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1.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도 영적 묶임을 깨뜨리는 시리즈인 <묶임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 삶>을 계속해서 나누겠습니다. 사람을 가장 강력하게 얽어매는 것은 바로 재물입니다. 재물의 묶임은 사람에게 수많은 비극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물의 유혹을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사람은 왜 미혹될까요? 거짓말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사람이 거짓말을 믿기 시작하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제가 사역해 온 사람들 중에 재물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만큼 재물의 묶임과 그로 인한 혼란은 매우 깊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설교 제목은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입니다.
제가 예전에 한 분을 섬긴 적이 있는데, 참 인상 깊은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목사님의 딸이었습니다. 대만에서 오뎅탕 가게를 하며 생계를 꾸려가느라 아주 고단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녀를 키우며 힘겹게 살아가던 중, 대장암에 걸려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대장암은 참으로 가혹한 질병입니다. 대변을 제대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가 생사를 가르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공동체의 한 목회자가 그분을 섬겼고, 그분은 기적처럼 치유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깨달은 것은, 기적처럼 한순간에 낫는 것보다 서서히 회복되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분은 기적적으로 완치되어 병원에서 재검사를 받았는데, 모든 암세포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것을 참된 보배로 여기고 굳게 붙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다시 연락하는 것을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는 일로 여기며 연락을 끊어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이 돈 버는 시간을 방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돈을 버는 것이 그토록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돈을 벌려고 했지만, 실제로 돈을 벌기는커녕 오히려 막대한 빚을 졌습니다. 그분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의 생각과 논리 체계 안에서 대장암에 걸렸던 사람이, 치유를 받고도 다시 그 옛 논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결과는 뻔한 파멸이었습니다. 한 달쯤 지나자 그분은 다시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모든 암이 재발한 것입니다. 어찌 재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분은 다시 기도를 요청했고, 저는 정말 온 힘과 대가를 쏟아부으며 기도로 그분을 동행했습니다. 저는 사람이 죽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누리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때로는 힘이 전혀 없어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하던 사람이 기도 후에는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습니다. 사실 매번의 기도가 다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로 몸이 조금 나아지기만 하면 그분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아, 내가 다시 살아났구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이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앞에서는 재물이 중요하지 않지만, 다시 살만해지면 ‘아, 이제 다시 살아야 하니 휴대전화 요금도 내야 하고 월세도 내야 하네’라는 생각이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죽어서 유골함에 들어가면 방세를 낼 필요가 없고, 낸다 해도 남의 일입니다. 그러나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하기에, 그분의 영혼은 살아나지 못한 채 돈에만 얽매여 있었습니다.
몸이 조금 회복될 때마다 장사 생각과 이 세상의 염려에 짓눌려 늘 수심이 가득했습니다. 사실 돈을 좀 쥐여주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지만, 돈을 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머릿속이 세상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몸이 조금만 나아지면 손가락을 꼽아가며 ‘3천만 원, 3천만 원...’을 셌습니다. 대만 화폐 단위가 작아서 그렇지, 인도네시아 루피아로 치면 수십억, 수백억에 달하는 돈입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늘 억 단위로 돈을 세니 수학을 잘하고, 대만 사람들도 화폐 단위가 작아 계산을 잘합니다. ‘아, 3천만...’ 그래서 제가 “지금 도대체 뭘 그렇게 세고 계십니까?”라고 물으니 세상적인 헛된 꿈을 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어떻게든 그 세상적인 꿈을 깨뜨려 주려 했지만 결국 깨뜨리지 못했고, 세상의 헛된 꿈이 도리어 그분을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날, 생명이 단 6시간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날 몸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때 제가 다시 기도하자 그분은 기운을 차리고 일어났습니다. 그러고는 또다시 “3천만... 8억...”이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제가 “와, 숫자가 참 크네요. 꿈이 아주 거창하십니다. 차라리 최고의 부자가 되시지 그럽니까!”라고 했습니다. 겨우 6시간 남았는데, 6시간 후면 죽을 목숨인데도 그랬습니다. 그분의 가족이 영상통화를 걸어왔을 때 보니, 침대에 누워 이미 숨이 끊어졌는데도 눈을 부릅뜨고 있었습니다. 그 8억, 3천만의 환영이 여전히 눈에 맺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진 빚이 얼마였을까요? 사실 그렇게 엄청난 빚은 아니었지만, 너무나 가난에 찌들어 있었습니다. 사람이 살려고 하면 돈이 필요하다고 아우성치지만, 죽음 앞에서는 비로소 모든 것을 덧없이 봅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생명이 6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돈을 세고 있었다니, 가슴 깊이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저는 암 환자들을 참 많이 섬겨보았습니다. 암이라는 질병은 사람을 완전히 옭아맵니다. 수년 전에도 한 암 환자를 섬긴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직접 만나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는데,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완치되고 나니 너무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마침내 세상을 사랑할 자격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아, 이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아마 지금 우리 중에도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8대 명소는 다 구경하러 다녀야지’라고 생각하는 형제자매들이 있을 것입니다. 암이 낫자마자 그는 온 세상을 유람하며 5A급, 6A급 명승지는 빠짐없이 다녀야겠다고 했습니다. 이후 그의 SNS를 보면 늘 꽃밭 한가운데에서 찍은 사진이 올라왔는데, 저는 그것을 보며 참 씁쓸했습니다.
