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1.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아주 좋은 말씀의 제목은 《존귀한 왕자》입니다. 최근 들어 우리 형제자매들의 머릿속에 무언가 빠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무엇이 부족할까요? 제가 느끼기에는 '존귀함'이 부족합니다. 존귀하게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가 존귀하게 살지 못하면서도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니 갈수록 덜 존귀해지고, 갈수록 숨이 막히며, 거울을 봐도 스스로 못나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존경받고 존귀히 여김 받기를 원하며 무시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느끼셨겠지만, 남들이 나를 존중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행동하는 것들을 보면 오히려 더 무시를 당하게 됩니다. 참으로 마음이 답답한 노릇입니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돈을 좀 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걸음걸이가 마치 게처럼 옆으로 거들먹거리며 걷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사는 것이 존귀한 모습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나누고자 합니다. 어떤 이들은 어릴 때부터 공부하기를 싫어해서 이런 도리를 전혀 모릅니다. 온몸에 좌청룡, 우백호를 문신하고 허리에는 갈치 한 마리를 새겨 넣은 채 뒤에 부하들을 우르르 거느리고 다닙니다. 그것이 존귀해 보입니까? 제 눈에는 도무지 존귀해 보이지 않습니다. 건달이나 양아치처럼 보일 뿐이며, 온종일 얍삽하고 못된 짓만 골라 하는데 어떻게 존귀할 수 있겠습니까? 남들이 보면 어떤 사람인지 단번에 압니다.
제가 어릴 적에는 사람들이 할 일이 없어서 그랬는지, 통 큰 나팔바지 청바지를 입고 서너 명씩 사거리에 모여 서 있곤 했습니다. 지나가다가 눈길이라도 마주치면 "뭘 쳐다봐?" 하고 시비를 겁니다. 그러면 상대방도 "쳐다보면 어쩔 건데?" 하고 맞받아치지요. 그러면 끝장입니다. 피를 보는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그런 무리를 보면 멀리 피해 돌아갔습니다. 그들 곁으로 지나가지 않고 1킬로미터를 더 돌아가도 상관없었습니다. 그런 행동이 존귀한 것입니까? 하지만 그들은 자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논리입니까? 결국 그렇게 살다가 칼에 찔려 죽기도 하고 교도소에 가기도 했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저만 꼬리를 내리고 몸을 사리며 피했던 아이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질이 불같고, 어떤 사람은 몹시 쩨쩨해서 쓸데없는 일만 골라서 합니다.
나중에 보니 사람들은 참 묘하게도 늘 자기가 손해를 본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이 존귀해질 수 있겠습니까? 절대 존귀해질 수 없으며, 남들이 보기엔 그저 깍쟁이일 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미국에 산다면 겨울에 눈을 치울 때 옆집의 심기를 건드리지 마십시오. 언제 총을 쑥 빼들고 나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뉴스에 눈을 치우다가 옆집 마당으로 눈을 넘겨 싸움이 난 가족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라면 차라리 옆집 문 앞의 눈까지 다 치워주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 집 앞 눈까지 치워준 것을 보면 총을 들고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날 만두를 빚었다면 만두 한 접시를 가져다주었겠지요. 어떤 사람이 더 존귀합니까? 총을 빼드는 사람이 존귀합니까? 전혀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매우 미묘하며, 이는 사람이 가장 배워야 할 부분입니다. 늘 남에게서 이득만 보려고 하면 옆집 이웃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개도 다 압니다. 여러분은 도대체 어떤 평판을 쌓고 싶으십니까? 저는 어릴 적부터 이것저것 뒤섞여 난장판이 되는 싸움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싸우기만 하면 "내가 옛날에 너한테 뭘 사줬는데, 너는 나한테 뭘 해줬냐" 하며 서로 헐뜯습니다. 그렇게 싸워서 도대체 무엇을 얻겠습니까? 평판만 엉망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평판을 관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남들이 "저 사람은 매사에 트집만 잡는 사람이야"라고 수군거린다면, 마치 동네 깡패를 보듯 사람들이 피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흠잡기를 좋아하고 선악을 분별하기 좋아한다는 것을 알기에 엮이지 않으려고 피하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사역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매일 사람들의 선악을 분별하는 문제를 다루어야 하니 참 힘듭니다. 믿음이 없으면 금방 무너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브랜드 이미지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왜 나를 그렇게 보세요?"라고 말합니다. 남들이 왜 그렇게 보면 안 됩니까? 본인 스스로가 만들어 낸 이미지인데 남들이 부족하다고 말하면 안 됩니까? 자기는 마냥 훌륭하다고만 생각합니다.
