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여러분에게 나눌 아주 좋은 주제는 바로 “기쁨의 지혜”입니다. 지혜가 없으면 기뻐하기가 참 어렵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어리석은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지혜가 없으면 기뻐하기 어렵기에, 오늘 우리는 기쁨의 지혜를 얻고자 합니다. 이것은 《전도자의 언어》 시리즈의 열한 번째 강의입니다. 이 제목이 별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해 제목을 잘 못 정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목도 어느 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앞으로는 최소한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도록 제목을 잘 짓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기쁘게 사는 경우가 많지 않고, 공연히 문제를 사서 만드는 사람이 유독 많습니다. 사람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보십시오. 이미 얻은 것에 대해서는 당연하게 여깁니다. 제가 말씀드리건대, 우리 가운데 있는 목회자들을 포함해 온몸에 온통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을 얻었을 때는 기뻐하지 않고, 얻지 말아야 할 것을 원하다가 얻지 못하면 몹시 불행해합니다. 제가 발견한 것은, 사람이 불행해지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일이지만, 기쁘게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들이 자기를 존귀하게 여겨 주기를 바랍니다. 남들이 자기를 높여 주기를 바라는데 남들이 높여 주지 않으니, 또다시 높여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무슨 자격으로 존중을 받아야 하는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돼지처럼 게으르고, 돼지처럼 미련한데 사람들이 어떻게 그를 존중해 줄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저팔계처럼 살면서 손오공이 자기를 존경해 주기를 바란다면, 손오공이 그를 존경할 수 있겠습니까? 손오공은 저팔계를 존경하기 어렵습니다.
그러고는 불평합니다. “아, 이 집안에서 왜 다들 나를 존중해 주지 않지?” 남들이 무슨 이유로 당신을 존중해 주겠습니까? 당신이 베푼 것이 얼마나 됩니까? 남의 것을 탐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데, 남들이 자기를 높여 주기까지 바라다니요. 어떤 사람들은 남들이 자기를 인정해 주기를 바라면서도, 자기가 무슨 자격이 있는지는 묻지도 않습니다. 남들이 자기를 얕보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지 않습니까?
저는 제게도 장점이 여럿 있다고 생각하지만, 남들이 저를 얕보아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남들이 무슨 이유로 나를 대단하게 보겠는가? 나를 대단하게 볼 필요도 없고, 나 또한 그것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 제가 강단에서 설교할 때 밑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어도 ‘저 사람이 무슨 이유로 휴대폰을 안 보겠는가? 설교 듣는 것보다 휴대폰 보는 게 더 중요하겠지’라고 생각하며 굳이 불쾌해할 필요가 없다고 여깁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별일도 없는데 공연히 많은 사연과 문제를 만들어 내니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사람에게 정말 부족한 것이 있다면 바로 ‘기쁨’입니다. 그리고 더 부족한 것이 있다면 바로 ‘기쁨의 지혜’입니다. 이 세상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있어도 기쁘지 않고,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졌는데도 기쁘지 않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기괴한 일입니다. 목사로서 가장 많이 보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불행(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가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가 “무슨 일입니까?”라고 물으니 부모가 돌아가신 것처럼 울었습니다. 자매가 말하기를 “목사님, 저 아직 처녀예요”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결혼한 지 두 달인데 아직 처녀라니요. 제가 “그럼 잘된 것 아닙니까?”라고 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건대, 목사로서 가장 많이 접하는 문제는 불행입니다. 기쁜 사람들은 저와 나누지 않습니다.
교회 안의 한 형제와 자매가 뜨겁게 연애할 때, 그들은 그 기쁜 시간에 저를 참여하도록 부른 적이 없습니다. 기쁜 일은 아무도 저와 나누지 않습니다. 그러다 둘이 싸우기만 하면 찾아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여러분 기쁠 때는 왜 저를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목사라는 직업이 바로 이런 일을 하는 자리입니다. 느끼셨습니까? 목사가 하는 일이란 바로 문제를 해결하는 일입니다.
다행히 저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만약 문제 해결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제가 이 일을 얼마나 불행하게 했겠습니까? 저는 불행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도전적인 직업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미국 대통령이고 다른 하나는 목사입니다. 목사의 가장 큰 도전은 바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다 불행하다는 점입니다.
