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제가 참 좋아하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이 본문 말씀을 읽을 때마다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왜 기쁠까요? 하나님의 은혜와 유익을 경험했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유익을 경험해 보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고 주님의 은혜의 맛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님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우신지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모실 때 우리가 받는 유익은 참으로 많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유익이 있는지, 곧 ‘주 밖에는 나의 복(유익)이 없다’는 것을 나누고자 합니다.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에게서 유익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세상에서 유익을 얻을 것인가 사이에서 늘 흔들리고 갈등하기 마련입니다. 유익을 얻고 나서도 여전히 흔들립니다. 유익을 얻지 못하면 아예 흔들릴 것도 없이 곧장 세상 쪽으로 기울어져 버립니다. 끝없이 흔들리다가 세상 속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 갈등과 싸움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갈등 속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 영혼아, 네가 여호와께 고백하기를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습니다’ 하였도다.” 여러분은 어떤 형편에서 이런 고백이 나오는지 아십니까? 바로 주님의 보호하심이 필요할 때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지키심이 필요할 때, 곧 몹시 힘겨운 환경에 처해 있을 때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힘겨운 환경 속에서 과연 무엇을 선포하고 계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일만 터지면 ‘끝났다, 망했다’고 말합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우리 안에서 마음이 흔들립니다. ‘아이고, 하나님, 주무시고 계신 것 아닙니까? 어디 가셨습니까? 지금 뭐 하고 계십니까? 제가 여기서 이렇게 고생하는 게 안 보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어찌 보지 못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바로 이러한 갈등 속에서 승리해야 하며, 이것을 가리켜 영적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마음속으로 이것이 맞다 저것이 틀리다 하며 싸워 이기는 그 과정 속에서, 여러분은 친히 하나님의 선하심과 유익을 경험하게 됩니다. ‘지난번에도 하나님이 나의 복이 되셨으니, 이번에도 여전히 하나님이 나의 복이 되신다. 나의 복은 주님 밖에 없으며, 나는 여호와 하나님 밖에서 유익을 구하지 않겠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권력이나 인간관계에서 유익을 얻으려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유익을 얻으려 할 것인가 하는 이 갈등이 얼마나 현실적입니까? 여러분은 ‘목사님에게도 그런 갈등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실지 모릅니다. 늘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매 순간 다윗처럼 선포합니다. ‘주는 나의 주님이시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습니다. 나는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앙망할 것이며, 이것이 나의 삶이요 사명입니다.’
어떤 자매님이 간증문을 하나 써서 목회자를 통해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자기는 평소에 돈을 끔찍이도 사랑했다고 합니다. 원래 회계 일을 하던 분이라 온종일 남의 돈을 세는 일을 했습니다. 남의 돈을 센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십니까? 예를 들어 은행 창구에 앉아 있는데 어떤 고객이 20만 위안을 찾으러 왔다고 해봅시다. 그 고객 통장에는 20만 위안이 있지만 내 통장에는 없습니다. 얼마나 속이 쓰리겠습니까? 세는 돈이 다 남의 돈이니까요. 그렇게 돈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다가 결국 20만 위안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면 많은 분이 공감하실 것입니다. 무엇에 공감합니까? ‘아이고, 나도 돈을 사랑했는데.’ 여러분은 돈을 사랑하다가 얼마의 빚을 졌습니까? ‘저는 20만 위안 빚을 졌습니다.’ ‘저는 6만 위안 빚을 졌습니다.’ ‘저는 100만 위안 빚을 졌습니다.’
여러분, 평범하게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혼자서 20만 위안이나 되는 빚을 질 수 있겠습니까? 돈 벌 기회를 잡겠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돈 벌 기회만 보이면 ‘이 대박 기회를 놓쳐선 안 돼’라고 생각하며 돈을 빌립니다. 다행히 은행에서 대출을 해줬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갚아야 하지 않습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기회가 아니라 함정이었습니다.
기회와 함정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한 번 잘못 판단하면 옛날 빈털터리 시절로 돌아가고, 두 번 잘못 판단하면 천지창조 이전의 혼돈과 공허 상태로 돌아가 버립니다. 참 엄청나지 않습니까? 그래도 빈털터리 시절로 돌아간 정도라면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이 년 전쯤 이 자매님이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고는 ‘아, 말씀이 정말 너무 좋다. 돈을 사랑하면 안 되는구나. 돈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구나. 돈을 사랑하는 자는 존귀해지지 못하고, 유익은커녕 빚더미에 앉게 되는구나’ 하고 깊이 깨달았습니다.
