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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됨과 일하기】《일하기 편》05: 일하는 가운데 사람과 교제하라!

2024-08-30 3,607 Y135课程 - 做人做事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일하기 편》 제5강을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먼저 사람 됨됨이를 이야기하고, 그다음 일하는 법을 이야기합니다. ‘사람 됨됨이’와 ‘일 처리’라는 이 두 단어는 투박하게 들릴지 몰라도 매우 현실적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 됨됨이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는 누구나 마음속에 저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일을 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에 대해서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저울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체면을 차리든 차리지 않든 속으로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회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평소에는 참 괜찮아 보이던 사람이 일만 시작하면 망가지고 펑크를 냅니다. 일을 시작하면 그 사람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일을 시작하면 잘못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엉망이 되는데, 그런 상황이 아주 흔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 됨됨이 편’과 ‘일하기 편’에서 저는 개괄적인 틀만 제시했을 뿐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반드시 이 방향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즉, 여러분을 사람 됨됨이도 갖추고 일도 잘하는 사람으로 훈련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일하기 편》 제5강, ‘일하는 중의 대인관계’입니다.

건강한 관계와 건강하지 못한 관계

저는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인간관계의 본질은 그 관계를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에 반드시 드러납니다. 그 관계를 어디에 씁니까? 어떤 관계는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는 데 쓰입니다. 제가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난 수년간 연구한 결과, 어떤 사람들과 교제하고 나면 마음이 답답하고 괴롭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관계를 ‘건강하지 못한 관계’라고 합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고 나면 마음이 아주 편안하고 기쁨이 넘치는데, 이것을 ‘건강한 관계’라고 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관계 중 하나가 바로 잡담을 나누는 관계입니다. 여러분도 느껴보셨겠지만, 대부분의 관계는 그저 둘러앉아 실없는 소리나 나누는 관계입니다. 그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나누다 보면 마치 관계가 아주 가까워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관계가 정말로 가까운 것일까요? 사실은 가깝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을 함께하면서 맺어지는 관계가 비교적 건강하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일하지 않는다면 같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같이 먹기만 합니까? 그런 사람들을 ‘주육지교(먹고 마시는 친구)’라고 부릅니다. 또 무엇이 있습니까? 험담이나 잡담을 나누는 것인데,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마음이 괴롭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 사람이 좋은 친구인 줄 알고 예배가 끝나 교회가 파하면 카페나 길거리 포장마차로 가서 함께 먹고 마십니다. 다 먹고 마신 후에 그 관계는 어떻습니까? 무엇이든 털어놓고 말할 수 있으니 꽤 가까워진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무슨 말을 나누었습니까? 직장 상사를 흉보거나, 담임 목사님을 험담하거나, 다른 쓸데없는 일들을 이야기할 뿐 정작 생산적인 일은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한 가지 관점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관계가 많다면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망가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누는 말이 온통 헛된 잡담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당신에게 그 말을 하고 나서 또 다른 사람에게 가서 그대로 전합니다. “내가 너한테만 비밀 하나 말해줄 테니까 절대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 알아들으셨습니까? 다음 날이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 비밀을 다 털어놓습니다.

