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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다 저주 아래에 있나니

2023-02-19 7,317 讲道 悟性 信心的路 以信心为本 以行为为本 以行律法为本 纯正的福音

《答疑解惑》

1. 서론

  1. 사람이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으면 그것으로 자랑하게 됩니다. 자기가 잘하면 우쭐해지고, 잘하지 못하면 풀이 죽으며, 다른 사람이 잘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몹시 못마땅해합니다. 이것이 바로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2. 사람이 행한 것은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2. 본문 말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10)

3. 기도

4. 본문의 배경

  1. 베드로와 야고보가 전한 할례의 복음은, 바울이 전한 믿음을 근본으로 하는 복음과 달랐습니다.
  2.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있었지만 도무지 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핵심은 사람이 무엇을 행했는가, 행하지 않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성령의 능력을 덧입는 데 있습니다.

5.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1. 행위로는 믿음을 떠받칠 수 없습니다. 행위와 믿음이 대등하게 공존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2. 믿음과 행위가 대등하게 함께하는 것을 가리켜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것은 믿음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기만성을 띱니다.

6. 왜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으면 저주를 받는가?

  1. 율법을 행하는 것 자체가 저주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율법의 행위를 기초로 삼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사람이 행해 내는 율법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믿음을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2. 사람은 날 때부터 타고난 죄가 있어서, 하고자 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악을 행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함입니다.

7. 율법의 기능은 우리 자신이 무능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1. 사실 사람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으면서도, 자기가 다 지킨 것처럼 착각하며 제법 잘 행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2. 율법의 기능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능력이 없음을 깨닫게 하여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하는 데 있습니다.

8.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고, 성령을 의지하는 것이다

  1. 사람은 늘 엉망으로 살아왔지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귀신이 그 사람 안에서 불법이 됩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람이 무엇을 행했는가를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2. 은혜를 입은 것은 자유를 얻기 위함입니다. 다시는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헛되게 만들지 마십시오.

9. 아브라함의 자손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1. 율법은 아브라함 이후 400여 년이 지나 모세를 통해 기록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하나님의 언약이야말로 근본입니다.
  2. 아브라함의 자손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의 복을 얻게 됩니다.

10.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1. 행위를 근본으로 삼으면 외식(위선)에 빠지게 되고, 결국 저주 속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2. 오직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믿음으로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이고, 조금씩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살아내야 합니다!

11. 결론

  1.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자는 다 저주를 받은 자입니다. 율법의 행위는 자기 자신과 육신을 부각하지만,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핵심 단어

  1.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음
  2. 믿음을 근본으로 삼음
  3. 율법의 기능
  4. 성령의 권능
  5. 아브라함의 자손
  6.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함
  7. 은혜를 입은 것은 자유를 얻기 위함

1.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여러분과 매우 어려운 주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디가 어렵냐고요? 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전하기 어려울까요? 명확하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명확히 밝혀 설명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많은 공을 들였지만, 여전히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바로 이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자는 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무릇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자는 다 저주를 받은 자입니다. 오늘날의 목양을 보십시오. 오늘 제가 동역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최근의 목양에서는 반드시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태도를 다루어야 합니다!"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문제를 해결해야 수많은 복잡한 문제들이 풀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주 속에서 살아가면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기도해 주어도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자는 다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이 문제 자체가 지각과 깨달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생각의 얽힌 매듭을 풀지 못하면 참으로 골치 아파집니다. 오늘 여러분이 댓글로 남겨 주시는 글이나 질문들에 대해서는 제가 당장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먼저 제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여러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오늘만큼은 제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시겠습니까?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데서 비롯되는 저주를 거의 누구나 목격할 수 있습니다. 사실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그 복음은 복음이 결코 아니며, 변질된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변질된 복음이 오늘날 이 세대의 주류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시대의 주류라 할지라도 변질된 복음은 결코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에 아주 쉽게 미혹당합니다. 듣기에는 그럴듯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은 일을 하고 선을 행하는데 뭐가 문젠가?" 성경이 착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습니까? 성이 유 씨라면 '유 선인', 성이 이 씨라면 '이 대선인'이라 불리면 얼마나 좋습니까? 대선인이 되는 것은 듣기에는 참 좋을지 몰라도 진리는 아닙니다. 듣기 좋다고 해서 다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근본으로 삼느냐, 행위를 근본으로 삼느냐의 이 싸움은 사도 바울의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영계에서 인간이 존재한 이래로 줄곧 이어져 온 싸움입니다.

사도 바울과 야고보 사이의 갈등과 고민은 모두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느냐, 믿음을 근본으로 삼느냐를 둘러싸고 전개된 것이었습니다. 행위를 근본으로 삼거나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것은 온 덩이에 퍼지는 누룩과 같아서 결국 매우 깊은 저주를 가져옵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을 나누지 않았습니까? 그 누룩의 위력이 얼마나 큽니까? 아주 작은 누룩 하나가 온 덩이를 부풀게 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바로 이 작은 누룩 때문에 온 덩이가 부풀어 오른 상태입니다. 지금도 제가 인터넷에서 어떤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다 보면 여전히 《야고보서》를 자주 인용하는데, 《야고보서》에 나오는 그런 말을 그대로 들어도 되겠습니까?

여러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제가 《야고보서》를 제대로 읽지 않아서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저도 《야고보서》의 기록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읽고 또 읽어도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명확하게 풀어 설명하고 싶은데 정작 제 자신부터 깨달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그 안에 무슨 말이 적혀 있는지 아십니까? 사람이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위로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이 없으며, 《창세기》에도 그런 말이 없습니다. 그것은 야고보 자신이 만들어 낸 논리입니다.

