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는 계속해서 <사도 바울의 복음> 시리즈를 나누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 시리즈를 전하기 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열두 편의 설교를 나눴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의 복음> 시리즈의 세 번째 시간으로, 주제는 “우리는 약속으로 말미암은 자녀입니다”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함께 어떤 복을 받아야 할까요? 어떤 분은 “목사님,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고, 우리의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가장 중요한 복은 바로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이 약속 안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계시되었는데,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얻었습니까? 얻지 못했습니다. 누가 얻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취한 우리들입니다.
제가 왜 교회를 세우게 되었을까요? 지난 세월 동안 교회 안에서 저를 가장 혼란스럽게 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 안에는 어떤 마음이 하나 있었는데, 여러분은 극단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성경 말씀을 읽었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믿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극단이 아니라 바른 믿음(正端)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을 때도 다소 막막했지만, 그 안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야 한다’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과정에서 많은 유익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주님을 믿는 길에서, 저는 제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 누구도 저의 이 확고한 고집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렇기에 사는 것은 매우 단순한 일이 되었습니다. 일도 열심히 하고 사역도 힘써서 하지만, 저는 여전히 제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압니다.
당시 현지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열정을 품고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이 전한 것은 약속이 없는 종교였고 사람을 끌어모으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의 약속이란 그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약속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수많은 우여곡절과 아주 길고 긴 어둠의 시간을 통과한 끝에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 화인 사명 신학은 하나의 체계적인 신학을 형성하게 되었고, 바로 체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체계가 없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취할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최근 인터넷에서 아주 화제가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새로 산 비행기가 격추당하자 많은 분석가들이 원인을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비행기가 격추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현대전은 체계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지상, 공중, 위성, 그리고 젠-10 전투기까지 결합되어 유기적으로 타격하는데, 체계가 없는 쪽은 체계가 있는 쪽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영적 세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주님의 교회를 세워 가고 있습니다. 지금 전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복음> 시리즈는 바로 온전한 체계를 갖춘 복음을 구축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적 세계에서 영적 전쟁을 치르고, 마귀가 새로 산 비행기를 격추해 버린다면 우리는 강력해질 것입니다. 무지는 거대한 재앙이며, 무지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렇기에 배움은 화인 사명 신학의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여기에 무엇 하러 오셨습니까? 설교를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며 필기조차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무지의 문제를 해결하겠습니까? 무지한 사람도 믿음은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취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을 취할 방법이 없습니다. 날마다 종처럼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 드려야겠다고만 생각한다면 큰 문제입니다.
사람에게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있어야 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알아갈 수 있을까요? 화인 사명 신학 체계를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이 또 다른 신학 체계를 만들어 낸다 하더라도, 우리가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인 사명 신학 체계는 사실상 바울의 신학 체계이며, 이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결코 자신을 종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매우 치명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다가도, 문제만 생기면 믿지 못합니다.
어떤 분들은 묻습니다. “목사님, 체계가 무엇인가요?” 체계란 온전한 시스템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가구까지 완비되어 짐만 들고 들어가면 살 수 있는 집과 같습니다. 만약 온전하지 못해서 집을 짓다가 엘리베이터를 빠뜨리거나 화장실을 빼먹었다면 그 집을 쓸 수 있겠습니까? 또 회계를 배울 때 단편적인 지식만 배워서는 회계 업무를 잘 해낼 수 없습니다. 회계학 전체의 지식을 갖추어 하나의 온전한 체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의 약속을 취하지 못할까요? 하나님의 약속이 폐해져서가 아니라, 우리가 제대로 붙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폐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지각 안에서 충만하게 하나님을 알기를 권면합니다.
