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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사도행전 21장 - 하나님을 위해 유대인을 얻으라

2023-10-11 57,738 使徒行传 使徒行传21章 使徒行传第二十一章 目标明确 为神热心 只听从神的旨意 用生命侍奉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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使徒行传21章-保罗上耶路撒冷
  • 1 我们离别了众人,就开船一直行到哥士。第二天到了罗底,从那里到帕大喇,
  • 2 遇见一只船要往腓尼基去,就上船起行。
  • 3 望见塞浦路斯,就从南边行过,往叙利亚去,我们就在推罗上岸,因为船要在那里卸货。
  • 4 找着了门徒,就在那里住了七天。他们被圣灵感动,对保罗说:“不要上耶路撒冷去。”
  • 5 过了这几天,我们就起身前行。他们众人同妻子儿女,送我们到城外,我们都跪在岸上祷告,彼此辞别。
  • 6 我们上了船,他们就回家去了。
  • 7 我们从推罗行尽了水路,来到多利买,就问那里的弟兄安,和他们同住了一天。
  • 8 第二天,我们离开那里,来到凯撒利亚,就进了传福音的腓利家里,和他同住。他是那七个执事里的一个。
  • 9 他有四个女儿,都是处女,是说预言的。
  • 10 我们在那里多住了几天,有一个先知,名叫亚迦布,从犹太下来,
  • 11 到了我们这里,就拿保罗的腰带捆上自己的手脚,说:“圣灵说:犹太人在耶路撒冷,要如此捆绑这腰带的主人,把他交在外邦人手里。”
  • 12 我们和那本地的人听见这话,都苦劝保罗不要上耶路撒冷去。
  • 13 保罗说:“你们为什么这样痛哭,使我心碎呢?我为主耶稣的名,不但被人捆绑,就是死在耶路撒冷也是愿意的。”
  • 14 保罗既不听劝,我们便住了口,只说:“愿主的旨意成就”,便了。
  • 15 过了几日,我们收拾行李上耶路撒冷去。
  • 16 有凯撒利亚的几个门徒和我们同去,带我们到一个久为(久为:或译老)门徒的家里,叫我们与他同住;他名叫拿孙,是塞浦路斯人。
  • 17 到了耶路撒冷,弟兄们欢欢喜喜地接待我们。
  • 18 第二天,保罗同我们去见雅各;长老们也都在那里。
  • 19 保罗问了他们安,便将 神用他传教,在外邦人中间所行之事,一一地述说了。
  • 20 他们听见,就归荣耀与 神,对保罗说:“兄台,你看犹太人中信主的有多少万,并且都为律法热心。
  • 21 他们听见人说,你教训一切在外邦的犹太人离弃摩西,对他们说,不要给孩子行割礼,也不要遵行条规。
  • 22 众人必听见你来了,这可怎么办呢?
  • 23 你就照着我们的话行吧!我们这里有四个人,都有愿在身。
  • 24 你带他们去,与他们一同行洁净的礼,替他们拿出规费,叫他们得以剃头。这样,众人就可知道,先前所听见你的事都是虚的;并可知道,你自己为人,循规蹈矩,遵行律法。
  • 25 至于信主的外邦人,我们已经写信拟定,叫他们谨忌那祭偶像之物,和血,并勒死的牲畜,与奸淫。”
  • 26 于是保罗带着那四个人,第二天与他们一同行了洁净的礼,进了殿,报明洁净的日期满足,只等祭司为他们各人献祭。
  • 27 那七日将完,从亚细亚来的犹太人看见保罗在殿里,就耸动了众人,下手拿他,
  • 28 喊叫说:“以色列人来帮助,这就是在各处教训众人糟践我们百姓和律法,并这地方的。他又带着希腊人进殿,污秽了这圣地。”(
  • 29 这话是因他们曾看见以弗所人特罗非摩同保罗在城里,以为保罗带他进了殿。)
  • 30 合城都震动,百姓一齐跑来,拿住保罗,拉他出殿,殿门立刻都关了。
  • 31 他们正想要杀他,有人报信给营里的千夫长说:“耶路撒冷合城都乱了。”
  • 32 千夫长立时带着兵丁和几个百夫长,跑下去到他们那里。他们见了千夫长和兵丁,就止住不打保罗。
  • 33 于是千夫长上前拿住他,吩咐用两条铁链捆锁;又问他是什么人,做的是什么事。
  • 34 众人有喊叫这个的,有喊叫那个的;千夫长因为这样乱嚷,得不着实情,就吩咐人将保罗带进营楼去。
  • 35 到了台阶上,众人挤得凶猛,兵丁只得将保罗抬起来。
  • 36 众人跟在后面,喊着说:“除掉他!”
  • 37 将要带他进营楼,保罗对千夫长说:“我对你说句话可以不可以?”他说:“你懂得希腊话吗?
  • 38 你莫非是从前作乱、带领四千凶徒往旷野去的那埃及人吗?”
  • 39 保罗说:“我本是犹太人,生在基利家的大数,并不是无名小城的人。求你准我对百姓说话。”
  • 40 千夫长准了。保罗就站在台阶上,向百姓摆手,他们都静默无声,保罗便用希伯来话对他们说:

