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 건축하기’ 시리즈의 일곱 번째 강의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신다면 여러분이 여전히 빚을 지고 살겠습니까? 저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데도 빚더미에 앉아 있는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데 내 삶이 매우 힘들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데, 온몸에 병이 가득하지만 그래도 꿋꿋이 믿고 있으니 내가 얼마나 위대하냐”라고 말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아주 큰 착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울 때는 반드시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전하는 일곱 번째 강의의 제목은 “너는 삼가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엔지니어로 일할 때 매사에 신중하고 엄격하게 일하는 직업적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엔지니어라는 직무는 신중하지 않고서는 결코 잘 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중함은 단지 엔지니어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바로 이 요구가 주어집니다. 일을 할 때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나답과 아비후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불에 타 죽게 될 것입니다.
어젯밤에 몇몇 동역자들과 함께 인터넷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것에 관한 많은 자료를 보았는데, 정말 온갖 이야기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양식입니까? 아닙니다. 사실 때때로 사람들은 “당신만 맞게 하는 거냐?”라고 말합니다. 저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맞으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모두 하나님께 배워야 하며, 삼가 조심하고 엄격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항공 엔지니어가 사람을 하늘로 띄워 올렸다면, 그 사람이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착륙할 수 없는 비행기를 여러분은 감히 타시겠습니까? 비행기를 탔는데 사람이 추락하고, 비행기가 올라갈 수는 있어도 내려올 수는 없다면 끝장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완전히 마침표를 찍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공 엔지니어는 엄격해야 합니다.
제 동료가 이야기해 주었는데, 한번은 시험 비행 조종사들이 엔지니어들이 연구 개발한 비행기를 몰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비행기 안에는 총 네 명의 조종사가 타고 있었는데, 결국 세 명이 사망했습니다. 그 비행기가 착륙하는 과정에서 지면과 얼마 떨어지지 않았을 때 갑자기 비행기 바닥이 위로 뒤집혔고, 조종석이 땅바닥에 긁히면서 결국 사포처럼 갈리다가 폭발해 버렸습니다. 사고 원인을 조사해 보니, 한 부분에서 엔지니어가 -1을 1로 잘못 표기한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1과 1의 차이는 단순한 마이너스 기호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목숨이 달린 문제였습니다.
그 후 저는 목회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일에는 더욱 신중함이 필요하며,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양식대로 행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영적 세계에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의 기본 원칙을 굳게 지켜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신중함’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입니까?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지시한 것은 효력이 없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만이 효력이 있습니다. 내 뜻은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이 중요합니다.
사실 가장 엄격한 것은 없으며 오직 더 엄격해질 뿐입니다. 지금까지도 저는 하나님께서 행하고자 하시는 사역을 두렵고 떨림으로 행하며 이 원칙을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역사이기에 장난이 아닙니다. 저는 나답과 아비후처럼 되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건대, 화인 사명 신학은 많은 기이한 현상들을 설명해 줍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선생님, 이 목사님은 주님을 매우 사랑하는데 어쩌다 암에 걸렸을까요?”라고 묻습니다. 그가 말한 사람들 중에는 제가 아는 사람도 있는데, 만약 여러분도 그를 안다면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가 사람의 뜻대로 교회를 세웠으니, 나답과 아비후처럼 된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나답과 아비후처럼 되고 싶다면 아주 쉽습니다. 교회를 세울 때 제멋대로 하면 됩니다. 교회 간판만 걸어놓고 하나님의 임재는커녕 귀신 떼만 불러들이는 그런 교회를 절대 세우지 마십시오. 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세워지지 않고 귀신의 뜻대로 세워진다면 큰일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삼가 조심하여, 하나님께서 산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양식대로 온갖 기구를 만들어야 합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저희가 처음에 교회를 세울 때, 맨 처음에는 저주받은 교회를 세웠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음이 부드러웠기에 금방 잘못을 깨닫고 ‘이건 아니다, 빨리 고치자’라고 반응했습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분명 제 생각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한다고 해서 그들이 올까요? 불가능해 보이지 않습니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괜찮다, 나중에 그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자.’ 