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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데살로니가후서 3장 - 교회 안에서는 규칙을 따라 행해야 하느니라!

2025-07-02 2,191 帖撒罗尼迦后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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帖撒罗尼迦后书-请为我们祷告
  • 1 弟兄们,我还有话说:请你们为我们祷告,好叫主的道理快快行开,得着荣耀,正如在你们中间一样,
  • 2 也叫我们脱离无理之恶人的手;因为人不都是有信心。
  • 3 但主是信实的,要坚固你们,保护你们脱离那恶者(或译:脱离凶恶)。
  • 4 我们靠主深信,你们现在是遵行我们所吩咐的,后来也必要遵行。
  • 5 愿主引导你们的心,叫你们爱 神,并学基督的忍耐!
  • 6 弟兄们,我们奉主耶稣基督的名吩咐你们,凡有弟兄不按规矩而行,不遵守从我们所受的教训,就当远离他。
  • 7 你们自己原知道应当怎样效法我们。因为我们在你们中间,未尝不按规矩而行,
  • 8 也未尝白吃人的饭,倒是辛苦劳碌,昼夜做工,免得叫你们一人受累。
  • 9 这并不是因我们没有权柄,乃是要给你们作榜样,叫你们效法我们。
  • 10 我们在你们那里的时候,曾吩咐你们说,若有人不肯做工,就不可吃饭。
  • 11 因我们听说,在你们中间有人不按规矩而行,什么工都不做,反倒专管闲事。
  • 12 我们靠主耶稣基督吩咐、劝戒这样的人,要安静做工,吃自己的饭。
  • 13 弟兄们,你们行善不可丧志。
  • 14 若有人不听从我们这信上的话,要记下他,不和他交往,叫他自觉羞愧。
  • 15 但不要以他为仇人,要劝他如弟兄。
  • 16 愿赐平安的主随时随事亲自给你们平安!愿主常与你们众人同在!
  • 17 我保罗亲笔问你们安。凡我的信都以此为记,我的笔迹就是这样。
  • 18 愿我们主耶稣基督的恩常与你们众人同在!

《答疑解惑》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는 《데살로니가후서》 3장, 즉 마지막 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주제가 무엇일까요? 주제는 바로 “교회 안에서는 규율대로 행해야 한다”입니다. 사실 이 단락을 앞에서부터 뒤까지 자세히 여러 번 읽어보시면, 오직 이러한 주제만이 이 장을 온전히 요약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 안에서는 규율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규율이라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 노릇을 못한다는 것은, 사람답게 처신하는 법을 모르고 사람으로서의 규율도 지킬 줄 모른다는 뜻입니다. 사람 노릇을 못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규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바로 사람의 규율을 지켜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답지 않고 들짐승 같다면 그것은 큰 문제입니다.

자녀를 키울 때, 자녀로 하여금 규율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사실 사람이 평생 무엇을 합니까? 사람은 평생 규율을 배웁니다. 규율이라는 것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러므로 어릴 때부터 아이의 육신을 배려하고 편하게만 해주면, 그 아이에게 규율을 지키게 할 수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에게는 야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짐승은 길들이지 않으면 규율을 지키지 않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조련사가 있습니다. 사람을 훈련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람을 훈련한다는 표현이 듣기에 썩 좋지 않을 수 있지만, 사람이 규율을 지키지 않는 것은 사실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만약 자녀를 키운다면 어떻게 규율을 지키도록 훈련시키겠습니까? 회초리와 몽둥이, 큰 몽둥이입니다. 우리 중에 한 어머니가 제 설교를 듣고 집에 가서 회초리를 준비했고, 나중에는 몽둥이도 하나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보더니 ‘아이쿠, 회초리는 괜찮지만 저 몽둥이는 맞으면 죽겠구나’ 싶어서 몰래 몽둥이를 아래층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어머니가 돌아와서 아이에게 “몽둥이 어디 갔니?” 하고 묻자 아이가 “엄마, 저 몽둥이로 때리면 사람이 죽어요”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그 몽둥이입니다. 규율을 세우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결국 다시 아래층에 가서 몽둥이를 주워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건대, 자녀를 키우며 규율을 세우지 못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아이가 규율을 지키지 않으면 커서 반드시 망가진 인간이 됩니다. 날 때부터 규율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면 사람 노릇도 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릴 때 제멋대로 구는 골칫거리 아이들은 참 문제입니다. 어떤 자매가 “저는 하루에 아이를 몇 대씩 때려요”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분명 규율을 세울 줄도 모르고, 아이가 규율을 지키게 하는 문제도 해결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루에 몇 번씩 때리는 게 어디 있습니까? 당신이 매번 때리는 것은 그저 간지럼 태우는 것에 불과하며, 그것은 매질이 아니라 안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규율이 있습니다

교회에는 규율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말할까요?

