命定神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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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나눌 말씀의 제목은 “교만의 영(오만한 영)”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교만의 영”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제가 이 세상을 관찰해 보니 한 가지 슬픈 현상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만한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크게 교만한 사람도 있고, 작게 교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교만할 만한 밑천이 있는 사람은 크게 교만하고, 교만할 밑천조차 없는 사람은 작게 교만하면서도 교만할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교만이라는 것을 통해 자신이 살아가는 존재감을 확인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자신이 자랑할 수 있는 것들을 의지하기 때문이며, 그러다 보니 오만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교만할까요? 능력이 좀 있는 사람도 교만하고, 능력이 없는 사람도 교만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일본식 이름을 붙여 주어야 마땅합니다. 성은 ‘오만’이요, 이름은 ‘자대’(오만자대)라고 말입니다.

카다피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카다피는 1969년에 집권하여 리비아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불과 몇 개의 전차 대대를 이끌고 전임 국왕을 몰아낸 뒤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카다피는 대단한 권세를 부리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도 아주 거들먹거리는 태도를 보여서 사람들이 보기에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교만했는가 하면, 40년 넘게 리비아의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결국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을 모두 적으로 돌렸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나중에 리비아에 반란이 일어나고 반군이 수도를 점령하자, 그는 지하 하수도관으로 숨어 들어갔습니다. 결국 그는 사람들에게 맞아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큰 교만’입니다.

어떤 사람은 대통령도 아니면서 대통령보다 더 교만합니다. 돈이 좀 있고 자기 뜻대로 된다고 해서 자기가 대단한 줄 압니다. 어떤 사람은 걸어 다니는 모습에서부터 교만한 티가 팍팍 납니다. 보신 적 있으십니까? 온몸으로 거만함을 드러내며, 자기가 대단한 부자라도 되는 양 어깨를 으쓱거리며 팔자걸음을 걷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되어서도 여전히 자기가 잘난 줄 압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비극입니다. 시골 마을의 토호나 골목대장들이 마치 황제 행세를 하며 더 교만하게 굽니다! 우리 시절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차를 몰고 가다가 경찰에게 단속되었습니다. 교통경찰이 “운전면허증을 제시하십시오”라고 하자, 그 사람은 “내 아버지가 이강(李刚)인데, 날 몰라?”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 일로 인해 큰 곤경에 빠지고 인생이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생일 파티 한 번에 20만 위안을 쓰며 매우 거만하게 굴었습니다. 입만 열면 그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 검사를 받아 보니 폐암 말기였고, 4개월을 버티더니 또 4개월 뒤에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을 때 아주 비참했습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사람이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을지조차 자기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믿고 교만합니까? 돈 몇 푼 있다고 교만합니까? 손에 권력 조금 쥐었다고 교만합니까? 사람은 이 세상에서 분수를 알고 하늘 높은 줄 알아야 합니다. 분수를 모르면 하나님께서 다루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루시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입니다! 사실 사람은 교만할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언제 태어날지, 언제 죽을지, 언제 밥을 먹을 수 있을지, 언제 대변을 볼 수 있을지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조차 마음대로 못 하면서, 대체 무엇을 믿고 교만합니까?

제가 어렸을 때 시골 마을에서는 아들을 몇 명 낳은 집이 아들을 낳지 못하는 집을 비웃곤 했습니다. 딸만 낳은 집을 향해 대가 끊겼다느니, 아들이 없어서 부끄럽다느니 하며 조롱했습니다. 시골이니까 그렇지 도시에서는 아무도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딸을 낳은 여자는 또 아이를 아예 낳지 못하는 여자를 비웃으며 “저것 봐라, 알도 못 낳는 암탉이다”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나는 알을 낳는 암탉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알을 낳는 닭이든 못 낳는 닭이든 다 똑같이 닭이 되어 버린 것 아닙니까! 아이를 낳으면 알 낳는 오리고, 못 낳으면 알 못 낳는 오립니까? 이런 쓸데없는 소리나 늘어놓는 것을 보면, 시골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참 곰곰이 생각해 볼 만합니다.

