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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사사기 15장 - 비록 한 사람뿐일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구원을 베푸시느니라!

2025-02-05 4,583 士师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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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师记15章-参孙击败非利士人
  • 1 过了些日子,到割麦子的时候,参孙带着一只山羊羔去看他的妻,说:“我要进内室见我的妻。”他岳父不容他进去,
  • 2 说:“我估定你是极其恨她,因此我将她给了你的陪伴。她的妹子不是比她还美丽吗?你可以娶来代替她吧!”
  • 3 参孙说:“这回我加害于非利士人不算有罪。”
  • 4 于是参孙去捉了三百只狐狸(或译:野狗),将狐狸尾巴一对一对地捆上,将火把捆在两条尾巴中间,
  • 5 点着火把,就放狐狸进入非利士人站着的禾稼,将堆集的禾捆和未割的禾稼,并橄榄园尽都烧了。
  • 6 非利士人说:“这事是谁做的呢?”有人说:“是亭拿人的女婿参孙,因为他岳父将他的妻给了他的陪伴。”于是非利士人上去,用火烧了妇人和她的父亲。
  • 7 参孙对非利士人说:“你们既然这样行,我必向你们报仇才肯罢休。”
  • 8 参孙就大大击杀他们,连腿带腰都砍断了。他便下去,住在以坦磐的穴内。
  • 9 非利士人上去安营在犹大,布散在利希。
  • 10 犹大人说:“你们为何上来攻击我们呢?”他们说:“我们上来是要捆绑参孙;他向我们怎样行,我们也要向他怎样行。”
  • 11 于是有三千犹大人下到以坦磐的穴内,对参孙说:“非利士人辖制我们,你不知道吗?你向我们行的是什么事呢?”他回答说:“他们向我怎样行,我也要向他们怎样行。”
  • 12 犹大人对他说:“我们下来是要捆绑你,将你交在非利士人手中。”参孙说:“你们要向我起誓,应承你们自己不害死我。”
  • 13 他们说:“我们断不杀你,只要将你捆绑交在非利士人手中。”于是用两条新绳捆绑参孙,将他从以坦磐带上去。
  • 14 参孙到了利希,非利士人都迎着喧嚷。耶和华的灵大大感动参孙,他臂上的绳就像火烧的麻一样,他的绑绳都从他手上脱落下来。
  • 15 他见一块未干的驴腮骨,就伸手拾起来,用以击杀一千人。
  • 16 参孙说:“我用驴腮骨杀人成堆,用驴腮骨杀了一千人。”
  • 17 说完这话,就把那腮骨从手里抛出去了。那地便叫拉末·利希。
  • 18 参孙甚觉口渴,就求告耶和华说:“你既藉仆人的手施行这么大的拯救,岂可任我渴死、落在未受割礼的人手中呢?”
  • 19  神就使利希的洼处裂开,有水从其中涌出来。参孙喝了,精神复原;因此那泉名叫隐·哈歌利,那泉直到今日还在利希。
  • 20 当非利士人辖制以色列人的时候,参孙作以色列的士师二十年。

《答疑解惑》

여러분 안녕하세요, 《사사기》 15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장을 끊임없이 듣고 읽으면서도 참으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속이 확 뚫리듯 깨달아졌습니다. 어떻게 깨달아졌을까요? 제 눈에 삼손만 보이고 의인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삼손을 보면, 그는 사실 일 처리하는 것이 참으로 미덥지 못하고 신뢰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꿰뚫어 보게 되었을까요? 만약 제가 삼손만 보고 의인을 보지 못한다면 이 장의 성경공부는 진행될 수가 없었고, 정말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화인 사명 신학의 매우 중요한 성경공부 관점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지 분명히 깨닫는 것입니다. 이 각도에서 읽지 않으면 그저 머릿속만 뿌옇게 흐려질 것입니다. 삼손이라는 인물만 쳐다보다가는 보면 볼수록 멍해지고 맙니다. 사실 삼손이 살던 시대는 하나의 비극이었습니다.