이처럼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아주 작은 누룩 하나, 그 사소해 보이는 교훈 하나가 순식간에 사람을 저주 속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누룩과도 같은 그 전염력은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일단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곧바로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숙주가 되어,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속성을 갖게 됩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해 드리겠습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올드카를 한 대 샀습니다. 여러분, 올드카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새 차를 살 돈은 없는데 고급 브랜드 차는 타고 싶어서 산 오래된 중고차입니다. 명차 브랜드이긴 한데 연식이 오래된 중고차였습니다. 막상 사서 운전해 보니 겉보기에는 폼도 나고 탈 때 승차감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너무 자주 고장이 나는 겁니다. 도로 한복판에서 차가 툭하면 멈춰 서는데 속이 터지겠습니까, 안 터지겠습니까? 정말 속이 터집니다! 그래도 차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타고 다녔습니다. 결국 제가 그 차를 사서 속은 셈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한 친한 친구가 제게 물었습니다. "그 차 어때? 좋아?" 제가 "아주 좋아"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도 한 대를 산 것입니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그 친구에게 "타 보니 어때?" 하고 물었더니, 그 친구도 "아주 좋아"라고 하더군요. 도대체 뭐가 좋다는 말입니까? 고물차, 낡은 중고차라 잔고장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이 늙으면 여기저기 아프듯 부품을 계속 갈아 주어야 합니다. 제가 그 친구를 보며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좋다'고 말했을까요? 교회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어때요? 좋습니까?" "네, 참 좋습니다." "좋아요?" "네, 좋습니다." 다들 좋다고만 합니다! 제가 그 똥차를 샀을 때 가졌던 심리와 똑같습니다. 사람이 일단 이런 것에 사로잡혀 감염되고 나면 이런 속성을 갖게 되고, 그 속성을 바탕으로 똑같은 바이러스를 퍼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은 그런 거 안 보신다면서요?" 하실 텐데, 가끔 지나가다 보는 것입니다. 어떤 귀신들이 나오는 영화인데, 겉모습이 아주 끔찍한 귀신들이 사람들을 쫓아다닙니다. 참 흥미로운 것은 왜 사람을 쫓아다니냐는 것입니다. 그 귀신에게 물리면 그 사람도 똑같은 귀신으로 변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쫓아가서 물고, 물린 사람은 또 똑같은 존재로 변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좀비 영화 이야기입니다. 다들 한 번쯤 보셨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참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누룩과 같습니다. 그 누룩이 사람 안에서 일으키는 작용은 실로 엄청납니다! 사람은 순식간에 그런 속성을 갖게 되어, 제가 샀던 그 고물차처럼 "아주 좋다"고 말하게 됩니다.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행위를 근본으로 삼고 율법을 근본으로 삼는 것은 바이러스와 같아서, 결국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수많은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다들 "어때요?" 하고 물으면 "참 좋습니다!"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이런 모습을 발견하지 않으셨습니까? "참 좋다"고만 하지, 나쁘다고는 말하지 못합니다.

우리 모임에 온 지 일 년이 지난 어떤 분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 목사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는 말은 《야고보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전히 '자기 목사님' 타령을 합니다. 제가 속으로 '세상에, 내가 어쩌다 남의 양을 데려다 먹이고 있는가?' 싶었습니다. 사람이란 한번 감염되고 나면 여러 해가 지나도 쉽게 벗겨지지 않습니다.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사상이 심기면 그 안에서 누룩처럼 부풀어 오릅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들이 저주의 근원이 됩니다.

사람이 일단 이러한 저주 속에 살게 되면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이토록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수많은 현상을 보고, 그 문제의 근원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냈습니다. 무엇을 찾아냈습니까? 이 모든 것의 뿌리가 바로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지난 세월 교회를 개척하고 수많은 사람을 섬기면서, 잘못된 복음에 빠진 이들을 건져내고자 애썼습니다. 원래 질병에 걸려 있던 사람에게 바른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마치 소 귀에 경 읽기와 같았습니다. 소에게 거문고를 타 주면 소는 눈이라도 껌벅거리겠지만, 그들에게 복음의 곡조를 들려주면 자신이 믿고 있는 그 거짓된 것이 정통이라고 여깁니다.

어느 부부가 있었습니다. 십 년 전에 남편이 암에 걸렸는데, 십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호스를 꽂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먹으면 위와 식도가 구분되지 않고 폐로 넘어가 버려, 배에 호스를 꽂아 유동식을 주입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꼬박 십 년을 보냈는데, 십 년 뒤 검사를 해 보니 아내마저 암에 걸렸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그 부인을 제게 데려오며 "류 목사님을 찾아가 보세요. 그분 기도가 아주 강력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들을 보니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진실을 말해야 할까요, 거짓을 말해야 할까요? 생각 끝에 진실을 말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저주입니다." 그랬더니 난리가 났습니다! 저주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귀신의 역사입니다"라고 했더니 그것도 안 된다고 합니다. 암에 걸린 것은 인정하면서 귀신이라는 말은 절대 입에 담지 못하게 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암에 걸렸으면서도 암의 영적 실체는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참으로 안타깝지만, 결국 스스로 긴 고통의 세월을 견뎌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형제자매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알고 보니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가짜 복음 때문이었고, 죽을 때까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결국 저주를 믿는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주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저주를 믿은 것입니다. 이 암 환자 부부는 참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얼마 전 제가 어느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시신이 관 속에 누워 있었습니다. 저도 일전에 그 고인에게 화인 사명 신학을 전한 적이 있었지만, 그 역시 소 귀에 경 읽기였습니다.

이런 예를 들자면 끝도 없습니다. 그러고는 결국 돌아오는 말이 "왜요? 당신만 옳다는 겁니까?"라는 핀잔이었습니다. 세상에! 저도 다 맞지는 않아서 꼬리를 내리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꼬리를 내리고 겸손하게 처신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조용히 사는 편이 좋습니다. 상대가 쌀쌀맞게 굴고 비꼬는 말을 던지더라도 그냥 감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이 무능하고 효력 없는 가짜 복음이 정통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사람의 행위로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평가하며 "아, 저 사람 믿음 참 좋다"고 말합니다.

얼마 전 한 목사님이 제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자기 교회 교인 한 명이 암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제가 섬겨 본 완고한 질병 환자들은 대개 영적으로 고질적인 병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우리 이 자매님은 신앙생활을 정말 잘하고 훌륭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저는 '큰일 났구나, 이걸 어떻게 사역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말을 하자니 상처를 줄 것 같고, 말을 안 하자니 제 양심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음을 독하게 먹고 진실을 말하기로 했습니다. 진실을 말하면 사람의 비위를 거스르게 마련입니다.

제가 그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분의 신앙이 어떻게 그렇게 좋습니까?" 그랬더니 "주일 아침 일찍 교회에 와서 문 앞에 서서 전도지를 나눠주고, 오는 사람마다 손을 잡으며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저도 사랑합니다'라고 인사합니다"라고 하더군요. 그게 좋다는 전부였습니다. 그 외의 것은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사역을 시작하기도 전에 단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골수 깊은 곳은 결코 건강할 수 없습니다. 우리 중에도 코 하나, 눈 둘 멀쩡히 달려서 겉보기에는 다 그럴듯한 사람처럼 보이는 분들이 많습니다. 겉모습은 멀쩡한 사람 같지만, 뼛속 깊은 곳에 담긴 것은 사람을 죽이는 독소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겉으로 몇 가지 모양새를 흉내 내는 것은 쉽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 전도지를 돌리고 "주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저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5분이면 배울 수 있습니다. 억지로 버티고 꾸며내며 포장할 수 있지만, 마음속 깊은 곳은 온갖 갈등과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 세상을 떠난 목회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 저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그런 위선자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면 속이 얼마나 괴롭고 뒤틀리겠습니까? 저는 강단 위에 있을 때나 내려왔을 때나 똑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류 목사님, 목사님은 왜 그런 질병이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저는 "나도 성인이 아닌데 왜 병에 걸리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나에게 병이 있어도, 내가 당신을 이끌고 기도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으십니까?"라고 답합니다. 저는 믿음으로 행합니다. 하나님께서 제 안에서 역사하시며 저를 철저하게 다루십니다. 감사하게도 바울에게 있었던 그 육체의 가시는 제게 아직 없습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새로운 변혁을 가져와 사도 바울의 복음을 전면적으로 회복하고자 합니다. 또한 《야고보서》에 대해 철저히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단호히 부정하며 혹평을 내립니다! 그것은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어떻게 말합니까? 모든 말이 틀릴 필요는 없습니다. 몇 마디 옳은 말을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구절이 몇 개만 들어가 있어도 치명적입니다. 그가 뭐라고 합니까? "사람이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위로도 의롭다 하심을 받느니라." 깊이 연구하지 않는 일반 성도들은 그 안의 문제점을 결코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저는 그 책을 수백 번 읽으면서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오늘 제가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찻잔에 든 것이 차(茶)입니까? 차가 맞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약간의 독을 타면 독차가 됩니다. 술잔에 든 것이 술입니까? 술이 맞습니다. 하지만 비상(砒霜)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사람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우리는 변혁을 일으켜 형제자매들을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해야 합니다. 행위를 근본으로 삼고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이 100% 율법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90%의 믿음에 10%의 행위나 율법이 섞여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치명적인 독이 됩니다. 누룩은 반죽 전체가 누룩일 필요가 없습니다. 반죽에 아주 적은 양의 누룩만 넣어도 온 반죽이 부풀어 오릅니다.

