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引言
大家好,我们刚才讲了《玛拉基书》的第二章,发现咒诅不断地出现在《玛拉基书》里,从第一章到第四章都是如此,那大家有没有被吓住了?其实你不用害怕,但是你需要敬畏神,不敬神才真的是一件可怕的事。人没有敬畏的心,就不知道什么叫做怕,然后该怕的不怕,不该怕的非得怕,那就麻烦了。
Q1:老师,您周围有很多别的教会的朋友,请问您是怎么和他们相处的呢?或者说,我们应该怎么和别的教会的人相处呢?
其实说来话长,我也在不断地调整当中,那我朋友越来越少了,前年死了,去年又死了一个,都是得了癌症死的。当年我很希望他们能从癌症里面走出来。
在我服侍过的一些癌症患者,只要他们愿意悔改,很多人得了医治!可是有些人,我一告诉他这是咒诅,他就对我发火了,并怼我说:“你才活在咒诅当中!”当时我也很无奈,既然我解决不了别人的问题,也做不了什么,那就算了吧!
我跟这些人交往,我跟他们相处是正常的朋友关系,我就尽量别讲这些敏感的东西,因为你一旦讲了这些敏感的东西,那朋友就没得做了。所以大家可以稍微讲一讲,点一点,仅此而已!尽量别说人家。
但是如果他们出事了,有了问题,能告诉他们还是要告诉他们,希望他们能得到恩典。其实神在给人癌症之前,会给人很多信号,神一而再、再而三地提醒,但是人就是不听,最后变成癌症,比较麻烦。
我跟人家相处,通常分析人家的核心利益,如果这东西是人家的核心利益,那你千万别碰。如果人家的核心利益是自以为是,然后你说:“你为什么这么自以为是?”那你不就是没事找事吗?不要去碰!
那为什么分析别人的核心利益呢?目的就是我们做事要追求有果效,那没有果效的事就尽量不做。我们分析完了别人的核心利益,就明白了这是人家的“财路”,那“拦人财路如同杀人父母”,这可不是开玩笑的。
有一些东西大家尽量别坚持,我反对大家跟别人讨论神学的时候,跟人家争得面红耳赤。咱们教会就有一些新人,特别喜欢跟其他教会的基督徒争辩,其实这可不是个好习惯。原本自己“半桶水”,然后整得自己晕晕乎乎的,很辛苦的!我们不要干这些没有益处的事。
那凡事都要造就人,能造就咱们就好好造就,不能造就咱们就闭嘴不说,别瞎扯。
Q2:老师,活出生命和平安的约,意思是要谨守遵行吗?
这不单单是谨守遵行,利未人和祭司是一个特殊的群体,他们是单单侍奉神的人,所以他们就要教别人律法。我念给你听:
真实的律法在他口中,他嘴里没有不义的话。他以平安和正直与我同行,使多人回头离开罪孽。祭司的嘴里当存知识,人也当由他口中寻求律法,因为他是万军之耶和华的使者。(《玛拉基书》2:6-7)
大家读明白了吗?活出生命和平安的约,就是说因为你是个祭司,你要能够把神的话讲得明明白白,使许多人回头,离开罪孽。
Q3:老师,请再讲一下诫命是福分也是咒诅。
诫命分两种,一个是祝福,一个是咒诅,所有的诫命都是这么写的。你到公司会发现墙上经常挂着“要”和“不要”,比如“三要四不要”,就像我们以前唱的“三大纪律”,“八项注意”,大概就是这些东西。
所有的这些诫命都是双向的,比如你孝敬父母,在地上就可以长久,否则就受咒诅,在地上不长久。所有的诫命都是这么写的!如果你爱神,神向你守约施慈爱;你不爱神,神就追讨你的罪,自父及子直到三四代,这就叫诫命。
诫命就是你遵守是这样的结果,违背是那样的结果。但是祭司的责任可不是开口胡说八道,而是要把神的律法传得全备。
Q4:老师,以色列被掳到巴比伦之前,拜的多是有形的偶像,从巴比伦回来之后,拜的是无形的偶像,可以这样理解吗?