가톨릭에는 고해성사실이 있고, 그 뒤에는 신부님이 있습니다. 신부님들은 정말 많은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거기서 속삭이는 이야기들을 뒤에서 신부님이 다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저는 하나의 요령을 터득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행하고 괴로워서 저를 찾아와 이야기하려 할 때, 저는 “잠깐만요, 멈추세요. 저는 구체적인 세부 사항은 알고 싶지 않으니, 대략 어떤 부분 때문에 불행한지만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됩니다”라고 합니다. 그런 세부적인 일들을 다 듣고 있으면 머리가 너무 복잡해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요약해 낸 단골 3가지 문제는 바로 ‘육신의 생각을 좇음, 세상을 사랑함, 선악을 분별함’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불행을 해결하는 전문 치료사가 되었습니다. 온갖 불행을 전문으로 해결하고, 온갖 불쾌함을 치료하는 클리닉을 연다면 제 사업이 꽤 잘될 것 같습니다. 만약 수십 년 전에 전화 상담 채널을 열고, 시간이 지나 인터넷 채널로 업그레이드했다면 분명 대박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고해성사실 같은 것도 열었겠지요.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육에 속하면 반드시 불행해집니다. 세상의 것들을 좇다가 얻지 못하면 반드시 불행하고, 얻어도 불행합니다. 선악을 분별하기 시작하면 반드시 불행해집니다. 별일도 아닌데 문제를 사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쁨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원하는 것은 얻지 못하고, 원치 않는 것은 생겨 봐야 헛됩니다. 원한다고 해서 다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벌고 싶었지만 결국 돈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쁠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1억이라는 작은 목표를 세웠는데, 1억은커녕 숫자 1만 남았다고 해 봅시다. 1억과 1은 1억 배의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해야 기쁠 수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살고 싶어 하지만 죽을병에 걸립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답답하겠습니까? 치료받고, 씨름하다가 결국 고통 속에 죽어 갑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생각합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불행하게 죽어가니 너무나 안타깝고 괴로운 일입니다.
우리 가운데 한 자매님이 최근에 아주 깊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이 자매님에게 아이가 하나 있는데, 어릴 때부터 머리가 썩 좋지 않았지만 예술을 배우고 싶어 했습니다. 아마 춤이었던 것 같습니다. 춤이었으니 다행이지 투신이라도 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 레슨비가 시간당 1,000위안씩 들어서 어머니가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습니다. 아주 비쌌습니다.
우리 중에도 경험해 본 형제자매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 경험의 대가는 매우 비쌉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지금까지도 본전을 건지지 못했고, 그러면서도 늘 엄마에게 “내가 엄마 돈을 얼마나 썼다고 그래요”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엄마 속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원래 직장이 있었는데 정규직에서 파트타임으로 바꾸어 버렸으니 엄마는 속이 타들어 갔습니다. 4대 보험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논리는 무엇입니까? “정규직으로 매일 출근하면 6,000위안이지만, 일주일에 사나흘 일하면 4,000위안을 받잖아요.” 엄마는 홧병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어머니 입장에서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수지맞지 않는’ 아이를 키운 것입니다. 우리 중 복건(福建) 사람들은 ‘부화(不划, 수지맞지 않다)’라고 표현하는데, 손해라는 뜻입니다. 손해 보는 아이를 키웠는데, 아이도 자기가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두 사람 모두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엄마는 아이에게 출근하라고 닭달하고, 아이는 출근하기 싫다고 하니 온갖 문제가 생겨납니다.
최근 우리 목회자들의 섬김과 기쁨의 상담을 통해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다 깨달았습니다. 더는 괴로워하지 않겠습니다. 아이의 인생은 아이의 인생이고, 아이의 운명이 그렇다 할지라도 제 기쁨을 잃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이 기쁨의 사역을 훌륭히 해낸 우리 목회자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목사로서 말씀드리자면, 반드시 불행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이 기쁨의 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기쁜 사람인지 아십니까? 잘 모르실 수도 있습니다. 오늘 스스로 시험을 한번 해 보십시오. 실험을 해 보면 베푸는 자가 기쁘고, 얻기만 하는 자는 기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원래는 얻었을 때 기뻐해야 할 것 같지만, 얻고 나면 그 당시 몇 분 동안만 기쁠 뿐 지나고 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전에 저는 캠핑카가 있어서 여행을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아주 젊었을 때 운전면허를 따고 사흘 만에 차를 샀습니다. 