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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아모스 1장 - 사람이 서너 번 거듭 범죄하면 하나님이 결코 그 벌을 면제하지 아니하시리라!

2024-04-05 17,335 阿摩司书 阿摩司书01章 阿摩司书第一章 讨神喜悦 效法耶稣 走永生的路 弃绝强人逻辑

相关经文

阿摩司书01章-亚兰
  • 1 当犹大王乌西雅,以色列王约阿施的儿子耶罗波安在位的时候,大地震前二年,提哥亚牧人中的阿摩司得默示论以色列。
  • 2 他说:“耶和华必从锡安吼叫,从耶路撒冷发声;牧人的草场要悲哀;迦密的山顶要枯干。”
  • 3 耶和华如此说:“大马士革三番四次地犯罪,我必不免去她的刑罚;因为她以打粮食的铁器打过基列。
  • 4 我却要降火在哈薛的家中,烧灭便·哈达的宫殿。
  • 5 我必折断大马士革的门闩,剪除亚文平原的居民和伯·伊甸掌权的。亚兰人必被掳到吉珥。”这是耶和华说的。
  • 6 耶和华如此说:“迦萨三番四次地犯罪,我必不免去她的刑罚;因为她掳掠众民交给以东。
  • 7 我却要降火在迦萨的城内,烧灭其中的宫殿。
  • 8 我必剪除亚实突的居民和亚实基伦掌权的,也必反手攻击以革伦。非利士人所余剩的必都灭亡。”这是主耶和华说的。
  • 9 耶和华如此说:“推罗三番四次地犯罪,我必不免去她的刑罚;因为她将众民交给以东,并不记念弟兄的盟约。
  • 10 我却要降火在推罗的城内,烧灭其中的宫殿。”
  • 11 耶和华如此说:“以东三番四次地犯罪,我必不免去她的刑罚;因为她拿刀追赶兄弟,毫无怜悯,发怒撕裂,永怀忿怒。
  • 12 我却要降火在提幔,烧灭波斯拉的宫殿。”
  • 13 耶和华如此说:“亚扪人三番四次地犯罪,我必不免去他们的刑罚;因为他们剖开基列的孕妇,扩张自己的境界。
  • 14 我却要在争战呐喊的日子,旋风狂暴的时候,点火在拉巴的城内,烧灭其中的宫殿。
  • 15 他们的王和首领必一同被掳去。”这是耶和华说的。

《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우리는 《아모스서》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저에게도 상당한 도전이 되지만, 여러분과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아모스서》 1장은 "사람이 서너 가지 죄를 거듭 범하면, 하나님께서 결코 그 형벌을 면제해 주지 않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의 내면에는 누구나 핵심 이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이 핵심 이익이 하나님과 영생이 아니라 이 땅의 것에 있다면, 누구든 그것을 건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며칠 전 차를 몰고 한 자매님을 데리러 가던 길에 차가 막히는 일이 있었습니다. 두 대의 차가 서로 끼어들기를 하려다 부딪힌 것입니다. 한쪽 운전자는 나이 드신 여성분이었고, 다른 한쪽은 젊은 청년이었는데, 말이 맞지 않자 말다툼이 벌어지더니 서로 멱살을 잡고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경찰이 와서 뒤차들이 먼저 지나갈 수 있도록 차를 빼라고 했지만, 그들은 끝내 길을 비켜주지 않았습니다. 저마다 각자의 핵심 이익이 있어서 남이 그것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서너 가지 죄를 거듭해서 짓는 이유는 사람에게 핵심 이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핵심 이익이 이 세상의 일이라면 죄를 짓고 또 짓게 됩니다. 사람의 핵심 이익은 건드릴 수 없다고 여기지만, 사람이 잘 살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핵심 이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핵심 이익이 자신을 잘 살게 해주는 요소이며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살지도 못합니다. 핵심 이익 때문에 거듭하여 죄를 범하면서도, 자신이 짓는 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기 핵심 이익만 챙기다가 결국 하나님께 죄를 짓고 맙니다. 하나님께 죄를 짓고 나면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며 결코 형벌을 면제해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의 이러한 논리들을 하나씩 짚어보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상인이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은 비도덕적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실제로 임할 때는 그것이 더 이상 도덕의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핵심 이익이 이 세상에 있을 때, 그것이 돈이든 영토든 핵심 이익이 되어 버리면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중국 동북의 헤이샤쯔 섬 맞은편은 러시아의 극동 지역인데, 그 땅은 역사적으로 청나라 시절 러시아에 빼앗긴 영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그곳에 자신들의 명장 동상을 세워 두었습니다. 이름을 다 알 수 없는 그 러시아인은 그들에게는 위대한 영웅이지만, 우리에게는 살인자입니다. 우리의 영토를 침탈하기 위해 서슴없이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사실 전쟁에서는 이겼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패배한 것입니다. 세상일이란 참으로 묘합니다. 우리의 영웅이 다른 이들에게는 살인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중국이든 세상의 다른 나라든 모두 각자의 핵심 이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핵심 이익은 사람을 대단히 해칩니다. 사람의 핵심 이익이 천국에 있다면 이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누가 조금 더 차지하든 덜 차지하든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사람의 핵심 이익이 세상에 속하게 되면, 겉으로는 매우 위대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형벌받을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모스가 언급한 이스라엘 주변의 여러 나라들은 사실 모두 이스라엘과 연관이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서너 가지 죄를 거듭 범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형벌을 결코 면해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하나씩 살펴볼 것입니다. 이 '서너 가지 죄'란 계속해서 반복하여 짓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시지만 그들은 도무지 듣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도 핵심 이익이 도대체 무엇인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을 미치게 만들고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것이 곧 핵심 이익입니다. 반면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나라를 핵심 이익으로 삼는 사람은 감정이 매우 안정되어 있고 괴로워하는 일도 거의 없음을 보게 됩니다. 돈을 벌어도 크게 기뻐하지 않고, 손해를 보아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런 것들을 대단한 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1. 다메섹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아모스서》 1:3)

