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는 《학개》 2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비록 학개서는 두 장밖에 되지 않지만, 2장의 주제를 찾는 것은 다소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원래 저는 이 장의 주제가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성경을 읽는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전체 본문을 아우를 수 있는 주제를 택하여 그 장의 내용을 하나로 꿰뚫어 내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내용이 주제와 무관하다면, 그것은 주제를 잘못 잡았다는 뜻입니다. 거듭 고민한 끝에, 저는 이 장의 주제를 “너희는 과거에 저주받았던 날들을 되돌아보라”로 정했습니다. 왜 이렇게 말해야 할까요? 그들이 이제 막 복을 받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특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좋은 날을 보낼 때 이것이 은혜임을 깨닫지 못하고, 다 자기가 마땅히 얻어야 할 것으로 여긴다는 점입니다. 참 흔한 일이지요! 우리는 과거에 저주 가운데 살았던 날들이 도대체 어찌 된 일이었는지 깊이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제가 정한 이번 장의 주제는 앞뒤를 이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1장의 주제는 “너희의 행위를 살피라”였는데, 실상은 자신이 왜 저주 가운데 살았는지를 살피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2장은 “너희는 과거에 저주받았던 날들을 되돌아보라”입니다. 이 주제는 우리에게도 매우 훌륭한 경각심을 줍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자매님은 우리 교회에 오기 전에 삶이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자녀가 둘 있었는데, 한 아이는 척추측만증이 38도까지 진행되었고, 다른 아이는 늘 병치레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 온 후 그녀는 복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녀는 지금까지도 과거에 받았던 저주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과거에 저주받았던 날들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형편이 좋아지면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치명적인 문제 중 하나는 바로 ‘흉터가 아물면 아픔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에 저주받았던 날들을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전히 저주 가운데 머물러 있고, 재정 상태가 좋지 않으며, 모든 면에서 형편이 어렵다면, 학개서 1장을 읽으며 왜 자신이 저주를 받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능력이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능력(성찰의 능력)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저주 가운데 살고 있다면 반성해야 합니다. ‘이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삶을 이렇게 사는 게 맞는가?’ 삶이 마치 막장 드라마 같고, 매 회마다 막장으로 치닫는다면 정말 탄식이 절로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살게 되었는가? 이것이 내 팔자인가? 아닐 텐데?’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사람은 마땅히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핵심은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입니다. 지난 장에서 저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그가 복을 받을지 여부를 결정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의 마음가짐은 이토록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 16년이 지났는데, 그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전혀 잘 살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들의 마음가짐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니, 그들은 “우리 집 인테리어도 아직 안 끝났어요! 성전 짓는다고 밥이 나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삶은 정말 처참해졌습니다.
성경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하는 모든 수고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학개 1:10-11)
그뿐 아니라 그들은 “많이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집으로 가져갔으나 하나님께서 불어 버리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성전이 황폐해지면 사람의 삶은 비참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근본 원인은 사람들이 ‘자기 밥그릇, 자기 삶만 챙겼기’ 때문입니다! 집 인테리어 생각만 하면서 “나는 와비사비 스타일로 해야지, 크림색 인테리어로 해야지, 일본식으로 해야지” 하며 매일 이런 생각만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일들에 대해 나름의 기준이 있습니다. 무엇이 이득이고 무엇이 손해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떻게 여러분을 가르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반드시 굳게 기억해야 할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 축복이고 무엇이 저주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축복과 저주를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생각만 했다 하면 세상적인 논리 체계로 빠져듭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이 일을 바르게 하고 있는가? 내가 이렇게 해서 무엇을 얻으려는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가? 만약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면 큰일 아닌가?’ 그러므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능력입니다. 과거에 저주받았던 날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때때로 제 마음도 싸늘하게 식을 때가 있고, 어떤 형제자매들은 저를 위해 안타까워하며 분개하기도 합니다. 제가 이전에 몇몇 고아와 과부들을 섬긴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원래 매우 비참하게 살았지만, 저의 도움과 하나님의 축복으로 형편이 날로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형편이 나아지자 이전의 비참했던 날들을 잊어버렸고, 결국 다시 저주받던 삶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 가장 수지맞는 일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가장 남는 장사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장 좋은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것이 가장 좋은 일입니다!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은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면 참으로 위대한 것이며, 복을 받지 않으려야 안 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너희는 되돌아보며, 그 저주받았던 날들을 기억하라
“이제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성전에 돌이 돌 위에 놓이지 아니하였던 때를 기억하라. 그 때에는 이십 고르 곡식더미에 이른즉 십 고르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고르를 길으러 이른즉 이십 고르뿐이었었느니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오늘 이전을 기억하라. 구월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성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기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었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학개 2:15-19)
사실 하나님께서는 진퇴양난의 딜레마에 빠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복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시지만, 그들은 복을 받고 나면 저주받았던 날들을 순식간에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이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자화상입니다.