며칠 전 인터넷에서 “약속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됨”에 대해 설교하는 많은 사람들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다 듣고 나서 무언가 참고할 만한 것이 있을까 싶었지만, 건질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영적 전쟁의 신학입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승리의 신학입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온전한 복음의 체계입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교회를 세우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며, 정병(용사)을 훈련하는 체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저것 배우고 나서 “목사님, 목사님 강의는 다 들었습니다.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은 앞 구절만 들으면 뒤에 무슨 말씀을 하실지 다 압니다”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승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비극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많이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다 알았다면 사명 신학을 하나 더 세워도 괜찮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귀보다 1분 더 버티기”라는 개념을 붙잡았지만, 온전한 체계가 없다면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마귀보다 1분 더 버티기”는 파편화된 작은 조각 중 하나일 뿐입니다. 이 온전한 체계 안에서 매우 중요한 관점 중 하나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지, 우리가 행한 무언가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개념 중에서 저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종의 마인드이고, 다른 하나는 아들의 마인드입니다. 종의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약속을 잘 믿지 못합니다. 아들의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분(위치)이 바로잡히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이 바로잡히지 않으면, 다른 모든 것은 무너집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께 “하나님, 저를 고쳐주시기를 간구합니다”라고 한다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 치료를 간구하는 태도가 종이 주인에게 밥 한 그릇 주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면, 그 이면에는 하나님이 치료해 주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뜻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태도를 취합니다. 치료해 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주님은 반드시 나를 고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저를 치료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여 마귀를 꾸짖어 쫓아내면, 시도할 때마다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종종 사람들은 “당신은 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 합니까?”라고 말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곧 저의 영광이고, 저의 영광이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저는 하나님과 하나인데 누구의 영광을 가로챘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결코 하나님 앞에서 낯선 남처럼 굴지 마십시오. 저는 남처럼 서먹서먹하게 구는 사람을 참 싫어합니다. 당당한 모습은 없고, 무슨 일만 있으면 쭈뼛거리고 부끄러워합니다.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사람은 관계를 맺을수록 점점 멀어지고 냉랭해집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갈수록 더 가깝게, 갈수록 더 좋게 맺어갑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하나님께 무엇을 사양하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이것을 해도 될까요? 하나님, 제가 저것을 해도 될까요?” 여러분이 종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에 와서 굳이 종이 되기를 좋아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고, 저는 사실 그렇게 큰 야심은 없습니다. 그저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위해 바닥이나 쓸면 족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의 마인드가 아닙니까? 전부 종의 마인드입니다. 어떤 아이들은 타고나기를 조금 어리석어서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할지 모르고, 부모와 남처럼 지냅니다.
어느 자매님이 있었는데, 아이가 게임만 하고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매를 들었습니다. 아이 아빠가 돌아와서 아이를 또 혼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가 학교에 가서 선생님에게 “저 경찰에 신고할래요. 아빠가 가정폭력을 써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정말 어리석은 것입니다. 부모가 자신을 위해 그러는 줄을 모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미련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무단결석을 해서 아버지가 머리끝까지 화가 나 2인치짜리 가죽 벨트로 엉덩이를 호되게 때리셨는데, 그 덕분에 단번에 대학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제 고향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하나 일어났습니다. 한 아이가 지역 최고의 고등학교에 다니며 반에서 10등 안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 게임에 빠져 성적이 곤두박질치자, 어머니가 스마트폰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러자 난리가 났습니다. 그 아이가 칼로 부모를 찔러 죽이고 자신은 아파트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일가족 세 명이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일이 제정신입니까?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부모가 어릴 때부터 아이를 바르게 양육하지 못하고, 아이의 악한 습관을 다루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아이를 짐승처럼 키우고 만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집안에서 누가 아빠이고 누가 엄마이며 누가 아들인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자녀가 자녀 같지 않고 부모가 부모 같지 않게 만들지 마십시오. 이것은 매우 흔한 현상입니다. 악행을 철저히 다루지 않으면 아이는 어리석어지고, 결국 온 가족에 비극이 일어납니다.
