여러분, 안녕하세요. 『사사기』를 요약해 보고자 합니다. 사사기 전체를 다 읽고 나서 마음이 몹시 무겁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사사기를 읽을 때 굉장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비극 전체가 갈수록 심해져 마치 한 편의 막장 드라마 같았습니다. 각자 자기 소견대로 행하고, 하고 싶은 대로 마구 행하며 끊임없이 엉망진창으로 살았습니다.
사사기 전체가 전하는 바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그저 제멋대로 엉망으로 행했다는 것이며, 이를 집약해 요약하면 바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타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은 아예 순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부분만 선택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이것은 실로 치명적인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 쫓아내라”고 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일부만 쫓아내고 일부는 남겨 두었습니다.
타협의 시작
그리스도인이 일단 타협의 물꼬를 트기 시작하면, 그 결과는 갈수록 악화되어 대를 거듭할수록 못해집니다. 여호수아가 죽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타협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여호수아 시대에도 이 백성을 이끄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조금만 틈을 주면 이스라엘 백성은 제멋대로 엉망으로 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도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제멋대로 엉망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닌지 말입니다.
제 마음도 자주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사람은 제멋대로 엉망으로 살지 않으면 오히려 스스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2~3년 동안 여러분은 제가 지각(悟性)에 대해, 지각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에 대해, 그리고 지각으로 충만한 믿음을 갖는 것에 대해 자주 설교하는 것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사람이 지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서 ‘참 좋다’고 느끼더라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에 결국에는 다 헛것이 됩니다. 때로는 우리 사역자들이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하여 치유를 받게 하지만, 정작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비극의 시작입니다.
화인 사명신학에서 매우 강력하게 전하는 말 중 하나는, ‘하나님도 실수하지 않으시고 귀신도 실수하지 않으며, 오직 우리 자신만이 착각하고 실수한다’는 것입니다. 제멋대로 엉망으로 행해서는 결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사사기의 사람들도 일단 타협의 물꼬를 트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의 이방인들을 그들의 뼈에 박힌 가시이자 육체의 가시가 되게 하셔서 날마다 찌르게 하셨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도 여기서 찔리고 저기서 찔리며 참으로 고달프게 살아가곤 합니다.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 끊임없이 문제들이 터져 나옵니다.
이러한 상태가 어찌 약속의 땅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 60만 명이 광야에서 죽고 마침내 약속의 땅에 들어갔는데, 그 약속의 땅이 그들에게 뼈의 가시와 눈물의 가시덤불이 되어 틈만 나면 찔러 댔습니다. 찌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도 참으로 난처하십니다. 가시로 우리를 찌르지 않으시면 우리는 좀처럼 돌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막장 드라마가 이미 완성되고 대본이 다 쓰여져서 당신이 그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을 연기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그때가 되면 연기하고 싶지 않아도 연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사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금만 살 만해지면 우상을 숭배했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겪게 하시고 가시로 그들을 찌르셨으며, 그제야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삶입니까? 나중에 제가 깨달은 것은, 사람은 누리지 못할 복은 있어도 당하지 못할 고통은 없으며, 타협을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에게 일단 타협하는 습관이 생기면 끝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칼날이 쏟아진다 해도 마땅히 가야 할 하나님의 길이라면 그대로 행하는 좋은 습관을 반드시 길러야 합니다.
사람은 일단 타협을 시작할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오히려 괜찮다고 여깁니다. ‘어제 죄를 하나 지었는데 오늘도 아무 일 없네? 어제 하나님을 거슬렀는데 오늘도 아무렇지 않네?’ 어제 타협했는데 오늘 괜찮은 것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사들이 일단 타협의 물꼬를 트자 계속해서 빗나가 마침내 막장 드라마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결코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화인 사명신학은 타협하지 않는 신학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시는 대로 그대로 행하는 신학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저는 ‘타협’이라는 두 글자에 대해 매우 깊이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출근하고 토요일과 주일에 쉰다고 할 때, 이사는 언제 해야 할까요? 주일에 해야 할까요? 저는 절대로 그런 물꼬를 트지 않습니다. 주일은 성수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내가 계획하고 결정할 수 있는데,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을 굳이 왜 주일로 잡아야 합니까? 이는 사실 태도의 문제입니다.
제가 재앙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참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재앙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는 지금 휴가 중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부르실 때 네가 휴가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온라인 교회이며, 시간은 스스로 계획하여 결정할 수 있습니다. 휴가 중이라고 해서 주일 성수를 제대로 하지 못하겠습니까?