《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는 <사도행전> 21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전에 우리는 이 장을 성경공부로 다루었고 설교할 때도 인용했지만, 당시에는 초점을 온통 야고보에게만 맞추었습니다. 야고보라는 인물을 분석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는데, 사실 이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연극을 볼 때는 조연이 아니라 주연을 보아야 합니다. 조연을 주연으로 착각하면 연극을 잘못 본 것이고, 연출가의 의도도 헛수고가 됩니다. 사실 이 장의 주인공은 사도 바울입니다. 본문의 내용만으로 주제와 핵심을 찾아내기란 꽤 어렵습니다. 우리는 먼저 사도 바울이라는 인물을 알아야 하고, 그가 무엇을 썼으며 무엇을 행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이 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많은 일을 하고 여러 곳을 다녔는데, 겉보기에는 매우 분주하고 고생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애쓴 결과는 온 성이 소동하고 사도 바울이 체포되어 쇠사슬에 결박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일찍이 성령께서 바울을 가로막으시며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권면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다른 서신들을 통해 이 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장의 주제는 ‘하나님을 위해 유대인을 얻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고, 베드로 및 야고보와 이미 분업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가고, 베드로와 야고보는 유대인에게로 가기로 말입니다. 사역의 분담은 이미 분명했지만,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어느 정도 마친 후에도, 여전히 예루살렘에 가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일하는 효율이 매우 높은 사람이었기에 수많은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저와 비슷합니다. 사람들이 제가 일하는 것을 보면 다들 의아해하며 '어떻게 저 사람은 저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을 빨리할 뿐만 아니라 대충 하지 않고 매우 정교하게 해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하루는 24시간이며, 누구도 28시간을 살지 않습니다. 모두에게 똑같은 시간이 주어졌는데 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낼까요? 머리가 맑고 일의 효율이 높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몇 마디 말을 배우신다면 여러분도 분명 높은 효율을 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명확한 목표, 분명한 전략, 올바른 방법'입니다. 만약 일을 할 때 목표가 불분명하고 전략이 뚜렷하지 않으며 방법마저 틀렸다면, 머리 없는 파리처럼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과 같습니다. 몹시 바쁘기만 하고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신속히 완수했고, 그 일을 마친 후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인데 왜 유대인 영역에 와서 몫을 챙기려 하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시장을 빼앗으러 온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이 복음의 유익에 함께 참여하기를 바라며 하나님을 위해 유대인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여러 번 읽어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더 깊이 이해하기

