命定神学
推荐评论
命定神学 关闭
【설교】- 예수님은 왜 귀신을 쫓아내셨는가

2023-09-17 7,107 胜过撒但系列 为什么赶鬼 神的话 神的应许 神的军队 效法耶稣 神的旨意

《答疑解惑》

1. 서론

  1. 오늘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포로 된 자가 해방되고, 눌린 자가 자유를 얻는 복음입니다. 오직 귀신을 쫓아내야만 사람을 풀어줄 수 있으며, 귀신을 쫓아내지 않으면 사람은 해방될 수 없습니다.
  2.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번영과 관련이 있고, 믿음의 훈련과 관련이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2. 본문 말씀

곧 그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예수께 이르되 “떠나가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누가복음 13:31-33)

3. 기도

4. 본문 배경

  1. 예수님께는 아름다운 소망이 있었습니다. “오늘과 내일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신” 것이 하나의 씨앗이 되어 장차 거목으로 자라나, 훗날 수많은 사람이 귀신을 쫓아내는 자가 될 것입니다.
  2.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좁은 문입니다. 귀신을 쫓는 영적 전쟁에는 대가가 따르고 매우 힘들기 때문에, 이 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단번에 걸러지게 됩니다.

5.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포로 된 자를 해방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1. 주위를 둘러보면 귀신을 쫓아내야 할 필요성이 매우 큽니다. 귀신 쫓는 일은 작은 문제부터 훈련을 시작하여 점차 그 수준을 높여가야 합니다.
  2. 포로 된 자를 해방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6.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믿음의 훈련이다

  1. 귀신을 쫓아내는 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귀신을 쫓아낼 수 없습니다. 믿음 안에서 사람은 이미 치유를 받았습니다!
  2.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믿음의 훈련이며, 참된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7.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인식 수준을 점검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아야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군대 기준에 따라 교회를 세워야 함을 알게 됩니다!

8. 귀신을 쫓아내야만 하나님의 약속을 취할 수 있다

  1.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믿음의 훈련이며, 귀신을 쫓아내는 믿음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취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당신을 번성하게 하시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며 번영을 누리는 삶의 핵심입니다.

9.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본보기이다

  1.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보기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귀신을 쫓아내고 수많은 사람을 자유케 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그분의 형상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핵심 단어

  1. 귀신 쫓아냄(축사)
  2. 하나님의 말씀
  3. 하나님의 군대
  4. 하나님의 약속
  5. 예수님을 본받음
  6. 하나님의 뜻
  7. 믿음의 훈련
  8. 포로 된 자의 해방
  9. 눌린 자의 자유

1.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여러분과 나눌 주제는 물음표가 붙어 있는 제목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왜 귀신을 쫓아내셨는가?’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무언가를 할 때 많은 문제를 깊이 파고들어 연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예수님을 연구하면서도 저는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왜 귀신을 쫓아내셨을까?” 지난주일 설교했던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라》의 본문 구절을 오늘도 다시 가져와 이어가려 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제목은 《예수님은 왜 귀신을 쫓아내셨는가?》입니다. 사실 지난주에 어떤 분들은 속으로 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왜 귀신을 쫓아내셨을까?” 그냥 보리수나무 아래 방석을 깔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손을 모으고, 삭발한 채 경전이나 읊조리면 얼마나 편합니까? 이리저리 다니며 좌충우돌 귀신을 쫓아내니 얼마나 시끄럽습니까? 지금은 과학이 이렇게 발달했는데 귀신을 쫓아낸다니 다들 이상하게 여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귀신을 쫓아내셨을까요? 예수님은 왜 석가모니처럼 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노자처럼 하지 않으셨을까요? 태상노군처럼 화로를 차려놓고 단약을 만들면 얼마나 좋습니까? 약을 만들어 팔면 돈도 벌고, 먹으면 불로장생한다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왜 귀신을 쫓아내셔야만 했을까요? 이 문제는 정말 물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제가 던지는 질문이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제가 주님을 처음 믿기 시작했을 때, 아주 별난 질문들을 던지곤 했습니다. 나중에 스스로 답을 찾아냈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대답해주지 못했습니다.

