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Q1:"人把地上所有被囚的都践踏在脚下",老师,这里“被囚的”指的是“被罪捆绑的”,意思是胜过罪是属世界的逻辑吗?
没太读懂你的问题,这是在第三十四节,人将地上被囚的踩在脚下。我们看后面的经文,“或在至高者面前屈枉人,或在人的讼事上颠倒是非,这都是主看不上的。"这世界上的人挺坏。你在学校里头读书的时候,大家有没有发现有一个很诡异的现象?那个被欺负的人,当他遇到一个比他软弱的人,他也会欺负别人。那才恶呢!人里面是很恶的。他被欺负,他也欺负别人。
这些以色列人被欺负,然后终于看到有一个坐牢的了,他可以欺负,反正你坐在牢里头,我欺负一下你很正常。我就是那个在管监狱里头薪水最低的那个。我看你不顺眼我就踹你一脚,我不爽我就给你一巴掌。监狱这东西,是挺邪恶的,什么事都有,比如这个女囚犯被强奸,反正也没人管,你想告诉谁都没办法。
所以我跟你讲,人是很恶的。人恶到什么程度呢?人恶到这个屈枉人,然后颠倒是非。有一个人,扶了一个老太太,法官说啊:"不是你撞的,你扶她干啥?"我跟你讲,这个世界就是非常的混乱,这些东西都是主看不上的。那些行恶的,神就把灾祸降在这些人身上。
所以说记住这句话,在世界上就是这样,大鱼吃小鱼,小鱼吃虾米,弱的就被欺负。但是这不是神所喜悦的。
Q2:老师,耶利米为什么让以色列人投降?
因为犹大人犯了罪,得罪了神,他们在给自己积蓄愤怒。积蓄愤怒了之后,神就提醒他们,但是提醒很多次,他们还是也不听,结果神就把巴比伦人带来把他们灭了,把犹大国给灭了。结果呢,耶利米就说,你们投降吧,这军队是神带来的。
那其实从有这个以色列民族开始,就带着强烈的属世界的逻辑体系。所以一直到犹大国灭亡,从那个年代,就是耶利米哀歌那个年代,一直到上个世纪以色列复国,都已经亡国了,亡了两千五多年。这两千五百多年,是很惨很惨的。
我想今天咱们弟兄姐妹也要知道,神让耶利米告诉以色列人投降,因为那是神告诉耶利米,耶利米就告诉他们。神的用意是非常明显的,就是要摧毁你,好让你们彻底的悔改。既然你喜欢依靠钱,那钱财就没了。你依靠军队,那军队就不行了。你依靠这些东西,然后就乌烟瘴气的,不行耶和华眼中看为正的事,当神的刑罚临到的时候,就早点投降。
Q3: 老师,所有的权柄都是出于神,那些靠贿赂上位的贪官,也是神的许可吗?神许可这些蛀虫上位,是为了借着这些贪官污吏,施行神的咒诅临到人间,临到需要受咒诅的人吗?
这个世界,神就故意这样安排的。你会发现有一些笨蛋坐在高位,有一些恶人坐在高位。神就这么干的,好让这个国家也好,让这个民族也好,还是让这个城市也好,让他们遭罪。那神让他们遭多少罪,这就跟他们有多邪恶紧密相关。
所以,我们今天要开始重新调整。这个世上的事儿,咱别在那儿判断来判断去,判断了也没有意义的,这终归是属世界的东西。
那你说这些人会不会影响到你呢?我告诉你,如果你行在神的旨意当中,这些就影响不了你。因为你追求的核心利益都不在这世上,他就没法影响你。它可能会影响你的生活,但是不会影响你的核心利益,因为它影响不了。所以我们要除掉我们里面属世界的的这些东西。我们里面装着属世界的东西,神一定会来修理我们,而且还是让这些恶人修理我们。
Q4:老师,你说常常讲属灵的故事,但是身边有不少的人听了害怕,不愿意靠近我们。我们该怎么调整?
这里是咱们要调整,人家想听就听,不想听咱就闭口不讲。人家不想听,你在那哒哒哒哒哒哒一直讲,这是讨人嫌的。我们要会做人,要会说话,在适当的时候说适当的话。不是照着你自己的意思,而是照着那个人的意思,人家喜欢听,你就多讲点,不喜欢听,你就闭嘴。
Q5:“‘两个儿子都没有行撒母耳的路,反而去追求不义之财,收受贿赂,屈枉正直。耶和华对撒母耳说:"众民对你所说的一切,你只管听从。因为他们不是厌弃你,而是厌弃我,不要我做他们的王。’老师我想知道,既然撒母耳的儿子没有行他的路,众民要求立王治理以色列,神说民众是厌弃神。是不是民众不该管这个事儿才对?我们也会犯这样的问题。正确的想法是什么?
