命定神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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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여러분에게 나눌 아주 좋은 말씀의 제목은 <자신을 팔아넘긴 아합왕>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지혜로워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바람은 오래전부터 품어온 것인데, 교회를 개척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런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어리석은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절친이 "내가 윈난성 여행 시켜줄게"라고 하니, 상대방이 "좋지!" 하고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국경을 훌쩍 넘어가 버렸는데, 어디로 갔을까요? 미얀마로 끌려간 것입니다. 미얀마에 도착해서 어떤 곳으로 넘겨지더니, 어떤 사람은 콩팥이 사라지고, 어떤 사람은 간이 사라졌으며, 아직 살아남은 사람들은 단지 내에서 강제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자기 자신을 팔아넘긴 것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어리석어야 그런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여러분을 속일 수 있습니까? 다 아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팔아넘겨, 어떤 이들은 속아서 노동을 하고 노예가 되는데, 이런 일이 아주 흔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신을 팔아넘기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알았다면 가지 않았을 텐데, 다 사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사람을 속이는 자는 친구입니다. 친구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 사람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인터넷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큰돈을 번다’, ‘고액 연봉을 받는다’며 듣기 좋은 말로 현혹합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합니다! 몇 년 전에는 더 기가 막힌 일도 있었습니다. 아이폰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 때, 젊은이가 아이폰을 들고 다니는 것이 신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살 돈은 없고, 너무나 갖고 싶고, 돈은 벌지 못하니 결국 콩팥을 팔아버렸습니다.

저는 ‘차라리 머리를 팔아버리지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머리를 팔면 얼마나 좋습니까, 휴대전화를 살 필요도 없어질 테니까요.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수많은 것들을 팔아넘깁니다. 그렇다면 머리(생각)를 팔아넘긴 사람도 있을까요? 실제로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신앙을 팔아넘기고, 자신의 생각을 팔아넘깁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을 팔아넘기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전 세대에 일본군이 중국에 쳐들어왔을 때의 일입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왕징웨이가 ‘대동아공영권’을 홍보하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일본인들이 그려놓은 판을 그가 앞장서서 홍보하다가 결국 거물급 매국노가 된 것입니다. 왕징웨이는 자신의 생각과 신앙(신념)을 팔아넘겼습니다. 사실 누가 총을 겨누며 강요한 것도 아니고 자신이 선택한 것인데, 마음에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갈등이 없었을 리가 없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왕징웨이가 매국노가 된 데에는 그의 아내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사실 많은 탐관오리가 아내와 깊은 연관이 있고, 악덕 상인도 아내와 깊은 연관이 있으며, 선한 왕이 되느냐 악한 왕이 되느냐도 아내와 뗄 수 없는 연관이 있습니다. 결국 자신의 양심을 팔아넘긴 것입니다. 왜 ‘팔아넘겼다’고 표현할까요? 본래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지만, 나중에 다른 무언가를 위해 자신의 것을 바꾸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원수는 바로 자기 가족입니다. 누가 여러분을 협박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자기 가족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영생의 길을 달려갈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태복음 10:36)

가족을 위해 자신의 신앙을 팔아넘기니, 얼마나 갈등이 심하겠습니까!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섬겨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의 기분도 맞춰주어야 합니다. 괴롭지 않겠습니까? 몹시 괴롭습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사업을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해 살아야 하니 괴롭지 않겠습니까? 괴롭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간을 다투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팔아넘기는 일은 우리의 가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 탐관오리들도 자신의 신념을 팔아넘긴 것인데,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그들도 좋은 관리가 되고 싶었겠지만, 좋은 관리가 되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중에 제가 깨닫게 되었는데, 이 일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결혼하지 않았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왜 결혼하지 않으셨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서른 살까지 사시면서 결혼하지 않고 아내를 맞이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그 시대에는 서른 살이면 이미 할아버지가 된 사람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독신으로 남으셨습니다.