그렇다면 무엇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았을까요? 소고기 장조림, 닭구이, 오리구이로 끌어모았습니다.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닭구이, 오리구이, 소고기 장조림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깊이 회개했습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소고기 장조림보다 훨씬 더 좋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사람의 평생의 모든 문제는 예수님을 떠날 수 없고, 하나님을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직장과 일상생활의 모든 문제에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 당시 교회에 방을 얻어 살면서 집주인과 문제가 생긴 사람이 있으면 목회자가 가서 중재해 주기도 했습니다. 또 일자리를 구하는 데 문제가 있는 등 아무튼 문제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이러한 문제들이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직장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오더라도, 이 사람이 저주 가운데 살고 있음을 알고 복을 받는 일부터 먼저 바로잡아 줍니다. 사람이 엄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어떤 프레임을 씌우려 해도 쉽지 않습니다. 한 목사님이 저를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당신들이 이단이냐고 묻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그럼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분이 말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살펴보았고, 당신들의 웹사이트에서 말씀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정말 꽤 많이 들으셨더군요. 제가 물었습니다. “그럼 조사해 보신 결과가 어떻습니까? 이단입니까?” 그분이 말했습니다. “이단은 아니지만, 매우 극단적입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어째서 극단적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하는 것이 극단적인 것입니까?” 그분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전하는 하나님의 기준이 매우 극단적입니다.”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는 극단적이어야 하며, 엄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하는 데 있어서는 조금도 타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양식대로 교회를 세우지 않고 엄격하지 못한 사례는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데는 몇 가지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 요소는 성경을 읽고 선악을 분별하는 것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기도입니다. 세 번째 요소는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처럼 치유와 축사를 행하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처럼 치유와 축사를 행하라』는 책을 썼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이십니다. 병을 고치지 않고 귀신을 쫓아내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단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지난 수년 동안 저는 하나님의 양식대로 교회를 세우지 않는 사례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깊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해하기 힘든 수많은 현상들을 자세히 관찰해 본 결과, 결국 단 하나의 원인으로 귀결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수년 전에 요실금이 있는 한 자매가 저에게 기도를 받으러 왔는데, 나이가 꽤 들었는데도 성인용 기저귀를 차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자매를 데리고 기도하여 요실금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회개했을까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우리 이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다시 자신의 교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너희만 맞게 하는 거냐? 어느 교회나 다 똑같지 않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사람에게 요실금이 생기게 하는 교회이고, 어떤 교회는 사람에게 치유와 축사를 경험하게 하는 교회이니 결코 같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는 사람을 암에 걸리게 하는 교회이고, 어떤 교회는 암이 치유받게 하는 교회인데 이것이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엄격하게 삼가 지켜 행하고, 어떤 교회는 느슨하고 흐리멍덩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번은 누군가가 저를 자신들의 집회에 초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집회를 인도하면서 기도를 시작하자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결국 저는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쓰러지고 나면 그것이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라며 겉보기에는 대단해 보였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오셔서 사역해 주십시오.” 그래서 저는 간단한 사역을 했습니다. 쓰러지는 것에 대해서는 제가 그들보다 훨씬 더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그렇게 쓰러지는 것은 제가 주님을 갓 믿었을 때 교회 안에서 크게 유행했던 것으로, 수십 년 전의 게임인데 그들은 여전히 그것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을 쓰러지게 하는 영상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은 다 쓰러지는데 자기 혼자만 안 쓰러져서 멍하니 있다가, 남들이 다 쓰러지는 것을 보고 얼른 자기도 쓰러졌습니다.
