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答疑引言
大家好!我们查的是《使徒行传》第四章,如果你是彼得那一拨的人,那你就会觉得:哇!老师,你终于夸彼得了!你还觉得我夸得挺好是吧?我主要讲的是:什么东西干对了,什么东西没干对。千万不要以为圣灵充满取代了所有的事。大家有困惑和问题吗?我不一定都整对了,但是我会很努力地回答大家的问题。我再做一点铺垫,就是你干对了一件事,不代表其它的事也干对了。你干对的事,我会说你干对了,你干错了的事,我会说你干错了;所以千万不要一白遮百丑。
我们要从客观上整明白路加写《使徒行传》的动机,我猜路加把这事写出来,只有明白的人才能够明白其中的含义 。比如说:哥林多教会整明白了,难怪保罗当年阻止我们这么干,所以说明白的人才能读明白。这两千年以后好不容易把这事给整明白了,大家知不知道我从哪开始读明白这一段话的呢?因为我发现一个非常痛苦的问题,就是他们写的《彼得前书》、《彼得后书》、《雅各书》、《犹大书》,这些书都很混乱,东一撇子,西一划地在那讲!很难找到重点,又很难去落实,而且我对照他们讲的,发现和耶稣基督所教导的不一样。
雅各讲:你要信,一点也不疑惑。谁能够做到一点也不疑惑?没有!我还没见到过一点也不疑惑的人,那这种话要是落实的话,可就毁了。耶稣基督的教导是:你的信心只要像一粒芥菜种子!《圣经》里记载是一点不疑惑,哪是一点儿啊?那是一大片。只要有一粒芥菜种子的信心,就能看见神在你身上显出神奇的事。咱们需要去了解,因为有好些东西跟耶稣基督的教导不一样,虽然雅各是耶稣肉身的弟弟,但是耶稣和雅各之间的差别,有点像我和我弟弟的差别,那差别可大了。
Q1:老师,圣灵充满再加上悟性通透一点,对付肉体的果效是否更好?
圣灵充满不是加上悟性通透一点,应该是悟性通透。因为肉体就是与生俱来的观念,一个属肉体的人,什么也不用做,从娘胎里头出来就是一个肉蛋蛋。第二年长大了就是大一点的肉蛋蛋,十岁就是十岁的肉体、二十岁就是二十岁的肉体,人与生俱来所有的价值观念都跟肉体紧密相关。
没有人教你对付体贴肉体,你的悟性要通透!你体贴肉体会出事的,人一体贴肉体就会体贴出很多的病来,你不会做自己害自己的事,你应该没那么笨。但事实上人一体贴肉体,就照着属肉体的价值观念走。认识肉体的败坏,一定是从悟性上开始。但是很多人悟性明白,却说:老师,我都懂,可是我一做就不行。那就是没有能力,圣灵充满,悟性上又通了,那你就有能力了。
比如说:圣灵充满了你就会有胆量,但是你悟性不通,圣灵充满过后又回到惧怕里头去了。如果你圣灵充满,悟性上又通了,就可以把惧怕的感觉给干掉。所以对付肉体是需要悟性和能力,能力是从圣灵充满来的。华人命定神学把这些东西解释得很清楚!因为我就是这么走过来的,不这么走该怎么走呢!掰不过来!对付肉体必须要在悟性上认识神的话,人原来的那套的价值体系和与生俱来的东西都是没有用的,后天学习神的话叫做悟性,然后从圣灵得着能力。
Q2:老师,有一个姐妹问我,我们在新约时代,已经受洗,我们之前的罪与咒诅已经与耶稣同钉十字架,即使是祖辈有遗传的咒诅,神也在受洗那一刻赦免、洁净了。为什么《101课程》里还提到有祝福和咒诅呢?