길르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사울이 죽임을 당한 후 사울을 기억하고 기렸던 사람들입니다. 다메섹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아주 성공적으로 쳤으며, 그것도 한 번만 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참으로 대단한 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울이 죽었을 때 사울의 시신을 수습해 주었고, 훗날 다윗도 이를 칭찬하며 상을 주었습니다. 즉 사울이 비록 온전치 못했을지라도, 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으며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은 하필 다른 이들도 아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몇 번이고 거듭해서 쳤습니다. 길르앗이 괴롭힘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방식이 우리의 방식과 다를 뿐인데,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은 우리의 생각과 매우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메섹의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주민들을 끊으며 벧에덴에서 규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길에 이르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아모스서》 1:5)

남의 것을 탐내고 이익을 취한 대가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로로 끌려가게 하시는 것이니,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도 훗날 모두 포로로 끌려가 나라가 망하고 가정이 깨어졌는데, 이러한 비극이 일어난 원인을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나라가 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라의 강성함이란 결코 그 세대의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사실 그 나라가 죄를 지었는지 여부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영적인 안목을 하나 가르쳐 드리자면, 겉보기에 아주 강한 나라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흔히 '인생사 새옹지마'라 하듯이, 한 나라가 연약할 때 와신상담하며 마음으로 통회하면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국운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나라들은 갑자기 강성해지면 오늘은 이 나라를 괴롭히고 내일은 저 나라를 괴롭히며 온갖 곳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민을 생각하고 있다면 여기에는 깊은 이치가 담겨 있으니, 결코 쇠퇴해 가는 쪽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올해는 흥하던 곳이 내년에는 쇠할 수 있는데, 마침 여러분이 이민 간 곳이 쇠하는 곳이 된다면 큰 낭패를 보게 될 것입니다. 다메섹은 국력이 강성할 때 남을 괴롭혔습니다. 세상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는 것이 변치 않는 법칙처럼 보이지만,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보다 강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하나님보다 강하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를 굴복시키실 것이며, 이것이 바로 역사의 법칙입니다. 만약 어느 지역이 갈수록 타락하고 갈수록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으며, 오직 자신의 핵심 이익만을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다루실 것이고, 그 나라는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강해지기만 하면 교만해져서 분수를 모르고 빼앗으려 듭니다. 일부 선진국의 부유함이 그들의 과학 기술 덕분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느 역사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국가의 부유함은 다 빼앗아 온 것이라고 합니다. 빼앗는 것이야말로 가장 빠르지 않겠습니까? 남의 돈을 빼앗아 오면 단숨에 부유해집니다. 힘이 세고 건장하니 남들이 당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메섹도 한때 매우 강성했지만 세상의 형세는 바뀌는 법이라, 이 글을 쓸 당시에는 번영하고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쇠퇴하여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도 포로로 끌려간 적이 있고, 아람 사람들과 다메섹도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곳이 동일한 일을 겪으며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바로 핵심 이익과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기독교 탓으로 돌립니다. 제 동창 한 명이 제게 영상을 하나 보내왔는데, 그들의 분석에 따르면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과 그 논리 체계가 지난 수백 년간 일어난 전쟁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매우 의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와도 싸우신 적이 없고, 결코 남을 침략하신 적도 없으며, 심지어 잡혀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조차 자신을 위해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베드로 같은 사람들을 데리고 각자 오호대장군이나 십이대장군처럼 군사를 거느려 전쟁을 일으키고 로마 제국을 전복시키려 하셨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웠을 뿐,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을 행했습니다. 예수님의 핵심 이익은 하늘에 있는 핵심 이익이었고, 이 세상 사람들의 핵심 이익은 세상의 핵심 이익이었습니다. 속담에 양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양두구육'과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제게 영상을 보낸 사람은 제 설명을 들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사람의 내면에는 언제나 기이한 논리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님이시니, 예수님께서 하지 않으신 일들을 벌이지 말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바르게 행해야 합니다.

