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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로마서 4장 -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으라

2019-01-16 43,868 罗马书 亚伯拉罕 信心 效法 割礼 信心的路 信心的根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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罗马书04章-以亚伯拉罕为例
  • 1 如此说来,我们的祖宗亚伯拉罕凭着肉体得了什么呢?
  • 2 倘若亚伯拉罕是因行为称义,就有可夸的;只是在 神面前并无可夸。
  • 3 经上说什么呢?说:“亚伯拉罕信 神,这就算为他的义。”
  • 4 做工的得工价,不算恩典,乃是该得的;
  • 5 惟有不做工的,只信称罪人为义的 神,他的信就算为义。
  • 6 正如大卫称那在行为以外蒙 神算为义的人是有福的。
  • 7 他说:“得赦免其过、遮盖其罪的,这人是有福的。
  • 8 主不算为有罪的,这人是有福的。”
  • 9 如此看来,这福是单加给那受割礼的人吗?不也是加给那未受割礼的人吗?因我们所说,亚伯拉罕的信,就算为他的义,
  • 10 是怎么算的呢?是在他受割礼的时候呢?是在他未受割礼的时候呢?不是在受割礼的时候,乃是在未受割礼的时候。
  • 11 并且他受了割礼的记号,作他未受割礼的时候因信称义的印证,叫他作一切未受割礼而信之人的父,使他们也算为义;
  • 12 又作受割礼之人的父,就是那些不但受割礼,并且按我们的祖宗亚伯拉罕未受割礼而信之踪迹去行的人。
  • 13 因为 神应许亚伯拉罕和他后裔,必得承受世界,不是因律法,乃是因信而得的义。
  • 14 若是属乎律法的人才得为后嗣,信就归于虚空,应许也就废弃了。
  • 15 因为律法是惹动忿怒的(或译:叫人受刑的);哪里没有律法,那里就没有过犯。
  • 16 所以人得为后嗣是本乎信,因此就属乎恩,叫应许定然归给一切后裔;不但归给那属乎律法的,也归给那效法亚伯拉罕之信的。
  • 17 亚伯拉罕所信的,是那叫死人复活、使无变为有的 神,他在主面前作我们世人的父。如经上所记:“我已经立你作多国的父。”
  • 18 他在无可指望的时候,因信仍有指望,就得以作多国的父,正如先前所说:“你的后裔将要如此。”
  • 19 他将近百岁的时候,虽然想到自己的身体如同已死,撒拉的生育已经断绝,他的信心还是不软弱;
  • 20 并且仰望 神的应许,总没有因不信,心里起疑惑,反倒因信,心里得坚固,将荣耀归给 神,
  • 21 且满心相信 神所应许的必能做成。
  • 22 所以,这就算为他的义。
  • 23 “算为他义”的这句话不是单为他写的,
  • 24 也是为我们将来得算为义之人写的,就是我们这信 神使我们的主耶稣从死里复活的人。
  • 25 耶稣被交给人,是为我们的过犯;复活,是为叫我们称义(或译:耶稣是为我们的过犯交付了,是为我们称义复活了)。

2019년 1월 16일 성경공부 녹음

서론

주제를 정하는 것은 문맥과 한 맥락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쓴 글을 볼 때, 우리는 그가 무엇을 논하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읽을 때, 단지 어느 한 장이 어떤 문제를 논하고 있는지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각 장이 앞 장의 내용에 이어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반드시 저자가 표현하고자 한 의미를 읽어 내야 합니다. 내가 한참 동안 이야기했는데도 여러분이 전혀 다른 뜻으로 알아들었다면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어떤 말을 한 후 여러분이 자신의 이해를 말했는데, 내가 “나는 그런 뜻이 아니었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니요, 당신은 바로 그런 뜻으로 말했어요”라고 한다면,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뜻대로 들으려고 한다면 더 이상 소통을 이어 갈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나는 당신을 무시한 적이 없어요”라고 말했는데, 여러분이 “아니요, 당신은 분명히 나를 무시했어요”라고 한다면, 우리가 계속 이런 식으로 대화해 나가는 것이 정말 힘들지 않겠습니까?

