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Q1:老师,十诫是底线,为何没守安息日?耶稣所做的洗脚礼,我们为何不做呢?
哇,挺厉害呀,上来就给我一闷棍。十诫是底线,其实第四诫就是守安息日。那他问的问题是说:为什么我们没有守安息日?因为我们每天都是安息日。哎呀,我这一棍一下子就把他那个棍挡住了。我们每天不都是安息日吗?每天都是为神而活。是不是?好,耶稣所做的洗脚礼,为什么不做?其实耶稣所做的是一个很本质的东西。不是你给人家洗了脚,就有了很本质的东西。是不是?我在网上给你洗脚,我给你发一盆水过去呀?其实千万不要学一个表象,要抓事物的本质。
一个人习惯性的抓一个表象,然后学了一个表象就坏了。法利赛人守了安息日没有呢?守了安息日。那为什么讨了神的愤怒呢?你就回答不上来了吧,是不是?你肯定回答不上来。一个人如果学一个表象,那就不是学了神的道。如果一个人心里面真的是要追求爱神,很多问题就迎刃而解。如果里面没有爱神的心,守了一个安息日,做了一个样子,那不是令人讨厌吗?那我做一个管理者,我最讨厌的就是员工给我做了一个样子。
你以为你给神做一个样子,能忽悠过去吗?我你都忽悠不过去,神你还能忽悠过去?你还不得了了!所以说神要让人知道什么真理是大的,什么真理是小的。不是说小的真理可以不守,那先得把根基建牢,把框架建牢。重要的真理把它抓住了,然后再抓什么十一奉献。这回明白了吗?你这个问题呢,基本上可以说,它是一个抓表象,其实应该抓本质。十诫是底线,抓住这个问题的本质才是关键。
Q2:老师,《诗篇》四十二章里说:你为何心里烦躁,应当仰望神!这里也没说为了何事而烦呢?
为了何事烦躁?被人追杀要想不烦躁难呐。那为什么被人追杀呢?因为神给他安排了一个对付肉体的功课。所以一个人活在肉身当中,他的肉身和他的信心相互较量,在这个较量的过程当中,你会发现《诗篇》四十二篇,后来作者得胜了。我里面烦躁也不知道为啥烦躁,可能为某一些事烦躁;但是我里面还有另一个声音,我应当仰望神。我一仰望神,烦躁就被践踏在脚下;一会儿烦躁又来了,又再次靠着仰望神,再次把它践踏在脚下!不管它是什么事。
Q3:老师,怎么样凭着信心医病赶鬼?请老师给一些建议?
凭着信心医病赶鬼,通常从哪开始?从一些小事开始。比如说有的人感冒了,哎呀,这点小事就别麻烦神了,我吃点感冒药就行了。结果怎么着呢?结果把操练信心的机会错过了一把。我说:那你为什么不操练呢?他说:等我得了癌症了再操练。真得了癌症就没有信心操练了。听明白了吗?所以说在医病赶鬼上,常常在小事上操练;那在治死肉体的邪情私欲上,也要在小事上操练。然后逐渐再玩一个大一点的,再玩一个更大一点的。
医病赶鬼的信心是怎么一回事?我得给你解释。第一:圣灵必降在你们身上,你们就必得着能力。所以圣灵充满是关键。那圣灵没有充满去医病赶鬼,就常常被鬼赶。那圣灵充满以后,还要怎么办?还得学会一件事:不要因为鬼服了你,你就高兴,应当为了你的名字记录在天上而喜乐。所以这人凭着信心赶鬼,一定得是朝着像耶稣基督这条路上走。千万别把这个医病赶鬼给孤立出来,你就很麻烦了。一定得走像耶稣基督的路啊!追求像耶稣,医病赶鬼就好使。
像耶稣怎么像耶稣?因为教会就是耶稣的身体,所以先建造神荣耀的教会。一边建造荣耀的教会一边医病赶鬼,你就会发现教会就因着赶鬼这事,就会变得越来越圣洁。后来我发现,等我在悟性上认识到一些东西,对某一种鬼就有很深刻的认识。身上带着这种鬼的人,要么他得释放;要么他被鬼带走,教会就得洁净。就很简单!
Q4:老师好,耶稣基督为门徒洗脚,是不是说明耶稣基督非常卑微?
