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방금 여러분이 나눈 간증을 들으면서 아주 흥미로운 질문을 하나 들었습니다. 어떤 질문일까요? 사실 그렇게 흥미로운 질문도 아닙니다. 들어 보니 꽤 슬픈 질문이었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비참하게 살아간다는 것, 매우 당혹스러운 문제입니다. 믿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 더 비참하다니, 이것은 제가 전하려는 주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지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논증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는 형제자매들은 반드시 잘 들어야 합니다. 답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제가 직접 여러분의 질문에 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딴생각을 하다가 듣지 못한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저는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분은 아주 귀엽게도 제게 “단단(单单)이 누구인가요?”라고 묻습니다. 제가 정한 이 주제는 아주 좋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주제를 정해도 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꾸어도 됩니다. 예를 들면 “갈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왕판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또는 “누군가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단’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힘쓴다는 뜻입니다. ‘전심’이 무엇입니까? 전심이 바로 ‘단단’입니다. 매우 한결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늑대가 양을 잡아먹은 이야기
옛날에 늑대가 양을 잡아먹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왕판 버전의 늑대와 양 이야기입니다. 양 떼가 아주 영리해서 이리저리 찾아다니다가 울타리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늑대가 양을 잡아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양들은 목숨을 걸고 도망가다가 늑대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울타리를 찾아 그 안에 숨었습니다. 양들은 이제 마침내 늑대를 막을 수 있게 되었다며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이 양 떼에서 며칠에 한 마리씩 양이 사라졌습니다. 양들은 회의를 열었습니다. “우리에게 울타리가 있는데 왜 자꾸 한 마리씩 없어지는 거지? 큰길에서 늑대에게 잡아먹혔다면 이상하지 않을 거야. 늑대가 양을 잡아먹는 것은 기본적인 이치니까. 그런데 우리가 울타리를 찾아왔는데도 왜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거지?”
그들은 격렬하게 토론했습니다. 어떤 양들은 너무 두려워서 감히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양이 말했습니다. “늑대가 이제는 더 강해졌어. 벽을 기어오를 수 있게 된 거야.” 양들은 다시 격렬하게 논의했습니다. “늑대가 기어오를 수 있다면 어떻게 하지?” 그러자 “울타리 위에 가시덤불을 올려놓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며칠에 한 마리씩 양이 사라졌고, 며칠에 한 마리씩 죽었습니다. 왜 계속 죽는 것일까요? 이대로는 안 되었습니다. 양 떼는 완전히 혼란에 빠져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때 어린 양 한 마리가 말했습니다. “이 일을 관찰해 보니 뭔가 이상해. 우리가 양을 한 마리씩 잃는 것은 모두 비가 오지 않을 때였어. 비가 많이 올 때는 양이 사라지지 않고,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양이 사라졌어.” 양들은 그제야 하나씩 되짚어 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양은 비가 온 뒤에 사라졌고, 두 번째 양도 그랬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방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들이 지은 울타리의 아주 먼 동쪽 끝에서 울타리가 무너져 구멍이 난 것을 발견했습니다. 비가 올 때는 양이 사라지지 않고 비가 오지 않을 때 양이 사라졌던 이유는, 울타리 아래로 흐른 빗물, 아마도 홍수로 인해 구멍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늑대는 울타리를 기어 넘어온 것이 아니라 그 구멍을 통해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지만, 나중에 그 구멍을 막자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모든 일에서 문제의 핵심을 찾아야 합니다. 두려워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해결하지 못합니다. 아무렇게나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역시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되는대로 부산을 떠는 것일 뿐입니다. 기술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역시 해결하지 못합니다. 양들은 울타리 위에 가시덤불을 올려놓았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 구멍을 발견하는 것이었고, 그 양 떼의 운명과 관련된 핵심은 바로 그 구멍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문제의 핵심을 찾아야 합니다. 그 구멍을 찾지 못하면 양 떼는 모두 죽게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핵심은 무엇입니까? 바로 성경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핵심이며, 사람이 살아가는 목표와 노선도입니다. 이것이 모든 문제의 핵심입니다. 제가 주님을 믿은 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있는 형제자매들은 반드시 잘 들어야 합니다. 아직 주님을 믿지 않는 분들은 아마 잘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잘 살아가려면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찬양곡 《one way》에서 부르는 것처럼, 오직 ‘단단’이라는 길만이 우리의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저는 《승패》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 책에는 아주 좋은 관점이 하나 나옵니다. 많은 영업사원들이 고객의 필요를 파악할 줄 알지만, 매번 물건을 팔지 못합니다. 책에 나오는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필요라는 것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휴대전화를 파는 사람인데, 한 고객이 와서 “화면이 큰 휴대전화를 주세요”라고 말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영업사원은 매장에 있는 가장 큰 화면의 휴대전화를 고객에게 내놓습니다. 그런데 고객은 그냥 가 버립니다.
