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1. 서론
- 가인 안에 있는 죄에는 '인격'이 있습니다. 이 죄는 가인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며, 이 죄의 이름은 바로 '가인'입니다.
-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죄이며, 이 귀신의 이름은 바로 그 사람의 이름입니다.
-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모든 일을 사람 안에 타고난 귀신은 다 알고 있습니다. 이 귀신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함께해 온 것입니다.
- 귀신을 쫓아내고 쫓아내어 결국 마지막에 이르면, 자신 안에 타고난 죄의 본성을 쫓아내는 것이며, 곧 자기 안에 있는 육신의 정욕을 쫓아내는 것이고, 자신 안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자기 안의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가인처럼 결국 '정신 계통'의 질병에 걸리게 됩니다.
2. 본문 말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18-25)
3. 기도
4. 본문 배경
- 예수님 시대의 귀신 쫓아냄(축사)은 매우 뚜렷하게 드러나는 광의의 축사였습니다. 예를 들어 중풍병, 간질 등 겉으로 드러나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
- 왜 바울 서신에서는 귀신 쫓아내는 일을 언급하지 않았을까요? 사실 언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이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곧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 바울이 <로마서>를 쓴 것은 그의 신학적 관점에서 일어난 커다란 도약이었습니다. 자신 안의 귀신을 처리하고, 육신의 정욕을 처리하는 것은 축사에 있어서 거대한 도약입니다.
- 거룩하고 하나 되며 승리하는 교회를 세우려면 가장 먼저 사람 안에 있는 강한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타고난 죄를 깨뜨려야 합니다.
- 사탄의 보좌를 치는 것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 안에 있으며, 곧 자기 안에 있는 육신의 본성을 치는 것입니다.
5. 육신 가운데는 선한 것이 없다
- 사람의 육신 가운데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근본적인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에게 무슨 선한 것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자처하거나 '참 착하다'고 말하는 것은 다 헛소리입니다. 사람의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없으며, 그 사람이 가진 장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 사람 안에 타고난 죄는 사탄에게 속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은 바로 사람이 타고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죄의 억압에서 사람을 건져내시기 위함입니다.
- 자기 몸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6. 사람 안의 갈등과 몸부림
- 사람 안의 갈등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고자 할 때 사탄이 역사하기 시작하면서 생기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육신 가운데 있는 사람의 곤경입니다.
- 사람 안에 갈등이 있는 것은 매우 정상적입니다. 사람이 행하는 것은 번번이 빗나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갈등과 몸부림은 예수님을 의지할 때 이겨낼 수 있습니다!
7. 성령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
- 예수 안이란 곧 교회 안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영이 그 성전 안에서 운행하시기 때문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귀신은 더 이상 여러분에게 권세를 부릴 수 없습니다. 그 귀신이 여러분에게 행하는 것은 더 이상 합법적이지 않으며, 여러분에게는 선택할 권리가 생겼습니다.
- 선택할 권리가 주어졌음에도 여전히 육신을 선택한다면, 여러분 안의 논리 체계가 바뀌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전의 죄를 예수님께서 담당하셨고, 본래 귀신에게 괴롭힘을 당해야 마땅했으나 예수의 이름으로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이제는 자기 뜻을 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8.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르기를 선택하라
-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따르는가는 전적으로 사람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 안에서 인도하시지만,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의 영을 '쫓아내' 버립니다.
- 사람이 어떻게 지혜로워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자기 안에 타고난 귀신(죄)을 다스리고 성령을 따르기를 선택하여, 타고난 귀신이 자신을 대신해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 더 이상 자신의 느낌을 따르지 마십시오. 버티기 힘들 때, 버텨내고자 결단하고 하나님의 영을 따르면 내면의 느낌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9. 사람의 소망은 무엇인가
- 사람이 무엇을 소망하는가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육신을 따를 것인가 성령을 따를 것인가는 그 사람 안의 소망이 무엇인지에 달려 있습니다.
- 사람의 소망이 세상일에 있다면, 자기 안에 타고난 귀신을 이길 수 없습니다.
- 무엇을 소망하는가는 곧 무엇을 믿는가이며, 무엇을 소망하느냐에 따라 그것을 따르게 되므로, 여러분의 소망이 여러분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결론
- 사람의 가장 큰 원수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의 축사는 새로운 단계의 축사를 시작해야 합니다. 곧 자기 몸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타고난 성격이 변해야 합니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원래 이랬다"고 하는 그 귀신을 처단하는 것입니다.
- 아직 젊을 때,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십시오! 영원한 영광을 온전히 소망하십시오!
- 승리하는 백성이 되어 겉에 있는 귀신만 쫓아낼 뿐만 아니라 우리 안의 귀신도 처리합시다! 우리의 모든 선택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게 하고, 세상의 모든 속한 것들을 끊어버립시다.
핵심 단어
- 성령을 따름
- 육신을 따름
- 사람의 소망
- 자기 안의 귀신을 쫓아냄
- 사람 안의 죄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 타고난 귀신
- 사람 안의 갈등
- 하나님의 뜻을 생각함
-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느니라
- 육신 가운데 선한 것이 없음
1.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설명하기가 다소 까다로운 주제를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이 주제의 제목은 <내 안의 귀신을 쫓아내기>입니다. 왜 '몸의 죄를 다스리기'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죄'라는 단어가 너무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죄라는 개념을 하나하나 설명해 드리기에는 제 역량이 부족합니다. 사람마다 죄에 대한 이해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귀신에 대한 이해는 비교적 쉬운 것 같아서, 저는 이것을 '내 안의 귀신을 쫓아내기'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설교나 성경공부가 끝나면 늘 질의응답 시간을 갖습니다. 얼마 전 어떤 분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제 몸에 있는 귀신을 스스로 쫓아낼 수 있나요?" 아, 그때 저의 대답은 다소 단편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일까요? 우리도 계속해서 진보하고 성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저는 매우 깊이 연구를 진행했고, 오늘 그 연구 결과를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이 연구 결과는 제 예상을 뛰어넘었습니다. 스스로 자기 안의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정말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이는 것이 바로 그런 일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인다'는 표현을 쓰는 것도 약간의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 육신의 악한 행실이 도대체 귀신인지 뭔지 헷갈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지난 얼마간 연구한 결과를 최선을 다해 여러분과 나누겠습니다.