咱们弟兄姐妹要知道,神让撒母耳的两个儿子这样做。然后他两个儿子就这样做了,这都是神的安排。神让他两个儿子犯浑。然后,以色列人就掉到这个坑里。因为觉得他的两个儿子犯浑,所以要求立王。那为什么要求立王?原因就是觉得神管得不好,觉得神管得太烂了,觉得撒母耳怎么整出这样的两个儿子呢?觉得撒母耳也没有管好他的儿子。但其实这不是撒母耳没管好,而是神就是故意这么安排的。
我们今天要养成一个新的习惯。就是神安排了这事儿,我们的反应是不是厌弃神!神如果这么安排,难道神没有资格这么安排吗?神有资格这样安排,安排了以后就看我们的反应。
弟兄姐妹要养成一个新的习惯,就是我们遇到了事儿,这事儿并不是我们能说得算的。但是,我们遇到这个事儿以后,我们里面的反应是什么?你看以色列人的反应:神不行,厌弃神,神不行,就立一个王。但是立王也没有没解决问题,立完了王问题更多了,后来一直到以色列亡国。
不是立王就能够解决问题了,我鼓励我们基督徒,不要再说什么这都是体制的问题,不管在什么体制下,神都可以祝福你,不管在什么体制下,我们都不要去管这些事儿,这不是我们该管的。我们就做一个良民,做一个讨神喜悦的人,因为我们的追求,我们的盼望不在这世上。在这世上多得一点少得一点没什么了不起的。
我们正确的观念就是我们在这世上活着活着就死了,最后还是要追求神的话,然后追求信靠神,信靠神的什么好处都不缺。
Q6:在牧养的过程中常常听到对方说:"老师你讲的我都懂。我知道要对付爱世界、识别善恶、体贴肉体,但是我做不到,觉得很难。"一部分人甚至还能把自己的问题讲得很具体。除了用道理戳对方,还有什么其他的方法?
这并不是反话,既然人家什么事没有,人家爱得挺好,玩得也挺好,吃得也挺好。吃得白白胖胖,拍个照,拍个小短视频,这个时候,你告诉人家你不能这样,也没有什么作用。人家反驳你,说这样已经很多年了,一直都挺好的,你也没什么办法。
所以,我鼓励大家别在没有把柄,没有抓手的时候去解决问题。等他受苦的时候,你再去帮助他。比如他受亏损了,那个时候,你去说你看你怎么老做吃亏的事儿。人要明白什么东西是占便宜,什么东西是吃亏。体贴肉体,爱世界,识别善恶,没有不吃亏的。
吃亏了以后,你如果脑袋不好使,还老干吃亏的事儿。比如有人说他控制不住。因为他老想占便宜。但其实呢,便宜也没占到,其实还是吃了亏的。
我给你举个例子,比如骗子跟你说投吧,投资这个可好了,这样那样的。结果呢,动心了之后,就把钱给人家了。那钱是骗子从他手里抢去的吗?并不是,是他自己给给人家。为什么会给人家呢,因为他一想到一百万到了年底就变成三百万,就忘了还有风险这回事儿。
所以说,人控制得住,控制不住,全是看得着的是啥。为什么会得着这个?为什么会把钱给骗子,是因为脑子里头想的是得着的东西。说控制不住,就是觉着不划算。如果他觉着划算,他就能控制住了。所以我们要慢慢地让人从无知里头走出来,教导人从无知里头走出来是一个漫长的过程。不是我们一下子就能够把这事说得明白的,随着时间的推移给他点时间。
但是,人控制不住的这种逻辑,是一种败坏。其实,并不是控制不住,是根本就不想控制。你比如说这个懒惰的人,一干点事儿就到冰箱里拿东西,一干点事儿遇到点难处,就到冰箱里拿东西吃,最后吃成了一个微胖女神。这个微胖,其实现在的微胖都是肥胖了,根本不是微胖,不是一点点胖,那都是很肥。
所以,弟兄姐妹开始重新琢磨一下,什么东西划算,什么东西不划算。以色列人总觉得他干的事儿划算,结果国破家亡。
Q7:老师我丈夫啥也不干,自己的衣服都不洗,礼拜天我休息就让我洗,我不洗他就骂我,老师是不是鬼在欺负我?
我们不管夫妻之间的乌烟瘴气的事儿。这也不是鬼,也不是啥。实际上是你应该被欺负。因为,你嫁给他,是你自己的选择。既然这样,那你就这么着吧。
我们当中也有很多姐妹不会做人,然后做到受亏损。这不是赶个鬼就能解决的,要先对付一下自己的问题。
Q8:老师,耶利米让以色列投降的事儿,和我们要争战赶鬼怎么区分?因为鬼也是神打发来的,请老师再解释一下。
如果人不悔改,鬼是赶也赶不出去的。所以说,神打发巴比伦人来,就是因为以色列人不悔改。比如说得了很严重的病,人如果里面不改是很难得医治的。天国近了,人都要悔改。这就是要悔改,悔改完了。你一赶,鬼就走了。
Q9:老师,一个信主很久的基督徒说,神不是咒诅的神,神不惜爱子耶稣基督为我们死在十字架上,已经赦免了我们现在过去未来的罪,神是恩典的神,我怎么回复?
不回复,千万别回复。我发现很多人特别喜欢跟这些人辩!这些人,他们得了癌症都觉着罪已经得赦免。他们遭那些罪,都觉着自己已经不是个罪人了。神的愤怒临到他们,他们也觉着那是恩典。
Q10:老师,工作中领导安排我与同事协作,我负责每日流程的最终把关,他负责具体执行,并约定他在繁忙的时候,可以找我临时顶替。初期他基本上独立工作,一两个月以后他开始以忙碌为由,偶尔让我顶替,发展到如今,他几乎每天都借故将本职工作推给我,并建议将我们的核心职责对调,我该怎么办?
多干点活儿没什么,上班时间你多干点少干点没什么差别,你这计较那么多干什么。当然了,领导安排,不是你们俩在那安排,领导怎么安排咱们就怎么做。
Q11:老师,我的姐妹信主,但她困惑神怎么没有因为她的缘故祝福她老公。因为她老公脑瘫,她照顾得很辛苦,就是受了咒诅,是因为她也没有行在神的旨意里,对吗?
其实,人通常跟神说:“神,你应该这么做,你应该因为我的缘故祝福我老公。”凭什么呢!我们人就特别的自以为是,做得不怎么样,还觉得自己做得不错。人怎么可能这么自以为是呢!