어떻게 해야 사도 바울을 더 깊이 알 수 있을까요? 그가 쓴 서신들을 읽어보아야 합니다. 그 서신들은 참으로 구구절절 심금을 울립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고린도전서 9:19-23)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었기에 하나님을 위해 유대인을 얻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마치 제가 중국인이어서 하나님을 위해 중국인을 얻고자 간절히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바울의 이러한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그는 왜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을까요? 절대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결코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나뉜 적이 없으며, 단지 당시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자신이 계시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말했는데, 이는 이전에나 지금이나 자신의 달음질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직분을 면직당할까 염려하여 잠시 상황을 완화하고자 베드로, 야고보 같은 이들과 다투지 않고 이방인의 사도로 만족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도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원래 이방인이 부정하다고 여겨 이방인을 얻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린도서>, <갈라디아서>를 읽어보면, 사도 바울의 논리 체계 속에는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구분하는 개념 자체가 전혀 없었음을 알게 됩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사실 그렇게 나누어서는 안 되며, 바울은 단지 이 사람들이 다 함께 복음의 유익을 얻기를 원했을 뿐입니다. 이 일은 결코 겉치레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겉치레였다면 바울이 목숨을 걸고 빗발치는 총탄과도 같은 위험을 무릅쓰며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더 깊이 알고자 한다면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유대인을 얻고자 갈망했음을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미 하나님을 위해 이방인을 얻었다

이때 바울은 마게도냐 등 각 지역에 이미 빌립보, 에베소, 고린도, 데살로니가 등 많은 교회를 세워 곳곳에 부흥의 꽃을 피웠습니다. 바울이 만약 사업을 했다면 엄청났을 것입니다. 단숨에 이런 거점들을 장악했으니 말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먼저 예루살렘에 갔다가 그 후에 로마로 가고자 했습니다. 결국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되었고, 이후 로마로 압송되었습니다. 바울은 원래 로마로 가려 했으니, 이렇게 되어 배삯을 아낀 셈입니다. 물론 이것은 제 농담입니다.

제가 바울이 로마에 가고 싶어 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요?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로마서>를 썼는데, 거기서 장차 기회가 되면 로마에 가겠다고 했고, 훗날 실제로 갔습니다. 바울은 갔을 뿐만 아니라 황제 앞에서도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로마에 도착해서 황제에게 예수님을 전했는데, 그들이 믿든 안 믿든, 제자가 되든 안 되든 바울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황제 앞에서 예수님을 증언할 자격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황제는 국사에 몹시 바쁜데 언제 바울의 이런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 있었겠습니까?

당시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가로막힌 장애물들을 점진적으로 제거해 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매우 명확한 전략 하나를 사용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사도들의 승인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사도행전> 15장과 <갈라디아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거침없이 전진하며 유럽과 아시아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튀르키예가 유럽 국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는 아시아에 속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튀르키예는 늘 유럽 쪽에 끼어들려고 하는데, 이는 인식의 문제입니다. 늘 유럽이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아시아의 시대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게도냐, 스페인, 키프로스 등은 모두 유럽에 속하며, 사도 바울은 당시에 이미 하나님을 위해 이방인들을 얻었습니다. 반면 야고보의 입장은 매우 확고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명확하게 구분했습니다. 사실 이는 몹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어떻게 이렇게 나눌 수 있습니까? 절반은 할례를 받아야 하고, 절반은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주 예수님은 얼굴 반쪽은 이렇고 반쪽은 저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음이 몹시 타들어 갔고, 하나님을 위해 유대인을 얻기를 갈망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 유대인을 얻기를 갈망했다

바울의 내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개념, 곧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개념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몸이며 나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고 우리 주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기에 늘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신 백성이 도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복음의 유익을 얻기는커녕 온갖 저주를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마음에 큰 고통을 느끼며 유대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및 다른 서신들을 쓸 때 끊임없이 유대인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모두 유대인이자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참 유대인이 누구인지, 가짜 유대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하나님의 약속이 유대인들에게 성취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습니다. 바울의 논증은 유대인 중 하나님께 속한 자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대단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서신서에 기록한 내용입니다. 바울 자신도 똑같은 열심이 있었기에 하나님을 위해 유대인을 얻고자 간절히 원했습니다. 왜 유대인을 얻고자 했을까요? 유대인들도 이 복음의 유익을 함께 누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저주를 받게 되었으니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바울은 자기 민족이 수많은 저주를 받는 것을 보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대가로 치르더라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단 한 번이라도 얻겠다고 결단했습니다.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사도행전 21:40)