꽃은 아름다울지 몰라도 사람의 중심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배가 대수냐며, 예배드릴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꽃밭을 쫓아다니던 그의 결말은 결국 죽음이었습니다. 석 달 만에 암이 재발했고, 돌이킬 기회도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음이 참으로 아팠습니다. 그때는 저도 미숙해서 제가 마귀보다 1분은 더 버틸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암 환자들 내면의 그 완고한 생각과 신념은 도저히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먹고 마시고 즐기는 쾌락이 가져다주는 혼란과 묶임은 이토록 깊고 지독합니다. 병이 나으면 또 살아야 하고, 살아가려면 먹고 즐겨야 하니 돈이 다시 가장 중요해지는 논리입니다. 돈은 이처럼 사람을 깊은 미혹에 빠뜨리며, 수많은 사람이 돈에 속아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돈이 결코 중립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돈은 영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을 묶고 생명을 앗아가기도 합니다. ‘사람은 재물 때문에 죽고, 새는 먹이 때문에 죽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재물의 유혹에 빠진 사람들은 돈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어떤 자매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돈이 없어서 병원에 제때 모시지 못해 돌아가셨다는 거짓말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마저 돌아가실 위기에 처했을 때는 그동안 모은 돈을 아버지의 치료비로 전부 쏟아부었지만, 아버지 역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돈으로 사람의 생명을 살 수 있습니까? 천금으로도 흐르는 시간을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단 15분의 생명도 더 살 수 없습니다. 어디 가서 사겠습니까? 저승사자에게 돈을 줄 테니 조금만 더 살게 해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제가 아는 지인 중에 아주 큰 기업을 운영하는 분이 있습니다. 39개국에 진출한 다국적 상장기업의 대표였습니다. 형제 5명이 함께 사업을 했는데, 다른 나라에서 사업장을 총괄하던 그의 동생이 40세 무렵 암에 걸렸습니다. 그는 동생을 몹시 사랑했고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깊었습니다. 저와도 친분이 두터운 분이었습니다. 그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 의사에게 매달리며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고칠 수 있다면 그것이 암이겠습니까? 결국 동생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일을 겪은 후 그는 돈으로 사람의 생명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가 다니게 된 교회가 바로 제가 다니던 교회였고, 그렇게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돈이 사람의 생명을 단 15분이라도 연장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돈은 무엇을 합니까? 사람을 미혹하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뿐입니다.
예를 들자면 끝이 없습니다. 돈은 참으로 사람을 미혹합니다! 몇 년 전 하이난에 갔을 때, 하이커우의 한 거리가 온통 하이난항공(HNA) 빌딩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HNA가 사들인 건물들이었는데, 사실 자기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막대한 빚을 내어 산 것들이었습니다. HNA는 당시 알리바바, 징둥, 화웨이를 훨씬 능가하는 중국 최고의 거대 민간 기업이었습니다. 민간 항공사로서 하이난항공은 지금도 존재하고 항공권을 팔고 있지만, 창업자는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정확한 사인조차 알 수 없습니다. 50대의 나이에 회사가 빚더미에 앉아 채무 초과로 무너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날까요?
