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번 주에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신학 제7강,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에 이미 넉넉히 이기느니라"를 계속해서 나누겠습니다. 제가 이 설교 원고를 준비할 때 사실 참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자신이 승리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깊은 혼란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넉넉히 이겼다고요? 둘러보아도 어디에 승리가 있습니까? 다들 넉넉히 이기지 못하고, 이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실패하고 또 실패할 뿐입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눈앞의 현실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승리한 본보기는 정말 드물고, 승리하지 못한 본보기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넉넉히 이겼다는 말입니까? 바울이 헛소리를 한 것일까요? 저는 정말 막막했습니다.
요 며칠 동안 저는 로마서 8장을 필사적으로 읽었습니다. 읽고 또 읽다 보니, 마침내 눈이 열렸습니다. 책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저에게는 한 가지 장점이 있는데, 바로 내 생각을 내려놓고 책 속에 담긴 관점을 치열하게 파고드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자기 머릿속에 든 것만 묵상하는 어떤 사람들처럼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과거에도 로마서를 설교한 적이 있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그 절반 이상을 온전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읽고 또 읽으며 깊이 묵상했습니다. 걸으면서도 생각하고, 운전하면서도 생각하고, 변기에 앉아서도 생각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바로 ‘도를 깨닫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중국 역사 속에서도 많은 이들이 도를 깨달아야 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노자가 한 젊은이를 만났는데, 그 젊은이는 마치 몸속에 예지력이 있어 득도한 고인이 올 것을 안 것처럼 미리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함께 도를 깨우쳐 갔습니다. 깊이 묵상하고 생각한 결과 마침내 그 일을 온전히 깨달았는데, 바로 ‘고신불사(古神不死, 영원한 신은 죽지 않는다)’라는 이치를 깨달은 것입니다.
저는 지금 로마서 8장을 온전히 깨달았습니다. 엉뚱한 생각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도덕경》을 생각했고, 저는 로마서 8장을 생각했을 뿐, 이치는 거의 비슷합니다. 저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넉넉히 이긴다는 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이루어 놓으신 일이며, 그것도 차고 넘치도록 넉넉하게 이루셨는데, 단지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을 뿐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로 있을 때 애굽의 군대를 싸워 이길 수 있었습니까?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어떻게 이겼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기다리기만 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셨고, 애굽의 바로 왕은 태자마저 죽자 깊은 고통 속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내보냈습니다. 내보내기 전에 애굽 사람들은 금은보화까지 쥐여 주며 제발 빨리 떠나라고 했습니다.
자기 집안사람들이 죽어 나갔고, 집집마다 초상이 났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더 붙잡아 두었다가는 둘째도 죽을 것 같고, 더 두었다가는 셋째도 죽고 온 가족이 다 죽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발 머물지 말고 어서 떠나라고 보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을 했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넉넉히 이겼습니까, 안 이겼습니까? 넉넉히 이겼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 드린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박사 학위를 마치지 못할 뻔했는데 기도했더니 졸업하게 된 것, 정말 신기하지 않습니까? 박사 졸업을 못 할 것 같으면 겅(耿) 동문처럼 수완이라도 좋아서 팔로워 200만 명이라도 모으든지 해야지요.
우리가 직장을 얻을 수 있는 것도 넉넉히 이기는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바가 없어서 뼛속에는 여전히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신 것입니다. 그 옛날 홍해 가에 섰을 때 애굽 군대가 다시 뒤쫓아오자 이스라엘 백성은 멘붕에 빠졌습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는 하나님이 넉넉히 이기게 하셨는데, 어째서 홍해 앞에서는 넉넉히 이기지 못합니까? 이후에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셔서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따라갔을 뿐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넉넉히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승리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며, 그런 결과는 필연적으로 패망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홍해 바닥에 머물러 서서 애굽 군대를 기다리다가 그들과 함께 홍해 밑바닥에 수장된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며 저는 깊이 생각했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넉넉히 이기는 승리를 예비해 두신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한 가지만 했습니다. 성령을 따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 그렇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정말 형편없었습니다. 작은 어려움만 만나면 즉시 남 탓을 하고, 불평하며 허튼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우리도 자주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정말 많이 힘들었습니다. 과거에 수많은 사람들을 양육했고, 그들 모두가 엄청난 은혜를 받았는데, 그러고는 떠나갔습니다. 떠날 테면 떠나라고 하지만, 제 마음은 참으로 씁쓸하고 편치 않았으며, 그런 상황들을 볼 때마다 몹시 괴로웠습니다.