또 어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매를 맞기만 하면 부모를 원망합니다. 머리에 문제가 있어서 좋은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나쁜 것만 잔뜩 기억합니다. 심부름이라도 조금 시키면 억울해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조금만 징계하시면 경찰에 신고하려 듭니다. 누구에게 신고하겠다는 겁니까? 마귀에게 가서 고발하겠다는 겁니까? 종의 마인드가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자기가 바르게 행했는지는 반성하지 않고, “하나님이 아직도 나를 사랑하시는가?” 하고 의심합니다. 이것은 매우 악한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종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예 생활에 익숙해져서 하루아침에 노예 근성을 고치지 못했기 때문에 광야에서 죽고 만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관계 설정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하나님은 강한 팔로 그들을 인도해 내셨고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작은 어려움만 만나면 하나님의 은혜를 까마득히 잊고 즉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곳에서 죽게 하십니까?” “가나안 땅에 거인들이 있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 거인들은 키가 3미터가 넘고, 손에 든 무기는 수레바퀴 축만큼 굵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던 일도 잊고, 홍해를 건너게 하신 일도 잊어버렸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머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결코 자신의 기억력을 믿지 마십시오. 사람의 기억은 매우 왜곡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늘에 굳게 서서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을 만나든, 앞에 홍해가 가로막혀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앞에 요단강이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광야를 이리저리 헤맨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영원히 잊지 마십시오. 갈라디아서 4장 28절부터 3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본문 말씀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갈라디아서 4:28-31)
기도
하나님, 오늘 우리의 지각의 눈을 열어 주셔서, 우리 생각 속에 있는 종의 마인드를 제하여 주시고, 우리 안의 가난한 마인드를 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갈라디아 사람들을 통해 깊은 교훈을 얻게 하시고, 주님 앞에서 우리가 주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자녀가 되었음을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 순전한 복음을 받으며, 주의 자녀 됨의 복음을 받게 하옵소서. 이것이야말로 참된 복음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주의 약속을 취하여, 그 약속대로 주님을 뵈올 때까지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며 살게 하옵소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주의 성령을 우리 위에 부어 주시고 늘 충만케 하사, 능력을 얻고 지혜와 총명을 얻어 더욱 주님을 닮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배경
갈라디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입니다. 바울이 교회를 세운 후, 또 다른 무리가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매우 열정적으로 대하며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등 열심을 냈습니다. 그러자 갈라디아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구약>도 지켜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누가 구약을 지키기를 좋아했습니까? 바로 <야고보서>를 쓴 그 야고보였습니다.
야고보 아래에는 바리새인 무리가 있었는데, 그들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성경을 제대로 읽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너희는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고 이미 분명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승복하지 않고 여전히 지키려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와 베드로로 대표되는 예루살렘 교회였으며, 요한은 그 일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매우 열정적으로 기도를 인도하고 행위 중심의 교훈을 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행위 중심의 교훈을 전했을까요? 그들은 모세만 생각하고, 모세 이전에 아브라함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하게도 종종 그릇된 길로 빠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목사님은 종교개혁을 한다면서 마르틴 루터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마르틴 루터에게 왜 돌아갑니까? 사도 바울에게 돌아가는 것이 더 좋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까? 우리가 사도 바울의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로 이해한다면,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 구성 요소임을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마르틴 루터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이 어째서 이토록 낯설게 들릴까요? 왜 사람들은 사도 바울에게로 돌아가지 않는지 저로서는 참 의아합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무리는 갈라디아에 도착하여 갈라디아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모세에게로 되돌려 놓으려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브라함에게로 돌아가지 않았을까요?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받은 것은 약속이었고, 모세가 반포한 것은 율법인데, 그 율법책 안에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누가 썼습니까? 모세가 썼습니다. 다시 말해 모세가 전한 율법서의 근본은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너희가 율법을 들고 나왔느냐? 그렇다면 우리도 율법을 들고 이야기해 보자.” 