바닷가로 소풍을 가려고 텐트와 피크닉 도구, 작은 테이블과 의자까지 사서 트렁크에 딱 싣고는, 바닷가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장비를 딱 한 번 쓰고는 다시는 가지 않았습니다. 장비는 완벽하게 갖추었지만 한 번 가보고 나니 별 의미가 없었고, 나중에는 쓰레기가 되어 버렸으며 중고로 팔려고 해도 아무도 사 가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얻었습니까?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목사로서 사람들의 문제를 자주 해결해 주는 것이 정말로 기뻤습니다. 눈이 먼 한 형제가 있었는데, 제가 기도하여 낫게 되었습니다. 그가 저를 만나러 왔을 때 제가 그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정말 기뻤습니다. 그 기쁨은 오늘날까지도 제 안에서 아주 아름다운 기쁨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베풀라고 했다고 해서 절대로 집을 남에게 주지는 마십시오. 몇몇 노인분들처럼 집을 자녀에게 다 주었다가 쫓겨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것은 큰일 날 일이며 어리석은 짓입니다. 제가 주는 기쁨의 지혜를 말했더니 그만 바보가 되어 머물 곳이 없어졌다고 “목사님, 제가 갈 곳이 없습니다”라고 해도 저는 집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베푸는 것은 기쁨이며, 베풂은 기쁨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도 집을 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그가 굶주리면 먹을 것을 주라고 했으니 5위안짜리 국수 한 그릇이면 족합니다. 입을 옷이 없으면 옷을 조금 주면 되는 것이며, 그뿐입니다. 그의 도박 빚을 갚아 주라거나 마약 빚을 갚아 주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베풀려거든 가장 좋은 것은 지혜를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배우는 교회입니다. 왜일까요? 지혜를 얻고 명철을 얻으며 하나님을 아는 것은 모두 배움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기쁨조차도 배우는 것입니다! 저는 기쁨이 넘치는 목사이며, 여러분에게 기쁨을 전해 주고 싶습니다. 저는 기쁨의 교회를 세웠고, 베푸는 교회를 세웠습니다.
우리 교회는 재물을 긁어모으지 않습니다. 헌금을 하더라도 헌금의 의미를 모른다면 헌금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오늘 저는 이 점을 강조해야겠습니다. 헌금의 의미를 모르면 자격이 없습니다. 배워야 하고, 똑똑해져야 하며,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기쁨의 지혜를 주는 것입니다.
예전에 저는 기쁨의 목사로서 마구 베풀었지만, 결과적으로 이기적인 자들만 잔뜩 끌어모았습니다. 통닭, 오리구이, 햄, 둥베이 당면 등 매주일 맛있는 음식을 잔뜩 준비했더니 식탐 많은 먹보들만 모여들었습니다. 다 먹고도 많이 남으니 저마다 포장해 갔습니다. 어떤 자매에게는 기숙사 친구들과 나누어 먹으라고 싸 주면서, 먹보들이라도 더 많이 오기를 바랐습니다. 그때는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하여 돈도 쓰고 힘도 썼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매의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 돋았습니다. “왜 이렇게 여드름이 많이 났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자기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매주 포장해 간 그 소고기 장조림에 온갖 향신료를 넣고 끓여 일주일 내내 먹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제가 주일에 베푼 음식이 그녀를 일주일 내내 먹여 살렸는데, 매일 먹다가 여드름이 나서 얼굴을 다 망쳐 놓았으니 제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 후로 저는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모두가 기뻐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베푸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는 베푸는 교회이며, 베푸는 교회는 헌신하고 섬기는 교회입니다. 오늘 《전도서》 11장을 나누는데, 여러분은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전도서》 11장은 우리에게 기쁨의 지침을 주며, 어떻게 하는 것이 기쁨인지를 알려 줍니다. 불행한 것은 정상입니다. 사람들은 얻는 것이 얻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으며, 베풀어야만 비로소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전도서 11장 8절부터 10절: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할지로다 다가올 일은 다 헛되도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네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 (전도서 11:8-10)
기도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기쁨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건강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번성입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를 부패하게 만드는 육체에서 건져 주시고, 우리를 망치는 이기심에서 건져 주시며, 우리를 무너뜨리는 미련함에서 건져 주셔서 이 기쁨의 지혜를 얻게 하옵소서.