한 크리스천 박사과정생이 있었는데, 지도교수가 "너는 이번에 졸업할 수 없으니 논문을 처음부터 다시 써라"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정말 청천벽력과도 같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박사과정을 안 해보셔서 모르겠지만, 4년을 공부했는데 다시 하라는 것은 인생 끝장나는 기분입니다. 그가 저에게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더군요. 제가 어쩌겠습니까? 제가 가서 지도교수를 한 대 때려줄 수 있겠습니까? 싸워 이길 수도 없고, 때리고 나면 제가 감옥에 가야 하니, 저는 뾰족한 수가 없어서 "우리 기도합시다"라고 했습니다.
그 한 주 동안 그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어차피 다른 할 일도 없으니 매일 교회에 와서 기도만 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후, 그는 지도교수로부터 "졸업해도 좋으니 어서 디펜스 준비를 해라"는 메일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넉넉히 이기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겨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훗날 그가 교회를 떠나겠다고 하더군요. 가겠다면 가야지요, 저는 사람을 붙잡지 않습니다. 그 후에 또 한 사람이 왔는데, 악귀가 들려 지하철 선로 앞에 서서 뛰어내릴 뻔한 사람이었습니다. 매일 괴롭고, 머리로 무슨 생각만 하려고 하면 윙윙거리며 귀신에게 붙잡혀 있었습니다. 그가 인터넷에서 저를 찾아왔는데, 저도 그를 모르고 그도 저를 몰랐습니다. 그가 와서 제가 기도를 인도해 주었더니 피 섞인 가래를 한참 토해냈습니다.
결국 다 나았습니다. 3개월 동안 잠을 못 자던 것도 치유되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후, "목사님, 저 교회 떠나겠습니다"라고 하더군요. 사실 많은 이들이 홍해를 건너고 출애굽을 하는 것과 같은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마음이 괴롭지 않겠습니까? 괴롭습니다. 어찌 괴롭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저 역시 승리해야 합니다.
칼입니까? 박해입니까? 사람들이 떠나가는 것입니까? 그 어떤 것도 저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나의 주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위해 넉넉히 이기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승리하셨기 때문이며, 따라서 따라오기만 하면 승리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 교회는 많으니, 여러분이 어느 교회와 함께 승리하기를 원하든지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서 이미 넉넉히 승리해 두셨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눕니다. 로마서 8장을 다시 자세히 읽어보면, 육신을 따르는 자와 성령을 따르는 자입니다. 육신을 따르고 육신의 생각을 하는 것은 사망이니, 승리하지 못합니다. 성령을 따르는 것은 영생입니다. 사람이 육신의 생각을 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요, 곧 사망입니다. 죽음의 길로 달려가기를 원한다면 이 '넉넉한 승리'는 당신과 상관이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만 좇는다면 어디서 승리를 찾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와 상관없는 일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제가 장담하건대, 제가 전하는 말씀에는 실질적인 알맹이가 가득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하고 육신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속에서 어떤 이들은 육에 속하도록 예정하셨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 속하도록 예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 모두 넉넉히 이깁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주님을 의지하여 넉넉히 이기는 사람이 됩시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로마서 8:4-8)
인생의 길을 어떻게 가야 하겠습니까? 이 문제를 명확히 짚고 넘어갑시다. 넉넉히 이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실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행하셨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하던 자라도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도우십니다. 넉넉히 이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이루셨고, 그 이상으로 넘치게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딱 맞게 하신 것이 아니라 훨씬 넘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의지할 이유가 없고, 육에 속할 이유가 없으며, 남 탓을 하거나 핑계 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승리하지 못할 때 남 탓할 이유가 없습니다. 육신을 따르기로 선택하면 그것으로 끝장나는 것이고, 성령을 따르기로 선택해도 그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전자의 끝장과 후자의 성취는 차원이 다릅니다. 육신을 따르면 실패하고도 남아 수많은 실패가 뒤따르지만, 성령을 따르면 넉넉히 이겨서 이기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핑계 대지 마십시오.
