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Q1:老师,心里不喜乐的时候,很难走出来,应该怎么办?
心里不喜乐的时候,先从逻辑上说:我没整对,记住这就叫悔改。心里不喜乐还给自己找诸多的理由,那就是一个人生的悲剧。人为什么整错了还找一大堆的理由呢?那就是很荒谬啊。其实很多时候我们的理由都是很荒谬的,但是我们就信誓旦旦,就觉得自己可有理了,这是一种愚昧。
心里不喜乐的时候,一定要知道自己整错了,就是把人活着这事儿整错了。你如果常常不喜乐,喜乐的时候就是占便宜的时候喜乐一小会儿,过后又不喜乐了。为啥?因为后悔占便宜占少了。
所以我想告诉大家,人心里不喜乐,那就是最致命的问题啊。常常不喜乐,将来一定换来一场大病。你一定要,一定要好好保养。怎么保养?在灵里头保养,让我们的灵越来越兴盛,起码我们照着神的话去行。那怎么走出来?先说自己整错了。你悔改了以后,赶紧灵里祷告,愿神的灵充满你。
Q2:老师,什么是受受?
受就是给,受就是领受。这个给出去和接受,给和接受这么两个词儿。
Q3:老师,怎么对付那个很强烈的想讲理的感觉?
这个很强烈的很想讲理的感觉,就是一个肉体,人天生就是这样。也就是说在大街上抓一把,几乎没有一个不是这样。那有的人是想讲理,但他嘴笨,嘴巴像棉裤腰,所以他讲不了。一讲,一着急就结巴了。所以说不是说他不想讲,是他讲不了。
那怎么办?其实对付肉体,就是耶稣基督信仰的一个很关键的组成部分。对付啥?对付讲理。我想这是一个很神奇的福音真理。就是人越多属肉体,他就多喜欢讲理。人多么想识别善恶,就多么喜欢讲理。因为讲的理都是人的理,很少人讲神的理,很少人讲耶稣基督的理。
Q4:老师,保罗怎么做到:处卑微,处卑贱,处丰富,或饱足,或饥饿,或有余,或缺乏,随时随在都得了秘诀?
他是信靠神啊。那其实我们活得好的时候我们信靠神,活得不好的时候我们就不信靠神。这个话听起来好像是很正常,其实不正常。你啥时候都得信靠神。
我给大家说一下,人如果把活着这事儿活成虚空的虚空。你如果真的知道活着是毫无意义的,你就把这些事看破了。看破了以后,我们的意义在哪儿找?在神那里找。我们以前以为自己讲的理,我们会得着啥,啥也没得着,得着一个病。那现在信靠神,得着啥,得着恩典。
大家想想看啊,他处在什么样的环境。也不能够剥夺他的喜乐,然后神就与他同在。《圣经》怎么说?靠着那加给我力量的凡事都能做。什么都能做,遇到什么样的光景都没有办法影响保罗里面那种爱神的心。那种悟性上达到了一个高度,人家对这些事看得明白啊,这不是个问题啊。对那个事看得明白啊,这不是个问题。
所以说我想,大家开始琢磨这事儿,人活着到底有啥意义?我要打击你一下啊,人活着是虚空的虚空,我们把那虚空的事儿看得那么重,有什么意义呢?能听进去吗?人在这世上活着很多东西都是虚空的虚空。不过是我们做什么都是做给神的这种态度。那不就好多了吗?
Q5:老师,家里一定要贴十字架吗?
我没教过你这样,贴那玩意干啥,最好贴在你心坎上。当然了,千万别在胸口的肉上,做一个十字架的纹身,也毫无意义。让神的话进到我们里面才是有意义的。我没有讲这个呀,我讲的是靠主常常喜乐,靠主背起十字架啊。没有这玩意儿。千万别搞这种形式,毫无意义。
Q6:老师,你说财务匮乏和讲理、识别善恶有关系。麻烦您具体说说。
可能你不能理解。我问你,你这个做工喜欢讲理。你能把工作做好吗?今天跟老板讲理,明天跟这个讲理,跟那个讲理。然后跟这个识别善恶,跟那个识别善恶,人际关系好不了。讲理就是识别善恶,识别善恶就是讲理。那一识别善恶,盗取你祝福的鬼来了。我问你牠盗取啥,盗取你的健康。好不容易赚点钱都送给医院了。那盗取你的财物,你的财物就会匮乏。你说识别善恶多可恶?
人为什么会识别善恶以后就会缺乏?识别善恶汗流满面才得糊口。就为了吃饱肚子,就已经累得不行了。所以说人呐,这个财务匮乏,一定是跟灵界里头,把鬼招来有关系。
Q7:老师,家里当地教会,朋友贴的十字架时间长了,十字架都坏了,现在要换十字架。以前家里贴了十多个十字架。老师,现在可以少贴一点十字架吗?