이 장의 주제는 “비록 단 한 사람뿐일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구원을 베푸실 수 있다”입니다. 그 세대는 정말로 비참했습니다. 저는 그런 세대에 살면서 외로운 목회자가 되지 않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목회자에게 가장 슬픈 일은 강단에서 설교를 전하는데 아래에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참 흥미로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강단에서 설교하는데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자, 마당의 풀을 베어 사람 모양으로 묶어서 의자에 앉혀 놓았다고 합니다. 아이고, 이건 마치 유령의 집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이 시대에는 “설령 나 한 사람뿐일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구원을 베푸실 수 있다”라는 이러한 중심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외로운 사사, 삼손

그때는 참으로 비참한 세대였고, 삼손은 큰 능력을 지닌 사사였습니다. 이토록 능력 있는 사사는 이전에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삼손처럼 강력한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기드온이라 할지라도 삼손에게는 미치지 못합니다. 기드온에게는 용사 삼백 명이라도 있었지만, 삼손에게는 오직 자기 자신이라는 정예병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 비참한 세대에 사람들은 삼손이 그렇게 대단한 것을 보면서도 왜 단 한 사람도 그를 따르지 않았을까요? 아이고, 세상에! 저는 “하나님, 저는 삼손처럼 되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은 너무 괴롭고, 참으로 견디기 힘든 느낌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삼손은 사사의 직분으로 이십 년을 일했지만, 그를 따르는 자가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 그의 무기를 들어주는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삼손은 두 다리로 나아가 싸웠고, 나귀 턱뼈 하나로 전투를 치렀습니다. 아이고, 세상에! 게다가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붙잡아 원수에게 넘겨주려고만 했습니다.

그 세대에 오직 삼손 한 사람만이 쓰임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셨을지 아십니까?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눈물이 쏟아질 것 같습니다. 쓸 만한 사람이 오직 삼손 하나뿐이었고, 그 누구도 억압과 통제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이고, 그냥 이렇게 살자. 저들이 우리를 억압하면 억압당하는 대로 살면 되지, 그래도 입에 풀칠은 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부부 관계, 이러한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를 영어로는 ‘Don't Rock the Boat(분란을 일으키지 마라)’라고 합니다. “우리는 다 한 배를 탔으니 흔들지도 말고, 다투지도 말고, 소란 피우지도 말자. 그냥 억압받으며 살면 된다”라는 식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이 사역하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어떤 부부가 있는데, 한쪽은 상대방을 억압하고 통제하려 하고 다른 한쪽은 통제받기 싫어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목회자가 “그냥 억압을 받아주면 끝날 일 아닙니까?”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허다합니다. 여러분은 제가 그런 목회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저는 억압하는 것도, 억압당하는 것도 가장 싫어합니다. 다른 것은 다 타협할 수 있어도 하나님이 주신 권위와 자유는 결코 타협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자유가 가장 중요합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유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어릴 때는 어머니에게 통제당하고, 커서는 아내에게 통제당하며 산다면, 아이고 세상에, 그 일생은 심령이 완전히 뒤틀리고 맙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다른 것은 다 대화로 풀 수 있어도 영적 권위와 자유만큼은 타협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억압하는 것도 싫어하시고 억압당하는 것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셔서 우리가 은혜를 입고 자유를 얻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 모두가 이 통제와 억압에서 벗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이해가 되셨습니까?

이 비참한 세대는 지나가야 합니다. 외로운 사사의 시대도 지나가야 하며, 통제와 억압을 받던 세대도 끝나고 반드시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가스라이팅(PUA)을 일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스라이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세뇌하는 것이며, 해괴한 논리와 언어로 상대를 통제하고 옭아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전화를 걸어 대수롭지 않은 듯 툭 던진 말에 마음이 짓눌리고 괴로워진 적이 있지 않습니까? 영을 교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모든 통제와 억압에서 걸어 나와야 합니다.

설령 삼손 한 사람만 남을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구원을 행하신다

인터넷에서 다른 사람들은 이 성경 본문을 어떻게 푸는지 찾아보았더니, 다들 “삼손이 이랬다, 삼손이 저랬다”라고만 말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는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삼손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이리저리 찾아보아도 삼손의 무기를 들어줄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이 잡듯 뒤져보아도 삼손의 조수가 되어줄 사람 하나 나오지 않았고, 말을 끌어주거나 나귀를 끌어줄 사람조차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삼손을 결박해 넘겨주려는 무리뿐이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그러나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삼손의 일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앞 장에서부터 이번 장에 이르기까지,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블레셋 사람을 칠 틈을 타려 하심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것을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큰 능력을 지닌 사사 삼손을 일으켰으니, 그 한 사람이 모든 대적을 쓰러뜨릴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삼손을 보았지만 통제와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저 억압 속에 안주하려 했습니다. 이 얼마나 해괴하고 비정상적인 일입니까?