사람 몸의 구조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개념을 명확하게 정리해 드리려는 것뿐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몸에 귀신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이 귀신을 '죄'라고 부를 수도 있고, 사람들은 이것을 '죄성'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왜 귀신이라고 부를까요? 영계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귀신은 사람의 몸에 거합니다. 그리고 사람 안에는 또 다른 것이 있는데, 바로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신 생기, 곧 하나님의 영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만드신 형상이 있지만, 동시에 사람의 형상을 타락시키는 것도 존재합니다. 마치 '모순론' 같습니다. 이 개념을 초기에 사람들은 '죄'라고 불렀습니다. 왜 죄라고 불렀을까요? 우리는 잘 모릅니다. 아마도 이 귀신의 이름이 '죄'일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그것이 너를 원하나 너는 그것을 다스릴지니라 (창세기 4:7 참조)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다는 것은, 이것이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분명 실재하는 존재입니다. 네가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고 했는데, 다스렸습니까?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문 앞의 죄에게 지배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문 앞의 죄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의견이 분분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창세기> 시대로 돌아가 이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그저 사람이 살인하고, 강도질하고, 도둑질하고, 욕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창조된 후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이 죄가 사람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바로 이런 논리입니다. 이 죄는 사실 하나의 영이며, 귀신입니다. 이것은 매우 혼동하기 쉬운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훗날 기독교 대가들이 설명한 내용도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사실 그것은 귀신입니다.
가인의 이 죄는 문 앞에 엎드려 있으면서 계략도 있고, 인격도 있고, 방법도 가지고 역사했습니다. 이것을 왜 죄라고 부를까요? 훗날 제가 귀신을 쫓아낼 때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귀신에게 "너 누구냐?"라고 물으면 "가인"이라고 대답합니다. 가인에게 묻는다면, 그 사람 안에 태어날 때부터 있던 그 존재의 이름이 바로 가인인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실제로 조상 대대로 내려온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부잣집에서 '샤오칭'이라는 첩을 들였는데, 이 샤오칭은 애절하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기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대를 이어 전해지다가 그 부잣집의 한 자매에게까지 내려왔습니다.
이 자매가 싱가포르에 와서 우리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교회에서 축사를 시작했습니다. 축사를 진행하던 중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매 안에 '샤오칭'이라는 이름의 귀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 샤오칭이라는 귀신이 자매의 몸에 줄곧 거하면서 파괴하는 일을 해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샤오칭은 언제 들어갔을까요? 아마도 태어날 때부터 그 안에 있었을 것입니다. 왜 이름이 샤오칭일까요? 그 첩의 이름이 샤오칭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물었을 때 샤오칭이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 자매는 본래 전통 경극을 할 줄 몰랐는데, 경극 배우들이 하는 특유의 손짓을 아주 능숙하게 해냈습니다. 옷만 입혀놓으면 당장 무대에 올라 경극을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고는 거기서 구슬프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영계의 일들이 얼마나 실재적입니까! 사실 그것은 자매 자신이 부른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귀신이 부른 것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사람 안에 있는 이런 귀신들의 이름은 종종 그 사람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세벨은 사람이었지만, 훗날 어떤 귀신들은 '이세벨'이라고 불립니다. 아합도 사람이었지만, 훗날 그 귀신은 '아합'이라고 불립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세벨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그 귀신은, 이세벨과 함께 태어난 바로 그 존재였습니다. 즉, 여러분과 제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그것을 쫓아내려고 하면, 그 귀신은 자기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나중에 어떤 자매가 축사 사역을 받는 과정에서 제가 "너 누구냐?"라고 물었더니 "난 나 자신이야"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자주 겪으면서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제게 고상한 이론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다는 말씀과, 축사할 때 귀신이 종종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며 그 사람을 죽여버리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점차 알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그 사람 안에 거하는 타고난 존재가 그 사람을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니 많은 경우 이 귀신은 하나의 영이며, 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모든 일을 이 귀신은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죄를 귀신으로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다들 얼마간 의아해하거나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사실 반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귀신의 이름이 바로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일까요? 사람이 태어날 때, 선천적으로 타고난 귀신이 자연스럽게 그 사람 안에 거하는 것, 그것을 죄라고 부릅니다. 나중에 두통이 생겼다면 두통의 영이 들어온 것이고, 허리 통증이 생겼다면 허리 통증의 영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 것은 밖으로 쫓아낼 수 있지만,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은 어떻게 쫓아낼까요? 스스로 하나님의 영을 의지하여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제가 전하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이것을 잘 분간하지 못한다는 것을 봅니다. 영이기 때문에, 이 영이 사람 안에 거하면서 자기 자신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되지만, 어쨌든 우리 안에서는 자주 충돌이 일어납니다. 언제 충돌이 일어납니까? 자극을 받거나 화가 났을 때 그 기운이 솟구쳐 오르고, 억제가 안 되어 다른 사람과 치고받고 싸우게 됩니다. 딸과 엄마가 다투고,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다투고, 부부가 다투는 것이 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두 사람 안에는 모두 죄가 들어 있어서, 두 사람 안의 죄가 서로 치고받고 싸우게 되고, 결국 사람은 타고난 죄로 인해 파괴되어 마귀의 올무에 빠지게 됩니다. 통제할 수 없는 그것이 바로 그 존재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저는 통제가 안 돼요"라고 합니다. 저는 "왜 통제가 안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통제가 안 된다는 말은 제가 가장 자주 듣는 말입니다. 왜 통제가 안 될까요? 그 귀신이 여러분과 완전히 융합되어 있어서, 어느 것이 여러분이고 어느 것이 귀신인지 분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그것들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가인은 제압하지 못했고, 역대 수많은 사람도 이것을 거의 제압하지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제압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여러분 안에서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생각을 자꾸 일으킨다면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어제 한 자매가 어떤 일을 겪으며 "저는 이런 줄 알았어요, 저런 줄 알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줄 알았다'는 생각이 얼마나 많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그것도 아주 당당하게 그렇게 생각했다면, 특별히 경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이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축사는 매우 눈에 띄는 축사였습니다. 