这个姐妹挺厉害啊!因为她把整个概念整得极其混乱。这些受洗的人洁净了吗?人得的癌症是祝福还是咒诅?这是一种混乱。不管是新约还是旧约,不是受洗了就赦免了,然后就完事了,这是人呢自己认为完事了。其实没完事,为什么没完事呢?《圣经》里有一个关键的主题,若谨守遵行神的话就蒙祝福,若不谨守遵行神的话就受咒诅。这句话到了新约仍然是一句信实的话!你若谨守遵行就必蒙祝福,你若不谨守遵行就必受咒诅,这句话在新约里成立了吗?成立!
人活着是靠神口里的一切话,你受洗了,第二天继续照着你自己的意思活,这根本就不是神的话。如果你照着神的意思活,之前的咒诅就不算了!因为那是神的恩典,神不算我们的咒诅,把我们的咒诅撤去了。但实际上我们仍然活在那个受咒诅的状态里,那个恩典是为了好引导我们悔改。
咒诅在人的身上,鬼就会合法的住在人身上,人就会有疾病、倒霉。有了这些疾病、倒霉,鬼是赶不出去的,只有耶稣诚然担当了我们的咒诅,鬼就可以被赶出去,你的病就好了。这个是给你的恩典,并不是你做得够好,是因为给你恩典好让你学习重新照着神的话去活。这个时候你做了一个选择,又活到那个违背神的话当中,然后会怎么样?病又回来了,神又再次给你恩典,你又继续违背神的话,又活在咒诅当中。结果会越来越难搞,所以神的恩典是为了引导我们去悔改。
这个姐妹读《圣经》读得不够啊,脑袋和彼得有得一比,要改!你要是读《圣经》读得一知半解就会以为自己了不起,那不坏了吗?什么赦免、洁净了?我在101课程中提到了祝福和咒诅。有人会说:你怎么还提这个呢?就算不提祝福和咒诅,还是存在的!用你的肉眼就会看见现在的教会充满了各种活灵活现的咒诅,所以不提的话更糟糕。
Q3:老师,我是做心理咨询的,在沙盘游戏疗法中,需要购买和使用很多沙具,一般的动植物、人物、耶稣像、佛教的塑像都有。这些东西可以用吗?是当灭之物吗?
可以用。你是不是想在我这给你点安慰呢?你最好还是别往家里放,你里面的信心还没这么强大,就别扯这些事。但是如果你想用的话,那你就继续用。当然了,既然它是一个沙盘,不是每一样都全部用得完,可以少用一部分,也可以用多一点,那就是你自己的选择。
Q4:老师,信徒为什么会开始凡物公用呢?是否也是被彼得所影响,开始不做实事,每天只在殿里祷告擘饼?
我也不知道这个凡物公用是从哪来的,因为这个彼得悟性不通,在悟性上不认识神,圣灵充满他,然后他说出来的那些话,也说不太清楚。凡物公用不是神的教导,如果是神的教导,那在耶稣年间就那么干了,但是耶稣有没有这么干,彼得不知道吗?知道!既然知道了还继续这么干,我就觉得这些人很奇怪。
摩西没这么干、耶稣没这么干、撒母耳也没这么干。彼得突然间脑袋一热:我要干一件前所未有的事。彼得要干一件超越耶稣、超越摩西、超越撒母耳,从今以后彻底消灭穷人的事。这是我们要解决的问题吗?不是!这是一个很伟大的创新,但是以失败告终。我真的很感慨:这是从哪学来的?
人要敬畏神!读《圣经》要读经典!你要把神的话读明白,至少这种事在《圣经》里是没有记载的,神没有这么干过。《申命记》28章讲到祝福和咒诅:都是你身所生的、牲畜所下的、你手所做的,那你的仓房就是我的仓房,我的银行账户也是你的账户,咱们几万人就全用一个银行,好像很伟大似得。有人光往外拿钱,不往里放钱,这都是愚蠢!因为懒人都是属肉体的人多!这事是出于无知,出于很善良的心态,动机是好的,但现实是很残酷的,后来这个彼得对做使徒的兴趣都给干没了。
Q5:老师,做耶稣基督的门徒就能解决自私的问题吗?怎么解决的?
