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느헤미야》 1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이번 장의 주제는 “주여, 제 기도를 들으시고 저를 형통하게 하사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입니다.
《느헤미야》의 배경
이 장의 마지막 구절에서 느헤미야는 “그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술 관원이 단순히 왕에게 술을 따르는 사람일 뿐이었을까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는 자신과 함께 국사를 논할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술 관원은 황제에게 술을 따르며 함께 가볍게 술을 마시면서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하는 매우 중요한 직책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황제와 독대하여 대화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화신(和珅)이나 기효람(纪晓岚)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술 관원이었지만 실제로는 대총관이자 수석 비서관과 같았고, 화신이나 기효람 같은 직책이었습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으로, 황제의 비서는 대단히 막강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여서, 최고 권력을 이어받는 사람들은 대개 이전 황제나 최고 지도자의 비서 출신이었습니다.
《느헤미야》의 배경은 무엇일까요? 느헤미야는 선지자 말라기와 같은 시대를 살았습니다. 만약 말라기와 느헤미야가 생소하시다면, 제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시 한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의 후손들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야곱의 이름이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지금의 이스라엘 국가나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뜻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훗날 야곱의 후손들은 기근으로 인해 이집트로 이주하게 됩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이 형들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 갔다가 훗날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고, 아버지와 형제자매들을 모두 이집트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 뒤 요셉이 죽고 이집트의 새로운 왕이 일어나자, 이집트 왕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400여 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 모세를 택하셔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고, 그들에게 일련의 율법을 반포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민수기》,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등이 바로 모세가 기록한 책들입니다.
모세가 쓴 이 책들을 율법서라고도 부르는데, 거기에는 어떤 사람이 저주를 받고 어떤 사람이 복을 받는지 아주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굳이 저주받는 길로만 가려 했고 아무리 말려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 오랜 세월이 흘러 다윗 시대에 이르렀습니다. 대략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연대표를 말씀드리자면, 아브라함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 모세는 약 3,500년 전, 다윗은 약 3,000년 전, 느헤미야와 말라기는 약 2,400년 전, 예수님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의 인물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이스라엘은 매우 번영한 나라가 되었고 영토도 아주 넓어졌습니다. 그러나 훗날 그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장난을 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저주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복을 받습니다. 결국 2,600여 년 전에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는데, 그중 일부는 바벨론에서 관직에 올랐습니다. 그중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바로 다니엘이었고, 《성경》에는 《다니엘》서라는 책도 있습니다.
다니엘은 지금으로부터 약 2,600여 년 전의 인물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훗날 바벨론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매우 뛰어났으며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고 기도하기를 즐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덧 70년이 흘러 바벨론은 페르시아 제국에 멸망당했습니다. 그러자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는 스룹바벨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했습니다. 스룹바벨과 느헤미야는 100년의 시간차가 있습니다. 그때는 스룹바벨도 이미 죽어 흙으로 돌아간 후였습니다. 그렇다면 재건된 성전과 성벽의 상태는 어떠했을까요? 사실 형편없었습니다! 그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는 매우 많습니다.
말라기와 느헤미야는 동시대의 인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로부터는 약 400여 년 전입니다. 이렇게 정리해 드리니 대략 그림이 그려지실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관직은 매우 높았고, 황제와의 관계가 매우 친밀하여 황제의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따라서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요? 사실 그와 다니엘은 모두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상사가 당신을 좋아할지 말지는 한순간의 생각 차이이며, 이는 사람이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말이 깊은 말인지 얕은 말인지 알 수 없고, 때로는 상사가 한번 떠보았을 때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미움을 사기도 합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군주를 모시는 것은 호랑이를 곁에 두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다니엘이든 스룹바벨이든, 느헤미야든 모르드개든 그들은 같은 시대를 살았습니다. 《느헤미야》는 비록 《구약성경》의 중간쯤에 배치되어 있지만, 역사적 시간순으로는 《구약성경》의 맨 마지막에 위치합니다.