최근 많은 분이 제게 알려준 뉴스가 있습니다. 상하이 CICC(중진공사)에서 투신한 서른 살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CICC는 이름에도 '금(金)' 자가 들어가고 현판도 금으로 도금된 유명 금융사입니다.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연봉이 100만 위안(약 1억 9천만 원)에 달할 정도로 유능했습니다. 날마다 돈을 만지며 살던 그녀가 왜 투신했을까요? 연봉이 삭감되었기 때문입니다. 100만 위안에서 35만 위안으로 줄어들었는데, 사실 35만 위안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그런데 투신자살을 택했습니다. 비극이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돈은 참으로 사람을 죽이고 미혹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 가지 원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살 형편이 안 되면 사지 않고, 먹을 형편이 안 되면 먹지 않으며, 쓸 형편이 안 되면 쓰지 않고, 들 수 없는 명품 가방은 들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며 수천만 원짜리 에르메스를 입고 다닙니다. 그러나 명품 옷을 걸친다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까? 아무리 비싼 옷을 입어도 그 속의 천박한 본성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존귀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돈보다 존귀하며, 사람의 생명이 돈보다 훨씬 존귀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마태복음 16:26)
사람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의 마음이 시원하게 열릴 수 있도록 다시 한번 권면합니다. 만약 돈 때문에 번민하고 있다면 오늘 그 번민을 다 떨쳐버리십시오. 세상에 돈 많은 사람은 적지 않지만,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마음이 밝고 기쁨이 넘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돈이 사람에게 참된 행복을 줍니까? 돈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며, 도리어 사람을 미혹하여 묶고 억압할 뿐입니다. 수천억 자산을 가졌던 한 부호가 재산을 수백억으로 날리자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100만 달러(약 13억 원)만 남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100만 달러도 여전히 큰돈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100만 달러를 쥐고 투신한다면 웃음거리가 되겠지만, 수천억을 가졌던 사람에게 100만 달러로 줄어든 것은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허망한 일입니까? 미혹된 것 아닙니까? 미혹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일들을 관찰해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들은 재물이 어떻게 자신을 망치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수십 년 전, '만원호(1만 위안 부자)'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의 콩트가 생각납니다. 어떤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어 6만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6만 위안이 그에게 온갖 골칫거리를 안겨주었습니다. 날마다 친척과 이웃들이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고 손을 벌렸습니다. 결국 6만 위안을 탔는데 빌려준 돈은 8만 위안이 되었습니다! 계산을 잘못해서 원금보다 더 많이 빌려준 것입니다. 웃지 못할 촌극입니다. 돈은 사람을 끔찍하게 옭아맵니다. 돈이 재앙을 막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돈이 사람을 지혜롭게 만듭니까? 아닙니다. 수많은 재벌 2세들이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얼마 전 한 재벌 2세가 수입 와인을 대량으로 들여왔는데 팔리지 않자 아버지에게 "늙은이가 되어서 자식 장사도 안 도와준다"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훈련시키려고 술을 사줬다가 도리어 자신이 골탕을 먹은 꼴이 되었습니다. 돈은 잠깐의 쾌락과 일시적인 누림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재앙의 날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오늘날 세상은 돈으로 사람의 성공을 측정하지만, 그 결과는 결코 성공이 아닙니다. '돈밖에 없는 가난뱅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기쁨도 없고, 영생도 없습니다. 기쁨의 계좌에는 기쁨이 없고, 영생의 계좌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오직 돈의 계좌에 얼마의 돈과 함께 닥쳐올 재앙만 쌓여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돈은 사람을 무섭게 타락시키고 파멸로 이끕니다!
제가 90년대에 막 주님을 믿기 시작했을 때 만난 한 사역자의 이야기는 참으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싱가포르로 신학을 공부하러 온 분이었는데, 자신의 집안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위화의 소설 《인생(活着)》과 똑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항일전쟁 시기)에 아내를 맞이하고 함께 주님을 믿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현(縣) 전체의 절반을 소유한 대지주였습니다. 그런데 재산 관리는 전혀 하지 않고 날마다 모여 예배만 드렸습니다. 그러자 소작농과 일꾼들이 집안 재산을 야금야금 다 가로채 버렸습니다. 결국 할아버지 부부에게 남은 것은 작은 초가집 한 채뿐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공산화(해방)가 되었을 때, 당국에서는 그를 체포해 처형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이 사람은 가진 게 다 낡은 초가집 한 채밖에 없는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인데 왜 잡아가느냐"고 변호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빈농' 계급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반면 그 집안의 재산을 가로챘던 소작농은 평생 지독하게 아끼며 쓰지도 못하고 살다가, 지주로 몰려 총살을 당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에게 "하나님께 감사하자! 만약 우리 재산을 가로챈 그 소작농이 없었다면, 오늘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바로 나였을 것이다! 주님을 찬양하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 아닙니까? 그 후 그의 할아버지도 전도자가 되었고, 아버지도 전도자가 되었으며, 그 자신도 전도자가 되어 3대가 사역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 가정에는 표적과 기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복음을 전하러 다니실 때, 매일 돌아와 항아리에서 쌀 한 줌을 꺼내 밥을 지어 드셨습니다. 그렇게 반년을 먹다가 문득 ‘이 작은 항아리에 어떻게 아직도 쌀이 남아 있지? 반년 동안 하루에 1근씩만 먹었어도 180근은 먹었을 텐데, 이 항아리는 기껏해야 5근밖에 안 들어가는 크기인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항아리를 꺼내 안을 들여다보니 쌀은 비어 있었지만, 손을 넣어 움켜쥐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쌀을 채워주셨던 것입니다. 그 가정에는 이처럼 하나님이 먹여 살리시는 기적이 가득했습니다. 소설 《인생》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롭고 깊은 주제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영원한 화두입니다. 그리고 저는 사람이란 본래 하나님이 먹여 살리시는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저는 살아가는 문제에 대해 탐구하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그냥 남들처럼 삼시 세끼 먹고 잠이나 자며 무의미하게 사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살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저는 삶을 깊이 연구했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 인생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오늘 여러분에게 전하는 것은 제가 오랫동안 탐구하여 얻은 결과입니다. 저는 일찍부터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연구했습니다. 저와 아브라함은 비슷합니다. 둘 다 삶의 의미를 깊이 파고들다가 결국 하나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까지 깊이 연구한 끝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감사하게도 저는 20대에 하나님을 알게 되어 삶의 핵심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참된 의미와 존재감이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깨달은 삶의 핵심은 바로 ‘복(福)’이었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복된 삶을 살고, 저주를 받은 사람은 불행한 삶을 삽니다.