주여,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지혜요,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게 하옵소서.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이 지혜와 능력을 얻게 하시고,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주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나타내며 살게 하옵소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계획이 성취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배경
솔로몬은 평생 재물을 모았고, 성전을 짓는 데 수백 톤의 금을 썼으며 금으로 바닥을 깔고 수많은 토목 공사를 벌였습니다. 성전을 짓고 자신의 궁궐도 지었으며 후궁이 3,000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큰 실험을 통해 기쁨을 얻고자 했습니다. 다들 기억하십니까? 그러나 기뻤습니까?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를 이었을 때 진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솔로몬이 궁궐을 지을 때 감독관들은 채찍을 들고 일하지 않으면 때렸습니다. 묻겠습니다. 채찍에 맞아 죽은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성경에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아들 르호보암은 그의 아버지 솔로몬이 노예 사회에서 사람들을 노예처럼 채찍질하며 부렸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지주 악덕배가 따로 없었습니다. 바로 솔로몬이 사정없이 채찍을 휘둘렀고, 게으름을 피우면 때렸습니다. 맞아 죽은 사람이 있었을까요?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노예 하나 죽는 것이 무슨 대수였겠습니까? 집에는 처자식이 있었을 텐데요. 노예가 어디 가서 하소연을 하겠습니까? 매우 잔혹한 통치였습니다. 솔로몬이 침상에 누웠을 때 기뻤겠습니까? 그가 시찰을 나가서 둘러보았을 때 잔혹한 감독관들을 많이 고용했으니 참으로 덕이 없었습니다.
3,000명의 궁녀가 날마다 궁중 암투를 벌이는데 기쁠 수 있겠습니까? 3,000명 규모의 교회를 목회해도 얼마나 문제가 많겠습니까? 그런데 3,000명의 궁녀가 매일 판결을 요구하지 않았겠습니까? 온갖 궁중 암투극이 날마다 벌어졌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방의 애굽 공주, 시돈 공주 등 온갖 나라의 공주들과 정략결혼을 했습니다. 기뻤을까요?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대단히 실패한 실험을 했고, 늙어서야 비로소 기쁨의 지혜를 깨달았습니다. 실패한 실험을 했으니 얼마나 미련합니까? 그래서 그는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라”고 말했지만, 정작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기쁘지 못했습니다.
중국에도 강희제라는 황제가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황제가 되어 오배(鳌拜)와 권력 다툼을 벌였는데, 결코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늙어서 강희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평생 고생했다.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자지 못했고, 수많은 상소문과 씨름하며 하늘과 싸우고 땅과 싸우고 신하들과 싸우고 지방관들과 장군들과 싸웠다.” 솔로몬 같은 사람의 일생을 보면 지혜가 있는 것 같았으나 헛됨 속에서 보냈습니다.
“청년들이여, 너희는 어린 때를 즐거워하라”고 한 것은 누구를 두고 한 말입니까? 바로 자기 자신을 두고 한 말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가 남을 두고 한 말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솔로몬은 본래 아주 준수하고 똑똑한 청년이었지만, 늙어서야 자기가 잘못 살았고 육체의 쾌락만을 좇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뭐라고 말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셨습니까? 심판하셨습니다. 노년에 쓴 책이 《전도서》인데, 무슨 도를 전합니까? ‘아, 내 평생은 이미 심판을 받았구나. 참으로 고달팠고, 마침내 보응을 받았구나.’ 그것은 다 보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전도서》 11장을 쓸 때 남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쓴 것입니다.
그는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베풀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베풀었습니까? 솔로몬은 자신의 떡을 물 위에 던졌습니까? 제가 보기에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땅히 던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은 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 떡을 물 위에 던지라고 합니까? 물이 흘러가 굶주린 자들이 밥을 먹을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라.” 당신은 계속해서 거두어들이기만 하고, 계속해서 이기적일 수 있습니다. 얻지 못할 것을 얻으려 하고, 얻지 말아야 할 것까지 얻으며 전혀 베풀지 않아 보십시오. 재앙이 반드시 닥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기적인 사람에게는 반드시 재앙이 임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얻을 생각만 하며, 심지어 남편을 만나고 아이를 낳는 것까지 이해타산을 따져 이익만을 계산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솔로몬이 얻어 낸 경험이며, 늙어서야 점차 깨달은 것입니다. 후회스럽지 않겠습니까? 후회스럽습니다. 결코 늙고 쇠약해진 날이 이르러서야 ‘아, 내가 평생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지 못하고 마귀의 모습만 나타냈구나’ 하고 후회하지 마십시오. 거울을 보니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를 지경이고, 돈을 다 성형수술에 썼는데 늙어서 다 무너져 내리는 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설계가 바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어떤 분이 저에게 “목사님, 이 구절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땅에서 수증기가 올라가 값없이 내어주면, 하늘에 비가 모여 다시 내립니다. 어디에 내립니까? 다시 이 땅 위에 내립니다. 즉, 당신이 내어준 것 같지만 결국 당신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사람이 왜 가난합니까? 베풀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내어주지 않는데 하늘에 어떻게 구름이 생기겠습니까? 구름이 없는데 어떻게 비가 내리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베푸는 것은 땅의 수증기가 올라갔다가 비가 되어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기적인 곳에는 재앙이 임하고, 이기심이 큰 곳에는 재앙이 많으며 하늘도 가물게 됩니다.