훗날 화인 사명신학을 정립하게 된 것도 제가 주님을 처음 믿던 시절에 던졌던 그 엉뚱한 질문들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제가 목사님들에게 묻기만 하면 목사님들은 “뭘 자꾸 묻느냐, 묻지 마라”라고만 했습니다. 본인들이 대답하지 못한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예수님은 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까?”라고 물으면 귀신을 쫓아내지 않는 목사님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화를 냈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수업을 들을 때도 제가 손을 들자 교수님이 “뭘 묻고 싶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제가 “교수님, 이 사안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보십니까?”라고 묻자 교수님은 “내가 예수도 아닌데 예수님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어떻게 압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부터는 오지 말아야겠다. 예수님이 어떻게 보시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여기서 뭘 듣고 있겠는가? 내가 낭비할 시간이 어디 있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일에 대해 많은 사람이 잘 알지 못합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명명백백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왜 귀신을 쫓아내셨을까요? 제가 주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면, 그냥 입김 한 번 훅 부셔서 그 땅의 사람들을 다 쓸어버리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파초선 부채를 들고 슬리퍼에 반바지 차림으로 열쇠 꾸러미를 짤랑거리며 문 열고 들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저는 “하나님, 왜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벌이십니까? 모세와 여호수아가 군사를 이끌고 전쟁을 치러야만 약속의 땅을 얻을 수 있게 하시고, 광야에 가서는 장막을 짓게 하시고, 율법을 반포하고 십계명을 주시며, 그러고도 전쟁하러 들어가기 싫다고 하니 그들을 다 멸망시켜 광야에서 죽게 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좋은 아이디어 하나 드릴 테니 이렇게 하지 마시면 안 됩니까? 그냥 부채질이나 하면서 스마트폰으로 틱톡 보며 유유히 걸어 들어가서 문 딱 열고 ‘여긴 내 땅이다’ 하면 되지 않습니까? 왜 전쟁을 치러야 합니까? 전쟁하면 사람 죽고 총알에는 눈도 없는데,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제게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목사님께 물어봤더니 목사님은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도 대답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대답해 드리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을 치러 승리하지 않고는 약속의 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화인 사명신학의 핵심 정수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왜 약속을 얻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갑니까? 귀신을 쫓아내라고 하면 “저는 할 줄 모릅니다”라고 하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라고 하면 “저는 안 갑니다, 거기엔 거인들이 득실거립니다”라고 합니다.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제가 젊은 시절 던졌던 이 질문에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아 제가 직접 연구했고, 결국 그 답을 다 찾아냈습니다. 죽어서 천국 가는 문제도 연구했지만 아직 완전히 다 풀지는 못했습니다. 훗날 사람들이 제게 몇 명이나 천국에 갈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함부로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누가복음 13:31-33)

저는 예수님께 아이디어 내는 것을 좋아하지만, 가끔은 좀 엉뚱한 생각도 듭니다. “예수님, 왜 하필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을 하십니까? 오늘은 성경공부 하고 내일은 설교하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귀신 쫓고 병 고치는 건 너무 기괴해 보여서 사람들이 들으면 이단이나 사이비교 아니냐고 오해하지 않겠습니까?” 귀신 쫓고 병 고친다는 말이 무섭게 들리지 않습니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기겁할 일입니다. 저는 “예수님, 성경공부가 싫으시다면 기도하는 것은 어떻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기도도 좋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소그룹을 인도하며 제자 훈련을 시키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병 고치고 귀신 쫓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저 늙은 여우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과 내일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오늘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않으면 사람이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귀신을 쫓아내어 사람을 자유케 하는 것은 결코 은사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닮아가는가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면서 어째서 석가모니의 얼굴을 닮아갑니까? 아무리 봐도 천국에 갈 것 같지 않고 서천 극락으로 갈 것만 같습니다. 귀신을 쫓는 것은 누구를 닮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떤 분들은 듣기 거북할지 모르지만, 인생의 수많은 문제는 결국 귀신을 쫓아내는 문제입니다. 중국인들은 귀신 쫓는 이야기만 나오면 머릿속에 온갖 상상의 나래를 폅니다. 귀신을 쫓아 사람을 자유케 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이지, 문제를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떤 이가 석가모니를 찾아와 자식이 죽어 너무 고통스럽다고 호소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성안에 가서 사람이 죽지 않은 집 다섯 군데를 찾아보아라”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돌아와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한 집도 없었습니다”라고 하자, 석가모니는 “그러니 네 집에 사람이 죽은 것도 지극히 정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반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자식이 죽었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가셔서 그 아이를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대단하십니까!

저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는 늘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제가 좀 특이한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화인 사명신학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우울증 환자 앞에 서 계신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분명 그를 자유케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거울을 보며 제 모습을 비춰보았습니다. 속으로 ‘내가 할 수 있을까? 정말 안 될 것 같다. 내겐 그런 은사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이 벅찬 일을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한 끝에 배우면서 실행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닮아가겠다!’