那不是。耶稣基督给我们做了一个仆人的形像,但是祂是主。千万不要搞错了,祂取了一个仆人的样子,但祂却是主!所以说那不叫卑微,那叫做一个服侍人的样子。当然也可以叫做卑微,所以你要做大的,你就得服侍人。在神的国里有这么一个规矩,你要想做大的,就得服侍人,不是在上面作威作福。
Q5:老师:全世界都“卧在”那恶者手下,这句话不明白。不是神掌权吗?
就是人要知道,魔鬼管的是这幽暗的世界。但是在牠上面还有一位神,神掌管所有,包括在这世上掌权;不管谁做王,谁不做王,也包括这地上的疆界都是神所定。那问题就来了,你到底是属于神的国度?还是属于这世上的国度?如果你是属世上的国度,神就把你划到那恶者的手下。你进到牠的国度,你不就得归祂管吗?牠要把你往死里整,神也管不了你,那是神所定的规矩。神定的规矩就是,属世界的人就属魔鬼,魔鬼就可以任意待你。所以要悔改归入神的国度,这就是神所设的规矩。
Q6:人若看见弟兄犯了不至于死的罪,就当为他祈求,神必将生命赐给他;麻烦老师能解释一下这句话吗?
其实我们人呐,不是一下子就完美了,我们还常常在犯罪当中往前走。所以说我们怎么办呢?就需要为他祷告,为他祈求。这是做啥呢?就是把他从罪的辖制里头释放出来。听明白了吗?但是最后还是真理使他得自由。怎么办呢?让他从罪的辖制里头出来,然后引导他进到永生的盼望里,所以神必将生命赐给他。如果一个人犯了必死的罪,下面还有一句话:还有人犯了不至于死的罪。什么叫这个人犯了必死的罪?就是这个人呐,犯了罪一祷告好了;又犯了同样的罪,又祷告好了,但是神不能永远给你机会。最后神把这个机会给剥夺了,那就叫做犯了至于死的罪。那得多刚硬呀!
所以说有些问题我们真的可以解决,但是有一个问题我们解决不了,就是人心里的刚硬。比如说,前一段时间我们有一个癌症患者,我带她祷告的时候,我让她悔改。我就问她最近悔改的怎么样了?她说:不,我屁股还疼。我就在想这人骨子里怎么就这么刚硬?所以我告诉你什么都可以解决,至于死的罪是解决不了的。
Q7:老师,关于《圣经》之外的预言,预言内容和《圣经》预言基本一致,我很好奇,如果我相信这些预言,会不会得罪神?关于这个可以讲讲吗?
比如说我小时候,我那时候还没信主,人家给我算命,我现在想起来挺准的,你说我算是相信他算的命呢?还是不相信呢?其实也谈不上相信和不相信,人家整得还是真的挺准的,我这么一说很多基督徒就不同意了。你怎么能够长那些算命人的威风?不是,这是真的,这都是事实,也就是说灵界是非常真实的。灵界如果是非常真实的,《圣经》之外有一些预言,包括算命这些东西,相信就相信,不相信就不相信。但是这些东西相信了又能怎样?也不能怎样。
我还是鼓励你好好地寻求永生之道,原有的生命之道,听明白了吗?所以我想我们人的体力有限,你要不要把这个《道德经》都研究透,才来信耶稣?要不要把这个《四书五经》都研究透,才来信耶稣?其实没这个体量,也没这个必要。如果你相信一些东西,不相信一些东西,这些东西也不重要,重要的就是在这永存的生命之道上往前不断地推进。
Q8:老师,前面讲到认罪,如何认罪呢?
其实都是神的恩典才能够进到认罪里面,比如说这人得了病。我难受!那我最先带着你的,一定是认罪,因为啥呢?因为我一祷告神的灵就会说,他还有这些问题,或者说我问你有啥问题?咋回事?原来是这个问题,昨天想啥来的?昨天想这个,都是想歪歪最后生病,然后认罪。什么叫做认罪呢?就是我知道我搞错了,我错了,我改,然后我去找一个对的。找到哪去呢?找到认识神的话,这叫做认罪。
你们的认罪可能就是嘴巴上说一句认罪叫做认罪。其实不是,是心里头知道没搞对,这么干吃亏,哎呀!傻了吧唧的以后不能再干这事了。就好像被人骗去十万块钱,哎呀!真是傻了吧唧的,以后不能再被骗了,那叫做认罪。所以说咱们大家要知道,认罪不是嘴巴上说一句,是心里头知道这是错啦!
