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Q1:老师,什么叫做永生?
你如果问我看过永生没有?我没看过。永生就是永远地活着。人是有灵的人,人的灵到了魔鬼那里就叫做永死。人的灵到了神那里,跟神非常和谐合一的关系叫做永生。人的生命是从神而来的,所以人的生命跟神连接叫做永生,跟鬼连接就是永死。你问我见过永生吗?其实我见过,因为我活在永生当中,就是永生的一部分。永生长啥样?就是有耶稣的样子,有神的形像。
华人命定神学解读救恩跟传统的神学体系是完全不一样的 。华人命定神学把救恩定义为活出神荣耀的形像。神为什么要救我们呢?就是为了要恢复我们当初被造的时候神荣耀的形像,不是恢复成鬼的样子或者恢复成世上一般人的样子,一般人的样子基本上也是个鬼样。
Q2:老师,有段时间我有信心,有段时间信心不够,反反复复,这是这么回事?
这个问题简单,其实你的信心是个假的。因为你的信心不是信靠神,你信心的目标不是永恒里面的荣耀,所以一会儿有,一会儿没有。我们如果真的有信心,信的是亚伯拉罕、以撒、雅各、约瑟所相信的。如果有人要害你,你觉得完了,然后不信了;如果有人对你好,信心又起来了。这叫啥信心?约瑟的信心是:你们的意思是要害我,但神的意思是好的。
Q3:老师,某某人被警察抓走了,我心里边难过,我该怎么祷告?
不知道他是犯罪还是没犯罪,咱不知道,就不能瞎说。但是信心不是祷告,是神必定看顾我们。即使他是个奴隶被卖到埃及,如果他是约瑟也会啥事没有,神必定看顾你们。如果他不是约瑟,神没办法看顾。
Q4:雅各给以法莲长子的祝福体现在哪里?为什么进到迦南地后,玛拿西的地业要比以法莲还昌大呢?
原来你是这样认为的。一个人以为地大了就是昌大,那就麻烦了。俄罗斯的西伯利亚老大了,可是那不能叫昌大,只能叫很大。弟兄姐妹,千万不要把这些东西都连在一起,这不是我讲的。我讲的是在受苦的地方昌盛,不是说以法莲这个人,而是说以法莲这个名起得挺好。
在受苦的地方昌盛和神使你忘记了痛苦,那是不同的属灵层次。别管那块地大还是地小。我就觉得我们里面装的东西有点怪,你的逻辑体系还不是一个属灵的逻辑体系。
记住,在受苦的地方昌盛,比“神使我在受苦的地方忘记了一切痛苦”的属灵层次更高,祝福更多。不要以为你叫以法莲就是以法莲,你叫玛拿西就是玛拿西。那是指着属灵的层次说的。以法莲支派还出过一些以色列的王,最后都行了耶和华眼中看为恶的事,最后都被一起扫进了历史的垃圾堆。
Q5:人要先有永生的概念才能看透人的生死吗?还是反过来?还是说这两者是相辅相成的关系?