저는 이러한 결단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 복음의 유익을 얻기를 원했고, 야고보나 베드로 같은 사람들도 깨어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야고보의 태도를 알고 있었으며, <갈라디아서>에서 야고보와 베드로를 매섭게 질책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목적은 그들을 깎아내려 가치 없는 자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야고보와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마음속으로 야고보와 베드로가 어떤 사람인지 뻔히 알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목회하던 이방인 교회들로부터 많은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으로 가져갔는데, 거기에는 거액의 부조금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베드로가 물질의 성의를 보아서라도 체면을 세워주며 이 복음의 진리에 귀를 기울여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사실 이 일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야고보와 베드로가 모두 예루살렘에 있었고, 바울의 설교를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은 주방의 기름, 소금, 간장, 식초, 설탕이 온통 뒤섞인 것처럼 온갖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야고보와 베드로는 겉으로는 바울과 원만하게 지냈지만, 바울 자신도 성전에 들어가면 틀림없이 유대인들에게 붙잡힐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처럼 총명한 사람이 야고보가 제안한 그 생각이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님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사도행전 21:20)

이것으로 그들의 태도가 단번에 드러났습니다. 율법에 열성을 내는 것을 여전히 좋은 일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사도행전 21:21-25)

이전에 제가 이 본문을 묵상할 때는 바울이 속아 넘어간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사실 바울은 속으로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며 이미 결박당할 것이라는 예언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그는 가야만 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유대인들도 이 복음의 유익을 함께 얻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마치 황지광이나 동존서가 자기 몸으로 총구를 막고 벙커를 폭파했던 것처럼, 자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은 것입니다. 마주할 상황이 계략이든 함정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유대인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을 얻기를 갈망했고, 또한 야고보와 베드로 같은 사람들을 얻고자 했습니다. 사실 야고보와 베드로도 <갈라디아서>를 읽어보았고, 바울이 세운 이방인 교회들이 극도로 부흥하는 것을 보며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야고보는 <갈라디아서>를 읽은 후 <야고보서>를 썼는데, 사실 한 조항씩 대조해 보면 서로 맞물리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야고보가 바울의 <갈라디아서>를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화기애애해 보였지만 사실상 원수를 대하는 듯했습니다. 야고보는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동생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넓은 마음을 품지는 못했습니다. 야고보는 굳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반으로 쪼개어, 절반은 유대인의 예수로, 절반은 이방인의 예수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복음의 유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루살렘의 유대인 교회는 이미 찢어지게 가난해졌고, 이후로는 갈수록 상황이 악화되어 재정이 바닥났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의 모금액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전달하며, 그들이 바울의 진심에 감동하기를 바랐으나 결과는 실망스러웠습니다. 물론 우리는 야고보 같은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고백한 것처럼 바울을 배우는 데 방향을 두어야 합니다.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고린도전서 9:22-23)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가 복음의 유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지켜보며, 복음 진리의 순전함을 위해 비록 <갈라디아서>를 써서 야고보와 베드로를 호되게 비판했을지라도, 여전히 그들 또한 복음의 유익을 얻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만약 저 같았다면 이런 사람들을 상대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에 비하면 저의 도량은 땅콩만 하고 머리는 호두알만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본보기입니다. 여러분 모두 공감하신다면, 우리 함께 사도 바울을 본받아 이 복음의 유익에 동참합시다. 병 고침을 받는 데 돈이 들지 않고, 재정의 축복을 누리며,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영원한 영광의 소망이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복음입니까!