她照顾她老公,照顾得很辛苦。其实从某种程度上也是活该。人如果知道这是神的愤怒,人应该最先选择的是好好地对照神的话,好好地悔改,不是觉着自己不错。很多人就是觉着自己不错,然后说:“神你咋没祝福我?”难道会是神搞错了吗?神是不会搞错的。
今天很多弟兄姐妹,里面有些东西真的很邪恶。而且要整也是很难整。说重了吧,受伤;说浅了吧,没有用。就跟以色列人也没什么太大的差别。
基督徒自以为是,是一个非常邪恶的习惯。能不能够把这个自以为是的东西给干掉,这其实是我们最需要做的。基督徒应该常常拿神的标准来看一看,常常认为我们是个罪人,认为是个恶人。如果认为自己是个好人,那不就是个恶人吗?结果,很多人还觉得自己不错。
我们弟兄姐妹听了这样的问题,我们更应该好好地反思自己。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번 설교는 제가 제 자신에게 아주 커다란 난제를 던져준 셈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을 지난 주일부터 이번 주일까지 매일 읽고 또 읽었는데, 도무지 이해가 안 되고 정말 깨달아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공부를 못하는 편도 아닌데 왜 이해가 안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기 도대체 뭐라고 써 있는 겁니까? 이랬다저랬다 갈피를 잡을 수 없지 않습니까? 어떨 때는 하나님을 믿는 것 같다가도, 또 어떨 때는 안 믿는 것 같고, 또 어떨 때는 어떻게 되는 것 같고요. 다 읽고 나니 머릿속이 하얘지고, 이리저리 뒤적여 봐도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애가> 3장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주께서 진노로 자신을 가리시고, 죽이시며 긍휼을 베풀지(아끼지) 아니하셨나이다.” 만약 이 제목을 들으면 ‘이게 기독교가 맞나? 이게 정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인가?’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제게 묻는다면, 저 역시 제 자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정말로 이러하신 분입니다. 우리 내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진실로 이러하신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죽이시되 결코 봐주지 않으시며, 사실 역사와 현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주일 동안 고뇌하며 열심히 묵상했습니다. 그러다 어떻게 이 제목을 찾았을까요? 제가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하나님, 이 장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십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니 정말 좋았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읽어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바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큰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은 읽어내지 못하고, 그저 자기가 읽고 싶은 것만 읽는다면 정말 문제가 됩니다.
만약 자기가 읽고 싶은 것만 읽는다면 큰 낭패를 봅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여러분은 예레미야가 겪은 그 ‘새로움’을 원하십니까?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아 얼굴이 멍투성이가 되었고, 이틀 뒤에는 감옥에 갇혔으며, 나중에는 하수구(진흙 구덩이)에 던져져 진흙이 머리끝까지 차올랐습니다. 아, 정말 끔찍합니다. 세상에, 그 안에서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새로움’을 원하십니까? 그러므로 성경을 그런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이 매우 중요하지, 여러분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관점은 얼마나 차이가 날까요? 사람은 이런 것을 보며 “아이고,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내가 너에게 왜 그러냐고 묻고 싶다”라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사실 사람은 일단 자기 생각이 생기면 하나님의 관점을 받아들이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설교의 주제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스스로 진노로 가리시고, 살육을 행하시되 아끼지 아니하십니다. 여러분 자신이 혹시 그 ‘아낌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아닌지 돌아보십시오.
제가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의 관점은 이렇습니다. 열 살까지 살든, 스무 살까지 살든, 백 살까지 살든, 죽으면 다 똑같습니다. 다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마치 우리가 땅 위에서 분주하게 기어 다니는 개미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무엇입니까?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는 것은 네 생명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은 다릅니다.
사람의 생각이란 온통 타고난 것, 세상적인 것, 육적인 것뿐입니다. 태어날 때는 한 덩이의 고깃덩어리에 불과했고, 그 육신 안에서 조금씩 자라면서 육신의 생각을 따르는 마음이 날로 늘어나고,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 날로 늘어나며,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날로 늘어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관점과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이렇습니다. “네가 날로 늘어난다고? 내가 네게 본때를 보여주마. 내 진노를 좀 맛보여 주마.”
그러니 이 세상에서 진리를 꿰뚫어 보는 사람은 정말 너무나 적습니다. 저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모두 꿰뚫어 볼 수 있기를, <예레미야애가> 3장을 통해 조금이라도 꿰뚫어 보고 더 이상 헛된 고집을 부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전에 한 형제가 우리 모임에 온 적이 있었는데, 자기 사장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사장님이 주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장님이 오게 된 이유는 자기 딸이 스물여덟 살에 암에 걸려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고, 제가 그를 섬겨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장은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 내 딸은 스물여덟 살에 일도 열심히 하고 정말 훌륭한 직원이었습니다.” 하지만 훌륭한 직원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훌륭한 직원이란 세상을 아주 잘 사랑한 사람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한 번도 뜨거운 연애 한번 못 해보고 죽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얼마나 지독한지 보이십니까? 사람 속에는 온통 이런 것들만 들어차 있습니다.
사람이 이 번쩍이는 세상을 바라보면 어질어질하고, 때로는 참 부러워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와도,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관점은 완전히 다릅니다. 대략 작년쯤 미얀마의 4대 가문이 성대한 생일잔치를 열었는데, 참으로 화려하고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습니까? 4대 가문이 통신 사기를 벌여 돈도 벌고 사람도 죽였습니다.
콩팥을 떼어내고, 간을 떼어내고, 목을 베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세대에 이런 사기를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사기꾼들에 대해 치를 떨었습니다. “하나님, 언제 오셔서 이들을 심판하시겠습니까?” 심판하셨지 않습니까? 올해 그 4대 가문은 완전히 몰락했습니다. 이제 더 날뛸 수 있습니까? 영화가 남아 있습니까? 없습니다. 전부 사라졌습니다. 그 집안의 손녀는 스물 몇 살에 사형을 당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많은 사람이 죽을 때까지도 자기가 왜 죽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자기 안의 그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논리 체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 임할 때, 단언컨대 단 한 사람도 피할 수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고 결국 모두 비극으로 끝납니다.
