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계속해서 영생의 도를 나누겠습니다. 다 듣고 나서 별다른 느낌도 없고 생각도 없을지 모르지만, 이는 여러분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된 일입니다. 사람이 살아내는 결과는 머릿속에 있는 논리 체계가 구체적으로 반영된 것입니다. 여러분 머릿속에 있는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산다면, 여러분은 평생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게 됩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만약 머릿속에 있는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면, 여러분은 평생 하나님의 기쁨 안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때로는 귀신도 여러분을 건드리기 귀찮아하고 건드릴 생각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귀신을 보내어 여러분을 좀 흔들어 놓으실 때가 있습니다. 왜일까요? 여러분이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영생을 얻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은 영생의 도 시리즈의 네 번째 시간으로, 제목은 "영생을 얻는 태도"입니다. 영생을 얻는 태도에 대해 말하자면,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태도도 없습니다. '영생을 얻는다고? 영생이 도대체 뭐야? 그게 밥 먹여 주나?' 좋습니다. 영생을 밥으로 삼을 수 없다면 세상을 붙잡고 밥을 드십시오. 이 세상에 대한 사람의 소망이 큰 만큼 실망도 큽니다. 마음에 두고 집착하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집착하는 것이 많은 만큼, 살아가는 것은 그만큼 고통스럽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동물의 세계 다큐멘터리 보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거기 나오는 내용이 정말 흥미롭습니다. 들개 두 마리가 뼈다귀 하나, 썩은 시체 하나를 두고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왜 그럴까요? 그 뼈다귀가 살아가기 위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에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고 보니 그 들개가 생각하는 방식이나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이나 똑같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것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기를 쓰며 붙잡으려 합니다. 그들은 그것들이 아주 실재적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다 온갖 병을 얻고, 붙잡고 또 붙잡다가 결국 암에 걸리지 않습니까? 암에 걸리고도 영생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전히 모릅니다.
세상에 헛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예로부터 진시황과 한무제, 다들 진시황과 한무제가 누군지 아시지요? 그들이 생각했던 것은 뼈다귀 하나를 두고 다투는 개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알렉산더, 칭기즈칸, 당태종, 송태조도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다 흙으로 돌아갔는데, 무엇을 얻었습니까? 역사 속의 이런 인물들을 보십시오. 무엇을 얻었습니까? 영웅호걸을 숭상하는 자들도 다 이렇습니다. 삼국지를 논하자면 조조, 손권, 유비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사람은 이렇습니다. 그 들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에 이르러서야 제가 이런 것들이 매우 허무하다고 느낀 것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이것이 꽤 무의미하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살아갑니다. 어쩌면 제가 말하는 사람이 바로 여러분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대단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고 계십니다. 이제는 "돼지가 그렇게 생각하듯 사람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최근 우리 가운데 한 자매님의 어머니가 남아선호 사상이 심했습니다. 그런 것에 왜 집착합니까? 아들 하나 낳아 놓고는 그 아들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매일 그 아들 걱정만 했습니다. 사실 제 어머니도 예전에는 그러셨습니다. 이 자매님의 어머니는 2년 동안 교통사고를 네 번이나 당했는데, 이번에는 분쇄 골절상을 입었습니다.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지금도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네 번의 사고 동안 본인이 남을 들이받거나 남이 본인을 들이받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소한 일들을 너무 무겁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께 털어놓자면, 제 어머니가 왜 치매에 걸리셨을까요? 누가 자신을 부양할지 온종일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여든이 넘었고 자녀들도 다 컸는데 노후 부양을 걱정합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큰아들을 믿자니 미덥지 못하고, 막내아들을 믿어야 하나. 막내아들을 믿자니 막내는 이렇고 저렇고..." 그러다가 결국 거짓의 영을 불러들이고 거짓말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제가 말씀드립니다. 네 번 골절되고 네 번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아들만 마음에 두고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한번은 제 어머니가 자녀들 걱정을 하셨습니다. 물론 저를 가장 걱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잘 살고 있는데 뭘 걱정하겠습니까? 어머니는 잘 살지 못하는 자녀들만 염려하셨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부모는 잘 살지 못하는 자녀를 늘 마음에 둡니다. 버스에서 내리다가 돌을 헛디뎌 발목을 삐끗하셨습니다. 엄동설한에 버스 정류장에 주저앉아 꼼짝도 못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긍휼히 여기셔서 제 마음에 어머니께 빨리 전화를 걸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전화를 걸어 "어디 계세요?" 하니 "버스 정류장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발목을 삐었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엄동설한의 동북 지방 밖은 가만히 서 있을 수도 없는 추위입니다. 제가 손으로 발목을 붙잡으라고 하고 기도를 해드렸더니, 5분 남짓 만에 통증이 풀렸고, 5분 만에 완전히 풀려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온전치 못한 자녀들을 향한 염려가 얽매임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얽매이게 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을 내려놓으십시오. 무엇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든 그것을 내려놓으십시오. 알아들으셨습니까? "내가 나 자신을 넘어지게 하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신다면, 자기 자신을 내려놓으십시오.