不用贴啦,贴那玩意干啥啊?啥用都没有。听见没有?那如果你要贴十字架觉得很伟大,你就满房子贴啊。人笨就在这儿啊。他觉着贴十字架很伟大啊。贴完了以后有啥用?啥用都没有,然后人也不喜乐。你还不如贴点喜乐呢,贴着喜乐不犯毛病。
Q8:“随时随在我都得了秘诀,我靠那加给我力量的凡事都能做”。老师,我对这句话还是感觉似懂非懂。
你缺啥呢?你缺的就是有这个心。什么叫做靠着那加给我力量的凡事都能做?人天生就是个软弱的。人能够遇到卑贱、丰富、饱足、饥饿、有余、缺乏。人遇到这种状况那种状况。怎么办?靠那加给我力量的,我什么光景我都能处理。我遇到这种光景OK,遇到那种光景OK啊。是不是?
我觉得世上所有的事儿,不过是个属灵世界的一个影。咱们继续说,靠着那加给我力量的凡事都能做。我问你:财务上能不能做?能做。缺乏的时候怎么办?神能不能解决?能解决。生病的时候神能不能解决?神能解决。那遇到这种问题那种问题,能不能解决?神能解决。你以为神厉害不厉害啊?我告诉你,我们的神老厉害了!
教会不是靠着教会的弟兄姐妹奉献养着,是靠神养着的。神一定会供给我们,神使所有的需要都在耶稣基督里得到满足。所以我们弟兄姐妹得知道,神是我们的一切。只是说你是似懂非懂,那我鼓励你,你开始学会实践。
Q9:在该撒家里人特别特别的问你们,这里的该撒是谁?
是当地教会,是当地的一个家庭教会里的一家人,他一家人信主了。那应该是保罗在罗马那个地方认识的一群弟兄姐妹。
Q10:老师,我在家族企业工作,公司大部分是老板的亲朋好友。每次他做苛刻的事情,不让他亲朋好友背锅。每次都和员工说,这些事儿都是我做的,我怎么办?
你不用办,那就可能是真的是你做的也说不清楚啊。其实我告诉你,人在这世上,被甩一个锅,背个锅就背了啊。如果每天都有这锅甩来甩去的,甩一摞锅和甩一个锅差不多一样,一摞的锅和一个锅没什么差别。
我想我们弟兄姐妹学会变聪明。别在这干个活儿,做个工,做得那个纠结难受,然后还觉着自己挺有理,人家对不起我们。你什么时候觉着人家对不起你,你什么时候难受。那信主咋信的?其实在这虚空的虚空当中。还是追求信靠神。那如果你这样的话,我鼓励你。你好好学习《圣经》真理。把自己那种坏习惯,败坏自己的东西给除掉。
Q11:老师好,怎样胜过爱讲理的人呢?
爱讲理的是你还是别人呢?我们一整就要胜过人家爱讲理的,咱还是先胜过自己吧。
Q12:老师,从小到大都不知道什么是喜乐,这是什么原因?
从小到大都不知道什么是喜乐,就是没喜乐过,活错了。什么原因?里面活着的根基是错的。我告诉你,人越是自私,就会越不喜乐。人越是爱自己,越是难受。那就开始重新把我们里面活着的逻辑整对,因为不会活嘛。
Q13:老师,亚比米勒的仆人抢了亚伯拉罕的水井。亚伯拉罕后来跟他说了这件事儿,这叫讲理吗?
你这个逻辑根基有问题。亚伯拉罕是让我们来效法的,不是让你来挑毛病的。要记住啊,很多事我们看不明白。我们就是这样:哦,亚伯拉罕这么做啊,这么做挺好啊。那耶稣基督这么做啊,这么做挺好。约瑟这么做啊,这么做挺好。
我给你解释一下,亚伯拉罕没有在讲理,就是告诉他,你的仆人抢了我的井。那不是在讲理,听得懂吗?那在什么光景下做这事儿?在他跟人家关系都建好了,才说这件事儿。关系还没建好的时候,人家不说这件事儿。说完了以后,人凭什么相信你啊?那不就起争吵了吗。后来人家亚伯拉罕和亚比米勒的关系,又更进深了一层,亚伯拉罕很聪明。
Q14:老师,我是一个做人力的,也是一个七岁男孩的母亲。我想问你在培养弟兄姐妹的时候,你觉得需要具备最重要的要素是什么?
最重要的要素是信心。没有信心的人,其实一生是个悲剧。我要告诉你,这个训练人就是训练人信神。那如果他没有这个信心,那就是他的状况。不管训练谁,训练孩子,就是训练孩子的信心。那信心是啥?信心是性格的根基。这个有信心的人,他最后体现出来的就是他有性格。你比如说他有坚韧不拔的性格,不怕困难的性格,都是信心。
Q15:老师,学习《圣经》真理胜过坏习惯能具体讲一讲吗?