제가 목격한 상황도 늘 이러했습니다. 그들은 저주와 질병 가운데 교회로 찾아옵니다. 제가 “왜 사역을(일을) 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면 “제가 몸이 아파서요”라고 합니다. 제가 다시 “아픈데 왜 일은 안 합니까?”라고 하면 “할 수가 없어서요!”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로 인도해 주어 병이 나으면, 그 후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 모임에 나오지 않습니다.
저는 참 의아했습니다. 그 수년 동안 온몸이 아플 때는 왜 일을 못 했을까요? 병이 낫자마자 왜 갑자기 세상일에만 몰두할까요? 이런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그가 보배라면 보배이고, 쓰레기라면 쓰레기일 뿐입니다! 제가 그의 인생을 바꿀 수도 없고, 쓰레기를 보배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억지로 손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쓰레기가 될 것입니까, 아니면 보배가 될 것입니까? 부정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거룩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스스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9월 24일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기 시작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6월 1일에 학개가 그들을 깨우쳤습니다. “너희는 왜 아직도 성전을 짓지 않는가? 저주받는 날들을 도대체 얼마나 더 살 셈인가? 속히 일어나라!”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24일 동안 고민하다가, 6월 24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공사를 시작했을까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다 총독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읽고 나면, 저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고 불쾌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한심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복된 삶을 살고 싶어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고 자극을 주셔야만 움직입니다. 이야말로 “발로 차야 한 걸음 가고, 안 차면 두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격입니다.
그리고 9월 24일이 되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려 합니다. 이때 성전 건축이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석 달이 지났지만 성전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그들이 한 일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실 때 먼저 하신 말씀이 바로 “너희는 그 저주받았던 날들을 되돌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깨워 주지 않으시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참으로 곤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스룹바벨과 학개 시대로부터 느헤미야와 말라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정말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을 짓기 시작한 6월 24일부터 9월 24일까지의 석 달 동안, 하나님께서는 왜 6월 24일 착공할 때부터 곧바로 복을 주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께서도 참 난처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의아해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왜 나에게 빨리 복을 주지 않으실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여러분에게 속히 복을 주고 싶어 하셨지만, 복을 받고 나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내팽개쳐 버릴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집에 들어오자마자 신발을 벗어 던져 버리듯이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보배라면, 하나님께서 어찌 우리에게 날마다 복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저주받았던 날들을 되돌아보고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신 뒤에 여러분이 다시 예전으로 미끄러져 돌아갈까 봐 염려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훗날 페르시아 제국이 바벨론을 정복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 고레스는 스룹바벨을 이스라엘로 보내 한 지역의 총독으로 삼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바벨론 왕이 빼앗아 갔던 금은 기명들을 돌려보내며 성전을 건축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16년이 흘렀음에도 하나님의 성전은 여전히 황폐한 채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자마자 그들이 뒤돌아서서 잊어버릴까 두려워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페르시아 제국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 때는 모두가 흥분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자기 일에만 바빴습니다! 저를 가장 놀라게 하는 사실은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뒷전이고, 자기 일이 언제나 최우선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너무나 흔한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 저주받았던 날들을 되돌아보고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매우 흥미로운 사례가 있습니다. 그의 딸이 암에 걸렸는데, 제가 그의 딸을 섬겨 치유된 후, 그는 화인명정신학(华人命定神学)을 본받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디로 가 버렸을까요? 막 본받기 시작할 때 당연히 방해가 있었는데, 가장 심한 방해는 그의 아내와 자녀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은 첫째, 가정은 둘째, 교회는 셋째”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논리가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는 저주받던 날들을 아직 덜 겪어서, 기어이 계속 겪어 보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두려운 대상은 귀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많이 얻고자 하나 적게 얻고, 집으로 가져가도 하나님께서 불어 버리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결과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다시 한번 경고합니다. 우리는 그 저주받았던 날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깨달아야 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음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제사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니라” 하는지라.