육에 속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파멸시킵니다. 자기 앞에 놓인 길이 파멸인 줄 알면서 굳이 그 길로 가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겉보기에는 살집도 좋고 통통하며 얼굴도 혈색이 좋아 육신을 위하는 것이 좋아 보일지 모르지만, 좋지 않은 날이 닥쳐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 중에 한 자매님이 있는데, 아버지가 폐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분 몸에는 분명 수많은 나쁜 습관과 암을 유발하는 성격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백성과 광야에서 죽어가는 크리스천들이 모두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자들이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너무 육에 속해 있었고, 지나치게 육신의 생각에 젖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육신의 생각을 품으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살아서 승리하고자 한다면, 내면의 육에 속한 논리 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려야 합니다. 승리하고 나면 당연히 좋은 날이 올 것이고 어떤 좋은 것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승리하지 못하면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합니다. 영계에서 여러분이 그 배상금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광야에 머무는 크리스천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지 못합니까? 육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은 몇 년 동안 림프암으로 고생하더니, 몇 년은 대장암, 몇 년은 심혈관 질환, 몇 년은 뇌혈관 질환으로 평생을 병과 씨름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혼란스럽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넉넉한 승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의 신학 체계가 잘못되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 신학 체계가 육에 속한 신학 체계라면 그는 결코 나아질 수 없으며, 단지 육신의 생각에 갇힌 사람일 뿐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한 가지만 해결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과 함께 이 승리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암에 걸렸을 때, 암을 유발하는 성격을 버리지 않고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만 받으러 다녀서는 암세포를 없앨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영, 즉 암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틈만 나면 의사에게 달려가며 육신으로만 살려고 할 뿐, 성령을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사망의 영이 사람의 몸에 이것저것 문제를 일으키며 죽지도 못하고 제대로 살지도 못하게 만드니 얼마나 비참합니까? 지금부터라도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고요? 기도하고 나면 분명히 통제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자꾸만 먹고 싶고 또 먹고 싶어요." 여러분이 방언으로 계속 기도하면, 음식을 마구 먹고 싶던 느낌이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십니다. 이겨내는 것, 그것이 바로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자신을 통제하기 힘들 때 영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셔서 내면의 육에 속한 것들을 무너뜨려 주실 것입니다.
우울증이 왜 낫습니까? 우울증의 뿌리를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우울증의 뿌리는 바로 육신의 생각과 선악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과 선악을 분별하는 것은 수많은 문제의 근원입니다. 우울증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병입니다. 아무 일도 없는데 그저 괴롭기만 한 기이한 병입니다. 왜 우울증이 도집니까? 육에 속하여 육신의 생각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사실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 구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해방하셨는데, "왜 저는 느껴지지 않지요?"라고 묻는다면, 성령을 따라 행하십시오. 아주 단순한 일입니다.