Q9:《圣经》说神的话就是灵,被圣灵充满,可不可以说是被神的话充满?
不是。圣灵充满《圣经》上记载的是五旬节圣灵降临。五旬节圣灵降临,降临完了以后,他们就开始方言祷告像喝醉了一样,那这叫做圣灵充满。被神的话充满,这话听起来我就不知道怎么解释,什么叫做被神的话充满?后来被圣灵充满,其实方言祷告对我们的悟性没有果效,但是我们却怎么样呢?我们要在悟性上认识神,也要在灵性上认识神。灵性上认识神,圣灵充满实际上是解决了一个人的灵性的问题。
比如说方言祷告,虽然我们不知道我们说的是什么,但是在灵界里头却是讲说各样的奥秘。方言祷告是对神说,那当然重要了,虽然它是个很小的恩赐,但是悟性上认识神却是非常重要的。所以既要圣灵充满,也要读《圣经》,然后圣灵会带领我们认识神的话,这是缺一不可的。千万不要以为圣灵充满就是被神的话充满,没有这回事,圣灵充满会带领我们明白神所说的这些话。
Q10:老师,我妈妈之前是拜偶像的,现在信了耶稣以后,别人聊假神的时候,只要我妈妈一搭话,鬼就上到她脑袋上,头就会晕得厉害。这是怎么回事呢?
因为一下子又进到世界里去了,就是她里面那个属世界的逻辑体系没有改,不是鬼又上到她头上,是她里面就是常常属世界,还是属于魔鬼的。信耶稣得知道怎么信,水、血、圣灵。
Q11:老师,有人说受圣灵说方言舌头要跳动才是从神来的,该怎么说呢?
《圣经》里头没有这句话,你能在《圣经》里头找到舌头要跳动吗?没有。所以方言祷告是个信心的操作,所以信的人必有神迹奇事随着。就是奉我的名赶鬼,说新方言;手能拿蛇,若喝了什么毒物也不受害;手按病人,病人就必好了。所以说《圣经》里从来都没有说舌头要跳动,然后就是从神来的。《圣经》里没有,为啥?因为方言祷告是一个信心的操作。如果我在这:哦!沙啦啦吧,沙啦啦吧,西巴拉巴,卡不拉嘎,舌头跳动啦?闲着没事干,舌头在嘴巴里头不听使唤,吓人不?
我跟你讲,不合乎《圣经》的东西多呀,幸亏我把《圣经》读得清清楚楚,我就不相信这些东西。这些东西还不如我教的,我说:你方言祷告会了吗?不会。没事,我说一句你学一句。有的人就说你怎么能这么说呢?怎么的?什么语言不可以说啊?什么都可以说,因为它是个信心的操练。《圣经》上有没有说这个不行啊?没有啊,《圣经》上没有说不能这么说呀。其实在《圣经》里头我们从来没有听过讲解方言祷告怎么出来的,没有啊,没有讲解。那没有讲解那怎么办?凭着信心做吧,凡不出于信心的都是罪。
那后来你知道这事是从神来的还是从鬼来的?大家来说说看,后来发现得着能力可以赶鬼,可以释放人,好使!所以千万不要看这个方言祷告这样、那样在那判断来判断去,《圣经》里没有,那怎么办?看这个东西是否是可以得着从神来的能力,可以奉耶稣的名赶鬼,说新方言;手能拿蛇,若喝了什么毒物也不受害;手按病人,病人就必好了。
Q12:老师,你刚说耶稣生在律法之下,不明白,麻烦老师讲一下。
耶稣有没有守住所有的律法?有!这叫生在律法之下。那耶稣有没有升华到一个更高的高度?有!耶稣升华的比守律法更高的高度。所以我们所走的路,其实是超越了律法。不是说违背了律法,是超越了律法,这就是耶稣基督所做的。生在律法之下他是个犹太人,所以他守割礼,所有他该做的都做了,那怎么办呢?这些东西就是一个仪文,但是最后最重要的是啥?最重要的就是行在神的旨意当中。
Q13:老师,我同事是信天主教的,三天两头嘴巴疼,哭得稀里哗啦。我就依靠神,读神的话,认识神。看她这样就带她祷告了很久,嘴巴疼好了,几个月没发了。前几天腰疼的动不了,她刚好坐我同一桌,非常难受,本来我不想管她的,后来心存善念看不过去了带她祷告好了,这没问题吧?