며칠 전 우리 공동체에 강직성 척추염을 앓던 분이 치유를 받았습니다. 이전에는 목발을 짚고 다닐 정도로 고통스러웠는데, 그가 고향 시골로 내려가서 치유받은 간증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아주 기가 막혔습니다. “아이구, 너 어쩌다 그런 미신에 빠졌냐?”라며 비웃었습니다.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흉볼 거리가 없는데도 어떻게든 비웃고 조롱합니다. 사람의 무지함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절대로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이 아는 것이 많습니까, 모르는 것이 많습니까? 당연히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지 않습니까. 모르는 것이 그렇게나 많은데 대체 무엇을 믿고 교만합니까?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착각합니다. 하늘을 나는 것, 땅 위를 달리는 것, 바다를 헤엄치는 것까지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감이 하늘을 찔러 자기가 아주 대단한 줄 알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떤 분이 말하길, “제 사촌 형이 예전에 200만 위안이 넘는 외제차를 몰고 다녔는데, 그 오만함 때문에 지금은 빚만 천만 위안이 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어제 아주 유명한 수학 선생님 한 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수능 수석들을 배출한 명강사였는데, 결국 폐암 말기에 걸려 혈중 산소포화도가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의사는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목에 구멍을 뚫어 관을 삽입하는 기관 삽관을 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폐암 환자를 섬긴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의사는 산소포화도가 너무 떨어져서 이제 가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팀이 모여서 간절히 목숨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산소포화도가 다시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그가 살아난 것입니다. 그런데 깨어난 그 사람의 첫마디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아이구, 요즘 의학 기술이 정말 대단하네!” 무슨 놈의 의학 기술입니까? 의학 기술이 옆에 있었는데도 산소포화도는 곤두박질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도대체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길래 그러는지, 정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렇게 교만하게 구니 더 이상 섬길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한 달 뒤에 그 사람이 저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병원에서 쓸 수 있는 모든 진통제를 다 써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아 고통스러워 비명을 질렀기 때문입니다. 그가 저에게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제야 기도가 생각난 것입니다. 그런데 참 놀랍게도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제가 기도하면 통증이 싹 가라앉고, 다시 아프다가도 기도하면 또 통증이 가라앉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폐암 말기 상태에서도 여전히 입에서 오만한 말을 내뱉었습니다. 교만이 습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바로 악한 영의 역사가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이 지금 어떻게 되었냐고 묻고 싶으십니까? 십여 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아주 오래전에 섬겼던 사람입니다.

영적 세계는 너무나 실제적입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땅을 밟지도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갑자기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습니다. 곁에서 간병하던 아들이 기겁을 했습니다. 그의 입에서 끊임없이 죽은 사람들의 이름만 튀어나왔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아들이 저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왔고, 제가 사망의 영을 꾸짖어 떠나가라고 명령하자 그는 다시 침대에 누웠습니다. 그것을 직접 본 사람들이라면 이것이 영적인 일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당연히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람이 교만한 것은 바로 ‘교만의 영’에게 속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교만의 영”입니다.

그렇다면 영(灵)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여러분, 영이라고 해서 한밤중에 길을 가다가 머리 없는 귀신이 하얀 소복을 입고 나타나는 그런 존재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은 무섭지 않습니다. 저 같으면 다가가서 하얀 옷을 확 벗겨 버릴 것입니다. 뻔한 속임수니까요. 정말 두려운 것은 바로 ‘거짓말’이며, ‘영’입니다. 사람들은 영에 대해 잘 모릅니다. 영이란 대개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한’ 그런 모호한 상태 속에 머물게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이해가 되십니까? 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귀신이 하는 말도 영이지만, 그것은 파멸과 부패입니다.