사람이 억압과 통제를 당하면 속이 꽉 막히고 억울한 느낌이 든다는 것을 느껴보셨습니까? 그렇게 속을 끓이고 참다 보면 결국 암에 걸리고 맙니다. 머리로는 자유를 원치 않아서가 아닙니다. 자유를 갈망하지만, 억압당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끙끙 앓다가 결국 암까지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극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억압과 통제의 배후에는 악한 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것을 깨닫기를 바라셨지만, 그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에 밀 거둘 때에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의 아내에게로 찾아가서 이르되 “내가 방에 들어가 내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 하니 장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이르되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 알고 내가 그를 네 친구에게 주었노라 그의 동생이 그보다 더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를 대신하여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라”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하고 (사사기 15:1-3)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만, 삼손은 애초에 빌미를 잡으러 간 것입니다. 그는 자기 아내가 다른 사람에게 넘겨졌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점은 그것이 아니라, 블레셋 사람들을 치기 위해 트집을 잡고 손을 댈 핑계를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세계 대전도 결국 명분을 찾아 터진 것처럼, 갑자기 싸울 명분이 생겨난 것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도, 제3차 세계 대전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하여 삼손은 가서 여우 삼백 마리를 붙잡았습니다. 저는 ‘이 사람은 에서보다 훨씬 대단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여우 삼백 마리를 어떻게 잡았겠습니까? 세상에, 보통 큰 공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삼손은 엘리야보다 빨랐고 몸도 날렵했습니다. 삼손은 여우보다 빠르게 달려서 순식간에 덥석! 한 마리를 잡고, 또 덥석! 한 마리를 잡으며 도대체 어떻게 했는지 여우 삼백 마리를 다 모았습니다.

나중에 저는 이 여우 삼백 마리를 도대체 어떻게 잡았을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옛날에 노아가 했던 일이 있지 않습니까? 노아가 숲속의 동물들을 다 암수 한 쌍씩 불러 모았던 것처럼, 이 여우 삼백 마리가 삼손에게 찾아와 줄을 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한 사람이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았다는 것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며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점입니다.

삼손은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아 참으로 기발한 생각을 해냈습니다. 꼬리와 꼬리를 두 마리씩 묶고 그 꼬리 사이에 홰를 달았습니다. 마침 밀을 거둘 때라 들판을 바라보면 온통 누렇게 익은 밀밭이었습니다. 삼손이 이 여우 삼백 마리를 놓아 불을 지르니, 블레셋 사람들의 밭이 온통 불타 버렸고 아직 베지 않은 곡식단까지 모조리 타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참으로 비범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의 밭도 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불이 옮겨붙은 곳도 있었을 것입니다. 밭과 밭이 맞닿아 있으니 어디 가서 따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삼손에게는 함께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원래는 이스라엘 사람 삼백 명을 데리고 가서 불을 질러야 마땅한데, 쓸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 삼손 한 사람만 남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아, 이스라엘 사람들은 쓸 수가 없으니 여우를 써라. 이스라엘 사람 중에는 쓸 만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썩었으니 그들은 내버려 두어라”라고 하신 셈입니다. 삼손은 홀로 여우 삼백 마리를 모았고, 그 여우들이 그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기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마치 교회를 세웠는데 강단에서 설교해도 아래에 들을 사람이 없어 여우 삼백 마리를 앉혀 놓고 설교하는 격입니다. 아이고 세상에, 눈을 돌려 보아도 족제비 아니면 여우뿐이니 어떻게 양육하겠습니까? 참으로 비참한 일입니다. 예전에 우리는 “하나님, 우리에게 정예병 삼백 명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상황을 보니 삼백 명은 너무 어렵습니다. 하나님, 큰 용사 백이십 명이라도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백이십 명도 채우기 어려워지자 “큰 용사는 고사하고 하나님, 제자 일흔 명이면 족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나중에는 열두 제자도 포기하게 되었고, 그마저도 몇몇은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모두 “비록 나 한 사람만 남을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축하리라”라는 굳은 중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얼마나 훌륭한 성품입니까!