저는 예전에 보았던 광경들을 떠올렸습니다. 그 시절에 저는 제 주변 사람들이 올라가기만 하면 하나씩 쓰러지고, 쓰러지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너무 잘 압니다. 몇 달이 지나도 사람은 여전히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저는 의아했습니다. ‘사람들을 이렇게 쓰러지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쓰러져 있는 느낌이 그렇게 좋은가? 교회에 와서 쓰러져 누워 한숨 자는 게 무슨 대수인가?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저는 지금까지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현장에서 저에게 사역을 요청하길래, 저는 그렇게 쓰러지고 나서도 여전히 그대로인 사역을 가장 싫어하므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프신 분들은 손을 들어 주십시오.” 세상에, 현장에 암 환자도 있고 우울증 환자도 있고, 다들 매우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까 그렇게 쓰러지면서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어째서 여전히 그대로인가?’ 만약 다 나았다면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고, 사람을 제대로 쓰러지게 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참 이상하다고 느껴서, 제가 가장 잘하는 허리와 목 디스크 통증 사역을 하기로 했습니다. 허리, 목, 어깨, 고관절 통증 같은 것들은 제가 가장 자신 있는 사역입니다. 저는 뒤에 있는 사람이 앞에 있는 사람의 어깨를 잡게 하고, 함께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허리와 목 통증이 모두 나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치유하시고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사람을 쓰러지게 하시고는 그 사람이 예전 그대로인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쓰러지는 것에 하나님의 영의 역사가 있는가에 대해 우리는 함부로 말할 수 없으며, 분명히 역사하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도 그러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당시에 쓰러졌던 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이 신학은 아닙니다.
그 후로 저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는가?’를 생각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나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양식대로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가 예수님을 찾아와 유산을 나누어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관여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물러가라, 내가 상관할 바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부부가 싸우고 예수님께 찾아와 시비를 가려 달라고 해도 예수님은 “물러가라, 내가 상관할 바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병든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오면 예수님은 반드시 고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이며, 예수님께서는 진작에 이 일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지금 많은 교회에서 부부 세미나를 열어 이혼 위기의 부부들을 유람선에 태우고, 웨딩드레스를 입히고 의식을 치르며 평생토록 일부일처로 살 것을 권면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일들을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의식이 끝난 후 결국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대로 따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지 않으신 일은 우리도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우리가 힘써 행하면 모든 일이 단순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워가는 길에서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한 가지는,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여러 선지자들의 피로 기록된 것입니다. 인터넷을 보면 많은 목사님들이 감성적인 위로의 말(마음의 힐링)을 전하기 좋아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당신을 축복하십니다” 같은 말은 듣기에는 참 편안합니다. 하지만 화인 사명 신학에 오면 이것도 내려놓고 저것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며 규칙이 수두룩하니, 다른 곳에는 이런 요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요구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온갖 문제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하며, 다시 『사도행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한 자매가 제게 말하기를, 이전 교회에서는 모 사람 뒤에 서서 기도하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한 시간 동안이나 겹치지 않게 기도해서 뒤에 있는 사람들이 다 기다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맨 뒤로 배치하곤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할 말들을 그 사람이 다 해버려서 뒷사람이 기도할 말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이 사람이 우리 가운데 왔고, 우리가 그를 사역할 때 보니 깊이 얽매여 있었습니다. 한가할 때마다 음란물을 즐겨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기도했던 것입니까? 그저 존재감을 드러내려 한 것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더욱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핵심들을 따라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자이지, 화려한 기도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부모, 형제, 자매, 아내, 자녀, 집과 전토를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제자들의 무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을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은혜를 얻는 일입니다.