사람 몸에서 귀신을 쫓아내어 혈루증 귀신을 쫓아내고, 중풍병, 눈먼 자, 귀먹은 자, 간질 귀신 등을 다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일을 낱낱이 다 설명해 주지는 않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사람의 일을 생각하자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우리가 날 때부터 타고난 그 죄는 누구에게 속한 것입니까? 사탄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 위력이 대단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보이십니까? 이 죄는 사탄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존재를 처단하려 한다면 대단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은 바로 우리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이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죄의 억압에서 건져내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축사는 광의의 축사입니다. 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까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지 않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다 보면 결국 우리 자신에게 도달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사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아니라, 여러분이 태어날 때부터 여러분 안에 거하던 그 귀신입니다. 여러분이 태어나거나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마귀 사탄이 귀신 하나를 보내어 그것이 합법적인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며, 아이의 성격을 보면 마귀가 그 아이를 통해 어떤 연극을 연출하려는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결국 늙어서는 비참하게 끝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습니다.
최근에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어떻게 오는지 보았습니다. 다 밖의 귀신과 안의 귀신이 안팎에서 호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밖의 귀신이 저 혼자 들어온 줄 알았지만, 사실은 안의 귀신이 초대해서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의 근원이자 본질입니다. 최근 한 자매의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리셔서 제가 줄곧 섬겨드렸고, 요양원에도 모셔다드렸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늘 가족들을 괴롭히고 할머니를 못살게 굴어, 결국 할머니도 병이 나서 몹시 힘들어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본인도 잠을 안 자고 남도 못 자게 하며, 사람이 잠들기만 하면 찔러대고 이것 달라 저것 달라 떼를 쓰며 괴롭히는데, 얼마나 못됐습니까? 참으로 못됐습니다.
치매에 걸린 것은 그가 타고난 바로 그 존재 때문이며, 그 귀신은 늘 1인칭을 사용하여 "내가 어쩌고저쩌고" 합니다. 그의 평생의 일을 이 귀신은 다 알고 있어서, 정신이 흐려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해도 자기 일은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사람이 이 귀신을 제압하지 못하면 가인처럼 결국 정신질환에 걸리고, 치매에 걸리게 됩니다. 왜일까요? 문 앞의 죄, 곧 타고난 귀신에게 제압당했기 때문입니다. 그 자매의 할아버지는 치매에 걸린 후에도 저와 대화를 나누셨는데, 그것이 제게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나는 좋은 사람이야, 어디를 가도 이치에 맞게 행동하지. 이치만 바르면 천하를 다 다닐 수 있어." 제가 말했습니다. "그만하세요, 요양원 문밖도 못 나가시면서 무슨 천하를 다닙니까?"
육신, 죄, 귀신이라는 단어는 사실 모두 한 가지를 가리킵니다. 곧 날 때부터 타고난 그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쫓아내는 것이며, 타고난 그것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죄라고 부를 수도 있고, 육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으며, 육신의 정욕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귀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쫓아내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기 안의 귀신을 쫓아내는 것, 이것을 '깨어짐'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우리가 부른 찬양의 제목이 <깨어짐에서 자유로>입니다. 자신 안의 이것을 깨뜨리지 않으면, 여러분은 이 존재를 제압할 수 없습니다.
쫓아내다 보면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게 됩니다. 늙어서 치매에 걸릴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그때가 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사람이 치매에 걸리면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아직 젊을 때,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온전히 기억하십시오. 절대로 그 존재를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육신에 속한 자아이며,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온 죄의 본성, 곧 귀신입니다.
연구하는 과정에서 저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일도 많고, 바울이 귀신을 쫓아낸 일도 많았지만, 바울 서신에서는 귀신 쫓아내는 일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바울 서신에는 귀신 쫓아내는 일이 다시 언급되지 않을까요? 바울 서신을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더 이상 축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역이 낱낱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가 귀신을 쫓아냈습니까? 그렇습니다. 로마로 압송되는 도중 한 섬에서도 열병에 걸린 추장의 부친을 섬겼고, 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얹기만 해도 사람들에게서 귀신이 나갔을 정도로 축사 사역에 매우 강력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골로새서>, <로마서> 같은 그의 서신들에는 귀신 쫓아내는 일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로마서>는 언제 쓰였습니까? <사도행전> 19장에서 20장 즈음에 쓰였습니다. 그런데 <로마서>에는 축사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시에도 여전히 귀신을 쫓아내고 있었는데, 왜 <로마서>나 <에베소서>를 쓸 때는 축사를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사실 언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이는 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는 5천 명에게서 귀신들이 우르르 쫓겨나갔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한 사람은 몇 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그런 일들을 기록하지 않고 오직 <로마서>에 있는 내용만을 기록했을까요? 바울은 더 이상 겉으로 드러나는 일에 머물지 않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고 하나 된 교회를 세우는 것, 축사의 개념은 바울 시대에 이르러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어 자기 안의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되었습니다. 왜 교회 안이 자주 난장판이 될까요? 모든 사람이 자기 몸에 귀신을 달고 교회 안에서 활보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집사회 회장이 되고, 어떤 사람은 목사가 되어 함께 모여 회의를 하는데, 사람이 회의를 하는지 귀신이 회의를 하는지 알 수 없고, 토론을 해보면 결국 귀신들의 모임이었기에 교회가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시대에 쓰인 이 서신들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음을 기록한 목적과는 이미 달라졌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서, 자기 몸에 있는 육적인 것을 처리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다리가 아픈 것은 쫓아내면 낫고, 머리가 아픈 것도 쫓아내면 낫고, 엉덩이가 아프거나 배가 아픈 것도 쫓아내면 낫습니다. 이런 것들은 쉽지만, 이것들이 나았다고 해서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습니다. 결국 바울은 더 깊은 신학 체계를 썼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안의 육신의 정욕을 처리하는 것이며, 저는 이것을 '내 안의 귀신을 쫓아내기'라고 부릅니다!