‘참 훤칠하게 잘생긴 청년인데 어쩌면 뼛속까지 수다쟁이 아줌마 같을까?’ 사람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정말 수다쟁이 아줌마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너 내 좋은 친구잖아. 나한테 10만 위안만 빌려줄 수 있어?”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이 진짜로 빌려준다면 얼른 갚으십시오. 아시겠습니까? 그래도 조금은 믿을 만한 구석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하지만 돈을 빌려달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상대방이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친다면 어떻게 됩니까?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라고 물으면 “아이고, 배가 아파서 화장실 좀 가야겠어”라고 합니다. 돈만 빌려달라고 하면 배가 아프다고 하니, ‘게으른 당나귀 연자방아 돌릴 때 똥 아니면 오줌 눈다’는 격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왜 그런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만드는 데 시간을 낭비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맺으려면 건강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건강한 관계란 무엇입니까? 건강한 관계는 생산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관계입니다. ‘우리가 함께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일을 어떻게 명확하게 풀어갈 것인가?’를 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은 책 한 권을 나누더라도 ‘이 책의 내용을 어떻게 잘 실행에 옮길 것인가?’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예배가 끝나고 카페에 가서 각자 밥 한 그릇씩 시켜놓고 생산적인 일을 토론하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아, 《마태복음》 1장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 《전도서》 1장은…” 이것도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은…” 사람들은 다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귀를 기울여 들어보면, 기가 막히게도 전부 남의 집 집안일 이야기뿐입니다. ‘어느 집 아들이 어떤 며느리를 얻었네’, ‘누구네 집 딸이 어떤 사람에게 시집을 갔네’ 하는 시시콜콜한 집안일 이야기뿐입니다. 저는 그런 것을 몹시 싫어하기 때문에, 제가 맺는 관계 속에는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들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 자리에 있음으로 인해 그곳이 더 좋아집니까? 아니면 당신이 있음으로 인해 그곳이 더 혼란스러워지고, 더 많은 다툼과 험담이 일어납니까? 당신이 그곳에 있음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이 자유와 해방을 얻습니까? 바로 이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실없는 소리를 못 하느냐 하면, 저도 잡담하는 실력은 남들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줄 압니다. 왜 그렇습니까? 둘이 앉아 밥을 먹는데 한 사람은 돼지갈비를 시키고 한 사람은 양갈비를 시켜놓고, 고개만 푹 숙인 채 먹다가 서로 눈만 쳐다보고 다시 먹기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숨이 막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험담을 나눌 수는 없으니 얼마나 피곤합니까? 그렇다고 진지한 일 이야기만 할 수도 없습니다. 참 난감한 일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험담을 나누는 것과 가벼운 농담을 나누는 것은 다릅니다. 가벼운 농담은 민감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험담은 남의 집 숟가락 개수까지 들먹이는 것들이라 밖으로 퍼져 나가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라며 날씨 이야기를 합니다. 날씨 이야기를 하고 나면 화성 이야기를 하고, 화성 이야기를 하고 나면 달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와서 때릴 사람도 없고, 찾아와 따질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만약 정치를 이야기하면, 뉴스에서 정치가 얽히는 순간 아주 골치 아파집니다. 예를 들어 대만 문제를 이야기할 때, 상대방이 녹색(민진당)인지 파란색(국민당)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한마디 툭 던졌는데 상대는 파란색이고 당신은 녹색이라면 끝장입니다. 그러니 파란색이니 녹색이니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차라리 날씨 이야기를 하거나 세상의 온갖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나누며 상식을 넓히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이중톈(易中天) 같은 사람은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를 잘합니다. 그는 방언에 대해 이야기하며 《대화방언(大話方言)》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둘이 앉아서 “왜 중국 북방에서는 ‘쥐(劇)’라고 하고 남방에서는 ‘시(戲)’라고 할까요?”라며 각자 의견을 냅니다. 자유롭지 않습니까? 아주 자유롭습니다. 이런 방언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남방은 다 ‘시’라고 하여 ‘황메이시(黃梅戲)’라 부르고, 북방은 ‘징쥐(京劇, 경극)’라고 부릅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사실 산시(陝西) 사람들은 ‘친창(秦腔)’이라고 부릅니다. 북방에서는 희극이라 하고 남방에서는 극(극본)이라 하지만, 서북 지역에서는 ‘창(腔)’이라고 합니다”라고 덧붙입니다. 제가 하나의 예를 든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건강한 관계는 무언가 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테리어를 한다고 해봅시다. 어떤 스타일로 인테리어를 할 것인가? 북유럽풍 스타일을 아십니까? 이케아에 가서 가구를 사면 다 북유럽풍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때 누군가가 “내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것은 ‘와비사비(侘寂)’야”라고 말합니다. 잘못 들으시면 안 됩니다. ‘와비사비’는 일본어로 번역하면 완벽하지 않고 투박한 멋을 뜻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게 무슨 뜻이야?”라고 물으면 한번 찾아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일을 하는 과정 속에서 당신은 무언가를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함께 일하며 말하는 법 훈련하기