我讲了这么多年,还问我这么简单的问题。华人命定神学解决什么问题?是想解决一个命定的问题,命定就是为什么而生、为什么而活。人来到这世上、为什么而活、为什么而死,有一些人还是为了钱活着,但是人为了钱活着这条路是走不通的。你要是问我:为了什么而活着?我告诉你:我就是为了成为别人的祝福而活着。自私怎么能够成为别人的祝福呢?
如果我穷得叮当乱响,我怎么祝福人?我脑袋里什么知识也没有,我怎么祝福人?很难的!所以接下来我想做的事超出了我的能力范围,但是我还在这里不断地学习,不断地成长。我就想让每一个人都成为一个有价值的人,而不是成为一个爱钱的人。
有的人说:人家占了这个便宜。我说:没事!我来到这世上就是让人占便宜的。有的人说:人家拿了你的钱。我说:拿吧,我就是钱,比钱还值钱。我要做各种各样的训练,让大家都成为一个有价值的人。怎么解决?得着命定,开始为神而活,为神付代价,花时间了解神的话。如果一个人成了一个祝福的典范,你手所做的,神都祝福,你身所生的,牲畜所下的,神都祝福,你还需要自私吗?自私是一个很愚蠢的行为方式!
Q6:老师,你总是说要让大家做实事,但耶稣带着十二个门徒,他们都做什么实事了?十二个门徒都跟着耶稣,看耶稣所做的,听耶稣所说的。虽然我自知做实事是对的,不应该懒惰,耶稣做的是传道、医病、赶鬼。
传道、医病、赶鬼,后来人还得照着神的话去活,如果不把这些人从魔鬼的辖制里释放出来,从疾病里释放出来,这些人该怎么做?神给他们的恩典是让他们悔改,耶稣从死里复活还教导门徒们学习牧养。
牧养到底是什么?在《圣经》里头也没有很清晰的记载,只有到了我们这个年代,我照着神的话琢磨出几样:第一点就是医病赶鬼,把人从魔鬼的辖制里释放出来。因为耶稣的宝血已经涂抹了我们,只有这样才能够赶鬼,魔鬼在人里面就成了非法。第二点就是开始对付人的肉体,使徒保罗讲的非常清楚,属肉体的人天生与神为敌,也不能够行神的话。第三点就是学习神的话,要让神的话成为我们的价值观念。第四点就是做事,落实神的话。
我们看到了一个缩影,神做事是非常有意思的,只是我们大家没怎么留意。耶稣没有在地上建立教会,耶稣把建立教会这事交给了我们。神创造完天地万物,完了吗?没完,把管理的工作交给亚当和夏娃了。如果神创造完了,让亚当夏娃在那儿玩,那不是神的心意。神让他们管理万物,活出神荣耀的样子,因为神照着祂的形像造人。
我还得说一下大家,读东西读的一知半解,为什么不从神荣耀的形像着手呢?那才是根本!神照着祂的形像造我们,但是活出的那个样不太像,不要说半神半鬼了,整个人都像个鬼似的,不能碰,一碰就是识别善恶。因为人里面的东西是很邪恶的。咱们的牧养体系刚刚才能够形成一个概念,真正到落实还是差的很远的,大家千万不要认为华人命定神学走到顶峰了,其实我们才刚刚开始。
前几天我在带祷告的时候说:华人命定神学要重新开始,要攻克各种各样的难关,因为我们离神的形像差的还很远。全都得了医治,网站的点击量大,我们就在那高兴吗?那个东西不重要,重要的是活出神的形像。你需要我帮助,我肯定会帮助你,因为你需要活出神的形像。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도행전》 4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성경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어쩌면 어떤 분들은 제가 베드로라는 인물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지만, 사실 저는 꽤 객관적인 편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잘한 일이 전혀 없을까요? 그가 잘한 일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이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을 찾으려 한다면, 5천 년을 찾아도 한 사람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이번 장의 주제를 《행해진 표적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로 정했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제가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었습니다. 다들 이 말에 익숙해졌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후에도 교회 안의 문제들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직접 교회를 개척하고 신기한 일들을 행하여 교회 성도들이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교회 안의 집사와 전도사가 싸우는 것까지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제게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수많은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행해진 표적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는 진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한 편의 설교로 5천 명이 주님을 믿다
아주 오래전부터 저는 교회에 사람이 넘쳐나는 것을 몹시 부러워했습니다. 목회자라면 다들 교회에 사람이 없는 것을 어느 정도는 비극이라고 느낍니다. 제 설교만 하더라도, 고작 서너 명만 듣고 있다면 정말 설교할 맛이 나지 않습니다. 한 편의 설교로 5천 명이 주님을 믿었다는 사실은 한때 제게 매우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설교를 하고 또 해도 단 한 사람도 주님을 믿지 않아 마음속에 큰 혼란이 가득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제발 은혜를 베푸셔서 행해진 표적으로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달라고 부르짖었지만, 결국 아무런 표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저는 이유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 성령께서 주시는 믿음이 없어서 그런가?’ 이것이 바로 제가 성령께서 주시는 믿음을 열심히 연구했던 이유입니다. 그러다가 깨닫게 된 것은, 그 믿음은 우리 사람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 내면의 선택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도 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 덕분이라고 돌렸습니다.