학개가 이르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하니,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부정하리라” 하더라.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들의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학개 2:11-14)
“그 때에는 이십 고르 곡식더미에 이른즉 십 고르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고르를 길으러 이른즉 이십 고르뿐이었었느니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학개 2:16-17)
여러분은 이 구절의 뜻을 이해하십니까? 거룩한 물건에 닿는다고 해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부정한 것에 닿은 후 성물에 닿으면 그 성물은 반드시 부정해집니다. 즉, 성결을 지키는 것은 매우 엄중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쌀죽 한 냄비에 쥐똥이 단 한 개만 들어가 있어도 여러분은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절대 못 먹습니다! 또한, 좋은 고기라도 조금이라도 썩었다면 먹을 수 있겠습니까? 먹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거룩’이고 무엇이 ‘부정’입니까? 사람이 부정해지는 것은 너무나 쉽지만, 거룩해지려면 온전히 여호와께 구별되어 성결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의 핵심 이익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데 있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사명임을 깨닫는다면, 온전히 여호와께 성결하게 되는 것이 그렇게 어렵겠습니까? 사실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사람의 핵심 이익이 오직 자기가 먹고사는 사소한 일에만 묶여 있다는 점입니다. 그로 인해 그들의 손으로 하는 온갖 일들이 전부 부정해졌고, 그들이 제단에 바치는 제물 또한 부정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어찌 혐오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 형제자매들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반드시 여호와께 성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은 것은 모두 부정한 것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복을 받는 것은 여러분이 성결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저주받았던 날들을 되돌아보며 한 가지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나는 여호와께 성결해야 한다. 나는 다시는 저주받던 날들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사람이 저주 가운데 사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스스로 부정해지면 자연스럽게 저주를 받고, 스스로 거룩하게 구별되지 않으면 자연히 저주 가운데 살게 됩니다.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핵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어떻게 살아갑니까?”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제가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저주받는 삶을 살고 싶습니까, 아니면 복된 삶을 살고 싶습니까? 온전히 여호와께 성결하게 구별된다고 해서 어찌 살지 못하겠습니까? 금도 하나님의 것이요 은도 하나님의 것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저는 아브라함이 구걸하는 것을 본 적이 없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찢어지게 가난한 것을 본 적이 없으며, 그들이 저주 가운데 사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살 수 없다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은 모두 아주 잘 살았습니다! 사람이 미련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은 두려워하면서 정작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으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것입니까?
이제 여러분은 깨달으셨을 것입니다. 저주받았던 날이란 바로 여호와의 성전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놓이지 않았던 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 때에는 이십 고르 곡식더미에 이른즉 십 고르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고르를 길으러 이른즉 이십 고르뿐이었었느니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학개 2:16-17)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려 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고쳤습니까? 사실 아주 조금 고쳤을 뿐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저주받았던 날들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면의 가장 치명적인 옛 관념을 과연 뜯어고쳤습니까? 우리는 자신을 망치는 일에는 일당백이지만, 자신을 세우는 일에는 둘이서 하나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이러니 삶이 어떻게 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삶이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런 형편에 머무는 것, 곧 원래 50통을 얻을 수 있었는데 20통만 얻고, 20말을 기대했는데 10말만 얻는 그런 삶은 결코 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일깨워 드립니다. 너희는 과거에 저주받았던 날들을 되돌아보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지금도 여전히 저주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1장으로 돌아가 스스로를 깊이 성찰하십시오. 여러분이 스스로를 돌아볼 때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실 것이며, 복을 받은 후에도 늘 저주받았던 날들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반드시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고, 확실하고 확고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천지와 만국을 진동시키실 것임을 알라
여러분은 저주받았던 날들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이제 복된 날들이 시작되려 하니, 결코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삽니까?”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다시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개 2:6-9)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만국과 만방을 진동시키시고, 천지를 진동시키시려 합니다! 여러분은 사금을 어떻게 채취하는지 아십니까? 금이 섞인 모래를 그릇에 넣고 흔들어(진동시켜) 금을 걸러내고, 그렇게 걸러낸 금을 불로 제련하며 찌꺼기는 내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실 무엇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그분은 보배를 선별하고 계신 것입니다. 진동을 통해 썩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영원히 남게 하시고, 썩어 없어질 부정한 것들은 흔들어 쓰레기더미로 던져 버리십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부정한 것은 반드시 흔들려 떨어져 나가고, 거룩한 것은 하나님께 속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배를 선별하고 계셨고, 그 가운데 스룹바벨을 택하셨습니다.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말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여러 왕국들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여러 나라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의 동료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개 2:21-23)
