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答疑引言
大家好!咱们讲的《创世记》三十五章,我觉得我讲得特别好。我有一个小小的怪癖,说出来也不怕丢人,就是爱听自己的讲道的习惯。以前我对自己的讲道常常不满意,把录音左剪右剪。听了一句话不顺,就再录一段加进去,一个小时的讲道我可以剪接三个小时。有一次我开车,后座有一个人在手机里播我的《传道书》讲道。我一边听,一边驾车,觉得自己讲得挺好。
我遇到一个牧师,问他有没有听自己讲道,他说他痛恨听自己讲道。这事有点小邪门。你想想看,如果你是个煮饭的,煮完了自己都不想吃,你给别人吃会怎么样?你自己都跟吃猪食似地,给人家吃就更不怎么样了。后来我发现,有些人不喜欢听自己的讲道,但是,主日还得站在台上讲,这是悲剧。
为什么我今天还在不断地进步呢?因为我常常听自己讲。一开始我也不喜欢听,但是我有追求,我想好好地服侍我的神,讨神的喜悦。我不甩锅给神,抱怨祂不赐给我讲道的恩赐,而是好好地、一点一点地改。改到今天,每次我听自己讲的时候,就觉得讲得特别好。
Q1:怎么样除掉我们里面的外邦神?
人里面有外邦神就会遭罪。人里面有命定也会遭罪,因为有了命定以后,里面还有一大部分不是属于神的。经常是这一块夺过来献给神,那一块夺过来献给神。之前的要么属于你自己,要么属于这个世界。我们里面有外邦神的时候,神也一定会透过很多事让你看见。
比如,雅各帐篷里整天摆个偶像,他怎么可能不知道要除掉它呢?但是,他爱拉结爱到离谱的地步,以至于进进出出,每天与偶像同在也觉得挺好,没出事,拉班没有杀他,以扫也没有杀他。真的挺好吗?不好。人笨就笨在这里。有的人觉得生意已经做得很好了,就不需要进步了。不是这么回事。
神也很清楚我们是怎么回事。结果家里就出事了,底拿被强奸了。谁也不喜欢这样。雅各心知肚明,完全不困惑。他已经有好长时间没有成长了。从以扫要来杀他之后,已经有那么几年的功夫了。这几年,过日子、搭帐篷,整着整着就出事了,这才想起来要除掉当中的外邦神。所以,是没遭够罪,才没除掉我们里面的外邦神。罪遭够了,就会去除了。
遭罪的时候别甩锅,而是要除去外邦神。如果你觉得没有遭罪,挺好的,那么就等遭罪的时候再说吧。你没遭罪的时候,我也说不了你,我一说你,你就跟我抬杠。我直接服侍的人,我都整不了他,别人能整吗?整不了的。后来长荨麻疹等等,我就带他祷告。要慢慢改啊!什么东西使你抓狂,那个东西就是外邦神。我就没看见有人为命定抓狂。但是《圣经》里确实记载了一个人,他就是使徒保罗,因为爱神,为神癫狂。但是这样的人不多,几乎看不到,看到的都是为自己的核心利益癫狂。
Q2:老师,第一本《圣经》是什么时候有的,以什么文字出现的?
你要反问他:为什么要问这个?第一本《圣经》应该是摩西时候有的,摩西是三千五百年前的,用希伯来文字写的。问这个干啥?做学术研究就不用问了,他肯定知道;如果不做学术研究也没有必要问。
Q3:老师,利未在上一章失去了长子的名分,但在摩西年间神又拣选利未支派做神的祭司,这怎么理解?
利未支派被分散在以色列各个支派当中,神在那个年代拣选了利未支派,是因为找到了一个摩西。我们要知道,摩西是利未人,然后神就拣选了利未人。即使利未干了这事失去了长子的名分,也不影响摩西得着命定,也不能取代摩西得着名分。不管你是华人或是洋人,你都可以得着命定,跟这关系不大。《圣经》上的意思是说,像西缅、利未一样,砍断牛腿大筋,流无辜人的血的人,会丧失长子的名分。不要把这两件事硬扯到一起。
Q4:老师,有人问崇尚中医是追求外邦神吗?听中医的忌口、长时间不吃很多东西是体贴肉体吗?