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저는 불평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 제게 믿음을 주시지 않아서 사람들이 제 설교를 듣고 5천 명씩 주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까?’ 이런 상태는 매우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저는 한 우울증 환자를 섬기며 3일 연속으로 기도해 주었는데,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울증 증세가 점점 더 악화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제 마음은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나는 왜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 없을까?’ 저는 성령께서 주시는 믿음이 임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텐데,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저와 함께 교회를 개척한 사람 중에 아주 흥미로운 분이 한 명 있었습니다.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믿음을 주실 때면 그의 머리카락이 온통 곤두섰습니다. 머리가 좀 길었다면 전기가 통한 것처럼 완전히 폭탄 맞은 머리 같았습니다. 그때는 그가 기도하기만 하면 상대방의 병이 다 나았는데, 과장이 아니라 정말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점입니다. 어떨 때는 곤두서고 어떨 때는 곤두서지 않았습니다. 저는 밤낮으로 그의 머리카락이 곤두서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나중에는 이 일에 흥미를 잃었습니다. 그의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일은 사람의 통제에 완전히 벗어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저는 '성령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 없음이나 믿음이 적음을 책망하셨을까?' 하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알고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은 우리 안에서 선택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즉 표적이 일어나고 머리카락이 곤두서며 병이 치유된 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은 사람의 선택입니다. 당시 제가 교회를 개척했을 때, 자주 제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이 있어서 제 마음은 정말 차갑게 식어버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제 안에는 보통 사람들은 정말 따라오기 힘든 성격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는 믿기로 선택했습니다.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은 제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 전혀 아니며, 단지 제 안의 혈기 넘치는 열정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지 않으셨더라도, 나는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부르셨다는 마음으로 그분을 섬길 것입니다. 나는 반드시 하나님을 섬길 것이며,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까지 끝까지 버틸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런 믿음을 쫓는 사람들이 넘쳐나지만, 저처럼 끈질기게 인내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설교 한 편을 전했을 때 아무도 주님을 믿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나중에 제가 사역 현장에서 발견한 것은, 설교를 듣고 5천 명이 주님을 믿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기는 했지만, 여러분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라인하르트 본케(Reinhard Bonnke) 목사가 아프리카에서 전도했고, 아프리카의 어떤 나라는 기독교인 비율이 매우 높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만, 그곳은 사기꾼이 가장 많은 곳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루지 못해서 질투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설교 한 편에 5천 명이 주님을 믿는 일이 저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제가 면밀히 확인해 본 결과, 한 편의 설교로 수만 명, 심지어 50만 명, 500만 명이 주님을 믿었다고 했던 곳들의 결말은 다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굳게 맹세하며 소리 높여 환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하나님께 별로 영광이 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한 편의 설교를 듣고 5천 명이 주님을 믿은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아직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려는 자는 그분께 속한 백성이며, 하나님의 보배는 성품과 뚝심이 있는 사람들, 즉 제 안에 있는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큰소리친다고, 돌을 맞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저는 여전히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할 것입니다.