복은 복이고 저주는 저주입니다. 따라서 축복과 저주는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열쇠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주와 축복은 죽은 후의 문제만이 아니라 지금 살아 숨 쉬는 삶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의 축복과 저주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가인은 저주 속에서 살았고, 라멕도 저주 속에서 살았습니다. 저주 아래 살면서 어떻게 잘될 수 있겠습니까? 에서는 어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에서는 부자였잖아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주받은 부(富)는 그 자체가 저주입니다. 많은 사람이 가난에 익숙하다 보니 돈만 많으면 장땡인 줄 알지만,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가인, 라멕, 에서, 니므롯 같은 자들은 모두 저주 가운데 살았던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은 복을 받는 길을 찾았습니다. 아브라함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축복과 저주의 원리를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고 말씀하셨으니, 아브라함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살아가는 법을 명확히 깨닫는 것은 이토록 엄청난 일입니다. 사역자라고 해서 삶의 원리를 다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사역자가 ‘산다는 것’의 참된 의미조차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 일이 하나님의 시간을 침범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님만이 제 삶의 유일한 축복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축복과 저주의 원리를 깊이 연구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것이 축복이고, 귀신이 함께하면 그것이 저주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사람이 저주 아래 있으면 끊임없이 바쁘기만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돌아보십시오. 지금 몹시 바쁩니까? 주일 예배조차 드릴 수 없을 만큼 바쁘다면, 안타깝게도 그것은 저주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일 예배의 형식만이 아니라, ‘이 시간은 내가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렸으니 결코 다른 용도로 침범할 수 없다’는 분명한 결단과 중심입니다.
정부에서 지정된 용도로 쓰라고 준 목적세 자금을 다른 데 유용하면 범죄가 되지 않습니까? 명백한 범죄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정하신 시간을 자기 마음대로 유용해 버린다면 그것이 어떻게 저주가 되지 않겠습니까? 결코 잘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제 설교가 듣기 거북할지라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축복할 것이며, 귀에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곳을 찾아가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 안에는 타협할 수 없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어떤 것도 내가 믿는 하나님의 시간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을 지켜야 할 때 지키지 않고 유월절이 다 지나간 뒤에 지킨다면 그것을 유월절을 지켰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설날에는 쇠지 않다가 청명절(조상 묘를 돌보는 날)에 가서 새해 인사를 건넨다면 귀신에게 새해 인사를 하는 것입니까? 뺨을 맞아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삶의 핵심을 알아야 하며, 왜 시간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이렇게 결단했습니다. “하나님, 이 시간은 주님께 온전히 구별하여 바치오니, 그 누구도 이 시간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제게 다른 중요한 일정이 생겨서 가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 일정은 이미 창세 전에 정해진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던 때부터 이미 계획된 일정인데, 어디 감히 끼어들려 합니까? 먼저 잡힌 약속이 우선 아닙니까?” 일 때문에 하나님의 시간을 빼앗기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회사에서 야근하는 것은 가족들이 다 이해해 주면서, 주님을 믿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시간을 들이는 것은 용납하지 못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경직되어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대답하라고 가르칩니다. 단 세 마디면 됩니다. “내가 좋아서요. 내가 원해서요.” 내가 좋다는데 누가 간섭하겠습니까? 내가 두리안을 좋아해서 먹겠다는데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렇게 단호하게 중심을 지키십시오.