如果人活着不知道是虚空的虚空,就不需要寻求神,而是去寻求世上的东西,就会活成世人的样子。所以,把人活着这事看透,知道人活着是虚空这件事一定是在先。
亚伯拉罕就是这样。其实亚伯拉罕在世上很有钱的,当时也是一个首屈一指的富户,但是他觉得活着没意思。如果一个人觉得活着挺有意思,那就好好地去活着吧。人一旦把活着当做是虚空的虚空,就会去寻求。有的人寻求后,最后就出家当和尚了;有的人寻求后,就认识了《圣经》里那位永恒的神了;有的人寻求后,就到山上炼丹去了,干啥的都有。人看透了以后,就走了不同的寻求的路。
有的人看了这大千世界,就做了像尼采、叔本华等这些大哲学家。有的人觉得活着是虚空,就写了一本书叫《老人与海》,还得了诺贝尔文学奖。人看透了以后寻求到啥,就是他的造化。我们把人生的事看透就要寻求永生。
凡寻求永生和永恒里不能朽坏之福的人,神就以永生报应他们。(《罗马书》2:7)
有的人寻求到了这个,有的人寻求到了那个,至于咱们,就开始认识了这位神,祂就叫做永生的神。然后就开始以神的话为根基,建立起了一套人活着的方式。就会在这永生的路上往前不断奔跑,就会不断地经历神。经历神是常态。如果人没把活着这事看作虚空,就完全走不下去。
有个人打电话给我,要求我不要把他踢出教会。他是个商人,不是个祭司。商人是赚钱的,那就好好地去赚钱,在我们这里赖着干啥呢?我也不知道。他很混乱,因为啥也没看透,光在那扯淡。我表面上不踢,但是我心里头已经把他踢了。放在一边晾着吧。我也不想管,就这么地,爱死死,爱活活。你的追求和我的追求不是同一个。我觉得世上的这些事追求来了最后也是个虚空,他却认为那多好、多实在啊。
我们的答疑就到这里,愿神祝福大家!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는 《창세기》 50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이전에 제가 《창세기》 50장을 나눌 때의 주제는 《죽어서라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리라, 죽어서라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리라》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과연 그런 내용이었을까요? 나중에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약간의 조정을 거쳐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하나의 제목을 정했습니다. 사실 첫 번째 제목인 《죽어서라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리라, 죽어서라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리라》도 나쁘지 않지만, 저는 두 번째 제목인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돌보시고, 너희를 인도하여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를 선택했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드릴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야곱과 요셉은 둘 다 죽어서라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마음을 썼던 것은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이 죽은 후 애굽에 남겨질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요셉이 말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돌보실 것이며, 반드시 너희를 이끌어 올려 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주신 바로 그 땅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제게 큰 격려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이 죽어서라도 가나안 땅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는 저의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제가 죽든 살든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저의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저 또한 형제자매 여러분을 격려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살아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살아가야 하며,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돌보신다는 것을 마음으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제가 죽는 것을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죽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죽지 않으셨고,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계십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듣기 좋습니까!
그래서 저는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연 하나님 위에 세워져 있는가?'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하나님 위에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을 돌보실 것입니다. 이 말을 전하는 사람은 여러분이 믿음을 갖기를 바라는 것이지, 어떤 특정 목사나 요셉, 혹은 야곱과 같은 사람 위에 믿음을 세우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 위에 세우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니, 더 이상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지혜로운 자가 되십시오.
야곱은 믿음을 가지고 죽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야곱이 세상에서 살아간 날들은 일생 동안 매우 험난했습니다. 야곱만큼 많은 고생을 겪은 사람은 없었으며, 그는 그의 조상들보다 더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세상의 일에 마음을 두지 않는 독특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게 하신 것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무엇에 관심을 두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얻게 하시는 것을 그가 얻기를 원하셨고, 야곱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얻게 하실 것을 얻게 되리라 믿었습니다.
야곱은 믿음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의 말을 들을지어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말을 들었습니까?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그 운명이 정해지는 법이며, 삶의 열매는 믿음에 거의 정비례합니다. 야곱의 이 아들들, 곧 요셉의 형들은 그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심지어 요셉의 동생 베냐민조차 그러했습니다. 각 사람에게는 각자의 몫이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말한 것입니다. "아들들아, 너희는 내 말을 들어라. 너희는 나와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하며, 너희의 믿음을 하나님 위에 세워야 한다." 그들이 그렇게 세웠습니까? 아닙니다!