저는 왜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결혼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결혼하면 일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왜일까요? 장가간 자는 아내를 기쁘게 하려 하니, 아내를 기쁘게 해주지 않으면 아내가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시집간 자는 남편을 기쁘게 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너무나 지혜로우십니다! 그래서 사람의 원수는 자기 집안 식구라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아내를 맞이하여 제자 몇 명과 아내를 데리고 다니는데, 아내가 제자들과 다투어서 예수님이 날마다 싸움을 말려야 한다면 어땠겠습니까? 아이고 세상에, 얼마나 소란스럽겠습니까! 게다가 제자들도 각자 아내를 데리고 다닌다면, 그 3년여의 세월은 정말 볼만했을 것입니다. 완전히 한 편의 드라마를 찍었을 것입니다. 서로 째려보며 “뭘 봐?”, “보면 어쩔 건데?” 하면서 온통 이런 일들만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골치 아프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목사님 말씀대로라면 세상에 누가 아이를 낳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이 낳을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화권 교회에는 참 재미있는 현상이 있는데, 중화권 교회는 ‘사모’라는 호칭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사모님의 위세가 대단합니다. 제가 어떤 목사님을 보았는데, 교회를 잘 세워서 직원도 많이 채용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결정을 내리고 직원들에게 “가서 이렇게 처리하십시오”라고 지시했습니다. 며칠 동안 작업을 하고 있는데 사모가 나타나서 “누가 이렇게 하라고 했어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직원들이 “목사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니, 사모는 “안 돼요!”라고 했습니다. 결국 직원들이 목사님에게 와서 “목사님, 저희가 목사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사모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아주 곤란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한마디 했습니다. “사모 말 들으세요, 그것도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러니 어떻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사모는 평소에 아무 일도 맡지 않다가도, 목사님이 지시만 내리면 반드시 뛰쳐나오니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일을 하다 보니 직원 중에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까지 생겼습니다. 우울증에 걸리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 갈등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입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그 목사님이 설교 중에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그 목사님의 내면에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분명 자신이 지시해 놓고는 “내 말은 소용없으니 사모 말을 들으라”고 하니, 그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팔아넘긴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옛날에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데리고 고향을 떠났을 때, 롯은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삼촌 아브라함에게 의지했고, 아브라함은 그를 아들처럼 키웠습니다. 그런데 롯이 아내를 맞이했습니다. 사실 롯의 마음속에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내면의 갈등이 컸습니다. 속으로 ‘내가 어떻게 나를 길러주신 아버지 같은 삼촌 아브라함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부부가 앉아서 문을 닫아걸고, 롯의 아내가 롯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롯은 “사모님 말씀 들어야지”라고 한 셈입니다. 이것은 제가 빗대어 한 말이지만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분명히 롯의 아내가 나중에 소금 기둥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롯의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목자들이 싸우고 재물을 빼앗으며, 오늘은 네가 내 것을 훔치고 내일은 내가 네 것을 빼앗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롯의 아내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다툼이 계속되다 보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아들 된 분들이 계십니까? 양쪽 사이에서 참 난처합니다. 한쪽은 아내이고 다른 한쪽은 어머니이니 얼마나 답답합니까! 왜 그렇습니까? 아내가 기분 나빠하면 온 집안이 편치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롯의 아내가 온갖 문제를 일으켰고, 롯 또한 아내의 말만 들었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일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아내의 말만 듣는 이 일은 역사적인 유래가 깊습니다. 훗날 베드로는 롯을 가리켜 ‘의인’이라고 불렀는데, 성경에서 베드로 외에는 그 누구도 롯을 의인이라고 부른 적이 없으며, 예수님께서도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누가복음 17:32)

그런데 베드로 시대에 이르러 베드로 역시 아내를 데리고 사방으로 다녔기에, 아내의 영향을 깊게 받았습니다. 왜 훗날 베드로가 그런 모습이 되었을까요? 베드로가 롯을 의인으로 여긴 것은 어디서 나온 말이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베드로의 아내에게서 나온 말일 것입니다. 베드로의 아내가 “여보, 롯을 좀 보세요, 얼마나 아내 말을 잘 듣는지 몰라요. 정말 의인이에요”라고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아내의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내의 말을 일방적으로 따르는 것에는 이처럼 역사적인 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바울은 그런 일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은 가정이 있는 사람들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터무니없는 소리입니다. 바울은 가정이 있는 사람들을 수없이 섬겼으며, 훗날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 7장도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기쁘게 하려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영적 원리를 발견하셨습니까?

오늘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이 아합은 자신을 팔아넘겼는데, 누구에게 팔아넘겼습니까? 바로 그의 아내 이세벨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이세벨은 오늘날의 일반적인 사모들과 달리 아주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깊이 연구해 보니, 이세벨처럼 똑똑한 아내를 얻는다면 정말 대단한 팔자입니다. 매우 똑똑하고, 지혜롭고, 유능하며, 관리에 탁월했습니다. 무엇을 관리했습니까?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관리했습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아합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척척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아십니까? 중국의 서태후보다 더 대단했습니다! 지식까지 겸비한 그야말로 완벽한 현모양처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처럼 얼굴을 잔뜩 찌푸린 씁쓸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세벨은 뛰어났습니다. 어떤 이들은 “내 안에 이세벨의 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만두십시오. 당신이 무슨 이세벨입니까? 어림도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세벨이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권모술수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외모도 매우 아름다웠고, 아합 수하의 대신들과 전국의 장로들, 권세자들과의 관계도 완벽하게 조율하며 팔방미인처럼 처신했고 매우 위엄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세벨이었기에 아합은 집에 돌아오면 그녀의 등까지 두드려주어야 했습니다.