인생의 핵심 원리를 알고 축복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복된 길을 가라 하면 불평과 핑계가 많습니다. 그러나 제가 확언하건대, 시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절대로 손해 보는 일이 아닙니다. 믿으시겠습니까? 믿고 안 믿고는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시간을 구별하여 주님께 드리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남는 장사입니다. 공부나 학위 취득 같은 세상 염려를 예로 들어봅시다. 시험에 붙을까 떨어질까 늘 염려하지 않습니까? 제가 흥미로운 실험을 하나 해보았습니다. 예전에 우리 교회에 기도회를 도입할 때의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처음부터 기도하는 교회는 아니었지만, 점차 기도하는 교회로 바뀌어 갔습니다. 주일 예배가 끝나자마자 연속으로 기도회를 하고 이어서 성경공부를 진행했습니다. 하루 온종일을 온전히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이들은 견디지 못했습니다. 주일 축도가 끝나기 무섭게 쏜살같이 도망쳤습니다. 제가 “기도회 참석하실래요?”라고 물어볼 틈조차 주지 않고 도망갔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 부담스러우니까요. 그런데 한 달쯤 지나자 그 사람이 도망가지 않고 남아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웬일로 남아서 기도를 다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며 울상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럽니까? 무슨 일인데요?” “시험을 완전히 망쳤어요.” 귀신이 붙어 있는데 시험을 잘 볼 수 있겠습니까? 제가 “자, 같이 기도합시다”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셔서 망쳤던 시험을 통과하게 해 주셨습니다. 얼마 후, 예배만 끝나면 꽁무니를 빼던 다른 자매도 남아서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이번엔 또 뭐가 망했습니까?” 무언가 또 터진 것입니다. 다 깨지고 부서져서야 기도회로 돌아온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기도회는 전원이 참석하는 기도회가 되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제게 “류 목사님, 교회 성도의 20%만 기도회에 참석해도 그 교회는 부흥한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에이, 우리는 100% 참석해도 아직 부흥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시에는 숫자가 많아야 부흥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실제로 검증해 본 결과, 하나님께 시간을 드린다고 해서 손해 보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온종일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느라 세상일을 할 시간이 줄었지만, 일이 지체되거나 망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후 금요 성경공부, 수요 성경공부, 화요 기도회까지 모두 모였습니다. 오프라인 교회 시절, 버스로 왕복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성도들이 기쁨으로 달려왔습니다. 제가 도리어 걱정이 되어 “형제자매 여러분, 직장 일이나 학업에 지장이 있으면 안 됩니다! 시험 망치면 안 됩니다!”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목사님, 아무 문제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많은 시간을 교회에서 보냈는데 어떻게 지장이 없습니까?”라고 물어도 “정말 아무 지장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데 무엇이 잘못되겠습니까? 아무것도 손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재물의 유혹을 깨뜨리며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오늘 영업이나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특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계약과 매출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날마다 염려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나누는 재물의 염려와 유혹, 이 세상의 염려는 우리 화인 사명신학이 수많은 시도와 믿음의 실험을 통해 직접 걸어 나오고 증명해 낸 길입니다. 사업이 크든 작든 원리는 똑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축복의 원리를 알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2. 본문 말씀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3:18-23)
3.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 임하게 하옵소서.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오늘 우리 안에서 완전히 몰아내 주셔서, 우리가 주님이 보시기에 좋은 땅이 되게 하시고 주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주님 안에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참된 만족이 있음을 아는 충만함과 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오늘 우리는 세상의 모든 염려와 근심을 내려놓고 재물의 유혹을 깨뜨립니다. 생명의 말씀 안에서 온전한 열매를 맺어 주님을 닮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믿음의 기초를 아브라함의 믿음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굳게 세우게 하옵소서.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며 오직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만이 참되고 신실함을 밝히 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영적 눈과 마음의 문을 열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4. 본문 배경
마태복음은 참으로 탁월한 복음서입니다. 만약 저에게 어떤 성도를 양육할 때 어떤 성경을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 없이 마태복음을 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은 두 개의 나라, 두 가지 가치관, 두 가지 논리 체계를 명확하게 대조하여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하나님께 속한 생각과 관점을 전혀 세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니, 머릿속에는 여전히 세상의 염려와 근심만 가득 차 있습니다. 직장 문제, 상사와의 갈등, 이런저런 세상일에만 매여 있으니 문제가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겪는 질병들도 대부분 이러한 세상 염려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저 자신이 아팠을 때를 돌아보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는 데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하나님이 필요하며, 하나님께서 나를 먹여 살리신다고 믿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됩니까? 별로 없습니다. 직장 프로젝트 하나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며 신경 쇠약에 걸릴 정도로 불안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체계를 설명하시기 위해 비유를 드셨습니다. 이 본문의 배경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는 매우 엄중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언뜻 들으면 냉정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를 갈망하고 구하는 자만이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후, 13장 18절에서 그 의미를 설명해 주십니다. 제자들이 그 뜻을 물어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비유는 풀어주셨고 어떤 비유는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예수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보배를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사람들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비유를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그대로 버려두십니다. 복음은 싸구려가 아니며,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지극히 존귀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값싼 것으로 전락시켜 구걸하듯 전해서는 안 됩니다. 