형제들아,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하노니 무릇 규율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교훈을 지키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멀리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6)

교회는 사람에게 규율을 지키도록 가르쳐야지, 감정을 분출하는 곳이 아닙니다. 감정 분출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규율을 지킬 줄 모른다면 그것이 바로 평생의 비극입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규율을 지키도록 가르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육신을 편하게 해주는 법을 가르치겠습니까?

어느 부모가 있었는데, 나이가 꽤 많으신 분들이었습니다. 매번 우리를 만날 때마다 매우 친근하게 대하셨습니다. 왜일까요? 자신이 키운 자녀를 어릴 때부터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 지금 마흔 살이 넘었는데도 규율을 통 모르는 사람이 되어 통제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훈련한 사람들은 모두 규율을 지킵니다.

교회의 규율은 매우 많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 이 시간에는 예배를 드리러 와야 하는데, 이 시간에 오지 않고 딴짓을 하다가 나중에 녹음 파일을 듣겠다고 하는 경우, 만약 그 시간이 정말 본인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충분히 조정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면, 저는 그 사람이 규율을 지키지 않는다고 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누가 이렇게 규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분명 규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규율이 정해지면 그것은 철저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녀를 교육할 때, 매주 일요일 아침 8시부터 10시까지 그림을 배우러 가고, 10시 반에는 교회 예배에 참석하도록 했습니다. 내일 시험이 있다고 칩시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가야 합니까, 안 가야 합니까? 내일 시험이 있든, 심지어 내일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의 종말이 오든, 오늘 아침 8시부터 10시까지는 그림을 배우러 가는 것입니다. 내일 시험이 있어도 오늘은 여전히 그렇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해진 규율입니다.

10시 반에 주일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데 “아이고, 숙제를 다 못 끝냈어요”라고 합니다. 숙제를 못 끝냈으면 진작에 무엇을 했습니까? 그래도 예배에는 참석해야 합니다. 오후 두세 시나 서너 시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다시 숙제를 하든지 하십시오. 왜 그럴까요? 이것이 바로 규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절기를 정하셨을까요? 규율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안식일을 정하셨을까요? 규율입니다. 교회는 마땅히 규율을 세워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한 사람이 규율을 지킬 수 있다면 그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규율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도무지 모릅니다. 정말 기가 막힌 것은,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는 사람치고 장래성이 있는 사람은 없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일에 이리저리 끌려다녀서는 안 됩니다. 조정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제대로 정돈해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바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저라고 왜 일이 없었겠습니까?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주일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그 주일에 제가 쓰러져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지경이 되지 않는 한 말입니다. 쓰러져서 못 일어난다 해도 요즘은 온라인이 있으니 온라인으로 열면 됩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건대, 이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을 ‘줏대 있는 사람’이라 부르며, 이런 사람에게는 굳건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사람이 규율을 지키는 사람인지를 봅니다.

이 시간이 되면 다른 일은 다른 시간으로 일정을 잡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이사를 한다면, 왜 굳이 주일 예배 시간에 이사 일정을 잡아야 합니까? “아이고, 다른 시간이 없어요.” 누가 그럽니까? 어떤 사람들은 참 이상합니다. “아이고, 이 시간에 이사해야 해요.” 어떤 사람은 “이 시간에 고객을 만나야 해요”라고 합니다. 왜 그들은 고객을 만날까요? 고객을 만나야 돈을 버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규율을 지키도록 훈련받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로 나왔을 때 모세가 왜 규율을 세웠겠습니까? 그리고 “진을 떠나라”고 하면 모두 출발했습니다. 왜냐고 묻지 말고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젖을 먹여야 하는데요”라고 한다면, 가려거든 가고, 남으려거든 광야에 남아 늑대 밥이나 되라는 식입니다.