본문
우리가 지금 나눌 본문 말씀은 출애굽기 25장 40절로, 모세가 하나님의 성막을 지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나중에 성경을 읽으면서 다윗과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 그리고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도 모두 그 시대에 남겨진 것이며,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건축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건축하라’는 이 말씀이 제 뇌리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하나님, 저를 인도하셔서 주님의 뜻대로 주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축하게 하옵소서. 신중하고 엄격하게,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장난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건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어떤 사람들은 나답과 아비후처럼 되어 곧바로 불타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때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져 수많은 사람들의 문제가 해결되고, 포로 된 자가 자유를 얻으며 억눌린 자가 놓임을 받았습니다.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출애굽기 25:40)
너는 삼가 이 기구들을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 이 말씀이 얼마나 단순합니까, 어렵지 않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사람의 뜻대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러다가 암, 뇌경색, 심근경색 같은 것이 생겨 병원에서 호스를 꽂고 누워 있게 된다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기도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결단의 마음을 주셔서 주의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함을 택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에게 마음을 주셔서 주의 말씀으로 격려를 받아 주의 교회를 세우고, 주의 임재가 있는 교회를 세우며, 주의 뜻대로 행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주의 말씀을 믿고, 주께서 지시하신 대로 건축할 것입니다. 주의 영광이 반드시 우리 가운데 충만할 것이며, 주의 뜻이 반드시 우리 가운데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포로 된 자를 자유케 하시고 억눌린 자를 놓아 주옵소서. 우리가 주를 위해 살며,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 되심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배경
이 본문의 배경은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수백 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던 때를 가리킵니다. 나중에 그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택하셔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수백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빠져나간다는 것은 이집트 경제에 막대한 타격이었습니다. 이집트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수백만 명이 갑자기 떠나게 되었으니, 노예들은 다 일하는 사람들이자 가치를 창출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싱가포르에서 수십만 명의 가사도우미(헬퍼)가 떠난다면 싱가포르는 큰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거리에는 가사도우미 중개업소와 훈련소가 수없이 많습니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가사도우미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일하다 보면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틈만 나면 가사도우미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오자 이집트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집트 바로 왕이 그들을 쉽게 떠나보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떠나면 이집트의 노동력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하여 바로는 군대를 이끌고 추격했고, 결국 바로 왕과 그의 군대는 홍해 바다 밑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지나 마침내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모세는 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함께 사십 주야를 머물렀습니다. 사십 주야 동안 얼마나 많은 글을 쓰고 도면을 그릴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성막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를 포함한 전체 사역의 설계가 출애굽기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성전을 건축하는 방법을 글로 명확하게 묘사해 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사십 주야 동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성막을 어떻게 건축해야 하는지 묘사했고, 하나님께서도 우리 가운데 그분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모세가 산에서 받은 메시지 중에 특히 중요한 한마디가 있었습니다. “너희는 삼가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 모든 기구를 하나님의 지시대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모세는 왜 하나님께 ‘왜 이렇게 지어야 합니까?’라고 묻지 않았을까요?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하나님이 한 걸음씩 가르쳐 주시는 대로 들었지만, 결코 “왜요?”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왜요?”라고 묻기 시작하면 일은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이 ‘왜 이렇게 지어야 하는가?’라고 묻는 순간 틀어지게 됩니다. 비밀을 알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은밀한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지 않으셨고, 설령 말씀해 주신다 해도 그 설명을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만들어야 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것들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양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올라갔다면 나답과 아비후처럼 다른 불을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결코 그런 식으로 따지고 들지 마십시오.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끝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하기가 매우 어려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은 어떻게 하고 저 일은 어떻게 하라고 알려 주십니다. 여러분에게 읽어 드리겠습니다.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 높이는 한 규빗 반으로 하고 순금으로 안팎을 싸라고 온갖 설명을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설명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짓는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시기 위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이기에 하나님이 “나는 이런 것을 원한다”라고 말씀하시는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무 문제 없습니다. 하나님께 “왜 이런 성막을 원하십니까?”라고 물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심플한 인테리어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모던 차이니즈 스타일을 좋아하며, 어떤 사람은 일본식을, 어떤 사람은 자연 친화적 스타일을, 또 어떤 사람은 시골 농가 스타일을 좋아합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스타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드리건대, ‘왜’는 없습니다. 이는 하나의 태도를 훈련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데는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하는 태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공부할 때 결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방식으로 파고들지 마십시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수많은 말씀을 하시고 수많은 요구를 하셨지만, ‘왜’인지 이유를 설명하셨습니까?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왜 그런지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교회를 모래 위에 지으면 안 되는가? 왜 굳이 반석 위에 지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됐다, 너 같은 녀석은 저리 물러가라”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관리직을 맡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관리하는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늘 “왜요?”라고 묻는 사람입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입사한 사람이 오자마자 “왜 이렇게 해야 하나요?”라고 묻습니다. 제가 그 모습을 보며 “너한테 설명해 줘도 이해 못 한다”라고 말한다면 그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지지 않겠습니까?