받든지 말든지 그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오늘 저 역시 몇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드립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 것이요, 깨닫지 못하는 자는 지나칠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자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아도 예수님과 연결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은 말씀을 들었으나 세상 염려와 재물의 미혹에 짓눌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머릿속이 낡은 컴퓨터 CPU처럼 좁고 둔하여 영적인 것을 담지 못하니, 이리저리 잔머리를 굴리다가 결국 예수님을 삶 밖으로 밀어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말씀보다 눈앞의 쾌락과 물질을 더 귀하게 여기니, 결국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의 결말이 어떠합니까? 찍혀 불에 던져져 사라질 뿐입니다. 반면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달아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제자들은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은 사람의 영혼을 너무나 깊이 병들게 합니다. 제가 섬겼던 그 암 환자들이 억울하게 죽었습니까? 전혀 억울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음의 극치였습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돈의 본질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위중한 환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병이 너무 급하게 낫는 것을 경계합니다. 낫자마자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는 돈이 아무 소용없음을 알다가도, 살아날 기미가 보이면 다시 돈 벌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병이 나았으니 이제 세상을 맘껏 사랑해 보자는 태도로 돌변합니다. 사람은 살아갈 궁리를 할 때 재물의 유혹에 가장 쉽게 넘어갑니다. 반대로 삶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면 돈의 유혹은 힘을 잃습니다.
홍콩의 4대 문사(才子) 중 하나인 채란(차이란)이라는 유명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평생 자녀도 없이 풍류를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노년에 이르러 ‘모든 재산을 다 털어 나누어 주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왜 젊었을 때는 그렇게 재산을 털지 않았을까요?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죽고 나면 돈이 아무 소용없음을 알기에 다 처분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죽음 앞에서는 돈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살려고만 하면 재물의 유혹에 휘둘립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는 일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가볍게 내려놓는 것이 지혜입니다.
살려고 아등바등할수록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세상 염려가 무겁게 짓누릅니다. 그러나 돈이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돈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큰돈을 만져본 사람은 돈의 한계를 압니다. 수많은 억만장자가 하는 말을 세상은 궤변이라 비웃지만, 그것은 사실 진실입니다. 돈이 있어도 참된 기쁨을 살 수 없고, 암을 고칠 수도 없으며, 인생의 수많은 고통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돈 때문에 더 많은 문제가 생겨날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의 모든 문제를 능히 해결해 주실 수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이것은 허황된 말이 아니라 실제로 제가 걸어오며 검증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급자이시므로 평생 부족함이 없게 하실 것이요, 우리의 치료자이시므로 질병의 고통에서 건져내실 것이며, 우리의 능력이자 지혜가 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논리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논리 체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생의 논리이고, 다른 하나는 영생의 논리입니다. 하나는 세상 나라의 논리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논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생을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에는 왜 옵니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고난을 통해서라도 영생의 실재를 깨닫게 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썩어질 세상 것만을 구하려 한다면 그것은 헛수고일 뿐이며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의 염려는 참으로 부질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빚을 졌더라도 하나님은 먹여 살리실 수 있습니다.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을지조차 우리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예전에 우리 교회 한 형제는 아내가 임신하자 사흘 동안 통곡을 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웁니까?”라고 물으니 돈이 없어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울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이 키워주십니다!”라고 권면하자 위로를 얻었고, 지금 그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 학교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먹여 살리시는데 무엇을 걱정합니까? 직장이 여러분을 먹여 살립니까, 하나님이 먹여 살리십니까?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먹고사는 것이 직장에 달려 있다고 믿는 순간, 그것은 저주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살리신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무슨 결정을 내리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과거 저와 함께했던 수많은 귀한 동역자들은 퇴근 후 교회로 달려와 헌신적으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직장 생활에 지장이 생겼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깟 세상일 하나 책임져 주지 못하시겠습니까? 사람의 내면이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으면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5. 하나님의 말씀은 한 알의 씨앗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알의 씨앗과 같습니다. 왜 도정된 쌀알에 비유하지 않았을까요? 쌀알은 생명이 없는 죽은 것이지만, 씨앗은 살아있어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씨앗은 자라나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생명의 씨앗이며, 우리에게 참 생명을 줍니다. 그것은 영생의 말씀입니다. 인생의 참된 의미는 염려와 근심, 불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갖 염려를 다 짊어지고 살아갈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생명의 열매를 맺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력과 지혜와 능력이 충만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누구나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것이 축복의 말씀이라고 가르치면, “에이, 직장에서 돈 버는 게 훨씬 실속 있지”라며 세상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축복의 역사가 나타나고, 어떤 이에게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역사하는 사람에게는 늘 역사하고, 역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늘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내면에 무엇을 믿고 있느냐의 차이 때문입니다. 직장에 대한 염려와 스트레스가 가득할 때, 시간을 더 많이 쏟아붓는다고 스트레스가 해결됩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화인 사명신학이 발견한 위대한 진리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신뢰하면 모든 좋은 것에 결코 부족함이 없다.’