사람 안에 인내하는 믿음이 있는가, 어려움을 만났을 때 뒤로 물러서지 않는가? 애굽으로 팔려가거나 감옥에 던져졌을 때, 애굽에서 최고의 노예와 최고의 죄수가 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바로 그 믿음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이르러 기근을 만났을 때에도 '이곳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약속의 땅이다'라며 이러한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눈에 보배입니다!
저는 아주 젊었을 때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주님의 눈에 보배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전하는 화인 사명 신학은 설교 한 편으로 5천 명이 주님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추구하는 것은 우리 모든 형제자매들이 단순한 신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 웹사이트에서 언제 제자 훈련을 하느냐는 댓글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제게 일깨움을 주어, 8월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순한 신자를 원하신 적이 없으며,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자입니다.
우리는 절대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읽고 그저 좋다고만 생각하는데, 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지금 와서 좋지 않다고 여기는 이유는 한 가지 과정을 빠뜨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금을 채굴할 때 몇 톤이나 되는 금광석을 집에 가져다 놓았지만, 사실 그 안에서 가치 있는 것은 겨우 몇 조각의 금인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금광석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순금을 원하십니까? 금광석은 별 쓸모가 없고 금이라야 가치가 있습니다. 이 5천 명은 광석과 같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했지만,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라는 한 가지 단계를 잊어버렸습니다.
베드로가 설교 한 편으로 5천 명을 주님께로 인도한 것은 지금까지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5천 명 중에서 제자를 가려 뽑는다면 그 수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비전은 거룩하고, 하나 되며, 영광스럽고, 진리를 지키며, 싸워 승리하는 정병(精兵)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정병이 곧 제자이며,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자라야 제자라 부를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저 역시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보배를 선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함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붙잡힌 후 감옥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이튿날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이끌고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하기 시작하며,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담대해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들의 심문에 담대히 맞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오늘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우리에게 묻는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4:6-12)
이때 베드로가 한 말은 흠잡을 데가 없었으며, 참으로 성령께서 그들을 통해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내면의 선택, 우리의 성품과 믿음이 여전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자마자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들임을 알아보았는데, 이는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져 담대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에는 분명한 열매와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항상 성령 충만을 받기를 권면합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이 말씀 읽기를 대신할 수 없고, 말씀 읽기가 성령 충만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방언 기도가 마음으로 하는 기도를 대신할 수 없고, 마음으로 하는 기도가 방언 기도를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방언 기도가 지각을 넓히는 데 효력이 없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성경》도 열심히 읽어야 하며, 지각으로 기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 방언으로도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으로부터 능력을 얻어야 할 뿐만 아니라 지각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한 사람들이며 매우 대단하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 두 사람이 이 담대함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굳이 사도 바울을 크게 쓰실 필요 없이 사도 베드로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계속 복음을 전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의 서신서가 아니라 사도 베드로의 서신서를 주로 읽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을 받은 것은 분명 담대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위협하오니, 이제 주여 감찰하시옵고, 또 주의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주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또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주의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게 하옵소서.” 기도를 마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그들이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도를 전하니라. (《사도행전》 4:29-31)
성령 충만에는 신기한 역사가 따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이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표적과 기사가 따르더라도 너무 흥분할 필요는 없으며, 이는 매우 정상적인 일입니다. 《사도행전》 3장을 공부할 때 저는 표적과 기사가 하는 역할의 비중을 다소 낮추어 설명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며, 표적과 기사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것으로 착각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표적과 기사는 여전히 전파된 도를 확증하는 기초이지만, 단지 매우 초보적인 단계에 속할 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함을 얻어 담대히 말씀을 전했지만, 그들의 내면에는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마음이 부족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람이 지각적으로 설교 한 편에 5천 명이 주님을 믿었다고 해서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옳게 했다고 생각하고, 담대함이 생겼다고 해서 자기가 하는 모든 말이 다 옳다고 여기기 시작하면 완전히 망치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할지라도, 아직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내면의 믿음의 선택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만, 입으로만 하나님께 영광을 외치는 것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마음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한때 중국의 많은 시골 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표적과 기사도 많았지만, 훗날 교회들은 극도로 황폐해졌고 결말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우리 중에도 이 역사를 목격한 분들이 분명히 계실 것입니다. 이런 좋지 않은 결과는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 부족한 것은 바로 지각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며,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엄격한 학문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을 학구파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일들을 하나하나 명확하게 정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는 엄격한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과는 일하는 스타일이 완전히 다릅니다. 