왜 먹어서 거대한 비만이 됩니까? 육신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필사적으로 먹고 싶어 하는 충동이 해결됩니다. 왜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합니까?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도 사실 핑계에 불과합니다. 승리는 아주 쉬운 것입니다. 몇 번 벌떡 일어나면 되지 않습니까? 일어나서 몸이 힘들다면 성령을 의지하여 견디십시오.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는 것조차 못 한다면 무력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몸에 병이 났을 때 성령을 따르면 승리하는 것이 아주 쉽지 않습니까? 병이 나면 첫 번째 반응으로 병원부터 찾는데, 병원의 의사도 자기가 아프면 누구를 찾아가야 할지 모릅니다. 그런 의사를 찾아간들 그가 해결해 줄 수 있겠습니까? 연약함을 이기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이미 넉넉히 이깁니다. 사람이 둔하고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각만 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의지하여 이겨 보십시오.
우리 중에는 학교에 다니면서 기도하고 섬기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섬기면서도 공부까지 훌륭하게 해내는 청소년들도 있습니다. 우리 안의 논리를 바꾸는 것은 사실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집을 부리면 어려워집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만 고집하니 고치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리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며, 승리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고달픈 일입니다! 끝내 자신을 의지하려는 사람은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본문 말씀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7-39)
기도
주 예수님,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실패의 논리를 무너뜨리시고, 세상의 논리를 허무시며, 육에 속한 논리를 파해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옵소서. 우리가 주님을 의지할 때마다 언제나 넉넉히 이기게 하옵소서.
하나님, 주님의 약속은 결코 폐하여지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 눈에 수많은 실패가 보일지라도 주님의 약속은 하늘에 굳게 서서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만을 의지하겠습니다! 성도들이 다 함께 고백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기느니라!" 하나님, 주님의 뜻대로 행하시어 우리 안의 헛된 것들을 무너뜨리시고, 우리가 다시금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따를 것이며,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능력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굳게 믿습니다!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 주옵소서! 하나님, 주님의 약속은 하늘에 굳게 서서 결코 폐하여지지 아니하며 반드시 우리 삶에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말씀의 배경
저는 사도 바울이 왜 로마 성도들에게 이 글을 썼는지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로마 교회는 예루살렘 출신의 크리스천들, 즉 예루살렘에서 성령이 강림하고 베드로가 교회를 세운 후 핍박을 받아 흩어지기 시작했던 무리들이 세운 교회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가 거의 부패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나온 소수의 무리를 인도하셔서 로마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그들은 각자의 생업을 시작하고 사업을 하거나 직장을 구했습니다. 워낙 똑똑한 사람들이라 그곳에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 교회의 배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사실 그들에게는 승리의 개념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로마 교회 성도들의 내면에는 승리의 관점이 부족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처한 형편은 오늘날 우리가 자주 처하는 형편과 같아서, 둘러보면 온통 실패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깊은 혼란 속에 사도 바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교회가 어찌하여 이 모양입니까? 우리는 이런 모습이 아니어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은 보이지 않고 온통 타락과 패역뿐입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교회 안에서 누가 우두머리가 되고 누가 2인자가 될 것인지를 두고 치열하게 파벌 싸움을 벌이며 아수라장이 된 비참한 상황을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제가 그런 것들을 다 정리했지만, 다른 교회들에는 여전히 수많은 정치적 싸움이 존재합니다. 사람이 모인 곳에는 늘 정치 싸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깊은 혼란에 빠져 사도 바울에게 편지를 썼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그곳 크리스천들의 혼란에 답을 준 것입니다. 그들의 혼란은 바로 "어찌하여 우리는 이기지 못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여전히 능력이 있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화인명정신학(华人命定神学)이 성경의 기록대로 실제로 살아내어 검증된 신학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대로 실천해 보니 정말 역사하기 때문에 우리가 전하는 것입니다. 능력이 나타나지도 않는데 헛소리를 늘어놓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수많은 요소들을 제거했습니다.
정말 '넉넉히 이긴다'는 것이 사실일까요? 바울은 승리에 대해 아주 명쾌하게 설명했습니다. 편지로 그들을 바로잡고, 디모데와 디도를 보내며 온갖 애를 썼습니다. 바울 서신에 등장하는 고린도 교회 역시 육에 속한 교회였습니다. 육에 속한 곳에는 필연적으로 수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육에 속한 사람들이 세운 교회는 결코 온전할 수 없습니다.