100년 전 페르시아 황제는 스룹바벨을 보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했고, 예산까지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매우 비참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도망쳐 온 하나니라는 형제가 느헤미야에게 말하기를,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유다 지방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고 전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중국인이 유럽이나 미국에 있을 때, 조국이 침략자에게 짓밟히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마음이 찢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런 일을 들었을 때 기도를 선택했고, 느헤미야 역시 그러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어떻게 황제의 총애를 받았을까요?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상사로 하여금 당신을 좋아하게 만드시면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말할까요? 저 역시 경험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황제로 하여금 당신을 좋아하게 하시면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장의 주제는 “주여, 제 기도를 들으시고 저를 형통하게 하사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입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은혜를 입었습니까?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는 이미 술 관원의 자리에 올라 황제의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의 정책 수립에 직접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기도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절대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켜주신다면 수많은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끝이 좋지 않을까 두려울 뿐입니다. “군주를 모시는 것은 호랑이를 곁에 두는 것과 같아서”, 관직이 높을수록 오히려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져 매우 고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담긴 “《성경》 자료 모음”이 있으니 여러분이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느헤미야를 본받아, 그가 어떻게 형통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상사 앞에서 은혜를 입었는지,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게 했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느헤미야의 인식
우리는 이 인물을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느헤미야의 인식은 결코 평범한 사람들의 인식과 같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어려서부터 페르시아 제국에서 자랐고, 한 걸음씩 승진하여 직업적 커리어의 최고 단계인 황제의 술 관원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느헤미야와 같고, 여러분 마음속에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이 느헤미야와 같다면, 여러분 역시 반드시 형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느헤미야의 인식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이 허물어지고 성문들이 불탔으며,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유다 지방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몹시 괴로웠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오직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하는 것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느헤미야는 이전에도 궁중의 정치 싸움에 직면했을 때 이렇게 하기를 여러 번 반복했습니다. 그는 매번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입었기에, 이것은 정말로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느헤미야》 1:5-7)
보십시오, 느헤미야는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모세를 통해 반포된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어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특히 모세가 율법서에서 말씀한 것들은, 만약 저주가 사람의 머리 위에 임하면 결코 피하기 어렵고 아주 정확하게 들어맞습니다.
얼마 전 한 자매가 법원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쉬운 일일까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너무 복잡하게 살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사람을 심판하고 판결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말로는 대개 매우 비참합니다.
얼마 전 어떤 사람이 길에 넘어진 노인을 부축해 주었는데, 오히려 그 노인에게 억울하게 덤터기를 썼습니다. 판사는 그 사람에게 “당신이 넘어뜨린 게 아니라면 왜 부축했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인터넷에서 수많은 사람이 그 판사를 향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며 비난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도덕적 파탄’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은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이 언제 그런 덤터기를 쓸지 모르니, 우리는 멀리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세상은 도덕이 타락했는데, 이것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판결을 내리는 사람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사법 기관은 법을 세우고 집행하며 판결을 내리는데, 이 일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왜일까요? 사람들이 정과 체면을 따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노인이 자기 절친한 친구의 가족이라면, 기회를 틈타 돈을 좀 뜯어내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돈을 버는 것은 매우 쉽고, 한번 뜯어내면 큰돈이 생기지만 후손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즉,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세오경의 논리 체계로 관찰해 보면 억울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표현으로 하자면 “다 인과응보”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느헤미야를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는 ‘진흙탕 속에서도 물들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어떻게 그 자리에 올라갔을까요? 이오(李敖)는 “성공한 사람의 등 뒤에는 풍상이 아니라 추악함이 있다”고 했습니다. 즉, 추악해지지 않고서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어떻게 올라갔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힘입어 올라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을 받았고, 하나님께서 그를 형통하게 하셨으며,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황제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두고 어디 가서 따질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묻습니다. “느헤미야는 2,400여 년 전 사람인데, 당신이 그를 만나 보았습니까?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저는 비록 그를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았습니다. 그가 또 묻습니다. “어떻게 보았습니까?” 제가 조금 ‘자랑’을 하자면, 제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제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성경》을 읽으며 갖게 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느헤미야가 가졌던 인식과 매우 가깝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추악한 방법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힘입어 올라갔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도 시도해 보지 않고 어떻게 알겠습니까?