그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다가왔을 때 말을 건넸지만, 사실은 영을 전달한 것입니다. “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도 돼, 먹고 싶으면 그냥 먹어.” 말이 곧 영입니다. 그러므로 귀신이 하는 말은 영이요, 패망이며, 사망입니다. 영이 사람 속에 들어가는 통로는 결국 생각과 마음입니다. 영이 곧 말이고, 말이 곧 영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도 영적인 일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도 영(말씀)이요, 사람을 죽이는 것도 영(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평생 자신이 내뱉는 말 속에서 살아가고, 자신의 논리 체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사람이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상태와 형편이 대략 어떤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일련의 논리, 즉 말 속에서 살아가며, 일련의 생각 속에서 살다가 결국 자신의 신념을 살아내게 됩니다. 당신이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당신이 살아내는 결과가 결정됩니다. 이제 개념이 좀 명확해지셨습니까? 영이 곧 말이고, 말이 곧 영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하는 말 역시 영입니다. 말을 하면 영이 들어가고, 들으면 들어가며, 받아들이면 들어갑니다. 그래서 어떤 말을 듣고 “이거 참 논리적이네, 그럴듯하네” 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영이 쑥 들어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원리입니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서 누가 소리를 지르면, 제가 건물 안에서 창문을 닫고 몇 층 위에 있어도 그 소리가 다 들립니다. 영의 역사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평생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을 조심해야 할까요? 사람이 하는 말도 영이며, 사람을 패망하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자면 끝이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직장에서 월급이 오르지 않아 저녁에 친한 친구를 만나 밥을 먹으며 하소연했다고 칩시다. “아, 우리 사장이 이번에 월급을 안 올려줬어.” 그러자 상대방이 뭐라고 합니까? “뭐라고? 진짜 너무 불공평하다!” 그러면 원래 50점 정도였던 당신의 화가 순식간에 100점으로 치솟지 않습니까? 상대방이 맞장구를 칩니다. “사장님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널 어떻게 그렇게 대우할 수 있냐고? 너무 불공평해!” 끝났습니다! 당신은 부패해진 것입니다. 원래 50만큼 났던 화가 100이 되었고, 여기서 더 나아가면 압력이 너무 차서 타이어가 터져 버립니다. 이처럼 사람의 말은 참으로 악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뜻을 헤아려 위로해 준다는 것이 오히려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곧 사탄이며, 이것이 바로 그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평생 싸워야 할 대상은 무엇입니까? 사실 귀신이라기보다는 우리 내면에 가득 찬 수많은 말들과 수많은 인간적인 논리 체계입니다. 우리 안에서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체되지 않으면 병이 들고 괴로워집니다. 입만 열면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말만 내뱉으니, 귀신을 불러들이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회개는 평생에 걸친 훈련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마음 씀씀이가 땅콩알만 하고 속이 좁쌀만 한 데다 머리는 호두알 같습니다. 그런 상태로 어떻게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얼마나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그 좁은 공간에 담겨 있는 것조차 전부 사람의 것뿐이니 어떻게 일이 되겠습니까? 사람이 속는 이유는 어떤 말들을 믿기 때문입니다. 말이 곧 영이므로, 거짓의 영은 거짓된 말들을 풀어놓습니다. 사람이 왜 사기를 당합니까? 거짓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왜 거짓말을 믿습니까? 자기가 옳다고 스스로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수많은 거짓말은 조금만 따져보고 검토해 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자기는 절대로 안 속는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대단한 기회라고 착각합니다. “이건 대박 기회야!” 하다가 10만 위안을 사기당하고, “이건 진짜 기회야!” 하다가 60만 위안을 날리고, “이번엔 진짜야!” 하다가 천만 위안을 털립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바쁘게 삽니까? 온종일 돈 날리느라 바쁩니다. 사람이 참으로 어리석고 무지합니다! 다들 기회인 줄로만 압니다. 어떤 사람은 사기를 당하고 나서도 기가 막힌 행동을 합니다. 제가 그 문제를 지적하면, 오히려 “그게 아니라 이래저래 해서 그렇다”며 변명하고 설명하려 듭니다. 사기당한 게 무슨 자랑입니까?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절대로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교만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자는 어리석은 자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은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의 문제를 다루려고 하면 즉시 날을 세우고 덤벼듭니다. 저와 한바탕 붙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도 입담을 갈고닦았습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저를 말로 당해내지 못합니다. 악한 영이 공격해 오는데 제가 맞받아쳐서 꺾어 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옳다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면 참으로 답답합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남을 해칠 뿐만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망치는 길입니다. 사람의 어리석음은 오만함과 자만심에서 비롯되며, 이 모든 배후에 ‘교만의 영’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 스스로 안다고 자만하지 말고, 그것이 진짜 어떻게 된 일인지 명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감정부터 앞세우지 마십시오. 감정이 올라오면 얼굴부터 굳어집니다. 함부로 횡설수설하지 마십시오. 아무 말이나 지어내어 헛소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 곁에 있는 사람이 입을 열어 엉뚱한 소리를 하면 저는 즉시 “또 헛소리하네”라고 합니다. 매사를 불분명하게 처리하고, 말도 앞뒤가 안 맞게 두루뭉술하게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 더하기 1은 얼마입니까?” 물으면 “얼마 안 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들어보십시오. 이게 명확한 대답입니까? “2 더하기 2는 얼마입니까?” 물으면 “그리 많지 않습니다”라고 합니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물으면 “그냥 뭐 괜찮은 것 같아요”라고 합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들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일 시간 있습니까?” 물으면 “상황 좀 보고요”라고 합니다. 제가 “뭘 본다는 건데요?” 하고 물으면 “저도 뭘 봐야 할지 모르겠네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뭘 봐요?” 물으면 “그냥 상황 좀 보고요”라고 합니다.