함께 일하면서 말하는 법을 훈련하는 것은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함께 일하지 않는다면 무슨 말을 나눌 수 있을지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기껏해야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아, 차이나타운의 그 볶음 쌀국수가 참 맛있더라.”, “아, 저쪽에 만둣집이 새로 생겼더라.” 이런 이야기들 아닙니까? 먹고 마시는 이야기들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관계는 좋지 않고 건강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일을 하면서 사안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에게는 작은 재주가 하나 있는데, 어떤 일이든 제게 오면 저는 그것을 명확하게 설명해 낼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훈련을 통해 길러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훈련을 해보셨습니까? 말을 꺼내긴 하는데 도무지 정리가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머릿속이 죽처럼 뒤엉켜 있기 때문입니다.

말을 하면서 생각을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게 되기까지 저는 수없이 훈련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상사에게 “이 일은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합니다”라고 보고한다고 해봅시다. 상사가 여러분에게 주는 지시는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상사는 무엇을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도 않고 그저 “알아서 해봐”라고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사장님, 이렇게 하면 될까요?”라고 물으면, 사장은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닌데”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다른 방식으로 해서 “사장님, 이번엔 이렇게 할까요?”라고 하면 또 “이것도 내가 원한 게 아니야”라고 합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을 원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나도 잘 모르겠으니 다시 해봐”라고 합니다. 또다시 해가면 “이것도 아니야”라고 합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이런 상사 밑에서 내일도 계속 일하시겠습니까? 당장 사표를 낼 것입니다. 이런 일은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하고, 무언가를 만들어 가면 자기가 원한 게 아니라고 하니, 대체 어떻게 일을 하라는 말입니까?

얼마나 피곤합니까? 정말 피곤한 일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가끔 이런 일이 있습니다. 밥 먹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뭐 먹고 싶어?”라고 묻습니다. 아내는 “아무거나 다 좋아”라고 합니다. “그럼 맥도날드 가자.” “싫어.” “그럼 뭐 먹을래?” “몰라, 아무거나.” “그럼 햄버거 먹으러 가자.” “싫어.” “그럼 도대체 뭘 먹겠다는 거야?” “몰라.” 세상에, 남편에게 엄청난 난제를 던져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설명하지도 못하고, 본인도 명확히 모르면서 상대방이 제안하는 것은 무조건 싫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인관계를 하면서 상대방이 “싫어요”라고만 하는 경우를 참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족시키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일을 하려면 명확하게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자,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가르쳐 드린 것을 다 잊어버리셨을 것입니다. 제가 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저에게는 명확하게 설명하는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 채 시작하면 반드시 망합니다. 설계도조차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시작하면 100% 망합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말로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서 일에 뛰어들면 반드시 망합니다.