그래서 어떤 형제자매들이 제게 수만 가지 핑계와 이유를 대도 저는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마지못해 억지로 꼬인 마음으로 예배에 오는 것을 원치도 않습니다. 억지로 와서 예배드려 무엇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예배 오는 것이 부족하신 분 같습니까? 왜 이렇게 할까요? 이것이 사람을 온전하게 세우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규율은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운 규율 중에 가장 중요한 규율 중 하나는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제 동북 사투리 발음이 부정확해서 단어 구분을 잘 못하더라도 개의치 마십시오. 예전에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베이징에 가면, 우리가 입만 열어도 다들 웃었습니다. 왜일까요? 오리지널 동북 사투리로 ‘고기를 먹고 싶다(吃肉, chī ròu)’고 하면 발음이 ‘또(又, yòu)’처럼 변해서 다들 재미있어했습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발음의 규율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표준어로는 정확히 ‘러우(肉)’라고 해야 하지만, 정통 동북 사투리로는 ‘여우(又)’라고 합니다. 교회가 이런 발음의 규율을 세우자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규율은 바로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은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당시 베드로가 교회를 어떻게 세웠는지 아십니까? 베드로가 교회를 세운 방식은 참 흥미로웠습니다. 베드로가 세운 것은 교회가 아니라 거대한 식당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크나큰 무료 급식소를 차렸습니다. 일은 안 하고 밥만 먹다가, 밥을 못 먹으면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다들 실없는 짓거리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만 명이 일도 안 하고 밥만 축내며 재산을 다 팔아 돈을 가져와 함께 먹기만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먹고살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은 당연히 많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자의 재산을 축내는 것 아닙니까? 베드로는 교회를 세울 줄은 몰랐지만 식당을 차릴 줄은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입버릇처럼 “우리 전도자들이 밥 먹이는 일이나 맡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밥 먹는 그 사소한 일 하나 해결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전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건대, 그 시절 베드로가 세운 교회는 규율이 없는 교회였고, 게으름뱅이들의 무리였습니다. ‘먹자, 먹어, 어차피 주 예수님께서 오실 텐데 실컷 먹자.’ 아이고, 맙소사! 그것을 어찌 교회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바울이 세운 교회는 어떠했습니까? 각자 자기 일을 하고, 자기 돈으로 밥을 사 먹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교회는 식당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 노릇 하는 법을 가르치고, 일하는 법을 가르치며, 돈 버는 법을 가르치고, 정상적인 삶을 사는 법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어차피 주 예수님께서 오실 텐데 그냥 먹고 마시며 죽는 날이나 기다리자”는 식의 논리는 집어치우십시오. 만약 주님이 안 오시면 어쩔 작정입니까? 다 먹고 마시고 돈도 바닥났는데 주 예수님께서 아직 안 오시면 어찌하겠습니까? 안락사라도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독에 중독되어서는 안 됩니다. 설령 주 예수님께서 내일 오시고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며 성실히 일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주 잘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어떤 고대 사본에는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가 있음) (《누가복음》 17:34-36)

밭에서 밭을 갈던 두 사람 중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합니다. 즉, 일하는 자, 밭에서 일하는 자 중에서 데려감을 당하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이고, 버려둠을 당하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은 자입니다. 교회 안에서 할렐루야만 외치던 사람 중에서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두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분에게 그 이유를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목청 높여 할렐루야를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조용히 일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왜일까요? 장차 주 예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데리고—그중에 여러분이 포함될지 저는 모르겠지만, 여러분 모두가 포함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이 땅에 오셔서 이 땅을 다스리고 통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창조된 이래로 이 뜻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을 불러내신 것이,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무슨 일을 해도 엉망이면서 할렐루야만 일등으로 외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땅을 다스리고 통치하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살아내게 하려는 것입니다. 분명 그렇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면 어찌하겠습니까? 무슨 일을 해도 엉망이고, 할렐루야만 할 줄 알며, 자기 밥값조차 벌지 못한다면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천국에는 결코 그런 사람이 없을 것이며, 그때 이 땅에도 그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사람 노릇을 할 줄 알고, 일할 줄 알며, 사람을 관리하고 일을 관리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논리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보 천치들의 무리가 아닙니다. 바보 천치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일하지 않는 핑계와 소망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재림을 일하지 않는 핑계와 소망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기만 하면 머리카락 빼고 온몸이 다 아프다고 합니다. 일만 시작하면 “아이고,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라고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내가 왜 일찍 가야 하느냐?”라고 물으시면 “아이고, 주님이 오셔야 제가 일을 안 하죠”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온통 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나타낼 수 없습니다. ‘아이고, 세상의 모든 수고를 그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일하는 것이 은혜임을 알지 못하는 참으로 비극적인 사람입니다.