어떤 위험도 가로막을 수 없다

비전과 꿈과 목표가 있는 사람은 어떤 위험도 가로막을 수 없으며, 이는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자세입니다. 서두에서 저는 여러분에게 목표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모두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사는가?" 어떤 사람들은 큰 뜻 없이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살며 직장 다니고 입에 풀칠이나 하기를 바랍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목표를 그런 수준으로 정해버리면, 그들이 살아내는 인생의 결과 또한 매우 낮은 차원에 머물게 됩니다.

저는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몇 달 전 70대의 상당한 부자를 만났는데 몹시 고단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고단함을 다른 사람들은 모를 뿐이었습니다. 그분이 제게 식사를 대접하기에 이야기를 나누며 제가 가진 가장 좋은 것, 곧 이 복음의 유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당시 제가 그분에게 "수십 년 동안 쌓아온 경험이 그렇게 풍부하신데, 그 경험을 젊은 세대에게 전수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싫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것은 대화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대화 중에 그분은 자기가 골프 치는 것을 좋아한다고 은근히 자랑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골프라는 게 쳐봤자 작은 공 하나 날아가는 것뿐인데 무슨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 물론 폼나게 스윙하고 노래방에서 노래도 잘 부르십니다. 하지만 사람이 날마다 그렇게만 산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 후 몇 달간 그분을 보지 못했는데, 한번은 호텔에 묵다가 밤에 불을 켜지 않고 일어나다가 바닥에 주저앉으며 소파 팔걸이에 부딪혀 갈비뼈 두 개가 부러져 몹시 고생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아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제가 행한 기적들을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데, 그들도 저와 함께 이 복음의 유익을 누리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그들이 팔선 조각상이나 온갖 우상을 얼마나 모아두었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고, 오직 그들이 이 복음의 유익을 얻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그분은 제가 하는 일처럼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젊은이들을 훈련하고 싶다고 말하며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그분이 복음에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가 사람들 가운데 살아가면서 일생의 목표를 '사람들이 복음의 유익을 얻게 하는 것'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사람에게 절로 영적 아우라를 띠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오직 돈 버는 생각뿐인데, 그럴 거면 차라리 집에서 돈을 찍어내지 그 고생을 하며 돈을 법니까? 제 말을 들으니 자신의 차원이 너무 낮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저 같은 사람은 오직 사람들이 복음의 유익을 얻기만을 바라며, 이는 실로 강력한 침투력을 가집니다. 저는 사람들에게서 무언가를 얻고자 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설령 위험이 따를지라도 저는 그가 복음의 유익을 얻게 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축한다는 매우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라는 비전을 받았을 때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목표를 갖고 삶의 이유를 알게 되면 온몸에서 사람을 감화시키는 영향력이 흘러나옵니다. 당신을 만나는 사람마다 기뻐하게 되며, 함께 술 한잔 기울이는 것보다 훨씬 더 즐거워합니다. 입을 열어 복음의 유익을 전하면 참으로 강력한 파급력이 있습니다.

바울의 목표는 매우 명확했습니다. 그렇게 행하는 데 위험이 따랐을까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을 위해 이방인들을 얻었고,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유대인들을 얻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영역이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에게 배정된 구역이었을지라도 상관없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 헌신했습니다. 이 장을 보면 성령께서도 그를 만류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성령이 옳았을까요, 아니면 바울이 옳았을까요? 많은 사람은 바울이 성령의 권고를 어겼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으실 수는 없습니다. 만약 계속해서 이 길에 위험이 있다고 알려준다면 그래도 가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이미 우리에게 명백히 계시되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 행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까? 당연히 압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사도행전 21:4)