好啊!这当然没有问题啦!因为这行了这个神迹,她虽然得了好处,但得着好处的是你,你就对你所信的神就更有信心,是不是啊?对我们永生的观念就更加地坚固,听见没有?千万不要把目标放在被服侍的人身上,那耶稣服侍的十个大麻风,九个离弃神,正常!
愿神祝福大家,弟兄姐妹再见!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드디어 《요한일서》의 마지막 장까지 성경공부를 마쳤습니다. 제가 《요한일서》를 이전보다 훨씬 더 깊이 깨닫게 된 것 같아 무척 다행스럽습니다. 사도 요한은 중국에서 《도덕경》을 쓴 노자와 비견될 만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요한이 쓴 글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다면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잘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요한일서》의 매 장마다 쓰인 어휘와 표현들이 꽤나 심오하고 독특하다고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물, 피, 성령 같은 단어들은 언뜻 들으면 다소 무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실제로 ‘혈수성령교’라는 분파가 있을 정도이니, 사람이 어떤 것을 왜곡하고자 하면 참으로 쉽게 왜곡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요한일서》의 주제
우리가 《요한일서》를 다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요한일서》 5장의 주제는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입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훌륭합니다. 《요한일서》 전체가 승리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무엇이 승리이며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요? 우리 중에는 이름을 ‘득승(得勝, 승리)’이라고 지은 분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그리 승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중에 보니 ‘득승’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승리하지 못하고, ‘희락(喜樂, 기쁨)’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도 그리 기뻐하지 못하며, ‘한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그 속사람이 별로 한나를 닮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승리에 대해 이야기하니 어떤 분들은 이름을 바꾸고 싶어 하는데, 사실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일서》 5장을 제대로 읽고 깨달으면 됩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저는 복잡한 일을 단순하게 설명하여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 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도 요한은 대단한 경지에 이른 분이기에, 그가 쓴 책은 상당한 실력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1장은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죄를 범한 죄인이며, 소망이 없고 반드시 멸망할 자들의 무리에 속해 있었기에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을 나타내 보여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이 말씀을 힘입어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생명의 말씀(道)을 말하다 보니 《도덕경》의 ‘도라 말할 수 있는 도는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만약 이 도를 명확히 설명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결코 평범한 도가 아닐 것입니다.
저는 이 표현을 예수님께 적용하는 것이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道)은 명확하게 설명될 수 있는 도가 되었으며, 결코 평범한 도가 아닙니다. 가장 단순한 말로 표현하자면 이는 곧 ‘믿음의 도’입니다. 이 도는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며 이미 나타나신 바 되었고, 우리 또한 이 도를 믿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도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바로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지금 보면 아주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지만, 사도 요한이 사용한 언어가 다소 난해하게 느껴졌을 뿐입니다.