만약 제가 <갈라디아서>를 썼다면 훨씬 더 직설적으로 썼을 것입니다. “너희는 모세의 율법서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무엇을 잘난 체하느냐?” 하지만 바울은 비교적 정중하게 율법서를 인용했습니다. 바울은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내게 말하라 너희가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아브라함과 그의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하였느냐?”라며 아브라함을 제시했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 그에게는 육정을 따라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의 어머니 하갈은 사라의 여종이었습니다. 사라는 자신의 여종을 아브라함에게 주었고,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삭은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주신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이 99세 되던 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내년 이맘때에 네게 아들이 있으리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육정을 따라 난 자로,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다른 하나는 약속을 따라 난 자로, 약속을 따라 난 자라야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다면, 우리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난 자이며, 곧 하나님의 자녀이자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 시대에 이르러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습니다. 에서는 후손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야곱만이 후손으로 여겨졌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난 자라고 해서 다 후손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을 가진 자라야 후손임을 보게 됩니다. 야곱과 이삭은 아브라함과 맥을 같이하며, 이는 아브라함의 약속을 계승한 것입니다. 야곱이 왜 그토록 하나님을 귀하게 여겼을까요?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을 내세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논증했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까, 아니면 약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까? 이 논리는 지금까지도 극도로 혼란스러워져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명확히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잘 설명하지 못해 여러분이 알아듣지 못할 수도 있고, 제가 명확히 설명해도 여러분이 못 알아들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논리는 매우 단순합니다. 육정으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낼 수 있습니까? 살아낼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 육정을 따르면 약속을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약속은 믿음으로 말미암기에, 믿을 때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되고, 성령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어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결코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내가 주님의 자녀입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은 없습니다. 반드시 약속으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약속을 취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안에 아들의 영이 있고, 성령이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 안에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공헌을 하겠다는 마음만 있다면 그것은 종입니다. “하나님, 제가 마당을 쓸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구두를 닦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면도를 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도대체 누구로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문제가 됩니다.
매우 혼란스러운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까, 받지 않았습니까?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고 나서 왜 미혹되어 하나님의 도에서 벗어났을까요? 성령을 받은 후 그들 안에는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무리가 와서 미혹하자,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며 그것들에 얽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까? 복음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고도 왜 곁길로 빠졌을까요? 성령께서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수 없었단 말입니까? 여러분은 차츰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고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지각(이해)에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지각으로도 기도하고, 영으로도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을 받는 것 자체만으로는 지각에 즉각적인 변화를 주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 교인들이 성령을 받고,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미혹을 당한 이유입니다. 화인 사명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매우 중시하며, 지각 안에서 충만하게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지각 안에서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방언 기도는 해야 합니까? 영으로 기도해야 합니까? 