여러분은 바리새인의 누룩을 경계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야말로 바리새인의 전형적인 누룩입니다. 아무도 이런 말을 감히 꺼내지 못하지만, 저주를 감당할 용기가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 누룩을 붙듭니다. 지난 몇 년간 교회를 떠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제가 《야고보서》를 이렇게 강해하고 혹평을 내리자 시험에 들어 떠나갔습니다. 제가 《야고보서》에 '별점 1점'을 주었더니 그들이 떠나간 것인데, 저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 가운데 제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개인적으로 저와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습니다. 제가 틀렸다고 생각하신다면, 어디가 어떻게 틀렸는지 한번 논증해 보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신약 성경》에도 저주가 언급되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전히 저주가 있습니다. 어떻게 저주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야고보서》에서 하는 말은 기가 막힙니다. 어떻게 찬송과 저주가 한 입에서 나올 수 있느냐며 이상하게 여깁니다. 찬송과 저주가 어찌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없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도 자주 나오지 않았습니까? 지극히 정상적인 일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왜 이미 저주가 없다고 선언합니까? 예수님께서 참으로 저주를 담당하셨기 때문인데, 그것은 믿음을 근본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만일 당신이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자라면,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헛되이 죽으신 것이며 당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런 사람을 도울 방법은 없습니다.

오늘 제가 이 내용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지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오늘은 아주 복잡한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사람이 어떤 사상 체계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깊이 따져보지 않으면, 그것은 대단히 큰 화근이 됩니다. 여러분은 '매판(Comprador)'이라는 단어를 아십니까? 매판은 특정 학설을 유통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 학설이 세워진 이면에는 거대한 자본과 권력의 지지가 있으며, 그들은 진심으로 자기가 말하는 것이 과학이고 진리라고 믿어버립니다. 얼마 전 제가 어느 제약회사의 소프트웨어 개발을 도와준 적이 있는데 참 흥미로웠습니다. 저는 의약품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제약회사 이면에 있는 자본은 거대 기업과 거대 자본들입니다. 그들은 전문가와 학자들을 후원하기 시작하는데, 실상은 일군의 매판들을 키워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뇌된 매판 학자들은 그들의 학설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 학설이야말로 제약회사가 돈을 버는 비결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다"라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으니 온갖 그럴듯한 논리를 폅니다. 그러고는 전문가의 권위 있는 목소리로 제약회사를 대변하는데, 이는 모든 업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것은 현대의 발명품이 아닙니다. 이를 가장 먼저 고안해 낸 사람은 여불위(呂不韋)였습니다. 여불위는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문객 3천 명을 거느렸고, 그 3천 명의 문객이 여불위를 대변하고 이론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편찬한 책이 바로 《여씨춘추(呂氏春秋)》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배후의 흐름을 조금은 꿰뚫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시간이 나실 때 제약회사의 논리 체계나 병원의 논리 체계를 한번 연구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연구해 보지 않으셨겠지만 저는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제가 여기서 섣불리 말했다가는 책임을 져야 하므로 자세히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굳이 말씀드려야 한다면 사석에서 조용히 말씀드릴 수는 있어도 여기서 공개적으로 다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파장이 너무 커지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저는 매사를 명확하게 밝혀내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확실하게 파헤쳐서 명백해진 뒤에야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에는 참으로 흥미로운 일들이 많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아십시오.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것에는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제 제가 ChatGPT에 질문을 하나 던져 보았는데, 답변이 제법 객관적이었습니다. AI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 가져오는 저주에 대한 것입니다. 아직 본론을 다 설명하지도 못했는데,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율법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 무엇인지,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다 풀지 못했으니 계속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 3장 10절을 읽겠습니다.

2. 본문 말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10)

3.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성령님이시여! 오늘 우리의 마음눈을 열어 주셔서 바울이 전한 순전한 복음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 오늘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사, 우리를 이 은혜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 믿음으로, 성령을 힘입어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이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살아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나를 위해 저주를 짊어지셨으니, 오늘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집에서 아들의 권세를 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4. 본문의 배경

저는 이 《갈라디아서》 본문을 참으로 자주 인용합니다. 혹여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셨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오늘 새로운 통찰을 더해 드리겠습니다. 본문에 보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등장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야고보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는 한패였으며, 그들이 전한 것은 결국 바리새인의 누룩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교리를 전하면서 "가서 사람을 죽여라" 하겠습니까? 듣자마자 잘못된 것임을 누구나 압니다. "가서 은행을 털어라" 하겠습니까? 듣자마자 이상하다는 것을 모를 사람이 없습니다. 바리새파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전한 것은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을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 자신은 율법을 온전히 지켰습니까?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들도 지킬 수 없었고, 지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율법 전체를 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간교한 일입니다.

왜 그들은 율법 전체를 전하지 않았을까요? 아주 사소한 일부분만 전했습니다. 악하지 않습니까? 대단히 악합니다. 그들이 전한 것이 무엇입니까? 남성의 생식기에 작은 수술을 하는 것, 즉 할례였습니다. 작은 수술 하나 받는 것이 대수냐고, 받으면 그만 아니냐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정황을 보면,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이었고 베드로는 수제자였습니다. 사람들은 "저분들은 예수님을 직접 따랐던 분들이고, 율법에도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할례를 받지 않고 어떻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듣기에는 제법 그럴듯한 논리입니다!