여러분도 느껴지십니까? 공감이 되시지요? 우리 가운데 이런 뼈아픈 경험을 하신 분들이 참 많습니다. 어떤 분은 구덩이에서 겨우 기어 나와 집까지 팔아 빚을 갚아 놓고는, 또 무슨 기회가 생기자 유혹에 넘어가 다시 그 구덩이로 뛰어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이 좌우로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유익을 얻을까, 돈에서 유익을 얻을까? 예수님 안의 유익도 좋지만, 에이 이번 한 번만 이 기회를 꼭 잡자.’ 하지만 그 기회를 붙잡는 순간 또 수만 위안의 빚이 생기고 맙니다. 그렇게 슬픔과 고통이 찾아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돈을 유익으로 삼든지, 하나님을 유익으로 삼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나중에 이 자매님은 필수 훈련 과정을 다 마치고 나서 ‘아, 내가 하나님을 의지해야겠구나. 하나님만이 나의 복이시구나’라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에게서 복을 얻는 것이 진지한 결단 없이 거저 되겠습니까? 진지하게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형제자매들은 거듭나서 은혜와 유익을 얻고도 십일조를 드리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복을 받는 길임을 모르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며, 그것을 자기 손에 쥐고 있으면 멸망할 물건이 되고 맙니다. 세상 기회를 붙잡으러 다니느라 십일조를 드릴 시간조차 없는 것입니다.
온전한 십일조의 개념을 붙들고 나아가자, 지난주에 이르러 이 자매님의 20만 위안 빚이 이제 겨우 1만 위안만 남게 되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남는 일입니까, 손해입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 자매님은 드디어 주님의 은혜의 단맛을 보았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또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인터넷에 이른바 ‘경매 정보’라는 것이 뜨자 마음이 흔들려서 다시 돈을 빌려 투자하고 싶어졌습니다. 머릿속 온통 그 경매 정보를 낙찰받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낙찰받아서 다른 사람에게 되팔면 돈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되팔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어도, 상대방이 나에게 그것을 넘기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어쩌면 그렇게 교훈을 못 얻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머릿속에 온통 경매 정보 생각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자면, 낙찰받는 순간 매수자는 사라져 버립니다. 함정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그렇게 쉽게 돈 버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덫입니다! 그 경매 정보만 생각하면 마음이 어지럽고 갈등하며 좌우로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그 부름에 이끌려 하마터면 또 흔들려 넘어갈 뻔했습니다. 만약 그대로 돌진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아직 1만 위안도 다 갚지 못했는데 20만 위안의 빚더미로 되돌아갈 뻔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함정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마음이 복잡해져서 끊임없이 싸우고 갈등하다가, 문득 ‘유 목사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이 이랬었지’ 하고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권면합니다. 부디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여러분을 속이지 않습니다. 제가 무엇 때문에 여러분을 속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세상의 헛된 집착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에게서 참된 유익을 얻고 복된 사람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자매님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 앞에 모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절대로 저를 여러분 앞에 모셔 두지 마십시오. 아무 소용없습니다. 저에게는 악한 영을 쫓아낼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능력이 있으시니, 그분이 내 오른쪽에 계실 때 내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자매님은 흔들리지 않았고, 속이려던 마귀는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매님 안에 있었기 때문에 끝내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보험 환급금이 들어와서 남은 빚을 다 청산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빚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편안하고 홀가분한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빚이 없는 상태의 그 홀가분한 기분을 아십니까? 빚더미에서 벗어나 빚이 전혀 없게 되었을 때의 그 기분은, 마치 온갖 진해산미를 배불리 먹은 것처럼 정말 좋습니다. 어떤 자매님이 제게 ‘가난한 것은 빚 때문이요, 추운 것은 바람 때문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어릴 적 저희 부모님이 빚을 지셨을 때, 아이 다섯을 키우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다 돼지 새끼마냥 얼마나 잘 먹어치우는지, 젓가락을 들면 순식간에 만두 스무 개가 사라졌습니다. 한창 자랄 때였으니까요. 참으로 추운 것은 바람 때문이요, 가난한 것은 빚 때문입니다. 돈을 1만 위안, 2만 위안 모을 때는 느낌이 잘 안 오고, 10만 위안, 20만 위안을 모아도 체감이 잘 안 됩니다. 하지만 빚을 다 갚았을 때의 해방감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시편 16편을 쓴 다윗 역시 우리와 똑같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익을 두고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갈등했습니다. ‘나의 왕위, 나의 왕위, 나의 왕위… 아니야, 아니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의 왕위, 나의 왕위…’ 매일 속에서 그렇게 부딪치며 몹시 힘들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무엇을 지켜 달라는 것입니까? 내 마음이 빗나가지 않도록, 내가 스스로 의롭다 여기지 않도록, 내가 다시 빚더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지 않도록 지켜 달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첫 번째 갈등은 쫓겨 다니는 신세였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쫓기는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빚쟁이에게 쫓기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위협받으며 쫓기는 것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온종일 이리저리 숨어 다니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고통스럽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대놓고 장사해서 돈을 버는 것도 힘든데, 몰래 숨어서 생계를 잇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든 일입니다.