훗날 어떤 사람들은 저를 비웃으며 “너 같은 자가 감히 예수님을 닮겠다고?”라고 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닮는 게 어렵다면 바울이라도 닮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또 “너 같은 자가 바울을 닮겠다고?”라고 했습니다. 저는 “왜요, 제가 바울을 닮으면 안 됩니까?”라며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바울도 결국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말이 안 통하니 관두자”라며 포기했습니다. 그들은 포기했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울증 환자가 오면 오는 족족 치유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주님을 닮게 하시는 것이 그분의 뜻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모하고 구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제게 주십니다. 제 논리가 얼마나 명쾌합니까? 예수님이 귀신을 쫓으셨으니 나도 쫓아냅니다. 어떤 이들은 묻습니다. “귀신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쫓아냅니다”라고 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결국 수많은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러므로 귀신을 쫓는 것은 누구를 닮느냐의 문제이지 은사의 문제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이를 잘못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저 역시 오늘과 내일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면 제삼일에는 온전해질 것입니다. 온전해졌습니까? 온전해졌습니다! 앞에 아무리 많은 고난과 장애물이 가로막혀 있어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에 반대할 사람은 없습니다. 가는 길에 수많은 반대가 있을지라도, 어느 교파든 간에 “예수님을 닮겠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귀신이란 존재는 참 묘합니다. 손을 얹고 기도해도 쉽게 나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호락호락 나갈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요 녀석 봐라!” 하면 귀신도 말을 걸어옵니다.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는 것입니다. 귀신이 저를 깔보면 저도 귀신을 비웃어줍니다. 귀신이 “네가 한 번 손 얹었다고 내가 나갈 줄 아냐?”라고 하면, 저는 “상관없다, 난 시간이 넘쳐나니 열 번이라도 손을 얹겠다”라고 합니다. 귀신이 “열 번 얹어도 안 나간다. 절대 안 나갈 거다. 열 번 얹는다고 네가 예수처럼 될 줄 아냐? 예수는 한 번만 손 얹어도 끝났지만 넌 아니다”라고 비아냥거립니다. 그러면 저는 “상관없다. 결국엔 내 한 번의 안수로 네가 쫓겨나게 될 것이다. 백 번이고 만 번이고 얹겠다. 손 얹는 자리가 틀렸다면 제대로 된 자리를 찾아서 다시 얹으면 그만이다”라고 응수합니다. 저는 귀신을 쫓아낸 간증이 무수히 많습니다. 다리를 절면 귀신을 쫓고, 발목을 삐면 귀신을 쫓고, 골절이 되어도 귀신을 쫓고, 두통이 와도 귀신을 쫓고, 눈이 안 보여도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중독될 지경입니다. 귀신 하나를 쫓아내고 돌아설 때면 산해진미를 배불리 먹은 것처럼 속이 후련합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비명을 지르며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지하철역에서 걸어오는데 도포를 입고 관우처럼 붉은 피부를 가진 도사가 마주 오더랍니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 사람에게서 강력한 사악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더니 ‘탁’ 하고 자신을 2~3미터 튕겨 나가 자빠지게 했고, 그 후로 다리를 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의 다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이런 다리 부상은 10분, 20분, 길어야 한 시간 안팎이면 끝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 시간을 끌었습니다. 저도 땀범벅이 되고 그 사람도 땀범벅이 되었는데 낫지를 않았습니다. 계산해보니 안수를 대략 7,200번쯤 한 상태였습니다. 상관없었습니다. 2,800번만 더 하면 만 번을 채우니까요.

‘참 기괴한 일이네, 이런 놈은 처음 다뤄보는데’ 싶었습니다. 저는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이 귀신 녀석, 왜 이렇게 질기지? 제법 끈질기게 버티는구나.” 그렇게 묵상하고 있는데 한 줄기 음성이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그 사람의 족삼리(足三里) 혈을 눌러라.” 제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족삼리 혈을 누르기 좋아하는 것은 그때 생긴 습관 때문입니다. 제 손가락 힘이 꽤 센 편이라 혈자리를 찌르듯 그의 족삼리를 꾹 누르며 선포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통증은 물러갈지어다!” 그러자 굳어 있던 다리가 풀리며 깨끗이 나았습니다. 당시 저는 경악했습니다. “아, 귀신이 여기에 숨어 있었구나. 이 녀석, 드디어 잡았다!”

여러분께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걸어온 이 모든 과정은 하나의 과학적 연구와 같습니다. 무엇을 연구한 것입니까? 어떻게 귀신을 쫓아낼 것인가를 연구한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 세계에서 승리하는 법이며, 영적 세계의 법칙이 바로 그러합니다. 수많은 사례를 연구하고 또 연구했습니다. 요즘도 저는 계속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연구할까요? 학습 장애를 연구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어떻게 우등생으로 만들 것인가? 이런 귀신을 쫓아내겠다는 결단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자 훈련을 시키고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주축이 되었지만, 훈련을 마친 뒤에도 정작 무엇을 훈련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은 다 잘하면서 귀신 쫓는 것 하나만 못합니다.