훗날 야곱은 믿음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했으며, 죽기 전에 요셉에게 맹세하게 하여 자신을 막벨라 굴,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리브가가 묻힌 곳에 장사하게 했습니다. 야곱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는 믿음을 가지고 죽었습니다. 그는 영원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시고, 영원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을 멀리서 바라보았습니다. 야곱의 이 짧고 험악했던 일생의 날들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너무나 적다는 사실에 놀라곤 합니다. 이것은 보배입니다. 이런 사람이 죽으면 세상 사람들은 애통해합니다. 이런 사람은 실로 대단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들은 모두 믿음을 가지고 죽었습니다. 그들이 믿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약속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믿음이었습니다. 비록 죽을지라도 가나안 땅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히 성취되는 것을 다 보지 못했을지라도, 죽어서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야곱이 소망했던 모든 것은 다 이루어졌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제 권면을 들으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든 여러분의 믿음을 하나님 위에 세우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돌보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폐하여지지 않으며, 믿는 자는 반드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고, 반드시 하나님과 함께하며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살아갈 것입니다. 저는 때때로 흥미로운 말을 하곤 합니다. "내가 살아 있을 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죽어서라도 이루어질 것이다. 내가 믿은 바는 내가 죽은 후에도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거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과 제가 믿는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십니까? 그분이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만약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돌보신다!" 이 사람이 죽든 저 사람이 죽든 더 이상 염려하지 마십시오. 누가 죽더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돌보십니다. 우리 마음이 추구하는 것은 바로 이 믿음의 거인들이 추구했던 것과 같으며, 모두 영원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생의 것들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이생의 것들은 다 헛된 그림자일 뿐입니다.
어젯밤 저는 한 형제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너를 내보내야겠다. 너는 우리 가운데서 쓰레기 같은 존재다. 마귀의 눈에는 달콤한 과자 같겠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개똥 한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러자 그는 황급히 전화를 걸어와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를 내보내지 말아 주세요." 그가 믿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런 사람은 곁에 팽개쳐두고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살 수 있으면 살고, 죽고 싶으면 죽으라고 하십시오. 이런 사람은 죽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날마다 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추구하는 것, 세상을 사랑하는 그 마음의 극히 일부만이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썼다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굳이 기뻐하며 이생에 안주하고, 저주 가운데 머물며, 귀신과 동행하는 길을 택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이 왜 울었는지 아십니까? 요셉이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울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운 것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진정한 영적 동역자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오직 그의 아버지 야곱만이 요셉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세상 사람들은 요셉의 추구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17년 동안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 함께 지냈지만, 요셉은 막대한 공무를 처리해야 했습니다. 애굽의 총리로서 온종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매우 고된 일상이었습니다. 아버지와 마주 앉을 시간이 자주 없었지만, 시간만 나면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부자가 마주 앉아 소박하게 음식을 나누며 담소를 나누는 것은 매우 단순한 장면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나눈 대화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실 것이라는 내용이었고, 영원 속에 있는 영광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 부자는 모두 하나님을 향한 거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을 가지고 죽는 자들이 있을 때 땅조차 진동합니다. 이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들이며, 세상이 소유하기에 합당치 않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논했던 것은 멀리서 바라본 영원 속의 영광이었습니다. 