那我们每次查经都是在讲《圣经》真理胜过坏习惯。最坏的习惯叫做不信。人不信神,那就是坏习惯的,坏习惯中最恶的叫恶人。恶人不是因为他做了什么恶事儿,是因为他里面不信神就成了恶人。那这个坏习惯,很多受咒诅的东西全叫做坏习惯。比如说靠自己的双手去做事儿,那是很败坏。能不能做成?做成了。后来活得怎么样?活得不好。
我问你该隐活得好不好?喜乐吗?该隐一生不知道什么叫做喜乐。那拉麦一生喜乐吗?没有。一生活在恐惧当中。那我们照着这条喜乐的标准去看,你就仔细看吧,哎呀,喜乐的人真少。家里很有钱但却不喜乐。你说愁不愁?很愁啊,但是没有喜乐,那活着又有什么意义呢?
靠自己的双手,创造自己的命运,这都是坏习惯。懒惰,那是体贴肉体的非常明显的体现。我想学会信靠主,靠着神我们凡事都能做,这就叫做信心。
Q16:老师,能讲讲神经兮兮和敬畏神之间的关系吗?
那这个关系太大了。一个人不敬畏神,他一定会神经兮兮。一个人神经兮兮,他一定不敬畏神。你说这不对吧?我敬畏神,可是我就是神经兮兮。哎,如果你敬畏神,你不知道神掌管宇宙万物啊?你不知道银河系是神管的呀?银河系之外几千个银河系,上万个银河系都是神管的。知道不?那我问你地球上的一粒尘土是不是神管的?是神管的。你一根头发,如果神不许可都不会掉下来,你知不知道?如果你不知道,那你就神经兮兮的。
所以说我们知道我们要敬畏神,别冒犯祂。人世上所有的悲剧是因为冒犯神。我们可得知道,爱神的,神必向他守约施慈爱,直到千代。那恨神的,神必追讨他的罪,自父及子直到三四代。所以敬畏神多重要。整本《圣经》讲的其实就是让我们敬畏神。
Q17:老师好,在工作中怎样才能居上不居下,作首不作尾?我发现跟我在一起的同事,每一个都想做我的老大,这个说:大姐,帮我搞一下这个;那个说:大姐帮我做一下那个,我就像他们的店小二了。
这话挺有意思啊。你觉得这叫居下了是吧?那为啥你会有这种感觉?其实这种感觉就挺败坏的。那我问你,约瑟在波提法的家里做奴隶,他是他们家里头最小的奴隶,哪个都可以做他的老大。又脏又累的活儿全是约瑟干,结果这约瑟干着干着,成了他们家里的老大了。
约瑟怎么成为家里的老大了?因为老板发现约瑟这个人挺好啊。那为什么约瑟的老板看到约瑟挺好?因为神使他看见。所以咱们弟兄姐妹啊,有的时候就是在一朝一夕上老是咽不下这口气,我教大家学会夹着尾巴做人,做什么都把它做好了,做什么都好像做给神,为神多做一件事少做一件事,差不了多少。
那我们有的时候就太计较。如果一个人能干十个活儿,绝对别干五个。如果那天干了五个,有位大姐说你去把那五个也干了,人家不说的时候我都干了。听得懂吗?我们不在这上计较。计较这些东西本来就是一个很可恶的性情。
我想我们在工作岗位上夹着尾巴,然后满有喜乐,与人无害。后来你慢慢会发现那是一条更好的生存之道,你以为人家会接着欺负你吗?不会的。然后你就会居上不居下,作首不作尾了。别搞一堆宗教味儿,宗教味儿不会让人做首不作尾。你的理解做首不作尾,也不是这么做的。
约瑟在人家家里,人家绝对不会问这种问题,每一个都像我的老大。人家会做的比人期望的还高。结果怎么着,后来就做了其他奴隶的上司,做了奴隶总管。我年轻的时候我就这样,我吃亏吃得起,我不觉得那是吃亏,多干点活吃啥亏啊。多干点活吃亏不吃亏啊?直到现在,我告诉你啊,办公室的厕所我清扫。我能打扫一个位置就打扫一个,能打扫俩就打扫俩。所以我在的地方,只要我在,它一定干净。我是小二了?我不是小二,我还是老大。
Q18:老师,雅各逃跑的时候,他岳父追上他。雅各跟他辩论说,我夜里寒霜尽湿,被狼叼走的自己赔上。雅各和岳父理论算讲理吗?我们遇到这种情况,也可以像雅各一样辩论吗?