몇 년 전에 우리 모임에 온 자매가 한 명 있는데, 어제 그 자매의 목회자가 제게 그 사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자매는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시간만 보냈고 교회 행정 일도 맡아 했습니다. 제 표현대로라면 잘못된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 아이가 제법 컸는데도 야뇨증(오줌싸개)이 있어서 아무리 치료해도 낫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유명한 사역자와 신유 은사자가 찾아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나중에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목회자를 키워내겠다는 사람이 와서 그 집에 묵기까지 했지만 아이의 야뇨증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 자매에게는 아주 절친한 자매가 한 명 있었습니다. 이 절친한 자매는 날마다 환상과 입신(이상)을 본 간증을 나누었습니다. 와, 정말 대단해서 아주 영적인 모습이었고, 그를 보면 마치 영적 세계를 보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땠을까요? 우리 자매가 오줌을 싸는 아들을 데리고 그곳에 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본다면서 결국 오줌 싸는 문제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여기저기 찾다가 우리에게까지 오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야뇨증이 크게 호전되었습니다. 왜일까요? 야뇨증의 배후에는 라오마(老马)가 있었는데, 그 라오마와 제 사이가 꽤 각별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라오마와 사이가 좋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영적 전쟁터에서 자주 맞닥뜨리며 호적수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둘 사이는 꽤 통하고, 결국 라오마는 저에게 제압당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영계에 가서 라오마와 이야기를 나눠본다면, 그놈도 저를 꽤 인정할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놈이 제 안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저도 여전히 힘써 추구하고 있지만,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세상에 속한 것, 육신에 속한 것은 제 안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남들처럼 이 땅에서 살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돈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유명한 목사가 되고 싶어 하지도 않고, 교회를 크게 키우려다 감옥에 갇히고 싶지도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안에서 올바르게 살아가기만을 원합니다.
그런데 그 지극히 영적으로 보이던 절친한 자매는, 몇 년이 흐른 최근에 백혈병에 걸렸는데 상태가 꽤 심각했습니다. 병에 걸린 후 그녀가 우리 자매를 찾아왔습니다. 우리 자매는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릴까 봐 열여덟 바퀴나 말을 빙빙 돌려 조심스럽게 꺼냈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자존심은 대단히 강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렇게 조심조심 돌려서 “이런 것은 저주라고 부릅니다”라고 넌지시 나누었더니, 벌집을 쑤셔놓은 듯 난리가 났습니다. “네가 저주받았지, 내가 왜 저주를 받느냐!” 하는 반응이었습니다. 우리 자매가 이런 반응을 겪은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우리의 사역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암이 저주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암에 걸리고도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는 진노의 그릇이 되었음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더 죽이는 것을 결코 아까워하지 않으신다는 사실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만 전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통해 모세오경을 받았고, 이후에 선지자 사무엘과 이사야, 예레미야 등이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한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진노로 가리시고 살육을 행하시되 결코 긍휼을 베풀지(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하던 그날부터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민족이었습니다. 두렵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믿은 그날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옛길을 그대로 걷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너무나 비참합니다. 너무나 비참합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죽을 때까지도 자기가 왜 죽는지 모르고,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가 옳다는 교만을 품은 채 죽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것을 사람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사람이 집착하는 것을 하나님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십니다. 이것은 참으로 치명적입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당신이 무시하고, 당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이 무시하시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는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레미야애가> 3장을 읽고 나면, 그렇게 많은 고난을 겪는 예레미야를 보며 ‘하나님, 왜 그냥 보고만 계십니까?’ 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줄곧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듣지 않았고 들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라가 이미 바벨론에 한 차례 포로로 끌려갔는데도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 문제가 터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은 무시하고, 하나님이 안중에 두지 않으시는 것을 사람은 집착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고난을 조금 더 겪고 고통을 조금 더 당하는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예레미야이든, 예수 그리스도이든 마찬가지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시며 장사되실 때도 하나님은 아끼지 않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은 죄라는 것을 극도로 증오하시기 때문입니다. 죄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죄란 곧 ‘세상을 사랑하는 것’, ‘육신의 생각을 좇는 것’, ‘선악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제가 죄를 핵심적으로 요약한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살인을 저질렀습니까?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불을 질렀습니까? 방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만약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습니다. 이 세 가지가 사람의 죄를 핵심적으로 요약한 것입니다. 사람 내면의 관념을 보십시오. 삶에 대한 생각이 온통 세상적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는 당신이 어떻게 세상을 사랑하고, 어떻게 육신의 생각을 좇으며, 어떻게 선악을 분별하는지에 따라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진노를 나타내시며, 당신이 죽는다 해도 하나님은 크게 개의치 않으십니다.
사람 안의 가치관이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지, 아니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을지를 결정합니다. 우리 안의 관념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것을 소중히 여길 것이며, 반드시 하나님께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비록 사역 가운데 얼마간의 고난을 겪을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따릅니다. 예레미야가 겪은 고난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에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암에 무슨 영광이 있겠습니까? 암은 정말 끔찍합니다. 어제 한 형제가 나누어 주기를, 자기 직장 동료가 폐암에 걸렸다고 했습니다. 수술할 때 흉강에서 암세포 덩어리를 한 대야나 꺼냈다고 합니다. 세상에, 한 대야 분량이라니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겠습니까? 결국 그 사람도 사망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도 얼굴을 돌리셨는데, 당신을 아끼시겠습니까? 크게 연연하지 않으십니다. 목을 곧게 세우고 완고하게 군다면 어디 한번 끝까지 버텨보십시오. 하나님이 더 완강하신지 당신이 더 완강한지 보십시오.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삶이 헛되고 헛된 것임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극입니다.