비록 저는 설교 한 편에 5천 명이 주님을 믿는 일을 겪어보지 못했지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표적과 기사가 따르고 모든 사람이 치유받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일 뿐입니다. 저는 결코 누군가가 치유받았다고 해서, 혹은 기도 한 번에 누군가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해서 흥분하지 않으며,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고자 합니다. 길거리에서 기도 영접을 시켜 결신했다고 흥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설교 한 편으로 5천 명이 주님을 믿는다 해도 차분히 그 5천 명을 들여다보면 과연 순금을 얼마나 가려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순간적인 감정의 고조로 한번 외치고 주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후에는 다루어야 할 거대한 육신이 남아 있으며, 사람의 육신을 다루어 내지 못하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일부러 억울한 일을 겪도록 몇 가지 상황을 배치해 두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를 들어, 어떤 사역에 참여했는데 소그룹 조장이 영 미숙해서 엉뚱한 소리를 해대고 당신을 다그치기까지 합니다. 그 결과 당신은 선악을 분별하는 태도에 빠져버립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선생님이 사람을 시험하고 계시는구나! 괜찮아! 우리는 시험을 견뎌낼 수 있어, 우리는 하나님의 눈에 보배니까!’ 그래서 저는 오히려 좀 미숙한 조장들을 가장 좋아합니다. 다만 그 미숙한 조장들도 계속해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사역을 하면서 자기가 정말 그 덫에 걸려 넘어졌다고 고백합니다. 그 덫에 걸려보고 나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신을 조금만 건드려도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 순식간에 야수와 같은 본성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음이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4:12)
저는 베드로가 구원의 도를 정말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입증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가 생각한 구원의 도라는 개념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제 생각입니다. 문자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이제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음이 무엇인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일들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머리카락이 바짝 서고, 표적이 나타나며, 사람이 치유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제게 묻습니다. "사람이 치유된 것이 목사님의 이름 때문입니까?"
당연히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셨다는 사실은 결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일 뿐만 아니라, 핵심은 우리 안에 믿음이 있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날 때부터 맹인 된 자가 보게 되고, 걷지 못하던 자가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그런데 그 대가가 "그래서 어쩌라고(So What)?"라는 반응으로 돌아오고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완전히 망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울증이 제 손을 통해 치유되었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오늘날의 제가 어떻게 있겠습니까? 제게 무슨 병 고치는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런 질병들이 치유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저의 믿음 때문입니다. 저는 환자가 오늘 치유되지 않으면 내일 반드시 치유될 것을 압니다. 이번 주에 낫지 않으면 다음 주에 나을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저는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을 때,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이라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저는 "그래서 어쩌라고?"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보배임을 알기로 선택했습니다. 이제부터는 그저 흥분했을 때 구호나 외치며 "주님! 주를 위해 죽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자신에게 "나는 하나님을 위해 태어났고, 하나님을 위해 이 세상에 왔으며, 하나님을 위해 살고, 또한 하나님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다면 저는 결코 내일까지 미루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이름입니까!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포로 된 자와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이며, 또한 저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동시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매우 중요하고도 충격적인 반응이 일어납니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신가, 정말 위대하시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의 하나님을 얻을 것이며, 어떻게 해서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로 하여금 얻게 하시는 것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 주님께서도 저를 얻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모든 무릎이 꿇고 모든 입이 찬양할 것입니다. 행해진 표적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한두 가지 표적을 행했다고 흥분하지 말며, 너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한 가지 일을 행하셨다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헌신하는 것은,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함께 성경공부를 해보시면 제 안에 참으로 전심으로 좇아가는 개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5천 명이 주님을 믿었다고 해서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여기며 그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입니다' 하고 거기에 안주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런 일로 흥분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어떻게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 5천 명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로 돌아오고,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며, 각자의 육신의 악한 행실을 완전히 죽이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사도행전》 4:33)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진 표적들이었고,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사도들은 큰 권능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증언하는 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며,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걷는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길이며, 마침내 우리의 육신을 십자가에 온전히 못 박는 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이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하나님께서 처음에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사도행전》 4:13-21)
사도들은 큰 권능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을 증언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도 베드로와 같은 이들은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표적과 기사는 믿는 자들에게 따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영원히 거하는 것은 믿음, 소망, 사랑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결코 믿음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소망에만 머물러 있지도 말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차원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차원이야말로 가장 높은 차원입니다.