제 동창이 아내와 함께 저와 식사할 때의 일입니다. 제 동창도 꽤 똑똑하고 그의 아내도 똑똑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아내가 남편을 출세시키는 복이 있는 관상이라며, 자기 집안의 돈은 다 아내가 번 것이고 그 복스러운 관상 덕분에 잘된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집에 가면 아내의 등을 두드려준다며 제 앞에서도 아내의 등을 두드려줄 뻔했습니다. 아주 능숙한 손놀림이었습니다. 그는 저처럼 낯가죽이 두껍지 않으니 체면을 차리려 한 것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너는 몰라서 그래. 많은 지도자가 다 이렇게 살아. 밖에서는 대단해 보여도 집에 가면 다 아내 등 두드려줘”라고 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참 좋아 보입니다. 가화만사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중에 깨닫고 보니 이런 ‘아합’의 모습이 너무나 보편적인 현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주님을 믿는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바로 자기 가족이다.” 왜일까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고자 할 때, 귀신은 즉시 여러분의 가족을 통해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원리입니다.

오늘 말씀드리는 ‘자신을 팔아넘긴 아합왕’을 보십시오. 그는 한 나라의 왕인데 굳이 자신을 팔아넘길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런데도 자신을 팔아넘겼습니다. 왜 자신을 팔아넘겼다고 할까요? 그의 내면에는 여전히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합에게 양심이 조금은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강제로 빼앗으라고 했다면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이세벨이 남편의 기분이 상한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아무 문제 없어요, 나한테 맡겨요. 내가 다 해결해 줄게요.” 며칠 지나지 않아 나봇은 죽었고, 그 포도원은 아합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아합과 같은 이런 보편적인 현상은 그에게 양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양심을 팔아넘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아합은 매우 흥미로운 인물인데, 잠시 후에 그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2. 본문 말씀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을 보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나니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 대적이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절할 것이요 또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고 하셨느니라 하니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함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크게 가증하게 행하였더라) (열왕기상 21:17-26)

3. 기도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깨어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비록 우리가 천지를 뒤흔드는 표적을 경험하고, 주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했다 할지라도, 오늘 주님 앞에 나아와 간구하오니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사 깨어 있는 마음을 주셔서 우리 자신을 팔아넘기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어리석은 자가 멸망하고 무지한 자가 멸망함을 알게 하시고, 오늘 우리가 주님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다윗을 본받아 주님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4. 본문 배경

이 본문의 배경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이 배경을 설명해 드리려면 이스라엘의 역사를 조금 짚어드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어디서 갈라져 나왔습니까? 다윗과 솔로몬의 가문에서 갈라져 나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뉘었습니다. 나라가 분열된 후, 북이스라엘은 솔로몬과 그의 아들 르호보암 자손들의 통치에서 벗어났고 열 지파가 여로보암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전에 나누었던 인물이 바로 이 여로보암입니다. 여로보암은 왕위를 그의 아들에게 물려주었으나, 그 아들은 바아사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아사가 왕위를 그의 아들에게 물려주었으나, 훗날 바아사의 온 집안은 시므리에게 몰살당했습니다. 그리고 시므리가 왕이 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오므리에게 죽임을 당했고, 오므리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는데, 오므리가 바로 아합의 아버지입니다.

제가 말씀드리자면, 오늘은 이 사람이 찬탈하고 내일은 저 사람이 찬탈하며 온통 왕위 찬탈의 역사였습니다. 이 왕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바로 여로보암이 행한 그 죄를 그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오므리는 훗날 왕위를 아합에게 물려주었고, 성경은 아합에 대해 아주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합은 몇 년 동안 왕위에 있었을까요? 22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아합은 왕이 된 후 아주 훌륭한(?) 아내를 맞이했는데, 그녀는 매우 사랑스러운 여인이었습니다. 누구였을까요? 시돈 왕의 딸이었습니다. 아합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한 것은 사실 정략결혼이었기에, 아합은 그녀를 몹시 사랑했습니다. 궁궐 안팎의 모든 일에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고, 대단히 유능하고 똑똑하며 영리하고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아합은 이세벨을 따라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그는 여로보암이 만든 두 금송아지만 섬긴 것이 아닙니다. 여로보암이 만든 두 금송아지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라도 붙였지만, 아합은 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조차 쓰지 않고 바알로 바꾸어 버렸으며 아세라까지 숭배했습니다. 아합이 그의 아내 이세벨의 환심을 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집안에서 이 사람의 환심을 사고 저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 하는 사람은 순전한 신앙과 순전한 복음을 지켜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이렇게 우상을 숭배한 결과,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나타내사 3년 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견뎌냈을까요? 제가 말씀드리자면, 아합이 이러한 경제 파탄의 상황 속에서도 왕위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밑에서 반역을 일으키는 자도 없었습니다. 그가 왕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누구 덕분이었을까요? 바로 이세벨 덕분이었습니다. 이세벨이 나라를 다스린 방식은 모두 자신이 가진 지혜와 계략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는 기간에 하나님께 속한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바알과 아세라 앞에 굴복시켰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세벨은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거느렸습니다. 그녀의 세력은 대단했습니다. 만약 이세벨 밑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에서 최고의 직장이었으며, 이세벨과 줄이 닿기만 하면 집안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정도였습니다. 아합을 아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었습니다. 이세벨은 이 3년 동안 나라를 일사불란하게 통치했는데, 실로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습니다. 아합이 발을 동동 구르는 동안 이세벨이 수많은 계책을 내놓았기에 나라는 여전히 정상적인 궤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합의 내면에는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아합의 평생을 보면 툭하면 여호와의 선지자를 찾았습니다. 아합이 살던 시대에 가장 위대한 선지자가 있었는데 바로 엘리야입니다. 제가 아합의 마음에 하나님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며, 훗날 일어난 많은 사건이 그에게 하나님이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그에게 심판을 선포하셨을 때 그는 회개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부드러웠습니다. 때로는 지나치게 부드러워서, 한쪽에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듣고 다른 쪽에서는 아내가 말하면 그것도 들었습니다. 너무 물렀던 것입니다.