세상에는 놀라운 일이 많이 있는데, 그중 가장 놀라운 한 가지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같은 사람들은 믿음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왜 많은 교회에 기적과 이적이 부족할까요? 오늘날 이 시대의 많은 교회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하지 않으신 일은 오히려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실 오늘 어디를 가든 반드시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할까요? 다시 말해, 자신이 누구를 믿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행동은 석가모니처럼 한다면, 그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다면, 자신이 정말 예수님을 닮았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지 않았다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반드시 자신이 누구를 닮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길에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직접 실천해 보고 알게 된 방법입니다. 또한 《성경》을 읽은 후 실천하면서 발견한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예수님을 닮지 않은 이유는 믿음의 길을 걷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 가는 이유는 제가 걷는 길이 믿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며칠 전 한 자매의 집에 갔는데, 그 자매의 두 아이가 제 곁에 둘러앉았습니다. 제 입에서는 종교적인 용어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 자매의 아이들이 제 곁에 앉아 있기를 좋아했을까요? 그 아이들은 제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모두 하나님께서 제 손을 통해 행하신 일들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기까지

오늘 《로마서》 4장의 주제로 정한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것입니다. 1장에서 말하는 것은 이 복음이 본래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의는 믿음에서 믿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가는 과정은 모두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의 믿음이 조금씩 자란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과정은 모두 아주 작은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어느 날 점심에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늙은 자매가 평생 수고하며 살아왔는데, 몸에 어깨가 뻣뻣하고 불편하며 등이 아픈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그 자매에게 치유받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그 자매는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자매에게 겨자씨만 한 믿음을 풀어 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자매님을 위해 기도해 드릴게요!” 그러자 그 자매의 어깨와 등이 훨씬 풀렸습니다.

믿음이 이루어 내는 방향

사물을 볼 때 추세를 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 사물을 보면서 추세를 보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때때로 제가 몇 사람을 인도하여 기도하면 몸 상태가 많이 좋아지는데도, 그 사람은 여전히 이렇게 말합니다. “제 몸 상태는 별로 변한 것이 없어요.” 저는 그 사람의 몸의 통증이 많이 줄어든 것을 볼 수 있어서 이렇게 묻습니다. “전보다 조금 좋아지지 않았나요?” 그러면 그는 “확실히 전보다 많이 좋아졌어요”라고 대답합니다. 제가 계속 묻습니다. “그런데 왜 여전히 별로 변한 것이 없다고 말하나요?” 그러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몸의 통증 증상은 아직 남아 있으니까요.” 그의 사고방식에는 오직 한 가지 개념만 있습니다. 완전히 치유되었거나, 아니면 치유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추세를 보는 법을 배우라고 가르치고 싶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믿음이 조금씩 자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게나 굴을 기른다고 합시다. 오늘 가서 보면 어제와 크기가 똑같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을 볼 때 반드시 추세를 보아야 합니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육적인 사람들은 믿지 않기 때문에 짐승처럼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믿지 않을 때는 영생이라는 관념이 없고, 모든 목적이 이 세상을 위해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상태를 짐승처럼 사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짐승이 어떻게 사는지 사람도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당하는 일이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이것이 죽으므로 저것도 죽고, 다 한 호흡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은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전도서》 3:19)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되는 이유는 믿음 때문입니다. 제가 그렇게 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이유는 제가 믿음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은 본래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그 능력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니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은 겉만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

《로마서》 2장에 이르면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에 따라 사람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도 인과응보의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이것을 행위로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행위로 사람을 심판하실까요? 우리가 보는 것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사람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대로 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행위를 심판하는 것은 사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일 뿐이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에 따라 사람을 심판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의 세계를 믿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해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육적인 일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심판하시는 본질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에 따른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악한 생각으로 가득하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속에 있는 생각에 따라 그를 심판하십니다. 이 시대에 잘 살고자 한다면 반드시 생각과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고 믿지 않는 것이 사람의 일생이 어떻게 될지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2장에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3장은 믿음이 근본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붙잡기를 좋아하지만, 본질을 붙잡는 사람과 겉모습을 붙잡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근본을 붙잡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선택지들을 많이 기록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읽다 보면 잘못된 방향으로 읽게 되고, 결국 어디까지 읽게 됩니까? 겉으로 드러난 현상 속까지 읽어 들어가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을 이끌어 《성경》 안에 있는 아주 본질적인 것들을 붙잡게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가 바울의 서신을 읽을 때 어려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너무 읽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글자 하나하나는 모두 아는 것 같고, 문장도 모두 읽을 수 있는데, 다 읽고 나면 바울이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4장에서 저자는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을까요? 우리는 근본을 붙잡고, 행위는 하나의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은 믿음의 결과이고, 또 어떤 사람이 저런 행위를 하는 것은 믿지 않는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횡령을 하려는 것은 경찰이 자신을 잡지 않을 것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믿지 않음이 있기 때문에 결국 어느 날 붙잡히고, 그는 그 자리에서 탄식합니다. “내가 왜 붙잡혔지?” 붙잡힐 때까지도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얼마나 이상합니까? 일을 할 때 그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까?