很好的问题。我问你吃饭是追求外邦神吗?吃饭是崇尚吃饭吗?有人就喜欢经常问一些非常奇怪的问题。今天你来我这了,我请你吃顿饭,算是体贴肉体吗?很多人混乱到一定程度,以为吃饭叫体贴肉体,不吃饭叫不体贴肉体,这样咱们大家就毁了。中医是有效的,中医讲的是邪灵在人身上运作的规侓。
Q5:老师,在职场中的时候,汇报工作没有像汇报流水账这样,而是觉得不重要的就略过,但是我领导批评我汇报一半隐瞒一半,还说你是一个基督徒,怎么还撒谎?我听了也不生气,基督徒也不是道德的典范,这是不是把老板的话视为外邦神了呢?
你没干好,人家老板说你,你不得好好改吗?老板要啥你给啥!人家让你往东你往西,那不麻烦了?你得照着老板的意思干,还得把活干好。要把这活干好肯定是有点难度,但这跟外邦神没关系,难受正常。如果我们做错事被说一顿,还不难受,那可毁了。你看有的小孩,从小扛揍,犯错被爸妈揍一顿,硬是不认错,最后很辛苦。常常认错是好的。
Q6:老师,耶稣家谱中的人都是有命定的人吗?
这可不知道。但是有几个很清晰的人物都是有命定的。像亚伯拉罕、以撒、雅各,犹大从他玛生谢拉和法勒斯,都是耶稣家谱中的人。有没有没有的呢?好像还真有。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창세기》 35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이 장은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창세기》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인물 이야기는 요셉이고, 그다음이 야곱의 이야기이며, 그 후에야 아브라함과 이삭이 나옵니다. 오늘 나눌 《창세기》 35장의 주제는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우상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위해 살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 삽니다. 만약 여러분이 추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참되신 하나님이라면, 여러분은 참되신 하나님을 위해 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평생 추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남편이라면, 여러분은 남편을 위해 살게 되고, 여러분의 남편이 곧 여러분의 이방 신이 되고 맙니다.
이 이야기를 조금 되짚어 보겠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사람들을 죽였는데, 사람을 죽였으니 상대방도 복수를 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와서 공의를 묻고 그를 진멸하려 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진멸당하면 모든 것이 끝나지 않겠습니까? 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창세기》 35:1)
사람이 왜 벧엘로 가야 할까요?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일찍이 그에게 꿈을 꾸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하늘에 닿은 사다리가 있었고, 그 사다리 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그곳은 바로 그가 돌 하나를 베고 누워 꿈을 꾸었던 곳입니다. 야곱은 그곳에 이르러 자신이 그 당시 어떻게 그 길을 지나왔는지, 그리고 지금 어떻게 다시 걸어가고 있는지를 기억해 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너는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집안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고 말했습니다.
야곱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이러한 재앙이 그들 중에 있는 이방 신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알았습니다! 모를 리가 없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셔서, 영문도 모를 공포에 휩싸인 그들이 더 이상 야곱 일행을 추격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쫓아가 죽이려고만 하면 두려움이 엄습하여 추격을 포기했고, 이 일은 그렇게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장에서는 수많은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유모 드보라의 죽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심,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 등입니다. 이 모든 것은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을 버리는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람의 영적 생명은 한 걸음씩 성장한다
여러분은 성장하지 못한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어쩌면 오랫동안 성장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아마 곧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모릅니다. 왜 일이 터질까요? 일이 터지지 않으면 여러분은 성장하지 않기 때문이며, 일이 터지지 않으면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이 터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벧엘이라는 곳에 가서 예전에 나타나셨던 하나님을 떠올리기나 하겠습니까? 사람은 평생 살면서 어느 정도 일을 겪어야 합니다. 저는 이런 일들을 떠올릴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누구도 어려움을 겪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는 에서가 죽이려 하고, 어느 때는 세겜 주변 사람들이 죽이려 하고, 또 어느 때는 라반이 뒤쫓아와 죽이려 하는 이런 상황을 누가 겪고 싶겠습니까? 평생 이 일 저 일이 끊이지 않는 것, 영적인 사람에게는 늘 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번에 겪은 일은 그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야곱의 두 아들 레위와 시므온이 사람들을 죽인 사건이었습니다. 야곱과 상의도 없이 나가서 그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사람들이 야곱에게 와서 죗값을 물으려 하니 야곱은 혼비백산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놀란 것은 오히려 좋은 일이었습니다. ‘아이고, 죽겠구나! 어쩌면 좋지?’ 급히 하나님을 찾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여러분이 사기를 당했을 때, 피해 금액이 비교적 적다면, 사기를 당하고 나서 조금은 정신이 번쩍 들지 않습니까? 또 사기를 당하고 나면 조금 더 정신이 들지 않습니까? 다음에는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다음에 또 사기꾼이 나타나면 그때는 잘 통제해야 합니다.