《전도서》를 읽어보면, 사람이 수고하는 가운데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몫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 같은 사람은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특징이 하나 있는데, 바로 취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학창 시절 기숙사에 있을 때 마작 테이블을 펼쳐놓고 24시간 내내 그것만 치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저는 그랬습니다. 그들이 패를 쥘 때의 표정이란, 마지막 패 하나만 들어오면 날 수 있는 상황에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손으로 패를 슥 문지릅니다. 그러다 자기가 원하는 패가 아닌 것을 보고는 탁 집어던집니다. 다음번에 또 자기 차례가 오면, 아이고 맙소사, 그 표정이 마치 마약에 취한 사람 같습니다. 저는 ‘저게 도대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럼 당신은 뭘 이해합니까?”라고 묻습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이렇게나 많은데 언제 그런 짓을 하고 있겠습니까? 저희 어머니께서 치매에 걸리신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마작을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가끔 제가 전화를 걸어 어머니가 받으시면 마작 패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디세요?” 하고 물으면 어머니는 “산책 중이다, 마작 패 옆에서 산책하고 있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담배를 딱 물고 마작을 즐기셨습니다. 어머니는 그것이 참 재미있다고 하셨지만 저는 이해가 안 됐습니다. 결국 마작을 치고 또 치시다가 치매에 걸리고 마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주님의 재림을 일하지 않는 핑계와 소망으로 삼습니다. 이는 터무니없는 논리입니다. 사실 주 예수님께서 오시면 우리를 데리고 한 성읍, 열 성읍, 백 성읍을 다스리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스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신 것은 그들을 이 땅에 두어 하나님처럼 이 땅을 다스리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무엇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제가 보기엔 좀 위태롭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가 전환점을 맞이하기를 원합니다. 저는 형제자매들을 모두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훈련시키고자 합니다. 관리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목사님, 저는 지금 청소부인데요”라고 합니다. 괜찮습니다. 청소부 관리자의 자리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 저는 바닥을 쓸고 있어요”라고 합니다. 바닥을 쓰는 것이나 청소하는 것이나 같은 원리 아닙니까? 어떤 분은 “목사님, 저는 화장실 청소를 합니다”라고 합니다. 화장실 하나를 잘 관리할 수 있으면 열 개도 잘 관리할 수 있고, 열 개를 잘 관리할 수 있으면 백 개도 잘 관리할 수 있습니다. 화장실 백 개를 혼자 다 못하면 밑에 청소원 열 명을 배치하면 됩니다. 그러면 당신이 바로 관리소장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를 이끌고 관리하는 일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먹고 마시고 놀며 마작이나 치는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 땅을 다스리고, 땅의 짐승과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를 관리해야 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을 관리하여 더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을 두고 ‘드디어 실컷 놀겠구나, 드디어 쉴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게으름뱅이의 소리에 불과합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골라서 들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중에는 청소부도 있었고 관리도 있었으며 부유한 부인들도 있었을 텐데, 바울이 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전하는 것을 듣고는 “아, 영광스럽다, 정말 영광스럽다” 하며 헛된 망상에 빠져 “아, 나도 드디어 부잣집 사모님처럼 살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개념입니다. 저도 교회 안에서 그런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자매는 외모도 그리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더러 결혼하라 해도 안 하겠지만, 물론 그럴 자격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설교만 나오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다”라며 얼굴에 꽃이 핍니다.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며 아주 신이 났습니다. 아무 일도 제대로 못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겠다고 으스댑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 중에도 이런 이들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말을 듣고는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일하라고 한 것은 까맣게 잊은 채, 매일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다”라며 헛된 꿈만 꾸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며 날마다 예수님이 자기를 데리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며, 듣고 있자니 탄식만 나옵니다.

제가 이제야 이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관리를 맡기려 하신다는 것을 저는 젊었을 때 성경을 읽으며 이미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고등학교 때 저는 문과 과목을 못해서 편중이 심했습니다. 골고루 잘했다면 점수를 수십 점은 더 받았겠지만 저는 편중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된 후 저는 이 편중된 문제를 완전히 보완하여 균형을 잡았습니다. 교회의 규율과 하나님의 뜻을 명명백백하게 꿰뚫어 보게 된 것입니다.