어쩌면 4천 년 후에 중화권 사명신학이 일어날 것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1천 년 후에 다윗이 일어날 것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400여 년 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할 것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그것을 보았고,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하나님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한 무리의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하나님의 형상, 사도 바울의 형상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부자가 나눈 이야기는 온통 이런 것들이었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제 야곱이 죽었으니 요셉은 누구와 속마음을 나누겠습니까? 마음을 터놓을 사람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해보았자 답답하기만 할 뿐입니다. 때로 제 마음에도 깊은 감회가 듭니다. '나에게도 야곱과 같은 아버지가 있어서 나와 같은 갈망과 같은 추구를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야곱과 같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다면 저는 통곡하며 울었을 것입니다. 평소에 제가 양육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정말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들의 생각이 너무나 좁고 어리석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를 보십시오. 신경 쓰는 것들이라곤 전부 사소하고 부질없는 일들뿐입니다. 때로는 그들을 책망하고 싶지만 한참 동안 말이 나오지 않아 마음이 답답합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신실하게 목양하면 됩니다. 영원 속에서 어쩌면 저의 믿음으로 인해 형제자매들이 영원한 영광을 갈망하기 시작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그토록 슬피 운 것은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하나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을 읽으며 여러분은 분명히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선생님, 생사를 초탈하셨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요셉도 생사를 초탈하지 않았나요? 요셉은 왜 울었습니까?" 요셉의 눈물이 여러분의 눈물과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눈물과 요셉의 눈물은 우리가 흔히 사람이 죽었을 때 흘리는 눈물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무덤에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마르다와 마리아 등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표적을 보고서도 뼛속 깊이 여전히 믿지 못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아십니까? 저는 형제자매 여러분 모두가 저와 마음이 통하는 영적 동역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야곱과 요셉 같은 사람이 되어 영원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갈망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던지는 질문만 보아도 여러분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의 울음은 사람들의 둔한 생각을 안타까워하는 울음이지만, 여러분의 울음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애굽 사람들은 왜 울었습니까? 애굽 사람들은 요셉 때문에 운 것입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 때문에 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왜 울었겠습니까? 요셉이 우는 것을 보고 "우리 지도자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겉으로라도 시늉을 내야지"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요셉의 부하였기에 요셉이 무엇 때문에 우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애굽 사람들의 울음은 헛된 울음이었고 흉내에 불과했으며, 그들 마음속에는 실상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돌보시며, 반드시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저는 믿음 안에서 선포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을 돌보실 것입니다. 만약 제가 죽더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을 돌보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믿음으로만 말할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여러분을 반드시 돌보십니다. 여러분이 영원 속의 영광에 마음을 둔다면, 세상의 사소하고 하찮은 일들에는 더 이상 얽매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현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진실로 믿습니다. 이것이 저의 추구이며, 제 힘의 원천이며,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저의 소망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저는 참으로 살아갈 소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으며, 세상에서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런 낙이 없었을 것입니다.
영원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저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으며, 매일이 비록 고단할지라도 소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 눈에 보배가 되십시오. 야곱이 믿은 분은 하나님이셨고, 그는 믿음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돌보실 것이며, 마지막 날에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실 것을 믿었습니다. 야곱은 영원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었지만, 야곱의 아들들은 그리 훌륭하지 못했습니다. 열두 지파라고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온전치 못했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우리가 본받을 만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야곱을 본받아야 하고, 요셉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 밖의 사람들은 그저 그러했습니다.