아합은 마음에 하나님이 있던 사람이었기에, 사실 이 과정에서 극심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이리저리 갈등했지만 아내의 치맛바람이 가장 거셌고, 선지자는 결코 그의 아내를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아내가 바람을 불어넣으면 대단했습니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우상 숭배를 제외하고는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아합은 집에 돌아오면 아내의 등을 두드려주었습니다. 관직이 아무리 높아도 아내보다 높을 수는 없었고, 아내가 기뻐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세벨을 보면 “와, 아합 왕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 왕비님 덕분입니다. 왕비님은 남편을 출세시키는 상을 타고나셨고, 점쟁이들도 왕비님의 남편이 왕이 될 팔자라고 했는데 바로 당신이 그 남편이기에 왕이 된 것입니다”라고 추켜세웠습니다.

훗날 이 본문의 배경을 보면, 아합이 주변 이방 민족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아람 왕을 놓아주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 아람 왕은 하나님께서 아합의 손을 통해 목숨을 거두려 하셨던 자인데, 아합이 아람 왕 벤하닷을 살려 보내자 하나님께서 아합을 심판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사실 아합이라는 사람은 마음이 매우 유약하고 줏대가 없었습니다. 왜 벤하닷을 놓아주었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아람, 시돈 등은 모두 주변 국가들입니다. 이세벨이 살짝 바람을 잡으며 “그 사람을 놓아주면 문제가 다 해결되는데, 굳이 또 다른 사람을 상대하느라 골치 아프게 만들 이유가 있나요?”라고 계책을 냈을 것입니다. 중국의 제갈량이 맹획을 칠종칠금(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놓아줌) 한 것처럼 그들도 벤하닷을 놓아주었는데, 이는 필시 이세벨이 낸 꾀였을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셨고, 심판을 받은 아합은 마음이 몹시 괴롭고 답답했습니다. 왜일까요? 일을 잘못 처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고, 돌아와서 또다시 마음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나름대로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속으로 ‘억지로 빼앗자니 너무 염치가 없고, 사려고 해도 그가 팔지 않으니, 돈을 아무리 많이 주어도 팔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남의 산업을 탐내고 남의 포도원을 탐내는 것은 다 저주받을 일입니다. 그가 몰랐을까요? 알고 있었습니다. 아합이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얼굴을 찌푸린 채 식음까지 전폐하고 누워있자, 이때 또다시 그의 아내가 나타났습니다. 사실 식음을 전폐할 때마다 그의 아내가 나타나서 모든 것을 잘 해결해 주곤 했습니다. 아내가 참 대단했습니다. 아합이 죽은 후에도 이세벨은 아합의 여러 아들을 빈틈없이 통솔했습니다. 그 아들들이 다 이세벨이 낳은 아들은 아니었을 텐데도 그녀는 훌륭하게 관리했습니다. 참 대단한 아내 아닙니까? 다른 후궁이나 왕비들과 시기하고 질투하지도 않았습니다. 질투할 필요도 없이 그녀에게는 다 방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여인이었습니다!

결국 계책을 내어 나봇을 쳐 죽이고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했습니다. 그들은 뜰 안에서 ‘이렇게 꾸미고, 저렇게 인테리어하고, 이쪽에는 장막을 치고 저쪽에는 테라스를 만들어 친구들을 불러 술도 한잔하고 차도 마셔야지. 포도원이 참 좋구나!’ 하며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포도원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셨고, 엘리야를 통해 아합과 이세벨의 집에 임할 심판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아합에게 선포된 심판의 이유는 “아합이 자신을 팔아넘겨 양심을 팔아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구에게 팔았습니까? 그의 아내에게 팔아넘겼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아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훗날 이 아합 역시 거짓말하는 영에 속아 넘어가 전쟁터에서 날아온 화살 한 발에 정확히 맞아 쓰러지게 됩니다. 빗나가지도 않고 정확하게 꽂혔습니다. 여러분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대략이라도 아셔야 하기에 제가 간략하게 설명해 드린 것입니다.