我告诉你,其实不是偶像不偶像的问题,而是里面过日子的心可恶。你过日子,过着过着,看到一个美女挺美,魂都被勾去了,结果就把美女搞来了,把自己的老婆给休了。所以说人要想过日子,那你就过吧!过着过着就过到咒诅里去了。
其实拜偶像是满足人所需要的,人为什么拜财神呢?因为他需要钱,并不是因为财神好玩。拜偶像的人都是追求过日子的东西,过得好就觉得整对了,过得不好就请一个神来拜。
有一个弟兄,他公司里的老板挺有意思,老板被竞争对手搞得生意不好了,于是就从外面请来一尊神,拜了那个神以后的第一月,我的天哪!拿了一百多万的单,生意很火爆。这个弟兄回来就跟我说:“老师,他拜那玩意挺神的。”大家听明白了吗?因为他要的是钱。
如果你要的是爱神,会因为生意不好而整一个偶像回来吗?不会的!所以我跟你讲,不要说偶像有形还是无形,没有太大意义,关键你是爱世界还是爱神?过以神为中心的生活,还是过以自己为中心的生活?
世上的人想过好日子很正常,但是基督徒每天都想过好日子,那就有点危险。千万别搞错了!过好日子不是我们基督徒的核心利益,也不是我们基督徒应当追求的,但是因为爱神,活在祝福当中,所以我们日子过得肯定不错。
像我们当中有个人,去年还有十多万的债,也不知道现在还完了没有,但为什么老是以过日子为中心,最后都可惨了。咱们弟兄姐妹,好好地琢磨一下我讲的,至于偶像是有形的还是无形的,这东西不重要。
我们这次的答疑就到这,愿神祝福大家!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말라기》 2장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책이 《구약》에 속해 있다고 해서 지금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그것은 매우 터무니없는 이해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하나님이시자 《신약》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약》의 그 하나님을 밀어내듯 교체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영원히 바로 그 한 분 하나님이시며,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약》이 말하는 계명과 율법을 온전하게 이루려 하신 것입니다.
《말라기》는 많은 저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 역사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저주의 결과입니다. 왜 저주가 되었을까요?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이 하나님은 여러분이 온전히 믿고 섬기며 여호와께 성결하게 구별되든지, 아니면 아예 건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장의 주제는 바로 “너희의 복을 저주로 바꾸리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셨고, 또 이삭, 야곱, 모세, 다윗을 택하셨지만, 후에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은 하나씩 차례로 멸망했습니다. 나라가 망한 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말라기 시대에 그들은 어떤 상태가 되었을까요?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데려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지 않았고 결국 그 무엇을 해도 소용이 없게 된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저주 가운데 살고자 한다면 아주 간단합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 됩니다! 하지만 축복 가운데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결코 장난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는 직분도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이미 은혜를 입어 구원받았다고 절대 착각하지 마십시오. 얼마나 많은 복이 저주로 변했는지 아십니까? 이 계명은 우리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은 “그것은 《구약》이고, 《신약》에는 이제 계명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누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여러분 중 하나님의 큰 계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가장 큰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둘째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일, 자기 자신,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더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이 계명에 대해서는 “에이, 됐어! 그게 밥 먹여 주나?”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이 말을 내뱉는 순간, 저주를 받지 않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계명을 전하시다
사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매우 위대하고 복된 직분을 레위인들에게 주셨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는 레위인이었고, 모세의 형 아론과 그의 자손들은 모두 제사장의 직분을 맡았습니다. 사실 제사장의 수입은 일반 백성의 두 배였으며, 그들은 오직 여호와께 성결하게 구별되어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을 레위인들에게 전하셨고, 레위인들과 맺은 언약을 ‘레위의 언약’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그들이 온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수입은 적지 않았고 일도 그리 힘들지 않았지만, 그들은 계명을 짓밟아 버렸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저주를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께 다시 한번 일깨워 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명분은 장난이 아니며, 복을 저주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라”(《말라기》 2:1-2)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유대인들, 레위인들을 저주하셨고, 그들은 이미 저주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저주 가운데 살고 있다면 스스로 그것을 알까요? 제 생각에는 모를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선지자 말라기가 와서 그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말라기와 여호와께서 “내가 이미 너희를 저주하였고, 너희의 복이 저주로 변하였다”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누군들 다 그렇게 살지 않는가? 나는 옆집 사람보다 더 나은데!”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이렇습니다. 이 계명이 복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 생명과 평강의 언약인데도 그 직분을 잘 감당하지 못하여 결국 저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시대는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이들은 “아, 지금은 은혜의 시대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은혜를 보았습니까? 저는 정말 너무나 놀랍습니다.