이것은 실로 믿음의 반응입니다. 우리가 타협을 시작하면 우리는 지극히 큰 손해를 보는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작은 손해가 아니라 엄청난 손해입니다. 제가 34년 전 주님을 믿기 시작한 이래로 단 한 번도 주일을 빠진 적이 없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힘들 때도 있었고, 온몸이 아프고 병들어 괴로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어떻게든 일어나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신실하셨습니다. 당시 그 교회가 그리 승리하는 교회는 아니었지만, 제가 돌아올 때면 몸이 금방 나았습니다.
따라서 일단 타협을 시작하면,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에서 그것들을 쫓아내지 않으시기로 작정하시며, 결국 눈물의 가시를 겪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잘 이해해 주지 못하신다고 여겼습니다. 예를 들어 ‘내 아들이 가나안 사람의 딸과 연애를 하니 서로 왕래하며 지내는 것인데, 하나님은 왜 그리 문제 삼으시는가? 하나님은 참 이해를 못 하신다’라고 생각하는 식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스라엘 백성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가서 그들을 다 쫓아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사람들도 다 좋은 사람들인데, 참 순박하고 괜찮은데 왜 쫓아내야 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끝장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미래의 사돈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교제할 때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도 겉으로는 참 좋아 보입니다.
이제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것인가, 아니면 사람의 말대로 행할 것인가 하는 선택입니다. 신약에 오면 이 선택은 더욱 어려워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나 자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이렇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하며 ‘하나님, 왜 이렇게 저를 이해해 주지 못하십니까?’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에 영원히 굳게 서 있으므로, 그 뜻을 이루지 않고는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눈물의 가시를 원하십니까? 눈물의 가시를 원하신다면 ‘타협’의 물꼬를 트고 계속 그렇게 사십시오. 위챗을 통해서든 전달받아 듣는 성경공부이든, 여러분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권면을 드립니다.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하십시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여 따를 것이요, 만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할 것입니다.
사역을 하면서 자세히 관찰해 보니, 수많은 사람들의 문제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데서 비롯되었음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선택입니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막장 드라마를 연출하게 된 것도 바로 ‘타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초기의 사사들은 그래도 내세울 만했지만, 후대의 사사들은 삼손처럼 갈수록 엉망진창이 되고 별의별 사람이 다 나왔습니다. 훌륭한 사사는 몇 명 되지 않고 나머지는 갈수록 엉망이 되었으며, 뒤로 갈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저는 ‘타협’이라는 두 글자에 대해 깊은 탄식을 느낍니다. 사람에게 사명이 없으면, 이러한 세상 것들을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추구 대상으로 여깁니다. 왜 그것을 중요하게 여길까요? 그것들이 헛되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비즈니스 계약을 맺고, ‘내가 모 기술 기업과도 잘 협의했고, 저 검색 엔진 기업과도 잘 협의해서 계약까지 다 마쳤다’고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선생님, 저 다음 달에 공무원 시험을 봐야 해서 너무 바쁩니다”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선생님, 저 이 사람도 접대해야 하고 저 사람도 접대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이러한 것들이 결국 막장 드라마로 변해 버릴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을 보며 탄식합니다. 여산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그 산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생에서 벗어나, 예컨대 근두운을 타고 인공위성으로 뛰어올라 대지를 내려다본다면, 그것들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생님, 저 스트레스가 너무 큽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이 탑을 받치는 천왕이라도 됩니까? 사실 당신은 아무것도 떠받칠 수 없습니다. 아주 작은 바이러스 하나만 침투해도 사람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작은 가래 찌꺼기 하나가 심장 혈관을 막아도 사람은 순식간에 떠나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음을 인정할 때, 스트레스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스트레스나 ‘세상살이에 얽매여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해 깊은 통찰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이 없으면, 제 잘난 줄 알고 버둥거려 보았자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고 결국 한 편의 막장 드라마만 만들어 낼 뿐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를 번성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우리는 좀처럼 번성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번성하기만 하면 곁길로 빠지고, 번성하면 모든 공로를 자기 자신에게 돌리며 자신이 대단하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교만해져서 날개가 돋고 얼굴에 털이 나며 머리에 뿔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우리 모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기어 나온 경험이 있습니다. 복을 누리는 삶은 좋은 것이지만, 복을 받는 데도 조건이 있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하며, 무조건적으로 지켜 행해야 합니다. 이는 곧 삶 속에서 끊임없이 찾아오는 ‘타협’을 하나하나 이겨 내고, 스스로에게 틈을 주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 소견에 옳다고 여긴다
사사기에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바로 에봇을 만들기를 좋아한다는 점입니다. 정치를 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전 중국 전역에서 옥새를 차지하려고 다투었던 것과 같습니다. 옥새는 화씨벽이라는 옥돌을 깎아 만든 도장인데, 사람들은 옥석을 연마하여 옥새를 만들었습니다. 손권의 아버지 손견이 옥새를 얻었지만, 옥새를 얻었다고 해서 황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진짜 옥새를 가질 수 없으니 직접 하나 새기기로 마음먹었는데, 지우개로 만든 도장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에봇을 만들어 놓고도 결국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종종 자신이 어디서 틀렸는지 알지 못하며, 자기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는 법입니다. 우리가 조교를 하든 셀 리더를 하든 다툼이 일어나는 이유는, 서로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훗날 저는 이런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정의했습니다.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다들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때로 이미 빚더미에 앉았으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똑똑하다고 여길 만큼 어리석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자기가 게으른 줄 모르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어리석은 줄 모르며, 정작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가 똑똑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사사기의 사사들을 줄 세워 보면 오드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기드온, 그리고 그의 아들 아비멜렉, 돌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삼손, 미가, 모세의 손자 요나단, 그리고 기브아 사람들과 불량배들에 이르기까지, 죽을 때가 임했는데도 알지 못한 채 ‘나는 내 방식대로 하겠다’며 살아갔습니다.