您就好好学吧,那不叫辩论。那是让他岳父觉着亏欠他。你好好学雅各,听见没有?雅各身上的东西别拿来品头论足。我们离雅各的状况还差很远。好好学,学,你得学到本质上。这个本质到底是啥?因为他舅舅那个时候追上他要杀他。雅各一看他舅舅来要杀他,为什么要杀他?要把牛羊都带回去。那不是一般的财产,那是很多很多的财产。那就跟一间上市公司的财产差不多。那起码十个亿吧。那这十个亿用雅各一条人命换了十个亿是OK的。
结果雅各就跟他解释,这些年过的。然后其实得着益处的是谁?是他岳父。他岳父就没那么难受了,如果他岳父觉着雅各的东西都是他的。你说他岳父得多难受啊?他岳父就非常难受。但是他让他岳父好受一点啊,就让他岳父觉着对不起雅各,他就没那么愤怒了。
Q19:老师,让人活着的乃是灵。不信的人靠什么活着?是肉体吗?
人不信是靠着邪灵活着,靠着邪灵活着就满脑子都是歪门邪道的东西,邪灵就在他里面掌权,然后邪灵就让他死。让人活着的是神的灵,让人死的是邪灵。肉体和邪灵非常的合一。
愿神祝福大家!
여러분 안녕하세요, 빌립보서 4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이제야 바울이 왜 빌립보서를 썼는지 조금 이해하게 됩니다. 앞부분에서는 많은 논술을 펼치며 마치 신학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 같았지만, 4장에 와서 보면 사실 빌립보 성도들이 별로 기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왜 기뻐하지 못했을까요? 교회 안에 다툼이 있고, 한마음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한마음이 되지 못하면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너는 네 파, 나는 내 파로 갈라져 교회 안에서 궁중 암투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교회 안의 용호상박(파벌 싸움)’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치를 따지다가 스스로 기쁨을 잃어버린다면 정말 큰 문제입니다. 이 세상의 일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사람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매우 고통스러워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 봐, 이 일은 원래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너희가 저렇게 만들어 버렸잖아” 하면서 화를 내고, 결국 홧병이 납니다. 그러고는 사역자를 찾아와 “빨리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인도해 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화가 가라앉지 않는 것입니다.
빌립보에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유오디아도 여성이고, 순두게도 여성입니다. 아마 이 두 사람은 과거에 바울을 위해 헌금하고 바울을 크게 도왔던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성경 인물들의 이름 번역에 대한 이야기는 여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의 논리 체계는 바로 ‘기쁨의 논리 체계’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해서 기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여길수록 기쁨은 사라집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기쁨이 ‘내가 옳은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순간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니 차라리 자기가 옳지 않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되는 편이 낫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가 교회에서 이렇게 큰 헌신을 했는데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네”라고 말합니다. 듣기에는 그럴듯하고 옳은 말 같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괴롭게 만드는 논리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내가 이 가정을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을 했는데, 다들 고마워할 줄도 모르네”라고 합니다. 그렇게 계속 말하다 보면 금세 마음이 괴로워집니다.
원래 사람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빌립보서를 읽을 때, 반드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옳게 행하셨다. 나는 옳지 않고 하나님만이 옳으시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큰 은혜를 베푸셨으니 나는 하나님께 빚진 자다.’ 이 얼마나 단순합니까?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누군가를 섬기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이 옳다’는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어떤 상태로 이끌어야 할까요? 다른 사람에게 빚진 마음을 갖는 상태로 이끌면 단번에 기쁨이 회복됩니다. 사람은 참 묘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의 주제는 바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주님을 의지하면 사람들은 한마음이 됩니다. 함께 모여 한마음으로 하나가 됩니다. 너도 주님을 의지하고 나도 주님을 의지하며, 너도 자신이 옳지 않다고 여기고 나도 자신이 옳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한마음을 품으십시오
마음이 맞지 않으면 참으로 힘듭니다. 저는 줄곧 의아했던 점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교회를 세울 때 마음이 맞지 않는 교회를 세우며,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억지로 한데 묶어 놓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한 친구가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예배당 중앙에 통로가 있고 앞에는 강단이 있었습니다. 좌측에 한 줄의 의자가 있고, 우측에도 한 줄의 의자가 있었습니다. 좌측은 방언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앉고, 우측은 방언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앉았습니다. 다들 그렇게 암묵적인 규칙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제가 “도대체 설교를 어떻게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정말이지 그 목사님이 너무 딱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그런 식으로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꽤 유명한 분이 저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교회를 세우고 전도사 세 명을 청빙했는데, 세 전도사가 각각 딴마음을 품고 있으니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허구한 날 싸우기만 합니다.” 본래는 매우 기쁘고 복된 사명이어야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심히 기쁜 일이어야 하는데, 완전히 기쁨 없는 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마치 이 세대의 정치 투쟁처럼 교회 안에서 싸운다면 이것이 얼마나 큰 비극이겠습니까?