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과연 무엇을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한번 꼽아보겠습니다. 당신이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고, 언제 병들고, 언제 넘어질지는 결코 당신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제가 숏폼 영상을 보다가 폭포 근처에서 드론 촬영을 하며 놀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산 위에서 돌 하나가 떨어져 한 사람의 머리를 덮쳤고, 그 자리에서 머리가 깨져 사망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일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습니까?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오늘 밤 양말을 벗고 잠자리에 들지만, 내일 아침에 그 양말을 다시 신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정말로 우리 뜻대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저에게는 또 다른 논리가 있습니다. 하루 세끼 밥 먹고, 자고 일어나고, 학교에 가고 오고, 대학 시험을 보고, 직장을 구하고, 출퇴근하는 이 모든 일은 당신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단지 하루하루, 해마다 반복되는 일상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합니까? 바로 돌발 사건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황제가 문득 생각나서 “이 신하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금의위, 동창, 서창을 보내 조사해 보라”고 명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끝장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권력자가 죄가 있다고 하면 죄가 있는 것이고, 죄가 없다고 하면 죄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일이란 그런 것입니다.
세상의 일들은 정말로 여러분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당신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능력 있는 많은 사람이 올라가지 못하고 오히려 능력 없는 사람이 올라가기도 합니다! 여러분, 절대로 저에게 오해의 잣대를 들이대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올라가지 못했더라도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사람의 한평생이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저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며 이 결단을 결코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저 자신의 그릇이 보잘것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을 어떻게 살겠습니까? 느헤미야에게 하나님이 없었다면 그가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느헤미야는 어떻게 그 자리에 올랐습니까?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사람은 평생 저주에서 벗어나기 어렵지만, 반드시 붙잡아야 할 한 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바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저주가 조상 8대로부터 왔든 어느 대에서 왔든 모두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리석어 보입니까? 저는 결코 어리석지 않습니다! 저는 이 계산을 아주 명확하게 끝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를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 주는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며,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이십니다. 원하건대 이제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주의 종이 주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를 자복하오니 들으시옵소서.”
형제자매 여러분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온전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이 범한 죄를 인정하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시인한다면, 더 이상 그렇게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 않게 됩니다. 《성경》은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여러분이 충분히 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왔을 때 죄의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법이 없어 오직 자복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나는 살인도 안 했고 방화도 안 했습니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선한 사람이라는 뜻입니까? 그렇게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아직 온전히 지켜 행하지 못한다면 자복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의인으로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당신을 형통하게 하시고 상사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주의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상사는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상사에게도 미움을 받고 고객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니, 어찌 된 일입니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상사로 하여금 당신을 좋아하게 만드시는 것은 식은죽먹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상사의 머릿속에 신호 하나만 주시면 문제는 즉시 해결됩니다.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만민 중에 흩어버리십니다. 지난 2,000여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만민 중에서 이리저리 내던져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얼마나 비참했습니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이스라엘 백성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을 버렸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호되게 징계를 받아 참으로 비참해졌습니다.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범죄의 전형이었고, 그저 자기 안위만을 챙기며 사는 소시민적 삶의 전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페르시아 제국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보수하며 다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스가랴, 말라기, 학개가 기록한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세상에, 그들은 돌아와서도 계속해서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큰 이적을 경험했습니까? 유다가 멸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왕을 통해 성전의 금은보화를 다 옮겨가게 하셨고, 페르시아 황제를 통해 바벨론을 멸망시키셨습니다. 페르시아 황제가 하나님을 경외했기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금은보화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했으며 예산까지 지원하여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돌아가서 무엇을 했습니까? 스룹바벨과 함께 처음 돌아올 때는 길에서 찬양하며 하나님을 송축했지만,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자기 먹고사는 일에만 빠져들었습니다. 참으로 가증스러웠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성전에는 관심이 없었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자 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눈 깜짝할 사이에 100년 가까이 흘러 느헤미야 시대에 이르렀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 모양 그 꼴이었습니다. 말라기와 느헤미야는 동시대 인물입니다. 말라기가 《말라기》서를 쓴 것은 대략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이후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성벽을 재건하고 다시 하나님 중심의 삶을 회복시켰습니다.