사실 제가 왜 교회를 세웠겠습니까? 지금 많은 교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세워 이 일을 바로잡고자 한다면 그 과정은 매우 어렵습니다! 저도 이전에는 교회를 세우다가 결국 제 자신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저는 얼른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계명을 전하신 것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면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전한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말라기》 2:4-7)
정말 훌륭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계명을 제사장에게 전한 것은 좋은 일일까요, 나쁜 일일까요? 여러분께 말씀드리지만, 비할 데 없이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이 일말의 자기 통제와 절제도 없이 자신의 이런 정욕과 사욕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은 《신약》에 저주가 없다고 절대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을 읽지 않고 어떻게 알겠습니까? 《로마서》 끝부분에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큰 계명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주 비참해집니다!
저는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듭니다. 제 주변에는 많은 그리스도인 친구들이 있는데, 어떤 이는 교회의 장로이고, 교회의 리더이며, 또 어떤 이는 목사입니다. 저는 그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주 단순하고 명백하게 저주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번 묻겠습니다. 암은 저주입니까, 축복입니까? 그들은 “그것은 위장된 축복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조금 주신다면 받으시겠습니까? 당연히 원치 않을 것입니다! 저주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에게 계명을 전하셨는데, 만약 우리가 삼가 지켜 행하지 않고 바른길에서 벗어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레위인과 세우신 언약을 파기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언약을 파기한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신실하시지만, 사람은 늘 거짓됩니다!
저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수많은 제사장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전하는 말이 매우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며 몹시 흥분합니다! 그러나 가져다가 분석해 보면 온통 엉터리 말뿐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살아내야 하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손을 가슴에 얹고 가슴을 치며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이 복을 저주로 바꾸어 버리지 않았는가?’ 훗날 제가 교회를 세우면서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은, 제가 담대히 여러분에게 요구할 수 있었고, 여러분 또한 기꺼이 저의 요구를 따라와 준 것입니다.
사실 화인명정신학(중화권 사명 신학)의 요구는 기준이 다소 높은 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곳에 왔다면 요구대로 행해야 합니다.
계명은 복이자 저주이다
《신명기》, 《레위기》, 《출애굽기》, 《민수기》, 《창세기》를 읽어 보십시오. 다 읽고 나면 모세가 두 가지 주제를 썼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축복이고, 다른 하나는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만약 당신이 삼가 지켜 행하면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요, 삼가 지켜 행하지 않으면 반드시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돈을 사랑하면 저주를 받을까요? 당연히 저주를 받습니다!
후에 저는 사람이 매우 쉽게 속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유난히 잘 속는데, 속을 때는 오직 돈 벌 생각만 하느라 머리가 저주로 꽉 막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는 그 열정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쓴다면 문제는 아주 쉽게 풀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당신이 계명을 받아 그것이 축복이 될지 저주가 될지는 당신 하기에 달렸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살아가다 보면 저주 속으로 빠져들어가기 마련인데, 그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자주 일깨워 줍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승복하지 못하고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저는 이미 하나님을 많이 사랑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이런 말을 하는 순간 틀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한 당신의 판단과 하나님이 당신을 보시는 판단 사이의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하나님을 몹시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여기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원히 사랑해도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더 많이 사랑합니까? 제가 보기에 당신은 돈을 더 사랑합니다. 그러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어떤 사람이 필사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누가 당신의 손에서 하나님을 빼앗아 갈 수 있으며, 누가 당신 안에 저주를 밀어 넣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계명은 축복이자 저주입니다. 사실 이 말은 제가 한 말이 아닙니다. 《신명기》 28장 1-14절은 축복을 말하고 있고, 15-64절은 온통 저주만을 말하고 있으니 비교해 보면 매우 분명합니다. 자기가 지은 집에 자기가 살지 못하고 남에게 사기당해 빼앗기며, 자기가 맞이한 아내가 다른 사람과 동침하고, 자기가 심은 것을 자기가 먹지 못하고 남에게 주는 것과 같습니다. 아, 전부 저주입니다!
제가 간곡한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깨어나십시오! 그 큰 계명을 힘써 지켜 행하십시오! 이 계명은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말씀조차 듣지 않는다면 무엇을 듣겠습니까?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이 영원히 지속되게 하신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이 축복이자 저주가 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영원히 지속되게 하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도 이 언약은 폐해질 수 없으며, 영원히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은 언제나 유효하다는 뜻입니다. 설령 당신이 이 언약을 어겨 복을 저주로 바꾸어 버렸다 해도, 그것 역시 이 언약의 일부이므로 이 언약은 영원히 유효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구약》이라고 절대 말하지 마십시오. 저는 정말 많은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이렇게 신실하신데, 많은 사람이 이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심지어 《신약》에도 저주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저주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기어코 우겨댑니다. 아이고! 그 어리석음이란! 이 장을 다 읽고도 저주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단순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이 영원히 지속되게 하시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의 계명에 비추어 보며 이것은 저주이고 저것은 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은 이 일을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며, 지각에 있어서 조금씩 향상되어야 합니다.