어느 날 부부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남편은 "목사님, 제 아내가 이렇고 저렇습니다"라고 하고, 아내는 "남편이 이렇고 저렇습니다"라고 하더니 두 사람이 동시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제 문제를 볼 때는 현미경을 들이대고 트집을 기가 막히게 잡으면서, 자기 문제를 볼 때는 축소경을 대고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게 봅니다." 사람이 다 이렇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머리에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고 생각이 부족한 것입니다. '머리에 생각이 부족한 것을 어찌해야 하나?' 하고 한숨이 나왔습니다. 요즘 참 고단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이름을 널리 알리려 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이름을 낮추시고, 자기 의를 세우려 하면 하나님께서 그 평판을 꺾으십니다. 천지 사방이 여러분의 진짜 평판을 다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뒤섞인 난장판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데, 온갖 재료를 한 솥에 다 털어 넣고 끓여 뒤죽박죽된 상태를 말합니다. 호박도 넣고 가지도 넣고 감자도 넣고 고기도 넣어서 결국 정체불명의 잡탕이 된 꼴입니다. 맛만 좋으면 되지 않냐고 하겠지만, 지금은 음식 이야기가 아니라 혼란스러운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직장에서 여러분의 이미지는 어떠합니까? 직장에서 이미지가 좋지 않다면 남들이 그렇게 보는 것을 탓하지 마십시오. 본인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의 집안에서 여러분의 평판은 어떻습니까? 물어보아도 사람들은 감히 진실을 말하지 못합니다. 벌집을 건드릴까 봐 다들 슬슬 피해 가며 "좋지, 다 좋아"라고만 합니다. 정말 좋아서 그렇겠습니까? 무서워서 바른말을 못 하는 것입니다. 집안에서든 직장에서든 사람들에게 "왜 다들 저 사람만 존중하고 나는 존중해 주지 않습니까?"라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염치로 그런 질문을 합니까?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지금 대우해 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은혜를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본인의 이미지가 나쁘다면 남들이 왜 나를 그렇게 보는지 묻지 마십시오. 전부 자신이 쌓아온 결과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살아오면서 본인 스스로 떳떳하지 않다고 생각한 일이 있었습니까? 모든 일에서 자기가 옳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스스로 옳다고 여길지 몰라도 남들은 여러분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속으로 '저 사람은 늘 자기만 옳다고 하고, 이득을 취하고서도 손해 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우러러보겠습니까?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어떻게 평판을 관리해야 하는지 가르쳐 드리고자 합니다. 직장에서 극도로 이기적인 사람들은 청소하는 아주머니까지도 그 실체를 다 압니다. 발가벗고 다니는 것처럼 훤히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평판을 어떻게 관리하여 존귀한 왕자가 될 것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저는 그냥 이것저것 뒤섞인 잡탕처럼 대충 살고 싶어요"라고 하신다면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남의 이득을 탐하고, 트집 잡고, 정색하고, 쩨쩨하게 구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우리 중에 그런 사람을 좋아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가장 다루기 힘든 사람이 바로 이런 부류입니다. 인색한 사람은 자기가 인색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트집 잡는 사람은 자기가 까다롭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남의 것을 탐하는 사람은 자기가 남에게 폐를 끼친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깨닫기만 해도 문제가 쉽게 풀릴 텐데 말입니다.
예전에 한 박사과정생이 있었습니다. 아직 졸업 전이라 수입이 넉넉지 않아서 제가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우리 집으로 들어와서 살게나. 여기는 거실도 넓어서 요리도 마음껏 할 수 있고 각자 방도 따로 있네." 다만 저희에게는 한 가지 규칙이 있었습니다. 각자 100위안씩 모아서 화장지, 세제, 냉장고의 생수와 음료수 등을 사서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물 한 병 가지고 따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형제님도 100위안을 내세요"라고 했더니, "저는 돈을 내지 않는 대신 가끔 물건을 사다 놓겠습니다"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는 이사 나갈 때까지 단 한 번도 물건을 사 오지 않았고 전부 제 것을 썼습니다. 한두 사람 더 쓴다고 해서 저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습니다.