5. 아합은 마음에 하나님이 있던 사람이었다

아합은 마음에 하나님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아합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아합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많이 양성했고, 평생 동안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자주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뿐만 아니라 유다 왕과도 사이가 꽤 좋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아합은 사실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체험한 하나님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는 여러 차례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았을 때 아합은 몹시 애가 탔고, 아내 외에는 아무도 그를 도울 방책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3년 뒤에 엘리야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엘리야가 나타나 그곳에서 아합에게 바알의 선지자들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을 다 불러 모으라고 했습니다. 아합은 ‘엘리야가 그렇게 하라니 반드시 불러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엘리야가 그곳에서 선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만일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만 섬기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열왕기상 18:21)

아합은 엘리야 곁에 서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올려놓게 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이 온갖 짓을 다 해도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반면 엘리야는 장작에 물을 흠뻑 붓게 하여 제단 주위의 도랑에 물이 가득 차게 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기도하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불을 내리셔서 고기와 장작을 태웠을 뿐만 아니라 도랑의 물까지 다 핥아버렸습니다. 아합이 그것을 보고 ‘와,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시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이어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다 잡아 죽이라!”고 하자 아합도 좋다고 여겼습니다. 아합에게 하나님이 없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아합이 궁으로 돌아왔을 때 이세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합은 마치 작은 고양이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보, 오늘 엄청난 일이 있었소.” 아내가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라고 묻자 아합이 대답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이 엘리야에게 다 죽임을 당했소!” 이세벨이 얼마나 독한지, 그녀는 선포했습니다.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이 말을 듣고 엘리야가 도망쳤습니다. 사실 이때 아합이 “그건 안 되오!”라고 막아섰어야 했는데, 아합은 감히 그러지 못하고 오히려 말했습니다. “아이고 여보, 화를 풀어요. 내가 등 두드려줄 테니, 내일 당장 수배령을 내려 엘리야를 죽여버립시다!” 도대체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까? 경험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왜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을 죽인 후에 하늘에서 비가 내렸을까요? 하늘에서 비가 내려 가뭄이 끝난 것입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최근의 홍수처럼 산사태가 나고 차들이 처참하게 부서지는 참사가 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도 사진 보셨습니까? 정말 끔찍하고 무섭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일을 겪은 아합의 마음에 어찌 하나님이 없었겠습니까? 분명히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다만 뼛속 깊이 유약함이 있었을 뿐입니다. 사실 매사에 다 유약했던 것도 아니고 오직 이세벨 앞에서만 유약했습니다. 이세벨 앞에서는 즉시 등을 두드려주고 안마를 해주었습니다. 아내에게 “아이고 여보, 내가 발 마사지해 줄게요”라며 진심으로 우러나와 마사지를 해주었습니다. 천하에 아합만큼 솜씨 좋은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합이 왕을 하지 않고 마사지 숍에 일하러 갔다면 분명 최고의 에이스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합이 이처럼 행동한 것은 아내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아합의 마음속에서는 아내의 모든 것이 좋아 보였고, 아내가 기분 나빠하면 인생을 어떻게 살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훗날 세간에 이런 말이 돌았습니다. 싱가포르의 한 목사님이 저에게 해준 말인데, “Wife happy, life happy(아내가 행복해야 인생이 행복하다)”라는 말입니다. 아내가 기뻐야 인생이 즐겁다는 것입니다. 아이고 세상에! 성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까? 큰일 날 소리입니다! 알고 보니 이 세상에 아합 같은 사람이 너무나 많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합이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전쟁에 나갈 때마다 여호와의 선지자에게 물었고, 능력 있는 왕이었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팔아넘겼습니다. 자신을 팔아넘겼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바로 자신의 하나님을 팔아넘겼다는 뜻입니다! 목회자들 세계에서도, 특히 중화권 교회 안에는 이런 이야기가 수없이 많습니다! 이런 목사들이 순전한 복음을 전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마십시오. 그들은 자기 자신을 팔아넘겼고, 심지어 자신의 하나님까지 팔아넘겼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사람이 왜 내면의 갈등을 겪는지 아십니까? 어떤 목사들은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며 아내도 훌륭하고 가정상황도 좋고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지만, 훗날 암에 걸리곤 합니다. 마음속의 고통을 털어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용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미 습관이 되어버렸고, 아내 등 두드려주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마음은 괴로운데 말은 못 하니 결국 암에 걸리는 것입니다. 암에 걸리는 성격이란 바로 이렇게 속으로 삭이다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든, 하나님을 경험하든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했어도 결국 하나님을 팔아넘기고 자신을 팔아넘긴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나마 여러분이 미얀마로 팔려 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미얀마로 팔려 갔다면 콩팥도 털리고 간도 털렸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사람이 자신을 팔아넘기고 자신의 뜻을 저버린 채 마음속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면, 그럴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에게 묻는다면 저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내는 장모님이 낳았고 나는 내 어머니가 낳았는데, 두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만나 결합했다고 해서 누가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6. 정권을 위해 자신을 팔아넘기다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생각했습니다. ‘내가 왕이 되었으니 정치와 경제, 온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더니 무릎을 탁 치며 생각했습니다. ‘그래, 여로보암이 참 똑똑했어. 금송아지 두 개를 만들자.’ 그리하여 아합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또다시 여로보암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약 북이스라엘 열 지파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헌금하게 놔둔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겠는가?’ 상상이 되십니까? 우리나라 백성이 다른 나라에 가서 헌금하며 돈을 다 갖다 바치는데, 그것도 적은 돈이 아니라 15%나 바치니, 세금을 내도 이 정도로 내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그들은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여로보암과 그의 아들들이 몰살당하고 가문이 멸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훗날 바아사가 여로보암의 집안을 멸했고, 바아사와 그의 아들도 시므리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시므리는 다시 오므리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 이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아합이 이 일들을 몰랐을까요? 아합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일어난 그리 오래되지 않은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제 아합이 왕이 되어 생각하기를, ‘백성들의 돈 15%는 엄청난 거액인데, 이걸로 국가를 발전시키면 얼마나 좋을까? 공항도 짓고, 고속도로도 깔고, 고속철도와 지하철도 만들자.’ 나라를 발전시키려면 곳곳에 돈이 필요하니, 왕 노릇 하기가 장난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결국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그래도 여로보암의 길을 가야겠다. 여로보암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나중에 생각하자’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결국 정권을 위해 자신을 팔아넘기고 여로보암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다음에는 정권을 견고히 하기 위해 시돈 왕과 동맹 관계를 맺었습니다. 아합이 말했습니다. “서로 치지 말고 국경을 명확히 합시다. 당신의 딸을 내게 주면 내가 극진히 대우해 주겠소.” 그러자 시돈 왕이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내 사위가 된다면 얼마나 든든한가! 훗날 누군가 나를 괴롭히면 군사를 파병해 주고, 누군가 사위를 괴롭히면 나도 출병하겠소. 내 사위니까 말이오.” 바로 이런 논리였습니다. 그리하여 시돈 왕의 딸이 아합에게 시집을 오게 되었습니다. 첫 맞선 자리에서 시돈 왕이 말했습니다. “딸아, 아합이라는 젊은이가 어떠냐? 아합, 자네는 이세벨이 어떤가?”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어보니, 아, 너무 늦게 만난 것이 한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이세벨은 “세상에 아합처럼 멋진 남자는 다시없을 거예요”라고 했고, 아합은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아내는 다시 얻을 수 없겠소. 하나님이 나를 위해 지으신 최고의 돕는 배필이오”라고 감탄했습니다.