왜 한마음을 품어야 합니까? 누구와 한마음을 품어야 합니까? 우리는 모두 주 예수님과 한마음을 품어야 하고, 사도 바울과 한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서두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빌립보서》 4:1)
이 말씀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입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부터 “내가 사모하는 형제들”이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실 그들도 바울을 몹시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을 너무나 그리워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만약 바울이 우리 가운데 있다면 우리가 이런 기쁨 없는 상태에 빠지지 않았을 텐데.’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옳으심을 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바울을 따라 하나님의 옳으심을 따른다면,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다툼도 없었을 것이고, 마음이 갈라져 교회 안에서 싸우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다투었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방언 문제로 다투었든, 기적을 행하느냐 마느냐로 다투었든, 복음주의파냐 은사주의파냐로 다투었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마음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한마음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부딪히면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저는 일찍부터 한마음이 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그만두는 게 낫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라 “우리 함께 진심으로 교회를 잘 세워갈 마음이 있다면 제대로 세워갑시다. 그렇지 않다면 갈 길을 가십시오. 당신이 떠나기 싫으면 내가 떠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한마음이 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초창기에 교회를 세울 때,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해 목회자로서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여기를 수습하면 저기서 터지고, 조롱박을 누르면 바가지가 떠오르듯,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바가지가 떠올라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제가 완전히 쓰러져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교회가 왜 이렇습니까?”
그 후 하나님께서 저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악령을 보았는데, 매우 흉측하고 사나운 악령으로 머리가 셋이고 몸통은 하나였습니다. 그 머리가 뱀 세 마리였고 꼬리와 몸통은 하나로 엉켜 있었습니다. 어떻게 싸우겠습니까? 저쪽은 머리가 셋인데 우리는 두 손으로 상대하기 벅찼습니다. 어느 머리 하나에만 물려도 치명적이었습니다.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제가 “하나님,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분열의 영(하나 되지 못하게 하는 영)이다.” 세 명의 전도사, 머리 셋 달린 분열의 영, 숫자가 딱 들어맞지 않습니까? 분열의 영 자체는 아주 똘똘 뭉쳐 하나가 되어 교회를 서로 물고 뜯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처음으로 치른 영적 전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됨을 이룰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도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께서 제하여 버리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정리하십니다. 교회가 하나 된 후에는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은 먼저 이 분열을 이기는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사실 분열을 이기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병 고치고 귀신 쫓는 것보다는 확실히 어렵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수년 전 우리 교회의 치유와 축사는 거의 완벽한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치유와 축사를 할 때 아픈 사람이 오면 전부 해결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치유와 축사는 작은 은사이고, 하나 됨이야말로 참으로 큰 은사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교회가 영적 정상으로 올라가는 여정에는 ‘형제의 연합(하나 됨)’이라는 관문이 있습니다. 이 관문을 통과하면 모든 것이 평안해집니다. 그래서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했습니까? 그들이 한마음을 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도 이 두 여인을 도우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왜 이 두 여인을 도우라고 했을까요? 이 두 여인은 교회의 지도부에 속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 안에서 바울과 함께 힘써 일했던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바울과 함께 수고했던 자들이 지금은 하나 되지 못하고 한마음을 품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 두 사람 사이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각자 자기 옳음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바울과 매우 좋은 관계였고, 바울의 전도 여행에 필요한 재정을 공급하며 후원했던 사람들입니다. 사회적 지위도 있고 돈도 꽤 벌었던 여성들이었을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루디아라는 여인도 있었고, 강가에 모여 기도하던 여인들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즉, 빌립보 교회는 여성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던 교회였습니다. 루디아, 유오디아, 순두게, 그리고 남성 중에는 글레멘드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울과 함께 수고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런 문제가 생기는데, 함께 수고하지도 않는 자들에게는 얼마나 문제가 많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하나 됨은 저절로 쉽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 됨은 반드시 주님과 동행해야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 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에서 어떤 어머니와 딸을 양육한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입을 열어 집안의 구차한 일들을 늘어놓았습니다. 시골 분이라 허난 사투리를 써서 저도 잘 알아듣기 힘들었는데, 뒤이어 딸도 찾아왔습니다. 평신도 사역자들의 수고가 참 많습니다.
제가 그 모녀에 대해 한마디 하겠습니다. 둘 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에게 양육을 받으러 왔을 때 제가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괴로운 것이 당연하다는 말입니까?” 그 어머니의 말이 결국 집안일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집안일은 다 내가 도맡아 했습니다”라며 억울해했습니다.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 안 해야 한단 말입니까? 만약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하지 마십시오.” 양육이란 사람을 ‘자신이 옳다’는 자리에서 벗어나게 하여 더 이상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한, 그 옳음은 스스로를 괴롭힐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모두 주님과 한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귀신들이 굴복한다고 기뻐하지 마십시오. 귀신 몇 마리 쫓아냈다고 해서 대단하다고 여길 일이 아닙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결코 어리석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런 귀신을 쫓아냈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본문 말씀은 얼핏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 여인들은 복음에 바울과 함께 힘쓰던 자들이고, 글레멘드와 그 외의 동역자들도 있으며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라면 마땅히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주님과 한마음을 품은 후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십시오!