목회자로서 저는 그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사실 목회자도 참 괴롭습니다. 늘 남에게 쓴소리를 해야 하니 미움을 사기 십상입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이런 것을 인색함이라고 합니다. 이런 인색함은 자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고 나중에 평판만 나빠집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뭘 모르시네요. 저희 상하이 사람들은 다 이렇습니다." 상하이 사람들이 다 이렇다니요? 자기가 상하이 사람들의 기준이라도 됩니까? 상하이 사람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을 소리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저는 상하이 사람 중에서 제일 통이 큰 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온 상하이 사람을 다 깎아내린 셈입니다. 이런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제 마음이 참 답답했습니다. 고쳐주려고 진심으로 권면했는데 본인은 너무나 자화자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들 중에도 이런 착각에 빠진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본인은 몹시 인색하면서도 '내가 청두에서는 제일 통이 커', '항저우에서는 내가 제일 화끈하지', '란저우에서는 내가 제일 넓어', '멍청한 주(州)에서는 내가 제일 대범해'라고 착각합니다. 결국 웃음거리만 될 뿐입니다. 사람이 이러니 어떻게 남들에게 존경을 받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사람을 존경하겠습니까? 물론 저는 존경하려고 애씁니다. 왜일까요? 사역자라는 직분상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이 사람이 앞으로 통 큰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선포하며 섬겨야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미래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바로 여러분 자신의 평판 안에 있습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 기숙사 방 하나가 12제곱미터(약 3.6평) 남짓이었는데, 6~7명이 함께 살았습니다. 한 사람당 1미터 남짓한 공간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방 사람들은 서로 사이가 아주 좋았습니다. 왜 좋았을까요? 물을 길으러 갈 때 양손에 보온병을 하나씩 들고 가는 친구들이 있었고, 힘이 센 친구는 양손에 두 개씩 들고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물을 뜨러 가는 김에 두 병을 드나 네 병을 드나 마찬가지였고, 오히려 한 병만 들면 균형이 안 맞으니 두 병을 드는 것이 더 편했습니다. 그러니 방 안의 관계가 좋아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반면에 옆방 사람들은 각자 자기 물만 길어다 마셨으니 사이가 좋을 리 없었습니다. 인색한 사람들은 참으로 유별납니다. 저희 대학 시절에는 보온병에 자물쇠를 채워두고 남들이 쓰지 못하게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자물쇠를 채워놓으면 남들은 기어코 열쇠공을 불러서라도 그 물을 몰래 쓰고 골탕을 먹입니다.
사람은 내면의 형상대로 삶을 살아내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값없이 거저 주시는 분입니다. 마귀의 형상을 닮아서는 안 됩니다. 귀신 같은 자들 틈에 섞여서 어떻게 잘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지옥과 천국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옥에서는 사람들이 큰 솥에 고기, 호박, 가지, 배추, 메기, 두부가 가득 든 음식을 둘러싸고 앉아 있는데, 모두가 피골이 상접해 있었습니다. 왜일까요? 손잡이가 아주 긴 국자가 하나씩 주어졌는데, 손잡이가 너무 길어서 자기 입에는 음식을 넣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필사적으로 자기 입에 넣으려고만 하니 한 입도 먹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에도 똑같은 큰 솥에 음식이 끓고 있고 똑같이 긴 국자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천국의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잘 먹고 있었습니다. 손잡이가 길기 때문에 맞은편 사람에게 음식을 떠먹여 주었고, 결국 모두가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쓴 이야기인지 참으로 훌륭한 비유입니다. 자기만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은 비극이며, 생각이 모자란 사람입니다.
내면에 가난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 지나가는 개도 알아보고 얕봅니다. 개가 얕보지 않으려 해도 하나님께서 "가서 저 사람 좀 건드려봐라" 하실 것입니다.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속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속이 가난하면 겉으로도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는 속이 가난하지 않다고 느끼십니까? 그것은 근거 없는 자기만족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곧바로 실체가 드러납니다. 덜 일하고 더 많이 얻으려 하며, 아낀 시간으로 틱톡이나 숏폼 영상이나 보다가 결국 인생이 완전히 식어버립니다. 하나님도 그를 싫어하시고 사람도 그를 싫어하게 되며, 지식도 없고 실력도 없어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일을 적게 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을 많이 하면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저는 직장에서 자타공인 최고의 직원이었습니다. 저는 일하는 것을 참 좋아했습니다. 일을 많이 하면 어떤 유익이 있는지 아십니까? 내 일은 당연히 최선을 다해 하고, 내 일이 아니더라도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라면 제가 도맡아 했습니다. 물론 상대방이 허락할 때 했습니다. 일을 많이 할수록 저의 가치가 올라갔습니다. 그렇다고 24시간 내내 일에만 매달린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이 헌신하니 더 많이 얻게 되었고, 하나님도 저를 기뻐하시고 사람들도 저를 좋아했으며 연봉도 가파르게 올랐습니다.
제가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았는지 아십니까? 저는 성경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 최선을 다했습니다. 20대부터 지금까지 제 인생의 80%는 밤새워 새벽 2시에 잠자리에 들었고, 2시 이전에 잔 날은 20%도 채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면 몸이 상하지 않습니까?"라고 묻겠지만, 몸이 상했습니까? 오늘 제가 피곤해서 감기에 걸린 것처럼 보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선악을 분별하다가 틈을 준 것뿐입니다.