교회가 귀신 쫓는 일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성도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장 중요한 핵심을 없애버렸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귀신 쫓는 목사’라는 말을 들으면 무섭고 거북하게 여기지만, 저는 아주 듣기 좋습니다. 능력이 나타나야 진짜 아닙니까? 교회가 왜 귀신을 쫓아내는 가장 유용한 사역을 없애버렸을까요?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끔 말을 직설적으로 하지만, 초등학교 기초가 안 되어 교과서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면 초등학교를 다시 다녀야 합니다. 귀신을 쫓는 것은 약속을 얻는 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번영하는 것과 밀접하며, 포로 된 자가 해방되고 눌린 자가 자유를 얻는 일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훈련과 직결되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아는 것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면 영적 세계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령한 말로 신령한 일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를 읽어보면 분명히 이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가 하는 말은 영적인 언어로 영적인 일을 설명하는 것이지, 영적인 언어로 정치경제학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영적인 말씀을 세상적인 말로 변질시키고 오직 세상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으니, 어떻게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보시고 “안 되겠다, 너를 데려가야겠다” 하시며 그들을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계속해서 읽어야 합니다. 우리에겐 이론적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이론과 고전적 출처가 없는 말은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반드시 성경 말씀에 근거해야 하며, 우리는 석가모니가 아닌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이곳에 와서 석가모니를 배우려 한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2. 성경 본문

곧 그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예수께 이르되 떠나가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누가복음 13:31-33)

3. 기도

하나님! 오늘 우리 가운데 귀신을 쫓아내는 큰 용사들을 일으켜 주옵소서. 하나님! 오늘 우리 가운데 강한 군대를 세워 주옵소서. 하나님! 주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기를 원하며, 주님처럼 오늘과 내일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 완전하여지는 자들로 이 세대 가운데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옵소서. 하나님! 주님만이 우리의 꿈이시며, 우리의 본보기이시며,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이십니다. 하나님!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닮기 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우리는 주님을 닮기 원합니다! 하나님! 설령 목숨을 바친다 해도 아까워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포로 된 자가 해방되고 눌린 자가 자유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주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충만케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4. 본문 배경

이 구절은 설교를 두 번뿐만 아니라 세 번도 전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번 본문 배경의 주제는 지난번과 다르게 ‘예수님은 왜 귀신을 쫓아내셨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 가셨을 때, 십팔 년 동안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보셨습니다. 허리가 굽고 허리가 아픈 것은 모두 귀신이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 어머니의 허리는 정말 기적 그 자체입니다. 어머니의 요추에는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덩이가 파여 있는데, 이는 그 마디의 뼈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음을 뜻합니다. 뼈가 반 토막이 나 구덩이가 파였는데 어떻게 걸어 다닐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제 어머니는 정상적으로 걸어 다니십니다. 왜일까요? 귀신을 쫓아내는 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십팔 년 동안 귀신에게 매여 허리가 굽어 전혀 펴지 못했습니다. 지난 18년간 안식일마다 회당에 나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을 불렀을 텐데, 왜 해방되지 못했을까요? 왜 예수님이 오셔야만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을까요? 18년 동안 귀신에게 묶여 있던 이 여인은 이번 주에 예수님을 만나 복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를 불러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놓였습니까? 아직은 아니었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제가 여러분에게 “당신의 병에서 놓였습니다”라고 선포할 때, 여러분의 믿음이 일어나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두 손을 얹으시자 여자는 즉시 허리를 폈습니다. 왜입니까? 귀신이 허리에 붙어 있어 허리를 펴지 못했던 것인데, 귀신이 떠나가니 허리가 펴지고 아무런 이상이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누가복음 13:11-13)

묻겠습니다. 그전의 회당은 무엇을 하던 곳이었습니까?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회당이었고,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있던 교회는 예수님의 임재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이제 교회를 세우면서 저는 오직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교회를 세우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사람들을 우르르 모아놓고 녹초가 되도록 만두나 빚어 먹이는 짓을 제가 왜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처럼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데도 기뻐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그들이 기뻐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제가 신경 쓰는 것은 오직 하나,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일 후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누가복음 13:18-19)

