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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생의 도 시리즈 (1) -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를 따르오리이까!

2026-01-04 2,437 永生之道系列

《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영생의 도(말씀)’라는 아주 흥미로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제목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입니다. 이 제목을 들으면 많은 분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영생이란 죽은 후에 주님께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영생은 살아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할 데 없이 좋은 것입니다!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영생의 도’ 시리즈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옛날에 천지의 기운으로 생겨나 바위를 깨고 나온 원숭이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매우 영특한 원숭이였습니다. 이 원숭이가 화과산에 왔는데, 전해지는 바로는 장쑤성에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원숭이 왕이 되었으니 그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머리에는 자금관을 쓰고 호랑이 가죽 의자에 앉아 왕 노릇을 하며 날마다 아주 즐겁게 지냈습니다. “얘들아, 즐겨라!” 하고 외치면 원숭이들은 즐겁게 놀았는데, 어메이산(峨眉山)의 원숭이들보다 더 신나게 매일매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일이 났습니다. 원숭이 한 마리가 병에 걸린 것입니다. 이 원숭이 왕은 사랑이 넘쳐서 지극정성으로 돌보며 온갖 방법을 다해 산에 올라가 약초를 캐고, 사방으로 민간요법과 비방을 구하러 다녔습니다. 만약 원숭이 왕에게 MRI가 있었다면 찍어 주었을 것이고, X-ray가 있었다면 촬영해 주었을 것이며, 양약이 있으면 양약을 쓰고 한약이 있으면 한약을 쓰며 탕약도 끓이고 약초도 캤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그리스도인이었다면 사람들을 돌아가며 배치해 기도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땠습니까?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이 엄습할 때, 원숭이 무리가 다 함께 아파했습니다! 병든 원숭이는 몸이 아프고, 병들지 않은 원숭이들은 마음이 아팠습니다. 특히 자기 가족이라면 정말 농담이 아닙니다.

결국 그 원숭이는 죽었고, 모든 원숭이는 이제 ‘게임 오버(Game over)’라며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말했습니다. “언젠가는 다 죽는 법이니, 살아 있을 때 즐겁게 살자!” 이 생각을 보십시오. 언젠가 다 죽을 것이니 즐겁게 살자고요? 원숭이도 그렇게 생각하고,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고, 돼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냥 그렇게 살자’는 것입니다.

오직 한 마리 원숭이, 곧 천지의 기운으로 태어난 그 원숭이 왕만이 울었습니다. 아주 서럽고 절망적으로 울었습니다. 다른 원숭이들은 다들 “사람도 살다 보면 죽고, 원숭이도 살다 보면 죽는 거니, 그냥 원숭이 인생 즐겁게 살자!”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나도 죽을 텐데,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 나는 영생의 도를 구하겠다!’ 원숭이도 영생의 도를 구하는데, 많은 사람이 이 원숭이만도 못합니다. 우리 중국인에게는 4대 명저가 있고 《서유기》가 그중 하나인데, 정말 잘 썼습니다! 왜일까요? 《서유기》를 쓴 사람이 사실 ‘영생’이라는 주제를 향해 썼기 때문입니다.

결국 원숭이는 사방으로 찾아다니며 스승을 모시고 무예와 도술을 배웠습니다. 배움을 이루고 나자 하늘과 싸우고, 땅과 싸우고, 바다와 싸우기 시작하더니 대요천궁(大鬧天宮, 하늘나라를 어지럽힘)을 벌였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날뛰다 보니 영생이라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사람이란 참 묘해서, 저 같은 경우도 일을 시작하면 모든 고통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저는 일하는 것을 참 좋아하고, 일을 안 하면 오히려 괴롭습니다. 원숭이 왕은 하늘나라를 어지럽히며 날뛰다가 초심을 잊어버렸습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단번에 오행산(오지산) 밑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실컷 날뛰어 보라는 것입니다! 오백 년 동안 그곳에 갇혀 반성했습니다. ‘내가 스승을 찾아 배운 것이 원래 무엇 때문이었던가? 나는 영생을 구하려던 것이 아니었던가! 처음에 화과산에서 원숭이 왕 노릇을 할 때 늙은 원숭이가 죽어서 내가 엉엉 울었지. 그 후에 스승을 찾아 도를 배웠는데, 그동안 난리 친 게 다 무슨 짓이었단 말인가? 너무나 허무하구나. 나는 다시 영생의 도를 좇아야겠다.’ 그리하여 삼장법사의 제자가 되어 서천으로 불경을 가지러 가며 구구팔십일 난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견뎌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였습니까? 정과(正果)를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온갖 고초를 겪으며 수많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느라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영생을 위해 이 원숭이는 세상의 수많은 사람을 뛰어넘었습니다!

