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는 이어서 《데살로니가전서》 3장을 공부하겠습니다. 이번 장의 주제는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았다”입니다. 이 말은 듣기만 해도 참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말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초신자 성도들을 몹시 염려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생각하고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일꾼인(하나님의 일꾼인: 어떤 사본에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 됨)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사명인) 줄을 너희가 친히 알기 때문이라.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었노라. 그러나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데살로니가전서》 3:1-6)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머문 시간은 매우 짧았지만, 그는 그곳에 교회를 세웠고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실 하나님의 도를 구하며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사람들입니다. 마치 많은 형제자매들이 인터넷을 통해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를 하다가 마침내 우리와 연결된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며, 결코 어영부영 온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개는 추구하는 중에, 현지 교회든 어느 곳에서든 많은 것들이 명확히 설명되지 않아 신앙생활에 혼란을 느끼던 사람들입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유대교를 믿었지만,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이 그곳에 가서 말씀을 전하자 그들이 듣고 말했습니다. “맞다, 바로 이거다. 체계가 있구나.” 어떤 목회자가 횡설수설하면 알아듣지 못하는데, 그것은 그가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쓴 글들은 모두 아주 명확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우리 가운데 오게 된 데에는 매우 솔직한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오랫동안 갈망하며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지 2주 만에 그들은 주님을 믿기 시작했고, 신앙생활도 꽤 잘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바울은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떠난 후 그의 마음속에는 큰 염려가 있었습니다. 전화도, 메신저도, 아무런 연락 수단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쉽게 설명하기 힘든 의문이 남았습니다. ‘이 사람들의 믿음은 지금 어떠할까?’
사실 바울은 그들의 믿음 상태뿐만 아니라, 그들이 송사에 휘말리지는 않았을까 마음속으로 깊이 염려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며 자신이 의지하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뿐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성안으로 몰래 보냈습니다. 가서 보니 모두 다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디모데가 돌아와 바울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바울은 매우 감동하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양 떼를 잘 돌보고 목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마음 깊이 알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보다는 전심으로 목양하는 교회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피도 눈물도 없고 마음도 영혼도 없는 무감각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결코 감정을 죽여버리는 신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살려내는 신앙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든 형제자매들이 썩어질 패망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세우는 것은 목양의 관계이며, 이 관계는 진실하고 깊이가 있습니다.
요즘 제가 목양하는 한 자매가 며칠 전에 어지럼증이 있었는데,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오늘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비록 어떤 사람들은 떠나기로 결정하고 제가 그들을 억지로 붙잡아 둘 수는 없지만, 우리 가운데 남아 있는 동안에는 제가 120퍼센트의 힘을 다해 목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가 환난을 받는 것은 원래 하나님이 주신 사명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가 환난을 받는 것은 원래 하나님이 주신 사명입니다. 여러분은 “목사님, 주님을 믿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는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라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하심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데살로니가전서》 3:7-8)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받도록 세우심을 받은(사명인) 줄을 너희가 친히 앎이라 (《데살로니가전서》 3:3)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가 모든 곤고와 환난 가운데 처하는 것, 알고 보니 이것이 사명입니다.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힘들었을까요? 힘들었습니다. 환난을 겪었을까요? 겪었습니다. 발에 피가 맺혔을까요? 맺혔습니다. 하지만 이는 애굽에서 노예살이하던 것보다 훨씬 낫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일제의 강제 수용소에서 노역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적어도 자유인이니까요.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러한 훈련을 받아야 할까요? 훈련하는 것은 바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환난이 없다면 무엇으로 믿음을 훈련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갈 때 힘들었을까요? 힘들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기근을 만났을 때 힘들었을까요?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환난을 받는 것은 원래 하나님이 주신 사명입니다.
‘환난’이라는 단어는 주의해야 합니다. 어떤 환난은 영광이라곤 전혀 없는 환난도 있습니다. 어떤 환난은 주님을 위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또 어떤 환난은 사람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환난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훈련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암에 걸린 것이 믿음 훈련이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이 참된 믿음을 시험하여 증명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 시대 교회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믿은 지 2주 만에 환난과 핍박을 겪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믿음이 있었고, 그것을 견뎌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참으로 참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도는 참으로 하나님의 도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복음을 잘못 믿어서 겪는 일을 환난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저주받은 것입니다.