제가 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수년간 쌓아온 경험으로 하는 것이며, 이렇게 해야 실수가 적기 때문이라고 말해 줄 수는 있다.” 그가 “왜요?”라고 합니다. 저는 “이유는 없어, 말해 줘도 넌 이해 못 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하나의 태도를 훈련하기 위함입니다. 모든 기구를 하나님의 뜻대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삼가 지켜 행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말뚝 쉰 개라고 하셨으면 쉰 개인 것이지, 마흔아홉 개로 해서는 안 됩니다. 마흔아홉 개로 해도 강도가 충분하지 않을까요? 충분합니다. 말뚝을 좀 더 굵게 만들어서 마흔여덟 개로 해도 되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왜’는 없습니다. 출애굽기 25장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시며, 네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를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중한 태도를 가져야 하므로, 온갖 기구를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만들어야 합니다.
성경에 아주 좋은 구절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모세가 그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모세라는 사람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수년 전 출애굽기를 읽을 때 저는 “하나님, 저도 모세와 같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왜’는 없습니다. 주께서 어떻게 하라 하시면 그대로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순종하며 나아가다 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나답과 아비후가 되지 않고 모세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성경공부를 하면서 이것은 무엇이고 저것은 무엇인지 자꾸 ‘왜’를 설명하려 드는데, 마치 하나님을 변호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이집트 사람 집안의 모든 장자를 치셨습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셨습니까? 장자들 중에는 좋은 사람도 많았을 텐데 왜 다 죽이셨습니까?”라고 묻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다 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가나안 사람들을 모조리 진멸하셨는데,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변호하며 ‘사실은 그런 뜻이 아니다’라는 둥 말합니다. 무엇을 변호합니까? 하나님께 그렇게 하실 자격이 없으시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죽이시겠다면 죽이시는 것이고, 나만 죽이지 않으시면 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저 사람 참 이기적이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일은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죽이지 마시고 차라리 절 죽여주세요”라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막을 건축하는 배경입니다. 금등잔대를 어떻게 만들고, 언약궤를 어떻게 만들며, 상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그 안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세워졌는데, 성소에는 상과 금등잔대를 두고, 지성소에는 언약궤를 두었습니다. 지성소는 일 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은 들어갈 수 없었으며, 들어가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대제사장이 들어갈 때 그 안에서 죽을까 염려하여, 죽으면 아무도 뛰어 들어가 그를 메고 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허리에 줄을 묶어 두어 죽으면 끌어낼 수 있게 했습니다. 이러한 논리가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보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임재를 보는 것입니다. 이상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헌물(봉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드리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과 그 기구의 형상을 따라 지을지니라.
이 봉헌이라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헌물을 권면하며 “물건을 가져오라”고 하면, 사람들은 집에서 쓰지 않는 낡은 옷이나 헌 이불 같은, 자기가 필요 없는 물건들을 가져옵니다. 우리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 저는 “집에서 쓰지 않는 낡은 밥솥이나 낡은 주전자를 가져오지 마십시오. 당신이 안 쓰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다니, 교회가 고물상인 줄 압니까? 당신들이 가져오면 내가 쓰레기를 버려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그런 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금, 은, 놋, 청색·자색·홍색 실, 가는 베 실, 염소 털,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 해달의 가죽, 조각목입니다. 이것들은 다 가장 좋은 것들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 눈에도 차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이 그것을 기쁘게 받으실 줄 압니까? 예를 들어 여러분이 거주하는 지역의 시장이나 도지사를 만나러 갈 때, 집에서 쓰지 않는 낡은 주전자를 가져가겠습니까? 그렇다면 평생 곤란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그렇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아리게 하고, 고통을 느끼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전에 헌금을 드릴 때, 저는 아픔이 느껴질 정도로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습관이 되어 아무리 드려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남는 장사인데 아플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제 평생에 가장 지혜롭게 내린 결정은 바로 봉헌하는 것이었으며, 죽어도 헌신하고 드릴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10원을 주시면 1원을 그분께 드립니다. 하나님이 내게 100만 원을 주시면 10만 원을 드립니다. 하나님이 내게 1,000만 원을 주시면 100만 원을 드리는데, 제게는 여전히 900만 원이 남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이득을 보는 일 아닙니까? 