그녀를 아내로 맞이해 데려왔을 때, 이세벨은 곁에 수많은 선지자를 대동하고 건너왔습니다. 그 선지자들이 어떤 선지자였을까요? 그들도 대단했습니다. 애굽 바로 왕 수하의 마술사들처럼 무언가를 예측하고 처리하는 데 귀신같이 능했습니다! 이세벨이 아합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이 선지자들이 머물 곳이 필요한데 국고에서 돈을 좀 내어 집을 지어줄 수 없나요?” 그러자 단숨에 이스라엘에서 가장 좋은 땅에 호화로운 별장 단지를 조성해 주었습니다. 별장 단지가 세워지자 그 안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합은 속으로 ‘정권을 위해서 조금 손해 보고 양보하자. 내 마음에 비록 하나님이 있지만, 하나님도 나를 탓하지는 않으실 거야. 하나님도 내 처지를 아시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분이 계십니까? “아이고, 하나님도 제 사정을 아실 거예요. 제가 얼마나 힘든데요.” 이렇게 하며 사모의 말을 듣고, 왕비의 말을 듣고, 이세벨의 말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다 이렇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나라는 꽤 번성했습니다. 왜냐하면 아합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주변의 수많은 국가가 아합에게 굴복하고 조공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이세벨이 낸 계책이었습니다. 이세벨은 대단했고 지혜가 넘쳐났습니다! 아합이 “여보, 이 일은 어떻게 처리할까?” 묻기만 하면 이세벨은 “이건 이렇게 하세요!”라고 했고, 그대로 하면 다 이루어졌습니다. “여보, 또 난관에 부딪혔는데 이건 어쩌지?” 하면 “그건 저렇게 하세요!”라며 집에서 상의하는 것이 조정의 모든 대신과 의논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었습니다. 아합은 속으로 ‘이 대신 놈들은 다 쓸모없는 자들이야. 너희와 상의하느니 내 아내와 상의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교회도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어떤 교회에서 사모의 위세가 너무 강하면 이와 비슷한 양상이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아합은 정권을 위해 자신을 팔아넘겼는데, 누구에게 팔았습니까? 악령에게 팔아넘겼습니다! 하나님을 몰랐습니까?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실 앞에서는 현실의 방식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7. 아내를 위해 자신을 팔아넘기다