사람이 영생을 갈망하는 만큼 세상의 득실을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 물처럼 담담하게 여길 때 사람의 내면은 그만큼 강해지고, 하나님을 그만큼 기쁘시게 하며, 그 안에서 나오는 삶의 결과도 그만큼 기쁨으로 충만하여 마음 상할 일이 없습니다. 돌을 헛디뎌 발목을 삐는 것도, 사람이 이 영생의 도를 알지 못하고 영생의 도가 얼마나 좋은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영생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영생을 사모합니까? 왜 이런 영생을 얻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생의 삶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의미가 없기에 하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생각을 전환할 수 있겠습니까? 이 전환이 이루어진다면 참 좋겠습니다.
만약 그분이 저와 같았다면 이런 염려가 없었을 것이고, 이런 염려가 없었다면 치매에 걸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원숭이, 돼지, 개들은 살다가 그냥 죽습니다. 그러니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아주 진지하게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살아갑니다. 개라면 뼈다귀 하나를 두고 목숨 걸고 다투고, 돼지라면 콩비지를 두고 기를 쓰고 싸웁니다. 사람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중에 오직 한 원숭이만이 '내가 이렇게 살다가 죽겠구나, 나는 반드시 영생의 도, 불로장생의 도를 추구해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온갖 고난을 겪으며 영생의 도를 얻고 바른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많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고, 온갖 산전수전을 겪으며 기꺼이 대가를 치르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소망이 있었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생을 영생과 바꾸시겠습니까, 아니면 이생을 사망과 멸망으로 바꾸시겠습니까? 오늘 깨어나십시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세상에 빠져 눈앞의 일만을 바라보며 매일 그런 일들로 분주합니까? 집 안에서나 집 밖에서 사람들이 논쟁하고 다투며 언쟁하는 것을 자세히 들어보십시오. 다 이런 하찮은 일들입니다. 동북 방언으로 말하자면 "네가 내게 구슬 두 개를 주고, 내가 너에게 딱지 두 장을 준다"는 격입니다. 구슬이나 딱지는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인데, 따지고 또 따지며 구슬 두 개, 딱지 두 장 가지고 "네가 나한테 구슬 두 개를 줬으니 내가 너한테 딱지 두 장을 주마, 네가 이득을 봤네 내가 손해를 봤네" 합니다. 저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체 뭐 하자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부모의 집을 어떻게 자기 손에 넣을까 온종일 궁리합니다. 어르신이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탐을 내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합니까! 결국 온몸에 병을 얻으니, 어찌 저주를 받지 않겠습니까? 틀림없이 저주를 받습니다! 온종일 부모의 돈을 가로챌 생각만 합니다. 제 동창 중 한 명은 매일 자기 어머니의 돈을 탐냈습니다. 어머니가 큰아들 집에 머물러 가실 때, 그는 어머니에게 "어머니가 가진 그 돈, 한 달에 얼마를 쓰고 얼마가 남는지 내가 다 알고 있다는 걸 아셔야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걸 알아서 뭐 하겠다는 겁니까? 도대체 알아서 뭐 하려고 그럽니까?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는 정말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입니까? 어르신이 돌아가신 후에 돈을 어떻게 나눌지 그때 이야기하면 될 것 아닙니까? 그는 그게 다 자기 것인 줄 압니다.
인간관계가 개와 개 사이의 관계와 같습니다. 뼈다귀 하나를 둘러싼 관계에 불과합니다. 알고 보니 이 세상은 거대하기 짝이 없는 웅덩이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이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함정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참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우리 가운데 한 형제님이 있는데, 외삼촌이 한 분 계셨습니다. 싱가포르에서 고향으로 돌아가 "외삼촌은 어디 계세요?" 하니 "돌아가셨다, 네 외삼촌은 돌아가셨어"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그의 어머니가 외삼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외할머니는 아직 살아 계십니다. 외삼촌이 왜 죽었을까요? 실은 암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럼 왜 암에 걸렸을까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외삼촌이 이모의 집을 몹시 탐냈기 때문입니다.