시간을 쏟아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곧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것입니다. 시간은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하나님께 바친 사람에게 시간을 드리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믿지 못합니다. 믿지 못하니 열매를 맺지 못하고,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만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을 내려놓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 명백한 진리를 전해도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세상의 염려를 쫓아간다면, 그 결말은 뻔한 것입니다.
6.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왜 말씀의 능력이 나타납니까? 진실로 믿는 자에게 어찌 열매가 없겠으며,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없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투자하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위대한 투자는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사역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평신도 시절부터 뼈저리게 확신했던 진리입니다. 그렇기에 늘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했고 하나님을 알기를 갈망했습니다. 하나님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오직 그분만을 섬겼습니다. 아무리 바쁘다고 핑계를 대도 암에 걸리면 모든 바쁜 일이 올스톱됩니다. 암 앞에서는 왜 바쁘지 않습니까? 생명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암이 중요합니까, 직장이 중요합니까? 둘 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만을 섬기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일이 바빠서 주님을 섬길 수 없다는 말은 다 핑계요 속임수입니다. 내려놓을 수 있으면서도 내려놓지 않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만이 영생의 말씀입니다.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이것은 타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를 때 평생 부족함이 없음을 믿으십니까? 하나님 나라에 심는 자는 결코 궁핍해지지 않습니다. 평생 넘치는 기쁨과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얻을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나타내고 건강과 하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직장을 의지하는 자에게 직장이 줄 수 없는 것까지도 하나님은 능히 주실 수 있습니다. 직장과 사업이 줄 수 있는 것은 물론, 세상이 줄 수 없는 것까지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는 여러분에게 이 지혜로운 선택을 할 믿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로병사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은 이생뿐만 아니라 영원의 세계까지 다스리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너무 극단적이라고 말하지만, 진리는 타협할 수 없으며 절대적인 것입니다. 1 더하기 1은 오직 2일 뿐, 3이나 4나 5가 될 수 없습니다. 계산이 틀렸을 때나 3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배타적이며 타협이 없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져 믿음과 말씀을 결합할 때, 여러분의 삶에는 반드시 풍성한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눈앞의 어려움에 미혹되지 마십시오. 미혹되는 순간 마귀에게 속아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7. 가시떨기에 뿌려진 것은 결실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들었으나 가시떨기에 떨어진 자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직장, 자녀, 사업, 온갖 세상의 염려에 짓눌려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이걸 해야 돈을 벌고 저걸 해야 돈을 번다, 주님을 믿는 게 밥 먹여주냐’라는 재물의 유혹까지 더해지니, 결국 천국 말씀의 보배를 눈앞에서 스쳐 지나쳐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상하이 CICC의 서른 살 여성은 100만 위안의 연봉이 35만 위안으로 깎이자 투신하고 말았습니다. 돈이 생명을 대신할 수 있습니까? 결코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돈을 위해 살았기 때문에 돈이 줄어들자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스스로 목에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중심은 이생의 논리 체계에 속해 있습니까, 영생의 논리 체계에 속해 있습니까? 이생의 논리를 품고 살아간다면 반드시 재물의 올무에 단단히 얽매이게 됩니다. 생각의 그릇이 너무 좁아 세상 염려와 돈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니, 영생의 보배로운 말씀은 쓰레기통에 내던져버리고 썩어질 쓰레기만 끌어안고 사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묻습니다. “에서의 삶이 복되었습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저주 아래 살았던 자의 삶이 어떻게 복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에서가 많은 재물을 가졌다는 이유로 잘 살았다고 착각합니다. 돈이 많다고 복입니까? 조조의 삶이 진정 복되었습니까? 돈을 믿고 돈을 의지하지만, 돈은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사람을 미혹할 뿐입니다.
제가 아는 한 사업가는 엄청난 부자이지만, 지적장애가 있는 아들의 문제는 돈으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수백 근이 나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절망감은 돈으로 채울 수 없기에 다른 것으로 마음을 달래려 합니다. 미혹된 것입니다. 어떤 이는 무리하게 애플을 인수하려다 6억 위안(약 1,100억 원)의 빚을 졌습니다. 그 빚을 갚으려고 닥치는 대로 일하며 장례식장에서 스탠드업 코미디까지 하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돈에 완전히 얽매여 혹사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채권자들은 그가 죽을까 봐 날마다 안부를 묻습니다. 돈에 꽁꽁 묶인 채 가시떨기에 짓눌려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그 마음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 상태에서는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오직 빚의 열매만 맺힐 뿐입니다.