제가 얼마나 많은 실력을 쌓고 많은 일을 해왔는지 아셔야 합니다. 수년간 관리직에 있으면서 네트워크 시스템을 완벽하게 다루었고, 네트워크의 원리를 머릿속에 훤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도 완벽하게 해냈습니다. 왜일까요? 일을 많이 해보았기 때문입니다. 때로 직원들이 투정을 부리거나 일을 내팽개치면 제가 직접 도맡아 처리했습니다. "그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겠지만, 제 시간이나 여러분의 시간이나 똑같습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시간이 왜 저에게는 없겠습니까? 경험이 많고 능력이 탁월하며 성품이 좋아서 저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습니다. 존귀한 왕자가 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좋은 모습입니다.
훗날 저는 한 가지 원리를 터득했는데, 이것은 참으로 강력합니다. 바로 '일하는 것이 은혜'라는 원리입니다. 왜 일이 은혜일까요? 일하지 않으면 문제들이 저에게 주어지지 않고, 그렇다면 어디서 경험을 쌓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화장실 청소를 할 때도 콧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닦았고, 청소를 마치면 변기와 세면대가 하얗게 반짝였습니다. 저는 일하는 것을 사랑합니다. 왜일까요? 제 안에는 존귀한 왕자의 논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존경을 받아야지, 무시당하며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화장실을 청소하는데 남들이 존경하겠습니까?"라고 묻겠지만, 만약 여러분이 제가 화장실 청소하는 모습을 직접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겠습니까? "와, 목사님 정말 대단하시다!" 하지 않겠습니까? 존귀해 보입니까, 아니면 천해 보입니까?
얼마 전 화장실에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제가 다 치웠습니다. 악취 방지 배수관을 설치해야 하는데 짐이 너무 많이 쌓여 있어 작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변기가 너무 더러운 것을 보고 천천히 청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손대지 않으면 점점 더 더러워질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님은 왜 돈을 좋아하지 않으세요?"라고 묻습니다. 저는 "돈이 나를 좋아해야지, 내가 돈보다 훨씬 가치 있는 사람인데 왜 내가 돈을 좇겠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아브라함도 이런 사람이 아니었겠습니까? 분명 그랬을 것입니다. 그는 재물이 넘쳐났는데 굳이 돈에 연연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쩨쩨하게 사는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공을 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난 세월 동안 무엇을 하며 살았습니까? 저는 2시 이전에 잔 적이 20%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늘 2시 넘어서 잤습니다. 그러니 배운 것도 많고 해낸 일도 많습니다. 여러분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틈만 나면 숏폼 영상에 빠져 통제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요즘 짧은 영상들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도록 정교하게 만들어져 영혼을 빼앗아 가는데, 이것이야말로 생각이 없는 행동입니다. 지금부터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일과 존귀하지 못한 행동은 줄이십시오.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주 예수님 앞에 나아가 재미있는 숏폼 영상이나 보여드릴 생각입니까? 물론 저도 가끔 보면서 웃기는 합니다만, 머리에 생각이 모자란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존귀하지 못한 것, 이기적인 것, 트집 잡는 것은 줄이거나 끊어버리십시오. 가치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겪는 모든 문제는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성실하게 일한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훗날 목회자가 되어 교회를 개척했을 때, 제가 쌓아온 모든 실력들이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저는 앞으로 기업 경영에 관한 책을 한 권 쓸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업 안의 모든 구성원이 '일하는 것이 은혜'라고 여기는 문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건 가스라이팅(PUA) 아닙니까?"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멀리 떠나십시오. 저는 사람들을 존귀하게 살도록 이끄는 것이지, 비루하게 살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 사회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세상도 여러분에게 보답할 것입니다. 제가 대학 시절에 보았던 인색한 친구들은 훗날 직장에서 잘 풀리지 못했습니다. 물병 두 개를 들고 오던 그 단순한 행동 속에는 그 사람 뼛속의 가치 체계가 담겨 있었고, 그런 사람들은 훗날 크게 성공하여 세상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반드시 존귀한 형상을 나타내어 존귀한 왕자가 되어야 합니다. 일하다가 숏폼 영상을 보고 싶어질 때마다 스스로에게 외치십시오. "나는 존귀한 왕자가 되어야 한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렇게 행하였기에 훗날 존귀한 왕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갈수록 엉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켜보지 않으면 어느새 또 숏폼 영상을 보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2. 본문 말씀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존귀한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주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진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그가 그의 밭머리에 있는 그의 막벨라 굴을 내게 주도록 하되 충분한 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 당신들 중에서 매장할 소유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하매 (창세기 23:1-9)
3. 기도