이모의 집은 낡은 주택이었는데, 재개발이 되면서 아파트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낡은 집일 때는 원치 않더니 아파트로 바뀌자 외삼촌이 눈독을 들였습니다. 집문서에는 이모의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외삼촌은 무작정 쳐들어가 인테리어 공사를 해버렸습니다. 인테리어를 해놓으면 그 집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 집을 차지하려 했을까요? 외할머니가 살던 그 허름한 집이 자기 것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 형제님의 외할머니, 즉 자기 어머니가 살던 집이니 어머니가 살던 집은 곧 내 집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명의는 남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데 들어가서 인테리어를 왜 합니까? 이것이 전형적인 남의 집을 탐내는 짓 아닙니까? 이모와 외삼촌은 오누이 사이입니다. 한 어머니에게서 난 남매간입니다.
결국 이 형제님의 외삼촌이 들어가 인테리어를 했습니다. 저는 '남의 벽에 돈을 발라놓는다고 그걸 챙길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들어가 인테리어를 했습니다. 제 생각엔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인테리어를 그냥 상납한 꼴입니다. 결국 남의 집을 탐내다가 암에 걸렸습니다. 암에 걸린 뒤 몇 달 지나지 않아 사망했습니다. 죽기 전에는 아들에게 "이 집은 내가 인테리어한 것이니 너는 반드시 이사해서 여기서 살아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그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아들이 이사하고 보니 직장에서 너무 멀었습니다. 게다가 외할머니도 거기 살고, 아들도 살고, 할머니는 저기 살고, 어머니는 여기 살고... 관계가 아주 복잡하게 얽혀버렸습니다. 결국 아들은 자기 할머니, 즉 아버지의 어머니이자 우리 형제님의 외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 관계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 할머니가 마비가 오셨습니다. 왜일까요? 이 어르신이 아들 묘소에 성묘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넘어져서 마비가 온 것입니다. 제가 그분을 섬겨드린 적도 있는데, 두 다리가 강철을 용접해 붙여놓은 것처럼 굽어져서 굳어 있었습니다. 매일 이것저것 헛것을 보시니 노인을 간호하느라 감당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일에 농락당한 것 아닙니까? 인테리어만 헌납하고 노인 간병만 하다가, 더 이상 간병을 못 해서 결국 집을 나갔습니다. 출퇴근도 너무 멀어서 끝나버렸습니다. 알고 보니 이 세상은 정말 거대한 함정입니다. 여기에 걸려 넘어져 목숨까지 잃으면서도 기어이 그 집을 차지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한 삼촌의 이야기이고, 우리 중에 또 다른 자매님에게도 외삼촌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삼촌들이 많을까요? 정말 그렇게 삼촌들이 많습니다, 그렇지요? 어머니의 남동생, 오빠가 다 외삼촌입니다. 그 삼촌도 똑같이 그랬습니다. 아이고 세상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일에 치여 비참해지다가 결국 죽게 됩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오늘 저는 형제자매 여러분이 이 세상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는 태도를 갖기 시작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영생을 얻는 태도, 귀에 들리십니까? 그 삼촌처럼 되지 마십시오. 사람이 이 세상에서 그저 좀 더 오래 살기만을 바란다면, 오래 살기를 바라는 순간 망합니다.
사실 사람이 이 세상을 일찍 떠나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면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이런 마음가짐이 있다면 이것저것에 연연하겠습니까? 신경 쓸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들을 깨뜨려 버리십시오. 오늘 우리 가운데 계신 형제자매 여러분에게 작은 경고를 하나 드립니다. 남의 집을 탐내면 반드시 저주를 받습니다! 저주 아래 사는 것은 장난이 아닙니다. 남의 집을 탐내며, 때로는 부모가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탐을 냅니다. 아이고 세상에!