제가 이 일을 이렇게까지 설명한 것도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열심히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쓴 <로마서>와 <에베소서>는 축사가 한창이던 시대에 쓰였음에도 축사에 대해 쓰지 않고 무엇을 썼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고, 육신의 정욕을 처리하는 것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귀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몸에 귀신이 얼마나 많은지, 교회 안의 사람들이 타고난 죄를 죽였는지에 대해 주님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두셨습니다. 이것이 더 높은 차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거룩하고 하나 된 교회를 세우려면 반드시 사람 안의 강력한 자아, 지극히 강한 자존심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을 처리하지 않으면 승리하는 교회를 세울 수 없습니다. 왜일까요? 아무도 이것을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라오마'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귀신을 아무리 많이 쫓아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를 해방하여 자유케 하시는 것이며, 결국 우리 안에 타고난 죄를 깨뜨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의 그 영광스러운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는 이것을 꽉 눌러 잡아야 합니다.
이전에 한 형제가 '눌러 잡는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사람을 양육하려면 반드시 그 사람을 꽉 눌러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사람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죄와 귀신을 누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반응은 순전히 육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눌러 잡지 않으면 그를 축복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근본이 바로 이렇습니다. 사람 안에는 온갖 기이한 것들이 많아서, 몹시 악한 사람도 스스로 착하다고 여깁니다. 자기가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제가 섬겼던 수많은 암 환자는 다 자기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해괴하지 않습니까? 암에 걸렸는데도 자기가 좋은 사람인 줄 알고 스스로 착하다고 여깁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말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여러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들리십니까? "보십시오, 나는 이미 충분히 잘해왔는데, 영생을 얻으려면 또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영생을 얻는다는 말에 아예 응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너는 악한 사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악한 자임을 인정하면 구원의 소망이 있지만, 자기가 착하다고 생각하면 끝장입니다. 사실 육신 가운데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조차 자신을 '선한 선생'이라고 인정하지 않으셨는데,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육신 가운데는 선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려는 원함은 여러분에게 있을지라도 행하는 것은 여러분 마음대로 되지 않으며, 구호는 얼마든지 외칠 수 있지만 행해져 나오는 결과는 구호와 완전히 다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사람 괜찮아, 저 사람 괜찮아, 참 착해"라고 말하는데, 이는 다 헛소리입니다. 왜 헛소리일까요? 사람의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치매에 걸린 사람도 자기가 좋은 사람인 줄 알고, 가족들을 그토록 괴롭혀 놓고도 여전히 자기가 좋은 사람인 줄 압니다. 예수님과 선한 선생에 대해 논하며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던 그 사람도, 사실 누구에게나 "선한 분이시여, 참 좋은 분이십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헛소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에 대한 질문을 상대하지 않으시고, 먼저 기초를 깨부수셨습니다. 곧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으며, 선한 자는 단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약간의 장점이 있을지 몰라도, 약간의 장점이 선함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사람이 자기 육신의 정욕을 죽이지 않고, 타고난 귀신을 땅바닥에 내리눌러 제압하지 않는다면 선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몸에 그런 귀신을 달고 있으니 악하기 짝이 없고 온통 못된 생각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 어머니에게 장점이 있었을까요? 약간의 장점은 있었습니다. 제가 어머니를 섬길 때, 저는 사무실 안에 있고 어머니는 사무실 문앞에 계셨는데, 제 남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눈물 콧물 흘리며 마치 저한테 엄청난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것처럼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제가 화가 나서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건가?"라고 했습니다. 못됐지 않습니까? 아주 못됐습니다.
어머니가 그러신 것이 아니라 누가 그런 것입니까? 타고난 육신이 한 짓입니다. 어떤 분은 "류 목사가 또 거친 말을 하네"라고 할 것입니다. 제가 욱하는 것도 제 육신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제가 한 것일 수도 있고, 제 안의 죄가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두고 논쟁하지 맙시다. 저는 단지 이 일에 대한 사람들의 혐오감을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이렇게 악할까요? 어머니는 동생에게 마치 저에게 큰 구박이라도 받은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제 앞에 오시면 저는 어머니의 비위를 맞춰드리지 않았습니다. 예로부터 사람 안에는 원대한 이상도 있고 아름다운 소망도 있었지만, 타고난 귀신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 귀신을 당해내지 못한 것입니다.