‘하나님, 이것이 복입니까?’ 다윗이 그렇게 묻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 이런 복이라면 사양하겠습니다’ 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사울이 다윗을 쫓아다닌 것은 다윗이 무언가 잘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사울의 속이 너무 좁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고 노래를 불렀고, 지금도 길거리의 여인들이 그렇게 외쳐대는 바람에 다윗이 쫓기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다윗은 속으로 ‘저 여인들이 정말 밉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미워해 봐야 소용없었고, 여전히 쫓겨 다녀야 했습니다.
이때가 가장 힘든 순간입니다.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 봐도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계산이 안 나옵니다! ‘내가 분명히 기름 부음을 받았는데, 왜 쫓기는 신세가 되었는가?’ 여러분에게 한 가지 중요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절대로 부정적인 선포를 하지 마십시오. 저 같으면 죽어도 부정적인 말은 선포하지 않겠습니다. ‘아이고, 직장도 잃고 수입도 끊겨서 너무 힘들다.’
제가 돈을 내고 힘을 다해 교회를 세우다가 설령 방법이 틀렸을지라도, 저의 중심과 태도는 올바르지 않았습니까? 제 안의 중심은 내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어쩌자고 저를 실직하게 만드십니까?’ 저는 결코 이런 말을 입에 담지 않습니다. 저는 늘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습니다.”
비록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아뢸지언정,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원망하는 말은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정말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사울의 손에서 나를 지켜 주소서. 하나님,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크게 원망하지도 않았고, 함부로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선택만을 했습니다.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습니다. 비록 쫓기는 신세일지라도 하나님만이 나의 유익이시며,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습니다.”
얼핏 들으면 비합리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훈련이요, 믿음의 연단이었습니다.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믿음을 선포할 때, 여러분은 진정으로 ‘나의 복이 하나님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갈등은, 다윗 수하에 싸울 수 있는 군사가 600명이나 있었다는 점입니다. 한 사람이 처자식을 거느려 부부와 자녀 한 명만 잡아도 세 배입니다. 3곱하기 600은 1,800명입니다. 거기에 부모님까지 모시면 3, 4천 명에 달합니다. 3, 4천 개의 입이 매일 먹을 것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루에 1근(약 500g)씩만 먹어도 하루에 3천 근이 넘는 식량이 필요합니다. 그 많은 양식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첫 번째 갈등이 생명의 위협이었다면, 두 번째 갈등은 ‘돈을 어디서 구하는가’였습니다. 돈이 어디서 나옵니까?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양식을 어디서 구합니까? 누구와 장사를 하겠습니까? 앞에서는 원수가 쫓아오고 있으니 참으로 힘들고 막막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다윗은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나를 먹이실 것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만약 다윗이 지금 살아 있다면 우리가 마주 앉아 ‘다윗 왕이여, 계산 좀 해봅시다. 그때 그 돈과 양식이 대체 어디서 났습니까?’ 하고 물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도 계산해 내지 못할 것입니다. 정말로 계산이 안 나옵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우리 교회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재정이 어디서 나왔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저 역시 아무리 계산해 봐도 맞출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계산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돈을 밝히거나 헌금을 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실제로 우리를 공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간증은 끊임없이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예전에 사역할 때 꽤 큰 규모의 예산을 집행했습니다. 저는 일을 할 때 돈을 쓰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고 일을 바르게 처리하려면 재정을 쓰지 않고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 우리 교회가 쏟아부은 재정이 얼마입니까?
나중에 ‘나 혼자 일하는데 사무실을 뭐 하러 얻나?’ 싶다가도 ‘사무실도 없으면 꼴이 뭐가 되겠는가’ 싶었습니다. 사무실을 얻으려면 당연히 임대료를 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 채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일을 올바르게 해내려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써야 할 곳에는 씁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지극히 부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 글에서 3천 명을 이끌던 시절을 언급했습니다. 그때 돈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너무나 풍성하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훗날 다윗이 성전을 위해 드린 헌금이 얼마였습니까? 금만 수백 톤에 달했습니다. 수백 톤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십 톤만 해도 어마어마한 양의 금입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벽을 온통 금으로 입힐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페인트로 인테리어를 하지만, 다윗은 순금으로 칠을 했습니다. 대들보와 기둥을 금으로 조각하고 벽면을 금으로 도배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계산해 낼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계산해도 그 많은 금이 어디서 나왔는지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윗이 고백한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습니다”라는 이 한마디가 평생토록 하나님의 유익과 복을 가져온 것입니다. 날마다 마음이 흔들렸지만, 하나님 은혜로 완전히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갈등은 진짜 갈등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겪고 나면 돈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이런 경험이 있다면 날마다 자랑하십시오. ‘하나님이여! 내 영혼아, 하나님께 고백하라.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습니다.’