형제자매 여러분, 깨어나십시오. 저주받을 짓은 하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득으로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손해입니다. 우리 눈에도 손해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소망이 이 세상에만 있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욱 불쌍한 자입니다. 오늘부터 영생의 소망을 얻으십시오. 이 영생의 소망은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의 소망이 없다면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 본문, 영생을 얻는 태도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 본문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태복음》 18:6-9)
기도
하나님, 우리의 마음눈을 여시어 이처럼 영생을 갈망하는 태도를 갖게 하옵소서. 무엇이든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 있다면 잘라내 버리는 결단을 주옵소서. 우리의 손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면 손을 찍어 내버리고, 우리의 발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면 발을 찍어 내버리게 하옵소서. 하나님,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품어야 할 태도입니다. 그저 영생에 들어가는 것만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얽매임을 끊어버리고, 세상의 얽매임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 안에 아무것도 가질 수 없도록, 세상이 더 이상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 안의 세상적인 논리 체계를 제하여 주시고, 우리 형제자매들이 영생을 우리의 눈이나 손발처럼 귀하게 여길 수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마음눈을 여시어 이러한 태도와 결단을 가지고 더 이상 세상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배경
이 본문의 배경을 보면, 마태가 이 구절을 기록할 때 영생과 영생을 향한 태도에 대해 아주 훌륭하게 기록했습니다. 처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천국에서는 누가 가장 큰지 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 안에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하는 태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크게 되고 싶고,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했습니다. 왜일까요? 높은 자리에 앉으면 하녀들이 시중을 들지만, 낮은 자리에 앉으면 남을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가장 큰가? 그러자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부르셨습니다.
그 맑고 순수한 아이를 보시고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는 천국에서 누가 큰지와 같은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요즘 아이들은 변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예전 아이들처럼 순수하지 않고 그저 스마트폰만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제가 말씀드리건대, 사람은 태어난 후 아는 것이 적을수록 선악을 분별하는 마음이 덜합니다. 이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사람 안에는 나쁜 생각들이 많아지고,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쁜 짓을 점점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얼마 전 고속열차인지 지하철인지 버스인지에서, 힘이 넘치는 한 노인이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젊은이를 보며 "일어나, 내가 앉아야겠어!"라고 했습니다. 그 젊은이는 "안 비켜요, 여기 앉아 있을 겁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와서 피곤한데 내가 왜 비켜줘야 합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노인이 그 젊은이를 때렸습니다.
이 영상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게 무슨 노인입니까? 어떤 사람이 댓글을 달기를 "노인이 나빠진 것이 아니라, 나쁜 사람이 늙은 것이다. 점점 더 나빠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사람은 갈수록 나빠집니다. 어릴 때는 나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악하며,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는 법입니다. 결국 늙어갈수록 더 나빠져서, 늙어서도 나쁜 사람이 늙어 예전보다 더 악해진 것입니다. 그러니 노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부축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조심해야 합니다. 정말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왜일까요? 마음속에 세상적인 논리 체계를 담고 있기 때문에 크고 작음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무엇이 큰 자이고 무엇이 작은 자입니까? 남을 섬기는 자가 큰 자이고, 섬김을 받는 자가 작은 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듣고 "목사님, 저는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합니다.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제 생각엔 작은 자도 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어찌 그런 마음이 있겠습니까? 참으로 탄식이 나옵니다!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되겠다고 말하는 속셈은 여전히 큰 자가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읽고 "아, 이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한 자라니, 봐라, 네가 나를 실족하게 했어, 네가 나를 넘어뜨렸어, 너는 화가 있을 것이다,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져져야 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완전히 거꾸로 이해한 것입니다.
알고 보면 뒤에 나오는 말씀이 진짜 중요합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남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결국 자기가 자기 자신을 넘어뜨린 것입니다. 제 해석이 틀렸습니까? 사람이 스스로 걸려 넘어져 자신을 실족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목사님,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셔서 제가 실족했습니다"라고 합니다. 제가 말합니다. "네? 일어나 본 적이나 있습니까? 줄곧 누워만 있었으면서 제가 넘어뜨렸다고요? 제가 당신을 넘어뜨릴 수 있다면, 걸어 넘어뜨려서라도 일으켜 세울 수 있었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는 저를 보며 답답해하지만 말로는 당해내지 못합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절 실족하게 하셨잖아요." 제가 묻습니다. "일어나 본 적이나 있습니까?" 사람은 이처럼 늘 남 탓을 하려 합니다.