많은 사람이 ‘가면서 생각하자, 천천히 해보자’라고 하지만, 그 결과는 일이 수포로 돌아가거나 흐지부지 중단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명확하게 하려면 첫째, 목표가 명확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는지, 어떤 목표를 달성하려는지 분명해야 합니다. 둘째, 전략이 명확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전략을 취할 것인가입니다. 셋째, 방법이 적절해야 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이 방식대로 하면 여러분도 일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하는 과정에서 훈련되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일할 때 문서를 작성해야 하지 않습니까? 비즈니스를 할 때 상업 서신을 써야 하지 않습니까? 집을 한 채 세놓으려고 해도 임대 계약서를 명확하게 작성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큰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런 일들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집을 임대하는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 임대차 계약서는 제가 한 글자 한 글자 직접 썼습니다. 무엇이 저의 책임이고 무엇이 세입자의 책임인지를 아주 명확하게 적어두었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일을 명확하게 매듭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일하면서 말하는 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함께 어떤 일을 하다 보면 각자 자기주장이 옳다고 맞서기 마련인데,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무조건 내 말대로 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큰일 납니다. 사람들은 “그래요, 당신 말대로 다 해보세요” 하고는 팔짱 끼고 구경만 할 것이고, 결국 당신 혼자서 일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까요. 그것은 말하는 법을 훈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함께 일하면서 일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일은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는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본기입니다. 말을 명확하게 하지 못하거나, 말을 제대로 할 줄 몰라 일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초등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하는 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이 일을 명확하게 설명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말만 하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고 흥분하는 사람에게 저는 “왜 흥분합니까? 천천히, 서두르지 말고 차분하게 하세요”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탐색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탐색하면서 일을 명확히 설명하고, 내가 문제를 바라보는 각도와 상대방이 바라보는 각도를 총괄하여 조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참여하기만 해도 그곳의 업무 효율이 껑충 뛰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신이 말을 제대로 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훈련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매일 “할렐루야”만 외친다면, 결국 ‘할렐루야’만 외치는 사람으로 훈련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을 무엇을 하도록 훈련합니까? 말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으로 훈련합니다. 왜냐하면 말의 이면에는 그 사람의 가치 체계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가치 체계는 과연 무엇입니까? 참으로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가치 체계라는 것은 정말 바꾸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성실하게 일하는 문제를 봅시다. 어떤 직원이 “사장님, 왜 열심히 일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사장이 “네가 일을 안 하면 내가 어떻게 돈을 버냐?”라고 답했다고 해봅시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알아들으셨습니까? 그렇게 대답하는데 직원이 성실하게 일하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상대방이 왜 열심히 일해야 하는지는 생각해 보았습니까? 어떤 사장은 “네가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너의 미래도 없어”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이 말은 조금 더 낫지 않습니까? 말을 할 줄 모르고 자기만 생각하는 사장 밑에서 직원들이 사표를 내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만둘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자기 생각만 가득한데 어떻게 말을 조리 있게 잘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에 일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이도 저도 아니게 설명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여러분을 데리고 초등학교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부터 다시 공부하여, 적어도 우리 내면의 생각들을 명확하게 정리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함께 일하며 자신의 성품 다듬기

어떤 형제자매들은 제게 종종 묻습니다. “목사님, 제 성격에 문제가 있나요?” 저는 “문제가 아주 큽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당신에게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함께 일을 하다가 중간에 일이 중단되어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 됨됨이에 있어서 어떤 이는 속이 좁고, 경쟁심이 강하고, 시기심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과 누가 한가하게 일을 같이해서 벌집을 쑤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너 왜 그렇게 속이 좁니?”라고 하면, 상대는 “네가 더 좁아!” 하면서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일을 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성격과 마음속 생각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예를 들어 어떤 직원이 사표를 냈습니다. 왜 사표를 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사람들을 이끌며 온갖 의미 있는 일들을 훈련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먹고 마시고 노는 것만 바란다면 우리와 함께 갈 수 있겠습니까?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잘 훈련하여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어떻게 그 문제를 풀어갈지 탐색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런 일은 하기 싫고, 먹고 마시고 놀며 산수를 즐기고만 싶어 합니다.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뜻이 다르고 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뜻도 같고 가는 길도 같은데 사람이 떠나간다면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성격에 문제가 있고 결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왜 나와 함께 일하려 하지 않을까?’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아, 내가 참 이기적인 사람이었구나.’ 그렇다면 자신의 성품을 다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문제는 결국 성격의 문제입니다. 왜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할까요? 일을 해보면 자신의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성품이 잘못되어 있다면 누가 당신과 함께 일하려 하겠습니까? 당신과 일하는 내내 마음이 괴로울 텐데요. 어떤 사람은 사람 노릇도 못 하고 일도 못 하면서 하루 종일 뚱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런 얼굴을 누가 보기 좋아하겠습니까? 입만 열면 웬수 대하듯 말하고, 성격 자체가 가시 돋쳐 있습니다.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일을 해보면 자신이 몇 점짜리인지 금방 드러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품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장은 꼭 기억해 두십시오. 제 뼛속 깊은 곳에는 하나의 논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논리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세우는 것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함인데, 만약 제가 사람보다 일을 더 중하게 여긴다면 차라리 해산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서유기》의 삼장법사 일행처럼 서천으로 경전을 구하러 갈 필요도 없습니다. 만약 리더가 저팔계 같은 사람이라면 진작에 해산했을 것입니다. 저팔계는 매일 해산할 생각만 하니까요.