할례의 복음을 전하자 사람들도 괜찮다고 여겼습니다. 저라도 '작은 수술 하나 받는 것인데, 요즘 교회들 가르침대로 위생상으로도 좋지 않은가' 하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해괴한 짓입니까? 이 일로 인해 바울은 몹시 격분했고, 의분에 차서 써 내려간 편지가 바로 《갈라디아서》입니다. 《갈라디아서》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라고 왜 복음이 아니겠는가? 《야고보서》에도 믿음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가? 믿음을 가져라, 인내하라, 겸손하라 등 좋은 말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작은 수술 하나 때문에 바울은 왜 그리 화를 내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작은 틈이 한번 열리면, 그 작은 단초는 누룩처럼 번져 교회 전체를 변질시키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도 이런 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우리 모임에 철없는 아이 하나가 있었는데 참 별났습니다. 어디서 책을 읽었는지 "주일에는 돈을 쓰면 안 된다"는 주장을 가져왔습니다. 지금도 인터넷에 《불의 세례》 같은 것을 검색해 보면 "주일에는 돈을 쓰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가 퍼뜨린 것입니까? 한국 사람들이 퍼뜨린 것입니다. 그 아이는 주일에는 절대로 돈을 쓰지 않았습니다. 저는 '안 쓰려면 너나 쓰지 말아라' 하고 내버려 두었는데, 나중에 보니 수많은 사람이 그 아이의 생각에 휩쓸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의아했습니다. '그 아이가 목사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어떻게 교회 안에서 저런 영향력을 갖게 되었을까?' 어디까지 갔느냐 하면, 주일 밤 12시가 지나기 전에는 학교 숙제도 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월요일에 과제를 제출해야 하는데, 주일 밤 12시가 넘기를 기다렸다가 숙제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답시고 말입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결국 사달이 났습니다. 많은 사람이 죄책감과 갈등 속에서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참으로 어리석지 않은가?' 싶었습니다.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말을 다 사실로 믿어버린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전혀 타당하지 않은 궤변이 참된 복음을 변질시켜 버렸습니다. 참 복음이 변질되자 갈라디아 사람들은 복음의 능력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기도하면 병이 나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온갖 고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고난을 겪은 것이 모두 헛된 일이었습니까?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사상에 감염되었기 때문인데, 그 비율은 1%도 아니고 고작 0.001%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남성의 생식기에 작은 수술을 한다고 해서 살점이 얼마나 떨어져 나가겠습니까? 몸무게가 가벼운 사람은 50kg, 무거운 사람은 100kg, 더 무거운 사람은 150kg이라고 칩시다. 잘라내는 살점은 기껏해야 2g에 불과합니다. 50kg과 2g의 비율은 0.001%도 되지 않습니다. 고작 그 정도의 일이었지만, 그것은 복음 전체를 바꿔치기한 행위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일로 물꼬가 한번 트이면, 할례를 지켜야 한다면 다른 율법 조항들은 안 지켜도 되겠습니까? 소를 잡고 양을 잡는 제사는 드리지 않아도 됩니까?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차라리 기독교라는 이름을 버리고 유대교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완전히 헛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토록 기이하고 심각한 문제였기에 바울은 그토록 분노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피땀 흘려 교회를 세우고 순전한 복음을 전하여 모든 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를 누리게 해 놓았더니, 어떤 자들이 들어와 교회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 짓을 하려거든 베드로나 야고보 같은 이들처럼 유대인 회당에 가서나 할 일이지, 왜 사도 바울이 개척한 이방인 교회까지 기어들어와 난장판을 만들어 놓느냐는 말입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질병에 걸리고 죽어 나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각자가 자기 죄의 저주를 짊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예수님께서 저주를 짊어지셨는데, 이제는 자기 행위로 저주를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소한 문제입니까?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결코 타협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 되는 원칙들이 있습니다. 어떤 학문이든 그 학문의 근간을 이루는 본질적인 원리는 결코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바울은 비장한 심정으로 이 《갈라디아서》를 써 내려갔습니다. 저주와 축복의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왜 하필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습니까? 왜 가부좌를 틀고 손을 모은 채 살아있는 부처처럼 계시지 않고, 굳이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만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자(이신칭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신칭의의 교리를 가볍게 여길지 모르지만, 이것이야말로 목숨처럼 붙들어야 할 진리입니다.

사람이 의인이 되지 못하고 본질상 죄인으로 남아 있다면, 그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기지 않는 한 그 사람에게 붙은 귀신은 결코 쫓아낼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신이 저주 아래 있는 자라면 귀신이 당신 안에 머무는 것은 합법적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이고, 예수님께서 나의 저주를 온전히 짊어지셨음을 믿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때에만 마귀의 거함이 불법이 됩니다. 마귀의 권세가 불법이 되어야 귀신을 쫓아낼 수 있고, 비로소 참된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됩니다. 참된 자유를 얻은 사람 안에서 성령께서 끊임없이 역사하실 때 능력을 덧입어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가르침은 결코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십자가의 사건은 바로 이렇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묻습니다.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처음에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시작해 놓고서 어찌하여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 합니까?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어 놓고서 왜 다시 유대교로 회귀하려 합니까? 유대교가 가르치는 모든 예표조차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데,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가 왜 껍데기뿐인 유대교로 돌아간단 말입니까? 참으로 해괴한 일 아닙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3:13-14)

율법을 행함으로 의로워지려 하면 성령의 역사를 소멸시키게 됩니다. 믿음의 길을 버리고 율법의 행위라는 멸망의 길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율법 조항 몇 개를 지켜 놓고는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깁니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입니다. 두 형제가 마주 앉아 이야기합니다. "형님, 할례 받으셨습니까?" "아직 안 받았다." "저는 이미 받았습니다." "아니, 벌써 받았단 말인가? 자네가 나보다 훨씬 거룩해 보이는구먼!" 이것이 도대체 무슨 해괴망측한 짓입니까? "형님, 어서 가서 받으십시오. 덧나지 않게 잘하는 곳을 소개해 드릴 테니 당장 받으십시오." 결국 형도 가서 수술을 받습니다. 온통 이런 껍데기뿐인 일로 서로 우쭐대며 자랑합니다.