세상에서 남 탓을 하는 것은 아주 흔한 현상입니다. 일을 잘 못하는 것도 남 때문이고, 인생을 잘 못 사는 것도 부모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세상의 논리 체계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영생을 향한 태도가 없다면 큰일 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실족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 안에 그 세상적인 논리 체계가 들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으면 걸려 넘어져 웅덩이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에게 세상적인 논리 체계가 있다면 영생의 소망이 어디 있겠습니까? '영생이 뭐야? 그게 돈이 돼?' 사실 예수님은 손이 너를 넘어지게 하거든 찍어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찍어 버리시겠습니까? 남이 찍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찍는 것입니다. 찍어 버릴 수 있습니까? 못 찍을 것입니다. 만약 팔을 잘라내는 결단의 영성이 있다면 진작에 세상의 논리 체계에서 벗어났을 것입니다. 찍어 버리는 것은 장난이 아닙니다. 발이 잘려 나가는 것은 안 된다고요? 그렇다면 세상에 걸려 넘어지지 마십시오. 실족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것들에 걸려 넘어지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남을 멸시하는 것 자체가 실족한 것입니다. 왜 남을 멸시합니까? 세상적인 논리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 꼴 좀 봐" 하면서 무시하는 순간 망가진 것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누가 크고 작은지 쉽게 단정할 수 없으므로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왜 세상 사람들은 남을 무시하고, 기를 쓰고 상류층 사교계에 들어가려 합니까? 기를 쓰고 그런 모임에 들어가서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임에 들어가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저는 지금까지도 그런 사교계에 들어가서 무엇을 하려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번에 한 자매님이 명품 가방을 들고 왔기에 "왜 이 가방을 샀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자매는 "제가 어울리는 모임에서는 이런 가방을 들어야 해요"라고 했습니다. 이 가방을 들면 그 모임에 낄 수 있습니까? 속으로 참 탄식이 나왔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건대, 최고의 인맥과 품격은 머릿속에 지식이 있는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이미 졸부 단계를 지나갔습니다. 일본인들에게 돈이 많다고 하면 부끄러운 일로 여깁니다. 반면 교양이 있고 유식하다고 하면 좋아합니다. 저 같은 외모는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교수나 지식인으로 봅니다. 어디를 가도 좋습니다. 저는 명품 가방을 들 필요도 없고, 굵은 금목걸이나 번쩍이는 시계를 찰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것을 왜 차겠습니까? 제 자신이 금목걸이나 시계보다 훨씬 값진 존재입니다.
사람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그것은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한 사람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이것이 바로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가시는 이유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한 사람도 멸망치 않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이 모든 말씀은 영생에 관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영생을 얼마나 중하게 여기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어서 죄를 범하는 문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 어떻게 하고 교회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내보내라고 하십니다. 왜일까요? 그는 세상적인 논리 체계를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생의 소망도 없이 교회에는 왜 옵니까? 교회에 상처받으러 왔습니까? 실족하러 왔습니까? 교회에 와서 상처를 주고받으려고 합니까? 아주 형편없는 일입니다. 누가 여러분을 섭섭하게 했습니까? 세상일로 서운하게 했다면 서운한 대로 넘어가면 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신경을 씁니까? 교회에 서운해하려고 왔습니까? 그렇게 쉽게 상처를 받고 마음을 끓입니까?
나중에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면 되겠습니까?"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 일곱 번이 대단한 줄 아느냐? 일곱 번도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무슨 뜻입니까? 어떻게 감히 상처를 입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영생의 태도를 가졌다면 무엇에 섭섭해하겠습니까? 어떻게 상처를 입겠습니까? '어디 한번 와서 나를 섭섭하게 해보아라.' 나를 섭섭하게 만든다고요?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누가 여러분에게 빚을 졌다고 해서 속상해한다면 그것은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일을 다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한마음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반드시 우리를 위해 이루어 주십니다.
이 본문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 영생을 향한 태도가 있는가, 영생의 소망이 있는가, 영생에 대한 지식이 있는가, 이것을 분명히 분별할 수 있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이것을 명확히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영생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영생을 대하는 태도가 바로잡히면 수많은 문제가 단번에 풀리게 됩니다. 이제 영생을 얻는 태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생을 얻는 태도 1: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
오늘 여러분께 말씀드리자면, 어린아이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아이의 논리는 단순하며 복잡하게 꼬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온종일 머릿속으로 잔머리를 굴리다가 결국 장폐색증에 걸립니다. 너무 많이 꼬아대서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아이의 사고방식은 솔직하고 단순합니다. "아, 이렇게 하는 것은 잘못된 거구나." 물론 요즘 아이들도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어릴 때 선악을 분별하는 나무의 열매를 아직 많이 먹지 않았습니다. 육신을 입고 태어났을지라도 선악의 열매를 덜 먹었기에 비교적 단순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로, 아이는 백지와 같아서 배울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도 배울 수 있고 세상적인 것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와 같은 상태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어른인데 "당신은 왜 이것도 모릅니까?"라는 말을 들으면 창피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너는 왜 이것도 모르니?" 하면 "전 아직 어리니까요. 안 배웠는데 모르는 게 당연하잖아요"라고 합니다. 따라서 사람에게는 이런 구하는 태도와 겸손한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린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는 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구하는 태도입니다! '나는 아직 모른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른다.' 어떤 이는 영생이 있다고 하고, 어떤 이는 없다고 하며 이생만을 위해 현재를 즐기며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영생이 없는 사람의 삶은 그야말로 비극입니다. 오늘 멀리 갈 것도 없이 암 병원이나 베이징 협화병원 같은 큰 병원에 가보십시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유명한 병원일수록 사람이 넘쳐납니다. 가서 보십시오. 다들 이생의 소망만을 품고 살아온 자들입니다.