사람은 겪어 보아야 반성하고, 반성해야 조정을 거치게 됩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단번에’ 이루어지는 법이란 결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생님, 그럼 선생님은 어떠신가요?”라고 묻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 아무 일도 없고 오늘 맛있는 것을 먹고 내일도 기름진 것을 먹는다면 사는 것은 참 좋겠지만, 성장은 없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날마다 맛있는 것만 먹고 잘 산다면 영적 생명이 자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다른 일을 겪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평안한 중에 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복된 일이겠습니까.
이번에 겪은 일은 사실 야곱의 영적 생명 성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계였는데, 바로 ‘이방 신을 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사명이 있든 없든, 우리 안에는 다소간 핵심 이익이 자리 잡고 있으며, 다소간 그다지 좋지 못한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지극히 사랑했는데, 라헬은 자신의 장막 안에 우상 하나를 놓아두었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매일 라헬과 함께 누워 지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침대 맞은편에 텔레비전을 두고, 부부가 때로는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을 켜고 “이것도 재미없고 저것도 재미없네, 재미있는 것 좀 틀어봐!”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부가 서로 금실이 좋아서 “너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찰떡처럼 붙어 있는 것, 그것도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다가 결국 우상을 낳게 되고, 이방 신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요. 라헬의 입장에서 야곱은 그녀의 이방 신이었습니다. ‘나는 내 남편을 잃을 수 없어, 남편은 내 거야.’ 그것이 정말 여러분의 것입니까? 라헬은 죽었지만, 그녀의 남편은 계속 살아서 결국 다른 사람의 남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영적 생명이 자라는 과정 속에서 우리 안에 있는 이방 신들을 한 걸음씩 제해 버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의 이방 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이것도 사랑하고 저것도 사랑하며 온갖 것들을 사랑하는데, 그 모든 것들이 여러분을 호되게 고생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잠깐 곁길로 새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수많은 사물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사실 왜곡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왜곡이 어디에서 올까요? 왜곡은 바로 ‘이방 신’이라는 것에서 옵니다. 갑자기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운동해야 합니다. 생명은 운동에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큰일 났습니다! 생명이 운동에 있습니까? 생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생명이 운동에 있다’고 하면 ‘운동’이 여러분의 이방 신이 되는 것입니다.
최근 한 유명 기업의 고위 임원이 평소에 운동을 자주 하다가 얼마 되지 않은 나이에 달리기 중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생명이 운동에 있습니까? 때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은 건강보식품에 있다”고 하며 이것저것 챙겨 먹다가 온갖 문제가 생겨 결국 사망하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의 생명은 건강보조식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운동에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드리는 이 말씀이 어떤 분들에게는 거슬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살아가다 어느 단계에 이르면 사업이 여러분의 이방 신이 되고, 직장이 여러분의 이방 신이 되며, 사랑하는 아내가 여러분의 이방 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내를 해치거나, 남편을 해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을 해치게 됩니다. 결국 무엇이 사람을 해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생명의 한 단계에 이르면 하나의 이방 신을 제해야 하고, 또 다른 단계에 이르면 또 하나의 이방 신을 제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이 터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언젠가 한 자매를 만났는데 매일 아침 일어나 작은 포 여러 개를 잘라 컵에 붓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호기심이 생겨 “이게 뭡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멀리서 맡아도 한약 냄새 같았는데, 끓는 물을 부으니 온통 건강보조식품이었습니다. 그래서 건강이 좋아졌습니까? 아닙니다! 많은 문제들은 제가 기도해 주어 나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생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면서 건강보조식품을 먹으면 안 될까요?”라고 묻습니다. 드십시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한편으로는 건강보조식품을 의지해 보십시오. 두고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이 조금씩 자라기 위해서는 참으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한 걸음씩 제해 버려야 합니다.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는 일에 있어서, 야곱에게는 이방 신이 없었을까요? 야곱에게도 있었습니다. 그가 자기 아내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였습니다. 흔히 “너를 너무 사랑해 죽겠다”는 말을 하듯, 결국 상대를 사랑해서 죽게 만든 꼴이 되었습니다. 본래 라헬이 아이를 낳는 것은 닭이 달걀을 낳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어야 했는데, 이렇게 말하면 조금 언짢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임신을 하면 가족들이 이리저리 극진히 보호하지만, 사실 보호할 수 없습니다.