당연히 해야 하며, 더욱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몹시 애를 태우며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라”고 말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었기에, 사람들이 모세를 들고 나오자 갈라디아 사람들은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창세기>를 제대로 읽지 않았고, 모세오경 전체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 채 그저 남의 말만 풍문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더 이상 무지한 자가 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성경을 상고하여 우리가 전하는 말이 그러한가 확인하십시오. 지금까지도 <신약>과 <구약>을 날카롭게 구분 짓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 시대에는 신약성경이 아예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 시대에 읽었던 것은 모두 <이사야서>, <창세기>, <출애굽기>와 같은 구약이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성경은 하나의 온전한 체계이며 본래 구약과 신약이라는 인위적 구분이 없습니다. 신약과 구약은 하나의 맥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나중에 제가 발견한 사실인데, 귀신을 쫓고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교회들 중 많은 목회자들의 말로가 매우 비참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지각이 열리지 않고 생각에 걸림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알아야 할 것은 방언 기도가 전부가 아니며, 기도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귀신을 쫓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하나의 온전한 체계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위해 속을 태우며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진실을 말하며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고 가르쳤더니, 그들의 반응은 “왜, 당신만 옳다는 겁니까?” 하는 식이었고, 바울은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바울이 쓴 서신들의 행간에는 눈물이 가득합니다. “내가 수고하여 너희를 섬기고 참된 말을 전했더니, 도리어 원수가 되었구나.” 왜 그렇습니까? 갈라디아 사람들의 생각이 비뚤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의 마인드
종의 마인드란 무엇일까요? 갈라디아 사람들의 상태가 전형적인 종의 마인드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하나님께 치료를 빌며 “하나님, 제발 부탁드립니다”라고 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의 마인드입니다. 효과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녀이지 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의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계속해서 종의 마인드 안에 갇혀 삽니다. 여러분의 지각이 열린다면 이런 태도는 아무런 능력이 없으며 도리어 주님을 답답하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집에 손님이 와서 머물 때, 뒤에서 몰래 소곤거리며 “조심해, 눈치 보이지 않게 처신해”라고 말하는 사람을 매우 싫어합니다. 결국 그 한마디가 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듭니다. 무엇을 조심합니까? 이것도 손대지 말고 저것도 손대지 말라니요. 찬장에 있는 라면 몇 봉지를 누가 아까워하겠습니까? 제가 엄청난 부자는 아닐지라도 라면이나 과자, 꿀 같은 것은 먹으라고 사다 놓은 것 아닙니까? 우리 집에 손님으로 와서 머무는데 방세를 받은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마음이 옹졸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마음이 옹졸하면 종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건대,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이 종의 마인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며, 여러분의 이 종의 마인드를 고쳐 주느라 제가 진이 다 빠질 지경입니다. 스스로 종으로 살면서도 자기가 꽤 대단하다고 여깁니다. “남에게 폐 끼치지 말고, 함부로 만지지 말자.” 차라리 수호지의 호걸들처럼 늠름한 기개라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차라리 소탈하고 호방하게 밤에 땅콩 한 접시 놓고 기분 좋게 한잔 기울이는 모습을 좋아합니다. 쭈뼛거리고 눈치 보는 모습은 마치 도둑 같습니다.
이러한 종의 마인드는 어디서 왔을까요? 바로 하갈에게서 왔습니다. 하갈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어느 날 임신을 하게 되자 기고만장해졌습니다. 종이 한번 신분이 오르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궁중 드라마를 보면 지위가 낮던 자가 득세하면 기세가 등등해져서, 자신의 주인인 사라를 여종 취급하고 자신이 상전 노릇을 합니다.
“사라, 물 한 잔 떠와.” 사라는 물 한 잔을 가져다가 하갈의 얼굴에 끼얹어 버렸습니다. “내가 너한테 물을 떠다 주랴? 어디서 건방을 떠느냐? 네 배에 아이가 생겼다고 기고만장하냐? 내가 널 내 남편에게 주지 않았다면 네가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었겠느냐? 널 쫓아내 버릴 테니 어디 한번 계속 우쭐대 보아라.” 종의 마인드는 참으로 무섭습니다. 종이 성공하면 아주 위험해집니다. 기업에서도 청소 노동자들 사이의 인간관계가 매우 복잡하고 다루기 힘든 것과 같습니다.
종의 마인드를 가진 하갈이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습니까? 경험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알고 있었습니까?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알았습니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고,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만 여겼습니다. 이 말을 들어보십시오. 믿는 것이 온통 간접적인 것들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저는 하나님의 자녀라고는 할 수 없고, 그저 손자 정도만 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하나님 나라에는 손자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손자는 없습니다. 왜일까요? 손자는 한 세대를 건너뛰는 관계이지만, 하나님 나라에는 대를 건너뛰는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제외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하갈이 광야로 도망쳐 오도 가도 못하고 거의 죽게 되었을 때, 문득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해 주옵소서.” 그러자 주의 사자가 그녀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돌아갔습니까? 돌아갔습니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까? 낳았습니다. 아이가 자랐습니까? 자랐습니다. 그런데 하갈이 교훈을 얻었습니까? 얻지 못했고, 그저 그렇게 살았습니다.