하나님은 삼손과 같은 성품을 사용하십니다. 그의 뼛속에는 대단히 강인한 기개가 있었습니다. ‘설령 나 혼자 남아서 내 무기를 들어줄 자가 없다 한들 어떠하냐? 블레셋 놈들아, 덤벼볼 테면 덤벼라!’ 그에게 블레셋 사람을 치는 것은 병아리 한 마리를 잡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깨닫기를 바라셨습니다. “보라, 삼손은 얼마나 당당하고 멋지게 사는가! 홀로 사사가 되어 따르는 자가 없으니 여우 삼백 마리를 데리고 일하지 않는가.” 그러면 백성들이 “삼손이여, 내가 따르겠소!” 하고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삼손이 “무엇을 하러 왔느냐?” 물으면, “당신의 무기를 들어주러 왔습니다”라고 해야 마땅했습니다. 기드온 때에는 삼만 명이 몰려왔지만, 삼손 때에는 단 한 사람도 오지 않고 오직 여우 삼백 마리만 왔습니다. 이러한 황량하고 비참한 광경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를 보고 “나의 하나님은 큰 능력이 있으신데, 내가 왜 억압 속에 살아야 하는가?”라고 외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시니, 그는 나귀 턱뼈 하나로 천 명을 쳐 죽였습니다. 이것은 결코 농담이 아닙니다. 나귀 턱뼈는 그리 좋은 무기도 아니고 길이도 짧으며 칼로 쓰기에는 턱없이 무딥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 나귀 턱뼈로 천 명을 죽였습니다. 천 명을 죽인다는 것은 고사하고 나귀 턱뼈로 닭 천 마리만 잡으려 해도 진이 빠질 노릇입니다. 정말 숨이 턱에 닿도록 지치고 비참한 일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속으로 ‘괜찮다, 내게는 하나님의 힘이 있다’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시자 그는 큰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 임하시려면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내면에 하나님께 쓰임받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며, 블레셋의 천군만마를 보아도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움’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야 합니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병거를 의지하는 것도 아니요, 말을 의지하는 것도 아니며, 사람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도 아니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영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까?” 하니 (사사기 15:18)

삼손이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작은 편의점 하나 없고, 생수 한 병 파는 곳조차 없었습니다. 레드불 같은 에너지 음료라도 한 캔 마시면 힘이 다시 솟아날 텐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삼손은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었고 목구멍에서는 불이 나는 듯했으며, 땀조차 말라붙어 더 이상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사사기 15:19)

이러한 삼손이 있었으니, 백성들에게는 억압에서 풀려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원치 않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저 구차하게 목숨만 부지하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종종 보았고 그들을 권면해 보았는데, 억압당하며 사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냥 기꺼이 억압당해주면 안 됩니까? 아내가 통제하면 그냥 맞춰주는 게 좋지 않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도 여전히 이런 비극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남편이 통제하면 통제받는 대로 살지, 그렇게 살면서 가정을 유지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식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입어 그 시대에 홀로 사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외로운 사사였으나 하나님은 이전 세대보다 삼손을 더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삼손이 이십 년 동안 사사로 있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억압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통제와 억압의 결과는 비극이다

삼손은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수수께끼의 답을 꾀어내라. 그렇지 않으면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을 불사르리라”라고 협박했습니다. 삼손의 아내는 그 말을 듣고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불태운다니 안 되겠다’ 싶어 삼손을 속여 답을 알아냈습니다. 속여서 빼앗은 결과가 어찌 되었습니까? 결국 삼손의 아내와 그의 장인은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억압과 협박에 굴복하는 자에게는 결코 좋은 결말이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통제의 문제가 아닙니다. 집안에서 패악을 부리고 교회 안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날뜁니까? 남을 통제하고 억누르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가운데서 누구를 통제하려 한단 말입니까? 차라리 그 억압에서 걸어 나오고, 남을 통제하려는 생각도 버리십시오. 어린아이가 어른을 쥐고 흔들려고 마트 바닥에 드러누워 울고불고 떼를 쓰며 “안 사주면 안 일어난다”라고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 부모는 결국 굴복하고 맙니다.