예수님이 바로 이 겨자씨이십니다. 주님은 표적을 행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이 겨자씨 한 알이 자라나 큰 나무가 됩니다. 그렇다면 그 겨자씨의 유전자와 큰 나무의 유전자는 동일한 유전자입니다. 겨자씨에서 자라난 것은 겨자나무이지 포도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수박을 심으면 수박이 나는 법입니다. 여주를 심어놓고 “왜 수박이 열리지 않느냐?”라고 묻는다면 바보 같은 짓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씨앗을 심으셨고, 오늘 우리 모두가 귀신을 쫓아내는 자들이 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고 번영을 누리길 원한다면 귀신을 쫓아내는 자가 되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을 취하기 원한다면 귀신을 쫓아내는 자가 되십시오. 사업이 잘되기를 원하십니까? 꿈에서라도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늘 찌든 모습으로 하는 일마다 실패하며 지금까지 겨우 버텨왔다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 뿐입니다.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게으름의 귀신을 쫓아내고, 술 귀신을 쫓아내고, 담배 귀신을 쫓아내고, 도박 귀신을 쫓아내고, 음란 귀신을 쫓아내십시오. 귀신을 쫓아내지 않으면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수많은 사람이 귀신을 쫓아낼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는 것은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의 유전자를 가졌기 때문이며, 당연히 예수님을 닮고 겨자나무처럼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또 하나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누가복음 13:20-21)

귀신을 쫓는 누룩을 밀가루 반죽에 넣어 반죽 전체로 퍼져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유전자와 누룩이 온 세상에 퍼져나가게 하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셨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는 “오늘과 내일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사역이 씨앗처럼 심겨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 우리 모두가 귀신을 쫓아내는 자가 되기를 바라시는 아름다운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좁은 문이 되었습니다. 왜 좁은 문일까요? 오늘날 보십시오, 이 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우리 몇 사람에 불과합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교회가 많습니까, 쫓아내지 않는 교회가 많습니까? 귀신을 쫓아내는 교회는 극히 드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며, 힘써 들어가야 합니다. 왜 힘써 들어가야 합니까? 귀신과 싸우는 영적 전쟁에는 대가가 따르고 매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벌집을 쑤시는 것과 같습니다. 저 역시 얼마나 많은 벌집을 쑤셔왔습니까? 어떤 목회자가 제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 길에서 이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왜 그렇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제가 벌집을 너무 많이 쑤셔놓아서 이전으로 돌아가면 벌 떼에 쏘여 죽을 것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수많은 귀신을 대적해놓고 어디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왜 좁은 문이라고 합니까? 귀신을 쫓아내는 이 일 하나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단번에 걸러지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을 잘못 읽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이 “귀신을 쫓아냈는데도 예수님이 모른다고 하셨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귀신을 안 쫓아내면 예수님이 알아주십니까?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은 “귀신을 쫓아내도 내가 너를 모를 수 있는데, 귀신조차 쫓아내지 않는다면 아예 문 근처에도 오지 못한 자들이다”라는 뜻입니다. 첫 번째 문조차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이 본문이 말하는 좁은 문은 바로 귀신을 쫓아내는 좁은 문입니다. 어느 수준까지 쫓아내야 합니까?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을 정도로 싸워야 합니다. 이 영적 전쟁에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생명을 내어놓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영원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과 내일 귀신을 쫓아내면 제삼일에 온전하여질 것이며, 오늘, 내일, 모레 결코 물러서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아시겠습니까? 이 영적인 길에서 목숨을 바치지 않고 어찌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후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이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러 군현으로 다녀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누가복음 13:22-28)

그 바깥이 어떤 곳인지는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오직 문 안으로 들어가기만을 원합니다. 제 생각이 옳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 ‘바깥’이 어떤 곳인지 연구하며 “바깥도 천국 안쪽에 있으니 괜찮다. 예수님이 나를 몰라도 천국에만 있으면 된다”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바깥만 연구하는 자는 쓸모없는 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포로 된 자를 해방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복음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해방하고 누구를 자유케 했습니까? 아직 아무도 해방하지 못했다면 주님 앞에 어떻게 서겠습니까? 바깥에 쫓겨나지 않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앞서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의 비유처럼, 열매 없는 나무는 찍어버려 땔감으로나 쓰는 쓸모없는 존재가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진실로 회개해야 합니다. 아직 귀신을 쫓아내 본 적이 없다면 돌이켜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안이 좋습니다.