훗날 제가 라오마를 대적할 때, 녀석은 태초 이래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지만 제게는 졌다고 말했습니다.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제게 제압당했습니다. 그러므로 타고난 죄를 처리하는 것은 사실 우리 화인사명신학의 매우 뚜렷한 특징입니다. 많은 교회의 목회자들이 교회를 세우지만 그 안에 사랑이 없고, 늘 파벌 싸움이 일어나며, 임종 직전까지도 큰 후회를 남깁니다. 어떤 목사님은 저에게 묻습니다. "당신네 교회에는 그런 문제가 없습니까?" 저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고 철저히 다루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의 정치적 암투는 다 이런 것 때문이며, 이 존재를 다루지 못해서 생깁니다. 결국 사람들은 '사람의 가장 큰 원수는 자기 자신'이라고 결론짓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축사는 새로운 단계의 축사입니다. 저는 드디어 문제의 근원을 찾았습니다. 새로운 축사는 바로 자기 몸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타고난 여러분의 성격이 변해야 합니다. 날 때부터 타고난 성격이 아무리 엉망이라도 고쳐야 하며, 이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난 날 때부터 원래 이래"라고 말하지만, 저는 문제의 핵심을 또 하나 밝혀냈습니다. 사람이 왜 어리석어지는지 아십니까? 사람 안의 귀신이 늘 여러분을 대신해 주인이 되고, 꾀를 내어 육신의 길을 걷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심는 자는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둡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혜로워질 수 있을까요? 드디어 답을 찾았습니다. 먼저 타고난 귀신, 곧 우리의 원래 본성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건드리기만 하면 무너지고 폭발하는 한계선이 있었다면, 오늘 그 한계선을 없애버리십시오. 그 한계선이 바로 귀신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을 망치는 것은 여러분 안에 거하는 타고난 귀신, 타고난 죄, 악령, 혹은 육신의 본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꽤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혜로워지고 싶습니까? 지혜로워지고 싶다면 바꾸십시오. 제게는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관념이 하나 있는데, 이것과 꽤 잘 부합합니다. 저는 타고난 것은 다 쓸모없다고 생각합니다. 똑똑하든 어리석든, 타고난 것은 아무 쓸모가 없으며 모든 것은 배워서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지혜로워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과거에 줄곧 해오던 방식도 소용없습니다.
어떤 자매에게 물었습니다. "전화번호는 왜 바꿨습니까? 번호를 바꾸면 연동된 은행 계좌들이 다 꼬여버리잖아요." 그녀는 "새로운 곳에 가면 그 지역 번호로 바꿔야 하잖아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유선전화기를 들고 다니는 줄 알았습니다. 요즘 같은 휴대전화 시대에 왜 집전화처럼 생각할까요? 참 이상했습니다. 그녀는 늘 그래왔고 줄곧 그런 줄 알았으며, 한 번도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안의 죄가 한 짓 아니겠습니까? 그 안의 귀신이 한 짓 아니겠습니까? 늘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런 줄 알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레짐작하는 것은 많지만 다 쓸모없습니다. 우리 안의 그 존재는 손해 보는 일을 이득으로 여기게 하고, 이득 보는 일을 손해로 여기게 하여 완전히 뒤바꿔 놓습니다. 가인이 바로 그런 자였으며, 철저한 바보였습니다.
2. 본문 말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18-25)
3. 기도
하나님, 오늘 우리를 자유케 하옵소서. 오늘 우리 가운데, 우리 형제자매들의 마음속에서 주님이 우리의 힘이 되시어, 주를 힘입어 이 원수 마귀를 이기고 육신의 정욕을 이기게 하옵소서. 하나님, 오늘 우리를 이끄사 승리하게 하시고, 우리 안에 타고난 귀신을 쫓아내기 시작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오늘 우리를 승리로 이끄사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 본문 배경
이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해결하고자 하시는 문제입니다. 통제가 안 되십니까?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15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의 한 형제를 만났습니다. 사실 그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 점은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의 문제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사실 밖의 귀신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에 타고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이 타고난 존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오늘 저는 이 문제를 명확히 밝히고자 합니다.
바울이 이곳저곳에 교회를 개척하다가 <사도행전> 19장에 이르러서는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 가기로 작정했습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부담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유대인들도 자신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고 내면의 죄와 타고난 귀신을 제압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중에 <로마서>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왜 <로마서>를 썼을까요? 로마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피난 온 유대인들이 로마에 세운 교회였습니다. 교회 내부의 문제가 매우 복잡하여 혼란과 내분이 가득했고, 많은 사건이 일어났으며,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혼란스러운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바울의 서신들이 사방으로 전해졌기에 그들은 바울이 대단하다고 여겨 바울에게 편지를 보내 물었습니다. 분명 그들이 바울에게 이러이러한 문제들이 있다고 편지를 썼기에, 바울이 <로마서>를 써서 여러 질문에 답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쓴 것은 그의 신학적 관점에서 일어난 중대한 도약이었습니다. 전통적인 의미의 축사는 겉으로 드러난 축사이지만, 자기 안의 귀신을 쫓아내는 것, 곧 사람 안의 육신의 정욕을 처리하는 것은 거대한 도약입니다! 교회를 세우려면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제도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이런 전통 저런 전통을 가져와도 소용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성령을 의지하여 육신의 정욕을 죽이는 것뿐입니다.