그러니 일을 단순하게 만드십시오. 세상의 논리 체계를 품지 말고 진지하게 구하십시오. 세상의 논리 체계를 가지고 어떻게 가겠습니까? 병원에 가보니 환자가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을 보고 "병에 걸린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구나, 나도 저들과 똑같구나" 합니다. 당연하지요. 멸망으로 가는 길은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 온갖 길이 다 멸망으로 통해 결국 병원에서 고통을 겪게 됩니다.
영생을 얻는 태도 2: 세상에 걸려 넘어지지 말라
세상의 논리 체계는 대단히 강력하며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오늘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여러분을 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여러분을 넘어뜨린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논리 체계가 머릿속에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세상의 논리 체계가 손을 지배하면 손이 여러분을 넘어지게 하고, 눈을 지배하면 눈이 여러분을 넘어지게 합니다. 예수님은 참 자비로우십니다. 한쪽 눈이 아니라 두 눈을 다 뽑아버려야 할 판입니다! 한쪽 눈만 남겨둔다고 해서, 이 눈으로 이렇게 보는데 다른 쪽 눈이라고 온전하겠습니까? 두 눈 다 끝장납니다. 그러니 사람이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넘어뜨림(걸려 넘어지게 함)을 말하고, 뒤에서는 실족함(스스로 넘어짐)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 어린아이가 남에게 걸려 넘어졌으니 넘어뜨린 자에게 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면 목에 연자 맷돌을 매달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실 이 작은 자는 자기 자신입니다. '나는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라고 핑계 대지 마십시오. 믿은 지 얼마 안 되었다면 영생의 도를 들어야 합니다. 믿은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해서 뭐 특별합니까?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생의 도입니다" 하면 "아, 그렇군요!" 하고, "사람이 이렇게 살다가 죽습니다" 하면 "아, 맞습니다!" 해야 합니다. 그런데 계속 그렇게 살다가 그냥 살겠습니까? 그 작은 자가 세상에 걸려 넘어졌다면, 그 세상을 연자 맷돌에 묶어 바다에 던져버리십시오. 손이 자기를 넘어지게 한다면 찍어 내버리십시오. 왜 넘어집니까? 왜 걸려 넘어지려 합니까?
앞으로 저는 '실족 훈련 과정'이라는 과목을 개설할 생각입니다. 여러 모듈을 설계해서, 1과에서는 운동장에서 한번 걸려 넘어지게 훈련해 보는 것입니다. 걸어보아도 넘어지지 않으면 실제 환경에 가서 실전을 치러도 넘어지지 않게 됩니다. 왜일까요? 연병장에서 훈련을 거치면 전장에서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모듈에서 이렇게 걸어보고, 두 번째 모듈에서 저렇게 걸어봅니다. 이런 훈련을 거치면 세상의 논리 체계가 무너지게 됩니다.
알고 보면 자기가 스스로를 넘어뜨린 것이며, 넘어지는 자에게도 화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이 너무나 많으니 제발 남 탓을 그만하십시오. 오늘 제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조금이나마 유익을 얻고 "이것 참 좋다"고 느끼실 것입니다. 우리 안의 세상적 논리 체계가 무너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2026년은 세상적 논리 체계를 무너뜨려 온갖 질병에서 벗어나는 해가 될 것입니다. 세상적 논리 체계가 얼마나 지독합니까? 사람들은 진심으로 "병에 걸렸으니 치유받고 싶다"고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순한 치유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에게 영생을 주고자 하십니다.
영생을 얻는 태도 3: 세상의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말라
영생을 얻는 태도를 가지면 세상의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않게 됩니다. 이 세상은 쉽게 한 가지 논리 체계에 빠져 자신이 대단히 존귀하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람이 존귀해지려면 영생의 소망이 있어야 하고, 영생을 얻는 태도, 즉 팔을 잘라내서라도 살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내 손도 세상에 속하지 않고, 눈도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귀도 세상에 속하지 않고, 나는 아무것도 세상에 속하지 않으니 세상은 나와 상관없다.' 이럴 때 세상의 작은 자를 업신여기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잘나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도록 두셨을 수도 있고, 본인도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람 안에는 영생의 태도가 있습니다. 설령 영생의 태도가 없다 한들 남을 무시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자신이 뭐 그리 대단합니까? 잘생겼든 못생겼든 누구나 다 대소변을 봐야 하고, 배설할 때의 모습은 누구나 다 똑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엇을 얕잡아 봅니까? 우리 교회에는 아주 큰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적이지 않습니다. 저는 종교적인 냄새가 풀풀 나는 사람들을 몹시 싫어합니다.