5.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포로 된 자를 해방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사탄에게 포로가 된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여인이 허리를 펴지 못하고 굽은 채 살아가는 것을 사람들은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의사도 못 고치는데 어쩌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귀신의 역사였습니다. 의사는 병은 다룰 수 있어도 귀신은 다루지 못하며, 사실 의사가 고칠 수 있는 병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포로 된 자가 해방되고 눌린 자가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오늘날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귀신을 쫓아내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만 말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머리가 아플 때 “목사님, 두통이 있어요” 하는 것은 단순한 질병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복잡한 문제는 어떻습니까? 훨씬 복잡한 문제들이 많습니다. 일만 생기면 이성을 잃고 날뛰거나, 무슨 일만 있으면 입에서 귀신의 소리를 내뱉는 사람들, 이들이 다 묶여 있는 자들이 아닙니까? 모두 해방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반드시 온전한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을 자꾸 행하고는 돌아서서 후회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중에 후회의 쓴잔을 마셔본 적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일을 저질러놓고 “내가 왜 그랬을까?” 하며 자책하지만, 귀신은 이런 무지한 자들을 괴롭히고 짓밟습니다. 그러므로 포로 된 자를 해방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것만이 참된 복음입니다. 다른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경전을 읊는 것으로는 안 되며, 오직 귀신을 쫓아내야만 역사가 일어납니다. 귀신을 쫓아내려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저 역시 수많은 대가를 치렀습니다. 오늘 제가 귀신을 잘 쫓아낼 수 있는 이유는 과거에 수많은 대가를 치르고 피나는 훈련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영적 실력을 극대화하여 훈련해야 합니다. 링 위에 오르면 귀신이 KO패 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훈련도 안 하고 링에 올라가면 누가 얻어터지겠습니까? 껍데기뿐인 엉터리 태극권 고수가 아마추어 격투기 선수에게 몇 방 맞고 판다처럼 멍들어 뻗어버리는 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일도 작은 훈련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감기 정도는 그냥 넘어가자”라고 합니다. 제가 묻습니다. “그럼 암에 걸릴 때까지 기다릴 셈입니까? 감기 하나도 제압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암을 제압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감기부터 시작해 훈련하십시오. 저는 허리 통증, 팔 통증, 등 통증을 치유하는 것부터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맹인이 찾아오고, 통나무처럼 퉁퉁 부어오른 다리를 가진 환자가 왔을 때는 정말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 다리를 붙잡고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좀 쉬운 문제를 주시지 왜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주십니까? 고치지 못하면 망신당하지 않겠습니까?” 속으로는 온갖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발을 구르며 그 다리를 안고 주무르며 기도했습니다. 기도로 안 되면 자극을 주며 온갖 방법을 다 썼습니다. 결국 나았습니다. 반드시 나아야만 했습니다.

6.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믿음의 훈련이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믿음의 훈련입니다. 믿음을 훈련하십시오. 귀신이 우리와 겨루는 것은 결국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귀신을 꺾을 수 없고, 오직 믿음이 있어야만 귀신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사역 초기에는 환상도 보이지 않고, 음성도 들리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퉁퉁 부은 다리를 보며 눈을 감고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절대 눈뜨지 마라. 육의 눈으로 보지 말고 영의 눈으로 보아라.’ 그래서 제 믿음 안에서 온전해진 다리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진짜 보셨습니까?” 저는 “아니요, 아무것도 안 보였습니다. 하지만 내 믿음 안에서 그 눈이 고침받았고, 다리가 나았으며, 중증 우울증이 깨끗이 치유되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사람 아닙니까? 믿음이 넘치고 뚝심이 있는 것입니다. 제 믿음 안에서 그는 이미 온전해졌습니다.

저는 귀신 쫓는 사역이 정말 좋습니다. 한번은 설교 중에 말했습니다. “남들이 비디오 게임을 할 때 나는 귀신 잡는 게임을 하고, 남들이 공포 영화를 볼 때 나는 진짜 귀신 영화를 찍는다. 나는 실전에서 칼을 휘두른다.” 이 믿음은 참으로 강력합니다. 어떤 이들이 제게 와서 묻습니다. “목사님, 다 치유되었습니까?” 의심 가득한 눈빛을 보며 저는 “아직 다 낫지 않았습니다”라고 합니다. “낫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선포하십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내가 말한 것은 미래입니다. 당신은 장차 위대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정말입니까?” “정말입니다!” 때로는 사람들의 믿음을 세워주기 위해 강하게 선포하기도 합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방금 환상을 보았는데, 당신은 장차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라고 말해줍니다. 그가 “목사님, 믿음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라고 묻습니다. 믿음으로 선포하는 것이 잘못되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믿음을 훈련하는 것 아닙니까? 아주 효과적입니다!

남들이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情)이라면, 저는 믿음에 속한 사람(信)입니다. 여러분도 감정에 휘둘리는 육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모든 과정이 믿음의 훈련이 됩니다. 예전에는 쫓아내지 못하는 귀신이 많았습니다. 치유율이 10%에 불과하여 어쩌다 한두 명이 나았을 때도 저는 “다 치유되었습니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사람들이 “거짓말 마세요, 아직 안 나았잖아요”라고 하길래 제가 비밀 하나를 알려주었습니다. “내가 다 치유되었다고 믿는 순간 10%가 20%로 오르고, 더 굳게 믿으면 20%가 40%로 뛰어오릅니다. 믿으시겠습니까?” 그러자 그들은 “그것참 대단한 도리군요”라고 했습니다.