세 번째 갈등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시편 16편이 언제 쓰였는지 아십니까?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을 때 쓰였습니다. 어떤 기회였습니까? 사울이 갑자기 배탈이 났습니다. 배가 너무 아파서 ‘어디서 볼일을 볼까? 변기 챙겨온 사람 있느냐? 아무도 없느냐? 저기 동굴이 있으니 저 안에서 봐야겠다’ 하고 들어갔습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제가 현장에 있진 않았지만 역사적 정황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동굴 안에서 냄새가 진동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무력할 때가 바로 배설할 때입니다. 똥을 누고 있을 때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미남이든 미녀든 다 똑같습니다. 만약 그때 다윗이 손에 든 칼로 찔렀다면 사울은 참으로 허무하게 죽었을 것입니다. 뒤도 제대로 닦지 못한 채 칼에 찔려 죽는 꼴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때 사울을 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다윗에게 갈등이 있었겠습니까, 없었겠습니까? 당연히 엄청난 갈등이 있었습니다.
주변 부하들은 ‘찔러 죽이십시오! 죽여버리십시오!’ 하고 부추겼습니다. 다윗은 이 일로 몹시 번민했습니다. ‘죽여라, 죽여라!’ 하지만 ‘아니다, 찌를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요, 왕이다. 하지만 내가 그를 죽이면 내가 왕이 될 수 있다.’ 얼마나 갈등이 되었겠습니까? 더는 쫓겨 다니지 않아도 되고, 3천 명 먹여 살릴 걱정도 끝나는 것이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순간 다윗의 머릿속은 초고성능 AI 칩셋처럼 엄청난 속도로 회로가 돌아갔을 것입니다.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극심한 내적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무슨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에게서 유익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내 손의 칼로 저자를 찔러 죽여서 유익을 얻을 것인가? 하지만 내가 사울을 죽인다면 나는 또 다른 사울이 되고 말 것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울은 정신 질환에 시달렸고 평생을 몹시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다윗은 한때 사울 밑에서 일하며 사울의 비극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16:4)
‘나는 절대로 왕위와 하나님의 복을 맞바꾸지 않겠다. 내가 저자를 찔러 죽인다면 훗날 나도 사울처럼 비참하게 살게 될 것이다. 내가 나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에게서 유익을 얻는다면 평생 평안과 기쁨을 누릴 텐데, 내가 왜 사울처럼 고통받아야 한단 말인가? 내가 왜 내 몸에 악령을 불러들여야 한단 말인가?’
고민 끝에 다윗은 올바른 선택을 내렸습니다. 사울의 옷자락만 가만히 베었습니다. 여러분은 옷자락 하나 베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일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치열한 영적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옷자락을 베고 난 뒤 다윗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아, 내가 하마터면 저 사람을 찔러 죽일 뻔했구나. 칼로 찔러 피를 보았다면 나 역시 사울과 다를 바 없었을 텐데. 내가 왕위를 얻겠다고 하나님의 유익을 저버릴 수는 없다. 내가 어리석게 돈이나 권력을 얻겠다고 하나님의 유익을 버릴 수는 없다.’
돌아와서 후회한 것은 단순히 옷자락을 벴기 때문만이 아니라, ‘다윗아 다윗아, 네가 하마터면 벼랑 끝으로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구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이런 찢어지는 듯한 갈등을 느껴본 분들이 많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람의 본성입니다. 사람의 본성을 시험하려 들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 누구나 이러한 갈등을 겪습니다.