그 후 황제의 소환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조정에 인재가 부족했고 느헤미야가 뛰어난 인재였기에, 황제는 그를 다시 불러들여 10여 년간 조정에서 일하게 했습니다. 이 10여 년의 세월이 바로 말라기 시대였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또다시 자기 먹고사는 일로 돌아갔고 성벽은 다시 훼손되었으며 성전도 황폐해졌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에 대한 느헤미야의 인식은 참으로 탁월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비록 하늘 끝에 쫓겨났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자신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으로 다시 인도해 내실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부디 깨닫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재앙은 우리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지 않고 그저 자기 일신의 안위만을 좇아 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얼마 전 한 자매의 이야기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자매는 그저 평범하게 살다 보니 어느덧 30세가 되었습니다. 서른 살이 되면 서른 살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서른 살에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결혼해서 아이 낳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서 온몸에 병이 들었습니다. 사실 산후에 생기는 그런 질병들은 다 귀신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다 2018년에 그 자매가 온라인에서 제 기도를 듣게 되었고, 온갖 질병이 다 깨끗이 나았습니다! 이것이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의 가치가 있겠습니까? 병원에 가면 돈은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돈을 끌어모아야 하고 빚을 내서라도 치료해야 합니다. 병원에 가면 사람은 짐승처럼 취급받으며 온몸에 관을 꽂게 됩니다.
며칠 전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따라 성경공부를 하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진작에 밥을 못 먹었어야 마땅합니다. 온몸이 병투성이인데 밥이 넘어갑니까?” 그의 말뜻은 이렇게 주님을 믿느라 일에도 지장이 있고 생활에도 지장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그만두십시오.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사십시오!”
사실 저는 사람들이 저를 따라 성경공부 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사람답게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만약 ‘사람 같지도 않고 귀신 같지도 않게’ 산다면 살아있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이나모리 가즈오의 책을 몇 권 읽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이나모리 가즈오도 결국 암에 걸려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사람은 그저 그렇게 살다 보면 점점 더 미련함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다가 어느 순간 덧없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자랑할 것은 수고와 슬픔뿐이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처소는 바로 복을 받는 곳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세우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둘 처소를 짓는 것이며,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게 되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축복과 약속이 다 우리의 것이 됩니다.