왜 우리가 대가를 지불하는 신학을 말하겠습니까? 대가를 치름으로써 그것이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 시험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와 저의 동역자들은 적지 않은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일반 교회들은 우리처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짜 진지하게 전력을 다해 목양하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을 믿는 것을 시간 때우기 정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 온 형제자매들 중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헌금도 잘하지만, 그저 여행 다니기 좋아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며, 안락한 소시민적 삶을 누리기만 좋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제 동역자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제가 “놀러 가자”고 해도 안 갑니다. 마음속에 목양에 대한 염려와 부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 사람의 사명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라면, 그는 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환난을 받는 것은 원래 사명이며, 믿음을 훈련하는 것 자체가 본래 사명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에 환난이 있습니까? 환난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명이 있습니까? 여전히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살고, 이를 위해 죽으며, 이를 위해 대가를 치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목양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자녀를 키우며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어떻게 자녀가 성인으로 자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중 어머니 되신 분들, 어머니가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아이는 온전히 자라기 힘듭니다. 엄마가 가슴을 졸이지 않고 자녀를 키웠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 중에 어떤 형제자매들은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아무 일도 안 할 정도로 게으릅니다. 집에 오면 그저 휴대폰만 보고, 집안일은 가족에게 다 떠넘깁니다.
어머니가 여러분을 어릴 때부터 목양하여 키우기까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여권을 만들어서 싱가포르로, 캐나다로 날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반드시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그분들이 여러분을 키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영상을 하나 보았는데, 우리가 까마귀에 대해 깊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까마귀가 못생겼고 우스꽝스러우며, 우는 소리도 곱지 않고 검다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까마귀는 매우 은혜를 아는 새입니다. 일부일처제로 자녀를 양육하고, 그 어린 까마귀가 자라서 늙은 부모 까마귀가 먹이를 구하지 못하게 되면, 새끼 까마귀가 먹이를 물어다 부모를 먹입니다. 우리가 까마귀만도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까마귀만도 못하다면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환난을 겪고 대가를 치르는 것은 사명입니다. 그것은 믿음을 훈련하고, 사랑을 훈련하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진실함을 훈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들이 다른 곳에서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 데살로니가로 도망쳐 왔는데, 데살로니가에 이르러서도 또 핍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깨닫지 못합니다. 참된 도를 믿으면 어떻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까? 부자가 되고 성공합니까? 둘 다 아닙니다. 참된 도를 믿으면 여러분은 사탄을 여러분의 적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권투 선수를 여러분의 상대로 선택한 셈입니다. 사탄과 링 위에서 한번 붙어보십시오.
환난이 실제적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더욱 실제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이 평생 살면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위로가 됩시다. 내가 여러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얻었고, 여러분도 저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얻기를 바랍니다.
이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선포하십시오. ‘사명 신학’이라는 교회가 있으며, 이는 승리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이 짧은 고난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물며 매번 환난 가운데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있습니다.
한번은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을 지경에 이른 적이 있습니다. 돌에 맞았으니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시체를 성 밖으로 끌어내어 쓰레기장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몸을 툭툭 털고 일어났습니다. 상처와 혹이 있었을까요? 당연히 있었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한 사람이 평생 이러한 문제와 환난을 겪지 않는다면 어떻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형제자매들이 더 많이 경험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이 말이 듣기에 썩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경험을 많이 한다는 것은 환난도 다소 많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을 때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이러한 환난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따른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겪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데살로니가전서》 3:7-9)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양이며, 그것은 곧 육신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에게 그렇게 많은 문제가 생길까요? 육신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명이 있는 환난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사람이 육신을 위하다가 겪는 고통은 환난이라 할 수 없으며, 단지 저주일 뿐입니다. 하지만 아십니까? 사람의 육신을 다루고 나면 마음이 늘 조마조마합니다. ‘그가 감당할 수 있을까? 감당하지 못하면 어쩌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곧바로 가서 다시 위로해 준다면 육신을 다룬 보람이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때로 제가 매우 매섭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당신 참 어리석군요.” 그러면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하는데, 그 결과 더 어리석어집니다. 하지만 사실 그 말은 여러분을 지혜롭게 만들려는 것이지, 결코 더 멍청해지길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형제자매들이 믿음 안에서 매우 견고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성경 말씀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만약 여러분이 굳게 서지 못한다면 우리는 거의 죽어가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으로 인해 심히 기뻐합니다. 정말 기쁩니다. 목양이 가져다주는 기쁨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큽니다. 마치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은 것과 같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는 기쁨과 같습니다. 원래 마음이 불안하게 매달려 있었는데, 디모데가 전해준 소식 덕분에 마음이 놓였습니다. 마음속에 넘치는 이 기쁨과 큰 위로는 마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기쁨과 같습니다.