만약 그녀가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입니다”라고 고백했다면 어땠을까요? 성경에는 “당신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나의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님이 됩니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자녀의 마인드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마인드가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을 취하지 못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몹시 조심스러워하며, 그것을 ‘겸손’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 앞에서 사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것 참 좋네요. 저에게 하나 주십시오. 천국 열쇠를 주신다더니 왜 이렇게 작은 꾸러미만 주십니까?” 거짓된 겸손으로 몸을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데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훗날 사라는 이스마엘이 자라서 자신의 아들 이삭과 함께 노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노는 것이 아니라 이삭을 괴롭히는 것이었습니다. 사라는 내 아들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어 “당장 쫓아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래도 자기 아들이었기에 몹시 근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쫓아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갈은 이스마엘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떠날 때 물 한 가죽부대만 챙겨 나갔다가 결국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습니다. 여전히 종의 마인드였습니다.
하갈이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적었습니까? 사라가 이삭을 낳은 사건이 바로 그녀의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끝내 깨닫지 못했습니다. 만약 하갈이 “사라여, 당신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고 나의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님입니다. 당신의 집이 곧 나의 집이며, 당신은 나의 주인이니 나는 당신의 여종으로 섬기겠습니다”라고 했다면 어찌 이런 처지에 놓였겠습니까? 여전히 종의 마인드였기에 조금만 잘되면 교만해졌던 것입니다. 이 종의 마인드는 결코 품어서는 안 됩니다.
아들의 마인드
아들의 마인드는 참으로 훌륭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나님, 저의 것이 주님의 것이고 주님의 것이 저의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주님의 돈이 제 돈이고, 제 돈도 주님의 돈이니 우리 함께 씁시다.” 그러므로 아들의 마인드는 종의 마인드와 선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우리가 영광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며,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곧 우리가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자세히 읽어보면 바로 이러한 논리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자주 무엇을 가르칩니까?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것이니,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 된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무런 영광도 남지 않게 되었고, 결국 암에나 걸리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아들의 마인드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나타나야 합니다.
아들의 마인드란 어떤 마인드일까요? 하나님의 것이 곧 나의 것이고, 나의 것 또한 하나님의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아들의 마인드입니다. 물론 여러분, 제 말꼬리를 잡고 “누구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지 않았느냐”고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그에게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라 왕위가 아버지였기 때문이며, 그것은 짐승 같은 본성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결코 하나님께 사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이미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모든 권세를 얻으셨고, 하나님께서는 그 권세를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 우리를 자녀 삼으시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취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승리하는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교회를 세워 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들의 마인드입니다.
아들의 마인드는 하나님의 집에서 다스리는 것입니다. 관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자 우리의 것이기에,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하셨고, 모세가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했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하는 것, 이것을 바로 본받음이라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그대로 우리도 행하는 것,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여기에 무슨 사양이 필요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면목이 없습니다. 제가 주님을 위해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저는 정말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하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본래 너는 자격이 없었단다. 내가 너에게 거저 준 것이 아니냐? 무엇을 사양하느냐?” 여러분이 “아직 부족합니다. 제가 행한 것이 온전치 못합니다”라고 하면, 하나님은 “너는 영원히 부족할 수밖에 없단다. 이 어리석은 아이야, 여기서 왜 사양하고 있느냐?”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무언가 잘해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행위 중심의 사고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약속으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모두 우리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폐해지지 않으며, 하나님의 약속 중 단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늘 권면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우리의 것입니다. 아멘!
어떤 분은 “목사님, 저는 왜 이렇게 가난하게 살까요?”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취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약속을 취하지 못할까요? 여러분 안에 종의 마인드가 들어 있고, 자신의 손에 든 칼을 의지해 살아가던 에서의 논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합니다. 저는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만을 의지합니다. 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 행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으스대는 것도 아니고, 내가 부족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처럼 여길 것도 아닙니다. 지금 당장 이 종의 마인드를 버리고, 하나님의 집에서 주님이 맡기신 것들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내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이 아직 두세 살배기 어린아이여서 철이 없고 때로는 바지에 똥을 쌀 때도 있다면, 그때는 규칙을 세워 훈련해야 합니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자라 성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아무리 어리고 부족하여 바지에 오줌을 싸고 똥을 싸며 “엄마, 젖 줘” 하고 칭얼댄다 해도,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다 자란 뒤에야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이미 자녀의 마인드를 품어야 합니다.