게으름에 대해 핑계를 대서도 안 됩니다.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 베풀라고 하면 “그건 안 돼요, 제 형편이 안 됩니다”라고 합니다. 기쁨을 나누어 주는 것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지혜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남에게 지혜를 주는 것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베풀지 않고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서 온갖 핑계만 대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대체 이것이 무슨 논리인지 이해하기 힘들어합니다. 베푸는 기쁨이라니, 주어 버리면 없어지는 것인데 10위안에서 1위안을 주면 9위안밖에 남지 않지 않느냐고 합니다. 초등학교 공부는 제대로 안 했어도 이런 셈은 아주 밝습니다. 공부를 못해도 10위안과 9위안은 기가 막히게 구분합니다.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하나님의 역사를 알지 못합니다.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해야 하지만, 또한 캄캄한 날들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날들이 많을 것이며 다가올 일은 다 헛되기 때문입니다.
불행의 근원은 바로 베풀지 않는 것입니다. 불행의 근원은 육에 속한 것입니다. 불행의 근원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행의 근원은 헛되고 헛된 것임을 알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많이 말씀드렸으니, 돌아가셔서 본문을 다시 깊이 읽어 보십시오. 《전도서》 11장 원문이 제가 설교하는 것보다 훨씬 훌륭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귀담아듣기를 바라는 마음에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베푸는 것이 지혜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베푸는 것이 지혜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도로 찾았습니까? 반드시 도로 찾습니다. 왜입니까? 값없이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왜 물 위에 던지라고 합니까? 이것이 값없이 거저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인 명정 신학은 베푸는 지혜를 깊이 알고 있습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게 되기 때문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만약 빚을 지고 있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날마다 얻으려고만 할 것입니다.
우리처럼 매일 베풀고자 해야 합니다. 베푸는 것이 지혜입니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빛이 어디서 옵니까? 빛은 끊임없이 거저 베풀어집니다. 햇빛은 돈을 낼 필요가 없으며, 그것은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초기에 화인 명정 신학은 이기적인 교회를 세운 적이 있었는데, 제가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베풀고자 하다가 사람들의 이기심만 살찌워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교회의 문화를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고, 목사님의 소고기 장조림을 못 먹게 되었네” 하며 아쉬워했습니다. 제가 보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싶었습니다. 지금은 얼마나 좋습니까? 오자마자 베푸는 법을 배우게 하고, 기쁨의 지혜를 얻게 하니 훨씬 낫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아쉬워하는 표정을 보면 ‘세상에, 또 먹보 하나가 왔구나’ 싶습니다. 마땅히 기뻐해야 합니다. 《전도서》가 소고기 장조림보다 낫고, 닭다리보다 낫습니다.
그러므로 베푸는 것은 지혜이며, 화인 명정 신학은 반드시 베풉니다. 지금까지도 제게는 아직 다 이루지 못한 큰 소원이자 아쉬움이 있습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다 베풀기를 원하지만, 너무나 절실히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신학적 연구와 목양 능력에 대한 연구입니다. 이런저런 문제들을 목양해야 하는데, 우리가 쏟은 노력이 아직 부족하고 개발한 콘텐츠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많은 콘텐츠를 개발해야 하고, 더 많이 베풀어야 합니다. 콘텐츠를 개발하지 않으면 어디서 양식이 나오겠습니까? 양식이 없으면 무엇을 주겠습니까? 주는 것이 화학비료라면 큰일입니다. 화학비료를 먹겠습니까, 유기농 비료를 먹겠습니까? 역시 천연이 좋습니다. 저는 목양 콘텐츠를 더 많이 개발하여 여러분을 더 지혜롭게 만들고 싶습니다.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 재능 있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사실에 감회가 새롭습니다.
며칠 전 참으로 위로가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한 회계 법인의 파트너인 자매님이 제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목사님, 저도 헌신하고 베풀고 싶습니다.” 저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정말 필요한 일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사람의 이기심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도 잘 압니다. “자매님의 업무와 회사에도 유익이 되는 일을 해 봅시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베풀고 싶지만, 베풀어서 유익을 얻고 지혜를 얻는다는 점을 정확히 짚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큰 위로를 받았지만 제 체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독특한 교육 방식과 독특한 콘텐츠 개발 방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신학이라도 화인 명정 신학은 비교적 직설적이고 단순하게 풀어냅니다.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 지혜입니다. 단순해야 베풀 수 있습니다. 설교를 다 끝냈는데 아무도 못 알아듣고는 그저 손뼉만 치며 ‘설교가 참 심오하다’고 감탄하고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은 화인 명정 신학의 방식이 아닙니다. 화인 명정 신학은 명료하고 단순하게 전달합니다. 우리의 모든 자료는 무료이며, 우리 가운데 오시는 것도 다 무료입니다.