사도들은 큰 권능을 얻어 어떤 일을 이루어낸 것을 매우 위대하게 여겼습니다. 사람의 내면이 흥분하면 믿음도 일어납니다. 그 후 성령이 임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지자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붙잡혀 사람들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듣고 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제사장들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며 대제사장들을 한 방 먹였습니다. 돌아와서 형제자매들에게 이 일을 전하자 다들 베드로가 정말 대단하다고 여겼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사람은 흥분하기 쉬우며, 흥분하면 자기가 한 일이 다 옳다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러면 완전히 망치게 된다는 점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이 큰 권능을 행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니 대단하다고 여겼습니다. 이때 그는 믿기 힘든 일을 행했는데, 지금까지도 누구든 이 일을 시도해서 제대로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밭과 집을 팔아 그 값을 가져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현대의 소련이 결국 무너진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말씀드리건대, 믿음과 지각이 모두 통해야 합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 한뜻이 되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들에게 가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사도행전》 4:23-24)
“그들이 우리를 위협하오니, 이제 주여 감찰하시옵고, 또 주의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주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또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주의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게 하옵소서.” 기도를 마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그들이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도를 전하니라. (《사도행전》 4:29-31)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사도행전》 4:32-35)
믿는 무리가 다 한마음 한뜻이었습니다. 당시 누가는 현장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누가의 시대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이 일을 전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겪은 이 역사는 그로 하여금 믿는 자들이 참으로 한마음 한뜻으로 믿었다고 확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린도 교회에 갔을 때, 고작 3050명, 많아야 100200명 정도인 것을 보고는 참으로 시시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당시 베드로가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설교 한 편으로 5천 명이 주님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았으니 아무도 그가 잘못했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 시절에는 일종의 인민공사와 같았지만, 나중에는 결국 황폐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교회가 황폐해졌는데도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았을까요? 당시 많은 신자들은 겉보기에 한마음 한뜻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한마음 한뜻으로 다른 사람들의 전답을 팔아 그곳에서 무위도식하며 빈둥거렸을 뿐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렸던 것일까요?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은 아직 오지 않으셨는데, 지금까지도 말세가 가까웠으니 어서 가산을 팔라고 사방에 선전하며 그리스도인들을 어지럽게 현혹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어떤 사람이 저를 찾아와 자기 교회에서는 집이며 뭐며 다 팔고 돈을 다 헌금한 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한마음 한뜻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중에 교회가 파탄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고 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의 평강과 희락에 있으며, 하나님의 뜻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뜻이었을까요? 많은 이들이 제각기 딴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한마음 한뜻이라 부르지만, 모두의 마음이 진정으로 하나 된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기적이며, 한결같이 이기적이어서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결코 잘못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땅을 한 조각씩 나누어 주시고 대대로 물려주게 하셨던 것입니다. 자고로 그 누구도 이기심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만 육신에 속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육신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핵심이며, 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양육은 바로 육신을 다루는 것입니다! 사람의 육신을 다루지 않으면, 그 안의 이기적인 마음이 언제 다시 살아날지 모르며 이는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 안에 온갖 문제들이 가득한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우리가 여전히 이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도 이것을 다 처리하지 못했는데, 사람들은 앉아서 ‘내 것도 네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이라는 식의 연구나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다루는 일에서 성공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개혁개방도 사람의 이기심과 사유재산은 침해할 수 없다는 원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자기 일이어야 적극성이 생기는 법이지, 자기가 다 일하고 돈은 남이 가져간다면 일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만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제자들은 아직 완전히 해결하지 못해 날마다 남에게 나누어 주면서도 속이 쓰려 죽을 지경일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 앞에 한 몫씩, 나누어 주는 것이 자기 것이 아니고 남의 돈에서 자기도 한 몫 챙길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을 사회 복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완전히 망칩니다.