얼마 전 우리가 <전도서>를 공부할 때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창세기> 앞에 <전도서>가 먼저 와야 한다고요. 전도서에서 말하는 ‘헛되고 헛되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기초입니다. 사람이 사는 것이 헛되고 헛된 것이라면, 열 살에 죽든, 스무 살에 죽든, 서른 살에 죽든, 쉰 살에 죽든, 여든 살에 죽든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다르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여러분 생각에나 다를 뿐 제 생각에는 다 똑같습니다.
사람은 살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욱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왜 그렇게 살려고 애를 씁니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시겠지요? 여기 별로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아주 젊었을 때부터 “사는 건 참 따분하구나. 죽으면 그만이지”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도 통 죽지를 않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너무 살고 싶어서 이 치료 저 치료 다 받아보다가 결국 치료받다가 죽고 맙니다.
수년 전 제가 차로 어떤 자매를 집에 데려다줄 때였습니다. 그 자매가 남편의 남동생이 코피를 자주 흘린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길래, 제가 저도 예전에 코피 흘렸을 때 증상이 어떠어떠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맞춰보니 제 증상과 완전히 똑같았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기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시동생은 저와 동갑이었는데 똑같은 증상으로 검사를 받았더니 백혈병이었습니다.
저는 검사를 받지도 않았고, 그런 검사나 의사를 크게 신뢰하지도 않았습니다. 의사가 다 고칠 수 있다면 믿겠지만, 의사가 고치는 것도 결국 확률 문제일 뿐이고 어떤 사람은 치료받지 않아도 낫지 않습니까? 9개월 후, 그 동생은 관 속에 누웠고 저는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그의 얼굴이 관의 유리창 너머로 보였습니다. 중국처럼 시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니라 싱가포르는 냄새가 나지 않도록 뚜껑을 덮어둡니다. 세상에, 그가 거기 누워 있었습니다. 제가 속으로 말했습니다. “형씨, 당신은 거기 누워 있고 나는 밖에 서 있소. 그렇게 살고 싶어 하더니 결국 살지 못했구려. 나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치료받을 일도 없다오.”
그러므로 삶에 대한 사람의 관점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기를 쓰고 살려고 하다가 오히려 더 빨리 죽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 속한 관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가치관이 이토록 중요합니다. 제게 있어서 인생은 헛되고 헛된 것이기에, 하루를 더 살든 덜 살든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세상을 너무 진지하게 살다가 종양이 생길 지경에 이르렀고, 그러고도 여전히 너무 살고 싶다면 치료를 받으십시오. 저에게 기도를 부탁하면서 병원 치료도 받으십시오. 기억하십시오. 필사적으로 살고자 애쓰는 마음은 사망의 영에게서 온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실상 아무런 소망이 없으며, 일찍 죽으나 늦게 죽으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관점을 품고,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과 같은 관점을 소유한다면 그렇게 쉽게 죽지 않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진노로 가리시고 살육을 행하시되 아끼지 않으시는 이유는, 사람 안에 세상적인 관념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 안에 있는 이 세상적 논리 체계를 무너뜨리고자 합니다. 세상의 논리는 너무나 많으며, 성경 전체가 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두 개의 나라, 두 가지 논리 체계, 두 가지 가치관을 말씀합니다.
지난주 금요일에 진행한 ‘느헤미야의 부유의 도’ 성경공부를 들으셨다면, 세상의 논리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논리는 하나님께 속한 논리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세상의 논리로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까? 때로는 얻을 수 있고 때로는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논리 체계 안에서는 어떤 좋은 것에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 안에 사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치심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쁘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나쁘다고 한들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본래 이러한 분이십니다. 사람은 자기 죄로 인해 죽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과 육신의 생각을 좇는 마음 때문에 죽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을 치시는 것을 본다면, 바로 이런 사람들을 치시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주께서 진노로 자신을 가리시고 우리를 뒤쫓으시며 죽이시고 긍휼을 베풀지(아끼지) 아니하셨나이다 주께서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사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시고 (예레미야애가 3:43-44)
기도
하나님, 우리의 눈을 여시어 주님을 알게 하시고, 주님의 진노를 알게 하옵소서. 주님의 진노 아래에서 어떻게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 할지 알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로 돌이키게 하시며, 주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것을 우리도 소중히 여기게 하사 우리 안의 세상적인 논리 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리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대로 행하여 주님의 진노에서 구원받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오직 주님의 말씀만이 채워지게 하시고, 우리의 삶이 주님의 말씀으로 말미암게 하옵소서. 주님의 진노를 피하여 멸망에 이르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논리와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배경
예레미야가 <예레미야애가>를 기록했을 때는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함락되고 1년 반 동안 포위당해 있던 때였습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 군사들은 겉보기에는 참으로 애국적이고 원대한 뜻을 품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벨론 오랑캐를 무찌르자!”라고 외쳤으니 듣기에는 참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악비(岳飞)처럼 나라를 사랑하여 정예병에 맞서 싸우니 얼마나 위대해 보입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성안에서 날마다 “항복하라! 항복하라! 이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바벨론 군대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군사들이 보기에 군의 사기를 꺾는 자로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이스라엘 군사들이 들으니 선지자 예레미야가 “하나님이 보내신 군대”라고 소리치고 있으니, 결국 그를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마구 때려 얼굴을 멍투성이로 만들었습니다. 온 얼굴이 팬더 눈처럼 멍투성이가 되었는데도, 다음 날 예레미야는 멍든 눈을 한 채 또다시 “항복하라! 항복하라!” 외쳤습니다. 연대장, 사단장, 군단장들이 군기를 어지럽힌다며 몹시 분노하여 그를 하수구 진흙 구덩이에 던져버렸습니다.