말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안 한 것 같기도 해서, 무언가를 설명하는 게 그렇게 힘이 듭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니 아무 말이나 지어내고, 헛소리를 계속하다 보니 나중에는 자기 말에 자기가 헷갈려 버립니다. 사람이 공부를 못하는 이유도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살기 때문입니다. 글을 쓸 때는 배운 대로 정확하게 써야 합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남에게서 배운 것이지 내가 스스로 발명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작문을 할 때는 읽고 배운 다른 사람의 지식을 활용하여 써야 합니다. 수학을 배울 때도 내 생각대로 푸는 것이 아니라 수학의 언어와 법칙을 따라 풀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지어내서 말하면 어떻게 수학이 되겠습니까?

며칠 전 인터넷에서 재미있는 유머를 하나 보았습니다. 이백의 유명한 시가 있지 않습니까? “침대 머리맡 밝은 달빛, 땅에 내린 서리인가 하였네. 머리 들어 밝은 달을 바라보고, 고개 숙여 고향을 생각하네(床前明月光, 疑是地上霜, 举头望明月, 低头思故乡).” 그런데 한 아이가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 시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침대 앞 밝은 달빛(床前明月光)’은 이백이 ‘명월’이라는 여자를 만나 침대 앞에서 옷을 다 벗었다는 뜻이고, ‘땅에 내린 서리인가 하였네(疑是地上霜)’는 그 여자의 피부가 서리처럼 하얗다는 뜻이며, ‘머리 들어 밝은 달을 바라보고(举头望明月)’는 고개를 들어 명월이를 바라본 것이고, ‘고개 숙여 고향을 생각하네(低头思故乡)’는 고개를 숙이자 고향에 있는 아내가 생각났다는 뜻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논리입니까?

결국 선생님은 그 아이에게 0점을 주었습니다. 가치관을 완전히 파괴하는 엉터리 해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답을 쓰는데 0점을 안 주겠습니까? 당연히 0점입니다. 제멋대로 지어낸 생각이 이백을 술집 여자나 찾아다니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함부로 지어내지 마십시오. 내 머리로 짐작한 것들은 검증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철저하게 검증하고 확인해야 일이 제대로 풀립니다. 모든 것은 자세히 살펴보고 검토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으면서 있는 줄로 착각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생각에 속고, 교만함에 속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왜 교만일까요?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이 교만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본문 말씀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널리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사무엘상 2:1-3)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입술을 막아주셔서 교만한 말을 내뱉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지식과 지혜를 주셔서 오만한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게 도와주옵소서.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게 하시고, 우리는 피조물인 사람에 불과하며 주님만이 하나님이심을 늘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로 한나와 같이 고백하게 하옵소서.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널리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하나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일으키사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로 삼아 주옵소서. 겉옷을 찢지 않고 마음을 찢게 하시며, 우리 안의 모든 거짓과 오만과 교만을 끊임없이 제거하여 오직 주님만을 경외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의 배경