필요와 관련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고객에게 화면이 얼마나 큰 것을 원하는지 물어봐야지, 무조건 가장 큰 화면의 제품을 꺼내 놓아서는 안 됩니다. 둘째, 이 필요 외에 다른 필요는 없는지 물어야 합니다. 고객은 화면이 큰 것뿐 아니라 하늘을 날 수 있고 땅속으로 내려갈 수도 있는 휴대전화를 원할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휴대전화에 그런 기능이 없다면 고객은 사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 큰 화면을 원하는 목적을 파악해야 합니다. 어떤 고객은 자신이 사용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드리려고 살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눈이 침침해서 작은 글씨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목적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가장 큰 화면의 제품을 내놓으면 고객은 사지 않습니다.
저는 완전하게 논증해 보려고 합니다. 날마다 구호만 외치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나는 열방과 만민의 제사장이 되겠다. 나는 열방과 만민의 축복이 되겠다. 나는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 이렇게 말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고, 하나님의 필요를 만족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이 우리가 잘 살아가는 핵심입니다. 날마다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깨달음 가운데 이 일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이 오히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보다 못하게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둘째,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잘 살아야 합니까?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함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성경 본문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너희가 행하는 바를 더욱 많이 힘쓰라. (《데살로니가전서》 4:1)
기도
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에 주의 깊게 귀 기울이고, 주님의 뜻을 지켜 행하며,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 우리의 모든 결정과 소망과 모든 일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옵소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에서 과거에 주님을 의지했던 것처럼 오늘도 계속 주님을 의지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게 하옵소서. 가려진 눈을 제거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열어 주셔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믿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믿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을 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 외에도 다른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말하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불신은 인류 문제의 근원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3장에서 선악을 분별하는 문제를 읽을 때, 한 단계 더 깊이 추론해 보면 문제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하와와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진노하게 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이 먼저 있었고, 인류의 모든 문제의 근원은 불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나중에 저는 만약 당시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을 뿐 아니라 생명나무의 열매도 먹지 말라고 하셨다면, 하와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었어도 저주를 받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을 먹는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은 것이며, 곧 불신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처음으로 만든 성경공부 자료 《창세기》의 주제도 《불신은 문제의 근원》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하신 것이며, 하와와 뱀도 그러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엿새 동안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루의 창조를 마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 모든 좋은 것들이 3장에 이르러 모두 문제가 되었습니까? 뱀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아담과 하와에게 모두 문제가 생겼습니다. 원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선하신 하나님까지 선하지 않게 보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원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창조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았고, 하와의 말을 들었습니다. 뱀은 하와를 미혹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일을 했습니다. 결국 원래 좋았던 뱀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아담과 하와가 모두 좋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재정 문제든 건강 문제든 살아가는 것이 좋지 않다고 느낀다면, 아담과 하와도 분명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영이 있는 생명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마저 좋지 않게 변했습니다. 하물며 여러분과 저는 어떻겠습니까? 문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뒤 저주 가운데 빠졌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근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근원에서 계속 실패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근원에서 계속 실패한다면 그리스도인이 잘 살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잘 살지 못하는 것을 누구 탓으로 하겠습니까? 아담과 하와도 피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여러분과 저는 어떻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에 아직도 훨씬 미치지 못합니다. 이것이 사람이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기
오늘 우리는 롯과 아브라함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생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생활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노선도는 하나하나의 판단과 선택으로 세워집니다. 예를 들어 제가 10시부터 11시까지 여러분과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로 선택했다고 합시다. 오늘 10시부터 11시까지의 시간은 다시는 제 삶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만약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기로 선택한다면, 제 삶의 노선도는 다시 쓰이게 됩니다.