모여 앉아 귓속말을 주고받습니다. "자네 할례 받았나?" "받았지." "역시 훌륭해! 자네는?" "난 아직..." "쯧쯧, 신앙 수준이 참 낮구먼."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추태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때로 분을 참지 못하고 "차라리 스스로 몸을 베어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일갈했던 것입니다. 그럴 바에는 아예 환관이 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환관이 되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요즘 의학 기술이 발달했으니 다른 성별로 성전환이라도 하라는 말입니까?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율법과 아브라함의 사건을 대비하여 논증을 펼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브라함은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습니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보십시오! 사실 《창세기》는 온전히 믿음을 증언하는 책이며, 《창세기》 시대에는 아직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창세기》를 누가 기록했습니까? 모세가 기록했습니다. 모세가 기록한 모세오경 중 첫 번째 책이 바로 《창세기》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율법서가 증언하는 본질은 믿음입니까, 아니면 율법의 행위입니까?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이 주어지기 500년 전의 인물입니다. 율법보다 500년 앞서 아브라함이 존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과 은혜는 전적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입니까? 바울은 이어서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해 탁월한 논증을 이어갑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그 뉘앙스를 온전히 살려 읽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씨(자손)'는 수많은 자손을 가리키는 복수가 아니라, 오직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원수의 성문을 취하신 아브라함의 그 유일한 자손이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대적의 문을 취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 율법이 왜 주어졌는지, 율법의 본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율법과 약속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밝힙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몽학선생(초등교사)이었습니다. 율법은 인간 스스로는 결코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야고보와 베드로, 바울의 시대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은 이미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상태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짓밟힌 이유가 무엇입니까? 율법이 있었음에도 인간의 힘으로는 그것을 온전히 지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킬 수 없는 것은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옛 이스라엘 사람들도 지키지 못했는데, 당신이라고 해서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만일 온전히 지켜낼 수 있다면 당신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칭찬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능력을 힘입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진리가 임하고, 성령을 받아 성령이 우리의 능력이 되는 것만이 유일한 근본입니다. 당신이 무언가를 행했는가 행하지 않았는가는 결코 본질이 아닙니다. 본질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사 성령의 권능을 힘입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5.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음과 행위 두 가지를 동등한 근본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당신의 믿음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그 믿음, 우리도 믿습니다. 당신도 믿고 우리도 믿지만, 우리에게는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 하나가 무엇입니까? 바로 작은 수술 하나, 즉 할례를 덧붙인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덧붙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깎아내린 것에 불과합니다. 몸의 일부를 잘라냈으니 말입니다. 깎아내렸든 덧붙였든, 그것은 사람을 옭아매는 올무가 됩니다.

믿음과 행위를 동등한 기초로 삼는 것, 이것이 바로 야고보의 논리입니다. 믿기지 않으신다면 돌아가서 《야고보서》를 직접 읽어 보십시오. 야고보는 사람이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위로도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공공연히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실 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사람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사람의 선한 행실을 구원의 조건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헛수고입니다. 행위가 믿음을 떠받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 모든 것이 뒤엉켜 버립니다. 행위와 믿음이 대등하게 공존한다는 것은 마귀의 거짓말이며, 그것이 바로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영적 실체입니다.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은 믿음을 완전히 내팽개치는 것이 아닙니다. 밀가루 반죽은 그대로 둔 채, 그 안에 약간의 누룩을 슬쩍 집어넣는 것과 같습니다. 핵심을 간파하셨습니까? 겉으로는 같은 밀가루처럼 보이기 때문에 기만성을 띱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부풀어 오른 변질된 반죽입니다. 순전했던 복음은 이미 가짜 복음으로 전락했고, 함께하시던 성령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사람의 행위라는 누룩만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심각한 비극입니까?

사람들이 왜 이런 것에 쉽게 빠져들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보기에 대단히 합리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논리는 얼핏 들으면 지극히 당연하고 타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귀에 그럴듯하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 올바른 것입니까? 성경과 부합하지 않으며, 십자가 복음과 정면으로 대치됩니다. 귀에 듣기 좋다고 해서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야고보 파는 선전을 아주 기가 막히게 잘했습니다. 사람이 오면 바지를 걷어 올리며 무릎을 보여줍니다. "내 무릎을 보십시오." "어머나, 낙타 무릎처럼 굳은살이 박였군요!" 이것이 무엇을 하는 짓입니까? "내가 이렇게 기도를 많이 합니다. 내 무릎에 박인 굳은살을 보십시오" 하며 자기 행위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실제로 그런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직접 만나지는 못하고 전화로 전해 들었는데, 하루에 일곱 시간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무릎에 두꺼운 굳은살이 박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여전히 지독한 저주 아래 묶여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낙타 무릎을 자랑거리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행위를 근본으로 삼고 율법을 근본으로 삼으면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게 마련이지만, 그래 봐야 지극히 보잘것없는 일부분일 뿐입니다. 지키려면 율법 전체를 온전히 다 지켜야지, 몇 조항 겨우 흉내 내놓고 자기가 의로운 줄로 착각합니다.

얼마 전 제가 어느 암 환자를 섬긴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자기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평생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선하게 사셨습니까?" "노인들이 길을 건널 때 시장 바구니를 들어 집까지 날라다 주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선행도 하셨습니까?" "몇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까?" "네." 제가 말했습니다. "고작 그런 사소한 일 몇 번 한 것으로 스스로 의인이라 자처하십니까?" 작은 일 몇 개 해놓고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니 암에 걸렸을 때 억울해서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어머니가 홧김에 던진 말 한마디를 마음에 품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자의 실상이란 이처럼 추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잘하면 콧대가 하늘을 찌를 듯 기고만장해지고, 자기가 못하면 금세 풀이 죽어 고개를 떨굽니다.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매사를 행위의 잣대로만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불같이 화를 냅니다. 남의 허물을 보면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립니다. 여러분도 주변에서 보지 않으셨습니까? 목회자인 저는 믿음의 눈으로 여러분을 바라봅니다. 비록 여러분의 지금 모습이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제 믿음 안에서 여러분은 이미 예수님의 형상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의 눈이 없다면 목양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여전히 사람의 외적 행위로 영성을 저울질합니다. 그 사람의 뼛속 깊은 곳에 무엇이 들어차 있는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저는 사람의 내면 깊숙한 골수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꿰뚫어 봅니다. 가끔 슬쩍 시험해 봅니다. 여러분이 눈치채지 못할 방식으로 슬쩍 건드려 보면, 감추어져 있던 밑천과 본색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쓴소리 한마디, 억울한 상황 하나 견뎌내지 못하고 본색을 드러냅니다. 저에게는 영적 실체를 꿰뚫어 보는 분별의 거울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행위 중심 신앙의 민낯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영성이 아주 깊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주일 예배에 한 번도 빠지지 않거든요." "주일 예배 안 빠지는 것이 깊은 영성입니까?" "저는 십일조와 헌금을 꼬박꼬박 바칩니다." 그러고는 "내가 이렇게 헌금을 많이 드렸는데 왜 복을 받지 못합니까?"라고 따집니다. 헌금을 바쳤으니 당연히 복을 받아내야 한다는 식입니다. 복을 받는 은혜와 헌금이라는 행위를 맞바꾸려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행위를 근본으로 삼고 율법을 근본으로 삼는 태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남들도 다 그렇게 헌금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당신처럼 거래하듯 드리는 줄 아십니까? 당신은 헌금을 드린 뒤 그것을 자기 의와 자랑으로 삼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들의 건축 헌금 작정을 보십시오. 제 친구 목사가 교회를 개척하고 건축 헌금을 걷었는데, 교회가 발칵 뒤집혀 풍비박산이 났다고 합니다. 헌금한 사람의 이름과 액수를 주보에 공개했더니 아수라장이 된 것입니다. 헌금을 적게 낸 사람은 부끄러워 숨고 싶어 하고, 많이 낸 사람은 으스대며 자기를 과시하려 했습니다. "내가 제일 많이 헌금했다!" 그러고는 교회 안에서 큰소리를 치며 기득권을 주장합니다. 적게 내면 수치스러워하고 많이 내면 영광으로 삼습니다.