하나님, 오늘 저희 가운데 역사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저희의 생명과 마음속에 모셔 들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저희 심비에 새겨지게 하시고, 아브라함이 우리를 위해 열어놓은 이 길을 따라 힘차게 달려가게 하옵소서. 하나님, 저희 안의 악습을 온전히 제하여 주시고, 저희 안에 있는 모든 악한 것들을 처리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오늘 저희가 존귀한 왕자의 형상을 살아내게 하옵소서! 주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 제 안에서 이 놀라운 역사를 이루사 저를 빚으시고 다듬어 주시며, 성령의 불로 저를 태우사 주님을 더욱 닮게 하시고, 우리 안의 육에 속하고 세상에 속한 정욕을 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이것이 본래 주님의 뜻임을 믿사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4. 본문 배경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수많은 해를 살았습니다. 그가 가나안으로 갈 때가 대략 7576세였고, 사라는 대략 6566세로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10세 안팎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눈 깜짝할 사이에 127세가 되었으니, 그곳에서 60여 년을 산 것입니다. 이 60여 년 동안 아브라함은 자신의 평판을 성공적으로 관리했습니다. 그가 쌓아 올린 평판이 무엇입니까? 바로 '존귀한 왕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곳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었지만, 아브라함은 그들과 매우 원만하게 지냈습니다. 얼마나 원만했느냐 하면, 사람들이 보기에 아브라함이라는 노인은 너무나 대단했습니다. 결코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뛰어난 능력을 지녔으며, 집안사람들도 훈련이 매우 잘되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오늘날 태어났다면 대기업의 최고경영자이자 탁월한 경영학 전문가였을 것입니다. 그가 경영학 전문가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대략 137~138세 무렵이었습니다. 그가 10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집안의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곧바로 사람들에게 가서 할례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천여 명이나 되는 집안사람들에게 "우리 다 같이 할례를 받읍시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할례가 뭡니까?"라고 물을 것이고, "남자의 생식기 표피를 잘라내는 것입니다"라고 답한다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겠습니까? "본인이나 자를 것이지 왜 내 몸에 칼을 댑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모든 사람이 그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지도력입니까? 그에게는 확고한 관리 체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알 수 없지만, 그가 참으로 탁월하게 이 일을 성사시켰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배후에는 틀림없이 하나님이 계셨을 것입니다.
그 이전에 아브라함은 집에서 기른 318명의 사람들을 거느리고(자신까지 포함해 총 319명), 네 왕을 추격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네 왕은 요즘으로 치면 지역 폭력조직의 우두머리들과 같았습니다. 통 큰 청바지를 입고 문신을 한 채 "세금을 내라!"고 으름장을 놓는 건달들 같았습니다. 그들이 군사를 이끌고 롯이 살던 소돔을 멸망시키고 롯의 온 가족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조카가 끌려가자 아브라함은 가만히 있지 않고 집안의 318명을 데리고 가 지역의 토착 세력이자 암흑가의 거두들을 완전히 쳐부수었습니다.
다섯 왕을 꺾었던 네 왕이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 패배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일대의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사람들은 뒤에서 '아브라함이 무림의 비급이라도 얻은 것이 틀림없다. 저 노인을 건드리지 마라, 절세 무공을 가졌다'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정말 그런 비급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이로 인해 아브라함의 명성이 사방에 자자해졌고, 아무도 감히 그 노인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아브라함의 이름만 들어도 몸을 떨며 '그가 우리를 치러 오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니 절대 건드리지 말자. 저 노인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비급이 아니라 성경을 가진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매우 존귀하게 행했습니다.
소설가 김용이 아브라함에 관한 소설을 썼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장풍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김용이 쓰지 않았으니 우리가 나누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브라함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의 경영 철학은 그 일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배우고 수업을 듣지 않았겠습니까?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반을 열어 기업 경영과 통치술을 가르쳤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가르친다고 다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겠지만요.
먼 곳에서 배우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을까요?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치는 양 떼는 품질이 뛰어났고, 아들 이삭이 짓는 농사도 풍작을 이루어 온 가족이 전문가였기 때문입니다. 왜일까요? 그들은 한가하게 숏폼 영상이나 보지 않고, 틈만 나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바르게 해낼 수 있는가?'를 깊이 연구했기 때문입니다. 배울 줄 모른다면 배움의 방법부터 먼저 배워야 합니다. 눈도 어둡고 생각도 모자라 일만 벌이면 그르치는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은 날마다 온 가족과 함께 일을 어떻게 제대로 할 것인가를 연구했습니다.