더 이상 제게 베냐민이나 단 같은 자들이 어떠했는지 묻지 마십시오. 열두 사도나 열두 지파라고 하지만, 열두 사도 중 가룟 유다를 대신해 제비 뽑혀 들어간 사람도 그리 대단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베드로를 보면 저는 종종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훗날 천국에 가면 베드로를 만날 수도 있겠지만, 베드로가 저를 보면 겸연쩍어할지도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열두 사도에 들지 않았지만, 참으로 당당하고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의지한 것은 사람이었다
요셉의 형들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만약 본받을 만한 자들이었다면 우리는 손을 잡고 뛰놀며 영원한 영광을 향해 달려갔을 것입니다. 이 형들은 사람을 너무나 답답하게 만들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야곱이 아들들에게 방금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는 모여 들으라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창세기 49:2)
그들은 듣기는 들었지만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본래 어떤 사람이었든 간에 여전히 변함없이 한심한 모습 그대로 살아갔습니다. 야곱이 죽자마자 그들은 엉뚱한 생각을 품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성토하고 보복하지나 아니할까 하고 (창세기 50:15)
이 말을 들어보십시오. 이것이 무슨 믿음입니까? 그들이 의지한 것은 오직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야곱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요셉이 자신들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요셉이 정말로 그들에게 해를 가하고자 했다면, 야곱이 살아 있었던들 어찌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버지도 막지 못했을 것입니다! 형들은 온종일 악한 생각과 악한 일만 일삼았기에, 자신들이 과거에 상대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기준으로 상대도 자신을 똑같이 대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속이 좁은 사람은 자신이 옹졸하므로 남들도 옹졸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이란 참으로 기이하여, 자기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방식대로 온 세상 사람들도 똑같이 생각할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들은 요셉이 아버지의 체면 때문에 자신들을 돌보아 주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이 어찌 알았겠습니까? 요셉과 야곱은 하늘의 영원한 소망을 품고 이 세상을 살아간 자들이었으며, 이 세상의 것들 중 그들의 눈에 찰 만한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형들은 사람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죽었으니 이제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들의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댄 것은 아버지 야곱이었으니, 매일 요셉의 집 앞을 지나며 밥을 먹을 때도 아버지만 살아 계시면 네가 우리를 어쩌겠느냐는 식이었지.'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사람을 대한 방식 그대로 상대도 자신을 대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창세기 50:16-17)
그들은 죽은 사람까지 끌어들였습니다. 사실 야곱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요셉에게 이 말을 전할 때 요셉은 울었습니다. 요셉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너희는 도대체 언제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질 것이냐? 겨우 그 정도 실력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느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세기 50:19-21)
우리 가운데 있는 형제자매들, 특히 제가 직접 목양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때때로 말을 매우 매섭게 할 때가 있지만, 그것은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입니다. 저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어찌하여 이토록 믿음이 없는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가." 요셉이 운 것은 형들이 하나같이 믿음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하나님의 뜻을 그리도 모르는가? 과거에 너희는 나를 해하려 하였다. 너희는 날마다 시기하고 질투했으나, 아버지가 나를 편애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너희의 그 한심한 태도 때문에 아버지는 너희에게 고된 일을 시키셨던 것이다.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어 나를 속이려 하고, 죽은 아버지까지 들먹이며 아버지가 죽기 전에 용서를 구하라고 하셨다고 하는구나."
요셉이 말했습니다. "과거에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의 뜻은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 오늘과 같은 광경을 이루려 하심이었습니다." 실로 놀랍지 않습니까! 요셉의 마음의 크기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가 추구한 것은 결코 세상의 하찮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것을 추구하지 않았지만, 일인자 아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심지어 바로조차 요셉을 아버지처럼 대우했으니 그 그릇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형제자매 여러분이 하늘에 속한 큰 안목과 하늘의 도량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심지를 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상에서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더러운 배설물을 맛있는 음식인 양 집착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배설물을 귀한 과자처럼 여기며 살아간다면 망하는 길입니다.