수년 전 일이 생각납니다. 칠십 세가 다 된 한 노자매님이 매일 심한 어지럼증을 겪다가 먼 곳에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결국 깨끗이 고쳐졌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몇 년이 흘렀는데, 가끔 증상이 나타나도 다시 기도해 주면 낫습니다. 그것은 정말 큰 기쁨입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사람이 병들면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도 모르고, 돈을 써도 어지럼증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양은 사람에게 참으로 큰 기쁨을 주는 일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목양하면서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워하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고, 그저 혼자 먹고 마시고 놀 생각만 하며 목양에 관심이 없다면, 목양하지 마십시오.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우리의 마음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목회자들이 간증하며 자신들의 목양 구역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듣는 내내 참으로 기쁩니다.
칭다오의 한 부부가 있었는데, 물과 불처럼 서로 으르렁대며 싸웠습니다. 비록 우리가 부부 갈등 중재 같은 일에 매달리길 원치는 않지만, 그 사람의 성장은 여전히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 담당 목회자가 제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아세요? 남편이 최근에 강하게 중심을 잡으니, 아내가 더는 억지를 부리지 않고 온전해졌습니다.”
또 다른 부부도 우리가 목양하던 분들이었는데, 월요일에 이혼하려고 민원실에 갔다가 줄이 너무 길어서 그냥 돌아왔습니다. 사실 많은 것들이 스스로 문제를 일으켜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억지를 부리지 않고 문제 만드는 짓을 멈출 수는 없습니까? 서로를 얽매고 통제하려 하지 마십시오. 남편은 아내를 바꾸려 하고, 아내는 남편을 바꾸려 하며, 남편은 아내가 못마땅하고 아내는 남편이 못마땅합니다. 먼저 자기 자신부터 돌아보십시오. 아직 자신이 온전히 고쳐지지 않은 것은 아닙니까?
그러므로 주님께 감사합니다! 우리가 담대해지고 믿음이 일어나면 사람은 변화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가 제게 “목사님, 저희 이제 이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혼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망가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만약 어떤 결혼 생활이 계속해서 여러분을 망가뜨린다면, 함께 있어서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 믿음을 좀 가질 수 없겠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제가 위로를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우리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유입니다. 혼자서 쓸데없이 이리저리 헛된 궁리를 하지 마십시오. 헛짓을 하다 보면 수많은 패망만 만들어냅니다. 믿음이 일어나면 하늘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강하고 담대해지면 사람들을 훨씬 더 잘 세워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여러분의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하게 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을 칭찬했습니다. 주님을 믿은 지 2주 만에 이런 믿음을 가지다니,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로 다시 돌아가 그들을 다시 굳건하게 세우고, 그들이 깨달음 안에서 믿음이 충만해지기를, 즉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시오며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3:11-13)
앞에서는 바울이 그들을 칭찬하더니, 뒤에서는 여러분의 믿음이 아직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됩니까?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오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마음이 견고해져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이 요구 수준이 결코 낮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일깨워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길은 그저 안이하고 편안한 길이 아닙니다. 저는 사람을 칭찬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칭찬에 매우 인색합니다. 칭찬하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버리고, 결국 망가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요구 사항을 제시하는 편을 더 좋아합니다.
여러분이 먼 곳에서 저를 보러 온다 해도, 저는 여러분에게 요구를 할 것입니다. 저를 보러 와서 무엇을 보겠습니까? 전화로나 온라인으로나 직접 만나서나 하는 말은 다 똑같습니다. 오히려 다른 말을 덧붙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아직 부족합니다. 당신의 믿음은 아직 멀었습니다. 더 노력해야 하고, 더 견고해져서 거룩하고 흠과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제가 여러분을 만나기 싫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말씀드리는 것은 여러분이 얼마나 삶에 실천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문제를 제게 털어놓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문제를 이야기하십시오. 그래야 제가 여러분 믿음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여러분이 깨달음 안에서 끊임없이 돌파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도울 수 있습니다.