또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갔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해 보았고, 다음 날에도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세 번이나 신호를 무시했는데도 아무 일이 없자 네 번째에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다섯 번째에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고를 당해 목숨까지 잃었습니다. 시속 60킬로미터로 달리던 차가 부딪혔다고 합시다. 시속 60킬로미터로 달리는 두 대의 차가 서로 부딪히면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볼보를 사야겠어요. 볼보는 세계에서 가장 단단한 철로 만든 차니까요”라고 말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만, 그런 철도 여러분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늘 신호를 무시하고 달린다면 결국 안 되는 것입니다. 그날 저는 볼보 차량이 가운데가 두 동강 난 영상을 보았는데, 현장이 너무 처참했습니다!

제가 주님을 믿는 과정에서 차량 사고로 목숨을 잃은 두 명의 그리스도인을 직접 배웅했습니다. 한 사람은 제가 전에 다니던 교회의 젊은 목회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주님을 매우 사랑하던 부부였습니다. 이것도 심판의 결과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 듣기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장례식에서 제가 강단에 올라가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돌을 던지지 않겠습니까? 저도 감히 올라가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어떤 일이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들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동차를 목숨처럼 사랑했고, 결국 자동차와 함께 멸망했습니다. 이것이 믿지 않은 결과입니다.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의지하여 자랑할 수 없고, 본질과 마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영에 속한 것이 중요하지 의문에 속한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의문을 머릿속에 새긴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창세기》 12장 1절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새기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세기》 12:1-3)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단순히 인두로 의문을 이마에 새기려 하지 말고 마음 깊은 곳에 새겨야 합니다. 이 일은 영에 속한 것이 중요하지 의문에 속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배우고 본받기

1장, 2장, 3장은 믿음이 근본이라는 것을 말하고, 4장은 어떤 믿음을 말합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믿음입니다. 이렇게 읽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습니까? 사실 제가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본받다’라는 두 글자를 정말 머릿속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본받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최근 저는 붓글씨 연습을 좋아합니다. 요즘 붓글씨 도구는 아주 편리합니다. 흰 물에 적셔 글씨를 쓰면 글씨가 검은색으로 변하고, 반복해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아주 깨끗해서 검은 먹물을 한 병 마련할 필요도 없습니다. 조금만 조심하지 않으면 사방에 먹물이 묻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받음입니다. 유체를 쓰는 사람에게는 유체 서첩이 있고, 구체를 쓰는 사람에게는 구체 서첩이 있으며, 안체를 쓰는 사람에게는 안체 서첩이 있습니다. 왜 서첩이 있어야 합니까? 서첩 없이 백지 한 장을 주고 열심히 연습하게 하면 되겠습니까? 연습해서 쓸 수 없습니다. 본받을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무를 비벼 불을 피우는 것부터 배우기 시작한다면, 늙을 때까지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을 것이고, 인생 70~80년을 살아도 여전히 네 발로 기어 다닐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일 중 사람에게 배우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일을 사람에게 배웁니다. 수학을 배울 때도 끈 하나를 묶어 매듭 하나를 만드는 것부터, 끈 두 개를 묶어 매듭 두 개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선생님에게 배웁니다. 한자는 옛사람들이 발명했지만, 우리는 선생님이 어떻게 쓰는지를 배웁니다. 서첩을 따라 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의 글씨를 따라 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삶과 일에서 ‘본받다’라는 두 글자를 모른다면 정말 슬픈 일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본받아야 합니까? 이 믿음의 길은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아브라함을 본받는 데서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는 믿음의 길을 개척했고, 그 길은 계속 크게 발전해 왔습니다. 그의 아들 이삭은 아브라함을 뛰어넘었고, 야곱은 이삭을 뛰어넘었으며, 요셉은 야곱을 뛰어넘었습니다.