2장에서 말씀하는 것은 이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한다는 것, 즉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영생도 없고 소망도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그저께 우리는 한 어르신의 장례식에 다녀왔는데, 두 달 전만 해도 그분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요즘은 시신이 화장되는 과정을 직접 볼 수 없고, 유골함을 건네준 뒤 영결 대기실이라는 곳에서 기다리게 합니다. 어디선가 재 한 줌을 긁어모아 건네주는데, 이를 유골 인수라고 부릅니다. 한 줌의 재가 되고 나면 아무런 소망도 남지 않습니다. 과거의 모든 사랑과 미움도 전부 재가 되어 한 줄기 연기로 사라져 버립니다. 요즘 화장터는 그 한 줄기 연기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하늘 높이 솟은 굴뚝이 있어서,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를 때마다 또 한 사람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환경보호를 강조하다 보니, 한 줌의 재가 되어도 그것이 누구의 재인지조차 알 수 없고, 연기마저 사라져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영원히 거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의 말씀을 행하며, 세상의 논리 체계와 하나님께 속한 논리 체계, 이생의 논리 체계와 영생의 논리 체계를 분명히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으로 이끄시는데, 이것을 기름부으심이라 부르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 안에 있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영원히 거하는 도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령이며, 도의 핵심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에게 트집을 잡고, 이생의 하찮은 일들을 너무 무겁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유산 다툼으로 소송을 해야 할지 묻기도 합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그 몇 장의 종이 쪼가리를 빼앗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영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지폐가 붉은색이든 초록색이든, 하나님의 눈에는 그저 노잣돈 종이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는 영생의 말씀이 있고 영원히 거할 수 있는데, 영생에 들어가지 못할 것들을 위해 다투고, 싸우고, 빼앗으려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일 전기세를 내야 하고 모레 월세를 내야 하는 것을 걱정합니다. 결국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이 당신의 마음에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면, 결코 잘못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도입니다. 서로 주먹질하고 싸워봤자 마지막에는 모두 한 줄기 연기나 한 줌의 재로 화할 뿐이며,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의 관점에서 이 땅의 인생을 내려다본다면 실로 우습게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섬겼던 한 암 환자분도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와서 트림 한번 하고 방귀 한번 뀌면 사라지는 존재와 같으니, 속된 말로 ‘숨이 멎으면 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태초부터 있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가는 이 일을 꿰뚫어 보게 하려는 것이며, 그리할 때 비로소 어떻게 서로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사랑에 대한 혼란이나 죄에 대한 혼란은 모두 우리가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들입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께 구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고, 일평생 먹고 마시고 입고 자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을 얻는다면, 무엇을 더 빼앗으려 하겠으며 빼앗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사람이 빼앗으려 하는 이유는 장래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을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가진 논리 체계에 따라 무언가를 추구하게 됩니다.
4장에 이르면 승리, 곧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이기는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는 데 이르지 못하게 하고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도록 미혹합니다. 사람은 왜 우상을 숭배할까요? 어떤 사람은 제법 큰 기업을 운영하면서 회사 로비에 우상을 세워두었습니다. 사장은 직원들을 데리고 우상 앞에 엎드려 기업이 계속 운영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지만, 빌고 빌어도 결국 기업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는 이유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며, 그 욕구는 세상에 속한 것이라 장차 죽을 날이 올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살아가다 보니, 먹고사는 문제를 위해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영생의 말씀,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을 가졌다면 어찌 제대로 살지 못하겠습니까?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은 내어주는 도이며, 끊임없이 베풀어 주는 도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족한 사람은 이처럼 끊임없이 내어주는 사람이고, 가장 넘쳐나는 사람은 자기 안으로 끌어당기며 남에게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사람 안에 있는 논리 체계에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품는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어떤 이는 다 내어주면 살 수 없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다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이며, 하나님께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은 곧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를 승리하게 하는 것은 우리 안의 믿음이며,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 영원히 거하는 길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따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생명의 말씀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며, 우리를 이 도에서 벗어나도록 유혹하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이기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믿지 않고 천국과 지옥을 의심하며, 여전히 눈앞의 금과 은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큰일입니다. 이제 5장에 이르러, 우리를 승리하게 하는 것은 우리 안의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승리하는 것, 서로 사랑하는 도를 지키는 것, 그리고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것이 얼마나 어렵냐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한일서》 5:1-3)
사실 하나님의 계명은 지키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고 생각하며, 심지어 선악을 분별하지 않는 것조차 몹시 힘들어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습니다. “참으로 어리석군요.” 여러분도 저를 따라 이 말을 배워보십시오. 제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무엇이 손해이고 무엇이 유익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일단 지키고 나면 모두 유익을 얻게 되는데,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일을 행하는 것이 어찌 그리 힘들단 말입니까?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일을 믿지 못하니, 이것은 지키기 어렵고 쉬운 문제가 아니라 믿느냐 믿지 않느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사람에게 유익하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더 이상 다른 사람의 권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유익을 얻기 때문에 스스로 힘써 지키게 되며, 이생의 유익뿐만 아니라 영생의 유익까지 얻게 됩니다. 이토록 좋은 일인데, 다른 사람이 끌어당기고 밀어붙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굳게 지키는 핵심은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부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복잡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는 영생의 도를 ‘믿음’과 ‘불신’이라는 두 가지 문제로 귀결시킵니다. 만약 이것이 여러분에게 유익을 주는 일임을 믿는다면 문제는 쉽게 해결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면, 남의 것을 빼앗고 이득을 취해야만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으면 지키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리 쉽게 속을까요?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것이 기회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쉽게 사기를 당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상황이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하며 끊임없이 요동치는데, 이는 어리석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얼마나 풍성한 영광과 은혜가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이미 겪을 만큼 손해를 보고 고통을 당했으면서도 왜 여전히 세상을 사랑합니까?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도는 지키기 어렵지 않으며, 실상은 엄청난 유익을 얻는 길입니다.