요즘 부모들이 아이를 키우는 것을 보면, 한두 살짜리 아이도 벌써 어른을 조종하고 통제할 줄 압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아이들이 어떻게 사람을 통제하려 하는지 알아채고 대처법을 배워야 합니다. “네가 나를 조종하려 해? 어림없다. 울 테면 실컷 울어봐라.” 이것이 제 방식입니다. 네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덤벼야 하지 않겠습니까? 울고 싶으냐? 나는 네 우는 소리가 참 듣기 좋으니 실컷 울고 다 울면 나를 찾아오너라. 이분쯤 울다가 아이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을 봅니다. 저는 차를 따르고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있습니다. 아이는 ‘어라, 저 사람은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있네? 나는 우는데…’ 하고 생각하다가, 통제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울음을 뚝 그칩니다.

사실 여러분이 일단 통제와 조종에 굴복하기 시작하면, 그 아이도 망가지고 여러분 자신도 망가집니다. 영원히 기억하십시오. 우리 중에도 남의 집에서 보모로 아이를 돌보며 아이에게 휘둘리고 통제당하는 자매들이 있는데, 그러면 삶이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수년 전에 우리 교회 어떤 자매가 다른 집에 보모로 들어가 아이를 돌보았는데, 종일 아이에게 휘둘려 살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다루면 안 되고 이렇게 단호하게 다루어야 합니다”라고 했더니, 그 자매는 “안 돼요, 부모가 보면 어쩌려고요?”라며 난색을 보였습니다. 아이 한 명에게 온통 휘둘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지쳐 있었습니다. 그러다 제 말대로 한번 시도해 보았더니 효과가 있었습니다. 억압과 휘둘림에서 벗어나자 아이도 더 이상 조종하려 들지 않고 귀신도 틈타지 않게 되었으며, 어른도 평안을 찾았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은 통제와 억압의 배후에 악한 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삼손의 아내가 “너희들, 내 남편이 삼손인 걸 알고 까부느냐? 내 남편을 화나게 하지 마라. 어디 한번 해보겠느냐? 자, 여기 앉아라. 너희 넷이 맞은편에 앉고 내 남편이 이쪽에 앉아서 팔씨름을 해보자. 이길 수 있나 보아라”라고 당당하게 맞섰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감히 누구 집에 불을 지르겠다는 거냐? 지를 테면 한번 질러봐라!” 했다면 아무 일도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삼손의 아내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남편을 속이고 답을 넘겨주었고, 결국 자신도 다른 이에게 버려진 채 아버지와 함께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협박과 통제와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어찌 불타 죽는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여러분은 통제와 억압 배후에 악한 영이 있고, 음란 배후에 악한 영이 있음을 똑똑히 알아야 하며 더 이상 어리석어서는 안 됩니다. 부부가 서로를 통제하고 옭아매는 것의 배후에는 악한 영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살아서는 온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참으로 잘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가정 안에 수많은 통제와 억압을 풀어놓는다면 그 끝은 보나 마나 파멸입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배후에는 악한 영이 도사리고 있으며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삼손의 아내의 집은 불타 버렸습니다. 그녀가 정말로 불타 죽을 줄 알았다면 왜 그런 짓을 했겠습니까? 악한 영이 전이된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를 협박하고 통제했습니다. 삼손의 아내는 거짓말로 남편 삼손을 옭아맸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속임을 당했어도 남편 삼손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속았으면 속은 것이고 고작 삼십 명이 죽었을 뿐이지만, 정작 그녀의 온 집안은 불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삼손이 사사로 지낸 이십 년은 이스라엘이 억압받던 이십 년이었다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사사기 15:20)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심리는 극도로 뒤틀려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뒤틀려 있었을까요? 삼손은 블레셋의 억압을 거부하고 그 통제에서 걸어 나왔으니, 백성들이 조금만 발맞추어 따랐다면 블레셋이 더 이상 그들을 억압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싫다, 우리는 그냥 억압받으며 살겠다. 이대로가 좋다”라고 반응했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온순했습니까? 그들은 도리어 남을 통제하고 억누르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삼손을 결박한 것 자체가 바로 폭력적인 통제였습니다.