저는 필사적으로 성경을 읽었습니다. 다 읽고 난 후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먹고 마시며 죽을 날이나 기다리는 그런 복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복음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살아내는 복음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나타내야 합니다. 거울을 보고 자신의 형상이 어떤지 비추어 보십시오. 매번 힘들어하고, 이래서 괴롭고 저래서 괴롭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 메시지를 읽다 보니 어떤 형제자매의 나눔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수십 살이나 되었는데 어릴 때부터 배울 줄을 몰랐습니다. 손해를 보지 않았겠습니까? 큰돈을 날리고 빚더미에 올라앉아 지금까지도 갚고 있습니다.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그저 먹고 마시고 놀기만 바라고, 먹고 마시며 죽기만을 기다리는 태도로 어찌 살겠습니까? 온몸에 종교적인 냄새만 가득합니다. 앞의 두 장에서 왜 그렇게 주님의 재림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을까요? 그것이 결코 핑곗거리가 될 수 없음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규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멀리해야 합니다

규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멀리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하노니 무릇 규율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교훈을 지키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멀리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6)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4-15)

교회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무리입니다. 저는 예전에 어떤 전도자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전도자는 주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것을 믿고 자기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끌고 우리 고향의 아주 먼 산봉우리에 올라가 기다렸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오시지 않았고, 일주일 동안 기다리다 가져간 음식이 다 떨어지자 다시 내려왔습니다. 저는 ‘도대체 얼마나 어리석으면 저러는 걸까,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걸까?’ 싶었습니다. 규율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이처럼 제멋대로 엉망진창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건대, 교회 안에서는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을 조심해야 할까요? 아무 일도 제대로 못 하면서 할렐루야만 일등으로 외치고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대부분 사기꾼입니다. 사기를 당해서 그런 사람이 된 경우도 있고, 남을 속이려고 그런 사람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기꾼이 정말 많습니다. 우리 중에 사기를 당해본 적이 있는 분은 조심하십시오. 자주 사기를 당한다면 조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멀리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가까이해야 합니까, 멀리해야 합니까? 당연히 멀리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깨끗하다고 생각합니까? 온몸이 더럽고 머릿속에는 쓰레기만 가득합니다. 부정함을 타지 않도록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그들은 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매우 그럴싸하고 흥분해서 떠들어댑니다. 정작 자기가 먹는 밥은 남이 번 돈으로 빌붙어 먹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모든 것을 남에게 얹혀사는 사람이라면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 예수님께서 당신 같은 사람을 데려다가 무엇에 쓰시겠습니까?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과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를 원수처럼 대하지는 말아야 하지만, 지나치게 친하게 지내서도 안 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유유상종이라 했습니다. 당신이 어떤 무리에 속해 있는지를 보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유유상종인데 멀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이 한 무리라면 우리는 그들과 섞이지 말고 다른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전에 교회를 처음 개척했을 때, 참 기이한 일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청년이 있었는데, 찢어지게 가난하여 교회의 지원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교회 안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과만 어울려 친구가 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사람을 섬길 때 마음속으로 깊이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언젠가는 그 청년도 결국 그런 사람이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중국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습니다. 어릴 때 그러했다면 커서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어릴 때 선악을 분별하는(识别善恶) 사람이었다면, 새로운 규율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커서도 선악을 분별할 것입니다. 새로운 규율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런 부류의 사람들만 좋아한다면 커서도 여전히 그럴 것입니다. 사람이 평생 무지하게 사는 것은 비극입니다.