육에 속한 목사가 육에 속한 성도들을 이끌고 육에 속한 교회를 세운다면, 그 끝은 결코 좋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화인명정신학은 육신의 악한 습관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육신을 처리받지 않으면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시 로마 교회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 매우 흡사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승리의 비결을 써 주었습니다. 로마서 8장에 관한 많은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기존의 주석들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승리해보지 못한 사람은 이 승리의 개념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을 정리해 주었습니다. 왼쪽에 선을 긋고 오른쪽에 선을 그었을 때, 그 중간에 있는 것을 가리켜 '넉넉히 이김'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이 선 안에 있지 않다면 이 말씀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육에 속한 자는 이 선 바깥에 있으며,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므로 이 승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누는 것은 매우 핵심적이고 분명한 진리이며, 로마서 8장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이미 우리를 해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1-4)
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능력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곧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방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죄의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우리가 죽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그분의 죽음은 효력이 있습니다. 그분은 죄 없는 몸으로 죄인을 대신하셨고, 우리의 모든 죄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 우리는 모두 저주 아래 살았고, 온갖 억압과 얽매임이 우리를 짓눌렀습니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고, 벗어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완전한 올가미에 갇혀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여러분이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해방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이미 우리를 해방하신 것입니다.
귀신이 우리 몸에 머무는 것은 불법입니다. 지난 강의에서 나눈 것처럼 귀신도 우리에게 굴복하므로, 여러분이 꾸짖어 쫓아내면 쉽게 물러갑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 안에 육에 속한 본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복음이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이는 복음인 이유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남 탓을 할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내가 억압을 당해서 어쩔 수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몰라서 그렇게 했다"고 핑계 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해방하셨으므로 여러분은 이제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연 어느 쪽 논리를 따를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머릿속으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망치는 것은 귀신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귀신이 세상적인 논리 체계를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 놓으면 여러분은 끝장나는 것입니다. 둘러보십시오. 육에 속한 크리스천들의 말로가 어떠한지 말입니다. 육에 속한 크리스천은 결코 잘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해방하셨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육에 속하기를 선택하고, 자기 자신으로 살기를 고집합니다.
따라서 화인명정신학은 신학적 진리를 명확히 설명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을 따름으로써 넉넉히 이기는 길을 아주 분명하게 전합니다. 사실 사람은 육에 속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위독하여 돌아가시려 할 때 속으로 '아버지, 절대로 돌아가시면 안 돼요!'라고 집착한다면 끝장난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렇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일이 결국 사람 자신의 선택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습관만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내면에 두지 않아서, 그 속이 갈가리 찢어지고 체계가 없는 상태인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들은 "가족이 세상을 떠나는데 마음 아프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세상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말씀하는데, 어찌 그것을 알지 못합니까?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하여 이제 우리는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을 두고 몰랐다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육신을 따를 수도 있고, 성령을 따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육신을 따를 수도 있고, 성령을 따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뜻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제 선택권이 있습니다. 지금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과거에 이런 질병, 저런 문제로 고통당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곤경에서 건져내 주신 것은 여러분의 육신을 살찌우고 교만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은혜가 여러분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님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은혜는 여러분을 회개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육에 속한 사람이었기에 그런 곤경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왜 다시 육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려 합니까? 다시 그 곤경 속으로 들어가고 싶습니까?