이 무렵의 아브라함은 훌륭한 명성을 널리 떨치고 있었습니다. 결코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남을 괴롭히지 않았으며, 누군가 그의 것을 빼앗아가도 "그냥 가져가시오"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축복을 받아서 양을 쳐도 복을 받고 집안에는 재물이 넘쳐났습니다. 아브라함은 당대의 기인이었으며,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귀한 왕자'라고 불렀습니다. 성이 '왕'이고 이름이 '자'라는 뜻이 아니라, 왕의 아들처럼 존귀하고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명성이 퍼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행동에는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사라가 죽은 후 왜 굳이 매장지를 사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오늘날 깊은 산골이나 외딴곳에 산다면, 차를 타고 한 시간만 나가도 사람이 없는 곳이 수두룩합니다. 인적이 드문 곳에 땅을 파고 나무껍질을 덮어 유골함을 묻으면 돈도 안 들고 편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막벨라 굴이 명당이라는 말을 듣고, 그 땅이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소유임을 알아냈습니다. 그는 헷 족속의 장로들에게 "소할의 아들 에브론이 저에게 그 땅을 팔도록 중재해 주신다면, 제 죽은 자를 장사 지낼 수 있도록 충분한 값을 치르고 사겠습니다"라고 청했습니다. 우리는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아닌가? 왜 굳이 매장지를 사려 했을까? 유골을 바다에 뿌리면 끝날 일 아닌가?' 그 이유 중 하나는, 아내 사라를 이곳에 묻고 정당하게 땅을 매입함으로써 합법적인 표징을 남기고자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헤브론의 막벨라 굴(실제 그 동굴인지는 알 수 없으나)은 수많은 이들의 순례지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을 사서 가문의 영원한 매장지로 삼았습니다.
이 땅을 사는 과정을 통해 그들은 아브라함을 어찌하여 '존귀한 왕자'라고 불렀을까요? 이것은 깊이 탐구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형제자매들의 내면에 바로 이러한 존귀한 왕자의 모습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제 안에는 우리 형제자매들의 뼛속에 아브라함의 이러한 본질이 흐르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매장지를 사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존귀한 왕자'로서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존귀한 왕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원하신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서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존귀한 왕자로 만드셨다면, 왜 여러분은 그렇게 만들지 못하시겠습니까? 문제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존귀한 왕자가 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가이며, 우리는 이를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5. 존귀한 왕자 (1): 말을 잘할 줄 알아야 한다
말을 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남의 말을 알아들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원수 대하듯 입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의 모습은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온몸에 문신을 한 채 "야, 이 녀석아, 이리 와 봐!" 하고 소리치는 건달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저에게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저는 기꺼이 가겠지만, 남을 그렇게 부르는 본인의 인품은 얼마나 비루하겠습니까? 말을 잘해야 하고 남의 말을 들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말을 예쁘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저 역시 말하는 법을 끊임없이 다듬기를 원합니다만, 그래도 많은 사람에 비하면 남의 유익을 구하는 말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아브라함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그는 말을 지혜롭게 했습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창세기 23:4)
아브라함은 남이 자기에게 빚진 것처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거저 달라는 뜻입니까? 돈을 주고 사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달라'고 표현했을까요? 상대방이 땅을 파는 것 자체가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낸다고 해도 상대가 팔기 싫다고 하면 어쩔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매매를 하면서도 상대에게 간청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는 본질을 꿰뚫어 보았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통찰이 없는 사람은 말을 지혜롭게 하지 못합니다.