본받으려면 뿌리까지 본받아야 한다

최근 우리는 성경 개론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모든 것을 빨리 해야 하는 즉석식품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느리면 안 됩니다. 며칠 전 홍콩에서 지하철을 타려고 서둘렀는데, 홍콩 사람들은 걸음이 빨랐고 저도 그렇게 빨리 걸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너무 빨리 걸어서 낮인데도 별이 보일 정도였습니다.

이 길은 아브라함이 시작한 믿음의 길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뿌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 이후의 모세, 사무엘, 다윗, 솔로몬, 베드로, 요한, 바울도 아브라함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믿음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뿌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처음부터 본받으려면 뿌리까지 본받아야 합니다. 그 뿌리는 아브라함입니다.

과연 믿음인가, 행위인가

우리 하나님께서는 많은 함정을 파 놓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만 된 것이 아니라 행위로도 되었다.” 이것은 참 흥미로운 일입니다. 모세는 그렇게 기록하지 않았고, 하나님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의로 여기셨느니라. (《로마서》 4:3)

이 말씀은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본래 죄인이었는데, 오늘 하나님께서 나를 의인으로 여기시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행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께서 아직 나를 의롭다고 여기지 않으셨다면, 나는 여전히 저주 가운데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저주 가운데 살면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 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내게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내 마음 전체가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이 기록한 것은 무엇입니까? 석가모니의 개념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분은 예수님이지 석가모니가 아닙니다. 불경이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불경을 잘 읽고 석가모니를 잘 본받으십시오. 나는 《성경》을 믿으므로 아브라함을 잘 읽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믿음에 행위를 더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만 된 것이 아니라 행위로도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을 조금 오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저를 비판하더라도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이것은 단지 제 견해일 뿐입니다. 제 견해는 중요하지 않고 《성경》의 견해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잘 읽어야 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전하기

제가 말한 것 중에는 바울이 말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야고보서》를 읽어 보니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서 조금 혼란스러웠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이 함정은 너무 깊습니다. 제가 야고보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아니면 바울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나중에 저는 바울이 영광스럽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교회를 세웠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야고보가 말한 것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하고 싶지 않았고, 저는 바울을 본받는 데 집중했습니다.

바울이 제게 제시한 길은 간단합니다. 예를 들어 한 늙은 자매를 만났는데, 그 자매가 평생 수고했기 때문에 몸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저는 이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건강하게 살고 싶으세요?” 자매는 다급하게 “그럼요. 건강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라고 대답합니다. 원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자매님과 함께 기도하기 시작할게요”라고 말합니다.

또 예를 들어 제 동창 한 명에게 종교적 믿음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가 저에게 식사를 대접하던 중 팔을 내밀었는데, 팔 근육이 모두 위축되어 힘이 전혀 없었고 생수병조차 들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면 팔이 정상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믿습니까? 팔이 정상으로 회복되기를 원합니까? 저는 바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저도 말을 꽤 잘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말만 거창하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효과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팔을 붙잡고 5분 동안 기도했고, 그의 힘은 정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그의 안에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이 좋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정말 좋으십니다! 태산 아래에서 이마를 땅에 대고 세 걸음마다 한 번씩 작게 절하고, 다섯 걸음마다 한 번씩 크게 절하면서 태산 정상까지 올라가 머리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사람들은 “아이고, 저는 아직 충분히 경건하지 못해요!”라고 말합니다. 그 경건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하나님께 은혜가 충만하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형제자매들은 오늘부터 한번 시도해 보십시오. 요 며칠 저는 한 자매의 집에 머물고 있는데, 그 자매의 어머니가 하루 종일 멍하게 웃고 계셨습니다. 저는 마음에 큰 부담을 느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매님, 이제부터 부모님께 ‘아버지, 어머니, 주님을 믿으시겠어요?’라고 묻지 마세요.” 부모님이 “나는 안 믿는다”라고 대답하면 대화가 거기서 끝나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대신 이렇게 말해 보십시오. “아버지, 어머니, 지금 몸이 이렇게 힘든데 조금 좋아지고 싶으세요?” 그러면 부모님은 “그럼, 좋아지고 싶지”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인도하여 함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인해 우리 가족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십니까!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우리는 근본으로 돌아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 믿음은 아마 겨자씨와 같을 것입니다. 저는 자주 제 믿음이 거의 죽어 가고 있다고 말하지만, 거의 죽어 가는 믿음이라도 역사합니다. 그것이 꺼지지만 않게 하면 믿음으로 여전히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바울이 기록한 《성경》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용했지만, 바울이 인용한 것은 《창세기》의 원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의인으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굳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뿐 아니라 행위도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의인으로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을 소유하기