우리 중화권 사람들은 《서유기》를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 살아가니 원숭이만도 못합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죽는 거지, 차라리 즐겁게 사는 게 낫다’고 하는데, 사실 돼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원숭이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람은 언젠가 죽으니 많은 사람이 그저 즐겁게 살자고 하는데, 과연 그런 것입니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언젠가 죽겠지만, 나는 영생을 구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저는 바로 영생을 구하는 쪽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은 단번에 갈라집니다. 제가 말씀드리건대, 그저 살기 위해 산다면 귀신이 반드시 와서 당신을 괴롭힐 것입니다. 사람을 히스테릭하게 만들고, 애초에 사는 목적 자체가 틀려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사는 목적이 그저 살기 위해 사는 것이라면 마음대로 놀아봐라’ 하십니다. 그렇게 놀다 보면 귀신을 불러들이게 되고, 하나님께서 작은 귀신 하나를 보내어 당신을 흔들어 놓으시면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은 매우 진지합니다. 왜냐하면 즐겁고 싶기 때문입니다. 즐거웠습니까? 즐겁지 않습니다. 어떻게 즐거울 수 있겠습니까? 기를 쓰고 일해서 돈을 벌면 돈이 있어 즐거울 줄 알았는데, 즐거웠습니까? 즐겁지 않았습니다.

어떤 형제가 참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보십시오, 주님을 믿으면 무슨 이점이 있습니까?” 제가 듣고 속으로 ‘큰일 났구나, 세상적인 논리 체계로 주님 믿는 것을 바라보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희생하시고,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은, 여러분에게 살아 있는 동안 무슨 이점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멸망치 않게 하려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유익입니다! 굳이 멸망의 길을 향해 내달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깨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만, ‘살다 보면 죽는 것이니 즐겁게 살자’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립니까? 사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돼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자매가 있었는데 참 얌전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늘 필기도 잘하고, 설교도 잘 듣고, 모든 면에서 참 좋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자기 목회자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영생의 소망이 없다면 헛사는 것’이라고 설교하시는데, 저는 그 말을 들으면 마음이 답답해요. 저는 영생의 소망 같은 건 없고, 그저 이 세상에서 좀 잘 살고 싶을 뿐이에요.” 결국 그녀는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생만 생각하고 영생은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오래전에 우리 가운데 아주 흥미로운 자매가 있었습니다. 이 자매의 남자친구도 제가 중매를 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저에게 말하기를, “목사님,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하나님은 왜 세상을 멸망시키려 하시나요?”라고 했습니다. 저도 이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저렇게 좋은데 왜 굳이 병에 걸려야 하나요?” 이것도 제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교회를 떠난 그 사람들은 지금 아주 잘살고 있습니다. 잘사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었고, 또 그럴 만한 능력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집을 사고, 아파트를 사고, 집값이 오르고, 차도 사고, 삶이 아주 번창하며 아이도 낳고 모든 것을 다 가져서 아주 잘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발뒤꿈치로 계산해 보아도 언젠가 그들은 죽게 됩니다. ‘새해 벽두부터 왜 남더러 죽는다고 저주하느냐?’고 하겠지만, 이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언젠가 그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날이 올 때, 그저 행운을 빌 뿐입니다.