그 악취가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하수구에 던져 넣었으니 악취에 질식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드기야 왕이 그를 속히 끌어올리라 명했고, 얼마 후 예레미야를 왕궁으로 은밀히 불러 “내게 진실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제가 진실을 말해도 저를 죽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들이 저를 하수구에 던졌습니다”라고 하자, 왕은 “죽이지 않겠다. 결코 죽이지 않을 테니 진실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 진실이란 바로 ‘항복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왕이 듣기에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왕에게 군 통수권이 확실히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내가 항복하라고 명령하면 저들이 나마저 하수구에 처넣지 않겠는가? 내가 비록 왕이지만 하수구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항복이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정치는 대단히 복잡합니다. 자기가 왕이라고 해서 다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가 사람을 꽁꽁 묶어두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회사를 차려 스마트폰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제재를 당하면 어쩌지?’ 싶어 칩을 만들기 시작하고, ‘안 되겠다, 자동차를 만들어야겠다’ 하며 끝없이 얽혀 들어갑니다. 나중에 ‘이제 그만두고 싶다’고 해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거대한 그물망처럼 사람을 단단히 옭아매고 있기 때문이며, 시드기야 역시 그러했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수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굽히지 않고 선포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두들겨 맞아 얼굴이 멍투성이가 되고 붓기가 빠지기도 전에 하수구에 던져졌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이 영적인 높은 차원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기 위한 한 가지 전제 조건은 삶과 죽음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그 시시콜콜한 일들을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어차피 다 그런 것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내 동의를 구하고 나온 것도 아니니, 태어났으면 그뿐이다. 이제부터는 이런 가치관을 품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살아가리라. 고난을 받더라도 기꺼이 받으리라.’
예레미야가 고생스럽지 않았겠습니까? 흠씬 두들겨 맞아 멍투성이가 되고, 다음 날엔 하수구에 던져지고, 감옥에 갇히곤 했습니다. ‘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한 자’—이것은 이스라엘 백성 위에 임한 진노의 매였으며, 예레미야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 당한 자는 나로다 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빛 안에서 걸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 종일토록 손을 들어 자주자주 나를 치시는도다 (예레미야애가 3:1-3)
이러한 고통은 하나님께서 친히 예레미야에게 더하신 것입니다. 왜 그에게 이런 고통을 주셨을까요?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 내면의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랬다저랬다 표현하는 예레미야의 글 때문에, 저는 <예레미야애가> 3장을 일주일 내내 읽고도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사람의 소망이 이 세상에 있지 않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고난을 받으라. 그러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하리라. 눈물이 강처럼 흐를지라도 아까워하지 않으리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생관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으나 결국 이스라엘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노래를 지어 “뭘 울고 그래, 못나게. 예레미야야, 왜 우느냐? 왜 흐느끼느냐?” 하며 놀려댔습니다. 예레미야는 웃음거리가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대가로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셨으나 죽임을 당했고, 또 다른 선지자를 보내셨으나 또 죽임을 당했습니다. 나중에는 그의 아들을 보내셨으나 그 아들마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멸망에 이르게 되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선지자가 왜 고난을 받습니까? 선지자의 고난과 예수님의 죽임 당하심은 이 세상의 논리 체계가 얼마나 사악한지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내면에 세상의 논리 체계를 품고 있다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 해도 여러분은 예수님을 죽이는 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것에 의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바로 세상의 논리 체계에 의해 살해당하셨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의 밥줄을 끊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재물을 가로막는 것은 부모를 해치는 원수처럼 여기는 법입니다.
두 개의 나라, 두 가지 가치관, 두 가지 논리 체계입니다.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 안에서 살아가면 자기가 왜 죽는지도 모른 채 죽어갑니다. 하나님께 속한 논리 체계 안에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위해 살고, 그 사명을 위해 죽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본문 말씀은 바로 이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드러내고자 합니까?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며, 남은 것은 우리가 세상에 속한 길을 택할 것인지 하나님께 속한 길을 택할 것인지 힘써 결단하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고난은 사람의 죄를 드러낸다
나라를 지키고 바벨론 침략군에 맞서 싸우려 했던 군 지휘관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어디 한번 말해 보십시오. 잘못이 있습니까? 잘못이 없어 보입니다. 남이 우리나라를 공격해 오는데 맞서 싸우는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영웅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영웅입니다. 하지만 바벨론 입장에서는 졸개에 불과합니다. 세상에 사는 인생이 이렇듯 온통 세상적인 것에 얽매여 있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세상에 속한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이든 뭇 선지자들이든, 이 세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학대받는 것은 당연한 일임을 우리 형제자매들은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아, 하나님, 이 일이 제게 닥친다면 참 감당하기 어렵겠습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저더러 사람들에게 가서 “당신들은 다 틀렸으니 화인 사명 신학을 믿으십시오…”라고 외치라고 한다면, 저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런 말을 해서 욕을 바가지로 먹겠습니까? 발바닥에 땀나도록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문제는 역대로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세상의 논리 체계에 맞서려 한다면 동일하게 핍박을 받게 됩니다. 저는 제 설교를 인터넷에 올려둘 수 있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들을 사람은 듣고 말 사람은 마는 것이지, 그들이 먼 곳까지 저를 찾아오지는 못할 테니까요. 인터넷에서 악플을 단다면 달라고 하십시오. 