아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아합은 즉시 들어주었습니다. 이세벨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우리 중의 많은 자매가 “아이고, 내 안에 이세벨의 영이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데, 제가 말합니다. “그만두십시오. 이세벨은 당신보다 훨씬 똑똑합니다.” 이세벨은 아합의 비위를 맞추는 데도 아주 능숙했습니다. 그녀는 아합의 눈빛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면 즉시 다가가 “여보, 오늘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요? 제가 좋은 계책 하나 내어드릴까요?”라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다 엉터리 계책이었지만 말입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이세벨은 언제 어디서나 아합의 이름으로 어명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누가 아합의 이름으로 왕의 조서를 내릴 수 있겠습니까? 관계가 보통 깊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합은 아내가 자신의 이름으로 조서를 내리는 것을 몰랐을까요? 알고 있었습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갖고 싶어 할 때, 아내가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한테 맡겨요. 내가 다 처리해 줄게요.” 아합의 마음에는 여전히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어서 “조심하시오. 사람을 죽이거나 피를 흘리게 해서는 안 되오”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아이참, 걱정 붙들어 매세요. 지켜보기만 하세요. 손쉽게 해결할 테니까요!”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결국 이세벨은 아합의 이름으로 어명을 내렸습니다. 아합은 참으로 아내를 위해 자신의 권세를 팔아넘겼고, 양심을 팔아넘겼으며, 나아가 자신의 하나님까지 팔아넘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녀를 왕처럼 떠받듭니다. 우리 중에 자녀를 상전처럼 모시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만약 자녀가 왕이라면 여러분도 아합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합은 아내를 위해 자신을 팔아넘겼는데, 여러분은 자녀를 위해 자신을 팔아넘기지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른 일은 다 내려놓아도 자녀의 일만큼은 결코 내려놓지 못합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아합을 위해 첩을 하나 들여주고 또 다른 첩을 들여주는 일까지 도맡아 빈틈없이 잘 처리해 주었습니다! 아합이 보기에 ‘이렇게 자상하고 좋은 아내를 어디서 또 찾겠는가? 아내만 행복하다면 다른 일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라고 여겼습니다. 결국 자신을 팔아넘긴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팔아넘긴 대가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아합의 온 집안은 무덤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저주가 얼마나 깊었습니까!

8. 재물을 위해 자신을 팔아넘기다

이 사건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아합이 벤하닷을 놓아준 사건은 영적인 일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원수를 좋은 형제처럼 여겨 놓아주었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다루셨을까요? 아합의 내면에 갑자기 어떤 강렬한 욕망과 감정이 일어났습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 곁을 지나갈 때마다 그 포도원이 너무나 좋아 보였습니다. 여러분, 그 포도원에 무슨 대단한 것이 있는지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대단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몇 그루의 나무가 있는 흔한 포도원이었을 뿐입니다. 호화 주택을 보아도 사실 다 비슷비슷하고, 모델하우스를 보아도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합의 마음속에는 나봇의 포도원이 너무나 좋아 보이는 감정이 솟구쳤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일 같습니까, 아닙니까? 아주 영적인 일입니다! 이제 사람이 미끼를 물게 된 것인데, 이 낚싯바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볼 때마다 너무 좋아 보였고, 자기 포도원을 보면 볼수록 형편없어 보였습니다. 저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여러분, 포도원에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여행 중에 호주의 포도원에 묵어본 적이 있는데,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습니다. 뭐가 그렇게 좋았겠습니까? 사람의 눈에 콩깍지가 씌면 다 좋아 보이는 법입니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처럼 남들이 보기에는 별로 예쁘지 않은데도 남편은 “우리 아내는 정말 예뻐요”라고 말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뒤에서 “정말 눈에 콩깍지가 씌었구나. 저 사람 눈에는 절세미녀로 보이는구나!” 하며 웃곤 합니다. 왜 그렇게 보일까요?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합은 남의 재산이 너무나 좋아 보였던 것인데, 이것이 바로 죽음을 자초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돌아와서 이세벨에게 털어놓았습니다. “내 돈을 주고 그 포도원을 사겠다고 해도 안 팔고, 다른 포도원과 바꾸자고 해도 안 바꾼다고 하오. 괘씸해 죽겠소!”

그가 그의 아내 이세벨에게 이르되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네 포도원을 내게 주되 돈으로 계산하여 주거나 만일 네가 좋아하면 내가 그 대신에 포도원을 네게 주리라 한즉 그가 대답하기를 내가 내 포도원을 네게 주지 아니하겠노라 하기 때문이로다 (열왕기상 21:6)