사람의 일생은 생로병사이며, 그렇게 살다가 결국 죽습니다. 아무개, 아무개가 살아서 이 세상에 와서 자녀를 낳고 몇 년을 살다가 죽었고, 또 아무개, 아무개가 자녀를 낳고 몇 년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한 사람씩 다 떠나갑니다. 훗날 저는 주 예수님께 한 말씀을 배워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도 떠나가려 합니까?” 그리고 한마디 더 덧붙였습니다. “떠나고 싶다면 가버리십시오!” “말을 왜 그렇게 섭섭하게 하십니까?” 맞습니다. 당신이 안 가면 내가 갑니다. 그 후로 한 사람씩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영생의 소망을 품은 사람들은 아주 먼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왜일까요? 이런 일 저런 일이 일어나도 하나하나 다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안에 영생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셨던 것을 아십니까? 그때 제자들의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제가 처음 주님을 믿었을 때 《마태복음》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라!” 하시자 그들이 그물을 버려두고 배를 버려두고 주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저는 속으로 ‘저렇게 주 예수님을 따라가면 집안은 누가 돌보나? 베드로의 아내와 장모는 그가 물고기를 잡아 돈을 벌어오기만을 바라고 있을 텐데 누가 돌보나?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는데 예수님을 따라갔구나’ 생각했습니다. 베드로의 아내는 ‘내 남편이 예수라는 사람을 따라 도망갔다’며 당장 경찰에 신고해야 할 판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생각을 좀 복잡하게 했습니다. ‘어떻게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 참 신기하다.’ 지금은 이해가 됩니다. 왜일까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수고와 저주에서 건져내실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베드로와 그 일행은 그곳에서 물고기를 잡느라 몹시 고생하며 ‘인생이란 그저 수고와 슬픔뿐이구나’ 하고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곁을 지나가시자 그들은 “저분이 바로 비둘기가 그 위에 임했던 그 예수님이 아닌가? 세례 요한이 말했던 그 메시아가 아닌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와서 나를 따르라!” 하고 입을 여시자, 그들은 곧바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왜였을까요? 영생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 영생을 구하는 개념이 없었다면, 주님을 따르기 어려웠을 것이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비록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부활 승천하신 후 교회를 세울 때 그가 썩 잘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잘하지 못했어도 괜찮습니다. 여전히 영생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냐고요?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위해 특별한 은혜를 주셨는데, 바로 주를 위해 순교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교함으로써 모든 것이 끝났고 완성되었습니다. 아무리 불완전했던 과거라도 단번에 완전해진 것입니다.

제가 쓰는 표현이나 단어에 너무 얽매이지 마십시오.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사람이 영생을 추구하면 단번에 온전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꺼이 내려놓을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생을 위해 주님을 따르고, 어떤 사람은 영생을 위해 주님을 따릅니다. 얼마 전 저는 ‘대가를 지불하는 섬김’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왜 대가를 지불하는 섬김을 전했을까요?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섬긴 열매는 우리와 함께 영원으로 들어갈 것이며, 그것은 평생 섬긴 열매입니다. 어떤 자매는 그 설교를 듣고 마음이 괴로워했습니다. “당신들은 그렇게 섬길 수 있지만, 저는 그런 대가를 치를 수 없어요. 당신들은 내려놓을 수 있지만 저는 못 내려놓겠어요.” 안목이 너무 짧은 것입니다! 좀 더 멀리 바라보십시오. 당신의 투자와 보상을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만,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 안에 영생의 소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비극적인 상태입니다. 사실 영생을 구하는 사람은 원래 적으며, 이는 모두 사람 중심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영생이 어떤 모습인지 아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도 정말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이 말씀을 나누면서도 제 마음속에는 넘기 힘든 어떤 턱이 있습니다. 누군가 “당신은 하나님 계신 곳에 가봤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안 가봤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냐고요? 믿음 때문입니다. 가봤다면 믿을 필요도 없겠지요. 가보면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말씀드리지만, 저는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모든 일을 상고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제가 내린 선택은 다 계산을 거친 것입니다. 오늘 저의 계산법을 여러분께 알려드리겠습니다. 어떻게 계산했느냐고요? ‘사람이 사는 것은 다 헛되고 헛되다’는 것이 제가 확신한 바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별다른 뜻이 아니라, 사람은 살다가 결국 죽으며 평생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것입니다. 집안의 이 사람이 암에 걸리고 저 사람이 무슨 병에 걸려서 이 사람 돌보고 저 사람 돌보다가, 언젠가는 자기 자신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릅니다. 저는 그것이 참 헛되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사람이 사는 게 도대체 무얼 위해서인가? 그저 엑스트라 노릇이나 하다가 끝나는 것이니 아무 의미도 없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저는 ‘하나님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깊이 상고해 보고 나니 쉬워졌습니다. 만약 깊이 따져보지 않고 자기 안의 그 논리, 곧 육에 속한 논리를 맹목적으로 따른다면, 그 논리가 겉보기에는 합리적일지 몰라도 사실 짚어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오늘 병원에 가보십시오. 온몸에 호스를 꽂고 있는 사람들 중에 살고 싶어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장차 누가 호스를 꽂게 될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실 여러분께 말씀드리지만, 저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호스 꽂는 것 따위는 사양하겠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합니다. 저는 주님을 믿은 후 이 말씀을 읽고 깊이 공감했습니다. 육은 무익하고 살리는 것은 영이니, 바로 이 영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예를 들어 몸에 종양이 생겼다면, 그것이 단순히 몸에 종양이 생긴 것입니까? 그것은 종양을 일으키는 악한 영이 사람의 몸에 붙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호흡 곤란을 겪는다면 왜 그렇습니까? 호흡 곤란을 일으키는 악한 영이 그 사람에게 붙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모른다면 천천히 배우십시오. 예수님은 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실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자 왜 이런 환자들이 나았을까요? 악한 영이 떠나갔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혈루증을 앓는 것은 혈루증의 영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고, 사람이 허리가 아픈 것은 요통의 영이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영적인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101 과정》의 첫 번째 강의, 즉 입문 과정에서 “영계는 실재하며, 영이 본질이다”라고 가르치는 이유입니다. 만약 육신이 본질이라면, 의사가 치료할 때 치료하는 족족 다 나아야 마땅합니다. 종양이 생기면 잘라내고, 또 생기면 또 잘라내는데, 다 잘라낼 수 있습니까?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대체 무슨 논리인지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종양이 생겨 잘라내고, 또 생겨서 또 잘라낸다면 도대체 칼을 몇 번이나 대야 합니까? 그러니 이런 일은 참으로 고달픈 것입니다!