성령의 감동을 받는 것이 더 정확할까요, 아니면 우리의 목표가 더 정확할까요? 당연히 우리의 목표가 더 정확합니다. 제게도 이런 성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목표가 세워지면 그 푯대를 향해 맹렬히 달려가며, 피곤해 쓰러질지언정 멈추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당연히 피곤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쑤셔서 인상을 찌푸리기도 하지만, 여러분이 보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면 이내 생기를 되찾습니다. 저는 바로 이 일을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세운 교회가 왜 '순전한 복음'이 아니라 '사명 신학'이라 불릴까요? 저는 이를 위해 태어났고, 이를 위해 살며, 이를 위해 이 세상에 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게 주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룰 때까지 이 길을 달려갈 것인데, 어찌 빛이 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반드시 목표를 명확히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은 목표가 생기면 고도로 집중하게 됩니다. 목표가 없는 사람은 쉽게 마음이 흐트러져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잊어버리고 툭하면 스스로 흔들립니다. 바울의 목표는 대단히 확고하여 제자들의 감동으로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주 예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하셨다고 말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을 들먹인다고 해서 바울이 그 감동을 곧이곧대로 믿을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울처럼 목표가 뚜렷한 사람은 마귀가 속이기 어렵습니다. 감동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도 명확한 목표가 중요하며,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바울을 말리지 못하자 결국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제야 제자다운 말을 한 것입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되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사도행전 21:8-11)

여기서 빌립의 네 딸이 모두 처녀로서 예언하는 자들이었다고 특별히 언급합니다. 나이가 몇 살인지는 나오지 않지만, 시집가지 않고 하나님께 헌신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예언을 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언하는 자라고 명시된 이상 분명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해를 당할 것을 예언했을 것입니다. 나중에는 이것도 통하지 않자 이전에 예언했던 아가보라는 인물이 다시 나타납니다. 아가보는 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발을 묶으며 바울이 이처럼 결박당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바울이 들을 줄 알았지만, 바울은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만약 우리의 목표가 돈을 버는 것이라면 흔들림 없이 돈을 열심히 버십시오. 상인이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의 목표가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의 유익을 얻게 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표가 있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는 사람의 삶의 방식이며, 결코 시류에 휩쓸려 이리저리 떠돌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제가 말씀드리는 목표에 따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목표가 분명하다면 돈 몇 푼 더 벌자고 목표를 바꾸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돈을 더 벌기 위해 일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저의 목표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을 할 때 수익이 생길까요? 당연히 생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덤으로 더해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빌립의 네 딸과 아가보를 비롯해 수많은 선지자가 바울에게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이들은 당대의 저명한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이 찾아와도 바울은 듣지 않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들먹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우리 안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므로 누구도 말릴 필요가 없습니다.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심령에 강력한 침투력이 있어 어디를 가든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며 다른 군더더기가 필요 없습니다.