아브라함은 가족을 데리고 가나안 땅에 도착했고, 하나님께서는 “이곳은 내가 네게 준 약속의 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국 흉년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이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까? “아이고, 하나님, 잘못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방금 약속의 땅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흉년이 들었습니다. 제가 가야 합니까, 가지 말아야 합니까? 남아 있으면 흉년 때문에 굶주리고, 남아 있지 않으면 또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곧바로 이집트로 내려갔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바로에게 빼앗겼지만, 오히려 이집트 땅에서 큰 재물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꿈으로 나타나 사라를 돌려보내게 하셨고, 바로는 하나님을 노엽게 할 수 없어서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내면서 소와 양까지 함께 주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일입니까? 사실 이것이 바로 겨자씨만 한 믿음입니다.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주 《성경》의 말씀을 문맥에서 떼어 내어 봅니다. 저는 《성경》을 읽는 것을 좋아하고, 이 말씀이 어떻게 된 것인지 매우 알고 싶어 합니다. 모순되어 보이는 부분을 볼 때면 저도 혼란스럽고 곤란하지만, 계속 깊이 파고들어 가면 역시 바울이 말한 것이 좋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일을 잘했을 뿐 아니라 말도 잘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을 말했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하는지도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잘 읽어야 합니다. 먼저 자신의 뜻을 세워 놓고 《성경》을 가지고 자신의 뜻을 논증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뜻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목적은 뿌리까지 읽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기 시작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지혜로움을 배우기

오늘날 믿음에 대한 해석은 매우 많지만, 함정도 많습니다. 사람마다 믿음을 해석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어떤 형제가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하지 못해 매우 힘들어하고 있기에 제가 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이라면 벌써 ‘다른 길로 바꿨을’ 거예요. 이 일을 더 이상 붙들고 씨름하지 않을 겁니다. 다른 곳에서 시험을 보든지, 아니면 자동변속기로 시험을 보세요.” 곁에 있던 한 자매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평소에는 믿음으로 끝까지 견디라고 가르치시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왜 견디지 말라고 하세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다른 길로 바꾸는 것은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저는 아브라함을 본받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도착했고, 하나님께서는 그곳이 약속의 땅이라고 말씀하셨지만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방향을 바꾸어 이집트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금 더 지혜로워져서 무엇을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끝까지 붙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폐기되지 않습니다. 내가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도 그 땅은 여전히 내 것입니다. 야곱이 끝까지 붙든 것은 장자의 명분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속이는 것조차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연하게 견디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견뎌야 하고 언제 견디지 말아야 합니까? 이 일은 분명 매우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본으로 돌아가 아브라함의 일생이 어떠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모든 일에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라는 노인은 매우 영리했습니다. 그는 계산을 잘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버티자니 식량값이 금값처럼 비싸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집트에 가서 식량을 좀 운반해 오자.”

그래서 이집트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계산한 것은 수익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수익을 계산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운전면허를 따는 데 들어간 돈이 다른 사람이 면허를 몇 개나 딸 수 있는 비용이라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게다가 저는 그에게 급여도 지급해야 합니다. 그가 한 시간을 지체하면 한 시간의 운전 비용도 지급해야 하고, 한 시간의 업무를 지체하면 저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돈만 주는 셈이 됩니다. 한 시간에 200RMB라면 300시간을 시험 보는 동안 6만 위안이 들어갑니다. 그 자신도 1만 위안이 넘는 돈을 부담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면허를 따는 데 2천 위안 정도만 썼는데, 그는 7만 위안이 넘게 썼습니다. 우리는 수익을 계산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방법을 본받는 일은 제가 가르쳐 줄 수 없고, 천천히 배워야 합니다.