2. 가사와 두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사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넘겼음이라." (《아모스서》 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아모스서》 1:9)

이 두 구절에는 모두 백성들을 사로잡아 에돔에 넘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가사와 두로는 이스라엘 주변에 위치해 있으며, 오늘날의 가자와 레바논 지역입니다. 두로와 가사는 종종 이스라엘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에돔을 의지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손이고 에돔은 에서의 후손으로,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 형제입니다. 가사와 두로는 다윗이 통치하던 시절에 다윗과 꽤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각자의 핵심 이익이 있었기에 거듭하여 죄를 범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을 한 명이라도 잡기만 하면 에돔에 넘겼는데, 당시 에돔 역시 매우 강력한 국가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에돔이 저주를 받았으니 결코 강해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도 매우 강했습니다. 강도의 논리를 가진 자는 강하지 못할 것이라 착각하지 마십시오. 강하지 않으면 강도짓도 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가인과 라멕, 그리고 훗날 용사요 유명했던 자들은 모두 복을 받은 자들이 아니었지만 매우 강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은 오히려 연약했는데, 이는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최근 우리는 영적 전쟁터에서 점진적으로 전진하며 소돔과 롯에 대해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롯의 입장이었다면, 우리 역시 롯과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롯이 서서 바라보았을 때 소돔의 문명과 기술은 아브라함이 있는 곳보다 훨씬 발달하고 뛰어났습니다. 과학 기술뿐만 아니라 생활 수준이나 1인당 GDP도 훨씬 높았고, 가장 중요한 유흥과 사람들의 자유도 풍부했습니다. 롯이 보았던 것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있는 곳을 보니 아무것도 없고 매우 낙후되어 보여서 소돔으로 이주하려 했던 것입니다. 비록 아브라함과 함께 하란을 떠나왔지만, 롯은 그곳이 아브라함의 약속의 땅일 뿐 자신의 약속의 땅은 아니며, 소돔이야말로 자신의 약속의 땅이라고 여겼습니다. 사람들은 다 이렇게 바라봅니다. 그러나 소돔의 죄악이 가득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불로 그것을 살라 멸망시키셨습니다.

여러분, 결코 어떤 곳이 매우 번창하고 경제가 발달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 역시 롯과 같을 수 있습니다. 가사와 두로가 바로 그렇게 행했습니다. 힘이 부치면 에돔을 의지하고, 이기면 빼앗은 것들을 에돔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들의 결말이 어떠했는지 보십시오.

내가 가사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내가 또 아스돗에서 그 주민들과 아스글론에서 규를 잡은 자를 끊고 또 손을 돌이켜 에그론을 치리니 블레셋의 남아 있는 자가 멸망하리라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아모스서》 1:7-8)

이제 여러분은 가사 사람과 블레셋 사람의 관계를 명확히 아시겠지요?