스룹바벨은 무엇을 경험했습니까? 그는 한 번의 큰 흔들림을 겪은 후 결단을 내렸습니다. ‘내 일을 내려놓겠다.’ 그는 유다의 총독이었으므로 매우 바빴지만, 자신의 업무를 내려놓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그의 정적들이 황제 앞에 나아가 그를 고발한다면 그의 자리가 온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를 고발한 자가 있었을까요?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전 건축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일을 내려놓았으니,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 온전히 성결하게 구별된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는 분명 그러했습니다! 그는 ‘직장을 잃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서는 능히 지켜 주실 수 있었고, 그의 직무에는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는 도리어 조서를 내려 성전을 계속 건축하게 하였고, 주변 사람들에게 스룹바벨이 성전 건축용 목재를 요구하면 모두 내어 주라고 명했습니다.
그러나 스룹바벨과 같은 믿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믿음은 어떤 기초 위에서 생겨납니까? 바로 하나님의 성전을 마음에 품는 데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지켜 주신 후에 성전을 짓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먼저 위험을 감수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의 훈련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의 사람이라면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총독의 자리는 작은 매니저 직책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총독은 황제에게 직접 보고하는 자리이므로, 직을 잃으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을 인장(도장)으로 삼겠다”고 하신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를 본보기로 삼아 우리로 하여금 본받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를 본받으면 여러분은 진정한 금이 될 것이며, 금은 어디서나 빛을 발합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성결이란 여호와 하나님께 거룩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약간의 모험도 감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무슨 대단한 위험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이 모험을 감수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기 시작할 것입니다. 20말을 바라면 30말을 얻게 하실 터인데, 30말과 10말은 세 배의 차이입니다! 50통을 바라면 100통을 얻게 하실 터인데, 100통과 20통은 다섯 배의 차이입니다! 이러면 삶이 풍요롭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이 어찌 좋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천지와 만국을 진동시키실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것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보배로 거두어들이시고, 스룹바벨처럼 온전히 여호와께 성결하게 구별된 자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종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아, 그 날에 내가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스룹바벨을 본받기 시작해야 합니다. 훗날 이스라엘 백성은 다루기 힘들었고 저마다 삐딱한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스룹바벨은 끝내 이스라엘 백성을 일으켜 세워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스룹바벨이 백성들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했을 때, 그들 가정의 생업은 어찌하며 집 인테리어는 어찌하겠습니까? 참으로 갈등이 되는 일이었지만, 스룹바벨은 담대한 지도자로서 그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아마도 스룹바벨은 본보기를 보여 단호하게 다스려야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천지와 만국을 진동시키실 것인데, 무엇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바로 보배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거두어들이시려는 것입니다.
성전 건축은 믿음의 훈련임을 알라
스룹바벨의 성전 건축은 믿음의 훈련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7월 21일에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을 짓기 시작했을 때, 참으로 초라해 보였으며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기둥마다 금을 입혔으나, 스룹바벨이 성전을 지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목재도 없고 권력도 없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왕국은 매우 강성하여 주변 나라들이 조공을 바쳤지만, 스룹바벨은 일개 총독에 불과하여 큰 권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성전을 지으면서도 마음이 몹시 괴로웠던 것입니다.
“칠월 이십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학개 2:1-3)
이런 상황에서 성전 건축을 계속 지속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속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이런 마음 중심을 가지고 있다면, 특히 우리 가운데 있는 형제자매들이나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다른 이들이 제가 전하는 학개서 2장을 듣는다면, 비록 여러분이 짓고 있는 교회가 매우 초라해 보이고 세워진 성전이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런 외형을 보지 않으십니다.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학개 2:4-5)
우리 형제자매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성전을 짓기 시작할 때는 건축에 대한 지식이 없을 수도 있고, 다 짓고 나서도 보기에 흡족하지 않고 초라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성전의 겉모습이 어떠한지 전혀 개의치 않으시며, 오직 여러분 중심에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지를 보십니다.