화인 명정 신학의 성경공부 자료와 설교들은 수많은 사람을 먹이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도 수많은 교회의 목회자들이 스스로 그만큼의 콘텐츠를 생산할 능력이 없어서 우리 웹사이트의 자료를 무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여섯 명, 십여 명을 모아 놓고 제 설교를 틀어 주며 헌금을 걷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그들에게 더 많은 훈련을 제공하고 싶습니다. 베푸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며 우리의 지혜입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프랜차이즈나 네트워크라고 말하지만,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으며 우리는 오직 베풀 뿐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곳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며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주시는 곳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도 바울처럼 거저 주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는 베푸는 교회이며, 베푸는 신학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베푸는 것은 곧 자신에게 주는 것입니다
베푸는 것은 곧 자신에게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베풂은 은혜입니다. 읽어 드리겠습니다.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무슨 뜻입니까? 어제 한 자매님이 제게 묻기에 제가 말했습니다. “이것은 베풀었더니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물이 땅에서 올라가 다시 땅을 적시니, 얻은 것입니까, 못 얻은 것입니까? 얻은 것입니다. 하나의 순환을 이루어 대지를 적시고, 땅은 다시 식물과 농작물을 자라나게 합니다.
우리 형제자매님들 중에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제게 질문했던 자매님은 “목사님, 정말 지혜로우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건대,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베풂이 은혜라는 것은 화인 명정 신학의 매우 중요한 논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며 한쪽은 구름이고 한쪽은 비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베푸는 것이 곧 자신에게 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이지만 많은 이들이 알지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갑니까? 베풂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더욱 번성하는 길을 예비해 두셨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어디를 가든지 저는 남의 것을 탐내거나 덕을 보려 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제 목표는 베푸는 것이며, 언젠가 더 이상 베풀 수 없게 된다면 제 삶을 마감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아셔야 합니다. 만약 이 진리와 지혜를 모른다면 큰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저와 맺는 관계는 반드시 건강한 관계여야 합니다. 저는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얻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얻기를 바랍니다.
뒤이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이상합니까? 나무가 쓰러진 것은 사람이 벤 것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벤 것이라면 힘을 들여 벤 것이니 자기가 넘어뜨리려는 방향으로 넘어뜨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나무가 저절로 쓰러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쓰러진 그곳에 그대로 있을 것이며, 당신의 품으로 쓰러졌다면 당신의 품에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해석하겠습니까? 성경을 쓴 솔로몬은 중국인들이 재물(財)을 좋아하여 재물신을 섬기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나무를 목재(木材)라고 하는데, 이것은 저의 해석입니다. 그렇게 큰 나무(材/財)가 당신 품에 쓰러졌다면 대박이 난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중국인들도 참 재주가 많습니다.
제가 어릴 적 섣달그믐날 밤에 사람들은 다 가난해서 돈(財)이 생기기를 아주 바랐습니다. 돈이 있는 것을 ‘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 집 아이 하나에게 땔나무(柴) 한 묶음을 안고 뒷마당에서부터 뛰어나오며 “재물이 들어온다, 재물이 들어온다(柴来了, 柴와 财의 동음)” 하고 외치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얼른 재물을 맞이해라, 들어와라” 하시며 땔나무를 방 안으로 안고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나무 한 그루를 안고 들어온다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때 제 여동생이 참 재미있게 말했습니다. “무슨 재물이에요, 땔나무지.” 어머니는 아이가 ‘재물(财)’을 ‘땔나무(柴)’라고 부르자, 둘은 엄연히 다른 것인데 그렇게 말했다고 찰싹 때리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하셨습니다. 미신이었던 것이지요. 물론 솔로몬이 기록한 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나무 한 그루가 당신 집에 쓰러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산에서 쓰러져 당신 집 마당으로 날아들어 온다면 운반할 필요도 없으니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횡재(財運)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전도서가 기록된 의미가 참으로 흥미롭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 일곱 번째입니다. 오늘 지혜를 좀 얻으셨습니까? 네, 지혜를 얻으셨을 것입니다. 일곱 번째는, 핑계를 대며 베풀지 않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베풀지 않기 위해 핑계를 대지 마십시오
핑계를 대며 헌신하지 않거나 베풀지 않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 바람을 보고는 바람이 부니 씨를 뿌릴 수 없다고 하고, 구름을 보고는 비가 올 것 같아 추수할 수 없다고 늘 핑계를 댑니다. 제가 말씀드리건대, 게으른 사람은 언제나 핑계를 찾아냅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그 자매의 아이처럼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규직에서 파트타임으로 바꾸었는데, 정규직으로 일해도 과거에 쓴 돈을 다 갚지 못할 판에 감봉을 감수하고 파트타임을 합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도 참 대단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힘을 많이 쓰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일주일에 7일을 일하는 것과 사나흘 일하는 것이 어찌 같겠습니까?