때로는 그 곤경이 단순한 곤경으로 끝나지 않고 광야에서 죽는 비극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왜 육신을 따르는 쪽을 선택합니까? 어리석은 짓 아닙니까? 사람은 원래 어리석어서 늘 어리석은 길을 고집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자기가 어리석게 구는 것은 괜찮지만 남이 자기를 어리석다고 지적하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어리석은 짓을 하고, 손해를 보고, 고생을 할지언정, 당신이 나더러 어리석다고 말하는 건 못 참아!"라는 식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왜 육신을 따르려 합니까? 악령이 강제로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법이 이미 여러분을 해방하셨고, 여러분을 위해 속죄 제물이 되셨으므로 이제 여러분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때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어떤 사람은 육신을 선택했다가 고난을 겪고 다시 돌아오고, 돌아와서는 또다시 육신을 따르는 쪽을 선택합니다. 결국 광야에서 죽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자가 되고 맙니다. 끝내 교훈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병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의 작은 징계를 결코 가볍게 넘기지 마십시오. 큰 징계가 닥치면 모른 척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이것저것 바쁘게 살다가 암에 걸리고 나서야 바쁜 것을 멈춥니다. 결국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의 선택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로마서 8:5-6)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입니다. 또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선택하는지 보십시오.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다"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통제하지 못한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명심하십시오. 육신을 따르는 것은 곧 사망이며,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좋은 날을 누리지 못하고 기어이 죽음의 길을 가려 하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처음 주님을 믿을 때는 사실 100% 육신 덩어리였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내가 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기에—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회개로 인도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100%의 육신이 99%로 줄어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조금씩 처리하여 98%, 95%, 92%, 90%, 80%로 하나씩 깎아 나가는 것입니다. 내 안에 여전히 90%의 육신이 남아 있을 때 하나님은 계속해서 여러분을 다루실 것이며, 여러분은 연단을 겪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지금 치유를 받은 것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하지만 다시 육신으로 돌아가는 것은 귀신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자신의 악한 습관을 제대로 처리할 줄 모르고, 여전히 '내 방식대로 사는 것이 멋지다'고 여기며 고생을 자초합니다.
이제 저는 손을 놓았습니다. 여러분이 사서 고생하겠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다루심일 것이요, 덜 고생하겠다면 지혜롭게 처신하여 고생을 덜 하면 됩니다. 말씀에 아주 명확히 나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어찌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 몸의 행실을 죽이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육신을 따르겠습니까? 육에 속한 악한 습관을 쳐서 복종시키겠습니까?
몸에 질병이 많은 만큼 머릿속에도 쓰레기가 가득합니다.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질병을 통해 사람 속의 숨은 생각을 드러내시고, 고난과 불행을 통해 사람 속의 쓰레기와 찌꺼기를 들추어내십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8:9-14)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성도 여러분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의 영을 따르지 않지만, 어떤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을 따릅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성령에 속하게 되며,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몸의 악한 행실을 죽이십니다.
보십시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행하시는 일은 오직 한 가지, 우리 몸의 악한 행실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사실 귀신 때문만이 아닙니다. 사람이 육신에 속한 만큼 귀신이 달라붙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귀신을 불러들이고 나면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몸에 귀신이 있는데 어찌 편안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질병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왜 병이 생깁니까? 아주 단순합니다. 육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이 우리 마음에 거하시는데,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넉넉한 승리가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 위대하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그 영이 우리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살아남은 육적인 삶이 아니라 영적인 삶이며, 사람을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가 곧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갔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종종 묻습니다. "목사님, 광야에서 죽은 자들은 천국에 갔습니까, 지옥에 갔습니까?" 제가 말씀드리건대, 그들은 지옥에 갔습니다.
제가 직접 가보지는 않았지만 상식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몹시 싫어하신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크리스천이 되어 광야에서 죽는다면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출애굽을 하고, 홍해를 건너고, 만나를 먹으며 수많은 기적을 경험하고 마음에 새겼으면서도 약속의 땅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는 것이 두려워서 여전히 육에 속한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로마서 8:15-17)
육신은 이토록 부패한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 명의 정탐꾼은 그곳에 가면 다 죽는다고 보고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분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거민들이 애굽의 군대보다 강할 수 있겠습니까? 애굽 바로의 군대가 가나안 족속들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애굽의 군대도 하나님께서 다 이기게 하셨는데, 가나안 족속 따위가 무슨 대수입니까?