제 믿음은 이렇게 한 걸음씩 쌓아 올린 것입니다. 입김 한 번 분다고 생겨나는 믿음은 세상에 없습니다. 귀신과 한 판 한 판 치열하게 싸우며 얻은 믿음입니다. 어떤 축사는 5년을 끈질기게 붙들었고, 5년을 해도 안 되면 10년을 붙들 각오로 임합니다. 제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이 많지만, 제 믿음 안에서는 그 모든 미정복지가 이미 내 소유가 되었습니다. 내 것이 되었습니까? 되었습니다. 믿음 안에 이미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귀신을 쫓아내는 자이며, 귀신을 쫓아내는 자는 반드시 믿음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오늘과 내일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며 치유율을 10%, 20%, 30%로 올려갑니다. 예수님은 ‘오늘, 내일, 제삼일’이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오늘, 내일, 모레, 글피’여도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확고한 믿음이 있어서 내가 죽는 날이 올지라도 내가 믿은 모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어찌 이리 지으셨나이까! 참으로 아름답게 지으셨나이다!” 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본래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오늘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저는 믿음 없는 자를 믿음 있는 자로 변화시키고, 밑바닥 인생을 역전시키는 사람입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저를 택하사 오늘날 제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게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저의 사명이요, 저의 인생입니다! 귀신을 쫓아내지 않고 어떻게 믿음을 훈련하겠습니까? 귀신을 쫓아내지 않고는 믿음을 훈련할 방법도 없고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없습니다. 제가 정신병원에 가서 축사 사역을 감당했던 것,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곳 사람들도 제가 귀신을 쫓는 사람임을 다 압니다. 사람들은 “고학력 지식인이 왜 귀신을 쫓느냐?”라고 묻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데는 깊은 과학적 탐구와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축사를 행할 것입니다. 지난 시간 동안 축적된 수많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영적 세계를 활강하는 것입니다. 귀신 쫓는 사역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7.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인식 수준을 점검하는 것이다

구호만 외치지 마십시오. 아시다시피 저는 헛된 구호 외치는 것을 싫어하고, 발을 땅에 딛고 깊이 연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 영적인 말씀으로 영적인 일을 풀어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떤 이들은 제가 하는 이야기들이 성경 말씀과 상관없어 보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파고들었기에 나오는 열매입니다. 주먹구구식으로 머리를 굴린다고 이런 역사가 나오겠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제가 교회를 세우는 방식은 무지한 자들이 세우는 방식과 다릅니다. 어떤 이들이 세운 교회가 베드로의 교회라면, 제가 세우는 교회는 바울의 교회와 같습니다. 귀신은 참으로 교활하고 강력합니다. 그것은 치열한 수 싸움과 같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알지 못하면 귀신의 궤계에 말려들고 맙니다. 오늘 여러분을 한번 시험해볼까요?

때로는 사역할 때 마음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오르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보며 염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예수님을 닮아가자.’ 육신의 생각을 억누르는 것입니다. 육신의 본능대로 행해서야 되겠습니까? 제가 짜증을 내는 순간 귀신은 “거봐라, 짜증 났지? 저 사람이 밉지?” 하며 빈틈을 파고듭니다.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닙니다. 그럴 때면 이를 악물고 발을 구르며 선포합니다. ‘비록 어리석은 모습이 싫을지라도 내 뜻대로 행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리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육신의 소욕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육신의 감정이 여전히 남아 있을지라도 육신에 순종하면 패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승리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대적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4:4)

그러므로 말씀을 정말 깊이 배워야 합니다. 배우지 않고 어찌하겠습니까? 그저 그런 교회를 세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세우려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 비로소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군대를 세울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군대의 표준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기준이 높아야 합니다. 엉망인 상태 그대로는 안 되며 반드시 훈련받아 다듬어져야 합니다. 중국 산둥의 한 장교가 탄자니아에 가서 아프리카 군대를 훈련했을 때, 그 흑인 군인들은 산둥 사투리를 쓰며 차려, 열중쉬어까지 완벽하게 해내는 막강한 군대로 거듭났습니다. 그들이 전투에서 뛰어난 이유는 철저한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게 훈련해 봅시다. 군대 장교들은 병사들을 훈련할 때 새벽 3시에 막사 안으로 폭죽을 던져 넣는다고 합니다. 방 안에서 폭죽이 요란하게 터지는데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깜짝 놀라 1분 만에 옷을 입고 연병장으로 집합합니다. 지옥훈련입니다. 마귀를 굴복시키려면 우리 또한 그런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말씀대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며, 강한 군대를 세워야 합니다. 민수기에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자만이 계수됩니다.

여러분이 훈련받고자 결단한다면, 저는 여러분을 강철처럼 단련시킬 것입니다. 영적 전쟁을 치르는 자가 온실 속 화초처럼 유약해서야 볕이 조금만 내리쬐어도 쓰러지고 맙니다.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참된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집니다. 예수님께서 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까? 귀신을 쫓아내야만 사람을 해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귀신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위에 세워진 믿음으로 귀신을 박살 내셨습니다.