라헬의 임신은 좋은 일이었지만 결국 난산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아이는 태어났으나 그녀 자신은 죽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위기에 직면하자 먼저 자기 집안의 이방 신들을 제하여 그것들을 모두 한 나무 아래에 묻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리도 절묘할까요? 그의 아내는 하필 이방 신을 제하는 그 시점에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라헬의 마음이 복잡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까요? 대단히 복잡했을 것입니다. ‘내 우상을 빼앗겨 남편이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어버렸으니, 나를 지켜주던 신이 사라졌구나!’ 그녀는 그것을 진짜로 믿었습니다.
아이를 낳는 것이 본래는 닭이 알을 낳듯 자연스러워야 했는데, 결국 아이를 낳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죽어가는 과정에서 라헬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했겠습니까? 말할 수 없이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아마 ‘만약 내 남편이 우리 집안의 우상을 치우지 않았다면 내가 아이를 낳을 때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요? 있습니다. 물론 그 이방 신들을 치우지 않았다면 주변 사람들이 진작에 그들을 몰살했을 것이고, 아이를 낳는 일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이 일로 야곱에게서 단번에 두 개의 이방 신이 제거되었습니다. 하나는 라헬이 섬기던 이방 신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라헬 자신이었습니다. 라헬이 바로 야곱의 이방 신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품고 산다는 것은 때로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대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이 사랑하는 그 대상이 곧 이방 신이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집안의 이방 신들을 단번에 치워버리셨고, 라헬까지 한꺼번에 데려가셨습니다.
라헬이 죽을 때, 그녀의 영혼을 과연 누가 데려갔을까요?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을 수도 있고, 버려진 그 우상, 그 우상 배후에 있는 악령이 워낙 강해서 ‘네가 감히 나를 지키지 않았으니 나도 너를 지키지 않겠다’며 그녀를 잡아갔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 일을 완전히 논증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라헬이 섬기던 우상 배후의 악령이 대단히 강해서 라헬을 끌고 갔다는 점입니다! 이방 신들을 제하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명이 있는 자에게 나타나신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다시 나타나신 것은 라헬이 죽기 전이었습니다. 나타나신 후에 라헬이 아이를 낳다가 죽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관계가 있을까요? 절대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이 있는 자에게 나타나시면 사람을 살리시지만, 사명이 없는 자에게 나타나시면 그것은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다시 나타나신 곳은 벧엘이었는데, 벧엘은 오늘날 예루살렘의 성전산입니다. 그곳은 야곱이 돌을 베고 누워 하늘에 닿은 사다리를 꿈꾸었던 곳이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사다리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하나님께서 그 사다리 위에 서서 야곱에게 임할 사명을 선포하셨던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그저 “오,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오, 나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해요! 하나님도 나를 정말 사랑하세요! 오, 내가 예수님을 보았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명이 있는 자에게 나타나십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을 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자신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창세기》 35:11-13)
이번에도 야곱이 꿈을 꾼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분명하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전의 벧엘에서는 꿈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대면하여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한번 사명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사명은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의 사명은 바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것이 곧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을 세울 때 이곳이 바로 하늘의 문이 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무엇을 하려 하실까요?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저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한단다”라고 느끼하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참으로 무의미한 일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사명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그것은 다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책을 읽었는데, 그 사람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이 옷을 입어라, 저 옷을 입어라” 하셨다고 썼습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비키니를 입고 나가라고 하실까 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장 아닙니까. 그것이 하나님이시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그런 무의미한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바로 여러분이 과연 무엇을 위해 사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옷을 위해 산다면, ‘옷이 날개’라며 옷이 여러분의 이방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온몸을 에르메스니 샤넬이니 하는 명품으로 휘감고 제 앞에 와서 팔을 척 들어 올리며 거창한 포즈를 취합니다. 제가 보고 “뭐 하시는 겁니까?” 하니 “시계 몇 시인지 봅니다!”라고 합니다. 그 물건은 사실 전자시계처럼 생겼더군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지만 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방 신입니다! 제 앞에 와서는 그런 짓을 부리지 마십시오.