게으름입니다. 풍세를 살피며 씨를 뿌리지 않고, 구름만 바라보며 추수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가난할 수밖에 없는 온갖 핑계를 찾고, 베풀지 못할 온갖 이유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지, 저것이 잘 될지, 혹 둘이 다 잘 될지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는 어느 쪽이 번성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본 원칙은 다른 것을 바라지 않고 오직 한 가지, 즉 ‘베푸는 것’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어떠한 핑계도 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침에도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뿌릴 수 있으며 점심에도 뿌릴 수 있습니다. 어느 것이 잘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어떤 핑계도 대지 않고 끊임없이 베풀 뿐입니다.
세상의 지혜로 하나님을 이해하려 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지혜는 대단해 보입니다.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아니, 주는데 어떻게 얻는다는 말인가?’ 이런 생각에 빠지면 끝장입니다. 왜입니까? 장사꾼의 논리 체계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장사꾼은 ‘버는 체계’이지만, 하나님의 체계는 ‘베푸는 체계’이며 하나님이 채워 주시는 체계입니다.
예를 들어 땅의 물이 증발하여 하늘에서 구름이 되고, 구름이 가득 차면 비를 내립니다. 당신이 복을 받지 못했다면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복을 받는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복을 받지 못하면 무엇을 해도 헛수고이며 아무리 애써도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복을 받지 못하면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이 없고,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도 복을 받지 못합니다. 얼마나 심각합니까? 당신의 자녀가 복을 받지 못한다면 반성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축의 새끼가 복을 받지 못한다면 반성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지혜를 쓰지 말아야 합니다. 복을 받는 것과 받지 못하는 것은 세상의 논리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뼈 빠지게 노력하고 고생했는데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들도 똑같이 노력하고 고생했는데 풍성히 얻는 것을 보면 속이 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자신의 손에 쥔 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으로 삽니다. 자신의 칼을 의지해 사는 자는 다 저주받은 자입니다. 분명히 들으셔야 합니다. 축복과 저주는 사람이 살아가는 핵심이자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제가 세뇌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설계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그것이 바로 기쁨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래전 제가 주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어르신 교계 지도자분이 제게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 어르신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싱가포르에서 주유소를 여러 개 운영하셨는데, 차에 기름을 넣는 것이 마치 돈을 찍어내는 것 같아서 정말 부유했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헌금의 기준은, 내 수입에서 필수 지출을 제하고 남은 돈 전부를 헌금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계산대로라면 그렇게 헌금하고 나면 그달은 빈털터리가 되고도 모자랄 판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괴로워했습니다. 가다가 중간쯤에서 문득 깨달음이 왔습니다. ‘나는 이렇게 가난하고 저분은 저렇게 부자인데, 저분이 내게 베풀고 헌금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래! 하자! 베풀자! 헌금하자!’
그렇게 결단하고 실행했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고, 평생토록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내린 셈이 되었습니다. 왜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며,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중에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왜입니까? 제게 지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9위안이 10위안보다 많은 이유는, 그 9위안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저는 교회 안에서 또 다른 나쁜 습관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낼 때 지갑을 뒤적거리며 20위안짜리와 50위안짜리를 보다가 20위안짜리를 꺼내 헌금 바구니에 넣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헌금 바구니가 지나갈 때 1위안짜리를 꽉 쥐고 넣는 척하더니 바구니 안에서 50위안짜리를 쓱 집어 가기도 했습니다. 바구니 안으로 손이 들어가서 무슨 짓을 하는지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별의별 일이 다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스스로 결단했습니다. 헌금은 ‘아까운 마음이 들 정도로(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전혀 아깝지 않지만, 그때는 그런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아깝지 않다면 그것은 팁을 주는 것에 불과한데, 하나님께 팁을 준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지금은 아주 쉬워졌고 헌금하는 것이 너무나 좋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우리는 세상의 지혜로 하나님을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이 제게 “하나님께 속한 지혜와 세상에 속한 지혜는 완전히 정반대입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해야 하지만, 또한 캄캄한 날들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날들이 많을 것이며 다가올 일은 다 헛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국인들은 흔히 “30년은 강동에서, 30년은 강서에서 산다(인생의 부침이 심하다)”고 말합니다. 강동에 있을 때 30년은 좋았지만, 강서로 옮겨가면 좋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날이 어떠하든 이 땅에 사는 동안 일 년을 살면 일 년을 기뻐하고, 이 년을 살면 이 년을 기뻐하며, 삼 년을 살면 삼 년을 기뻐해야 합니다. 강동에 있든 강서에 있든 다 기쁨의 강이며, 기쁜 강동이고 기쁜 강서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헛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부잣집 도련님으로 살 때는 기쁜 도련님으로 살며 아버지가 지어 준 채색옷을 입었습니다. 그 채색옷은 오늘날의 에르메스보다 훨씬 좋아 보였을 것입니다. 나중에 종으로 팔려 가 강서로 가게 되었습니다.