영적인 산을 끊임없이 오르기

행위에 따라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는 의인이라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본래 죄인이었지만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단지 그렇게 여기신 것뿐입니다. 이해했습니까? 본래 의인이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행위에 따라 판단한다면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애초에 합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조차도 합격할 수 없습니다.

행위에 따른 것이라면 은혜가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형제자매들이 배워야 할 한 가지 교훈은 결코 하나님과 거래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향을 하나 피워 드릴 테니 제 일을 하나 해결해 주세요”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행위에 따라 계산하는 사람은 모두 저주 가운데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거래할 수 없습니다. 우주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것인데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과 거래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단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 떼를 섬기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많이 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잘못 알아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기신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일단 의인으로 여김을 받으면 일이 쉬워집니다. 죄인은 저주 가운데 살고 마귀는 합법적으로 그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지만, 우리 가운데 많은 형제자매들이 아주 조금이라도 믿기 시작하면 마귀는 더 이상 우리를 무너뜨릴 권세를 갖지 못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마귀를 물리칠 수 있고, 우리의 몸은 해방을 얻게 되며, 우리의 믿음도 날마다 자라나 언젠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자라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예수님을 닮을 수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저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저는 올해 작년보다 더 예수님을 닮았고, 작년에는 재작년보다 더 닮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장의 과정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어느 단계의 계단에 서 있든지 다음 계단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의 일생이 놀라움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매일 새로운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실 매우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사람이 날마다 똑같이 산다면 하루만 살아도 충분합니다. 우리는 오늘이 어제와 달라야 하고, 내일이 오늘과 달라야 합니다. 매일이 새롭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브라함을 본받기 시작해야 하는 이유이며, 날마다 하나님을 계속 경험하고 영적인 정상에 계속 올라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할례받기 전에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음

바울은 아브라함이 언제부터 믿기 시작했는지를 논하면서, 유대인들이 자주 자랑하던 한 가지를 들었습니다. 바로 할례입니다. 사실 할례라는 것이 무엇을 자랑할 만한 일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남성의 생식기에 작은 수술을 하는 것입니다. 듣기만 해도 매우 난처한 일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할례를 자랑하기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에 이미 수백 년 동안 나라를 잃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 두 나라를 멸망시키셨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할례를 이야기했습니다. 바울 시대에 이르러 로마의 그리스도인들도 할례를 행했습니다. 유대 민족 전체가 할례와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논쟁한 것은 할례와 율법은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며,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가 본받는 것은 아브라함이 소유했던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아브라함의 믿음도, 아브라함의 모습도 없었습니다. 단지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도 실제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 시대에 이르러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는데, 모세가 순종하지 않자 하나님께서 모세의 목숨을 거의 거두실 뻔했습니다. 그렇다면 할례가 과연 중요한 것입니까? 읽고 나면 우리는 모두 혼란스럽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의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혼란 가운데 있었습니다. 바울이 논한 것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의인으로 여기셨습니까, 아니면 할례받은 후에야 의인으로 여기셨습니까?

사실 아브라함은 할례받기 전에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받기 전부터 믿음의 길을 걸었고, 할례받은 후에도 여전히 믿음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는 핵심이 아니며, 믿음이 핵심입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 있는 사람이 되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근본입니다. 사실 할례를 행하는 것도 믿음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할례를 받았더라도 믿음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일을 행했을 뿐이며, 피부에 수술을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할례받은 사람만 의인으로 계산한다면, 아브라함이 할례받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계산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도 매우 이상하게 느낍니다. 《성경》의 《야고보서》를 포함해서, 저는 그 안의 많은 말씀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같은 부유한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할례받은 사람만 의인으로 여김을 받는다면 아브라함은 할례받지 않았을 때 제외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전에 이미 그를 의인으로 여기셨습니다. 다만 믿음의 길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또 하나의 믿음의 시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셨고, 아브라함은 이미 나이가 들었지만 개의치 않고 할례를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온 집안의 남자들에게도 모두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남자들에게 남성의 생식기에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모두 순종하고 동의했습니다.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정에서 어떤 일을 추진하려고 하면 많은 사람이 반대합니다. 예를 들어 자녀의 학업에 관한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는 것도 매우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말한다고 해서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온 가족이 동의했고, 수술 후 며칠 동안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할례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전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할례받은 후에도 의인으로 여김을 받았다면,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할례를 받았든 받지 않았든 모두 믿음에 따라 의인으로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본질이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 모든 형제자매들은 본질을 붙잡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율법과 믿음, 어느 것이 더 큰가