우리는 사명 신학(命定神学)을 하지 않습니까? 저는 화인 사명 신학의 창시자입니다. 제가 관심을 두는 것은 오직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사는가?’입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한다면 감정이 반드시 안정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고 내면의 이방 신을 버린다면, 누가 여러분의 하나님을 흔들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여러분의 하나님을 흔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명이 있는 자에게 나타나시며, 나타나실 때마다 여러분에게 주신 그 아름다운 사명을 다시금 확증해 주십니다.
이 사명은 우리가 스스로 상상해 낸 것이 아닙니다. 이 사명은 아브라함이 구했던 것이고, 이삭이 구했던 것이며, 야곱이 일찍이 구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하고 또 구하다가 일단 ‘진정한 사랑’을 찾게 되면 구하는 마음이 조금 약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안의 이방 신을 제해야 합니다. 사명이 있는 것과 우리 안의 이방 신은 서로 대립합니다. 참신을 섬기면서 동시에 우상을 섬길 수는 없으며, 그 어떤 것도 우리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의 남편은 낯가죽이 참으로 두껍습니다. 우리 자매들이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는 “당신은 당신의 예수를 더 사랑해, 아니면 나를 더 사랑해?”라고 묻습니다. 저울에 달아보거나 소변에 얼굴을 비추어 보며 자기가 몇 근 몇 냥짜리인지 분수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거의 이방 신이 다 되어버렸습니다. 아내는 당신을 이방 신으로 여기지도 않는데, 당신이 아내를 이방 신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거되지 않겠습니까? 머지않아 일이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명이 있는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창세기》 35:1)
제가 말씀드립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도 이런저런 일을 겪을 수 있으며, 야곱이 겪은 일은 어쩌면 매우 큰 골칫거리였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라반이 가신 몇 명을 거느리고 그를 죽이러 온 일이었고, 두 번째는 에서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그를 죽이러 온 일이었으며, 이번에는 세겜 사람들을 다 죽였기 때문에 주변 성읍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죽이러 온 일이었습니다. 세겜에는 주변 성읍 사람들의 친족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수천수만 명의 사람이 그를 죽이러 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지난번에 이런 일을 겪었을 때도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지지난번에 이런 일을 겪었을 때도 하나님께 기도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이번에는 도둑의 소굴을 벗어나니 이리 떼의 굴로 들어간 격이었습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명이 있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며, 야곱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기도할 때 온몸을 떨 정도로 이번 일은 참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지만,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끝장이 났을 것이고 큰 화를 당했을 것입니다. 이번 기도가 효력이 있었을까요? 효력이 있었습니다.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명이 있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는 반드시 찾을 것이요, 하나님을 찾는 자를 하나님은 반드시 기뻐하십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런저런 일을 겪게 되며, 어쩌면 일을 겪을 당시에는 아직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겪는 일이 우리 안의 이방 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자녀를 지나치게 소중히 여긴다면, 그 자녀가 바로 여러분의 이방 신이며 라헬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를 너무 중하게 여기면 자녀를 응석받이로 키우고, 버릇없게 만들며, 자녀의 육신을 배려하게 됩니다. 자녀의 일을 너무나 중하게 여겨 다른 모든 것은 다 내려놓아도 자녀의 일만큼은 절대 내려놓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기꺼이 내려놓아 버립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면 우리 가운데 계신 어머니들은 분명 깊이 공감하실 것입니다! 오늘날 영적인 여정에서 야곱조차도 이런 일을 겪었습니다. 그토록 사명이 충만했던 사람, 벧엘이라는 곳에서 일찍이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셨던 그 사람도 말입니다.