당시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를 읽고 '이신칭의'를 도출해 냈고, 오늘날까지 루터교라는 교파가 이어져 오고 있지만, 사실 그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로마서>는 단지 이신칭의만을 말하는 책이 아닙니다. 의롭다 함을 받은 뒤에 어떻게 됩니까? "아, 나 믿어" 하고는 믿고 나서도 그대로입니다. <로마서>가 해결하는 것은 사람이 타고난 죄와 귀신을 때려눕히는 일입니다. 루터는 주제를 제대로 잡지 못했습니다. <로마서> 서두에서 이렇게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로마서 1:16)
무슨 능력입니까? 우리 육신의 정욕을 죽이는 능력이며, 곧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이 축사에 대해 쓰면서 사람 안의 문제를 매우 명확하게 묘사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로마서 7:19-20)
여기서 사용된 '죄'는 사실 과거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했던 바로 그 귀신이며, 사탄입니다. 대단히 강력합니다! 우리가 사탄의 보좌를 쳐야 한다고 말하는데, 사탄의 보좌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중에 뱀이 가장 간교했기에, 뱀은 바로 그 사탄이었으며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했고, 훗날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까지 시험했습니다. 그 간계가 너무나 대단하여 오늘날 우리의 하찮은 실력으로는 견뎌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을 치려면 이렇게 쳐야 합니다. 오늘 제가 드리는 말씀은 아주 직설적입니다. 여러분이 원수 마귀를 치고 사탄의 보좌를 치고자 한다면, 그것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습니다. 육에 속한 본성,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연결해 보면 죄가 곧 귀신이고, 귀신이 곧 죄라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로마서 7:21)
발견하셨습니까? 여러분이 이렇게 행하고자 하지만 악이 튀어나오고, 내면에서 강력한 힘이 작용합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2-24)
보이십니까?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일을 명확히 깨달아야 합니다.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 제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5. 육신 가운데는 선한 것이 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반드시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육신 가운데 여전히 선한 것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 없을 테니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들어갈 때까지 혼자서 계속 애써 보십시오. 육신 가운데 선한 것이 없는데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많은 형제자매가 저에게 자주 묻습니다. "목사님, 저 좀 칭찬해 주시면 안 돼요?" 저는 말합니다. "칭찬할 게 뭐 있습니까? 당신이 선한 선생입니까?" 그러면 "저 요즘 발전했잖아요"라고 합니다. 저는 "작년, 재작년에 이미 여기까지 발전했어야지 왜 이제야 겨우 여기까지 왔습니까?"라고 합니다. 또 "아유, 목사님, 저에게 동기부여 좀 해주시면 안 돼요?"라고 합니다. 무슨 동기부여를 합니까? 기억하십시오. 사람의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이 논리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예전에 기업에서 수십 명의 직원을 관리할 때 한 가지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칭찬해 주고 오냐오냐해주면 일을 망칩니다. 못 믿겠으면 한번 해보십시오. 사람을 관리해 본 적이 있다면 반드시 알 것입니다. 저는 트집 잡는 데는 아주 탁월하며 눈이 아주 매섭습니다. "어? 이걸 왜 이렇게 했어? 저건 왜 저렇게 했어?" 그들은 제 말을 들으면 마음이 괴롭지만, 그래도 '이 사람은 정말 대단하다, 눈이 너무 매서워서 어떤 것도 피해 갈 수 없구나' 하고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육신 가운데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은 대단히 기초적인 진리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청년과 선한 선생에 대해 이야기하셨을까요? 청년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지만, 예수님은 영생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시고 선한 선생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착하다"는 것은 헛소리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헛소리이며, 실제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이 하나님의 기준을 자꾸 낮추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영광스러운 형상을 회복하기에는 영원히 부족합니다. 무슨 격려를 바랍니까? 한 대 맞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이 말이 듣기에는 불편하겠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육신 가운데 선한 것이 없다는 바로 이 사실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사람의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늘 구호만 외칩니다. "아, 내가 어찌하리, 사명이 없으면 짐승과 같으리라." 하지만 결국 그의 양육을 보면 난장판이고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구호만 외쳐서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행하여 나타나야 진짜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육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손만 대면 망쳐버립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세우겠다는 원대한 이상을 가졌지만, 사람의 이기심 때문에 엉망이 되었습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보니 다 함께 배급을 받으니 아무도 일을 안 했습니다. 그래서 덩샤오핑은 사람의 이기적인 심리를 이용해 사유제를 도입했습니다. 국유제 아래서는 다 자기 것이 아니지만, 다 자기 것이 된다면 열심을 내지 않겠습니까? 재물을 모으는 데는 기가 막히게 열심을 냅니다.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육신을 입고 태어난 본래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양육할 때 "이 사람 괜찮네, 저 사람 괜찮네"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제게 오면 "뭐가 괜찮습니까? 아직도 문제가 태산 같은데요"가 됩니다. 저는 단지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아직 처리해야 할 부분이 어디인지만 알고 싶을 뿐입니다. 과거에 처리했다고 해도 완전히 다 처리된 것은 아니니, 다 된 줄 알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생명은 더 이상 머무르지 않으리>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얼마나 좋은 찬양입니까!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해야 할 일 중에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수두룩한데, 고작 조금 해놓고 대단한 줄 압니까?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초입니다!
6. 사람 안의 갈등과 몸부림
육신 가운데 선한 것이 없기에 사람 안에서 갈등과 몸부림이 일어납니다. "목사님, 저는 내면에 갈등이 없고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라고 한다면, 당신은 귀신과 아주 잘 하나가 된 것이니 그냥 그 본성대로 사십시오. 남들이 2조의 빚을 질 때 당신은 4조의 빚을 질 능력이 있으니 참 대단하십니다. 그러므로 내면에 갈등이 없다면 당신은 번지수를 잘못 찾았고, 우리 교회에 오지 말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우리 교회에 왔다면 진리를 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고, 구하고 있다면 분명 내면의 갈등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은 못 하고 원치 않는 일만 골라서 행하니 미칠 지경인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악을 행하는 일부 사람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양심을 개에게 주어버려 양심이 없기 때문에 갈등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자들은 우리가 다룰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나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영광스러운 형상을 회복하며, 나 자신을 온전히 드려 수많은 사람의 축복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나는 많은 사람의 축복이 되고 싶지 않고, 저주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한다면 이름을 '가짜'로 바꾸십시오. 그게 낫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내면에 갈등이 있는 것이 매우 정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일까요?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들은 왜 번번이 빗나갈까요? 내면에 타고난 귀신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며, 오늘 쫓아내려는 것이 바로 이 녀석입니다.