제가 기꺼이 내어주는 삶을 사는 이유는 베푸는 것이 참으로 남는 장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베푸는 사람이 얼마나 바보 같냐고 말하지만, 사실은 완전히 거꾸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섬김은 희생이 아니라 얻는 것이며, 사역은 희생이 아니라 얻는 것이고, 내어주는 것 또한 희생이 아니라 얻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자신의 생각이 제 생각과 정반대인지 묻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지 한번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그런 사람들을 설득하기가 참으로 어렵게 느껴져, 제 얼굴을 한번 보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저는 꽤나 영리하게 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결코 여러분을 속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영리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얼굴에도 영리함이 묻어납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제가 바보로 보이지 않는데, 제가 어찌 그들이 생각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하겠습니까? 사실 제가 행하는 모든 일은 제 스스로 다 검증을 마친 것이며, 실로 큰 유익을 얻는 복된 일이지만, 단지 그들이 믿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생의 도,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은 지키기 어려운 것이 아니며, 승리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고, 서로 사랑하는 것 역시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제가 수많은 사람들을 섬기면서 매번 속으로는 ‘참으로 어리석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입으로는 표현을 순화하고 포장하여 말하지만, 그 본뜻은 여전히 같습니다.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은 이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이 얼마나 좋은지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세상에 견줄 데가 없으며 수많은 문제들이 단번에 해결됩니다. 우리는 생명의 말씀을 통해 의료 문제를 해결했고, 평생 병원비 걱정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생명의 도를 얻는 대신 ‘병드는 도’를 얻습니다. 여러분이 얻은 것이 병드는 도이고 제가 얻은 것이 생명의 도라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결코 병드는 도로 가지 마십시오. 우리는 생명의 길을 가고 있으며, 이로 인해 보물 항아리를 얻은 것처럼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승리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다
질병을 이기려면 병드는 도에서 생명의 도로 바꾸어야 하는데, 이 말은 듣기만 해도 참으로 좋습니다. 본래 우리에게 질병이 그토록 많았던 이유는 병드는 길을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승리하지 못하면 귀신에게 짓밟혀 피투성이가 되고 맙니다. 왜 굳이 그런 지경까지 가야 합니까? 믿음의 방향이 잘못되어 병드는 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승리하려면 반드시 이 생명의 도를 믿어야 합니다. 믿기지 않는다면 직접 시험해 보고 나서 저와 함께 논의해 보십시오. 저는 이 실험을 마친 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깨달았습니다.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으며, 수많은 귀신들을 쫓아낸 것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한 것이었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실로 놀라운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알고 보면 영원 속에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을 걷게 하는 하나의 생명의 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의 길을 걸어가셨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 아래 나셨고,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물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기에, 세례 요한이 그분께 세례를 베풀 때 우리에게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본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회개할 필요가 없으셨지만,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와 같이 회개하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물의 증언’, 곧 회개의 증언이라고 합니다.