성경은 결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윗도 그렇게 하지 않았고, 아브라함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뒤에 남아 짐을 지키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전리품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승리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선물이지, 자신들의 칼과 창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봉사 조금 해놓고 자기가 대단한 공로를 세운 양 으스댑니다. 봉사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아무것도 안 한다며 정죄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봉사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인사 관리를 하더라도 일할 수 있는 특권을 은혜로 여겨야 합니다.

포도원에 아침 일찍 들어가 종일 일한 품꾼들이 저녁에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녁 늦게 들어와 한 시간 남짓 일한 사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자, 먼저 온 자들이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왜 불평했습니까? 행위를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뙤약볕 아래서 종일 일했습니다!" 그러나 포도원에 들어와 일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다 무익한 종일 뿐이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주를 위해 많이 헌신했다고 제 앞에 와서 자랑하지 마십시오. 제게 호되게 꾸지람만 들을 뿐입니다.

"목사님, 저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습니다." 그것이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이 아닙니까? "저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하든 안 하든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주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다른 이들이 장터에서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며 답답하게 보낼 때, 당신은 아침 일찍 포도원에 부름받아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포도원 주인의 그늘 아래서 은혜를 누린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중 온 자는 포도원의 풍성함을 채 맛보지도 못하고 일이 끝났습니다. 일찍 부름받은 것이야말로 특권과 은혜가 아닙니까? 이렇게 복음을 바로 깨달으면 교회 안에 무슨 분쟁이 있겠습니까? "목사님, 우리 교구는 성도가 이렇게 많은데 저 교구는 숫자가 적습니다." 저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인사고과(KPI)가 아닙니다. 제가 관심을 두는 오직 한 가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변질 없이 올바르게 선포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6. 왜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으면 저주를 받는가?

이해가 되십니까? "내가 율법을 행하는데 왜 저주를 받는다는 말인가?" 당신이 율법을 행해서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기 때문에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이 둘을 명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 자체가 저주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기초이자 근본으로 삼을 때 저주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지극히 단순합니다. 당신이 지키는 율법의 수준은 하나님의 기준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의로워지려면 600여 개가 넘는 율법 조항 전체를 항상 완벽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 600여 개 조항 중에서 고작 서너 개, 대여섯 개 흉내 내놓고 자기를 자랑합니다.

차라리 지키지 못한 수백 가지를 내놓고 부끄러워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은 결코 율법을 온전히 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 사람을 율법의 행위로 완전하게 만드시려는 것이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사람을 온전하게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율법의 행위가 뿌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이 영원한 근본입니다.

사람이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순간, 마귀는 즉시 참소할 명분을 얻게 됩니다. 마귀가 기다렸다는 듯이 송사합니다. "보십시오. 저 장 자매, 이 자매, 왕 자매, 조 자매는 행위를 근본으로 삼고 율법을 기초로 삼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저 계명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내가 저 사람 속에 들어가 몇 년이고 둥지를 틀겠습니다. 저 자매에게 암을 안겨주고 관절염과 온갖 질병으로 짓누르겠습니다." 이런 영적 실상을 들으면 간담이 서늘해지지 않습니까?

누가 당신더러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으라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근본으로 삼아야만 그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요, 아브라함이 열어놓은 생명의 길입니다.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것은 아브라함의 길이 아닙니다. 행위를 기초로 삼으면 단 하나의 법규만 어겨도 처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운전할 때 교통 법규 하나를 어기면 딱지가 하나 날아오고, 두 개를 어기면 두 장, 세 개를 어기면 세 장이 날아옵니다. "나는 다른 법규는 다 어겼지만 신호등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지켰습니다"라고 우긴다고 봐줍니까? 면허 취소를 당할 뿐입니다. 율법의 작동 원리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하물며 인간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어도 행할 능력이 없고, 도리어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에게는 날 때부터 죄의 권세, 즉 악한 영의 영향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귀신의 영향 아래 있다'는 논리가 귀에 거슬릴지 모르지만, 깊이 묵상해 보면 그것이 엄연한 사실임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날 때부터 흠 없이 거룩하다고 착각하는 순간 파멸이 시작됩니다. 인간은 원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은 기어이 행하고 마는 비참한 굴레에 갇혀 있습니다. 악을 저지르고 나면 스스로 괴로워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안에 태생적으로 웅크리고 있는 죄의 권세이며,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자가 저주 아래 놓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바로 우리의 이 절망적인 무능을 해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 죄를 깨끗이 씻어내시고,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모든 저주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 결과 마귀는 쫓겨나가고, 우리는 비로소 원하던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측량할 수 없는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당신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낸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령께서 행하신 역사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시고, 그 승리의 면류관을 값없이 우리 머리에 씌워 주셨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우리에게 무슨 자랑할 거리가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자랑할 이유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 삶 속에 남아 있는 율법주의적 쓰레기들을 깨끗이 치워버립시다. 최근의 목양 사역에서, 우리 가운데 있는 목회자들은 귀를 기울여 똑똑히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돌보는 양 떼 안에 도사리고 있는 행위 중심의 사고, 율법 중심의 찌꺼기들을 철저하게 다루어 주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입을 열어 열 마디를 하면 일고여덟 마디에서 행위 중심의 냄새가 물씬 풍겨 나옵니다.

왜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으면 저주를 받습니까? 성경이 증언하기를 "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요, 저 계명을 어기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600여 개가 넘는 율법을 인간은 다 지켜낼 수 없습니다. 과거에 지은 수많은 죄는 또 어떻게 청산하겠습니까? 이미 범한 죗값을 무효로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왜 믿음의 은혜로운 길을 걷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매 이를 우리에게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은 바로 오늘 우리를 위해 기록된 말씀입니다.