영적인 사람이라 불리던 집안인데도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그의 아들들이 세겜 사람들을 죽였으며, 이로 인해 주변 성읍 사람들이 그들을 추격하여 죽이려 했습니다. 이런 일이 오늘을 피한다고 내일 피할 수 있겠습니까? 초하루는 피할 수 있어도 보름은 피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면 사람이 죽어나갈 판국이니, 이방 신을 제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일을 만나도 불운하고 저 일을 만나도 불운하다면, 그것이 바로 이방 신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나의 이방 신이 되어, 사명도 없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니 망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지 종종 탄식하곤 합니다. 사람들에게 이방 신이 너무 많고, 그들의 마음이 온통 자기 가정에만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명을 품은 사람이 많습니까? 제 눈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아내나 남편, 자녀, 형제자매, 집이나 전토를 버린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몇 안 됩니다. 마음으로 아끼는 모든 것을 사랑하다가 이방 신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서히 깨닫게 될 테니, 너무 미혹되지 마십시오.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영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너무나 분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처음 믿었을 때, 교회의 한 목사님이 교통사고를 당해 차가 형체도 없이 부서지고 목사님도 사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혼란스러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저는 그분을 잘 압니다. 차를 목숨처럼 사랑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하는 길에서 나를 지키신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창세기》 35:3)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에게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이 가는 길에서 여러분을 지키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벧엘에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분명히 보며 많은 재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여러분의 이방 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외삼촌 라반에게서 성공적으로 벗어난다면 큰 부자가 될 터인데, 이때 이방 신을 제해 버려야 합니다. 비록 이때 세겜 사람들이 여러분을 죽이려고 쫓아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라반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건져내셨을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입니다. 초하루의 위기에서 건지셨을 뿐만 아니라 보름의 위기에서도 건져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길에서 우리를 지키시므로, 누구든 여러분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려 한다면 먼저 하나님께 가서 허가증을 받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디 한번 건드려 보라고 하십시오. 건드리는 즉시 화를 당할 것입니다. 여러분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큰 공포를 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꿈을 꾸게 하시니 라반이 감히 야곱을 건드리지 못했는데,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어떻게 돌려놓으셔서 야곱을 죽이지 않게 하셨는지는 우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길에서 우리를 지키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사명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점입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이 다소 무겁게 들릴 수 있지만, 여러분은 진정으로 그 이방 신을 버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붙들고 있는 그 핵심 이익들을 내려놓을 용의가 있으십니까? 만약 그러하다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이 가는 길에서 여러분을 지키실 것이며, 아무도 여러분을 해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안의 중심이 이미 하나님 앞에 온전히 굴복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도 기억하신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창세기》 35:8)
사명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미천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억하십니다. 여기에 한 구절이 덧붙여져 있는데 무엇과 관련된 것인지 의아할 수 있습니다. 리브가의 유모가 죽은 일을 굳이 여기에 기록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기록하지 않고 지워버린다 해도 별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 문장은 야곱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 왜 여기에 기록되었을까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리브가의 유모는 가장 먼저 리브가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수명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만약 리브가가 이삭과 동갑이었고, 이삭이 마흔 살에 리브가를 아내로 맞이했다면 리브가의 유모는 이미 예순 살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 20년이 지나 이삭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으니, 이때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는 여든 살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이 집을 떠나 피신했을 때가 일흔다섯 살이었으니, 여든에 일흔다섯을 더하면 벌써 백쉰다섯 살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백일흔다섯 살이었고, 거기에 몇 년을 더 지냈으니 백팔십 세쯤 되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왜 그녀가 죽은 것을 기록했을까요? 성경을 기록한 모세는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이 한 줄을 기록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드보라가 사명이 있는 유모였음을 잊지 말고 꼭 한 줄 적어 넣으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유모란 그저 하녀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녀가 누구에게 영향을 주었습니까? 그녀는 일차적으로 리브가에게 영향을 주었고, 리브가에게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리브가를 도와 에서와 야곱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유모 드보라와 야곱의 관계는 대단히 좋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같은 계선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리브가와 야곱은 동일한 사명을 가지고 동일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고,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은 이 장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유모 드보라를 기억하셨음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라면 비록 일개 유모에 불과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한 줄을 기록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제가 묻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보라를 기억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기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기뻐하시고 어떤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시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드보라는 이방 신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리브가를 데리고 고향에서 나왔지만, 드보라와 리브가는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반면 라반은 여전히 고향의 우상을 섬기고 있었으니 이는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은 아무리 비천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사명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가 장자의 명분을 잃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창세기》 35:22)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첩과 잠자리를 같이했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 일은 디나가 강간당한 일보다 훨씬 더 심각해 보입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지만, 사명을 잃어버린 자 또한 하나님께서 분명히 기록해 두십니다. 성경 전체에서 모세는 참으로 기록을 잘했습니다. 단번에 두 종류의 사람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라고 해서 저절로 무엇인가 될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알아들으셨습니까? 왜 르우벤이 야곱의 첩 빌하와 동침했을까요? 아마도 르우벤 역시 합환채를 먹고 정욕이 치밀어 올라 주체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야곱의 첩 빌하가 르우벤을 유혹하여 이런 사단이 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 르우벤은 하반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가 어찌 장자의 명분 따위를 신경이나 썼겠습니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방 신은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이방 신은 ‘애정’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이것을 아주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착각하여 그런 짓을 저질렀을지도 모릅니다. 빌하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면서도 빌하가 야곱의 첩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 얼마나 난잡하고 해괴망측한 일입니까.