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권면한다고 해서 그들과 아주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사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좋아합니다. 교회의 유지는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우리 모두 좋다’ 식의 적당주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귀신 같고 저승사자 같은데, 어찌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면, 제 마음속으로는 ‘아, 당신도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지난 세월 동안 끊임없이 걸러내었습니다. 한 무리의 쓰레기를 걸러내고, 또 한 무리의 쓰레기를 걸러내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교회를 정결하게 하시는 주 예수님이십니다. 유유상종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좋아합니까? 비슷한 악취를 풍기는 자들끼리 어울리기 마련이니 조심하십시오. “나는 그저 먹고 마시고 노는 게 좋아요”라며 함께 모여 즐거워하는 자들을 보면, 저는 참 기가 막힙니다. 그것이야말로 바보 천치 같은 짓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사람을 권계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권계(勸戒)해야 합니다. ‘그 사람은 원래 저러니까 그냥 내버려 두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그런 상태라면 저 역시 ‘그냥 참고 견디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저는 아주 끈질기게 권면하고 훈계하여, 당신이 변화되든지 아니면 떠나갈 때까지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예전에 제가 안목이 부족하고 분별력이 떨어졌을 때, 먹고 마시고 놀기만 좋아하는 사람들을 들여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도 헌금을 했고 나름의 논리도 있었습니다. 날마다 제게 만 리 길을 걷고 만 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나눴지만, 제가 보기에 그는 만 리 길은 걸었을지언정 만 권의 책은 읽지 않았습니다. 저더러 넓은 세상을 많이 접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를 즐기라고 권했지만, 저는 도무지 노는 데 흥미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노는 것만 좋아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참 좋다고 여겼습니다. 나중에 제가 법칙을 발견했는데, 먹고 마시고 놀기만 하는 것은 흑마(老马)의 영이었습니다. 그렇게 계속 돌아다니며 믿음의 길을 제대로 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에게 성실히 일하고, 맡은 일을 잘 감당하며,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물론 그는 일을 안 해도 잘 먹고살 수 있었습니다. 돈이 많았는데, 과거에 어떻게 벌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에게 일하라고 권했고, 그는 저에게 먹고 마시고 놀자고 권했습니다. 둘이서 팽팽히 맞섰지만, 저는 먹고 마시고 노는 것에 아무런 재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물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저도 맛있는 줄은 압니다. 제가 맛을 모른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저는 먹고 마시고 노는 것에 정말 흥미가 없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흥미를 느끼는 것은 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들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노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저는 참으로 의아했습니다. 무엇이 의아했을까요? 세상의 모든 도시는 다 똑같다는 점입니다. 아십니까? 모든 도시의 모습은 다 비슷합니다. 여러분은 “아니에요, 북유럽의 작은 도시들이 얼마나 아름다운데요”라고 할지 모릅니다. 다 보고 나면 뭐합니까? 날마다 보면 질리지 않겠습니까? 저는 모든 도시가 다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보니 모든 시골 마을도 다 똑같았습니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보려고 한다면 인터넷에서 사진 몇 장 찾아보는 것이 직접 가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제 동역자들에게도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다들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함께 앉아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만, 사실 먹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함께 먹는 과정 속에서 양육을 하고 사역을 한다는 점입니다.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은 정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도시가 똑같이 생겼는데, 저는 그것이 참 기이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제가 참 단조롭게 산다고 여기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들이야말로 참 단조롭게 삽니다. 결국 무승부로 끝났으니 그만둡시다. 당신은 당신대로 실컷 놀러 다니십시오. 저는 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겠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내린 결론은, 먹고 마시고 놀기만 좋아하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머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권계를 통해 변화되든지, 아니면 귀신에게 끌려가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끌려갔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들이 먹고 마시고 놀면서 무엇을 얻었겠습니까? 툭하면 2~3년에 한 번씩 담석증이 생겨 데굴데굴 구르며 비명을 지르는데, 그것이 재미있습니까? 전혀 재미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너희 자신이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데살로니가후서》 3:8-9)