그다음은 믿음의 순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육신을 죽음에 내어주시고, 피 흘려 희생하시며, 자신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어야 할 바입니다. 물의 증언과 피의 증언을 다시 말하자면, 물의 증언에서 물은 회개요, 피의 증언에서 피는 대가를 치르는 것, 곧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바쳐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성령인데,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한량없이 충만히 임하셨고, 그 후 예수님은 권능을 받아 사역의 길을 시작하셨으며, 표적과 기사가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충만히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물과 피와 성령이라 부르며, 곧 ‘증언’이라고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성령께서는 반드시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며, 성령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 말씀마다 능력이 있습니다. 이제 성경 구절들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사도 요한의 표현력에 저도 깊이 탄복하게 됩니다. 물, 피, 성령이라는 말은 언뜻 들으면 이단 분파의 구호처럼 꽤나 무섭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물은 회개이고, 피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며, 성령은 표적을 행하는 권능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설명해 준다면 참으로 단순해집니다. 제가 이 구절들을 명쾌하게 풀어드렸으니, 저 역시 스스로 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므로 승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결코 회개하지 않으니 물의 증언이 없는 것이고, 결코 대가를 치르지 않으니 피의 증언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조차 자신의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셨는데, 여러분이 자신의 육신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 아니며,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붙잡히신 후 사람들에게 구타당하고 발길질을 당하시면서도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었다면 아마 그런 억울함을 참지 못했을 텐데, 그렇다면 어찌 예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거울을 한번 비추어 보십시오.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다면 거울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자신 안에 예수님의 형상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형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 역시 이 길을 걸어왔으며, 걸어갈수록 더욱 예수님을 닮기를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울을 돌아볼 때마다 제 자신이 너무나 추하고 더러움을 깨닫게 되며, 오직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저를 비추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회개와 대가 지불을 통해 육신의 정욕과 탐심을 죽이고, 끊임없이 성령을 힘입어 권능을 얻어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여 나간다면 모든 것이 참으로 단순해집니다. 그러므로 승리란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실로 놀랍지 않습니까?
믿음의 증언
믿음의 증언이란 곧 회개의 증언이며, 대가를 치르고자 하는 마음과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수많은 표적을 행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16:17-18)
그러므로 회개와 대가 지불, 그리고 능력에 이르기까지 이는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증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굳게 지켜야 할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도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그리할 때 표적과 기사가 반드시 여러분을 따를 것이며,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 또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할 수 있게 되며,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행하고 나면 영생이 있음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증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생이다
여러분, 이제 다시 《요한일서》 5장을 읽어보시면 훨씬 쉬워졌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사도 요한이 쓴 글이 참으로 난해하다고 여겨졌지만, 지금 보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이 증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생입니다. 우리는 한 번도 영생을 본 적이 없고 천국에 가본 적도 없으며, 지옥에는 더더욱 가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저는 천국에 한번 다녀오고 싶기도 하지만, 문을 잘못 찾아 들어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까 봐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생을 알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제가 굳게 지켜야 할 하나의 논리가 있습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수많은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문제를 해결하며, 수많은 사람을 자유케 했기에, 영생은 제가 보기에 지극히 당연한 실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그곳으로 데려가지 않으셨을지라도, 저는 영적 세계가 실재함을 확신합니다. 수많은 귀신을 쫓아내고 이처럼 많은 표적을 행한 것은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바요, 이 증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증거입니다. 제가 이러한 표적들을 행하고 회개와 대가 지불을 경험한 후, 내면에는 더 많은 능력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반복되고 순환하며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점점 더 빠르게 달려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한 계단씩 위로 올라가 마침내 이 세상에서의 사역의 길을 다 달리고 나면, 저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제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저는 하루라도 빨리 제 하나님을 뵙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님이 사는 게 지겨워졌느냐고 묻기도 하는데, 사실 저는 진작에 세상 사는 것에 미련을 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영생 가운데 살아가고 있으며, 영생의 영광스러운 소망이 제 안에 있기에 하나님의 기이한 역사가 더욱 풍성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이 한 말이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가 영생의 논리 체계 안으로 들어가면 증언으로 가득 차게 되며, 그 안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계실 것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요한일서》 5:12-14)
어찌하여 우리 안에 영생이 있음을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데 어찌 영생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온전히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요한일서》 5:15)
어떤 이는 구하는 것마다 다 얻는다는 것이 정말이냐고 묻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러자 그는 500만 위안을 얻게 해달라고 구하기에, 저는 그의 믿음이 너무 작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타이저우나 옌타이 최고의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구했는데, 그렇게 구하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일이며 결국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요한일서》 5:21)