우리 교회는 모든 사람이 게으름을 멀리하고 온종일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을 피하도록 훈련하며, 특별히 게으름을 철저히 다룹니다. 저는 여러분을 반드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사람으로 훈련시킬 것입니다.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밥만 먹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가치를 창출해야 합니다. 구원의 개념이 그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라면, 그것을 살아있는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그리스도인은 죽기 직전에 얼른 회개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이런 그리스도인을 보신 적이 있지요? 살아있을 때는 죄 가운데 살다가 죽기 직전에 얼른 회개해서 천국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화인 사명의 구원관은, 살아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살아내는 것이며,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으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창세기》를 읽어보시면 하나님이 창조의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여러분도 창조적인 형상을 살아낼 수 있습니까? 제가 가장 하기 싫어하는 일은 환자가 죽기 직전에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알 수 없으며, 이는 전부 죽어서 천국 간다는 논리 체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환자가 죽어가면 제게 얼른 와서 기도해 달라고 하는데, 제가 기도만 하면 그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을 만큼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그런 대단한 능력이 없으며, 그것은 전혀 실질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재물을 잘 관리하고, 올바른 일 하기를 잘 배워야 하며,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로마서》 14:17)
여러분이 일하지 않고 올바른 일을 하지 않는다면 밥도 먹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다음 구절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사도행전》 4:34-35)
가난한 사람은 득을 보고, 부유한 사람은 손해를 보며 부자의 재산을 빼앗아 나누어 먹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후 어느 세대든 이런 식으로 남의 재산에 얹혀살며 공산주의식으로 하려 해도, 사람의 이기심을 해결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베드로가 앞서 행한 일들을 다 잘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점차 담대해져서 설교하면서 치유와 축사를 행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들에게 큰 권능이 있었지만, 결국 마귀가 찾아와 작은 계략 하나로 교회를 흐물흐물하게 무너뜨렸고 그 후 수많은 문제들이 생겨났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행한 것을 기뻐하지 않으셔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일으켜 교회를 핍박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사방으로 흩어져 안디옥, 로마, 고린도 등으로 피신했고, 바울이 곳곳에 교회를 세우면서 그 교회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경험을 교훈 삼았습니다. 저 역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걸어간 길을 통해 우리 또한 값진 교훈을 배웠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한 가지 일을 잘했다고 해서 모든 일을 다 잘했다고 착각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어떤 자매의 남편이 그 자매에게 한 가지를 잘못했다고 지적하자, 자매는 몹시 화를 내며 반응했습니다. 자기가 다른 일은 잘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일을 잘한 것과 다른 일을 잘못한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여전히 이런 상태로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이 많아서, 무슨 지적을 받으면 자기가 또 다른 어떤 일은 잘했다고 항변합니다. 한 가지를 잘했다는 것이 무엇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가 잘한 일도 많았지만, 개인의 밭과 집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줌으로써 결국 아무도 일하지 않게 만들었고, 교회는 극도로 황폐해졌습니다. 사람의 육신을 다루지 않고, 양육도 없으며, 사람에게 내재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는다면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많은 교훈을 얻어 화인 사명 신학을 세웠으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걸어온 길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터무니없는 것들을 우리의 신앙 체계에서 점진적으로 완전히 제거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