저는 한 가지 결단을 내리고 교훈을 얻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성도들과 사업이나 비즈니스를 하지 않습니다. 성도들과 금전 거래를 하지 않고 오직 주기만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께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는 것은 저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니 여러분에게 유익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결코 성도들과 거래하지 않고, 성도들에게서 유익을 취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유익을 구합니다. 지금까지 베풀기만 했는데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나의 복이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악령이 임하여 정신 질환을 앓던 사울을 떠올리며, 다윗은 집으로 돌아와 ‘하나님,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입니다. 영적인 눈을 떠서 보면, 그 악령이 다윗을 충동질하여 칼로 사울을 찔러 죽이고 왕위를 빼앗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마터면 마귀를 안방으로 불러들일 뻔했습니다. 온 마음으로 선을 행할 것인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유익을 얻을 것인가? 갈등이 되지 않겠습니까?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시편 16:5-9 전반부)
비록 옛날이야기처럼 전해 드렸지만, 이 말씀을 읽을 때 다윗의 심정이 느껴지십니까?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9-11)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과 제가 다윗과 동일한 은혜와 감동을 누린다면 우리는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 16편을 쓴 배경에 대해 역사적 기록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처럼 전체적인 맥락을 맞추어 보면 그림이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바로 이러한 영적 싸움 속에서 쓰인 시입니다.
본문 말씀
이번 본문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편 16편에서 두 절만 읽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시편 16:1-2)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마음을 지켜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항상 우리 앞에 계셔서 우리를 이끌어 주옵소서.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복은 오직 주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모든 시험과 유혹에서 건져 주옵소서. 복에 대한 이 깨달음 위에 굳게 서서, 아무리 많은 갈등과 싸움을 거칠지라도 우리의 영혼이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습니다’라고 늘 고백하게 하옵소서. 주님만이 나의 전부이시며 나의 기업이시오니, 친히 나를 지켜 주옵소서. 내 육신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고, 주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이 내 삶에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내 마음이 흔들려 빗나가지 않게 하시고, 영원토록 주님을 굳게 붙들어 마침내 주님의 얼굴을 뵈옵게 하옵소서.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의 칭찬을 받게 하옵시며,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원수 마귀에게 주의 이름을 모독할 틈을 주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오직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말씀의 배경
사울이 다윗을 쫓다가 동굴에서 볼일을 볼 때,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을 베었습니다. 그때의 상황은 참으로 긴박했습니다. 칼을 내밀면서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기분을 느껴보셨습니까? 마음속에서 엄청난 요동이 일어났습니다. 칼을 거두었다가 다시 내밀고, 심장이 쿵쾅거리자 다시 칼을 거두었습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두려움 속에서 사울을 죽일 뻔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스스로를 지켜낸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신 것입니다. 결국 그는 사울을 살려 보냈습니다. 그러고 나니 속으로 ‘아, 이제 끝났다. 또 도망쳐야 하고 또 쫓겨 다녀야 하니 참으로 막막하구나’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내 손으로 왕위를 빼앗지는 않겠다. 저 왕위가 본래 내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억지로 쟁탈하지 않겠다. 하나님만이 나의 기업이요 왕위는 나의 기업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요 나의 전부이시니, 나의 복은 하나님 밖에 없다’고 결단한 것입니다.
다윗은 돌아와서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후회뿐만 아니라 깊은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하마터면 또 다른 사울이 될 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왕이시요 다윗의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 위에 세우신 왕이요 주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였기에 다윗에게는 그를 칠 자격이 없었습니다. 사울을 죽게 하실지 말지는 하나님께 속한 일이며 하나님이 친히 다루실 문제이지, 사람이 하나님을 도울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저 사울을 언제 죽여주시겠습니까?’ 다윗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사울이 죽었을 때 다윗은 그를 후하게 장사 지내고 그를 기리는 애가를 지어 불렀습니다.
다윗을 자세히 보면 그는 분명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너의 참된 복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사람의 일생에서 진짜 유익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중 많은 이들이 돈에 유익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빚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돈을 복으로 여기니 빚더미에 앉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참된 복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핵심 이익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아십니까? 무지는 가르쳐서 고칠 수 있지만, 핵심 이익은 바꾸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면 그의 핵심 이익은 쾌락이므로 그것을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의 핵심 이익이 직장이라면, 사실 직장 자체가 아니라 직장이 가져다주는 ‘돈’이 핵심 이익입니다. 따라서 그의 돈줄을 건드리거나 끊어버리면 원수처럼 여기게 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이 핵심 질문입니다. 여러분의 유익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의 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어떤 이의 복은 사업에 있기에 사업이 그의 목숨줄입니다. 어떤 이의 복은 직장에 있기에 직장이 그의 생명입니다. 어떤 이의 복은 남편에게 있기에 남편이 그의 목숨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왜 다윗이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고 고백했겠습니까? 다윗은 하나님 밖에서 다른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어느 정도로 철저했는가 하면, 그는 모든 유익이 하나님 안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비록 다윗이 여러 아내를 두었지만, 그런 부분은 본받지 마시고, 그의 모든 복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었다는 중심을 본받으십시오.