말을 잘하려면 내면에 바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남이 나에게 빚졌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내가 남에게 빚진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말투는 완전히 다릅니다. 전자는 말이 거칠고 사람들의 반감을 사며, 결코 존귀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평생 헷 사람들과 교류하며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기에 그 내면에 지혜로운 지식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말도 잘했지만 상대의 말을 분별하는 귀도 가졌습니다. 상대방이 "마음대로 땅을 가져다 쓰십시오"라고 할 때, 진짜로 거저 넙죽 받으면 되겠습니까? 헷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존귀한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창세기 23:6)
만약 '잘됐다, 멀리 갈 필요 없이 그냥 이 묘실에 묻으면 되겠네' 하고 묻어버린다면, 존귀한 왕자가 아니라 쩨쩨한 왕자가 되고 맙니다. 공짜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 되는 순간 망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왜 여러분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까요? 조금만 틈을 보여도 덥석 물어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왜 아브라함에게는 그렇게 말했을까요? 아브라함이 결코 공짜를 바라지 않는 사람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말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손님에게 "어서 많이 드세요"라고 하셨는데 손님이 눈치 없이 다 먹어버려 정작 다섯 아이들이 굶게 되자, 손님이 떠난 후 "눈치도 없이 먹으란다고 다 먹니?"라고 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지혜가 없으면 비극입니다.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아야 합니다. 제가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저는 결코 남의 이득을 탐하지 않고 오히려 남에게 베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관계가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주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진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그가 그의 밭머리에 있는 그의 막벨라 굴을 내게 주도록 하되 충분한 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 당신들 중에서 매장할 소유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하매 (창세기 23:7-9)
이것이 말을 잘하는 태도입니다. 말을 못 하는 사람은 귀도 닫혀 있어서 "네, 좋습니다. 그럼 그거 쓰겠습니다"라고 해버립니다. 그러면 평생 쌓아온 이미지가 하루아침에 무너집니다. 아브라함은 "가격을 부르시면 충분한 대가를 치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어지는 대화가 흥미롭습니다.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에게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에게 드리되 내가 내 족속 앞에서 당신에게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창세기 23:11)
이 말의 속뜻을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들을 줄 아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중국인들만 이런 줄 아십니까? 유대인들도 똑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그 땅의 백성 앞에서 몸을 굽히고 그 땅의 백성이 듣는 데서 에브론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하건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 (창세기 23:12-13)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내 말을 들으소서 땅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그것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창세기 23:14-15)
가격을 제시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제시했습니다. 은 400세겔이면 싼 값입니까, 비싼 값입니까? 꽤 비싸게 부른 것입니다. 은 400세겔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재물이 넉넉했고 목축과 농사로 번성했기에 흔쾌히 지불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바가지를 쓴 셈이지만, 사람들은 평소에도 늘 아브라함에게서 이득을 취하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것을 챙기면서 그가 가난해질 줄 알았지만 아브라함은 갈수록 부유해졌으니,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꺼이 은 400세겔을 건넸습니다.
핵심은 여러분이 진정 존귀한 왕자인가 하는 점입니다. 헷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아브라함에게서 이득을 취해왔고, 그 소문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저 노인에게는 부르는 대로 챙겨도 다 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존귀한 왕자'라는 평판과 관련이 없겠습니까?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가 존귀한 왕자로 불리자 사람들은 물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부자가 되었습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당신에게서 이득을 챙겨가는데 어떻게 여전히 부유합니까?" 오늘도 뜯기고 내일도 뜯기는데 말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아직 아브라함 수준이 아니니 무작정 뜯기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존귀한 왕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내게는 하나님이 계시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사람들은 속으로 '하나님이 계셨단 말인가? 진작 알았으면 400세겔보다 더 부를걸'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왜 존귀한 왕자입니까? 그는 대단한 사람이었으며 돈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늘 부유했고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자들의 약을 바짝 올린 셈입니다. 재물을 좇지 않아도 부유했던 이유는 그 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양들은 기름지고 살이 쪘으며 헷 사람들의 양들은 비쩍 말랐다면, 아브라함의 양이 얼마나 비싸게 팔렸겠습니까? 양 몇 마리만 팔아도 금방 채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6. 존귀한 왕자 (2): 자신이 나그네요 거류민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스스로 나그네요 거류민임을 알지 못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갑절로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이민자들, 특히 1세대 이민자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일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제가 새벽 2시 이전에 자는 날이 거의 없다고 말씀드린 이유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저는 이 땅에서 나그네요 거류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잇속만 챙기려 든다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아무런 기득권이 없기에 갑절로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고백은 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거류민에 불과하고 세상의 재물이 노잣돈에 지나지 않는다면, 세상일에 지나치게 얽매이겠습니까? 재물을 가볍게 여긴다면 남들이 조금 손해를 끼친다고 해서 목숨 걸고 싸우겠습니까? 결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요 거류민이었으며, 더 나은 본향인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며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사모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젊은 날부터 구했던 바입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의 이름이 창대해졌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가 세상일을 무겁게 여겼습니까? 아닙니다. 