무슨 뜻입니까? 우리 모든 형제자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기뻐하지 못하고 있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호되게 꾸짖었다고 해봅시다. “도대체 일을 어떻게 이렇게 엉망으로 합니까? 시간은 이렇게 많이 쓰고 결과가 이게 뭡니까?” 하고 책망하면, 돌아가서 속으로 씩씩대며 “어떻게 나한테 저렇게 말할 수 있어?” 하고 괴로워하고 혼란스러워하며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아주 나쁜 상태입니다. 즉시 영적 감각을 작동시켜야 합니다. ‘아니야, 이건 틀렸어. 내가 왜 기쁨을 잃고 있지? 먹을 것이 없나, 잘 곳이 없나, 쓸 돈이 없나? 내게 부족한 것은 기쁨뿐이다.’
왜 기쁨을 잃어버립니까? 주님과 한마음을 품지 못하고, 주님과 하나 되지 못하며,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잘못한 것을 지적받았다고 억울해합니까? 그것은 억울한 일이 아닙니다. 억울한 일이 아님에도 억울하다고 느끼니 얼마나 어긋나 있는 것입니까? 주님과 한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마음에 염려가 있으면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마음속 염려는 사람을 몹시 지치게 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온갖 염려에 사로잡혀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것도 염려하고 저것도 염려합니다. 염려하면서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기뻐할 수 없습니다. 염려하는 것이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까?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귀신이 틈타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 같다고 해서, 왜 그 일이 꼭 일어날 때까지 염려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왜 이 근본적인 진리를 말씀드릴까요? 세상 모든 만사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것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면, 여러분이 겪는 모든 일도 하나님께서 안배하신 것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배하셨을까요? 우리의 유익과 성장을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문제를 겪어보지 않고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염려가 생길 때 괴로워하고 낙심하고 번민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선택은 순수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효과가 있을까요? 절대적으로 효과가 있습니다!
간증을 하나 하겠습니다. 한 자매님의 어머니가 암에 걸려 중환자실(ICU)에 입원했습니다. 그때 마침 우리 온 교회가 72시간 연속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72시간 연속 기도를 진행하여 영적 훈련을 이어갈 것입니다. 참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영혼이 몸을 빠져나가는 경험을 했는데, 수많은 우리 성도들의 기도 소리와 딸의 기도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때 붉은 옷을 입은 분이 나타나 “돌아가라!”고 명하셨고, 어머니는 다시 몸으로 돌아와 살아났습니다.
제가 “어머니는 요즘 어떠시냐?”고 묻자 자매님이 “펄펄 날아다니십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품이나 문제는 고쳐지셨느냐?”고 물으니 “아직 안 고쳐졌습니다”라고 하더군요. 참 신기한 일입니다. 그 후 그 가정에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또 다른 일이 생겼습니다. 그 자매님이 이전에는 볼 수 없었을 만큼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할 정도로 간절히 기도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이다! 하나님은 정말 대단하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 마음의 소원대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어떤 이는 “남자친구를 구해도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안 될 것 없으니 차근차근 기도하십시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굳이 염려하려거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염려하십시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맡겨버리니 얼마나 좋습니까? 기쁨이 임합니다. 사람은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전에는 맡길 곳을 몰라 스스로 짊어지고 살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평생 쌀 한 가마니를 짊어지고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쌀 한 가마니를 짊어진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장기를 구경하는 격입니다. 짐을 내려놓으면 아무 일도 없는데 말입니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쌀 한 가마니를 메고 길을 가는데, 당나귀 달구지가 지나가자 마부가 “차에 타세요”라고 권했습니다. 차에 올라탄 그 사람은 여전히 쌀가마니를 등에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마부가 “쌀가마니를 바닥에 내려놓으시지요”라고 하자, 그는 “당나귀가 가여워서 그럽니다. 나를 태워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쌀가마니까지 싣게 할 수는 없으니 내가 메고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차에 올라탔으니 쌀가마니를 내려놓으십시오.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평강과 기쁨이 넘치고,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이 세상에 어렵게 태어났는데, 평생을 수고와 슬픔으로만 채워서야 되겠습니까? 기쁜 일은 극히 적고, 기껏해야 인생의 작은 부분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마신 후에도 마음이 복잡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과 한마음을 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한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누구를 본받아야 할까요? 제대로 행하는 사람을 본받아야 합니다. 무엇을 배우든 잘하는 사람에게서 배워야지, 자기 방식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내게서 배우고 받은 바를 그대로 행하십시오