사람은 사명이 없으면 무슨 짓이든 저지릅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가 추구하는 바를 좇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 시작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얻으려 듭니다. 그러므로 이방 신이란 단순한 우상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핵심 이익이자 마음 깊은 곳에서 갈망하는 대상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추구하지 않으며, 사명을 추구하는 사람은 정말로 드뭅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대단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별수 있겠습니까? 제가 만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남을 속이기를 좋아했습니다. 사기 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까, 적습니까? 많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스라엘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 관광 상품을 파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사명이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에게 돈을 조금이라도 덜 주어 보십시오, 그 낯빛이 즉시 험악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르우벤이 장자의 명분을 잃어버린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었습니까, 안 되었습니까? 기록되었습니다. 마음속에 제거하지 못한 이방 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왜 장자의 명분을 잃었을까요? 마음속에 이방 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방 신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누이 디나가 강간당한 사건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로 여겼습니다. 내면에서 용납하지 못하는 그 마음이 결국 그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수단을 쓰든 세겜 사람들에게 감언이설로 할례를 받게 한 다음, 그들을 모조리 쳐 죽였습니다.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사람의 내면에 자기만의 핵심 이익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내면에 사명이 없으면 짐승과 같은 야수성이 매우 강해집니다. 여러분은 이 장의 제목이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이것이 여러분의 이방 신이 되고 저것이 여러분의 이방 신이 된다면, 그 어떤 이방 신이든 결국 여러분의 목숨을 앗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제해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방 신이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일생을 살다 결국 모두 죽게 됩니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태어나고 무엇을 위해 살든 간에, 결국은 다 죽습니다.
제가 결론을 짓겠습니다. 결국은 다 죽습니다. 이삭은 백팔십 세까지 살다 죽었습니다. 그에게 사명이 있었습니까? 사명이 있었습니다. 유모 드보라는 대략 백칠십~백팔십 세까지 살다 죽어 벧엘에 묻혔습니다. 사명이 있었습니까?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명이 없던 자들은 죽지 않았습니까? 죽었습니다. 하나같이 다 죽었고, 누구도 오늘날까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은 결국 자기가 추구하던 것을 위해 살다가, 자기가 추구하던 것을 위해 죽는 법입니다.
훗날 르우벤, 시므온, 레위도 다 죽었고, 요셉과 야곱도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명을 품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사명이 있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사명이 있는 자에게 나타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는가가 관건입니다. 화인 사명 신학에서 말하는 사명이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죽는가 하는 것이며, 이것을 사명이라고 부릅니다. 어쩌면 누군가의 사명은 빌하와 동침하여 그녀의 침상에 오르는 것이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세겜 사람들을 다 쳐 죽이는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태어나고 그것을 위해 죽었습니다.
야곱과 이삭은 무엇을 위해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죽었습니까? 그것은 단지 사람 마음의 선택일 뿐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리브가, 드보라와 같은 이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다 죽었지만, 사람이 무엇을 위해 죽는가 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있는 이방 신들을 제해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영적 생명이 자라나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할 필연적인 여정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창세기》 35장 말씀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35: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5: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35: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35: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35:6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35: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35:8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35:9 야곱이 밭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35: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만은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35: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자신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35: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35:13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35:14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35:15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35: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35: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35:18 그가 임종에 이르러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35: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35: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35: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35: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35:23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35:24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35:25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35:26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밭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35: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35: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35: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