어릴 때는 율법 아래 매여 규율을 지키는 법을 배우지만, 규율을 지킨다는 사실이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합니다. 규율을 잘 지켜야 자녀가 되고, 못 지키면 자녀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 지키지 못하고 행실이 부족하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것입니다. 결국 우리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성장케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더 이상 혼란스러워하지 마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성경이 무엇이라 말씀하는지 아십니까?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맏아들이시며, 수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이끌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려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은 바로 아들의 명분(양자의 영)이며, 우리는 아들의 신분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약속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이며, 사도 바울 복음의 핵심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루어 낸 것은 바로 이 아들의 명분이 우리 위에 온전히 성취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의지하고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날마다 하나님의 아들을 더욱 닮아가고 우리 안에 하나님 아들의 형상이 나타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참된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화인 사명 신학이 말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지, 죽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서 천국에 간 뒤에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야 합니다. 본래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루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회복입니다. 사람 같지도 않고 귀신 같지도 않던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처음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바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여 나가는 과정입니다.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도달하라
바울의 복음 안에는 “나는 구원받았으니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식의 논리가 결코 없습니다. 바울의 복음에는 이런 논리가 아예 없으며, 도대체 누가 이런 소리를 지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귀신이 지어낸 것일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아, 나는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와 구주로 영접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무슨 구원을 받았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은 장성한 사람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날마다 칭얼대며 기저귀나 차고 있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귀신을 쫓고 방언을 말한다는 교회들이 결국 귀신에게 호되게 당해 처참한 말로를 맞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렇게 비참해질까요? 장성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이르지 못했고, 지각 안에서 끊임없이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성장은 지각(이해) 안에서의 성장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인 사명 신학이 배움의 신학이자 끊임없이 자라나는 신학인 이유입니다. 여러분이 늘 어린아이들만 데리고 있다면, 두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영적 전쟁을 치를 수 있겠습니까? 전쟁을 치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십시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의지하고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날마다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아끼십시오. 그 시간을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 사용하십시오.
때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한 번 걷어차실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머리가 아파요”라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한 번 걷어차시며 제대로 성장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두통이 찾아옵니다. 어떤 분은 “다리가 아파요”라고 합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이 여러분을 차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차고 밀고 끌어당기며 힘써 성장하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제가 나이가 이렇게 많은데 무슨 성장을 합니까?”라고 합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치매에 걸릴 뿐이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자녀란 장성한 자녀를 뜻합니다. 어릴 때는 무엇이라 부릅니까? 어릴 때는 종과 다름없어서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 얽매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후사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받는 자이며, 하나님의 기업이 곧 우리의 기업입니다.
여러분이 아직 장성한 자가 되지 못했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서둘러 힘써 성장하십시오. 여러분이 70세에 주님을 믿었다면, 70세부터 80세까지 하나님을 닮고 예수님을 닮아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이루어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이가 들수록 하나님이 더욱 필요하지, 나이가 든다고 하나님이 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은 힘써 성장하는 복음이며, 사도 바울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복음입니다.
마무리
여러분 모두 돌아가셔서 <갈라디아서>를 다시 한번 읽어 보시고, 하나님을 새롭게 알아가기를 권면합니다. 총 5장밖에 되지 않아 읽기 쉽습니다. 종의 마인드에서 벗어나 아들의 마인드를 품고 하나님의 약속을 취하십시오. 우리의 행위가 어떠한가에 매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며 끊임없이 장성한 사람으로 자라가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