제게 와서 몇 가지 기적을 경험하고, 제가 손을 얹어 안수하면 머리가 갑자기 똑똑해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런 것을 믿지 않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지혜로워지기를 바라고, 안수 한 번으로 지혜로워진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중요한 것은 깨달음 안에서 충만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마음이 견고하여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거울을 보듯 우리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보십시오. 어느 부분이 주 예수님을 닮았습니까? 주 예수님을 닮지 않았다면, 저를 만나러 온다고 해서 닮아지겠습니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저를 만나도 저는 여러분에게 “아직 별로 안 닮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여러분이 저에 대해 어떤 환상을 품고 계실지 모르지만, 저는 그 환상을 깨부수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일어나서 평범한 사람처럼 살려고 생각만 해도 너무 두렵습니다. 직장도 구해야 하는데, 제가 워낙 형편없고 패역해서 분명 취직도 못 할 거예요. 결국 집에서 굶어 죽을 텐데, 차라리 집에서 자포자기하고 며칠 더 도피하는 게 낫겠어요.”
제가 말했습니다. “당신 말에 꽤 공감합니다. 몇 년 더 자포자기하고 뒹굴어도 괜찮습니다. 말리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하려는 일을 막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가슴을 졸입니다. 여러분, 목양하는 목회자는 입으로는 매섭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정말 깊이 염려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제게 답했습니다. “목사님, 안 되겠어요. 이러다간 완전히 낙오자가 되겠어요.” 제가 말했습니다. “그럼 그렇게 뒹굴어 보세요.” 그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어쩌면 그렇게 독하게 말씀하세요?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벌써 일어나 청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고, 사실 사람이란 괴로워야 정신을 차리는 법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해야 괴롭지 않을 수 있는지 한번 연구해 보라”고 과제를 주었습니다. 당연히 깊이 연구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육신을 위하느라 대가를 치르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대가를 치르든지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위해 대가를 치르시겠습니까? 육신을 위하며 사는 삶이 괜찮을 것이라고 절대 착각하지 마십시오. 육신을 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무언가를 보내 여러분을 꺾으시고 연단하실 것입니다. 우리 자매님들은 정말 끊임없이 돌파하고 믿음 안에서 계속 자라나야 합니다. 여러분도 저의 위로가 되고, 저도 여러분의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사이에 더는 이런 넋두리를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여러분의 믿음의 부족함을 보충해 드리고, 여러분이 믿음 안에서 끊임없이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대가를 치르고 괴로움을 겪는 것, 저는 기꺼이 감당하겠습니다. 어차피 육신을 위해 대가를 치르든지 성령을 위해 대가를 치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썩어질 패망을 살아가든지, 아니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을 나타내며 살아가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손가락 네 개를 꼽으며 셈해 보십시오. 어느 쪽이 더 유익합니까? 저는 이 길을 택할 것입니다. 저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본받을 것이며, 사도 바울을 본받을 것입니다. 이 길이 고달플지라도 저는 기필코 이 길을 가겠다고 결단합니다.
어젯밤에 한 자매를 사역했는데, 그 자매의 말을 듣고 제가 한바탕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중급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면서 도무지 열심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조금만 대가를 치르려 하면 힘들어합니다. 하지만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보면 그저 진흙탕처럼 형편없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녀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 주기로 선택하고, 아까 읽은 말씀처럼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무엇을 공부하든 대가를 치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연습 문제 하나 풀다가 막히면 곧바로 낙심하고 믿음이 사라집니다. 책에서 어느 장, 어느 절에 있는지 찾아서 다시 그 문제를 풀면 되지 않습니까? 또 한 문제를 풀고, 다시 책에서 답을 찾고, 다른 연습 문제를 풀고, 또 답을 확인하면 저절로 외워지지 않습니까? 배움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릅니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훌륭한 인터넷 기술을 통해 온라인으로 언제나 서로 연락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저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역을 좋아하는 목사입니다. 거창하게 체육관을 빌려 수만 명을 모아놓고 소리 한 번 크게 지르고 끝나는, 집으로 돌아가면 여전히 제자리인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오직 성실하게 목회자들을 훈련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하고 싶을 뿐입니다. 이제부터 자신을 성장시키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형상을 살아내기를 너무나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위해 무언가를 해 드리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모습을 살아내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