이 본문의 배경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어느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며, 당시에는 일부다처제였습니다. 엘가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한나와 브닌나라는 두 아내를 두었습니다. 남편 엘가나는 한나를 너무나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한 가지 묘한 법칙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사랑을 많이 받는 쪽은 아이를 낳기 어렵고, 사랑을 덜 받는 쪽은 아이를 쑥쑥 잘 낳는다는 것입니다. 브닌나는 남편의 사랑을 덜 받았지만 아이를 순풍순풍 잘 낳았고, 한나는 남편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지만 아무리 해도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마을에서 날마다 슬픔과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두 여자가 한 남편을 두고 함께 살아가는 관계가 얼마나 미묘한지 아실 것입니다. “모르겠는데요”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도 겪어보지 않아서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그 미묘한 관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브닌나는 한나를 쳐다볼 때마다 눈을 깜빡거리며 눈치를 주었습니다. 그 눈짓 하나에 얼마나 많은 조롱과 비아냥이 담겨 있었겠습니까! 한나는 그로 인해 속이 뒤집어졌습니다. 어느 날 알을 낳지 못하는 암탉 한 마리를 보고 브닌나가 말합니다. “저 닭 좀 봐, 쓸모없는 닭이네. 알 하나도 못 낳으면서 무슨 닭이라고!” 한나는 가슴이 무너져 내립니다. 또 어느 날 오리가 지나가자 브닌나가 말합니다. “저건 무슨 오리람? 알도 못 낳는 오리네.” 한나는 또다시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무슨 말을 들어도 화가 나고 속이 상하니, 이대로 가다가는 암에 걸릴 지경이었습니다.

남편은 매년 두 아내를 데리고 성막에 올라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했습니다. 제물을 먹을 때나 분깃을 나눌 때 한나에게는 두 몫을 주었지만, 그것으로도 마음의 상처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상상해 보십시오. 둥근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데, 남편이 구운 닭 한 마리를 차려 놓았습니다. 그러자 브닌나가 또 입을 엽니다. “알을 못 낳으니 결국 통닭 신세가 되었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그 구운 닭이 한나의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습니까? 넘어가지 않습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 밥맛이 뚝 떨어집니다. 한참 뒤에 브닌나가 또 말합니다. “이 생선은 어째 뱃속에 알 하나 없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엘가나가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라고 하자, 브닌나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 난 그냥 이 닭이 알을 못 낳는다고 한 것뿐이에요. 내가 잡은 닭인데 진짜 알을 못 낳는 걸 어떡해요”라며 딴청을 피웁니다. 남편도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브닌나는 이처럼 한나를 조롱하고 격분시켜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어느 날 한나가 성막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데, 마음의 억울함과 슬픔이 너무 깊어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것은 정말 피를 말리는 고통입니다. 소리 내어 기도조차 할 수 없어 입술만 달싹거리는데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엘리 제사장이 그 모습을 보고 한나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한나가 대답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입니다.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아 이러는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 제사장이 말했습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한나는 집으로 돌아갔고, 곧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한나가 무슨 기도를 드렸습니까? 아이를 주시면 그 아이를 평생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귀한 아들 사무엘을 낳았는데, 정말로 하나님께 바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제가 그때 말을 잘못했습니다”라며 물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나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젖을 떼자 세 살 무렵에 성막으로 데리고 올라가 늙은 엘리 제사장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내 아이가 평생토록 여호와를 섬기게 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실인의 삶입니다. 평생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사무엘상 2장 1절부터 10절까지가 바로 한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그녀가 과거에 겪었던 모든 고난을 통해 얻은 깊은 영적 체험의 고백입니다. 한나는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브닌나가 날마다 나를 자극하고 격분시키며 괴롭힌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겠구나.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인생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했을 것이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내 아들을 온전히 바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 고난의 과정이 없었다면 어떻게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이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한나는 사무엘을 낳은 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 기도는 참으로 탁월한 기도입니다. 여러분도 자주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이 기도의 핵심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것의 극명한 대조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의 선택이며, 자신을 의지하는 것은 또 다른 선택입니다. 이 기도문은 사무엘의 평생 좌우명이 되었습니다. 제 생각에 사무엘은 이 기도를 통째로 외웠을 것입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사무엘서를 기록한 사람이 바로 사무엘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훗날 노년이 되어 사무엘서를 기록할 때, 어머니가 드렸던 그 기도를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한나는 사무엘이 세 살 때만 이 기도를 들려준 것이 아니라, 매년 성막으로 아들을 찾아올 때마다 이 기도를 들려주었을 것입니다.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널리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사무엘상 2:1-10)