여러분 안에 갈등이 있습니까? 있다면 축하합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재물이나 긁어모으려는 악한 자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마십시오. 사람 안의 갈등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살고자 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다 무한 루프에 빠지게 됩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먹는 순간 사탄이 신호를 감지하고, 신호를 받자마자 즉시 지원군을 보내 여러분을 공격합니다. 안의 귀신뿐만 아니라 밖의 귀신까지 합세하여 공격하니 결국 엉망진창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골치 아픈 인류의 곤경입니다.
7.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는 것은 <로마서> 8장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를 해방하셨을까요?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바로 교회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해방을 얻습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영이 그 성전 안에서 운행하시고, 이곳에 하나님의 큰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서 쫓겨나는 귀신들은 사실 아주 사소한 것들임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은 더 높은 봉우리에 올라, 사도 바울이 말한 바 우리 안의 자아를 쫓아내는 길을 가기 시작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는데, 어떻게 해방하셨을까요? 여러분이 예수 안에 있을 때 여러분이 지은 죄와 악행을 예수님의 보혈이 덮어 지워버리셨고, 그 귀신은 더 이상 여러분에 대해 권세를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귀신의 역사는 더 이상 합법적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타고난 본성으로 과거에 저지른 죄도 여러분이 한 것이 아니라 그 죄가 한 것으로 간주되어 귀신의 머리에 돌려졌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49%의 지분을 가지고 귀신이 51%의 지분을 가졌다면 끔찍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소수 주주라 발언권이 없고 대주주가 마음대로 결정하며, 빚은 절반 넘게 떠안으면서 이득은 저쪽이 다 챙겨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이 한 가지 일을 행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심으로 이 모든 것을 도말하셨고, 그 순간 내면의 귀신은 불법이 되었습니다. 녀석은 더 이상 합법을 주장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 일이 이루어진 후 이제 여러분에게는 선택할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육신을 따르기를 선택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여러분 안의 논리 체계가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여전히 육신을 위하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또다시 괴로워하고 썩어질 것 가운데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는 말은 헛된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다시 죄를 짓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같으므로, 우리 안에는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전에 우리의 죄를 예수님이 담당하셨고, 이전의 저주가 예수님께 돌아갔으며, 이전에는 귀신이 우리 몸에서 합법적으로 파괴를 일삼았지만 이제는 합법적으로 파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귀신에게 시달려 다리 통증, 허리 통증, 두통 등으로 고통받아야 마땅했으나, 이제는 예수의 이름으로 그것들을 쫓아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일까요? 본래 합법이었던 것이 이제는 불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죄의 억압에서, 타고난 귀신의 억압에서 건져내시어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도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자업자득이며, 고통을 더 겪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주여, 저를 구원하소서"라고 하면 하나님은 다시 구원해 주시겠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제 권면을 듣고자 하신다면 해결책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자기 안에 타고난 귀신을 쫓아내고, 더 이상 사람의 뜻을 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선택을 하겠습니까? 이런 선택을 할 줄 모른다면 그것이 당신의 한계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역은 세상 사람을 구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자녀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숙제를 하나 내드리겠습니다. 집에 가서 <로마서> 8장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야지, 귀신의 자식들이 교회 안으로 섞여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기 위해 지어진 그릇이다"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진짜 그럴지도 모릅니다.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그런 짓을 행한다면,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8.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르기를 선택하라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위하는가는 전적으로 사람의 선택입니다. 저는 무엇을 위하고, 여러분은 무엇을 위합니까? 사람마다 위하는 대상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육에 속한 일만을 생각하여 머릿속에 먹고 마시고 노는 생각뿐이니 무슨 영광스러운 소망이 있겠습니까? 사실 하나님의 영이 늘 여러분 안에서 인도하시지만,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을 쫓아내고 귀신의 영을 남겨둔다면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르기를 선택할 수 없겠습니까? 물론 이 말이 다소 모호하게 들릴 수 있으니, 기회가 되면 이 말씀들을 더 깊이 연구하여 여러분과 더 알기 쉽게 나누겠습니다. 성령을 따르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니, 육신을 따르는 자는 썩어질 것을 거둡니다.