상상해 보십시오. 훗날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밧세바를 취했을 때 선지자 나단이 뭐라고 책망했습니까? 나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내가 네게 준 것이 부족하였더냐? 어찌하여 은밀히 죄를 짓고 도둑질하듯 행하느냐? 왜 굳이 여호와 하나님 밖에서 여인을 얻으려 하였느냐? 내가 네게 준 것으로 부족하였더냐?”라고 꾸짖었습니다. 얼마나 준엄한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이 시는 다윗이 도망자 시절에 쓴 시입니다. 사울을 죽일 뻔한 위기를 겪고 난 뒤, 그는 다시 한번 자기 영혼을 향해 경고하며 일깨운 것입니다. 제가 늘 간증을 기록해 두고 자주 읽으라고 말씀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다 잊어버리고 남의 잘못만 기억하게 됩니다. 다윗은 시편 16편을 써서 스스로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시편 16:2)
‘내 영혼아, 훗날 어느 날에도 너는 여전히 여호와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 밖에서 유익을 구하는 순간 재앙이 시작됩니다. 다윗이 하나님 밖에서 밧세바를 취했을 때 칼이 그의 집안에서 영영 떠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이 바로 나의 기업이시요, 하나님이 나의 핵심 이익이라는 것이 다윗의 선포였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여러분이 사람과 관계를 맺든 무슨 일을 하든, 그 사람의 핵심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만약 그의 핵심 이익이 돈에 있다면 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는 결코 자기 돈을 여러분의 주머니에 넣어주지 않습니다. 돈이 핵심 이익인 사람이 어떻게 남의 주머니를 채워주겠습니까?
모든 성도는 우리가 왜 복을 받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복이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왜 십일조를 드립니까? 우리의 모든 재물이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핵심 이익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핵심 이익이 되면 돈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원리를 깊이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드릴 테니 그 마음을 느껴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내가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1-11)**
하나님은 나의 주님이시요,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사람이란 참으로 묘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몸무게가 50킬로든, 60킬로든, 90킬로든, 100킬로가 넘는 거구이든 간에 저울에 달아보면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아무리 재어보아도 인간 스스로 무엇을 온전히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교만한 생각을 다 내려놓으십시오. 인간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난 척 뛰어다녀도 그 결과가 어떠합니까?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풀릴지는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들을 절대로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대단히 잘해서 부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지도 마십시오. 그들이 무언가 큰 잘못을 저질러서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배후에는 영적 세계의 역사가 있습니다. 영적 세계에서 일어난 일의 결과를 보고 사람들이 갈피를 못 잡은 채 ‘저 사람 참 대단하다, 이 사람이 최고 부자다’ 하고 떠받드는 것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을 엄청나게 크게 키웠지만, 몇 년간의 전성기가 지나고 형세가 급변하자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그 사람이 낭패를 겪는 것이 그의 어리석음 때문이 아니며, 과거의 눈부신 성공 역시 그의 똑똑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본인의 능력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달렸습니까? 영적 세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대단하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재미있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미녀와 결혼했다가 헤어졌고, 또 다른 사람도 미녀와 결혼했다가 헤어졌습니다.
왜 헤어졌을까요? 아무리 예쁜 사람이라도 결국 똥오줌을 누며, 냄새는 똑같이 고약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여인이 큰 부자에게 시집을 갔다가 얼마 후 헤어졌고, 다른 부자에게 갔다가 또 헤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부자 역시 똥오줌을 누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며 냄새나는 존재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한낱 피조물임을 알아야 하며,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고관대작이라 해서 대단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높은 관리도 똥오줌을 누고 미녀도 배설을 합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한낱 연약한 존재임을 알고 자기 운명을 스스로 주관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습니다”라고 인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이것을 너무나 분명히 알았습니다. ‘내가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이 내 실력 때문이었겠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논리입니다.