지금까지도 저는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자이고시)’이 가장 고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스스로는 옳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하니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훗날 저는 ‘외적 요인은 내적 요인을 통해서만 작용한다’는 철리(哲理)를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영원히 지혜로워질 수 없으며,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모르면 결코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소가 물을 마시기 싫어하는데 구유에 억지로 머리를 처박아 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차라리 제 힘을 아끼는 편이 낫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제가 누군가를 얼마간 사역하다가 더 이상 붙들지 않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미 결정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내적 요인이 없으면 저라는 외적 요인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때로는 제가 “조금 게으르신 것 아닌가요?”라고 물었을 때, 상대방이 “저 안 게으른데요”라고 답하면 저는 그 후로 그 일에 대해 다시는 말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 일은 잘못 처리하셨습니다”라고 했는데 상대방이 “틀린 것 없는데요”라고 생각하면, 저는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신이 어떻게 죽어 가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은 실로 비극입니다. 예컨대 미가는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여호와라고 부르는 엄청난 짓을 저질렀습니다. 모세의 손자인 레위인은 자기가 여호와의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지만, 그곳이 정말 하나님의 집이었습니까? 그것은 미가가 만든 우상 신당이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매우 흡사합니다. “예수님을 믿습니까?” “네, 믿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을 믿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무엇을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합니다.
얼마 전 사역 중에 매우 흥미로운 사람을 만나 직설적으로 물었습니다.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그가 “갈 수 있습니다”라고 하기에, “왜 갈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음)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제가 예수님을 별로 닮지는 않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럼 누구를 닮았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삼손이나 미가를 더 닮은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하신다면 그것은 분명하게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든 ‘내가 지금 바르게 하고 있는가?’를 늘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화인 사명신학의 첫 번째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신이 바르게 행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온유와 겸손이라고 합니다. 만약 속에서 그릇된 고집이 올라와 ‘내가 옳다’고만 여긴다면 끝장입니다. 옳고 그름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어디서 본받았는지 모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마 사울을 조금 흉내 낸 모양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는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하고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간판만 걸려 있다고 다 교회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미가의 우상 신당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바르게 행하고 있는지 늘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행하는 일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과 같아야 비로소 합당한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는 닮지도 않았으면서 스스로 옳다고 여기니 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화인 사명신학의 첫 번째 개념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가?’ 끊임없이 도전하며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목사님이 또 달라지셨네. 재작년에는 저렇게 말씀하셨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말씀하시지?’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몇 년 전의 인식 수준이 거기에 머물러 있었지만, 작년에 조금 더 성장했고 올해 또다시 돌파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한 사람이 찾아와 “목사님이 강의하신 과정을 다 들었습니다. 아주 잘 알고 있고, 너무나 명확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성경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가르친 101 과정, 201 과정을 다 들었고 102 과정도 다 들었다면서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노트 필기를 하라고 해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일만 하느라 글을 써 본 적이 없으니 필기를 하라고 하면 참으로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점은 저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기록하지 않고 어떻게 배울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제대로 읽지 않으면서 제가 강의한 몇몇 과정만 듣고 자신이 전문가가 되었다고 착각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탄식이 나옵니다. 그래서 화인 사명신학의 신학교는 성경을 한 권 한 권 깊이 강해합니다. 성경을 한 권 한 권 강해하지 않고 대충 열 번 통독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수박 겉핥기로 읽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사기를 공부하는 것은 끊임없이 추상화하고 요약하며 그 안의 핵심을 짚어 내는 과정입니다. 최근에 우리는 사사기에서 모세의 손자 요나단을 짚어 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미가가 존재합니다. 그는 저주를 알고 있었을까요? 알고 있었습니다. 축복을 알고 있었을까요? 역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신상 하나만 만들어 놓으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착각했습니다. 그러므로 화인 사명신학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성경을 제대로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삼가 지켜 행해야 합니다. ‘삼가 지킨다’는 것은 자세히 탐구하고 깊이 이해한 뒤, 명확히 깨달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평생 하나님의 은혜를 얻고 하나님의 선하심 가운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지혜로워지기를 원한다면 잠언을 깊이 읽으십시오. 명철해지기를 원한다면 사무엘상·하를 깊이 읽으십시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기 원한다면 열왕기상·하를 읽으시고, 스스로 옳게 여기며 제멋대로 행하는 데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사사기를 읽으십시오. 제가 전하는 강의는 뼈대를 세워 줄 뿐이며, 결국 성경은 직접 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은 결코 베드로를 흉내 내지 마시고, 모세의 손자 요나단을 본받지 마십시오. 성경 속의 베드로 역시 제가 짚어 낸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30여 년 동안 베드로는 사역을 해 왔지만 여전히 글을 쓸 줄 몰랐습니다. 초등학교부터 공부하기 시작했더라도 30년이 지나면 최소한 박사 학위는 받았을 시간입니다.