하지만 사람은 어리석어서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가서 싸우다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개미를 짓이기듯 그 자리에서 열 명의 정탐꾼을 심판하셨습니다. 그 열 명의 정탐꾼은 모두 열두 지파의 족장들이었습니다. 육신을 따라 살아서 얻는 유익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 이미 넉넉히 이긴 자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이요, 영광스러운 권세요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데 어찌 승리하지 못하겠습니까? 이 모든 은혜가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홀가분하게, 존귀하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을 선택하여 평생 넉넉히 이기며 살아가십시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6-28)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십시오. 진정으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할 때 성령께서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기면 성령께서 도우실 수 없습니다. 육신이 잔뜩 부풀어 올라 대단한 사람인 양, 마치 교회를 위해 엄청난 공로를 세운 것처럼 굴면 큰일 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랑하려거든 나의 연약함을 자랑하리라"고 했습니다. 내가 대단해서 넉넉히 이기는 것이 아니라, 연약할 때 도우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의 연약함을 자랑한다는 이 논리를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육신이 부풀어 오른 교만한 태도로 하나님을 섬기며 자신이 위대하다고 착각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정말 위대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서 행하십니다. 우리가 처음 주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이 앞서 행하시며 승리를 주시고 구원해 주셨는데, 이제 와서 어찌 자신을 의지하려 합니까? 여러분도 연약하고, 저도 연약하며, 우리 모두가 다 연약합니다. 그것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연약함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 성령께서 연약함을 도우시도록 예비해 두셨습니다.
여러분이 연약해질 때마다 성령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단, 여러분이 성령을 따라야 합니다. 성령은 여러분 안에서 반드시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에 속하면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을 인도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약함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않더냐?" 하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의 고백은 참으로 탁월합니다. 바울이 대단하고 강인하며 영적 무공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늘 연약했으나 매 순간 성령께서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선포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로마서 8:26-27)
힘이 부족하다면 반드시 방언으로 기도를 많이 하십시오. 자신을 이기지 못할 때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연약함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출애굽을 할 때도, 광야 길을 걸을 때도,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도 우리가 연약하지 않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길을 걷는 내내 연약했기에 늘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기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연약할 때도 하나님은 이기게 하셨습니다. 과거에 연약했을 때도 이기게 하셨는데, 지금 어찌 그것을 잊어버립니까?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힘이시요, 우리의 도움이시며, 우리의 강함이십니다.
사람의 소망이 사람의 선택을 결정합니다
사람의 소망이 사람의 선택을 결정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매번 바른 선택을 하지 못합니까? 그의 소망이 여전히 이 땅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로마서 8:18-25)
지금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지금 이 순간 저와 함께 점검해 봅시다.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나이가 서른, 마흔, 쉰, 예순, 일흔이 되었는데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소망이 있기는 합니까? 어떤 이는 편안한 노후를 소망합니다. 노후가 지나가고 나면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소망이 선택을 결정하며, 소망이 없는 인생은 비극입니다. 예전에 가난하던 시절에는 "열심히 일해서 빚을 갚자, 5년만 지나면 다 갚는다"는 소망이 있어서 힘차게 일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먹고 마실 것이 풍족해지니 소망이 사라졌습니다. 소망이 없으니 사소한 고난도 크게 느껴지고, 작은 어려움에도 몹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망이 여전히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라면 분명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소망이 땅의 일에만 머물러 있다면 틀림없이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군대에서 정예 군사가 되었다면, 우리의 소망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하나님의 약속을 취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정예 군사의 모습이 있습니까? 근본적인 문제는 소망에 있습니다. 세상의 보잘것없는 일들에 소망을 두고, 큰 집에 살기를 바라다가 막상 들어가면 별것 아님을 알고, 좋은 차를 타기 바라다가 차를 사고 나면 또 별것 아님을 깨닫습니다. 보이는 소망은 참된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세상 소망을 다 이루고 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지고, 그 후의 삶은 매우 고달파집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명분을 소망하고, 우리 몸의 속량을 소망해야 합니다. 장차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 말이 다소 막연하게 들립니까? 하지만 세상의 소망에는 참된 소망이 없습니다. 유골함이 더 화려하기를 바라시겠습니까? 장례식이 더 성대하기를 바라시겠습니까? 참으로 덧없는 일입니다.