7. 율법의 기능은 우리 자신이 무능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율법의 본래 기능은 인간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지킬 수도 없는 율법을 주셨을까요? 율법은 신령한 영적 거울이어서, 인간이 율법 앞에서는 결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절감하게 하여 교만한 자랑을 꺾어버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헛된 자랑을 늘어놓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사역 현장에서 마주하는 가장 답답한 모습들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는 율법을 지킬 능력도 없으면서, 마치 스스로 율법을 다 지켜내어 의롭게 행하고 있는 양 착각하는 자들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우리의 전적 무능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 이것이 진정한 회복의 출발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성도들이 제 설교를 거꾸로 알아듣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도 참 답답합니다.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 늘 자화자찬 같아서, 목사님 혼자 저 멀리 앞서가시고 우리는 갈 길이 막막해집니다"라고 불평합니다. 제가 제 길을 가는데 왜 여러분의 길을 막는단 말입니까? 제 덩치가 그렇게 큽니까? 문이 좁아도 비껴서면 둘이 충분히 지나갈 만큼 제 몸집은 얇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자리를 다 차지하지 않았으니 저를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늘 제가 무능하다고 고백하는데, 여러분은 어찌하여 제가 잘났다고 자랑하는 것으로 듣습니까?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 제 자신에게 아무 소망이 없음을 뼛속 깊이 깨달았습니다. 제 힘으로 살 수 있었다면 옥상에서 뛰어내리려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 뛰어내리려 했지만, 뛰어내릴 용기조차 없었던 겁쟁이가 바로 저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이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이제 더 이상 뛰어내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 이상 내 힘과 행위로 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찍이 제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고, 인간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현상이 있습니다. 저는 고학력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간 정도의 교육은 받은 사람이며 무지막지한 무지렁이는 아닙니다. 그런 저도 하나님 앞에서는 제 무능을 고백하는데, 정작 배운 것도 별로 없고 반 푼수 지식밖에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어찌나 기고만장한지 모릅니다. 제 앞에서도 대단한 위세를 부립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율법의 참된 기능은 인간의 철저한 무능을 폭로하는 데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나아가 율법의 또 다른 중요한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오직 '믿음의 길',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로 나아오게 하는 데 있습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는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길이야말로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유일한 맥락입니다. 율법서인 모세의 《창세기》가 계시하는 궁극적인 진리 역시 오직 '믿음'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반드시 새겨두어야 할 관점이 있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외부 환경도 당신을 파멸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당신 자신만이 스스로를 망칠 수 있을 뿐입니다. "저 사람이 이런 짓을 해서 끝장났고, 저런 짓을 해서 망했다" 하며 남 탓만 일삼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영적 파멸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우리의 무능함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무능하면서도 스스로 유능하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삶이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목사님, 사는 게 너무 괴롭습니다"라고 호소합니다.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은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이십 년 되었습니다." 이십 년 동안 율법주의에 찌들어 살아온 것입니다. 예외 없이 100% 율법의 올무에 걸려 있습니다. 왜 괴롭습니까? 자녀가 조금만 빗나가도 괴롭고, 직장 일이 꼬여도 괴롭고, 가정이 흔들려도 괴롭고, 형편이 어려워지면 괴로워 견디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니 미래에 대한 산 소망이 없고, 미래에 대해 절망적인 판단만 내리니 마음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고통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은 "함께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사 당신의 영안을 열어주시기를 원합니다"라는 위로뿐입니다.

8.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고, 성령을 의지하는 것이다

믿으십시오! 믿을 때 마귀는 당신 안에서 불법 침입자가 됩니다. 당신은 여전히 온전하지 못하고 실수투성이입니다. 평생을 엉망진창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여전히 연약하고 넘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이제 귀신의 역사가 '불법'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이 여전히 부족함에도 하나님은 당신을 '의인'으로 여겨 주십니다. 당신이 대단한 선을 행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행위를 기준으로 당신의 구원을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만일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면 우리 중 사형 선고를 면할 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겠습니까? 백 년을 산다고 한들 그것이 복이겠습니까? 죄 아래서 칠팔십 년, 백 년을 장수하는 것은 도리어 저주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마귀의 역사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유일한 열쇠가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보시고 장차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이 될 것을 확신하십니다. 우리 역시 믿음으로 말미암아 장차 하나님의 온전한 아들이 될 것을 바라봅니다. 그럴 때 마음의 모든 죄책감과 억눌린 짐을 벗어 던질 수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과 연약함을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어디서 이토록 완전하고 놀라운 복음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폐기처분하려 합니까? 어찌하여 예수님을 또다시 헛되이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합니까? 우리가 은혜를 입은 것은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 바리새파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어찌 율법의 규례를 범하느냐?"며 정죄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믿음 없이 행위만 앞세우는 이런 어리석은 자들이 교회 안에 부지기수입니다.

얼마 전 제가 돌보던 어떤 성도들이 먼 길을 운전하여 저를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먼 길을 달려왔으니 제가 따뜻하게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우리 좋은 포도주 한 병 열어 기쁨을 나눕시다"라고 권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자리에서 안색이 굳어지며 정색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희 장로님이 술 취하지 말라고 엄히 가르치셨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술에 취하자는 것이 아니라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자 "술을 입에 대는 것 자체가 곧 술 취함입니다!"라고 대꾸하더군요. 이것이 도대체 무슨 해괴한 논리입니까? 그런 율법주의적 잣대로라면 예수님조차 죄인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사양치 않으셨을 뿐 아니라,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큰 항아리 세 개를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그 많은 포도주를 마시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거나해졌겠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는 술에 취하지 않습니다. 술을 절제할 줄 알기에 살면서 단 한 번도 술에 취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것은 얽매임이 아닌 자유를 누리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 계명, 저 규례에 얽매여 부자유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영적 지평이 열려야만 올바른 분별력을 갖게 되고, 율법주의적 억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유를 누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본래 목적은 하나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심이었습니다. 왜 우리를 종이 아닌 아들로 부르셨습니까?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자유하기 때문입니다. 종은 결코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고 성령을 의지하여 저주의 문제를 완전히 청산하는 것입니다. 저주에서 벗어나 영적 자유인이 되었다면, 이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겠습니까, 아니면 계속 성령을 의지하겠습니까? 당연히 성령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이 문제를 논할 때마다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들먹입니다. 야고보도 아브라함을 끌어들이고, 바울도 아브라함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어찌하여 양쪽 모두 아브라함을 내세우는 것일까요?

9. 아브라함의 자손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우리가 영적 본질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창세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율법이 언제 생겨났습니까? 아브라함의 시대가 지나고 400여 년이 흐른 뒤에야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모세는 아브라함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의 약속은 400년 뒤에 생겨난 율법 따위로 폐기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모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가졌던 그 믿음,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이야말로 흔들릴 수 없는 근본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까?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것이지, 아브라함의 행위가 완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사람이 행위를 기준으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요셉을 이리저리 비판합니다. 그들 역시 행위 중심의 잣대로 신앙의 위인들을 재단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행위의 잣대로만 들이대면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허물투성이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약속의 자손이 과연 그들 육신의 후손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약속된 참 자손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그 '한 자손'을 분명히 지목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그 유일한 자손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기에, 오늘 우리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누렸던 믿음의 복을 고스란히 상속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논리입니다. 당신이 무엇을 행했는가, 행하지 않았는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이제 비로소 영적 자유가 무엇인지 느껴지십니까?