우리가 전하는 말이 어떻게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겠습니까? 매우 어렵습니다. 널리 받아들여지기는커녕 매장당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본질적으로 이 세상의 논리 체계에 도전해야 하는 자입니다. 선지자는 본질적으로 이 일을 위해 대가를 치러야 하며, 세상적인 종교 체계에 도전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이 정치에 뛰어들어 이 대통령 저 대통령을 지지하다가 총살당하고 암살당하면서도, 자기가 순교한 줄로 착각합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순교한 무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저 진흙탕 싸움을 벌인 무리도 있습니다. 그런 짓을 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역대로 정치는 세상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논리 체계는 매우 치밀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또한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온갖 해석이 난무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산타클로스처럼 해석하여 누구에게나 선물을 나누어주는 분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사람은 자기 죄로 인해 벌을 받는다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리요 (예레미야애가 3:39)
암에 걸리면 하늘을 원망하고 땅을 원망합니다. 먹지도 못하는 병에 걸리면 남 탓을 합니다. 이런 병 저런 병에 걸려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도, 결코 자기 안의 세상적 논리 체계는 탓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 논리가 너무나 치밀하여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살아가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다음 달 집세와 주택담보대출도 갚아야 하니 돈을 벌어야 합니다. 돈을 벌려면 출근해야 하고 월급을 받아야 하는데, 이것을 반박할 수 있습니까? 직장에 다니면 상사의 눈치를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세상적인 것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아 버립니다. 당신은 과연 상사를 두려워합니까, 직장을 두려워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두려워합니까?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여러분의 한계선을 너무 건드렸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죄로 인해 벌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라!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하면 “그렇게 해서 먹고살 수 있겠는가? 사람이 살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합니다. 예를 들어 요즘 공직에 있으면서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 시스템 안에서 부패하지 않고 어떻게 버티겠습니까? 살 수가 없고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 세상적 논리 체계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 자아를 이기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의 논리 체계는 무너뜨리기 매우 힘들지만, 바로 이것들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말씀드린 그 세 가지를 깊이 새겨들으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것—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어찌 살겠습니까? 육신의 생각을 좇는 것—육신을 위하지 않고 어찌 살겠습니까? 선악을 분별하는 것—선악을 분별하지 않으면 판단 기준을 잃어버리는 것 아닙니까? 이처럼 사람은 자기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 역시 세상에 속한 그 논리 체계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벌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대제사장을 보십시오. 성전 뜰을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노점 자리를 세주고 임대업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제사 드리러 오면 돈을 환전해 주는 곳, 비둘기를 파는 곳, 양을 파는 곳 등 온갖 장사판을 벌였습니다. ‘돈을 벌 수 있는데 왜 안 벌겠는가? 성전을 분할 임대하여 운영비를 충당하면 얼마나 좋은 방법인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 역시 하마터면 이런 함정에 빠질 뻔했습니다. ‘사업을 해서 교회를 부양해야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가증스럽고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자칫 잘못하면 순식간에 세상의 논리 체계에 빠져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나중에 저는 온 힘을 다해 제 생각을 바로잡았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먹여 살리신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야 하며, 수많은 사람의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하고 재정이 부족하지 않다.” 이것이 쉬운 일 같습니까? 매우 어렵습니다.
언젠가 허난(河南) 출신의 주님을 아주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전도자들을 돕기 위해 큰돈을 벌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들을 제대로 돕지도 못하고 돈도 잃었으며 사업은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더니 매일 밤 새벽 1시만 되면 어떤 영이 자기를 깨워 재정을 위해 기도하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한밤중 1시에 제게 전화를 걸어 “제 돈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제가 “돈을 위해 기도하라니, 그런 소리는 처음 듣습니다”라고 했더니, 그는 “성령께서 매일 밤 1시에 깨우셔서 재정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왜 망하는지도 모른 채, 듣기에는 너무나 그럴듯하게 포장합니다. 사람은 자기 죄로 인해 벌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나라를 지극히 사랑했고 성전을 지극히 사랑했으며, 성전에서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공헌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수하자!” 듣기에는 대단히 위대해 보이지만, 바벨론을 친히 이끄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과 유다를 멸망시킬 뿐 아니라 성전까지 헐어버리려 하신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진노로 가리시고 살육을 행하시되 결코 아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무너뜨리실 뿐 아니라, 자신의 성전과 자신의 제단까지도 파괴하십니다. 얼마나 치명적입니까? 사람은 자기 죄로 인해 벌을 받는 것이며, 하나님은 인간의 하찮은 일들에 크게 연연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반역하면 하나님은 사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범죄함과 우리의 반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 (예레미야애가 3:42)
우리가 범죄하고 반역할 때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신다는 이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답답하지 않습니까?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왜 용서하지 않으실까요?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 속에 살고 있는데 어떻게 사함을 받겠습니까? 회개하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죄를 짓고도 여전히 반역하며 “내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하나님, 왜 우리를 이렇게 대하십니까? 내가 이렇게 한 것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라고 따집니다.