역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거듭해서 증명해 왔습니다. 비록 궁중 암투가 극심한 곳에 살지라도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다니엘, 느헤미야, 요셉, 다윗은 모두 우리에게 매우 훌륭한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를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경험했기에 하나님에 대해 이러한 인식을 갖추게 되었겠습니까? 그가 겪은 경험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사람이 살면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너무나 많습니다. 절대로 자신이 대단한 인물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쉬자인(许家印)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대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중국 과거 시절에 불운을 겪었던 펑더화이(彭德怀), 류샤오치(刘少奇) 같은 개국 공신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꺾으시면 꺾일 수밖에 없는 것이니 참으로 고단한 일입니다! 사람이 평생 무엇을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무언가를 통제하려 한다면 차라리 포기하시기를 권합니다! 사람이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을지, 어떤 일을 만날지는 결코 스스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항상 꼬리를 내리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과 부딪혔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상대방의 머리에 온통 칼자국이 가득하고 여기저기 흉터가 얽혀 있으며 아직 아물지도 않은 상처가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느 날 제가 공항으로 사람을 마중 나갔다가, 싱가포르에서 아주 맛있는 개구리죽을 대접하러 갔습니다. 그것은 싱가포르에 오면 꼭 먹어야 하는 코스입니다. 그런데 주차할 자리가 없어서 일행더러 먼저 가 있으라고 하고, 저는 차를 아주 멀리 주차한 뒤 걸어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에서 어떤 사람과 부딪혔는데 머리에 칼자국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나,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꼬리를 내리고 납작 엎드렸습니다. 왜일까요? 제 목숨이 그의 목숨보다 훨씬 귀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머리에 칼자국이 나고 피가 솟구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고, 심지어 무릎을 꿇으라면 꿇을 수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생님,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으십니까?”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저는 그런 일을 만났을 때 사람과 겨루고 싶지 않으며, 그저 꼬리를 내리고 조심스럽게 처신합니다. 솔직히 도망친다고 해도 그 사람보다 빠르리라는 보장도 없으니, 일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만약 그가 등 뒤에서 식칼을 꺼내 휘두르면 어떡합니까? 결국 그 사람은 저를 그냥 보내주었습니다. 제가 꼬리를 내리고 저자세로 나가며 “원하시는 대로 다 해드릴 테니, 제가 부딪혀서 재수가 없었습니다. 제 잘못입니다”라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의 계획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백성들이 억압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곳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황제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 감히 누가 나를 건드리겠는가? 나는 황제 앞에서도 손꼽히는 인물인데, 변방의 총독이나 장관, 서기들이 다 무슨 대수인가?’
하나님은 참으로 오묘하셔서 황제로 하여금 느헤미야를 다시 파견하게 하셨습니다. 느헤미야는 스스로 예루살렘에 가겠다고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말이 통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명이 있어야만 했고, 황제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 스스로 함부로 계획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황제의 파견 명령만이 유효했습니다! 비록 느헤미야에게 직접 돌아가 다스리고자 하는 뜻이 있었을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느헤미야는 참으로 대단한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의 계산에 따르면, 그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지 52일 만에 성벽을 다 재건했습니다. 그의 동원 능력은 대단히 강력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황제 곁에서 일하던 사람이 그런 능력조차 없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실 일 자체는 그리 많지 않지만, 사람이 미련하면 아주 작은 일도 엄청나게 많은 일로 만들어 버립니다.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당신에게 진정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느헤미야처럼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지혜로우면 일은 많지 않게 됩니다. 저 역시 나름대로의 비결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일을 빠르고 정확하게 해내는 것입니다.
제 친구 중에 예전에 저의 직속 상사였던 사람이 저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자네는 도대체 어디서 그런 시간이 나서 그 많은 일을 다 해내는가?” 사실 저는 허풍을 떠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정말 많은 일을 해냈습니다.
이번 성경공부를 시작하기 직전에도 우리 교회의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동역자가 저에게 “선생님, 온갖 방법을 써도 안 됩니다. 서버가 다운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데이터 센터로 차를 몰고 가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런 능력을 갖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느헤미야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가 돌아가고자 계획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외에 누가 그렇게 큰 역사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황제로 하여금 그를 보내게 하셔야만 갈 수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말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원합니다. 주의 성전을 다시 세우고, 주의 성벽을 재건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하나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도록 돕기를 원합니다.” 그는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느헤미야》 1:11)
그의 기도는 무슨 뜻입니까? ‘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자 하나 제 생각만으로는 소용이 없고, 황제가 조치를 취해주어야만 가능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느헤미야의 기도였습니다.
느헤미야의 기도
어떤 사람이 형통하고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까?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유익을 당신의 유익으로 삼을 때 비로소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일만을 구합니다.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제가 왜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입었을까요? 저는 하나님을 위해 그분의 교회를 세우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 저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주의 처소를 세우게 하옵소서”라고 고백합니다. 주의 이름을 두실 처소가 바로 교회입니다.
왜 많은 사람이 우리 교회에 와서 복을 받을까요? 비록 당신이 하나님을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도를 통해 질병이 치유되는 이유는, 이곳에 스스로를 기꺼이 헌신하여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 곧 주의 이름을 두실 처소를 세우고자 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곳에 복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만약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큰 문제입니다.