돌아보면 저는 어릴 때부터 공부에 있어서 참 자유로웠습니다. 남들처럼 과도한 입시 경쟁에 휘말려 아등바등 살았다면 오늘날 진작에 탈진해 쓰러졌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어려서부터 영혼의 자유를 누렸기 때문입니다. 합창단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도 상처받지 않고 "잘됐다, 남들은 노래하라지 뭐. 난 어차피 노래를 못하니 괜찮아" 하고 훌훌 털어버렸습니다. 저는 지금도 음정이 잘 맞지 않습니다. 축구를 하다가 공을 차지 못해도 "못 차면 그만이지" 했습니다. 시험에서 전교 1등을 해도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고, 10등으로 떨어져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굴지 않았습니다. 1등 하던 녀석이 10등으로 미끄러지면 집안이 발칵 뒤집혀 야단을 맞을 법도 한데, 저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심지어 20등 밖으로 밀려나도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겼습니다.

저는 제 어머니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머니는 저를 과도하게 옥죄지 않으셨습니다. 늘 "아들아, 몸 상할라, 너무 무리해서 공부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특별하고 지혜로운 어머니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영혼의 자유를 배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바로 이 참된 자유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아브라함은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매사에 전전긍긍하며 "이걸 지켰나, 저걸 못 지켰나" 하고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옹졸함이 없었습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 이삭도, 야곱도 다 그런 믿음의 대범함을 지닌 자유인들이었습니다. 믿음의 족장 사대가 다 그러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이 된 것입니다.

10.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바리새인의 누룩을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순전한 반죽 위에 '0.0001%'라도 행위를 공로로 삼는 생각을 섞는 순간, 온 덩이가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르게 됩니다. 무엇이 부풀어 오릅니까? 죄가 부풀어 오르고, 악한 영의 역사가 부풀어 오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힘으로는 마귀의 궤계를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힘입어, 성령의 권능을 덧입고, 굳건한 믿음으로 육신의 악한 소욕을 날마다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매일 조금씩 정욕을 죽이고, 매일 조금씩 혈기를 다루며,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온전히 살아내야 합니다. 《야고보서》가 아브라함을 인용했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행위를 구원의 근본으로 삼았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결코 아브라함이 행위를 자랑했다고 말하지 않으며, 모세 역시 그렇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행위는 결코 구원의 뿌리가 될 수 없으며, 오직 참된 믿음이 맺어내는 열매일 뿐입니다. 믿음의 뿌리에서 맺힌 열매만이 하나님 앞에 가치가 있으며, 믿음 없이 겉모양만 그럴듯하게 흉내 낸 행위는 영적으로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사람이 행위를 근본으로 삼으면 반드시 '외식(위선)'에 빠지게 됩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하다가 유대인들이 오자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며 위선에 빠진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행위를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넘어졌는데, 야고보는 얼마나 더 위선에 능숙했겠습니까? 그럴듯한 포장과 거룩한 척하는 외식에 도가 튼 사람들이었습니다. 겉포장은 화려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실상은 명백한 위선이었습니다. 오늘 외식하고 내일 또 위선으로 자기를 포장하다가, 장차 예수님 앞에 서면 어찌 감당하려 합니까? 두려운 일입니다. 경계하십시오! 행위를 의지하는 마음이 아주 조금이라도 스며드는 순간, 사람은 가차 없이 저주의 수렁 속으로 곤두박질치게 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자, 율법의 행위를 자랑하는 자는 누구나 저주 아래 놓이게 됩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조금 길어졌고 다룬 주제도 매우 방대했지만, 저는 여러분의 심비에 이 진리를 깊이 새겨드리고 싶습니다. 무릇 율법의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자는 다 저주 아래 있는 자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 자체가 죄라는 말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신앙의 '뿌리와 근본'으로 삼는 태도가 저주를 부른다는 뜻입니다. 율법의 행위는 결국 인간의 육신을 부각하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행하는 자에게는 결코 자기 자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고백합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저는 성도들을 온 힘을 다해 섬긴 뒤 "목사님,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받을 때마다 늘 이렇게 답합니다. "감사할 것 없습니다.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제가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을 다했을진대 제 마음에 무슨 섭섭함이나 미련이 남겠습니까? 아무런 미련도 갈등도 없습니다. "내가 이만큼 베풀었으니 당신에게서 이만큼의 대가를 받아내야겠다"는 저열한 마음이 제게는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을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영광스러운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가슴에 깊이 새기십시오. 행위를 근본으로 삼고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는 작은 누룩이 마음속에 슬그머니 들어와 "그럴듯하다"고 속삭일 때, 영적으로 깨어 경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여기서 맺고, 이어서 질의응답 시간을 갖겠습니다.

질의응답에 들어가기 전에, 찬양 한 곡을 부르며 주님께 예물을 봉헌하겠습니다. 만일 헌금의 참된 영적 의미를 깨닫지 못하셨다면 절대로 헌금하지 마십시오. 헌금을 드리면서 자기가 하나님께 대단한 공로를 세우는 양 착각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오산입니다. 온전한 헌금을 드릴 수 있다면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참으로 탁월한 선택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헌금의 영적 원리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면 결코 헌금하지 마십시오. 잘못 드린 헌금은 도리어 저주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헌금으로 인해 시험에 들고 저주 아래 묶이는 안타까운 일들이 교회 안에 참으로 흔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내가 이렇게 헌금을 많이 바쳤는데 왜 하나님의 복이 보이지 않는가?" 하며 불평합니다. 시간이 지나도 복이 보이지 않는다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헌금이라는 행위를 복을 받아내는 근본적인 조건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호흡과 물질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것이 피조물이자 아들로서 마땅히 드려야 할 본분임을 압니다. 일터에서 성실히 일하는 것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것도, 물질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행할 기쁨의 본분입니다. 값없이 거저 받은 은혜를 하나님께 기쁨으로 돌려드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가장 명쾌한 신앙의 논리입니다.

오늘 성령께서 우리 심령을 새롭게 하사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의 보좌 앞으로 온전히 돌아가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안에 남아 있는 행위 중심, 공로 중심의 찌꺼기들을 오늘 예수 이름으로 다 쓸어버립시다. 오늘 들은 말씀을 깨달은 만큼 깊이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수많은 형제자매가 저를 찾아와 "목사님, 제 삶은 왜 여전히 이 모양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 뿌리를 들여다보면 다 행위를 근본으로 삼고 율법을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만큼 선을 행했으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저 복을 주셔야 마땅하다'는 영적 보상 심리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움직이는 것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오직 믿음을 품고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 저는 전적으로 무능한 죄인입니다. 저에게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 시간 손을 높이 들고 저와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손의 예물을 기쁘게 흠향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값없이 주신 은혜를 기쁨으로 주께 돌려드리오니 열납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제 온 영혼과 육신, 제 삶의 모든 것을 주님 제단에 온전히 바칩니다.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주사 믿음의 길로 온전히 인도하여 주옵소서. 내 안에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던 바리새인의 악습을 제하여 주시고, 행위로 의로워지려던 율법주의적 교만을 뿌리 뽑아 주옵소서. 하늘의 지혜와 총명을 부어 주사 다시는 어리석은 자의 길에 서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 오늘 나의 마음눈을 활짝 열어 주사 온전한 복을 누리는 은혜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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