보십시오. 사람은 감정이 올라오고 화가 치밀면 지능이 0이 되어 버리고, 언약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온갖 말을 함부로 지껄입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비단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남이 당신을 한번 건드려 보라고 해보십시오. 아니면 쓰촨의 매운맛 아가씨들을 한번 건드려 보시겠습니까?
후난의 매운맛 아가씨들도 건드리면 안 됩니다! 후베이의 아가씨들, 동북의 아가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건드리고 나면 정말이지 대단히 사나워집니다. 쓰촨 말로 싸우는 것은 고사하고, 싸우지 않을 때도 쓰촨 말은 꽤 거칠고 억셉니다. 우리 동북 출신 형제 하나는 “완전 사나워!”라고 하더군요. 아마 자기 아내를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언약이 영원히 지속되게 하신다는 것은, 이 언약이 영원히 유효하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잃고 집안이 망했다고 해서 이 언약이 효력을 잃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언약이 여전히 효력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암에 걸렸다면 이 언약이 아주 잘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기를 당했다면 이 언약이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집트인들에게 내리신 질병, 곧 마귀의 그 모든 것들이 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더해질 것입니다. 아직 이집트인들에게 내리지 않은 질병까지도 이 사람들에게 더해져 복이 저주로 변하게 될 텐데,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니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여담으로 여러분께 조금 말씀드리자면, 저는 관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가 현지 교회들을 관찰하고 나서 발견한 것은 교회 안에 저주가 유난히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에 영원히 굳게 서서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 이전에는 자만하여 교회를 세우자마자 저주에 얽매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이 언약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제사장이 율법에 있어 사람의 낯을 보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직분은 바로 사람들에게 요구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제사장은 마땅히 요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느헤미야 같은 사람은 담대히 요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사람은 요구를 받을 때 유익합니다.
보십시오. 느헤미야와 말라기는 거의 동시대 사람입니다. 말라기가 이 백성들에게 요구하자 그들은 순종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복을 받았습니다. 훗날 저도 이 법칙을 터득했습니다. 교회를 세울 때는 반드시 요구 수준을 높여야 하며, 하나님의 기준까지 높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걸 누가 도달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본래 여러분은 도달할 수 없지만, 그것이 목표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비록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그 목표를 향해 조금씩 발전해 갈 수 있습니다. 만약 단번에 도달해 버리고 만족해한다면, 그것은 저주받는 것에 만족하는 꼴입니다.
예를 들어 100미터 달리기를 할 때, 만약 목표가 100미터에 30초라면(1초에 3미터 남짓 달리는 것이라면) 수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다 우승할 수 있습니다. 너무 쉽게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요구를 제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고는 “내가 100미터를 30초에 달리는데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면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요구 수준을 낮추는 것이 비극임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일전에 몇몇 목회자들에게 교회를 세우는 아주 좋은 비결이 있는데, 바로 요구 수준을 아주 높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회자는 “그건 불가능합니다!”라고 하더군요. 이 말을 들어보십시오. 본래 불가능한 것이 맞지만, 그래도 요구 수준을 높게 제시해야 합니다. 요구 수준을 낮추는 순간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율법에 있어 사람의 낯을 보아 편벽되이 행하게 되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교회가 성도를 필요로 하니, 제사장은 자신이 바른말을 했다가 성도가 떠나갈까 봐 걱정하는 것입니다. 저라면 떠나는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우리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없는데 우리 곁에 머물러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니 반드시 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요구해야 할까요? 그것이 제사장의 책임이며, 율법에 있어 편벽되게 사람의 낯을 보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헌금을 많이 하면 책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헌금을 적게 하면 호통을 친다면, 그것이 어찌 율법이겠습니까?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에서는 제사장이 율법에 있어 사람의 낯을 보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문제가 생겨 제사장에게 판결을 받으러 오더라도, 그 사람이 고관임을 보면 감히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본문의 유다인들은 사실 그 왕족과 귀족들을 가리킵니다. 말라기 시대에 유다 백성 가운데는 여전히 많은 귀족 계층이 있었고, 그들은 실권을 쥐고 이 땅 저 땅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니 제사장이 감히 그들을 관할할 수 있었겠습니까? 제사장이 그들을 책망했다가는 목숨이 날아갈 판이었습니다! 이 유다인들은 매우 위세가 등등했는데,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에서 벗어나게 하고 바른길에서 치우치게 하여,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걸려 넘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제사장은 멸시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더럽히다