제가 나중에 깨달은 것은, 무능한 사람일수록 유독 남을 억누르고 통제하려 든다는 사실입니다. 밖에서는 맥을 못 추면서 안에서만 큰소리치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가족에게만 온갖 위세를 부리는 자들이 왜 그렇게 많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정말 많으니 자세히 관찰해 보십시오. 밖에서 돈을 잘 벌든 일을 잘하든 유능하고 당당한 사람은 집에 돌아와서 가족을 억누르지 않습니다. 밖에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못 하고 손대는 것마다 그르치는 자들이 집에만 오면 그렇게 기세등등해집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의 심리가 딱 그러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통제당할 때는 아무런 대책도 없으면서, 삼손을 결박할 때는 새 밧줄까지 챙겨와서 대단한 위세를 떨쳤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건대, 영계의 법칙을 모르면 참으로 비참해집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결코 억압당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상대가 통제받기를 원해서 잠시 통제해 주는 것은 몰라도, 되도록 남을 억누르지도 말고 남에게 억압당하지도 마십시오. ‘내가 단속하지 않으면 저 사람이 엇나갈 텐데’라며 붙들고 통제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엇나가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이러한 비극을 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분의 능력을 모른 채 타협하는 태도로 살아가면 비극은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남을 통제하는 것도, 통제당하는 것도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떨 때는 통제에 성공했다가도 어떨 때는 상대가 튕겨 나가 버립니다.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을 때도 속이 편치 않고, 통제되지 않을 때는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사실 상대가 왜 내 통제를 받아야 합니까? 결국 당신의 자유마저 상대방에게 옭아매여, 상대가 굳은 얼굴로 집에 들어오면 당신의 얼굴도 즉시 일그러지고 맙니다. 이것이 무슨 병폐입니까? 상대의 낯빛이 어둡다고 해서 우리가 덩달아 영향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장담하건대, 억압과 타협을 숭상하는 교회는 반드시 비극으로 끝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악한 영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입니다. 제 말이 틀립니까? 교회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십시오. 억압과 타협을 앞세우는 교회는 결코 온전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런 경우를 수없이 보았고, 그 끝은 예외 없이 비극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억압을 숭상하지도 않고 타협을 숭상하지도 않으며, 우리는 오직 자유를 추구합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하며, 여러분이 은혜를 입은 것은 참된 자유를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부부 사이에,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서로를 통제하고 타협하는 온갖 뒤틀린 모습은 대단히 부패한 것이며, 사람을 숨 막히게 만듭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십니까? 막장 드라마 같은 인생을 사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것이니, 삶의 참된 의미를 꿰뚫어 보아야만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영원히 기억하십시오. 억압과 타협이 가져오는 것은 오직 비극과 고통뿐입니다.

억압과 통제에서 걸어 나오라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하니라 (사사기 15:11)

이야기는 이렇게 흘러갑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을 다 태우자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와 그의 장인을 불태워 죽였습니다. 그러자 삼손이 원수를 갚기 위해 그들을 크게 쳐 죽였습니다. 마을 하나를 통째로 쓸어버린 듯한데, 성읍까지는 아니더라도 촌락을 쳐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 시대에는 이 마을 저 마을, 혹은 다른 지역과 통혼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분통이 터져 유다 땅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참으로 해괴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삼손을 직접 치러 가지 못하고 엉뚱하게 유다를 치러 온 것입니다.

블레셋이 유다를 치러 올라오자 유다 사람들이 나아가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치러 올라왔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당해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었습니다. 삼손이 여우나 멧돼지보다 빠르게 달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를 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그러자 유다 사람들은 “아이고, 어쩌면 좋단 말인가? 삼손을 결박해 올 테니 우리에게 맡겨 달라”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어보십시오. 참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해괴한 논리 아닙니까?