“나는 예루살렘을 지키고, 주의 성전을 지키며, 주의 성전과 생사를 함께하겠나이다!” 세상에, 마치 하나님께 그가 꼭 필요한 것처럼 굽니다. 누가 당신더러 성전과 생사를 같이 하라고 했습니까? 예레미야의 말을 잘 듣기만 하면 되었을 텐데, 예레미야의 말은 듣지 않고 방향을 완전히 잘못 잡았습니다.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다. 우리더러 바벨론에 항복하라니, 나는 주의 성전을 지키겠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며 완전히 잘못 짚은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반역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그런 겉모습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 안에 자리 잡은 세상적 논리 체계는 매우 견고하여 무너뜨리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것을 완전히 깨부수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논리 체계를 세울 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적인 관념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세상의 논리 체계로는 이해하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짓고 반역하면 하나님은 사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짓더라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반석 위에 다시 세워질 때에만 하나님께서 용서하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반역이란 참으로 사악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그 생각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화인 사명 신학은 결코 우리가 진리를 다 소유했다고 자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찾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추구합니다. 10의 힘이 있다면 12의 힘을 쏟아붓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며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120% 쏟아부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힘써 추구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미 하나님을 다 알았고 이미 진리를 가졌다고 여긴다면 더 이상 추구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주께서 살육을 행하시며 아끼지 아니하셨나이다
이스라엘의 60만 대군을 자세히 관찰해 보십시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광야에서 하나님의 치심을 받아 쓰러졌습니다. 얼마나 엄중하십니까? 고라가 반역했을 때 땅이 입을 벌려 그들을 삼켜버렸습니다. 땅이 어떻게 갈라지고 어떻게 삼켰는지는 고고학자가 아닌 이상 굳이 파고들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사람의 수가 히틀러가 학살한 수보다 더 많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사람 자신의 죄 때문이며, 자기 죄로 인해 벌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반역하면 사함을 받지 못합니다. 제 설교를 듣고 두려운 마음이 든다면 마땅히 두려워해야 합니다. 사람의 일생의 비극이 바로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 안에서 그럴듯하게 들리는 타고난 세상 논리를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며 인간의 교만과 착각일 뿐입니다.
어젯밤 한 자매가 제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아, 저는 나이 들어서 노망나면 안 되는데, 우리 엄마처럼 될까 봐 걱정돼요.” 그녀가 남편에게 “나 늙으면 우리 엄마처럼 될까?”라고 물었더니, 남편이 “늙을 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어. 지금도 이미 그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지금 이미 그러면서도 자기는 괜찮다고 여깁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은 참으로 기괴해서 마치 왜곡된 요술거울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고집을 부리고 있지는 않은지 늘 반성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속히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육을 행하시기 전에 그 길로 가지 마십시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서 대학에 떨어졌을 때 ‘내가 왜 떨어졌을까?’ 하고 의아해하지 마십시오. 진작에 무엇을 했습니까? 살아가면서 20대에도 제대로 일하지 않고, 30대에도 게으르게 살다가 40대가 되어 쓸 돈도 없고 일자리도 없으면서 ‘내 꼴이 왜 이럴까?’ 하고 한탄하지 마십시오.
결코 죄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지 마시고, 죄를 짓고도 자기가 옳다고 우기며 반역하지 마십시오. 일단 그 지경에 이르면 남은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가차 없는 심판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로 가지 마십시오. 알아들으셨습니까? 모든 것이 바닥나고 돌이킬 힘조차 없을 때 후회하지 마십시오.
다루기 힘든 중병에 걸리기 전에 이미 당신은 잘못된 길을 한참 걸어온 것입니다. 결코 자신의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하나님의 논리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기 전에 속히 차선을 바꾸고, 속히 유턴하여 축복의 길로 돌아서며 자신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십시오.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는도다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는도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예레미야애가 3:48-50)
선지자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 패역한 무리에게 감옥에 갇히고 두들겨 맞아 얼굴이 멍투성이가 되었으며, 결국 그들은 파멸을 자초했습니다. 그럼에도 선지자는 여전히 그들을 위해 중보하고 눈물을 흘리며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오히려 노래를 지어 예레미야를 조롱하며 “왜 흐느끼느냐? 왜 우느냐? 못난 놈”이라며 비웃었습니다. 참으로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일입니다.
눈물이 강물처럼 쏟아졌습니다. 사실 저 역시 눈물이 많은 사람이라 마음이 참으로 아픕니다. 어떤 형제자매들에게는 말을 세게 할 수가 없습니다. 세게 말하면 도움이 되기는커녕 역효과가 나고, 그렇다고 약하게 말하자니 효과가 없어 참으로 난감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죄악의 길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하고, 죄를 짓고도 여전히 반역하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찢어집니다.
반역한 끝에 결국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맞닥뜨리는 것을 보면 마음이 너무나 쓰라려 눈물이 절로 납니다. 그러나 이것이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사람이 파멸에 이르기 전에 미친 듯이 외치며 소리쳐야 합니다. “이 길로 가지 마십시오! 하나님께로 돌이키십시오! 멸망을 당하지 마십시오!” 예레미야는 눈물을 흘리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켜 죄악을 버리기만 하면 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도리어 예레미야를 조롱했습니다.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예레미야애가 3:14)
그들이 앉으나 서나 나를 조롱하여 노래하는 것을 보옵소서 (예레미야애가 3:63)
“예레미야야, 왜 흐느끼느냐? 왜 질질 짜느냐? 못난 녀석.” 이 노래는 예레미야를 조롱하기 위해 지은 노래였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여전히 그 백성을 위해 간구했습니다. 가슴이 먹먹하지 않습니까? 심판이 임하고 아끼지 않으시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징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마음을 부드럽게 하십시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고 부드럽게 하여 선지자의 눈물이 헛되지 않게 해 주시겠습니까?
<신명기>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지존자께서 복과 화, 생명과 사망을 두셨으니 여러분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으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과 화, 생명과 사망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간절히 외쳤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축복의 길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길이 다 심판의 길인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스스로 심판의 길로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한 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아낌을 받지 못하고 멸망하는 길이며, 거기서는 몇 사람이 더 죽고 덜 죽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또 다른 한 길은 축복의 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이 논리 체계에서 벗어나,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을 사모하는 마음을 품고 하나님 앞에서 복과 기쁨을 누리며 반드시 영광의 면류관을 얻어야 합니다.
이번 설교는 여기까지 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