절대로 여기저기 다니며 맹목적으로 복만 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교회가 어떻게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를 세우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없습니다. 그곳이 주의 이름을 두실 처소가 아니라 어쩌면 자기 자신의 이름을 세우는 곳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우리 자신의 이름을 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전파합니다!
이것이 바로 느헤미야의 기도였으며,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식을 말해줍니다. 그의 간구는 오직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도록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느헤미야》의 후반부는 하나의 비극입니다. 왜일까요? 느헤미야는 탁월한 경영 능력을 통해 사람들을 조직하여 성벽을 재건했지만, 그것은 오직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일 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애초에 그러한 열망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다시 조정으로 돌아가자마자 이스라엘 백성은 또다시 저주 가운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살인이나 방화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지만, 느헤미야와 같은 중심과 뜻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때때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좋은 선택을 두고 사람들은 왜 마다할까?’ 사람들이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믿고, 이나모리 가즈오를 믿으며, 죽어라 일하는 것을 믿고, 상사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믿으면서도 오직 하나님만은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진정으로 느헤미야와 같은 실력을 갖추고 하나님을 의뢰하며 느헤미야처럼 기도한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생님,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가 구한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주의 종으로 형통하게 하사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존귀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느헤미야를 배우십시오. 이 성경은 우리더러 옛날이야기나 읽으라고 기록된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느헤미야와 같은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게 하려고 기록된 것이니 참으로 유익합니다!
사실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가입니다. 제가 전하는 도리는 매우 직관적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글자 한 자도 모르지만, 어떤 아이는 자라서 학사나 석사가 됩니다. 그러나 정작 일을 시켜보면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느헤미야를 닮은 것이 아니라 그저 쌀자루를 탐하는 쥐와 같을 뿐입니다.
이번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작은 교훈이라도 얻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의 핵심적인 소원이 하나님의 핵심 소원과 일치한다면 어찌 형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슬그머니 지워버리고 하나님을 저버린 채 ‘가라, 가. 내가 성경 읽고 기도하고 교회 세울 시간이 어디 있는가? 내 일이 이렇게 바쁜 게 안 보이는가? 나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이 왜 감히 그렇게 행동할까요?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두려우신 분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비록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지만 삶이 극심한 고통과 번민으로 얽혀 있는 사람들을 본다면 경각심을 가져야 하며, 결코 그들을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일평생을 찬찬히 살펴보십시오. 자랑할 것이라곤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느헤미야나 다니엘처럼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들은 참으로 훌륭하게 살았고, 당신의 상사 또한 반드시 당신에게 은혜를 베풀 것입니다.
저는 정말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저의 직속 상사들과 항상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부딪히며 정이 든 일들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늘 좋은 결말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직장을 구하고 이력서를 쓸 때마다 직속 상사들에게 추천서를 부탁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기업이 직속 상사의 추천서를 신뢰하지 않겠습니까? 직속 상사가 내리는 평가인데 그 사람이 부족할 리 있겠습니까? 제 직속 상사는 늘 “당신은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평가해 주었는데, 이 얼마나 훌륭한 평가입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한 느헤미야의 인식, 느헤미야의 계획, 느헤미야의 기도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입신양명이나 치부를 위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을 자신의 핵심 유익으로 삼았고, 그 결과 평생토록 형통함 가운데 살았습니다.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은 이를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만약 재정적인 결핍이나 건강의 연약함이 있다면, 자신의 삶의 방향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일생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저는 이미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았습니다. 제가 애타는 마음으로 거듭 당부하고 끊임없이 권면하는 이유는, 오직 형제자매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아 잘 살고, 기쁘고, 행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무언가를 위해 마음을 쓰고 염려해야 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조금 마음을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주의 이름을 두실 처소인 하나님의 교회를 구하기에, 우리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이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이번 성경공부 나눔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