유다 사람들은 바위 틈으로 내려가 삼손에게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삼손이 어찌 몰랐겠습니까?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라고 따지자, 삼손은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너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들이 나를 대우한 대로 나도 그들을 대우했을 뿐이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태도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남에게 통제당하고 억압받는 사람이라면 분명 겁이 많은 사람이며 아무것도 감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억압받는 자는 반드시 타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이 여러분에게 답을 제시합니다. “그들이 네게 행한 대로 너도 그들에게 행하라.” 그러면 싸움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본래 싸워야 마땅한 싸움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은 영적 전쟁이며, 대단히 치열하고 격렬한 싸움입니다. 한바탕 큰 소동과 난리가 나지 않고서는 결코 그 통제와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일본군이 침략하여 우리를 짓밟을 때, 굴욕을 감수하고 짓밟히든가 아니면 일어나 맞서 싸우든가 둘 중 하나입니다. 일어나 맞서 싸우려면 피를 흘려야 하며 그것이 곧 전쟁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영적 전쟁입니다. 억압 배후에 있는 악한 영을 대적하는 영적 전쟁입니다. 삼손이 한 이 말은 귀담아들을 자는 듣고,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 듣고 나서 “선생님, 그 말씀대로 했더니 집안이 온통 난리가 났습니다”라고 탓하지 마십시오. 그 난리는 본래 나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리라.” 이것이 바로 영적 전쟁이며, 대단히 훌륭한 태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선생님, 성경에는 그렇게 쓰여 있지 않은데요”라고 하지만, 성경은 분명 그렇게 말씀합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삼손은 유다 사람들이 이토록 겁이 많고 무기력한 것을 보고 ‘에라, 됐다. 너희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을 테니 나를 결박해서 넘겨주어라’ 하고 생각했습니다. 삼손의 중심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너희가 나를 죽이지만 않는다면, 나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보아라. 내가 그들을 어떻게 요절내는지 보라.’ 그리하여 사람들은 삼손을 결박하여 전선으로 끌고 갔습니다. 세상에,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삼손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손에서 스르르 떨어져 나갔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것은 믿음으로 끊어낸 것이며, 믿음으로 결박을 풀고 쇠사슬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삼손이 둘러보았으나 다른 무기는 없었고, 마침 마르지 않은 싱싱한 나귀 턱뼈 하나가 있었습니다. 바짝 마른 뼈는 부러지기 쉬우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싱싱한 나귀 턱뼈를 예비해 두신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고 천 명을 쳐 죽였습니다. 지난번에도 블레셋 사람들을 칠 때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마구 쳐서 크게 도륙했듯이, 이번에도 결사적으로 맞서 싸웠습니다.

독한 각오를 품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억압에서 걸어 나올 수 있겠습니까? 대적이 당신을 억누르려 할 때, 순순히 통제를 당하든가 아니면 억압을 뚫고 걸어 나오든가 둘 중 하나입니다. 억압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반드시 피비린내 나는 격렬한 영적 싸움을 치러야 하며, 한바탕 난리가 나기 마련입니다. 매국노가 되든가, 아니면 끝까지 항전하는 독립투사가 되든가 선택해야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결코 매국노가 되지 마십시오. 어떤 자들은 1945년에 매국노 짓을 하다가 1946년에 총살당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갈 때 기개를 품고 억압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나를 억누르려 하는가? 어디 한번 해보아라.’ 우리는 죽어도 매국노는 되지 말아야 합니다. 협박에 겁을 먹고 매국노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비참하게 죽는다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우리는 뼛속에 기개를 품고 하나님의 정예병이 되어야 합니다. ‘악한 영들아, 덤벼볼 테면 덤벼라! 오는 족족 다 짓밟아 주마!’ 우리는 남을 억압하지도 않고 남에게 억압당하지도 않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강력한 정예병이 되어야 합니다. 기개를 가지고 모든 억압과 조종에서 걸어 나오며, 더 이상 거짓에 속지 마십시오. 타협으로는 결코 살아갈 수 없습니다. 타협에 기대어 어떻게 삶을 유지하겠습니까? 어떤 형제들은 타협하기를 좋아하여 늘 짓눌려 살며 툭하면 눈물을 흘리는데,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아내와의 관계가 마치 막장 드라마 같은데, 제발 그 막장 드라마에 마침표를 찍고 더 이상 상영하지 마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사람은 곁에 누가 있든 없든 살아갈 수 있으며, 설령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영적인 세계에서는 당당한 정예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알아야 합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자유를 얻게 하는 신학이며, 타협을 숭상하지도 않고 억압을 용납하지도 않는 교회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권면합니다. 결코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마십시오. 다른 것은 다 양보할 수 있어도 하나님을 섬기는 중심만큼은 그 무엇에게도 빼앗길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사명을 위해 태어났고, 이 사명을 위해 이 세상에 왔으며, 이를 위해 살고 이를 위해 죽을 것입니다. 악한 영이 아무리 강대하다 할지라도 덤벼볼 테면 덤비십시오. 나는 나귀 턱뼈를 쥐고 사람을 억누르는 이 악한 영들을 모조리 쳐부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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