어떤 부자는 돈은 많은데 아이가 없자 서둘러 난자를 냉동하고 정자를 사서 아이를 낳아 재산을 물려주려 합니다.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지만, 본인은 그것을 소망이라 여깁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는 순간 인생은 끝장나는 것입니다.
최근 어떤 탐관오리가 붙잡혔는데, 집에 쌓아둔 인민폐 현금을 트럭으로 실어 날랐다고 합니다. 그 많은 돈으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뒤를 닦기에는 너무 뻣뻣하고 입을 닦자니 베일 것 같습니다. 도대체 무엇에 쓰려는 것일까요? 차라리 방에 두루마리 휴지를 가득 채워 두었다면 쓰기라도 할 텐데, 방 안 가득 돈다발을 쌓아두고 무엇을 하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짓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족함이 없다면, 나중에 무엇이 부족할까 염려할 필요가 없으니 얼마나 평안합니까? 이 땅에 소망을 둘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죽고 나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광스러운 소망, 곧 아들의 명분을 얻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바라봅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그 영광을 바라볼 때, 현재의 고난은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무엇을 소망하는지 스스로에게 도전해 보십시오. 이 세상의 것들을 소망한다면 결국 유골함 하나 남을 뿐입니다. 자녀나 손주들에게 소망을 둔다면, 몇 년 지나지 않아 여러분을 까맣게 잊어버릴 것입니다. 아무 소용없습니다. 사람의 소망이 그의 선택을 결정합니다. 인생이 헛되고 헛됨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갈 것입니다.
마음을 정돈하고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명확히 깨달아야 합니다. 깨닫고 나면 사람은 하늘의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속에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영광의 면류관 말입니다. 그 면류관이 진짜냐고 묻는다면, 일단 그 진위 여부를 떠나서라도 그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몸의 악한 행실을 죽이고, 수많은 흠과 허물에서 벗어나 고통을 훨씬 덜 겪게 되는 것입니다.
승리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29-30)
여러분이 승리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들으셨습니까? 승리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하나님은 반드시 택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떻게 해도 육신만 따를 자라면 내버려 두십니다. 그러나 택함받은 자는 영원한 영광을 선택할 줄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결코 육에 속한 자들을 끌어들여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세울 때는 하늘의 소망을 품은 자들, 동일한 사명(命定)과 동일한 비전, 동일한 부르심을 품고 앞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로 세워야 합니다. 어떤 이는 "내가 내 미래를 어떻게 압니까?"라고 묻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의 미래를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으니 우리는 마땅히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헛된 소망을 무너뜨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넉넉히 이깁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승리를 예정하신 것은 그저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하나님의 예정하심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1-39)
이제 이 말씀을 들으니 충분히 이해가 되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늘의 소망을 품고 있다면 종일 죽임을 당하는 것 같은 상황일지라도 능히 이겨내지 않겠습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다 넉넉히 이겨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무엇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어떤 것도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돌보시므로 모든 상황을 넉넉히 통과할 수 있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깊음이나 높음이나 상관없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힘찬 선포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에 넉넉히 이깁니다.
여러분이 지금 마주한 사소한 문제들쯤은 이미 넉넉히 이겼습니다. 일평생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하찮게 여기십시오. 삶의 모든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생각할 때 족히 비교할 수 없으며, 전혀 개의치 않게 됩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 안에 있는 영원한 소망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승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승리하셨습니다. 아멘.
오늘 설교는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