그러므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신의 성품을 다듬는 것입니다. 일을 할 때, 특히 일이 모호하고 불확실한 상태에 부딪혔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일을 할 때는 언제나 공허와 혼돈의 무질서 속에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공허하고 혼돈스러운 상태에서 문제를 조리 있게 정리해 내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바로 사람의 성품에서 나옵니다. 성품이 다듬어져 있을 때 비로소 일을 명확하게 정리해 낼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 저는 이틀 밤을 새웠습니다. 우리가 장비를 하나 샀는데, 다행히 그리 비싸지 않은 기업용 방화벽 네트워크 장비였습니다. 이 장비를 잘 세팅해서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라, 왜 이러지? 보기만 해도 골치가 아프고 뭔가 잘 안 맞네’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 나도 도무지 모르겠다. 그냥 관두자, 관둬. 빨리 커피나 한잔 마시자. 이걸 붙잡고 씨름할 기운이 어디 있어”라고 포기하는 성격입니다. 또 다른 성격은 “내가 네깟 녀석 하나 해결 못 할 줄 알고?” 하며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성격입니다. 결국 이틀 동안 남들이 다 잠든 밤에 일어나 신바람을 내며 야간 작업을 했고, 마침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결해 냈습니다.

설명서도 다 읽고 사례들도 꼼꼼히 분석하여 명확하게 파악했습니다. ‘아, 이 장비는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설계된 것이었구나!’ 이틀 만에 완전히 마스터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과 인내의 훈련입니다. 믿음과 인내,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모든 문제의 해결과 창의적인 결과물은 다 믿음과 인내의 결실입니다.

우리의 ‘101 과정’이나 ‘201 과정’만 보더라도 모두 믿음과 인내의 결과물입니다. 힘들었을까요, 안 힘들었을까요? 아주 힘들었습니다. 왜 힘들었을까요? 내용을 명확하게 설명해 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른 유명한 분들이 쓴 교재들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굳이 이름은 밝히지 않겠지만 그분들의 101, 201, 301, 401 과정을 다 합쳐도 우리의 101 과정 하나를 따라오지 못합니다.

우리의 101 과정에 담긴 논리 체계는 기독교 신앙 전체와 《성경》의 진리를 가장 핵심적인 정수로 요약해 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나왔겠습니까? 하루를 써도 안 나오고, 이틀을 써도 안 나오고,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달이 지나갔습니다. 사무실에서 걸어 나오는 제 얼굴이 굳어 있으니 사람들이 “목사님, 무슨 일 있으세요?”라고 묻더군요. 저는 “아닙니다, 위로해 줄 필요 없어요. 괜찮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또 한 달이 지나도 여전히 얼굴이 굳어 있었습니다. 왜일까요? 글이 풀리지 않아 속이 답답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교재를 하나하나 분석해 보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고, 정작 제 손으로는 써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석 달이 지난 후 완성된 글을 보았을 때 ‘어쩌면 이렇게 글이 좋을까, 도대체 누가 쓴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석 달을 끈질기게 버틴 결과입니다. 여러분 중에 콩나물을 길러보신 분이 계십니까? 콩나물은 며칠 만에 자랍니까? 6일이 걸립니다. 그런데 콩나물을 안친 지 겨우 이틀째에 “왜 아직도 싹이 안 나지?”라고 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콩나물을 기르는 데도 6일은 걸립니다.