사람들은 이생을 지나치게 무겁게 여깁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 눈에 보배라면 제 눈에도 보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 눈에 쓰레기 같은 삶을 산다면, 저 또한 여러분을 그렇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왜 쓰레기 같은 존재가 되려 합니까? 왜 헛된 것에 집착합니까? 왜 오직 이생의 하찮은 일만을 위해 살아갑니까?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세기 50:19-21)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것은 오직 "우리를 먹여 살릴 수 있는가", 즉 그저 먹고사는 문제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사실 간단한 일인데도, 사람들은 머릿속에 온통 이 생각뿐입니다. 결국 요셉은 다정한 말로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들은 이생을 염려했으나 요셉은 영생을 염려했습니다. 요셉은 그들의 믿음 없는 모습을 보고 그들의 믿음의 수준에 맞추어 말해주어 두려워하지 않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을 비교해 보면 하나는 하늘에 있고 하나는 땅에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자가 진정한 보배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는 일주일 중 닷새는 하늘의 일을 생각하고 이틀은 땅의 일을 생각할 수도 있으며, 어떤 이는 이레 내내 땅의 일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야곱의 집에서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을 똑똑히 보았고, 애굽에 온 지 17년이 지났음에도 17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행하심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면서도 하나님의 행하심을 깨닫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각만 하면 빗나가고, 생각하는 것이라곤 온통 사소한 일과 이생의 일뿐이기 때문입니다. 입을 열기만 하면 이런 일들만 쏟아내니 어찌 영광스러운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 없이 22년을 살았습니다. 양식을 사러 왔을 때 요셉이 그들을 한 차례 시험했습니다. 당시 그들의 마음은 몹시 괴로웠고, 결국 그 총리가 자신들의 동생 요셉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17년 동안 풍요로운 삶을 누렸지만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여전히 하나님의 행하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보고 경험한 것 중 얼마나 깨닫고 계십니까? 어떤 이는 말합니다. "선생님, 저를 내보내지 마세요." 겉으로는 내보내지 않았을지라도 제 마음속에서는 이미 내보냈습니다. 승리하는 교회 안에 머물며 쓰레기처럼 버티려 해도 버틸 수 없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의지한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믿고 의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셉이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며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겠다고 설명하자, 그제야 사람들은 안도하며 일상을 살아갔습니다.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살아가는 삶이었습니다! 요셉의 마음에는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요셉 또한 믿음을 가지고 죽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창세기 50:24-25)
야곱은 믿음을 가지고 죽었고, 요셉 또한 믿음을 가지고 죽었습니다. 요셉은 죽어서라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 영원한 복을 얻고자 했습니다. 요셉이 "너희는 내 해골을 메고 여기서 올라가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관은 매장되지 않았고, 그의 유골은 땅에 묻혀 평안을 누리지 않은 채 계속 관 속에 보관되었습니다. 왜 그곳에 두었겠습니까? 요셉의 믿음은 야곱을 뛰어넘었습니다. 사실 야곱도 염려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는 요셉이 살아 있을 때 서둘러 자신의 시신을 가나안 땅으로 운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달랐습니다. "내가 죽어 내 해골이 이곳에 머물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너희를 돌보실 것이며, 반드시 너희를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 내 해골 또한 너희와 함께 하나님의 능력을 증언할 것이다." 요셉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시켜 자신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묻힌 막벨라 굴에 장사하게 할 수 없었겠습니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믿음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믿음은 야곱의 믿음을 훨씬 능가했습니다. 요셉의 영적인 눈은 이미 400년 후의 결과를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관을 메고 유골을 지닌 채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는 광경을 보았던 것입니다.
요셉은 말한 것입니다. "비록 죽을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볼 것이며, 너희가 나와 함께 출애굽하는 것을 증언하겠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참으로 놀랍습니다. 요셉은 총리의 자리에 있었던 자입니다. 권력을 쥐었던 자가 죽은 후 누군가 자신의 시신을 꺼내어 부관참시하거나 불태우고 모욕할까 두려워하지 않았겠습니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요셉이 원수를 산 사람이 많지 않았겠습니까? 많았습니다. 애굽 사람 전체를 적으로 돌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만약 투표로 뽑았다면 분명 낙선했을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요셉이 자신들의 돈과 재산을 다 거두어 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있을 때 두려워했겠습니까? 그는 살아 있을 때도 염려하지 않았고, 죽은 후에도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를 돌보실 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도 동일하게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이러한 믿음이 있습니까? 요셉과 같은 사람은 실로 대단합니다. 게다가 요셉은 말했습니다. "나를 가나안 땅으로 먼저 보내지 마라. 나는 너희와 함께 출애굽할 것이다. 내가 수많은 사람에게 원한을 샀다 한들 대단할 것 없다. 그들이 나를 어찌하겠는가? 내게는 하나님이 계신다!"