그러므로 봉헌은 은혜입니다. 우리 가운데서는 봉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봉헌은 여러분이 얻게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세울 때는 반드시 봉헌이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 소고기 장조림과 닭구이, 오리구이로 끌어모았을 때는 밥벌레들만 모여들었습니다. 나중에는 닭구이와 오리구이가 사라지고 도시락으로 바뀌었고, 도시락도 사라지고 몇 푼짜리 과일로 바뀌었으며, 과일도 사라지고 생수로 바뀌었습니다. 결국에는 생수 한 병을 가져갈 때도 1위안짜리 동전을 넣어야 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도매로 2전에 떼어와서 1위안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니, 왜 그렇게 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교회는 봉헌하는 곳이며, 봉헌을 훈련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새로 온 사람이라면 봉헌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교회는 이기적인 사람들을 훈련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드릴 사람들을 훈련하는 곳입니다. 봉헌하기 싫다면 다른 일을 하러 가십시오. 봉헌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까지도 교회가 사람을 봉헌자로 훈련하는 곳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문서 사역을 한다면 그것은 은혜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우리가 문서 사역을 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문서 사역을 하는 것은 성도들의 봉헌하는 태도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반면 그 목사님은 문서 사역을 할 때 돈을 써서 시급을 주며 사람을 고용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역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일어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사람을 이기적으로 훈련해서는 안 되며, 봉헌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가 봉헌을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봉헌자가 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보배로운 것을 내어놓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것이며, 여러분 위에 하나님의 영광의 몫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성소
“너는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너비는 한 규빗,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순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 테를 두르고 그 사면에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고 그 턱 주위에 금으로 테를 만들고 상을 위하여 금 고리 넷을 만들어 그 네 발 위 네 모퉁이에 달되 턱 곁에 붙이라 이는 상을 메는 채를 꿸 곳이며 또 조각목으로 그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라 상을 이것으로 멜 것이니라 너는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붓는 잔을 만들되 순금으로 만들며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쳐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결하고 등잔대 줄기에서 여섯 가지를 나오게 하되 다른 세 가지는 이쪽으로 나오고 다른 세 가지는 저쪽으로 나오게 하며 이쪽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쪽 가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을 같게 할지며 등잔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을 위하여 꽃받침이 있게 하되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며 또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며 또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게 하고 그 꽃받침과 가지를 줄기와 연결하여 전부를 순금으로 한 덩이로 쳐 만들고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둘지니 불을 켜서 앞을 비추게 하며 그 불집게와 불 똥 그릇도 순금으로 만들지니 등잔대와 이 모든 기구를 순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출애굽기 25:23-40)
성소는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우리는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하는 곳입니다. 제사장은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일반 백성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성소 안에는 상과 진설병, 그리고 금등잔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무엇을 세우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을 세우는 것입니다. 진설병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금등잔대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만날 수 있게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건축할 때는 반드시 진설병,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하고, 금등잔대, 즉 하나님의 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이 곧 일곱 등잔대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의 눈이 밝아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눈은 마음의 창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이 있는지 없는지는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의 눈빛이 어둡다면, 그 사람은 영 안에서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는 방언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깨달음의 기도(이성으로 하는 기도)로, 깨달음 가운데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영 안에서 끊임없이 훈련해야 합니다. 방언 기도를 많이 하여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위에 운행하시게 해야 하는데, 이것을 금등잔대라고 합니다.