내가 두로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아모스서》 1:10)

가사와 두로가 맞닥뜨리게 될 운명은 소돔의 멸망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결코 세상적인 안목으로 바라보지 마십시오. 강자의 논리는 결코 좋은 논리가 아닙니다. 세상의 강자들은 매우 대단해 보입니다. 예를 들어 이나모리 가즈오는 세 개의 포춘 500대 기업을 일구어 냈는데, 그중 교세라와 KDDI 통신사는 그가 직접 창립한 회사입니다. 훗날 그는 헤드헌팅을 통해 일본항공(JAL)을 경영하게 되었고, 불과 1년 만에 흑자 전환을 이루어 냈습니다. 이나모리 가즈오가 이처럼 대단하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숭배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JAL처럼 거대한 기업에서 이나모리 가즈오가 1년 동안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회사를 흑자로 전환시킬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실 그것은 이나모리 가즈오와 그리 큰 상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이나모리 가즈오가 갔기 때문에 좋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치 한 작은 국숫집의 주인이 두 번 바뀌었는데, 둘 다 국수를 팔고 맛도 거의 같았지만, 첫 번째 주인이 할 때는 전혀 장사가 안 되다가 두 번째 주인이 이어받자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 먹는 것과 같습니다. 맛은 변하지 않았고, 단지 사진 몇 장을 바꾸었을 뿐입니다.

실제로는 누가 무엇을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붙어 있는 영적인 요인과 관련이 있습니다. 구체적인 이유는 우리도 알 수 없지만, 강자의 논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올 때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아야 합니다. 당시에는 매우 성공적으로 보였을 수 있습니다. 5년 전만 해도 헝다(Evergrande)나 룽촹(Sunac)의 부동산 단지들은 매우 훌륭해 보였지만, 그것이 꼭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충분히 오래 살아본다면 어느 곳에 불이 내려올지 알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바닷물이 빠지지 않았을 때는 모두가 물속에서 수영하고 있으니 진상을 알 수 없고 다 좋아 보이지만, 물이 빠져나가야 비로소 누가 바지를 입지 않고 알몸으로 있었는지 드러나는 법입니다.

불이 내려올 때에야 비로소 그것이 헛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문제는 서너 가지 죄를 거듭 범한 후에야 불이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죄를 지었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치 신호위반을 처음 했을 때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두 번 더 해도 아무 일이 없을 수 있지만, 그것이 영원히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언제 심판이 닥칠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만약 에서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과 자주 어울리며 자기 손의 힘에 의지해 살아가고 저주 가운데 거한다면, 하나님의 불이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다만 그 불의 형태가 다를 뿐입니다.

롯의 아내는 불이 내려올 때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천사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재산과 돈을 내려놓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한 번의 돌아봄으로 인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해에 가보면 해변에 수많은 소금 기둥들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롯의 아내는 한 사람뿐인데 어떻게 저렇게 많은 소금 기둥이 있는가?' 하고 의아해할 것입니다. 롯의 아내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롯이 있고, 수많은 롯의 아내가 있습니다. 저도 젊었을 때 사해에 가본 적이 있는데, 그 바다에는 염분이 너무 높아 물고기가 한 마리도 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백성들을 사로잡아 에돔에 넘겼을까요? 에돔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보다 더 대단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집에서 기른 사병이 318명뿐이었지만, 에서는 400명이나 거느려 할아버지보다 82명이나 더 많았습니다. 우리 눈에 에서가 대단해 보일 뿐만 아니라, 에서 자신도 자신이 왜 저주를 받았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야곱을 보았을 때, 한쪽 다리를 절며 발에는 슬리퍼를 신고 헐렁한 러닝셔츠를 걸친 채 영화에 나오는 꾀죄죄한 집세 받는 노인처럼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더욱 납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저주란 말인가? 야곱이 내 복을 가로채려 온갖 애를 썼지만 결국 빼앗아 가지도 못하지 않았는가?' 세상은 이처럼 사람을 심히 미혹합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불이 떨어질 때는 더 이상 미혹되지 않습니다. 친청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과 한때 득세하며 기세등등했던 자들이 훗날 어떻게 되었는지 보십시오. 오늘은 한없이 당당해 보일지 몰라도,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3. 에돔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을 보고서도 여전히 세상적인 길을 걷기로 선택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에돔은 야곱의 형으로, 야곱보다 5분 먼저 태어났습니다. 에서의 후손을 에돔이라고 부르는데, '돔(dom)'은 붉다는 뜻으로 '이홍(以红, 붉은 자)'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넘기고도 '붉을 홍(红)' 자가 참 좋다며 스스로를 에돔이라 불렀습니다. 음역하여 에돔이라 부르며, '붉고 번성하다'는 뜻으로 여기고 당시 장자의 명분을 판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이 팥죽 사건은 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었고, 명분을 판 후에도 그는 여전히 강성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칼로 그의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항상 맹렬히 화를 내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 내가 데만에 불을 보내리니 보스라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아모스서》 1:11-12)