훗날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가 되었을 때, 애굽 사람들은 그 관을 보고 물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의 관인가? 왜 관이 여기에 놓여 있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답했을 것입니다. "이분은 우리의 조상 요셉이십니다. 일찍이 애굽으로 와서 애굽의 총리가 되셨던 분입니다. 믿기지 않으시면 애굽의 역사를 찾아보십시오. 아주 유명한 분이십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노예가 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셉의 관을 지켜낼 수 있었겠습니까? 노예 주제에 무엇을 지키겠습니까? 실제로 애굽 사람들은 관 속의 유골을 꺼내 불태워버리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이스라엘인, 히브리인이 아니냐? 노예 주제에 무슨 관을 남겨두느냐?" 그러나 요셉과 같은 사람이 누워 있는 그 관의 유골을 불태우려 했던 자가 있었다면, 그는 실행에 옮기려던 다음 날 곧바로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손을 대기만 하면 변을 당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살아 있을 때도 요셉을 당해내지 못했는데, 요셉이 죽었다고 해서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요셉이 죽었을지라도 당해낼 수 없습니다. 요셉에게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유골을 돌보시며, 요셉이 살아 있을 때 믿었던 바를 성취하고자 하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죽은 지 400년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자신의 유골도 함께 출애굽할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 속에서 정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으며, 요셉이 믿은 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어떤 애굽 사람이 감히 손을 댈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도 손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손을 대는 자마다 재앙을 만났기에 수백 년 동안 그대로 놓여 있었고, 어쩌면 애굽 사람들은 그곳에 와서 절을 하거나 향을 피우며 제물을 바쳤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떠한 믿음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었으며, 영적 세계에서 마귀의 권세를 뒤흔드는 믿음이었습니다.
한번은 저의 어머니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죽거든 장례를 이렇게 치러다오." 제가 말했습니다. "네, 다 어머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치르든 결국 어머니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겁니다." 요셉도 그러했겠습니까?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믿음은 이러했습니다. "비록 내가 관 속에 누워 있어 내 뜻대로 할 수 없을지라도, 내가 살아 있을 때 품었던 믿음으로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노니, 하나님은 반드시 너희를 돌보실 것이요, 반드시 너희를 이끌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이며, 내 해골 또한 너희와 함께 올라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이다." 요셉은 애굽에서 행하실 하나님의 역사를 친히 목도하고자 했습니다. 훗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모세가 백성을 이끌고 나올 때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 내리신 재앙들을 요셉의 유골은 그곳에서 친히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결론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창세기》 전체가 말씀하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창세기》, 《신명기》, 《레위기》, 《민수기》, 《출애굽기》는 율법서입니까? 아닙니다. 이것들은 믿음의 책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길을 열었고, 여러분이 믿는 바는 다 성취될 것입니다. 《창세기》가 말하는 것은 믿음이며, 설령 죽은 후라 할지라도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돌보시며, 하나님의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고, 이미 확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선포합시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돌보시며,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이끌어 올리시고,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다!" 이것이 믿음의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저 또한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중화권 사명신학은 다가올 세상과 미래의 세대에 기독교의 변혁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살아 있을 때일지 아니면 제가 죽은 후일지는 알지 못하나,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저는 영원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하나님은 반드시 저를 돌보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도 돌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우리의 믿음의 그릇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몫이란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속에 믿고 있는 바로 그것이 우리의 삶의 결과를 결정짓습니다. 야곡은 믿음을 가지고 죽었고, 요셉 또한 믿음을 가지고 죽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죽어서라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자 했던 사람들이며, 살아 있는 동안 멀리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던 자들이니 실로 위대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설령 사람이 나를 해하려 할지라도 결코 해하지 못할 것이니,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의 기초는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길을 개척했고, 요셉의 믿음에 이르러서는 그 시대의 절정에 도달했습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며, 이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원 속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창세기》 50장 본문
50:1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부려 울며 입맞추고
50:2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50:3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50:4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청하건대 바로의 귀에 아뢰기를
50:5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50:6 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50:7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50:8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50:9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50:10 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호곡하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도하였더니
50:11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 강 건너편이더라
50:12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행하여
50:13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50:14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50: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성토하고 보복하지나 아니할까 하고
50: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50: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50: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50: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50: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50:22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50:23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50: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50: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50:26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