제가 어떤 사업가를 접대한 적이 있는데, 그가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는 모두 우리 팀이 개발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다른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주 예수님을 위해 그가 복음의 유익을 얻게 하는 데에는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사업가가 기업 경영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기에 경영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고, 그러자 그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저는 그가 복음의 유익을 얻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사도 바울이 행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과 판박이처럼 같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고난당하시는 것을 가로막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가로막으려다 무안만 당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막아섰지만 역시 무안만 당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속이기 어려우며 사람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건대, 우리 가운데에는 이런 무의미한 것들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있습니다. 몇 년 전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툭하면 선지자를 들먹였습니다. 선지자가 하는 말이 진짜인지 누가 압니까? 어떤 교회에서는 무심코 "당신은 사도입니다" 하면 사도가 되고, "선지자입니다" 하면 선지자가 되며, "복음 전하는 자입니다" 하면 복음 전하는 자가 되는 등 이른바 5중 직임이라는 것을 남발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이런 허황된 것들이 없습니다. 그 선지자라는 사람은 얼마나 황당하던지요.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마귀의 화살이 저쪽에서 날아온다고 했는데, 눈을 떠보니 자기를 가리키고 있어서 기겁을 하고 부랴부랴 회개했습니다. 정작 자기가 왜 화살을 쏘는 자가 되었는지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저는 지난 수년간 수많은 선지자를 만났지만, 저의 기준으로 판단해 보건대 참선지자라 부를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거짓 선지자일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이것도 겸손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조차 제대로 모르는데 무슨 선지자 노릇을 한단 말입니까? 제가 강조하는 것은 목표가 분명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우 흥미로운 사례가 몇 가지 있습니다. 온몸의 관절이 아프던 사람이 저를 찾아와 기도받고 모두 나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치유를 받자마자 그의 집 근처에 있던 그 선지자가 나타나 저 같은 목사를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관절을 낫게 해 준 사람은 조심하고, 자신의 관절을 고치지 못했던 그 선지자의 말은 귀담아듣더군요. 이런 사람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입니까? 어쨌든 저는 그런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서는 누가 선지자라는 식의 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아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선지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가로막았지만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본받고 있음을 마음속으로 알았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 유대인을 얻고자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고,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되며,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 같이 되고, 사업가에게는 사업가 같이 되며, 기업가에게는 기업가 같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오직 그들로 하여금 복음의 유익을 얻게 하고 하나님을 위해 몇 사람이라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목표는 너무나 중요하며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게도 약간의 아쉬움이 있습니다. 저는 아직 바울만 한 그릇이 되지 못하여 끊임없이 배우는 중입니다. 목회자들을 섬기러 갈 때면 매우 망설여지는데, 그분들을 섬기기가 참으로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다들 자기만의 방식이 확고합니다. 그들에게 틀렸다고 지적한들 30년 동안 사역해 온 분들이 수긍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제아무리 말씀을 잘 전한들 자기 혼자만 옳고 다른 사람은 다 틀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상대가 누구이든 오직 하나님을 위해 몇 사람이라도 얻어 그들로 하여금 이 복음의 유익을 누리게 해야 합니다. 비록 힘들고 완고할지라도 기회만 있다면 저 자신부터 변화되어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 이전에는 이런 사람들을 보면 얼른 피해버렸지만, 이제는 그들이 복음의 유익을 얻기를 바랍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저것 비판하기만 바빠서 귀신과 싸우지 않고 목회자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우리는 그들이 이 복음의 유익을 얻기를 간절히 바라야 합니다.

결론

이 장에는 제가 미처 다 읽지 못한 내용들이 있으니 여러분이 직접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사도행전 21:28-31)

성 전체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바울이 거룩한 성지를 더럽혔다고 주장했기 때문인데, 이는 실로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성지에 가지 마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성지를 더럽혔다는 말을 듣는다면 어찌 죽게 될지조차 모릅니다. 성지에서는 종종 사람이 밟혀 죽는 사고가 발생하니 그런 소동에 끼어들지 마십시오.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사도행전 21:26-27)

제사장이 그들을 위해 제사 드리기를 기다리는 데 7일이 걸렸는데, 사실 바울은 이런 의식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7일 동안 사람들은 이미 사전에 모의하여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폭동을 꾸몄습니다. 바울을 잡기 위해 온 성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빼앗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는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감이러라 (사도행전 21:32-36)

만약 이 천부장이 일찍 와서 바울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바울에게 침을 뱉어 질식시키거나 발로 밟아 죽였을 것입니다. 누가 이런 대가를 치르고자 하겠습니까? 바울은 복음을 전할 기회 한 번을 얻기 위해 목숨의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이 복음의 유익을 나누기 위해 그리했으나, 결국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바울이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단정하지 마십시오. 유대인 중에서도 이것이 참 복음임을 믿은 자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이후 바울은 그곳에서 설교를 한 편 전했고, 2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다시 로마로 이송되어 로마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현지의 총독, 고위 관료, 분봉왕에 이르기까지 모두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이는 오직 사람들로 하여금 이 복음의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복음의 유익을 얻을 수 있을지는 여러분 각자의 몫에 달렸습니다. 입을 열어 전할 것인지, 사람들과 함께 이 복음의 유익을 나눌 것인지 또한 여러분 스스로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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