악령이 붙은 자들은 결국 불로 태워져야 합니다. 에돔은 서너 가지 죄를 거듭 범하며, 늘 칼을 들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사람들을 뒤쫓고 괴롭혔습니다. 본래 한 형제였는데, 어찌하여 원수가 되었을까요? 사실 이러한 일은 에돔과 이스라엘, 에서와 야곱 형제 사이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중국 명나라 황제 주원장의 아들들도 서로를 잔혹하게 죽였습니다. 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연왕 주체 역시 수많은 형제들을 죽였는데, 단지 그들이 자신의 경쟁 상대라는 이유로 골육상쟁을 벌였습니다. 중국 역사를 보면 참으로 끔찍합니다. 《칠보시》에 나오는 "콩대를 태워 콩을 삶으니, 콩이 솥 안에서 우는구나. 본래 한 뿌리에서 태어났거늘, 어찌 이리도 급하게 볶아대는가?"라는 구절과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람의 핵심 이익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친구를 사귀거나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혹은 결혼 상대를 고를 때에도 그 사람의 핵심 이익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핵심 이익이 권력에 있는 것을 본다면 조심해야 하며, 가능한 한 멀리 피해야 합니다.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에게는 기이한 현상들이 나타나는데, 진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작은 의심 하나만으로도 상대를 큰 곤경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조조처럼 천성이 의심 많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호랑이 곁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핵심 이익이 돈이거나 세상의 일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조심하십시오.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그런 사람들뿐입니다.

에돔은 진작에 형제의 정을 잃어버렸습니다. 소망을 하늘에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소망을 땅에 둘 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형벌을 면해주지 않으시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심판하시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단지 다메섹, 가사, 두로, 그리고 에돔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동일한 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심판하시며 단 한 사람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실 것이고, 당연히 우리 자신도 포함됩니다. 아직 언급하지 않은 모압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빠뜨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형벌을 받을 사람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사람인지 깊이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형벌을 받을 사람이라면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의 핵심 이익만을 위해 서너 번 거듭 달려간다면 하나님의 형벌이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영적 상태를 한 단계 더 끌어올려 봅시다. 현재 우리의 영적 상태는 도대체 어떠합니까? 우리는 에서, 가사, 두로, 그리고 다메섹과 같은 길을 걷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메섹은 아람 사람들을 가리키며, 하사엘과 벤하닷이 바로 아람 사람들의 왕이었습니다. 사실 저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이러한 세상 것들이 저를 유혹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저의 작은 지혜는 이러한 유혹을 만났을 때 속히 피하게 만듭니다. 저의 핵심 이익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세상의 하찮은 일들에 대해 비교적 명확하게 분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암몬

암몬은 오늘날의 요르단입니다. 여러분도 실제로 그러한지 확인해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암몬 자손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하여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음이니라 내가 랍바 성에 불을 놓아 그 궁궐들을 사르되 전쟁의 외치는 날과 회오리바람 부는 광풍의 날에 할 것이며 그들의 왕은 그 지도자들과 함께 사로잡혀 가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아모스서》 1:13-15)

사실 영토를 넓힌다고 한들, 확장을 다 하고 나서 도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인 우리 내면에도 여전히 수많은 세상적 역사관과 세상적 논리 체계가 남아 있습니다. 이를테면 강희제, 진시황, 한무제가 영토를 확장해 준 것을 고마워하는 식입니다. 중국의 역사적 영토 변화를 보면, 수천 년 전 초기에는 아주 작은 땅에 불과했다가 청나라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청나라를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훗날 청나라를 우리의 역사로 편입시켰고, 이제 청나라에는 만주족도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칭기즈칸 역시 우리의 역사로 포함시켰지만, 정작 그 시대 사람들은 칭기즈칸을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했습니다. 그가 중국을 너무나 참혹하게 짓밟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가 흘러가면서 칭기즈칸은 대단한 인물로 둔갑했습니다. 사람의 역사관이란 참으로 기이합니다.