얼마 전 아흔이 넘은 할머니 한 분이 위독하셨는데, 제가 기도를 인도해 드린 후 회복되셨습니다. 나중에 찾아가 보니 펜을 잡고 글을 쓰시며 주기도문을 적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화인 사명신학은 배움의 신학이며, 배우는 교회입니다. 지각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지각으로 충만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배움은 인생의 커다란 기쁨이며 사람을 성장하게 합니다.
사람이 기쁨을 누리려면 반드시 성장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성장할 수 있습니까?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배움에 힘을 쏟아야 하며, 그래야만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먹고 마시고 즐기기만 하는 사람들은 결국 스스로에게 재앙의 불씨를 심게 됩니다. 유흥을 즐기는 사람들은 제 말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에 모여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합니다. 과거에 방탕하게 살다가 어리석은 자녀를 낳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면서 집안의 치매 환자 하나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이 되십시오. 오직 성장만이 스트레스와 압박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의 사람들은 꿰뚫어 보지 못했다
이생을 꿰뚫어 보고 영생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묵상해 보십시오. 사사기의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한 줌의 재가 되었습니다. 사사기까지 갈 것도 없이, 불과 백여 년 전의 사람들조차 다 흙으로 돌아갔으니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며칠 전 몇몇 절친한 지인들이 모였는데, 한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같은 단체 대화방에 있었는데, 어느 날 그의 계정으로 “저희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라는 메시지가 올라왔습니다. 저는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아래 글을 더 읽어 보니 아들이 아버지의 휴대폰으로 보낸 메시지였습니다.
사람이 어찌 이리도 허망하게 떠납니까? 따져 보니 동기들 중 5%, 10%가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리 대단한 의미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그깟 일들에 별다른 의미가 없음을 꿰뚫어 보았기에, 저는 기꺼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반드시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선생님, 왜 목사님과 함께 기도하고 나면 마음속이 한결 편안해질까요?”라고 묻습니다. 제가 기도를 인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꿰뚫어 보라’고, ‘이 일을 내려놓으라’고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왜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중요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내려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타협을 시작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중요하지 않고, 자신이 먹고사는 문제만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귀한 보배이신지 알지 못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과 인생의 생로병사를 꿰뚫어 보게 되면,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되고, 타협하지 않게 되며, 무지하지도,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도 않게 됩니다. 오직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사기를 다 읽고 나면,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두 손으로 만유를 붙들고 계신다면, 여러분 한 사람을 붙들지 못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면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을 다 쥐려 하고 하나님을 내려놓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눈물의 가시를 준비해 두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장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왜 두려워합니까? 월급이 사장의 손에 달려 있고, 먹고살려면 돈이 필요하니 일을 열심히 해야 하며 사장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장 역시 하나님의 손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을 보십시오. 그는 매우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부렸고, 그의 아들 아비멜렉 역시 뛰어난 수단과 방법으로 훈련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한 것은 세상의 하찮은 것들에 불과했고, 결국 아비멜렉의 결말은 비참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사사기의 사람들은 영적 현실을 꿰뚫어 보지 못했기에 끊임없이 타협했고, 끊임없이 자신이 엉망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세울 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워야 하며, 사역할 때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역해야 하고, 평생을 살아갈 때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화인 사명신학이 이러한 진리를 여러분에게 풀어 설명해 드리는 이유는, 여러분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날 동안 장수하고 복을 누리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결국 막장 드라마 같은 인생을 희극으로 바꾸어야지, 희극 같은 인생을 억지로 막장 드라마로 찍어 내는 것은 참으로 비극입니다. 다음 세 가지를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첫째, 타협의 물꼬를 트지 마십시오. 둘째,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셋째, 꿰뚫어 보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