사무엘은 이 기도를 매년 들었습니다. 우리도 이 말씀을 매일 묵상한다면 교만한 말을 그치게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자는 교만한 말을 내뱉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오만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나도 못하지만 하나님도 못 하신다”라고 하는 것은 불신앙이며 교만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훗날 역사가 증명하듯, 사무엘은 모세와 견줄 만한 가장 위대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브닌나의 오만함과 한나의 겸손

브닌나는 아이를 낳는 일에 있어서 남들보다 앞서 나갔습니다. 아이를 낳고 또 낳으니 스스로 대단한 존재라도 된 줄 알았습니다. 그녀가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긴 이유는 비교 대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나가 비교 대상이 되어 주었기에, 그녀의 입에서는 늘 교만한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너는 못 낳지만 나는 낳을 수 있어!” 여러분 중에도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직장이나 삶의 현장에서 내가 못하는 것을 남이 잘하면 큰소리를 치고, 반대로 남이 못하는 것을 내가 잘하면 우쭐해지지 않습니까? 얼마나 거만해집니까!

이런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라고 물으면, “이것도 아직 못해? 가서 공부나 더 하고 와!”라고 쏘아붙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는 말입니다. 직장에서 내가 알고 상대가 모를 때 당신은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상대가 알고 내가 모를 때 상대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십중팔구 교만하게 굽니다. 사람은 이처럼 교만을 통해 존재감을 확인하고, 그 헛된 우월감으로 살아갈 용기를 지탱하려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말들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아이구, 위를 보면 부족하지만 아래를 보면 아직 살 만해!” 밑바닥에 있는 사람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꼴찌에서 두 번째를 해놓고도 “괜찮아, 내 밑에 아직 한 놈 더 있어. 넌 어쩌다 꼴찌를 했냐? 나보다 더 한심하네”라고 합니다. 자기도 꼴찌 바로 앞이면서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시험을 보고 나서 “너 몇 점 맞았어? 난 98점인데 넌?” 하고 물었을 때, 상대가 “난 89점”이라고 하면, 89점이나 98점이나 도토리 키 재기인데도 자기가 대단히 뛰어난 양 으스댑니다!

브닌나의 교만은 남보다 조금 낫다는 것, 즉 아이를 잘 낳는다는 조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만약 엘가나가 셋째 아내를 얻었다면 한나 역시 콧대를 세웠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나는 브닌나의 끊임없는 조롱과 도발, 남편의 위로조차 위로가 되지 않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만이 그녀의 유일한 위로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겸손하다는 것을 결코 “나는 너무 부족해서 아무것도 못해요”라는 소극적인 태도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참된 겸손이 아닙니다. 참된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능히 행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겸손의 정의와 성경이 말씀하는 겸손의 정의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 후 브닌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경은 기록하지 않았으며, 굳이 기록할 가치조차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교만은 곧 여호와를 대적하는 일이었기에 반드시 산산이 부서질 운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귀신도 실수하지 않고 하나님도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교만함에 따라 그 오만의 열매를 철저히 거두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입술을 조심해야 합니다. 함부로 헛소리를 내뱉지 마십시오. 입만 열면 함부로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이 다 교만입니다. 브닌나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교만하게 굴다가 결국 교만의 비참한 열매를 거두었을 뿐입니다.

엘리 아들들의 교만과 사무엘의 겸손

엘리의 두 아들은 참으로 사악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보십시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은 이러하니 곧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가지되 실로에서 그 곳에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사무엘상 2:12-17)

보이십니까? 끝없는 교만입니다. “내가 제사장인데, 제사장이 요구하는 것을 감히 안 주겠다고?” 그들은 그렇게 여겼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이 어떤 자리입니까? 최고의 통치자이자 가장 높은 관직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의 권세는 막강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일조차 이 모양으로 처리하는데, 만약 재판을 열어 시비와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하는 일이라면 얼마나 더 엉망이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엘리의 두 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극도로 오만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고,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조차도 안중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무슨 문제 있어? 아무 문제 없잖아!”라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반면 사무엘은 어머니가 들려주는 그 기도를 매년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는 겸손을 배우고 또 배웠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더욱 은총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교만한 사람을 좋아하십니까? 아무도 교만한 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겸손했습니다. “나도 못하고 하나님도 못 하신다”가 아니라,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 신앙의 기초를 반드시 세워야 합니다.