사실 견디기 힘들 때, 견뎌내고자 결단하기만 하면 쉬워집니다. 성령을 의지하여 영 안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다 보면 잠시 후 그런 느낌이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음식이 너무 먹고 싶어서 배가 등가죽에 붙을 정도로 배고프다는 느낌이 들 때, 성령으로 잠시 기도해 보십시오. 그 느낌이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이것이 진짜 배고픔입니까, 가짜 배고픔입니까? 진짜 배고픔이라면 어떻게 그 느낌이 사라질 수 있겠습니까? 왜 사라졌을까요? 그 배고픔의 느낌은 타고난 죄가 뿜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배고픈 느낌은 두통의 느낌과 같고, 짜증 나는 느낌이나 우울한 느낌과도 같습니다. 그런 느낌들이 실재합니까? 대단히 실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따라가면 썩어질 것을 거두고, 하나님의 영을 따르면 영생을 거둡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느낌을 더 이상 믿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서 왜 짜증이 날까요? 타고난 귀신이 짜증 나는 느낌을 조금 뿜어내는 것은 식은죽 먹기입니다. 그러나 그 느낌을 따라가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내내 짜증이 이어질 것입니다. 반대로 그것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른다면 그 짜증 나는 느낌을 금방 처단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 만에, 어떤 사람은 이틀 만에 처단합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해 우리는 꽤 깊이 연구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참으로 풍성한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 안의 느낌을 기도 한 번으로 처단해 버릴 수 있으니, 그 느낌이 어디로 갔겠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온갖 평강과 희락을 우리 안에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9. 사람의 소망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무엇을 소망하는지 아십니까? 그저 맛있는 국수 한 그릇 먹는 것, 맛있는 반찬을 사는 것, 온통 이런 것들뿐이니 참으로 저급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소망하는가가 모든 것을 결정하므로, 여러분이 육신을 따르는가 성령을 따르는가는 여러분 안의 소망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바라는 것이 온통 육신에 속한 것이고 세상일에 불과하다면, 여러분은 결코 잘될 수 없습니다. 바라는 것이 온통 세상일뿐인데 어떻게 그 귀신을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의 소망을 가질 때 비로소 이생을 하찮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당하는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되므로, 그 영원한 영광을 위해 이 잠시의 가벼운 고난은 족히 비교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저에게 이 세상에서 무슨 소망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소망이 없습니다. 마흔 살 무렵 요양원 사업을 해볼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령화 사회가 오면 유망한 사업이고 장차 많은 사람이 요양원에 갈 테니 비즈니스 모델로 참 좋겠다고 생각하여 현장 조사를 다녔습니다. 요양원을 하나하나 둘러보고 난 후 저는 마음을 접었습니다. 호스를 꽂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세상에서는 완전히 소망이 없구나'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럼 목사님은 나중에 노후를 어떻게 보낼 겁니까?"라고 묻습니다. 노후는 없습니다. 내일 죽더라도 오늘까지 사역하는 것, 이것이 저의 소망이며 저의 소망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럼 나중에 어떻게 합니까? 누가 화장터에 데려다줍니까? 쓰레기장에 버려지면 어떡합니까?"라고 합니다. 저는 "쓰레기장에 버려지면 버려지는 거지요"라고 말했습니다.
10. 결론
저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는 소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의 소망은 반드시 하늘에 있어야 하고,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제게는 영원한 소망이 있으며, 이것이 바로 제 사역의 원동력이고 제가 수많은 것을 하찮게 여길 수 있는 이유입니다. 제가 왜 제 형제자매들과 재산 싸움을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원래 가진 것도 얼마 없어서 다툴 것도 없었지만, 이 땅에서 제게는 그런 소망이 없고 그런 것들을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 모든 필요가 채워졌는데 그런 것들을 가져서 무엇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제 두 손으로 저와 동역자들을 부양할 뿐만 아니라, 제 동역자들도 자기들의 두 손으로 자신들과 또 다른 동역자들을 부양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무엇을 소망하는가는 무엇을 믿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그저 살다가 죽는 것이라면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아무 소망도 없습니다. 요양원에 있는 노인들을 보십시오. 늙어가는 그 모습은 참으로 눈 뜨고 보기 힘듭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속히 영원한 영광을 소망하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살아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살아가길 갈망한다면 몇 가지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모세는 120세가 되었을 때도 기력이 쇠하지 않아 산에 올라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고, 그 후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어 열조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그들 중 요양원의 노인들 같은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그것은 비극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어떤 소망을 품고 있는가가 여러분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소망이 온통 육적인 것뿐이라면, 여러분의 미래는 요양원에 있는 사람들의 그 모습 그대로일 것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자신의 소망이 무엇인지 똑똑히 아십시오. 사람은 무엇을 소망하느냐에 따라 그것을 따르기를 선택하고,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느냐에 따라 그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가치 없다고 여기면 귀하게 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왜 늘 그런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고 위할까요? 무지하기 때문이며, 모든 소망을 이 세상에 두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사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셨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는 귀신이 우리 안에서 차지하고 있던 공간을 조금씩 되찾아 하나님께 돌려드릴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들을 모두 때려눕힌 것처럼, 우리의 온 영과 온 사람이 온전히 하나님께 속하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우리 가운데 다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형제자매들이 승리하여 육신의 썩어짐 가운데 살지 않고, 마귀의 유린 속에 더 이상 살지 않으며, 승리하는 백성이 되어 겉의 귀신만 쫓아낼 뿐 아니라 우리 안의 귀신까지 처단하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처리했습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입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누가복음 10:20)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소망과 우리의 모든 선택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바를 따라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성령께서 도우십니다. 여러분이 연약해도 괜찮고 스스로 선택할 힘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실 수 있으니, 그분을 의지하면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기를 얼마나 갈망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우리를 위해 본을 보여주셨고,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영광스러운 형상이 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육신의 정욕을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다면, 우리 또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다소 극단적인 비유를 드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비록 거지가 될지라도 하늘의 영광스러운 소망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거지가 되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이 극단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속한 것들을 끊어버리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으니, 오직 하늘의 영광만을 바라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십시오. 아멘!
찬양을 부르며 오늘의 헌금을 드리겠습니다. 헌금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시는 분은 헌금하지 마십시오. 오늘 저와 함께 하늘의 영광스러운 소망을 품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승리의 날이 임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손을 들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님께 고백합시다. "내가 나 자신을 이기겠습니다. 그 귀신이 내 몸에 몇 년을 머물렀든 오늘 내 발아래 짓밟힐 것이며, 나는 하나님의 승리하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는 세상에 속한 모든 소망을 철저히 끊어버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는 승리할 것이며, 성령을 따르기를 선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를 선택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마귀의 모든 거짓은 물러갈지어다!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시니 누가 나를 대적하겠습니까? 오늘 나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살아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형제자매 여러분, 돈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은 이 세상의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며, 영적인 문제는 더더욱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이제부터는 재물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 우리의 헌금을 기쁘게 받아주옵소서. 우리 자신을 주님께 산 제물로 드리오니, 주의 영광스러운 얼굴을 뵈올 때까지 우리와 함께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