또 혼란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이 모세의 율법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묻습니다. 《창세기》는 모두 모세가 기록한 것인데, 모세 이전에는 《창세기》가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창세기》의 저자는 율법서인 《레위기》와 《신명기》도 기록했습니다. 《신명기》를 읽으면 여호와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지켜 행하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중 하나가 할례입니다. 그러면 율법의 기능이 갑자기 복잡해집니다. 우리는 과연 지켜야 합니까, 지키지 말아야 합니까? 오늘날 우리도 혼란스러운데,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읽었다면 혼란스럽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은 어려서부터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성경》에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가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는 매우 엄격한 규정도 나옵니다.

모세 이전에는 《창세기》라는 책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읽는 모세오경의 《신명기》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지켜 행하면”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사실 할례도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여기서 율법의 기능은 복잡해지고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 역시 할례와 율법 사이의 충돌로 인해 큰 혼란을 겪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율법서를 배웠고,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그것을 명령으로 여겼습니다.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할례를 받지 않으면 끊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는 정말 심각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이 참으로 깊다는 것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깨닫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무엇을 말하는지 반드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율법의 기능을 분명히 말해야 하므로, 바울은 여기에서 율법을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합니다. 만약 율법이 근본이라면, 율법이 등장한 400~500년 동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무효가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근본이고 무엇이 근본이 아닙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근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그의 믿음을 본받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후에 주어진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약속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약속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며, 값없이 받은 은혜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 온전해질 수 없다면, 우리는 오직 받는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보면서도 우리가 육신으로 완성하려고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하나님의 영을 의지하여 거룩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은 믿음 안에서 계속 받아 누리는 것이지, 행위로 얻어 내는 은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을 했습니까? 율법은 하나의 기준선을 그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저주를 받지만, 믿음은 그 기준선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오늘 우리는 율법을 행함으로 살아야 합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율법을 뛰어넘어야 합니까?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생에 필요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충족되는데, 사람이 또 음모와 술수를 부릴 필요가 있습니까? 사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정직하고 떳떳하게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율법에 속한 사람이든 율법 밖에 있는 사람이든,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사람은 모두 함께 약속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뜻은 이렇습니다. 율법을 받았더라도 믿음이 없으면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받았고 큰 믿음이 있다면 율법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속한 사람도 믿음이 있으면 약속을 받을 수 있고, 율법이 없는 사람도 믿음이 있으면 약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닮았는지가 중요하다

여러 민족의 조상이란 무엇입니까? 반대로 말하면 우리는 모두 아브라함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아브라함의 모습을 가져야 하며, 아브라함은 우리 믿음의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 누구를 닮았는지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의 아이를 보고 “당신 아이는 옆집 누구누구네 아이를 닮았네요!”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듣고 기분이 좋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아브라함을 닮지 않고 옆집 왕 씨를 닮았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누구의 자녀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옆집 왕 씨를 닮아도 살아갈 수는 있지만, 사탄을 닮았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은 아브라함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본보기라는 것을 알고 그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믿었습니까? 그는 할례받기 전에 믿었습니다. 할례 전에도, 할례 후에도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00여 년 후에 율법이 나왔습니다. 율법이 아브라함을 대신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되도록 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소망이 없을 때에도 소망을 품게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라함의 후손인 우리는 소망이 없을 때에도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참 좋습니다. 우리는 자주 소망이 없는 상황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망이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환경을 살펴보면, 마윈이나 마화텅 혹은 다른 창업의 거물이 되고 싶어도 아무런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최근 저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중학교 때 공부를 잘하지 못했고, 고등학교 때도 그랬어. 대학에서는 시간을 모두 놀면서 보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사실 조건이 없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소망을 품는다면, 아브라함을 믿는 사람이 약속을 받는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소망이 우리로 계속 믿게 한다