우리 삶의 모든 노선도는 판단과 선택으로 결정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선택을 한 뒤에는 그 시간은 이미 그렇게 지나가 버립니다. 롯과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한 사람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선택했고, 다른 한 사람은 다른 것을 중심으로 선택했습니다. 이 두 가지 선택은 그들의 삶의 노선도가 되었고, 결국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의 종착지에 이르러 각자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롯과 아브라함이 본토와 친척을 떠난 일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는 롯이 왜 아브라함을 따라 나왔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롯이 한 일을 통해 제가 대담하게 추측해 보겠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이미 본토와 친척 가운데서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져 있었고,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다니며 먹고살았던 것 같습니다. 롯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롯에게는 이 삼촌이 필요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본토와 친척을 떠난 것은 하나님을 생명의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기에 본토와 친척을 떠난 것입니다. 제가 추측하기로 롯은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을 떠나면 정말 어려웠을 것입니다. 롯에게는 삼촌이 한 분뿐이었고, 아브라함은 떠날 때 온 가족을 데리고 갔습니다. 아브라함이 그곳을 떠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이었지만, 롯이 떠난 것은 아마도 먹고살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가면 먹고살 수 있었기 때문에 따라갔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에 떠났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선택입니다. 두 번째 선택은 롯이 아브라함과 분가하기로 한 것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다니며 이미 꽤 잘살게 되었는데 왜 아브라함과 갈라서려고 했을까요? 롯은 아브라함에게서 얻을 만큼 얻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금은보화와 소와 양이 이미 상당히 많았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갔지만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습니다. 양들이 겉으로는 자신의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라는 대로 해야 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지위와 소유권을 놓고 다투고 싶었고, 그래서 떠나기로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선택이었습니다.
두 번째 선택은 비옥한 곳으로 갈 것인지 황폐한 곳으로 갈 것인지였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 계산이 엉망이 됩니다. 많은 사람이 이 계산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나중에 저는 아브라함과 롯을 대신해서 한 번 계산해 보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롯은 왜 비옥한 곳을 선택했습니까? 비옥한 땅에는 자원이 많고 소와 양도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옥한 곳에는 자원이 많은 만큼 경쟁자도 많습니다!