자신의 지경을 넓히는 것은 수많은 위인들의 추구였습니다. 몽골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 전체가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때 지배했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참으로 명확히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언젠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논리는 매우 치밀하여, 칭기즈칸으로 하여금 유럽과 아시아와 일본까지 정복하겠다는 꿈을 품게 했습니다. 만약 그 당시에 배가 주어졌다면 미국까지 쳐들어갔을 테지만, 채 도달하기도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세상의 논리를 자신의 논리로 삼고, 세상일을 목표로 삼으며, 자기의 핵심 이익을 위해 살아간다면 반드시 서너 가지 죄를 거듭 짓게 되면서도 스스로를 매우 위대하다고 여깁니다. 제가 드리는 이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람이 이 평생 살아가는 이치를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칼에 의지해 살아가며 지경을 넓힌들, 결국 죽고 나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비록 세계 500대 기업을 연이어 세운다 한들, 죽고 나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물론 세계 500대 기업을 세우는 동안 큰 기쁨을 느끼며 즐겁게 일했다면, 그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린 것으로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암몬 사람, 에돔 사람, 가사 사람, 두로 사람, 다메섹 사람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설령 이스라엘 사람이나 유다 사람이라 할지라도 서너 가지 죄를 거듭 범하면 형벌이 임하게 됩니다. 한 번 죄를 짓는 것은 아무 일 없을 수 있고, 두 번 세 번 거듭 죄를 지어도 괜찮아 보일 수 있지만, 몇 번째에 화가 닥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정말로 재앙이 임하면 큰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점차 생각을 조정하여 영생의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이생이 아니라 영생입니다. 이 영생의 길은 바로 예수님을 본받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도 침략하지 않으셨지만, 훗날 기독교는 종종 남을 침략하곤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독교는 본받아 행하지 않았는데, 기독교가 이생의 개념에 동화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서른 남짓한 나이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삼십 대에 일찍 죽는 것을 아까워하거나 억울해하지 않으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영생에 속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라면 삼십 대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몹시 안타깝고 아깝게 여겼을 텐데, 이러한 '아까움'은 사실 참으로 악한 것입니다. 그것이 이생의 논리 체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뉴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보십시오. 어린아이가 살해당하면 '그렇게 어린 나이에 죽다니 너무 아깝다'고 탄식하고, '이 세상이 얼마나 좋은데 파괴되다니 너무 안타깝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생각들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는데, 그 안에 영생의 관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영생의 관점에 서서 바라본다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바울이 걸어간 길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왜 그렇게 분주합니까? 세상의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깊이 따져보지도 않은 채 아등바등 싸우고, 벌고, 빼앗고, 쟁취하느라 곤비하여 녹초가 되고 파김치가 되도록 자신을 볶아댑니다. 사람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사람이 이생의 것들을 점차 꿰뚫어 보게 되면 야곱과 같이 됩니다. 야곱은 이집트 바로 왕 앞에서 17년을 더 살았고, 이 땅에서 140여 년의 생애를 보냈습니다. 야곱이라는 인물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그가 평생 추구했던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일어난 일들에는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지만, 야곱은 그 모든 것을 매우 담담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일에 대한 그의 관점은 우리의 관점과 사뭇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걸어갔던 이 길을 걷고자 한다면, 그것은 결코 이생의 길이 아니라 영생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핵심 이익을 깊이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세상적인 논리 체계를 품은 채 우리 가운데 와서, 기도하자마자 복을 받는다면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멀리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단지 세상의 것들을 얻기만을 원하지만,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섬김을 하다가 점차 힘이 빠지곤 하는데, 자신의 핵심 이익과 끊임없이 부딪치고 갈등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섬김에 더 이상 열정이 없다고 느끼는데, 섬김이 여러분의 핵심 이익이 아닌데 어디서 열정이 나오겠습니까? 만약 섬김이 여러분의 핵심 이익이고, 여러분의 추구이자 소망이며, 평생 갈망하는 바라면 당연히 힘이 넘칠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힘이 나는 법이니, 평생 동안 마땅히 해야 할 그 일을 행하십시오.

사실 사람은 겉보기에 선한 사람일 수 있지만, 죽은 후에 어떻게 될지는 알지 못합니다. 오직 이생의 것들만을 위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불이 내려와 여러분의 세상적인 모든 꿈을 태워버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 왕국을 세우려 해도, 설령 그 불이 내려오지 않는다 해도 사람이 죽고 나면 그 왕국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평생 포로로 끌려가든지, 불이 내려와 타버리든지, 지진이 일어나 무너져 내리든지 비참하게 끝납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소망을 영생에 두면, 우리는 서너 가지 죄를 거듭 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거듭 짓는다는 것은 그가 여전히 자기의 핵심 이익을 좇고 자신의 꿈을 좇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나눔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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