어떤 자매님이 저에게 “목사님, 저는 요즘 유명 강사의 강연을 즐겨 듣고 경영의 대가라는 사람들의 책을 즐겨 읽어요”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십니까? 둘 다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위대하다고 우러러보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들도 여러분과 저처럼 똥오줌을 누는 한낱 연약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배설하지 못하는 것은 생사가 걸린 큰 문제입니다. 옛날 욕설 중에 ‘항문 없이 태어날 놈’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대소변을 보지 못하면 온몸이 독소로 가득 차 죽고 맙니다. 인간은 만물을 주관할 능력이 없기에,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참된 유익과 복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슨 유익을 보태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유익과 복을 받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본래 뜻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만 복을 누리는 것이기에, 우리는 오직 그분 안에서 유익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주님께 복을 구하지 않고 누구에게 구하겠습니까? 내가 다른 데서 복을 구하면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첫 번째 유익: 하나님은 나의 산업이시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시편 16:5-6)
하나님이 우리의 산업이시라 할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재어 주신 몫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왕으로서 다스릴 이스라엘 땅이었습니다. 그의 직분은 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라는 고백은, ‘내가 지금은 아직 왕좌에 오르지 못했으나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왕위를 지키고 계시며 장차 내게 주실 것이다. 내 왕위도 면류관도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때가 되면 주께서 내게 주실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만이 내가 추구할 대상이며, 나는 마음과 힘을 다해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왜 ‘산업(기업)’이라고 부릅니까? 회계를 배운 분들은 자산과 부채의 개념을 압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산업이시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자산’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마귀나 우리의 육신은 ‘부채’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저것이 자기 재산이라고 착각하지만 그 어느 것도 영원한 자산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기업이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업이 되실 때, 주님은 참으로 위대한 일을 행하십니다. 줄로 재어 아름다운 구역을 여러분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산업이시며 우리의 가장 귀한 자산이십니다. 그것이 밥을 먹여주냐고요? 돈이 되냐고요? 영원한 자산의 가치를 아시겠습니까? 이 자산은 세상의 돈과는 비교할 수 없이 광대하고 존귀한 것입니다.
두 번째 유익: 하나님은 나를 훈계하시고 가르치시는 분이시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시편 16:7)
하나님은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려 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은 옳지 않다’고 그를 훈계하셨습니다. 어떻게 가르치셨습니까? 심장이 쿵쾅쿵쾅 뛰게 하시고 마음을 몹시 괴롭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옷자락을 벤 것은 원래 칼을 찔러 죽이려던 손길이었습니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가 찔렀다면 사울은 그 자리에서 비참하게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옷자락만 베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밤에 악한 생각을 품으려 할 때마다 양심과 마음이 쿵쾅거리며 경고를 보냈던 것입니다.
세 번째 유익: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16:8)
늘 흔들리는 사람은 평생 담장 위의 풀처럼 동풍이 불면 서쪽으로 눕고, 서풍이 불면 동쪽으로 눕습니다.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며 중심을 잡지 못합니다. 하지만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저를 가르쳐 주옵소서. 주님은 나의 기업이시요 나의 전부이시니, 나는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이 일을 주께서 기뻐하십니까? 기뻐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하지 않겠습니다. 설령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된다 한들, 사울처럼 미쳐서 비참하게 산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내게는 오직 주님이 필요하며, 주님이 나의 전부이시요 나의 참된 복이십니다.’ 사람은 육신을 입고 살기에 끊임없이 흔들리고 미끄러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기 위해 항상 여호와를 내 앞에 모셔야 합니다. 그분이 내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이 고백이 얼마나 귀합니까!
네 번째 유익: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도 즐거워하리로다
이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도 즐겁습니다. 다윗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다시금 일깨워 드립니다. 평생을 기쁨 없이 산다면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먹고 마시고 즐겨야만 겨우 기뻐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특별한 일이 없어도 늘 기뻐합니다! 어느 쪽이 더 낫습니까? 당연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늘 기쁘고, 날마다 기쁘며, 녹초가 되도록 피곤한 중에도 기쁜 것이 훨씬 복됩니다. 진수성찬이 없어도 소박한 반찬에 밥 한술 뜨면서도 기뻐하는 삶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평생을 우울과 낙심에 빠져 매일 한숨 쉬며 사는 인생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날마다 기쁨이 넘쳐 평생을 기쁘게 살아가는 인생을 원하십니까? 인간의 삶은 외적인 조건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내면의 누림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 되시고, 나를 훈계하시는 분이 되시며, 내가 그분을 의지하여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 결과가 어떠하겠습니까? 참으로 놀랍습니다.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이 즐거우니, 일생토록 누리는 그 은혜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저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평생을 기쁨 가운데 살아가는 복에 있어서는 저를 따를 자가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한 저보다 더 기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그저 기쁩니다. 이유를 댈 필요도 없이 그저 기쁩니다. 우울해하는 자들이 약 오를 정도로 저는 기쁨을 누립니다.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이 즐겁습니다. 돈을 잃어버려도 내 마음은 기쁘고 내 영은 즐겁습니다. 나의 복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돈으로 사는 자가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이며, 이것이 나의 삶이요 사명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분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인생은 마땅히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아무 일도 없는데 사서 걱정하고 갈등을 만드는 것입니다. 잘 먹고 잘살면서도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고 삐치는 태도 말입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왜 말을 번복해?’ 말을 바꿨으면 바꾼 것이고, 뒤집혔으면 뒤집힌 대로 두면 됩니다. 굳이 얼굴을 붉히고 화를 내며 발악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그 누구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누구도 내 안의 기쁨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비록 눈물과 땀을 흘릴지라도 제 속에는 기쁨이 가득합니다. 형제자매들이 은혜와 복을 받는 모습을 보면 제 마음이 얼마나 시원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저는 성도들에게서 무언가를 얻기보다 그들이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저의 복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처럼 주님 앞에서 마음과 힘을 다해 사역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유익: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라
사람들은 평생 육신의 안전을 위해 노후 대책을 세우고 통장에 돈을 모아둡니다. 은퇴 후를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돈이 육신의 온전한 평안과 건강을 보장해 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치료자이시며 공급자이시니, 나의 복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성도들을 더 가치 있는 존재로 세우고, 하나님의 더 큰 축복 속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게는 부족함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저의 공급자이시기 때문입니다. 2011년도에 우리는 육체의 안전한 거함을 위한 첫 번째 발걸음으로 치유와 축사 사역을 정립했습니다. 제가 쓴 《예수님처럼 치유와 축사를 행하라》는 책은 그 당시 치유 축사의 이론적 기초를 집대성한 것입니다.