8. 귀신을 쫓아내야만 하나님의 약속을 취할 수 있다

화인 사명신학은 이 진리를 매우 명확하게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얻기 위해 왜 모세와 여호수아가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치러야만 했을까요? 그 과정 자체가 믿음의 훈련이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취할 수 있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귀신을 쫓아내는 믿음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슬리퍼에 반바지, 런닝셔츠 차림으로 열쇠 꾸러미나 흔들며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게 들어갔다가는 이튿날 시체 소각장으로 직행할 뿐입니다. 그렇게 안이하게 영적 세계를 대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 강한 군대의 훈련 상태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일련의 체계적인 훈련 과정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목사님, 화인 사명신학에 온 이후로 삶이 너무나 알차졌습니다”라고 합니다. 제가 “그 말은 너무 바빠졌다는 뜻 아닙니까?”라고 하면 다들 바쁘다고 인정합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고 학업을 마칠 수 있습니까? 시험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대학에 붙을 수 있습니까? 바쁘긴 하지만 참으로 좋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취하지 못하면 답답해서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는 것이 좋습니까, 광야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 당연히 좋습니다. 비록 전쟁이 치열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가 얻는 것은 영원한 약속의 땅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번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찌들고 메마르게 사는 것은 결코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초라하게 살기를 원하신다면 이곳을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그저 적당히 살며 9 to 5 출퇴근이나 하면서 하루하루 때우기를 원하신다면 다른 곳으로 가십시오. 육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교회로 가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취하느냐 못 하느냐가 우리가 번영을 누리며 승리하는 삶을 사는 핵심 열쇠입니다!

9.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보기이다

보셨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곁길로 새지 않도록 거듭해서 친히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마치 제가 사람들에게 시범을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못은 이렇게 박고, 도면은 이렇게 그리고, 프로그래밍은 이렇게 짜며, 처세는 이렇게 하고, 사역 관리는 이렇게 하며, 양 떼는 이렇게 목양해야 한다고 하나하나 본을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본보기가 얼마나 훌륭합니까?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모습을 우리에게 똑똑히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육신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의 안위를 위하셨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은 겉으로는 우리 육신을 만지시며 몸의 구속을 이루시는 것 같지만, 실상은 우리의 전인격을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허리를 굽히고 걷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이제 허리를 꼿꼿이 펼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허리를 굽힌 채 살고 싶습니까? 원치 않는다면 허리를 펴십시오. 펼 수 없다면 당신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아름다운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늘, 내일’을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오늘, 내일, 모레, 글피’를 바라보며 나아가면 됩니다. 언젠가 우리는 더욱 예수님을 닮아갈 것이며, 언젠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도 더욱 주님을 닮아갈 것입니다. 언젠가 모든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취하게 될 것이며, 모든 성도가 영적 세계에서 승리하는 용사가 될 것이고, 모든 성도가 예수님처럼 또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남들에게 영적 본보기가 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10. 결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귀신을 쫓아내지 않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겠습니까? 배후에서 귀신이 사람을 옭아매고 있기에 축사 없이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는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아는 예수님은 결코 산타클로스가 아니며, 석가모니도 아닙니다. 내가 아는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크신 능력으로 친히 입증하신 분이십니다. 선한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우리 삶 속에 온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아멘!

찬양 한 곡을 부르고 오늘 봉헌을 준비하겠습니다. 헌금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신 분은 헌금하지 마십시오. 강하고 담대하게 저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나아갑시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새로 쓸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우리 세대에서 새롭게 쓰일 것입니다. 이제부터 교회는 하나님의 군대로 세워질 것이며, 교회는 전진하여 약속의 땅을 취할 것이고, 번영하지 못하고 귀신에게 매여 있던 자들은 모두 자유케 될 것입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약속을 취하는 곳이며, 우리를 번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살아내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는 곳입니다. 아멘!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합시다. “하나님, 저는 주님의 정예 용사가 되어 원수 마귀를 짓밟기를 원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노니, 포로 된 자는 해방되고 눌린 자는 자유를 얻을지어다! 나는 귀신을 쫓아내는 자가 될 것이며, 주님을 본받을 것입니다. 하나님! 주님이 훈련하신 열두 제자도 귀신을 쫓아냈고, 칠십이 명의 문도들도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오늘 우리는 기꺼이 이 좁은 문을 선택하여 대가를 지불하고, 목숨을 바칠지언정 결코 물러서지 않고 반드시 약속의 땅을 취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번영의 날이 이를 것이며 마귀가 도둑질한 모든 것은 배상될지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노니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내 삶에 이루어질지어다. 하나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관심을
关闭
暂无评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