예를 들어 설날이 다가올 때 제가 마늘 한 접을 접시에 담아 물을 부어두었습니다. 보름이 지나자 마늘 싹이 쑥 올라왔습니다. 그 마늘 싹을 잘라 송송 썰고 새우와 고기를 넣어 빚은 마늘 싹 만두는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습니다. 제가 직접 기른 마늘 싹이지만 보름이 걸렸고, 적어도 20일 전에는 마늘을 준비해 두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인내는 성품의 핵심입니다. 즉, 우리가 문제에 부딪혔을 때 대인관계가 어떠한지, 우리 자신에게 그런 인내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람들과 교제할 때 시기, 질투, 경쟁심, 비교 의식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내면의 성미는 어떻습니까?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런 사람들과 한번 일해보고 나면 두 번 다시 같이 일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성질이 너무 급하고 성격이 모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함께 일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성품을 다듬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함께 일할 때 성품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말을 어떻게 하느냐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람의 정신적 건강은 곧 건강한 성품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일하는 가운데 자신의 성품을 다듬으십시오. 일을 이루어내고 싶다면 먼저 사람 됨됨이부터 갖추어야 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모든 일을 성취하는 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전에 저는 영어로 글을 쓰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남들이 5분이면 쓸 내용을 저는 끙끙거리며 한 시간 동안 써야 했으니 정말 진이 빠졌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나아졌고, 마침내 극복해 냈습니다. 일을 하려면 상황을 명확히 설명할 줄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그림도 그리고 글도 써야 합니다. 저처럼 일하기를 좋아하고 먹고 마시고 노는 것에는 관심조차 없는 사람도, 일을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그림과 글을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허와 혼돈의 상태에서 명확한 질서를 만들어내려면 끈기 있는 성품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일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남에게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방하고 전수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은 일하기가 몹시 힘들며, 그 독선이 일 가운데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영향력 키우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높은 위치에 서겠습니까? 일을 할 때 실제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여 영향력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 성경의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은 세상에서 말하는 높은 자리에 앉는 것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을 많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당신은 영향력이 있습니까? 만약 커다란 집무용 책상 뒤에 앉아 구체적인 실행 세부 사항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사람들에게 이것 해라 저것 해라 지시만 내린다면, 그런 사람에게 무슨 영향력이 있겠습니까?

직원들은 잔뜩 굳은 얼굴로 회의를 마치고 사장실을 나오며 수군거립니다. “에휴, 사장님이 지시한 이 일은 도저히 못 할 것 같은데…” 하면 옆 사람이 “그냥 평소대로 해”라고 합니다. 평소대로 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사장은 어차피 세부 사항을 모르니 적당히 둘러대며 속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일에 대한 영향력도 없고 실력도 없으면서 사장 자리에만 앉아 있다면 대체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지금까지도 그런 방식으로 어떻게 일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를 보며 느끼는 바가 참 많습니다. 자신의 영향력을 키운다는 것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당신을 속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당신을 따르고 싶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신과 함께하기만 하면 일이 성사되고, 당신과 함께하면 효율이 나며, 당신과 함께하면 불필요한 결재 과정을 거치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기꺼이 따르는 것입니다. 만약 까다로운 결재 관문을 거쳐야 하는데 상사에게 제대로 설명조차 되지 않는다면, 직원들은 “목사님이 이 일을 시키셨는데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못 하겠다고 말씀드릴 수도 없고…” 하며 속이 타들어 갈 것입니다. 부하 직원들은 피가 마르는데, 상사는 태평하게 차나 마시며 신문을 읽고 있다면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그렇다면 영향력은 어디에서 옵니까? 바로 당신의 창조력에서 나옵니다. 당신이 목표를 제시하고, 전략을 세우고, 방법을 내놓아 실행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우리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이 방향은 틀렸으니 이렇게 바로잡읍시다”라고 조율해 줍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저분의 말을 들으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신에게 영향력이 있고, 실제로 일을 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일을 많이 해보면 이론적인 지침이 생기고, 철학적인 통찰이 생겨 직관이 매우 정확해집니다. 또한 일을 깊이 경험하다 보면 당신의 관리는 단순한 통제를 넘어 ‘교육과 훈련’이 됩니다. 사람들에게 “이 일은 이렇게 해야 하고, 저 일은 저렇게 해야 합니다”라고 가르쳐주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일이 수월해지겠습니까, 안 수월해지겠습니까? 아주 수월해집니다. 사람들은 기꺼이 당신을 따라 일하게 되고, 그 결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이 ‘머리가 됨’은 일반 세상 사람들처럼 높은 자리에 앉아 실현 가능 여부도 모른 채 공허한 지시나 남발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함께 일하며 하나님을 경험하기