제사장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불을 켜고, 늘 등잔을 관리하여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때로는 ‘이렇게 작은 잔에 기름을 부으면 금방 다 타버릴 텐데, 또 기름을 붓고 조금 이따가 또 기름을 부어야 하네’라는 생각이 듭니다. 잠을 자다가 불이 꺼져 버리면 큰일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등잔을 계속 관리해야 합니다. 왜 등잔에 기름 파이프를 연결해서 바깥에 있는 큰 기름통으로 바로 이어지게 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켜두면 영원히 꺼지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작은 등잔 그릇이라 제사장이 들어가서 조금씩 기름을 채워 넣어야 했고, 제사장의 끊임없는 관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방언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단지 기도 음원을 틀어놓고 듣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입을 열어 따라 기도해야 하며,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울 때, 맨 처음 했던 몇 가지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시간과 물질을 봉헌하도록 훈련하고,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했습니다. 당시에 우리 교회가 처음으로 이를 추진했을 때, 싱가포르의 모든 공휴일을 금식 기도로 드렸습니다. 기도가 끝난 후에 나눔을 더 가진 뒤에야 다들 다른 일을 하러 갔습니다.
교회의 모든 사람이 다 참여했고,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우리 가운데 함께하셨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도록 훈련합니다. 화인 사명 신학에 왔다면 필기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필기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필기를 하지 않는다면 무엇하러 왔습니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서는 안 됩니다. 나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매우 알찬 삶을 살게 되었고, 틱톡을 보거나 놀러 다니는 시간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그 덕에 수많은 재앙을 면하고 남에게 사기를 당하는 일도 피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성소입니다.
지성소
지성소 안에는 속죄소(시은좌)와 언약궤가 있고, 속죄소 위에는 두 그룹이 놓여 있으며,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할 일들과 장래에 관한 일들을 계시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지성소 안에서 죽은 대제사장이 있었을까요?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비책으로 줄에 방울을 달아 두게 하셔서, 잘못되면 시체를 밖으로 끌어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축할 때, 이 언약궤와 돌판은 곧 십계명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구약의 십계명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며, 신앙의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범하면 반드시 저주를 받습니다. 언약궤, 돌판, 그룹은 하나님을 만나 대화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금으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뜰과 성소와 지성소를 세워야 하며, 지성소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단번에 자신을 드리심으로 거룩하게 하셨고, 단번에 자신을 드리심으로 이후의 모든 제사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신약의 요구는 구약의 요구를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소나 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리는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받아 자신을 드릴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지성소로 나아갈 수 있으며, 이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 관한 일들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려면 지성소로 건축해야 합니다. 지성소로 세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온전히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할 때 여러분은 지성소에 이르게 됩니다.
지금도 저는 우리가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며,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의 교회와 그분의 백성에 관한 일들을 받는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문밖에 있을 수도 있고, 문을 열고 들어와 바깥뜰에 있을 수도 있으며, 물두멍을 지나고 또 지나 지성소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성소에 이른다면, 반드시 예수님을 닮게 될 것입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살아내게 하는 것이며, 이것을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살아내는 것, 여러분이 살아있을 때 지성소에 이를 수 있다면 이 영적인 여정은 진정 가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인 헌신의 길입니다. 가장 초기의 봉헌은 물질을 드리는 것이었지만, 지성소에 이르면 자신을 드려 완전히 번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며, 우리의 이러한 헌신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 주신 길이 바로 지성소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삼가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지성소에 이르러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갖추는 것입니다. 지금 거울을 보며 우리가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십시오. 우리의 모습이 저승사자 같다면 예수님을 닮기는커녕 아직 문에도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이 속히 깨닫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걷는 이 길은 삶이 조금 더 나아지고, 빚이 조금 줄어들고, 병이 조금 줄어들어 좀 더 편안하게 살고 더 번창하는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소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을 받고 지성소로 나아가 승리의 길을 걷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버리며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버려야 한다고 하신 것은, 겨우 제자가 되는 기본일 뿐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의 승리의 길은 아직 멉니다. 그러므로 저는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 알기 시작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가야 할 헌신의 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쉽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육에 속한 악한 행실을 끊어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며, 비할 데 없이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계시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알고 보니 지성소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것입니다. 지금부터 사모하십시오. “선생님, 당신은 도달했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진실로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모두 손을 맞잡고 이 길을 달려가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게 합시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