몸이 아플 때 사람이 얼마나 괴롭습니까? 질병이 찾아오면 어찌 힘들지 않겠습니까? 다리에 힘이 빠지고 눈앞이 핑핑 돕니다. 코로나에 걸려 자리에 누워 있을 때, 천장의 주먹만 한 전등이 농구공만큼 크게 보이는 착시를 겪었습니다. ‘큰일 났구나, 눈에 이상이 생겼구나’ 싶었습니다. 컴퓨터로 인터넷 뱅킹에 들어가려는데 자판을 치면 엉뚱한 글자가 쳐지는 기이한 현상도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손가락이 제멋대로 움직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주님은 나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내 육체 또한 안전히 살게 하십니다. 광야를 이리저리 도망 다니던 다윗에게 온역이 임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당시 다윗의 생활 환경이나 위생 상태는 몹시 열악했고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라”는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염려를 내려놓으십시오. 모든 질병은 치유될 수 있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영적 원리를 알지 못한 채 오직 병원에만 매달려 유익을 구하려 합니다. 의학과 병원에서만 길을 찾으려 한다면 어디 한번 찾아보십시오. 근본적인 질병의 뿌리는 영적인 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유익을 구할 때 내 육체는 평안히 거하게 됩니다.
제가 코로나를 겪으면서 ‘왜 죽지 않았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육체를 안전히 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누워서 할 일도 없고 기운도 없으니 그저 간절히 기도만 했습니다. 기도를 시작하자 트림과 방귀가 계속해서 터져 나왔습니다. 속으로 ‘트림과 방귀가 나오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구나’ 싶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치유와 배출의 통로였습니다.
여섯 번째 유익: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신다
다윗의 내면에는 영생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음부(지옥)로 가지 않고 하나님께로 갑니다. 음부는 지옥이요, 하나님이 계신 곳은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은 세상의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음부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까? 저승사자에게 뇌물을 준다고 해서 놓아주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뇌물을 주고받는 악습도 결국 마귀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 세계의 악령들은 뇌물을 받는다고 해서 사정을 봐주지 않습니다. 돈을 준다고 지옥에서 내보내 주겠습니까? 기껏해야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이 불구덩이에서 저 지옥불로 자리를 옮겨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영혼을 음부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은 영생에 대한 확신을 품어야 합니다.
일곱 번째 유익: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라
생명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참된 생명의 길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생명의 길은 장차 누릴 영생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의 삶도 포함합니다.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이 즐거운 것, 그것이 바로 생명의 길이요 기쁨의 길입니다. 내가 곁길로 가려 할 때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것, 그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는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한순간 속아 넘어가 빈털터리가 되거나, 또다시 속아서 흑암과 공허 속으로 곤두박질치지 말아야 합니다. 소망을 품으십시오. 이 땅에서도 육체가 평안히 거하고, 살아 숨 쉬는 동안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이 즐거워하는 삶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생명의 길이 아니요 멸망의 길입니다. 괴로움만 더할 뿐입니다. 돈도 권력도 여러분에게 괴로움을 안겨줄 수 있지만, 우리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으십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길을 걷고자 한다면, 얻어야 할 가장 큰 복은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바로 ‘생명’입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얻은 것은 돈이 주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저와 함께 한목소리로 선포합시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습니다! 내가 오직 주님만을 굳게 붙들고 평생토록 주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