제가 말씀드리자면, 눈에 콩깍지가 씌면 이와 같습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한 초기에 한 정신질환자를 섬긴 적이 있습니다. 이 자매는 대학을 갓 졸업했는데, 어떤 형제를 보더니 너무나 반해버렸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촌스럽기 짝이 없고 별로였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그 형제에게 시집가고 싶어 안달이 났고, 고백했다가 거절당하자 짝사랑을 하다가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제가 귀신을 쫓아내 주었지만 나중에 또 문제를 일으키며 끊임없이 요동쳤습니다. 아합이 무언가에 꽂혔을 때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남의 아내가 좋아 보여 차지하고 싶어 하거나, 남의 재산이 좋아 보여 차지하고 싶어 하거나, 남의 자녀가 좋아 보여 탐내는 것은 다 악령의 역사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남의 자식은 저렇게 훌륭해 보이는데 내 자식은 왜 이리 엉망인가 비교하며 스스로 괴로워하는 것은 쓸데없이 사서 고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세벨이 얼마나 유능했습니까? 포도원 하나 빼앗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거대한 나라도 한 손에 쥐고 흔들었는데, 나봇 하나쯤 처리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세벨이 말했습니다. “여보, 이 일은 나에게 맡기세요.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해 줄게요.” 결국 나봇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어떻게 죽였습니까? 하나님과 왕을 모독했다는 누명을 씌웠습니다. 씌운 죄목이 너무 터무니없고 거창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무섭습니다! 이 세대에도 무죄한 피를 흘리는 죄가 너무나 많습니다. 결국 아합은 저주를 받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팔아넘겼는데, 어디로 팔려 갔습니까? 악령에게 팔려 갔습니다. 이세벨은 본래 악령에 사로잡힌 자였기에, 훗날 이세벨에게 붙어있던 영의 이름을 ‘이세벨의 영’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영은 대단히 교활하고 강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고, 내게 이세벨의 영이 있나 봐요”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정말 똑똑하고, 영리하며, 지혜가 넘치고 관리에 탁월한 사람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악령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재물을 위해 자신을 팔아넘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의 지위를 위해 자신을 팔아넘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내를 위해, 가족을 위해 자신을 팔아넘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재물을 위해 자신을 팔아넘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깊이 경계해야 할 일들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있다고 해서 다가 아닙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있어도 생각의 논리 체계가 여전히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라면, 그 길을 끝까지 갈 수 없으며 갈수록 황폐해져 결국 큰 코 다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주받는 그리스도인이 많은 것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죄를 범해놓고도 찬양할 때는 눈물을 글썽입니다.

9. 모든 것은 아내 이세벨의 충동질 때문이었다

이세벨은 배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 결정적인 역할은 모두 악령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었습니다! 바알 숭배든, 아세라 숭배든, 일련의 모든 악행은 이세벨과 뗄 수 없는 관계였으며, 다 이세벨의 충동질 때문이었습니다. 이세벨이 받은 심판 또한 대단히 엄중했습니다. 아합이든 이세벨이든 다 자연스럽게 그러한 지경에 이르렀고, 저주 속으로 걸어 들어갔으며, 결국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임했습니다!

10. 결론

누가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거느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세벨이 아합을 충동하여 이세벨도 심판을 받았고, 아합은 자신을 팔아넘겨 아합도 심판을 받아 결국 온 집안의 대가 끊기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즉, 사람이 이 세상의 일들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결코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 제가 나눈 아합의 이야기가 여러분 모두에게 깊은 경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평생의 날 동안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더는 자신을 팔아넘기지 맙시다. 그 누구도 우리 마음속에 계신 하나님을 빼앗을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우리에게 예비된 이 최상의 복을 가로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믿으십니까? 여러분에게 하늘이 무너질 듯한 큰일이 닥친다 해도 하늘은 결코 무너지지 않으니,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면 어떤 좋은 것에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찬양 한 곡을 부르며 오늘 헌금을 준비하겠습니다. 만약 헌금의 의미를 잘 깨닫지 못하신다면 헌금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돈을 긁어모으는 곳이 아니라 축복을 나누어주는 곳입니다. 여러분이 헌금하셨다고 해서 제가 감사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드린 것이며, 제 모든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목사님, 제가 헌금했는데 왜 감사하다는 말씀을 안 하십니까?”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도 감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헌금한 것은 여러분 자신에게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헌금은 축복의 문을 여는 결정적인 단계입니다! 우리가 돈을 너무 중하게 여기면 곤란해지고, 사업을 너무 중하게 여겨도 곤란해지며, 그 어떤 것을 지나치게 중하게 여겨도 다 문제가 생깁니다. 오직 하나님을 우리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중화권 사명 신학이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이 시간 다 함께 손을 들고 기도합시다. “하나님, 오늘 제게 지혜와 명철을 주사,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님을 굳게 의지하게 하옵소서. 직장을 위해, 사업을 위해, 권세를 위해 주님을 팔아넘기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 제 가족을 위해 주님을 팔아넘기지 않게 하시고, 재물을 위해 주님을 팔아넘기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 제 마음을 지켜주셔서 평생 주님의 뜻 가운데 행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사 오늘 저 자신을 다시 한번 주님께 온전히 드리오니 주님의 뜻대로 행하게 하시고, 제 자유를 빼앗는 모든 것을 다 내어버리고 오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얻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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