세상일에 집착했다면 더 나은 본향을 찾는 것이 아니라 더 화려한 유골함을 찾는 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귀한 왕자는 자신이 나그네이자 거류민임을 압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 세상의 사소한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고, 존귀한 왕자가 되어 지혜롭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면의 논리 체계가 바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내게서 이득을 취하려 할 때, "가져가라"며 넉넉히 넘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아브라함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그가 그런 칭호를 얻게 된 배경에는 수많은 사람이 그의 것을 탐냈고 실제로 이득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여전히 부유했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 사기를 당하고 힘들어하는 분들은 벌어들인 돈이 결국 사라질 헛된 것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온전히 깨닫고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7. 존귀한 왕자 (3): 뼛속까지 강건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뼛속까지 매우 강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자신을 나그네라고 낮추었지만, 그의 내면은 나약한 자들과 달리 극도로 강인했습니다. 왜 강건할 수 있었을까요? 세상일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뼛속까지 강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일에 연연하는 사람은 결코 내면이 강건할 수 없습니다. 그의 내적 강인함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그의 성품의 핵심은 믿음, 곧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신뢰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기에 남에게 조금 뜯긴들 무슨 상관이 있었겠습니까? "내게는 하나님이 계신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손해를 조금만 보아도 속이 뒤집어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으니 조금만 일해도 억울해하고, 일은 안 하면서 남의 덕만 보려 하니 결국 존귀한 모습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8. 존귀한 왕자 (4): 일을 바르게, 잘 해낼 수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무예가 출중했고 전쟁에 능했으며 경영 능력이 탁월했고 소와 양을 치는 최고의 전문가였습니다. 공을 들이지 않고 어떻게 전문가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각고의 노력 없이 어떻게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경영을 훌륭히 해낼 수 있었겠습니까? 제가 왜 종종 사람들이 제 설교를 듣고 아편을 맞은 것 같다고 말할까요? 설교를 들을 때는 은혜를 받았다며 집에 가서 다시 드러누워 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인생을 초탈했다고 해서 드러누워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일을 바르게, 그리고 탁월하게 해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일을 제대로 해내려면 공을 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충분히 노력하고 계십니까? 턱없이 부족합니다. 어떤 이들은 일할 때 "빨리 대충 끝내고 치우자" 하다가 일을 그르칩니다. 양을 치면서도 "짜증 나고 냄새나네, 양이 또 똥오줌을 쌌네. 왜 하필 내가 있을 때 싸는 거야"라며 불평합니다.
아브라함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까요? 그는 아들을 훌륭히 양육했고 손자까지 가르쳤기에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도 모두 그런 탁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사람이 세상에서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복임을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수고 속에서 기쁨을 누리는 특징이 있었기에,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을 결코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9. 결론: 존귀한 왕자의 핵심
존귀한 왕자가 되는 핵심은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인생의 목적을 찾았습니까? 찾았습니다. 삶의 이유를 찾았기에 그는 수많은 사람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남들이 자기에게서 이득을 취해도 축복해 주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치를 명확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핵심은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저주를 내리시고, 그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십니다. 주변 사람들은 점차 한 가지 법칙을 깨달았습니다. "저 사람의 것은 함부로 탐내서는 안 된다."
이 원리를 깊이 깨달으셨습니까? 저 사람을 축복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저주하면 하나님이 치신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도 알고 있었을까요?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틈만 나면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나누었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23장에 이르기까지 아브라함은 사람들과 이 신앙의 체계를 끊임없이 공유했습니다. 남들이 손해를 끼쳐도 아브라함은 그들을 축복했고, 그를 해치려던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지극히 영적인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사명'을 입으로만 외치지만, 진정으로 사명을 품고 있습니까? 진정한 사명이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나타내어 존귀한 왕자가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아브라함을 본받으십시오. 이것이 진정으로 복을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찬양 한 곡을 부른 후 헌금을 드리겠습니다. 헌금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헌금하지 마십시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한 형제를 심방하러 타지역에 갔는데 참 착한 형제였습니다. 지하철 표도 끊어주고 며칠 동안 밥값을 자기가 내겠다고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제가 돈을 돌려주면 그 형제가 다시 돌려주기를 반복했습니다. 계속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정 그렇다면 이 돈을 하나님께 헌금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를 축복하니 그도 복을 받고, 그가 하나님께 드리니 또한 복을 받아 안팎으로 복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축복받을 일을 아끼지 마십시오. 우리 형제자매들은 헌금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교회는 돈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복 받을 일을 많이 행하십시오. 헌금 자체는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며, 헌금 행위 자체를 지나치게 크게 부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명을 품는 것이 핵심입니다! 저희 모임에는 불문율이 있습니다. 헌금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아직 헌금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헌금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저희와 함께 복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으며, 화인 사명 신학의 체계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때 비로소 헌금할 자격이 있다고 말씀드릴 것입니다.
다 함께 손을 들고 기도하겠습니다. 주 예수님, 저를 도우사 제 내면을 변화시켜 주시고 겉으로 드러나는 형상도 새롭게 하사 존귀한 왕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오늘 저를 도우사 제 안의 게으름과 이기심, 트집 잡는 악습을 다루어 주시고, 육에 속하고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를 깨뜨려 주옵소서. 진정으로 사명을 가진 자, 복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노니, 나는 하나님의 눈에 존귀한 왕자로 살아갈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