제사장은 율법을 받은 자로서 유다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더럽히는 것을 보았지만, 감히 책망하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수많은 선지자들은 바로 이러한 일들 때문에 목숨을 잃었는데, 그러니 어찌 감히 책망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사야서》의 선지자 이사야는 허리가 잘려 순교했습니다. 그가 유다인들을 심하게 책망했기 때문에 결국 유다 현지의 귀족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들을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유다의 귀족들은 속으로 ‘네가 감히 내가 저주 가운데 산다고 말해? 저주 가운데 사는 건 바로 너다! 내가 내일 당장 너를 저주 속에서 살게 해주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는 선지자를 죽여버렸으니, 제사장 노릇하기가 쉽겠습니까?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 유다인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더럽혔을까요? 그들은 이방 신을 섬기는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했을 뿐만 아니라, 조강지처를 내쫓아 버렸습니다. 사실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율법이 있었지만, 돈만 있으면 율법을 꽈배기처럼 비틀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사람은 이야기를 지어내는 데 아주 능하여 어떻게 설명하든 스스로 정당하게 들리도록 만듭니다. 지금과 달리 그 시대에는 여전히 남자가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현대에는 집안에서 남자의 말이 절대적이지 않고 어떤 아내는 남편을 내쫓기도 합니다. 비록 그런 확률은 적지만, 이혼하여 재산을 가로채는 이야기는 아주 흔하며 결국 온통 궤사만을 부릴 뿐입니다.
유다의 고관대작들은 아내를 내쫓았을 뿐만 아니라 재산도 나누어 주지 않고, 온갖 궤계로 이 일을 처리해 버렸습니다! 이처럼 유다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더럽혔지만, 제사장은 이 일을 전혀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저주를 받고도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탓하다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말라기》 2:17)
이스라엘 땅에서 그들이 행한 것은 실로 부패하기 짝이 없었고, 불의한 일들이 매일같이 밥 먹듯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 공의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라고 말했습니다.
부자들이 저주를 받았을 때, 그 시절에는 암이라고 부르지 않고 불치병이라 불렀을 것입니다. 어떤 병에 걸려 온갖 방법을 써도 낫지 않자 그들은 “공의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정리를 아주 잘해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섬겼던 암 환자들은 모두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매우 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단지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는데, 이는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며, 자신이 좀 부족하다고 느낄 때조차도 스스로는 꽤 괜찮다고 여깁니다.
제가 사람들을 섬길 때 저 역시 말이 매우 날카롭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저도 다 옳은 것은 아니고 상대방도 제게 체면을 차려주지만, 그들 역시 자신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으면서도 입으로는 여전히 완강합니다. 사실 저나 여러분이나 피차일반이지만, 물귀신처럼 남을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고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한두 사람의 특별한 예외라고 절대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닙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저주를 받고도 스스로를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탓합니다.
가난한 자도 돈을 사랑하고 부자도 돈을 사랑하여, 사랑하고 또 사랑하다가 결국 저주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고는 하나님을 탓하며 “하나님, 왜 저를 막아서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저주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 저주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셨는데, 당신은 도리어 하나님을 탓하며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사람에게 임할 때, 사람은 알아차리고 하나님과 다투려 하지 말아야 하며, 먼저 자신을 살피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지난 장의 주제는 “잘못된 헌금 태도가 저주를 부른다”였고, 이번 장은 제사장이 너희의 복을 저주로 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온 백성이 저주 가운데 살았고, 후에 이스라엘은 집 잃은 개 같은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서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식민지였고, 그 후 수십 년 만에 로마 제국은 이 성전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시며, 그것은 단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좀 깨어나셨습니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이것이 저주임을 자주 말하며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욥조차도 잘못 생각했었습니다. 욥은 처음에 자신이 매우 옳다고 여겨 하나님과 시시비비를 따졌지만, 옥신각신하다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자 문득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잘못 행했구나.’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내가 잘못했다”는 고백이 바로 황금률입니다. 사람은 저주 가운데 사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회개하기만 하면 저주에서 벗어나기란 매우 쉽습니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저주 가운데 살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의롭고 선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끝장입니다.
여러분은 저승사자가 좌우에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서야 회개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때가 되면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아직 온전한 상태에 있을 때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이번 성경공부 나눔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