도련님일 때는 기쁜 도련님, 종이 되었을 때는 기쁜 종, 죄수가 되었을 때는 기쁜 죄수로 살았습니다. 강동에 있든 강서에 있든,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헛되고 헛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결코 빠뜨려서는 안 될 한 가지가 있으니, 곧 기쁨의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종이 되든 죄수가 되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과 연단에 불과하며, 훗날 그곳에서 나올 때 반드시 뛰어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요셉은 13년의 ‘강서’ 시절을 거쳐 오랜 세월 애굽의 총리라는 ‘강동’을 얻었습니다. 30년 강동, 30년 강서가 아니라 17년의 강동, 13년의 강서 후 다시 강동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평생을 기쁨 속에 사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셨습니까? 평생을 기쁨 속에 살아가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필요하며, 사람의 일생을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꿰뚫어 보지 못하면 큰 괴로움에 빠집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꿰뚫어 보면 많은 문제가 술술 풀립니다. 들리십니까?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십시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다가올 캄캄한 날들이 많을 것임이라.” 어둠도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빛을 막을 수 없습니다.
기뻐하되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네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전도서 11:9)
솔로몬은 수많은 일을 겪고 수많은 일을 행했지만 기뻤습니까? 기쁘지 않았습니다. 청년의 때부터 이기심을 버리고, 청년의 때부터 베풀며, 청년의 때부터 기쁨의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청년의 때 또한 헛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솔로몬처럼 살지 말고 다윗을 본받으십시오. 솔로몬은 늙어서야 문득 ‘아, 청년 시절을 헛되이 보냈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평생을 분주하게 살았지만 늙어서야 비로소 무엇이 기쁨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육신의 생각을 좇는다면 단골 3가지 문제가 나타납니다. 저는 우리 목회자들이 걸핏하면 이 3가지 레퍼토리(육신의 생각을 좇음, 세상을 사랑함, 선악을 분별함)를 들먹이는 것도 염려스럽지만,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나중에만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심판을 경험하게 하셔서 그것이 다 어리석음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근심을 제하고 악을 버리십시오
사람은 평생 마음에서 근심을 제하고 육체에서 악을 버려야 합니다. 일생의 시작과 청년의 시절이 다 헛되기 때문입니다. 어제 한 자매님이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을 때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병원에서 화장장으로 모셔졌는데, 화장장에 큰 냉동고가 있어서 끌어내어 보니 사람이 숨을 거둔 채 누워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화장하는 과정을 직접 볼 수 있었는데, 시신을 덜컹 밀어 넣자 불길이 확 타올랐습니다. 다 타고 난 후 작은 유골함 하나를 사서 뼈와 재를 담았습니다. 당시 그 자매는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헛되고 헛되구나, 다 끝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우리 일생의 마지막도 결국 화장로 안으로 덜컹 밀려 들어가 불길이 일고 나면 한 줌의 재로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근심을 제하고 악을 버려야 하며, 더 이상 육신의 생각을 좇지 않고 세상의 것들을 구하지 않으며, 오직 베푸는 논리 하나만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사장의 논리입니다. 제사장의 논리는 기쁨의 논리이며, 하나님께 속한 논리 체계입니다. 오늘 만약 당신이 몹시 불행하다면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음속에 근심이 너무 많고 육체에 악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시작과 청년의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다 헛된 것입니다. 왜 솔로몬은 인생의 시작과 청년의 때만 언급했겠습니까? 청년의 시절에는 소망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청년의 때부터 이런 것들을 버린다면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게 될 것이며, 평생이 헛되고 헛된 것임을 안다면 사람이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마음을 정리하고, 우리가 기쁘게 살아가며 기쁨의 지혜를 얻기를 바랍니다. 이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