오늘 우리 교회의 몇몇 형제자매들은 처음 왔을 때 모두 월급을 받으면 그달에 다 써 버리는 사람들이었지만, 지금은 매우 좋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생님이 전하는 것은 성공신학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월급을 다 써 버리는 상태보다 성공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하나님의 약속을 끌어내야 합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고 소망이 없을 때에도 여전히 소망을 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좋은 상태입니다. 사람은 소망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소망이 없으면 하루하루 살아도 나아지는 것이 없고, 살아 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조건에서도 여전히 소망을 품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중국인은 매우 대단합니다. 지난 세기 1960년대에는 로켓도, 미사일도, 위성도 전혀 없었지만 중국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건이 있으면 올라가고, 조건이 없으면 조건을 만들어서라도 올라가자.” 오늘 이 말은 여러분에게도 적합합니다.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을 위해서만 기록된 책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도 기록된 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죽고 수백 년이 지난 후에야 이 책이 완성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대단합니다. 믿음으로 말하면 아브라함은 고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에게 아무런 조건이 없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브라함을 본받아 계속 믿음을 세워야 합니다. 믿음을 실천하는 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좋은 본보기가 되셨습니다.

헛된 믿음에 관해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게 “네가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헛된 믿음이 있었습니까? 어떤 목회자에게 이 질문을 한다면 아마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고 무화과나무가 죽었습니다. 제자들이 놀라워하자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바다로 옮기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예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만나 “주님, 저도 물 위를 걷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이라면 많은 사람이 “분수를 모르는군요”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물 위를 걷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기록되어 있을까요? 성경은 여러분이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960년대에 한 목회자가 변속기어가 있는 자전거를 갖고 싶어 했는데, 나중에 정말 그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런 요구를 이루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람보르기니를 갖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전에 이 예를 들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께 구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잊었습니다. 단지 물건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므로 얻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구한 적이 있습니까

저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에서 자주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합니다. 그래서 병든 사람이 제게 오면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어떻게 하실지를 생각합니다. 저는 자주 자신에게 묻습니다.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이 예수님 앞에 와서 치유를 구한다면 예수님께서 그를 치유하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제 앞에 온다면 저도 그를 치유해야 합니다.

나병 환자와 걷지 못하는 사람이 예수님께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모두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저도 그분을 본받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결과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하며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실 때까지 계속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로마서》를 읽으면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이 믿는다면 계속 하나님께 죄를 고백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아직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신 것처럼 계속 죄를 고백합니다.

제 기도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예수님께서 이미 저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병들어 예수님께 치유해 달라고 구한다면, 마치 예수님께서 그를 치유하기를 매우 원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치유를 받을 수 있습니까? 자신이 이미 용서받았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진정한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걷는 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미 용서받았다는 것을 믿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이미 저의 허물을 지워 주셨습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마귀는 물러가라! 너는 내 몸에 불법으로 거주하는 자다. 내 몸은 성령의 전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이미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 것처럼 기도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면 우리의 믿음이 기초를 갖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믿음 안에서 달리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의 병이 지난 수년간의 수고로 인해 생긴 것이라 해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음에서 살리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대신할 수 없고, 하나님께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 앞에 나아올 때 절대로 우리 하나님께서 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할 수 없다고 느낀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마십시오. 사실 우리보다 강한 사람도 많은데, 하물며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어떠하시겠습니까?

우리 믿음에 기초가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우리를 위해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에게서 모든 저주를 제거하실 수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러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 안에서 계속 성장하고, 계속 거룩해져 예수님의 모습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마귀와 원수를 대적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아직 얻지 못했어도 얻은 것처럼 여기고, 모든 일에서 그렇게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도 그렇게 확신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끌어내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약속을 받으려면 일어나 싸워 승리하고 약속의 땅을 차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하는 진리입니다.

결론: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기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의 믿음은 수천 년 뒤의 일까지 내다보았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4천 년 전의 아브라함을 본받고, 3천 년 전의 다윗을 본받으며, 2천 년 전의 예수님을 본받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사방이 적에게 둘러싸인 것처럼 보여도 곳곳에 믿음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공격을 받아도 싸이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소망과 기대가 있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가 보기에 오늘날 이것저것 두려워하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주 만물을 붙드실 수 있는데, 지구 위의 작은 존재인 여러분과 나를 붙드시지 못하시겠습니까? 우리 형제자매들이 모두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후손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하나님께서 모두를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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