왜 우상을 멀리해야 할까요? 우상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것들만을 구하도록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태복음》 6:9-11)
500만 위안을 얻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하루에 500만 위안어치를 다 먹을 수 있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500만 위안어치의 음식을 사준다면, 하루 만에 다 먹으려다 사람이 죽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 증언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이며, 딴것을 위함이 아니라 영생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소망인지를 알게 하려 하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찬물을 한 바가지 더 끼얹어야겠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구하는 모든 것은 결국 한 줌의 유골에 불과하며, 아무런 소망을 둘 것이 못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만약 세상의 것들을 구한다면, 그것은 집에서 위조지폐를 찍어내는 것과 같아서 조만간 붙잡히고 말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구할 것은 오직 영원한 영광뿐입니다. 그러므로 승리란 이처럼 단순한 것이며, 오직 믿음에 달린 것입니다. 이 믿음은 증언을 낳고, 이 증언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 안에 얼마나 풍성한 영광이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범죄하지 아니한다
우리 안에는 범죄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로 향한 부분입니다. 또한 여전히 죄를 짓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에 속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아직 얻지 못한 땅을 정복하여, 우리의 온 존재가 안팎으로 온전히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되고 더 이상 육에 속한 사람으로 머물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의 처한 바 된 것이며 (《요한일서》 5:18-19)
온 세상은 악한 자의 지배 아래 놓여 있으므로,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사랑하게 되면 악한 자의 지배를 받게 되어 악한 자의 종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면, 곧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품은 그 부분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육신의 정욕과 탐심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회개해야 합니다. 대가를 치르고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여야 하며,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이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에서 끊임없이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세례를 받아야 할까요? 사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장사되는 것이며, 물에서 올라올 때에는 부활의 생명의 형상을 덧입기 위함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전히 악한 자에게 끊임없이 해를 당하고 있다면, 그것이 치루(항문 질환)이든 밥을 먹지 못하는 증상이든 모두 라오마(악한 영)로 인한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이 모든 문제들을 요약할 수 있습니다. 누가 당신더러 라오마의 집에 들어가라고 했습니까? 라오마의 종이 되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안목으로 살아가는 이 작은 일들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보좌에 서서 이 세상과 세상의 모든 일들을 내려다볼 수 있습니까? 제가 이 말을 얼마나 많이 반복했는지 모르지만, 조금만 참고 다시 들어보십시오. 대변을 보지 못하고, 소변을 보지 못하며, 밥을 먹지 못하거나 밥을 먹어도 위가 꽉 막힌 듯 답답한 증상, 또 어떤 사람은 대변을 보고 싶지 않은데 변이 새어 나오고, 소변을 보고 싶지 않은데 뇨가 새어 나오는 요실금 증상, 그 외에도 하혈이나 치루 같은 것들은 모두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질병들입니다. 비록 치통이 중병은 아니라 해도 통증이 시작되면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인데, 세상살이가 얼마나 힘겹습니까! 우리 형제자매들은 우리에게 이러한 지혜가 부족하며, 이러한 실체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에서 지혜로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요한일서》 5:20)
우리는 처음 믿음에서 출발하여 지혜에 이르렀으며, 이 길 또한 끊임없는 순환을 이루며 계속해서 걸어가는 길입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고 온갖 질병에 걸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지혜와 지식이 없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하나님의 백성이 무지함으로 멸망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을 걷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설령 믿음의 길을 걸었다 해도 지혜에까지 이르지 못했다면 실로 큰 곤욕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걷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승리란 참으로 단순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믿지 않을 때에는 승리하지 못하고, 믿을 때에는 승리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세상을 이기는 지극히 단순한 원리입니다. 사람이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누구나 승리하니, 이는 하나님의 본래 뜻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니, 믿음이 있을 때 증언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곧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처럼 우리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소망을 품고 이 땅의 길을 완주하셨는지 바라보며 우리도 동일한 소망을 품고 이 땅의 길을 완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자신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듯이, 우리 또한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셨듯이 우리도 표적을 행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점점 더 닮아가야 하니, 이것이 곧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증언이 따르고, 증언이 있으면 영생을 알게 되며, 영생의 소망이 있으면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보배로운지 깨닫게 되니, 모든 것이 단번에 단순해집니다. 우리는 드디어 《요한일서》 성경공부를 마쳤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훗날 사도 요한을 뵙게 된다면 꼭 물어보고 싶습니다. “어찌하여 말씀을 이토록 에둘러 어렵게 쓰셨습니까?”
하지만 만약 사도 요한이 “그것이 바로 자네에게 남겨준 숙제가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한다면 저는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글을 다 썼으니, 남은 일은 저에게 맡겨진 몫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 사명을 꽤나 잘 감당한 셈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람들을 자주 ‘자녀들아(어린아이들아)’라고 불렀는데, 제가 바로 그 어린아이였습니다. “어린아이가 참 잘 해냈구나!”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승리란 참으로 단순한 일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핵심은 여러분의 내면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