한 자매님이 매우 고달프게 살았습니다. 왜 고달팠을까요? 남의 첩(세컨드) 노릇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아는 주변 사람들도 대부분 남의 첩이었습니다. 얼마 전 제가 싱가포르에서 말레이시아로 차를 몰고 간 적이 있습니다. 선전에서 홍콩 가듯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제가 간 곳은 포레스트 시티라는 곳이었는데, 현지인이 소개하기를 그곳은 첩들을 두고 부양하는 동네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경기가 나빠져서 그런 생활도 어렵다고 합니다. 소비가 위축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한 달에 10만 위안씩 주는 경우가 흔했지만, 지금은 3만 위안을 준다고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이 자매가 우리 가운데 왔을 때, 그녀는 제게서 존중받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녀를 얕보지 않았습니다. 그녀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그녀를 멸시하지 않았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니 생활비는 받을 대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이 말을 들으면 "안 된다, 당장 끊어야 한다! 남의 가정을 파괴하는 짓이 아니냐!"라며 온갖 역겨운 소리를 늘어놓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무얼 파괴합니까? 야곱도 아내를 넷이나 두었는데, 아내가 몇 명 더 있는 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 후 우리 목회자들이 그녀를 훈련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에게 무슨 생계 기술이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그녀에게 아이를 가르치는 법을 훈련했고, 타오바오 인터넷 쇼핑몰을 꾸미는 법을 가르쳤으며, 그녀 자신도 기꺼이 배우려 했습니다. 배울 때 눈물 콧물 다 쏟으며 정말 힘들게 배웠습니다. 나중에 그녀는 아이 아버지의 공장에서 중요한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 아버지도 그녀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그녀가 일을 점점 더 잘해내자 그녀를 귀하게 대우하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인근 도시에 갔을 때, 그녀가 벤츠를 몰고 저를 만나러 왔습니다. "목사님 보세요, 아이 아빠가 저에게 사준 차예요." 왜 사주었겠습니까? 실적을 아주 훌륭하게 냈고 디자인한 제품들이 대단히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남을 무시하느냐 인정하느냐는 세상의 논리 체계를 대변합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가 도덕관념을 가지고 선악을 분별하며 사람을 전혀 세워주지 못합니다. 그러니 제게 와서 이런저런 소리를 해도 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제가 관심을 두는 것은 우리 형제자매들이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걸어온 길을 제가 바꿀 수도 없는데 왜 바꾸려 하겠습니까? 그냥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제 설교를 듣는 분들은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도덕관념이 강한 사람들은 견디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창기도 들어가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창기조차 멸시하지 않으셨는데 우리가 누구를 업신여기겠습니까? 우리도 다 죄인입니다.
영생을 얻는 태도 4: 무례함과 상처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남에게 오해를 받거나 무례한 대우를 당해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람은 왜 상처를 받을까요? "그 사람이 말로 나를 해쳤다"고 합니다. 제가 묻습니다. "그럼 당신은 왜 상처를 받습니까? 왜 상처를 안 받을 수는 없습니까?" 그는 "그 말을 들으니 괴롭습니다"라고 합니다. 제가 말합니다. "왜 안 괴로울 수는 없습니까? 괴로워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상처받고 섭섭해하고 분개하는 이유는 마음속에 세상의 쓰레기 같은 것들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슬 세 개를 딱지 두 장과 바꾸는 것 같은 하찮은 일들 때문에 "그가 날 넘어뜨렸네, 무례하게 굴었네, 상처를 주었네"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암 환자들이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암에라도 걸리고 싶으십니까? 꼭 암에 걸려야만 직성이 풀리겠습니까? 왜 굳이 자기 논리만 옳다고 주장합니까? 예수님께서 상처와 용서에 대해 말씀하실 때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라고 묻는 자에게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만약 여덟 번째로 상처를 받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수첩에 적어두며 "한 번 당했다, 두 번 당했다" 하고 셉니까? 상대는 섭섭하게 할 의도가 없었는데도 한 번으로 치고, 또 상처 줄 생각이 없었는데도 셈에 넣는다면 어떻게 계산하겠습니까? 계산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 안에서의 영광이 있고 영생의 태도가 있다면, 좁아터진 마음보는 파내 버려야 합니다. 온전한 마음보를 가지고 영원한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그 마음보를 도려내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이것이 무례함과 상처를 감당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건대, 제가 남에게 상처를 입거나 섭섭해할 확률은 극히 낮습니다. 제가 바보입니까? 남들이 저를 섭섭하게 하고 제게서 이득을 취해 가도 "괜찮습니다" 합니다. 저는 실제로 그렇게 행동합니다.