결국 사무엘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 아들들의 교만과 사무엘의 겸손이 낳은 차이입니다. 훗날 엘리의 두 아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교만은 반드시 교만의 열매를 맺는 법입니다. 두 아들은 같은 날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전사했고, 늙은 엘리 제사장 역시 그 소식을 듣고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즉사했습니다. 엘리의 며느리는 아이를 낳다가 죽으며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영광이 떠났다)’이라 불렀습니다. 그 후 엘리의 가문은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가문의 저주를 끊지 못했고, 후손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어제 우리는 실존 인물에 대한 실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우리 지역에서 대단한 권세를 누리던 사람이었습니다. 1980~90년대 개혁개방 초기에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어서, 명절 때마다 사람들이 그 집으로 뇌물과 선물을 싸 들고 줄을 섰습니다. 받은 물건들을 내다 팔기만 해도 수천 위안을 챙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집안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재앙의 연속이었습니다. 권세를 부리던 본인은 암에 걸렸고, 그의 아들도 암에 걸렸으며, 막내아들은 신부전증과 요독증에 걸렸습니다. 온전한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권세를 쥐고 흔들다 보니 교만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교만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탐욕스러운 관리가 되었겠습니까? 엘리와 그 두 아들이 부렸던 교만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가장 위대한 선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겸손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교만의 영을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교만한 말을 자랑하지 말고 오만한 말을 내지 말라

왜 우리는 이것을 ‘교만의 영’이라고 부를까요? 오만한 말을 내뱉는 모든 행위는 교만의 영이 사람에게 역사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의 영향력은 매우 강력합니다. 사람이 무지하여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면 교만한 말을 내뱉게 됩니다. 저는 교만한 말을 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사람은 입술을 철저히 다스려야 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마음에 교만한 생각이 조금 들더라도 입 밖으로 내뱉지 마십시오.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것이 내뱉는 것보다 훨씬 낫고, 그나마 결과가 덜 나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아예 그런 교만한 생각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한 영의 역사임을 분별해야 합니다.

악한 영은 사람을 충동질합니다. 마치 브닌나를 부추겼던 것처럼 말입니다. 브닌나가 아이를 몇 명 낳고 나자 자기가 대단한 존재인 양 착각하여 오만한 말을 쏟아냈습니다. 교만한 말을 내뱉으면 반드시 교만의 대가를 치르게 되며,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반드시 보응하십니다. 사람이 교만해지는 데는 저마다의 그럴듯한 이유가 있습니다. 브닌나는 아이를 쑥쑥 잘 낳아 남편이 기뻐했기 때문이었고, 어떤 사람은 수능 시험을 잘 봐서, 어떤 사람은 학생들을 잘 가르쳐서, 어떤 사람은 사업을 성공시켰기 때문에 교만해집니다.

제가 관찰해 보니, 자신의 능력만을 의지하는 사람은 일이 잘 풀리면 기고만장해지고, 일이 조금만 틀어지면 깊은 절망에 빠집니다. 왜 그럴까요? 배후에서 ‘이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해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큰돈을 번 사람들을 살펴보면 머리가 특별히 비상하거나 지식이 남다르게 많은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들 느껴보셨습니까? 그들은 단지 좋은 기회를 만났을 뿐이며, 개인의 능력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서전을 쓸 때는 온통 자신의 탁월한 능력 덕분인 것처럼 미화하여 자신을 우상화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 책에 적힌 대로 따라 해 보면 어떻게 됩니까? 망합니다!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성공은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그가 만났던 시대적 기회 덕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당신이 어떤 일을 성공시켰다 하더라도 그것은 당신의 능력 덕분이 아닐 수 있으며, 사실 실제로도 능력이 아닙니다. 사람이 오만한 말을 자랑하고 교만한 소리를 내뱉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 즉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늘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다가 결국 하나님께 죄를 짓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한때 일을 성사시켰을지 몰라도, 그 결말이 어떠했습니까? 수조 위안의 빚을 지고 파산한 거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예전에 하이커우에 갔을 때, 한 거리 전체가 한 사람의 소유였던 곳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막대한 빚더미를 남겼으며 능력도 바닥나 버렸습니다. 이 모든 배후에 영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영들은 실로 무섭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반드시 보응하신다