이 말씀은 정말 훌륭합니다. 제가 감히 말씀드리건대, 여러분에게 우리를 본받으라고 진심으로 권면합니다. 왜 우리를 본받으라고 권할까요? 핵심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많은 가치를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을 이 사회가 홀대하겠습니까? 결코 홀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사람이 가난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 같은 사람이 가난해질 수 있겠습니까? 저는 가난해질 수 없으며, 결코 가난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향상시키고, 자신이 하는 일에서 잘 성장하라고 권면합니다. 제가 소목자들을 훈련할 때 일터에서 업무 효율을 높이는 법에 대해 강의했습니다. 남들이 하루 종일 걸려 할 일을 우리는 2시간 만에 끝내고, 나머지 6시간 동안은 다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난해질 수 있겠습니까? 품질이 떨어지거나 대충 때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품질 또한 매우 훌륭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분 중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수고하고 애써 일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권리가 없어서 여러분에게 공짜로 얻어먹지 않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본을 보여 본받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제 안에도 결단이 있습니다. 제가 어디를 가든지 형제자매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으며, 형제자매들의 덕을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가운데 한 부부 형제자매가 매우 열정적으로 어떤 전도자와 그의 동역자들을 대접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캐나다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왔기에 그 집에 머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 머물면서 요구 사항이 참 가관이었습니다. 유기농 음식만 먹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고 맙소사, 요구 수준이 참으로 높습니다. 공짜로 먹고 자면서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보기에 이런 전도자들은 널리고 널렸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절대로 짐이 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우리는 공짜로 먹고 자며 여러분의 덕을 보려는 생각을 털끝만큼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두 손으로 일합니다. 참으로 수고하고 애쓰며 밤낮으로 일합니다.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말씀드리건대, 저는 20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의 쉬지 않았습니다. 물론 밤에는 잠을 잡니다. 24시간 내내 깨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얼마 전 손님들을 접대할 때의 일입니다. 그날 밤 저는 3시간밖에 자지 못했습니다. 낮에 운전을 하고 돌아오는데 너무 졸려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고속도로에서는 멈출 수 없어서 억지로 참고 고속도로 구간을 다 빠져나왔는데, 고속도로를 나와서 2~3km를 남겨두고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옆에 있던 형제에게 “빨리 교대해서 운전 좀 해달라”고 넘겼습니다. 그리고 조수석에 타자마자 잠이 들었는데, 얼마나 달게 잤는지 모릅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모두 일하기를 즐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일하는 것은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본을 보였으며, 사도 바울은 저의 롤모델입니다. 만약 천국에 가서 주 예수님 곁으로 돌아갔을 때 누구를 가장 만나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저는 바울과 가장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제 모습 속에 사도 바울의 모습이 많이 담겨 있다고 느낍니다. 그가 바로 제가 본받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를 롤모델이라 부르는 것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본받는 본보기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는 먹고 마시며 죽는 날이나 기다리며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논리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읽어본다면 반드시 무엇을 발견하게 되겠습니까? 성실히 일하라는 가르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의 일은 참 흥미롭습니다. 예수님께서 전도하러 다니실 때 누군가가 “당신이 우리 집에 만들어준 탁자가 부서졌는데 아직 보증 기간도 안 끝났소”라고 항의한 적이 있었을까요?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만들어준 의자가 부서져서 엉덩방아를 찧었잖아요”라는 일이 있었을까요? 없었습니다. 그분은 목수의 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의 인내를 배우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12세에 성전에 계셨던 기록 이후 수년 동안 성경의 기록이 끊겨 있다고 말합니다. 그 긴 세월 동안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요?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일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하시면서 자신이 사역할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사역하러 나오실 때가 되자 목수 일을 내려놓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멍청한 분이 아니셨으며, 교회를 세우시는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자는 성막을 지었던 모세나 성전을 지었던 솔로몬과 다윗처럼 모두 탁월하게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울 때, 그리스도의 인내가 없이는 세울 수 없습니다. 이 인내를 가리켜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인내를 배우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목수 일을 하고, 내일도 목수 일을 하며, 묵묵히 30세가 될 때까지 일하시다가 사역하러 나오셨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매우 탁월하고 유능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마스터 빌더(工师)이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그분이 탁월한 엔지니어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속히 퍼져 나가도록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속히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데살로니가후서》 3:1)

이 구절이 단순한 중보기도 부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중보기도할 때 사도 바울이 행한 일들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사도 바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온전히 깨달아 그를 본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 사도 바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라고 고백하면서, 기도하는 본인도 주의 말씀이 속히 퍼져 나가 영광을 얻도록 그 길을 걸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광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영광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이러한 결단을 품고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을 통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의 말씀이 속히 퍼져 나가,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낼 수 있음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자 사도 바울의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헛된 감정에 도취된 모습을 철저히 벗어버려야 합니다. “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다. 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혼녀다” 하면서 정작 일은 하나도 제대로 못 하고 혼자 감상에 젖는 일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하려거든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되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도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겨우 3년이라는 짧은 공생애를 보내셨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살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영광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영광의 길을 걸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 영광의 길을 걷는다면 우리 또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게으른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살아낼 수 있겠습니까? 게으른 사람은 저팔계 같은 모습밖에 살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저팔계가 되겠습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살아내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논리가 우리의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논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화인 사명신학(华人命定神学)은 바로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내는 신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며, 이 땅에서의 삶 동안 형제자매 여러분 모두가 삶의 모든 영역, 모든 구석, 모든 작은 순간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온전히 살아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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