바울이 그들을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가르치고 난 뒤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잊어버렸습니다. 바울이 곁에 있을 때는 분명히 이해한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 문제를 만나면 어리둥절해합니다. 문제를 만나 당황한다는 것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반쪽짜리로 배운 것입니다. 마치 사과를 몇 입 베어 물다 만 것 같은 상태입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빌립보서》 4:8)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사랑받을 만한 것, 칭찬받을 만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 이것들을 생각해야 할까요? 생각하지 않으면 자꾸 자기 옳은 소리(이치 따지기)만 늘어놓기 때문입니다. 이치를 따지는 것은 결국 선악을 분별하는 일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면 기뻐하기 어렵습니다. 기쁨을 잃은 채 오래 번민하다 보면 결국 병이 찾아옵니다. 지혜로워지는 것이 왜 이리도 어려울까요? 지혜로워져야 하는데, 왜 굳이 자기 옳음만 고집합니까? 그 옳음은 참된 것도, 경건한 것도, 옳은 것도, 정결한 것도, 사랑받을 만한 것도, 칭찬받을 만한 것도 아니며 덕이나 기림이 될 것도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지혜롭지 못하면 평생 ‘골치 아픈 인생의 짐’만 묵상하며 죽을 때까지 괴로워하게 됩니다. 관 속에 누워 영결식을 할 때 사람들이 “아, 이 자매님 참 고생 많으셨지. 평생 수고와 슬픔뿐이었어”라고 말하는 것이 칭찬인 줄 아십니까? 대단한 공헌을 했을지 몰라도 기쁨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기쁨을 희생시켰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십시오. 왜 주께 하듯 해야 합니까? 그래야 기쁘기 때문입니다. 집안일을 해도 주께 하듯 하면 기쁘지 않습니까? 기쁩니다. 반면 사람을 보고 일하면, 그 사람들은 내 수고를 받을 자격조차 없어 보이니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배워야 합니까? 바울에게 배워야 합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립보서》 4:9)
이 세상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누리다가도 제 손으로 하나님을 쫓아내 버립니다. 하나님의 영은 지극히 존귀하신 분입니다. 간절히 구해도 오실까 말까 한데, 쫓아내면 당연히 떠나십니다. 우리는 바울의 영성을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끝으로”라는 말은 ‘이것을 어떻게 명확히 설명할까’라는 뜻입니다.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받을 만하며,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나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행하고 있는 모습과 비교해 보라는 뜻입니다. 바울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실 것이며,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기뻐하고 싶지 않습니까? 기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뻐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모른다면 배워야 합니다. 누구에게 배웁니까? 주 예수님께 배우고, 사도 바울에게 배우십시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 유오디아, 순두게, 글레멘드, 그리고 교회의 다른 동역자들에게 친히 본을 보이며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을 배우십시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0-13)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데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주님을 의지할 때 내게 능력을 주십니다.
풍부에 처하는 법, 배부름에 처하는 법, 배고픔에 처하는 법, 풍부와 궁핍에 처하는 법, 모든 일에 일체의 비결을 얻었습니다. 바로 ‘기쁨의 비결’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하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니 기뻐하는 것은 더더욱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제 말을 꼭 기억하십시오. 사람은 평생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골에 살든 도시의 번화한 곳에 살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느 도시, 어느 곳에 있든지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이 기쁨을 배우면 옳고 그름을 따질 이유가 없습니다. 따지고 나면 속만 상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은 두 냥을 빚졌다고 한들, 내가 주님께 진 일천 냥의 빚을 탕감받았는데 그 두 냥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그냥 넘어가십시오. 우리는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의 기쁨이 있고, 돈이 많으면 많은 대로의 기쁨이 있습니다. 배부를 때의 기쁨이 있고, 배고플 때도 기쁨이 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해할 수 있다면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사람이 왜 괴로워합니까? 배가 고파 영양실조에 걸렸는데, 기쁨마저 잃고 괴로워하며 몸속에 수많은 독소를 배출하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분별하며 따질 때 몸속에서 생성되는 독소는 불량 기름을 먹어서 생기는 독소의 수천, 수만 배에 달합니다. 선악을 따지며 온종일 건강식품을 챙겨 먹어도 단명하는 이유가 바로 속에서 뿜어내는 독소가 밖에서 들어오는 독소보다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성령으로 충만하여 크게 기뻐하십시오. 술 취하지 마십시오. 이는 방탕한 것이지만, 성령 충만은 기쁨을 가져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사실 아무 문제도 아닙니다. 가족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그의 몫입니다. 자매님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남편이 “그런 걸 왜 믿어?” 하며 멸시의 눈빛을 보낸다고 해봅시다. 남편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억지로 기도를 시키는 것은 돼지 사료를 억지로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과 생각을 새롭게 변화시켜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크게 기뻐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요셉처럼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도 기뻐하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기뻐하십시오. 아프지 않았겠습니까? 아팠습니다. 괴롭지 않았겠습니까?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내 안의 기쁨을 빼앗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어 기뻐하는 사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달리며 이 세대의 축복이 되는 사람은 결코 궁핍할 수 없습니다. 궁핍에 머무는 것은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족함이 없다고 다 영적인 것은 아니지만, 지속적인 궁핍은 분명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해야 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쓴 진짜 목적이 무엇일까요?