일을 하는 과정에서 대인관계를 맺게 됩니다.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나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 사람과 함께 일하면 반드시 해낼 수 있어.”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과 일하고 나면 “아이고, 다시는 같이 안 해. 죽어도 저 사람하고는 일 안 할 거야. 제발 나 좀 살려줘”라는 말이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귀신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예전에는 화인 사명 신학에서 이 부분을 많이 강조했는데, 요즘은 조금 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일을 해야 하나님께서 손으로 하는 일에 복을 주실 텐데,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에 복을 주시겠습니까? 아무런 복도 임하지 않습니다. 《신명기》 28장 1절부터 14절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어 번성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는 모든 일이 복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당신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일을 하면서 반드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일을 하며 말하는 법을 훈련하고 성품을 다듬어 어디까지 맞추어야 할까요? 하나님을 닮아가는 데까지 맞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일터에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없고 귀신만 들끓는다면 망하지 않겠습니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곳에는 반드시 귀신이 역사합니다. 귀신이 함께하는 사람은 마음이 더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이치이며, 그런 사람은 결코 일을 잘 해낼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함께 일하며 하나님을 경험하는 논리 또한 매우 단순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고 땅의 모든 만물을 지으신 후,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피조물을 다스리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스리는 일을 다시 하나님께 떠넘겨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아담이 땅의 모든 생물을 불러 모아 가리키며 “이것은 개, 이것은 돼지, 이것은 말”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맙소사, 얘 이름을 뭐라고 지어야 할까요? 아이고 하나님, 하나님이 직접 지어주세요. 저는 도저히 생각이 안 납니다. 하나님이 정답을 알려주세요”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건 네가 할 일이다”라고 하시는데, “아닙니다, 저는 주님께 다 맡겨드립니다(교탁/交托)”라고 한다면요. 하나님은 당신에게 일을 맡기셨는데 당신은 다시 하나님께 떠넘기고, 하나님이 또 맡기시면 당신이 또 떠넘기기를 반복한다면 결국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됐다, 네 마음대로 해라. 난 다른 사람을 찾겠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세우라고 하신 것은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책임입니다.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해 교회를 세우라고 하셨는데, 무책임하게 ‘주님께 다 맡깁니다’라며 기도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안 됩니다. 사실 화인 사명 신학의 관점에서 이런 문제들을 정리해 보면, 교계에 참으로 기이한 모습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저 모든 일을 하나님께 떠넘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제가 최근에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요즘 저는 예전에 101 과정을 쓸 때처럼 내면에 강렬한 거룩한 불만족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고 싶을까요? 저는 여러분을 잘 훈련하여 잘 듣고, 잘 말하고, 잘 읽고, 잘 쓰는 사람으로 훈련하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이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에서 도무지 핵심을 잡지 못하고, 말만 꺼내면 엉뚱한 소리를 하니 제 속이 타들어 갈 지경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 혼자서는 이 많은 일을 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자매들을 한데 모으려고 합니다. 영업에 재능이 있는 분들을 모아 ‘영업 101 과정’을 쓰고, 회계 분야에 은사가 있는 분들을 모아 ‘회계 101 과정’을 쓰는 것입니다. 말하기에 관한 ‘말하기 101 과정’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에 오시면 참 바쁘다고 느끼실 것입니다. “목사님, 저 이미 맡은 일이 너무 많은데요”라고 하신다면 “하나 더 하세요!”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무엇 하러 왔습니까? 돼지처럼 먹고 살만 찌우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돼지는 잡고 나면 온몸이 다 쓸모 있는 보물이지만, 사람이 게으르게 살다 돼지만도 못하게 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함께 일하며 하나님을 경험합시다.

비록 저의 체력도 한계가 있고 능력도 부족하지만, 화인 사명 신학의 색채를 담은 이러한 훈련 체계를 반드시 구축해 내고 싶습니다. 저는 이곳이 진정으로 사람들을 살리고 축복하는 곳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평생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해 아쉬워했던 분들이 계신다면, 우리 가운데 와서 제대로 배우십시오. 여든이 넘은 연세라도 얼마든지 배우고 훈련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나타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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