제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나중에 두 천사가 롯의 집에 왔습니다. 그들이 롯의 집에 들어오자마자 한 무리가 갑자기 롯의 집으로 몰려들어 집을 털고 두 천사를 끌어내려고 했습니다. 외지인 두 사람이 롯의 집에 들어오자 그 무리가 벌떼처럼 몰려든 것입니다. 롯이 딸들과 함께 그곳으로 갔을 때에도 같은 일을 겪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롯의 두 딸은 계속 처녀로 있었습니다. 이것은 롯이 극히 큰 대가를 치렀다는 뜻입니다. 비옥한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고, 그 사람들과 경쟁하고, 온갖 일을 겪으려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했겠습니까? 롯은 자원이 풍부하다는 것만 생각했고, 그곳에는 경쟁자도 많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돈이 천 원이면 그것을 나눠 가지려는 사람이 천 명이나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황폐한 곳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백 원의 자원을 몇 사람만 나누어 가질 수도 있었고, 아브라함은 밑에 있는 사람들을 잘 훈련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만큼 빠르게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어리석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인데, 모든 가능한 요소를 충분히 고려하여 여러분을 위해 안배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지 않는 사람은 재물과 지위를 중요하게 여기며, 결국 매우 비참해집니다. 재물과 지위만 중요하게 여기고 많은 요소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롯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롯은 매우 힘들게 살았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본받지 않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돈과 지위였고, 이를 위해 매우 큰 대가를 치렀습니다. 두 딸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겠습니까? 게다가 롯은 아브라함처럼 사람을 훈련할 줄도 몰랐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318명의 훈련된 장정이 있었지만 롯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여러분을 위해 안배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롯처럼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면, 소와 양과 재물과 지위가 삶의 중심이 된다면, 사물을 반드시 전면적으로 보지 못하게 되고 결국 롯처럼 매우 고생하게 됩니다. 롯이 그 후에 내린 결정은 더욱 우스꽝스럽습니다. 롯이 살던 곳의 소돔 왕과 모든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고, 아브라함이 그들을 모두 구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롯은 다시 소돔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롯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압니다. 롯의 모든 것을 네 왕이 빼앗아 갔고, 아브라함이 그의 모든 것을 되찾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롯은 왜 아브라함을 계속 따라가지 못했을까요? 롯은 이렇게 계산했을 것입니다. ‘내 것을 네 왕이 빼앗아 갔고, 내 가족들도 그들의 지배를 받았다. 아브라함이 나를 구해 주기는 했지만, 계속 그를 따라가면 나도 아브라함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롯이 여전히 관심을 가진 것은 자신의 소유권 문제였습니다. 그의 소유권이 모든 것보다 앞섰습니다. 결국 롯은 다시 소돔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은 롯의 치명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이 치명적인 선택 이후 롯은 어느 정도 정신적으로도 이상해졌습니다. 롯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롯이 나가서 딸들과 약혼한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창세기》 19:14)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의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롯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창세기》 19:16)
롯은 이미 정상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떠나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은 떠나기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믿은 뒤 오히려 더 잘 살지 못합니다. 주님을 믿은 뒤 종교적인 규례 하나를 더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롯은 자신에게 아직 많은 재물이 있으니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자기 딸들의 정절을 지켜야 했으며, 하나님께서 소돔을 멸하실 것이라는 예언도 반신반의했습니다. 결국 정신병에 걸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모두 영적으로 병든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면 정신적으로 병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세상도 사랑하여 이런 균형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면 매우 위험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병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본토와 친척을 떠났고, 아내가 사로잡혔을 때에도 계속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318명을 데리고 롯을 구하러 갔고, 그와 함께 간 좋은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에게는 롯을 구할 충분한 힘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능력으로 롯을 구할 수 있는지 판단했습니다. 나중에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을 때에도 그가 한 모든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세대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롯은 어떠했습니까? 결말은 매우 비참했습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에 치명적인 결정을 내리고 산으로 도망가 딸들과 근친상간을 저질렀습니다. 만약 그가 아브라함을 찾아갔다면 그의 삶은 뒤집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롯의 일생입니다. 그는 돈과 가족과 지위를 자신의 핵심 이익으로 삼았고, 심각하게 병든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후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저주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롯의 선택에서 왔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면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영적으로도 깨달음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측면과 깨달음의 측면은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됩니다. 형제자매들의 영적 성장은 이 두 가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저는 사역을 통해 이런 경험을 얻었습니다. 최근에 한 자매를 섬기게 되었는데, 그 자매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막 자리에 앉자마자 제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때 아픔을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우리 가운데 허리가 아픈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는데, 정말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자매가 재정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고 있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문제는 허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제가 이 말을 마치자마자 제 허리가 곧바로 나았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의 목회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목회자가 그 자매의 허리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왔습니다. 