제가 왜 그렇게 할까요? 이 세상이 너무나 허무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내게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런 시시한 것들에 왜 연연하겠습니까? 남이 내게서 이득을 취해 갔다면 가져가게 두십시오! 여러분은 내 안에 있는 기쁨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제게 한 가지 잘 넘어서지 못하는 작은 관문이 있습니다. 형제자매들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여전히 많이 아픕니다. 형제자매들이 세상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보면 여전히 마음이 괴롭습니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축복을 주고 싶은데 받지 않아서 주지 못할 때, 제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이 좋은 것을 주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냥 제가 간직하고 있으면 됩니다. 영생의 태도가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의 고통이 훨씬 적습니다. 만약 제게 이런 영생을 얻는 태도가 없었다면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찔려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졌을 것입니다.
사역을 위해 약간의 무례함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고, 영생을 위해 약간의 대가를 치르는 것도 당연합니다. 제가 손오공만큼도 대가를 치르지 못하겠습니까? 산전수전을 다 겪고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여든한 가지 고난조차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손오공의 마음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정말입니다! 살아가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다면, 영생의 태도를 가지십시오. 영생을 얻는 태도를 가지면 모든 것이 좋아집니다! 오늘 제 설교를 다 듣고 나면 이 도가 참으로 좋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태도 5: 남이 진 빚을 따지지 말라
남이 여러분에게 진 빚을 따지지 마십시오. 남이 빚을 졌습니까? 우리 가운데도 남에게 돈을 빌려주고 떼인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빌려주었다면 빌려준 것으로 끝내십시오. 갚지 않으면 안 받는 것입니다. 안 받는다고 해서 가난해지지 않고, 받는다고 해서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형제자매들 중에 이 관문을 통과한 분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이 관문을 넘어서고 나니 갑자기 빚진 자가 돈을 갚았다고 합니다. 어떤 자매님이 얼마 전 "목사님, 제게 빚진 사람이 돈을 갚았어요"라고 하기에 얼마나 꿨길래 그러나 했더니 700위안이었습니다!
제가 참다못해 말했습니다. "그런 돈에 왜 집착합니까! 전화를 걸어서 '요즘 여유가 있으면 갚고, 없으면 안 갚아도 괜찮아요. 나는 당신이 정말 잘살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해보세요." 이렇게 말하면 듣는 사람이 얼마나 편안하겠습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형편이 나아지면, 언제든 돈이 생길 때 갚으세요. 사업이 번창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하지만 나한테 또 돈을 빌릴 생각은 마시고 은행으로 가세요." 알아들으셨습니까? 사람이 돈을 떼이면 그것을 붙잡고 놓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은 하나님께서 다 탕감해 주셨는데, 남이 우리에게 진 빚은 어떻습니까? 이것이 주기도문의 내용 아닙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빚)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왜 날마다 마음에 두고 끙끙 앓습니까? 그 700위안을 안 갚는다고 온종일 속을 끓이다가 심장 혈관이 막히고, 스텐트 시술을 하거나 혈관 우회수술을 받으면 700위안보다 돈이 훨씬 더 많이 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형제자매들은 영생을 얻는 태도를 품기 시작하십시오. 이것이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자 하는 '영생을 얻는 태도'입니다. 영생을 얻는 태도를 가지면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스텐트가 얼마인지, 우회수술이 뭔지도 잘 모르고 그런 게 뭔지 분간도 안 가지만, 어쨌든 대단히 비싸다는 것은 압니다. 영생의 태도가 있으면 우회수술을 받을 일도 없고, 스텐트를 넣을 일도 없으니 그런 것을 몸에 박을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결론
이 세상을 일찍 떠나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언젠가는 여러분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 세상에서의 헛된 날들은 반드시 끝이 납니다. 그 날들이 다 지나고 나면 돈이란 그것이 위안화든 달러든, 붉은색이든 초록색이든 결국 저승길에 태우는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생에서 영생을 위해 대가를 치르는 것, 오직 그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