8. 이스라엘 사람들을 거울로 삼으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의 치명적인 문제는 눈앞의 안락한 일상에만 매몰된 것이었습니다. 삶을 챙긴다며 아등바등 살다가 결국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깊이 빠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귀찮고 성가신 일로 여겼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도 온전한 것은 아까워 자기가 챙겨두고, 다리 저는 것, 병든 것만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돈을 아끼려다가 도리어 극심한 저주를 자초한 것입니다. 구멍 뚫린 전대에 돈을 넣는 꼴이 되어, 열 말을 기대했던 밭에서는 다섯 말만 거두었고, 곡간에 들여놓으면 하나님께서 다 불어 없애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이 불어버리시면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자신의 돈벌이를 방해한다고 생각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재물의 유혹입니다.
‘남의 돈줄을 끊는 것은 부모를 죽이는 것과 같다’는 세상 속담처럼, 사람들은 돈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괴로워합니다. 조금만 바빠지면 하나님을 팽개치고, 사역과 헌신은 뒷전으로 미뤄버립니다. 영적 안목을 열어 역사를 거울로 삼으십시오. 그것은 나라가 망하고 가정이 무너지는 멸망의 길입니다. 재물은 결코 하나님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에 와서조차 하나님을 이용해 돈을 벌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천박한 욕망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주님의 관심은 돈이 아니라 영혼을 얻는 데 있습니다. 중심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패망하게 됩니다.
9. 하나님이 우리를 먹여 살리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재물의 유혹에 쉽게 빠지지 않으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여 살리신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수많은 은혜를 경험하고도 뒤돌아서면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결과라고 착각합니다. 여러분이 사업가라면, 자신이 번 모든 돈이 자신의 능력으로 번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세상에서도 국가의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돈을 벌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법과 정책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영적으로 망하게 됩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6:26)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마태복음 6:30)
두 가지 체계 중에서 지혜로운 선택을 하십시오. 사람들이 왜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빠집니까? 돈을 의지하고 자기 두 손의 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돈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좁은 길이요 좁은 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음을 전심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공중의 새도 심지도 거두지도 않지만 하나님께서 먹이시는데, 하물며 주님의 자녀인 우리이겠습니까? 내일 불에 던져질 들꽃도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먹여 살리십니다. 이 믿음의 관점을 굳게 세우셨습니까? 하나님과 이와 같은 신뢰의 관계를 맺으십시오. 하나님을 뵙는 그날까지 주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먹이시고 입히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두 손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이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와 확신을 줍니까? 하나님께서 어찌 여러분을 책임지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말씀은 과거 제가 중년의 위기와 실직 속에서 여러 채의 주택담보대출을 갚아야 하는 막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저를 붙들어준 가장 강력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신실하게 먹이셨고, 우리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삶에서 결핍을 느낀다면, 그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결핍이요 믿음의 결핍입니다. 기쁨이 부족합니까? 만족이 없습니까? 하나님은 나의 공급자이시며, 나의 영생이시요, 나의 영광이시며, 나의 유일한 전부이십니다! 이 믿음을 품고 저와 함께 영생의 길을 걸어갑시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선택입니까!
찬양을 부르며 오늘 예물을 준비하겠습니다. 만약 헌금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면 헌금하지 마십시오. 억지로 드리고 나서 마음에 시험이 들면 드리는 여러분도 괴롭고, 보는 저도 안타까우며,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가짜 돈을 바치듯 드려 하나님의 전과 금고를 더럽히지 마십시오. 헌금의 의미를 온전히 깨달은 후에 드리십시오. 헌금은 단순히 물질이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넘어, 내 온 생명을 주님께 바치는 거룩한 고백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돈이 부족하신 분이 아니며, 우리에게 복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이시며 하나님이 나의 전부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헌금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믿음으로 자원하여 드린 자는 결코 후회하지 않으며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다 함께 손을 들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삶을 주님 앞에 거룩한 산 제물로 온전히 올려드립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세상의 헛된 재물에 미혹되지 않게 하시고, 이 세상의 모든 염려와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고 평생 부족함 없이 먹여 살리시는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임을 온전히 신뢰하게 하옵소서. 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얼굴을 뵈올 때까지 이 땅에서 힘차게 달려가게 하옵소서. 주여, 나의 생명을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오니 열납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헌신이며 우리의 마땅한 영적 예배입니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