그 후 이 자매는 많은 면접 기회를 얻게 되었고, 이번 월요일부터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전처럼 저축한 돈이 없는 상태로 지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영적인 부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자신의 깨달음을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훈련하실 때 그들에게 온 땅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사람의 깨달음이 부족하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자동차에 영적인 부분, 곧 연료와 엔진이 있어도 명확한 방향을 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로마서》 8:16)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마음과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깨달음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깨달음만 있고 영적인 것이 있어서는 안 되며, 영적인 것만 있고 깨달음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영성과 깨달음이 핵심입니다. 나중에 저는 이 모든 것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영성이 있어야 하는 동시에 자신의 깨달음도 훈련해야 합니다. 사람이 왜 일해야 합니까? 깨달음을 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다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성과 깨달음은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손을 움직이기 시작하자마자 해방되기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충분했지만 깨달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은 그들의 깨달음을 훈련하는 일이었고, 그 후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읽자 그 사람의 상태가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은 깨달음을 훈련할 어떤 기회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예를 들어 수공예를 하는 것처럼, 자신의 깨달음을 훈련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영적 전쟁 사역에서 점차 생각과 의지의 사역으로 나아갔습니다. 현재 우리 교회가 하는 일은 영적 전쟁과 생각과 의지의 사역을 통해 사람들을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면 영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하고, 깨달음의 문제라면 깨달음을 훈련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측면을 제대로 훈련하여 모든 형제자매를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으로 훈련해야 합니다.
결론
어떤 일이 있어도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처음에 나누었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양들이 문제의 핵심을 찾게 된 것은 늑대에게 쫓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과 저, 우리 모두가 처음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것은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마귀가 우리를 몰아붙여서 어떤 방법을 찾지 않으면 출구가 없게 했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렇게 억지로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히 우리에게 충분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그 지경까지 몰렸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상황이 없고, 그런 늑대도 없고, 그런 귀신도 없는데, 우리가 오히려 게을러진 것은 아닙니까?
최근에 저는 몇몇 형제자매를 섬기면서 매우 무겁고 오래된 주제들을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래된 내용이지만 매우 소박하며 문제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바로 처음 사랑과 처음 믿음입니다. 과거 우리의 사랑과 믿음은 마귀가 몰아붙였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런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살기가 좋아졌고 부유해졌으며,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능력도 어느 정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우리의 마음가짐은 ‘단단’에서 더 이상 그렇게 단단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단순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던 것이 복잡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변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더 이상 우리 삶의 중심축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회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거에는 어쩔 수 없이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몰아붙인 마귀에게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그런 일이 없다고 해서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까? 과거에 저는 우울증을 앓던 한 아이를 섬겼습니다. 그 아이가 이제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어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아이를 도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아이와 아이의 어머니에게 도전해야 했습니다. “당신은 아이로 인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으로 인해 아이가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아이가 치유받은 뒤에는 그 ‘단단’이 다른 것으로 바뀌어도 됩니까?”
그 아이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미 공부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과거 우울증을 앓을 때에는 공부도 할 수 없었는데, 이제 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매일 그렇게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데 아이는 안 된다며 매일 야간자율학습을 했고, 집회 시간은 모두 어디에 내버렸는지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녀와 함께 광시까지 가서 집을 살 시간은 있는데, 하나님을 섬길 시간은 없다는 것입니까? 집이 첫째이고, 딸이 둘째이며, 하나님은 셋째가 될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오늘 저는 이 주제를 조금 무겁게 말하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형제자매들에게만提醒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 저 자신에게도 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경험을 하는 사람은 저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저를 제외한 모든 형제자매들도 분명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주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로 하면, 그때 우리는 기쁨으로 살아가고 건강하게 살아갑니다. 언제든지 이런 마음가짐에서 다른 마음가짐으로 바뀌면, 우리는 갈등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정신적으로도 병든 것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런 상태에서 선택을 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있는 형제자매들을 격려합니다. 제 말을 듣고 오늘부터 변화해도 늦지 않습니다. 기초에서 다시 선택합시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