사람이 교만한 말을 내뱉으면 반드시 보응을 받습니다. 우리는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만약 과거에 오만한 말을 한 적이 있다면 깊이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사무엘상 2:3)

당신이 행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저울에 올려놓고 달아보십니다. 저울에 달아보아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헛점투성이임이 드러나면 하나님께서 보응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허풍을 떨고 말을 과장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과장한 그대로 당신을 다루시고 보응하십니다. 어떻게 보응하실까요?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사무엘상 2:10)

하나님께서 당신을 산산이 부수신다면 어떻게 감당하시겠습니까? 당신이 여호와를 대적하여 자기가 잘났다고 나서고 여호와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려 한다면 승산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저와 한번 겨뤄보시지요”라고 하는 꼴이니,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 짓입니까! 헌금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제가 이만큼 바쳤으니 알아서 하십시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가진 것 중에 당신 것이 어디 있습니까? 헌금이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다시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지 마십시오. 자기가 하나님을 먹여 살리는 후원자라도 되는 양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여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를 대적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힘과 능력만을 의지하여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힘을 의지한 결과는 언제나 처참하게 깨어지는 것뿐입니다. 여러분, 이 영적 법칙을 깨달으셨습니까? 이 원리를 깨닫고 나면, 왜 어떤 때는 일이 잘되다가도 어떤 때는 손대는 족족 망하는지 알게 됩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손만 대면 일을 그르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적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성도님들은 지난 반평생 혹은 인생의 대부분을 오직 자기 힘만을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결국 인생이 완전히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습니다. 이제 영적 교훈을 얻으셨습니까? 입을 열어 “저 사람은 10억 위안을 벌었대, 저 사람은 부동산 투자로 수천만 위안을 벌었대, 안목이 정말 대단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까? 그런 칭송은 사실 사람을 저주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이 모든 것이 교만한 말이요, 헛된 자랑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보응하십니다. 세상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보십시오. 자기가 대단하다고 거들먹거리던 자들은 예외 없이 모두 보응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멋대로 황제의 상징물을 세우기도 합니다. 자기가 황제라도 되겠다는 뜻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 집 대문을 대궐 문처럼 거대하게 짓습니다. 신통한 척 점을 치며 사기를 치던 어떤 사람은 왕궁 같은 대저택을 지어 살았습니다. 결말이 어떠했습니까? 결국 체포되었고,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었기에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이 한낱 피조물인 사람에 불과함을 깨달아야 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 최고의 복임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심을 알라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사무엘상 2:2)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사무엘상 2:4-9)

만유의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귀신이 주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절대로 하나님을 대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다투려 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오만하게 굴지 마십시오.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이며,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곧 교만이요 어리석음입니다! 믿음을 가지려거든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 반석 위에 굳게 세우십시오. 아직도 이 영적 진리를 뼈저리게 겪어보지 못했다면, 하나님께 호되게 매를 맞을 때까지 계속 자기 능력을 의지하며 살아보십시오.

물론 철저히 깨어지고 부서진 후에 다시 세움을 받는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그릇이 되는 길이니 하나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모른 채, 날마다 자신의 얄팍한 힘만을 믿고 분주하게 발버둥 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기이한 궤변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영적 원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해서 맡겨진 일을 대충 한다는 뜻이 아니며,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믿음이란 나의 기초를 온전히 하나님께 두고, 맡겨진 일에 성실히 임하는 것입니다. 일할 때 우리 내면에 가인과 라멕의 세속적 논리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안식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으실 것입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교만의 영은 사람을 철저히 파멸시키는 악한 영입니다. 교만한 말을 내뱉는 자는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며, 결국 하나님께서 보응하실 뿐만 아니라 이 악한 세대 또한 당신을 비참하게 짓밟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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