여러분의 중심에 성전을 세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아무리 초라할지라도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기쁨이 됩니다. 그러므로 강하고 담대하게 일어나 성전을 건축하십시오. 성전의 초라함에 마음 쓰지 마십시오. 믿음의 눈을 통해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게 될 것을 바라보십시오. 그 나중 영광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진동을 통해 걸러내신 보배들이며, 금과 은이요, 사람들의 믿음으로 세워진 보배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형제자매들은 믿음을 소유하고, 이 초라함 너머로 나중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훈련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믿음의 안목이 있어야 하며, 강하고 담대하게 세워 나가야 합니다! 저는 믿음을 훈련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의 초기 모습은 보통으로 비참했던 것이 아니었지만, 제 안의 믿음 또한 평범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평범한 믿음을 가졌더라면 이런 비범한 사역을 결코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처음 교회를 개척할 때는 참으로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싱가포르를 보면 수만 명이 모이는 대형 교회가 많아서 무대만 해도 우리 교회 전체보다 컸습니다. 웅장한 무대, 드럼, 가수들을 보면서, 노래만 불렀다 하면 음정이탈이 나는 저로서는 마음이 참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한 가지 중심이 있었습니다. ‘교회를 세우려면 오직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교회를 세우겠다!’ 하나님의 말씀이 끊임없이 저를 격려했습니다.
이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클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모두 믿음을 훈련하고 있으며, 믿음의 눈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교회를 세워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 교회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전진하여, 우리가 세우는 교회가 다른 무엇이 아닌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드럼, 기타리스트, 화려한 음악, 무대, 조명이 있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뜨거운 중심이 있어야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뜨거운 중심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것이며, 교회를 세우려면 참되고 확실한 교회, 승리하는 교회, 마귀와 원수를 짓밟는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고된 연단을 거쳤지만, 하나님께서 참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와 분명히 함께하심을 보았기에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출애굽 때 우리와 맺으신 언약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머물러 계시므로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금 다시 드럼이나 기타리스트를 보면 얼마나 촌스럽습니까! 콘서트를 여는 줄 압니까? 우리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성경공부, 기도, 치유, 축사만이 있을 뿐이며, 구름같이 허다한 간증이 있고 하나님의 역사가 실제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나중 영광은 지금의 영광보다 클 것이며, 장차 임할 영광은 현재의 영광보다 10배, 100배 이상으로 뛰어넘을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거나 멈추어 서지 말고 계속해서 앞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신앙 안에 섞여 있는 터무니없는 것들을 제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다시금 그 크신 능력을 드러내게 하여, 형제자매들이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복된 삶으로 들어가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된 삶으로 들어갈 뿐만 아니라, 과거에 저주받았던 날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질병과 저주와 가난 가운데 살았던 과거의 날들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참으로 기이한 면이 있습니다. 겪지 못할 고난은 없으면서도, 누리지 못할 복은 없다는 듯이 복을 오래 누리다 보면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학개서 2장을 통해 여러분께 다시 한번 당부드리며, 제 자신에게도 일깨웁니다. 복된 날들을 누릴 때 과거에 저주받았던 날들을 잊지 말고, 믿음으로 앞을 향해 힘차게 달려갑시다.
결론
우리 앞에는 복된 날들이 놓여 있습니다. 과거에 저주받았던 날들을 항상 스스로에게 상기시키십시오. 그것은 결코 장난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세상적인 논리 체계를 철저히 무너뜨리고, 여호와께 거룩히 구별된 논리 체계, 하나님의 보배가 되는 논리 체계를 새롭게 세우십시오.
‘나는 기필코 하나님의 보배가 되겠다!’ 이것이 저의 결단입니다. ‘나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겠다!’ 이것이 저의 꿈입니다. 저의 핵심 이익은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그 누구도 우리가 받은 이 복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설령 약간의 고난을 겪고 대가를 치른다 해도, 내 하나님을 위해 치르는 대가이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선택입니까!
오늘 나눔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