내가 구하는 것은 여러분의 열매가 더욱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기쁨이 없는데 무슨 열매가 맺히겠습니까? 기쁨을 잃으면 다른 열매들도 다 망가집니다. 단 참외를 심었는데 쓴 여주가 열린다면 얼마나 허탈합니까? 우리는 성령의 열매, 곧 평강과 기쁨과 지혜와 명철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감정이 불안정한 것은 인생의 비극입니다.
우리가 기뻐할 때 일의 열매가 맺히고 재정도 건강해집니다. 마음이 불편하고 괴로우면 일하는 것 자체도 힘든데, 집에 돌아와 남편의 얼굴을 보는 것은 더 힘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집에서도 원수 같고 직장에서도 원수투성이라면, 평생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사는 셈인데 인생이 어떻게 잘 풀릴 수 있겠습니까?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두 번 내가 쓸 것을 보내었도다 (《빌립보서》 4:15-16)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머문 기간은 고작 2주였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성도들은 한두 번이나 헌금을 보내왔습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빌립보서》 4:17-18)
참으로 훌륭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게 모든 것을 보내주었거늘, 오늘날 너희는 왜 한마음을 품지 못하고 스스로 기쁨을 잃어 괴로워하느냐? 그 당시 나를 후원할 때 너희는 참으로 기쁘지 않았더냐? 내가 그 일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은 너희가 과거에 얼마나 뜨거웠고 기쁨이 넘쳤는지를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그것을 잊었느냐? 내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한두 번이나 사람을 보내 나를 돕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에바브로디도를 보내 나를 돌보아 준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그런 귀한 일을 행한 너희가 아직도 자기 옳음만 따지고 있겠느냐? 빌립보 성도들아, 이제 옳고 그름 따지기를 멈추라!” 바로 이런 뜻입니다. 과거의 그 기쁨 넘치던 날들이 어떻게 왔는지를 기억하고, 더 이상 헛된 옳음을 주장하지 마십시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 쓴 이 편지는 오늘날 우리를 위해 기록된 말씀이기도 합니다. 기쁨을 잃고 온종일 남의 흠만 잡거나, 남에게서 지적당해 마음이 상한 이들을 위해 주신 말씀이니 이제 다 내려놓읍시다.
저는 평신도 사역자들이 양육할 때 지나치게 ‘공감’만 해주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잘못된 공감은 옳지 않습니다. 성도가 “우리 엄마가 나한테 이랬어요” 하면 사역자도 “맞아요, 우리 엄마도 그랬어요”, “우리 아빠가 이랬어요” 하면 “우리 아빠도 그랬어요” 하며 장단을 맞춥니다. 그렇게 맞장구쳐봐야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는 방식대로 해야 합니다. “왜요, 계속 괴로워하고 싶습니까?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니 괴로운 것입니다. 당신의 그 논리가 참 훌륭하네요. 양육은 그만둘 테니 집에 가서 실컷 괴로워하십시오. 마음을 돌이켜 더 이상 괴롭고 싶지 않을 때 다시 이야기합시다.”
어떤 이들은 “엄마도 내게 잘못했고, 아빠도 내게 잘못했고, 하나님도 내게 너무하시고, 직장 상사도 나를 괴롭힙니다”라고 불평합니다. 그렇게 말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남는 것은 고통뿐입니다. 우리는 기쁨 가운데서 성령의 열매를 끊임없이 맺어야 합니다. 이제 깨달으셨습니까? 더 이상 자기 이치를 따지지 마십시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도리만을 말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침 뱉음을 당하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었습니까? 주님이 무슨 잘못을 하셨습니까? 아무 잘못도 없으셨지만, 그토록 큰 억울함 앞에서도 억울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결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높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고,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모든 권세를 얻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복되게 살기를 원한다면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고, 악령의 열매를 맺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옳다고 여기는 존재가 바로 악령입니다. 악령은 자기가 대단히 옳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재정 상태가 좋지 않다면, 스스로를 대단히 옳은 사람으로 여기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은 궤변이며 악령의 논리일 뿐입니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도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사도 바울에게 빚을 졌지만, 바울은 오히려 자신이 빚진 자라고 여겼습니다.
기쁨을 배우십시오. 우리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우리의 쓸 것을 풍성히 채우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연결해 보십시오. 남의 흠을 잡기 좋아하는 사람은 재정적인 궁핍을 겪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왜 재정적 궁핍이 찾아올까요? 자기 옳음과 이치를 너무 많이 따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큰 문제입니다. 그렇게 따지다 보면 재정은 궁핍해지고, 몸에는 질병이 찾아오며, 기쁨은 사라지고, 자기만의 궤변만 늘어납니다. 도대체 무엇을 얻기 위함입니까? 어리석은 짓이 아닙니까? 결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십시오. 아멘!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