사람들이 영적 세계를 알지 못하고,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 모르며, 우리 하나님께서 해결하고자 하시는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영생의 도입니다. 만약 당신 안에 온통 이생의 논리 체계만 들어차 있다면 귀신을 불러들이게 됩니다! 이러한 질병들이 다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과학이 이렇게 발달했는데 왜 병원마다 사람이 미어터질까요? 앞으로 병원에 사람이 좀 줄어들기는 할 것입니다. 왜일까요? 전액 보험 처리가 안 되고 본인 부담금이 늘어나면 병원에 가는 사람이 줄어들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치료받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여전히 치료는 받고 싶어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6장 60절부터 71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본문 말씀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요한복음》 6:60-71)

기도

주님, 오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주님의 부르심에 어떠한 영광스러운 소망이 있는지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마음 문을 여시어 이생의 번뇌 가운데서 걸어 나오게 하시고, 이 영생의 소망을 얻게 하시며, 썩지 아니할 영생의 양식을 위하여 일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시고, 날마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며 주께서 택하신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그 누가 떠나갈지라도 우리는 떠나지 않겠사오니, 주께 영생의 말씀이 있으므로 우리를 영생에 이르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배경

이 본문의 배경이 무엇에 관해 말씀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6장 전체를 읽어보면, 사실 《요한복음》에서 영생에 대해 가장 많이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장에서는 니고데모와 영생을 논하셨고, 5장에서도 영생을 말씀하셨으며, 6장에서도 다시 영생을 말씀하십니다. 6장은 무슨 내용입니까?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빌립을 시험하시며, 손에 은이 얼마나 있는지, 그들에게 떡을 사 먹일 수 있는지 보셨습니다. 둘러보니 운동장에 만 명 가까이 모여 있었습니다. 한 사람에게 도시락 하나씩만 준다 해도, 하나에 만 원씩 만 명이면 1억 원입니다. 빌립은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 있어도 부족하며, 이 사람들을 다 먹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논리 체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디 있는가 찾아보라 하시자, 한 아이가 호주머니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두고 아까워서 먹지 않고 계속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참 착하고 기특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르려면 식량을 잘 챙겨야지’ 하고는 집을 나설 때 떡 다섯 개를 챙겨왔거나, 어쩌면 떡 열 개 중 다섯 개를 먹고 물고기 네 마리 중 두 마리를 먹어 두 마리가 남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 여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내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고 “참 좋구나! 다 먹어 치우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나누어 주시어 오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조각도 여러 바구니에 거두셨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수많은 바구니의 부스러기가 되고 오천 명이 배불리 먹었으니, 하나님은 참으로 대단하신 분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료’였다는 점입니다. 공짜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다음 집회 때도 꼭 오겠다며 아쉬워했습니다. 왜일까요? 떡을 바라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집회 때는 배불리 먹여주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참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공짜로 얻는 것만을 바라고 옵니다. 그것이 영생의 도입니까? 그것은 영생의 도가 아니라 이생의 떡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도나도 “공짜 떡을 준다”며 소문을 퍼뜨렸고, 오직 떡과 물고기만 바라보았습니다. 영생은 무슨 영생입니까? 수많은 그리스도인도 바로 이러한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저 떡만 보았고 물고기만 보았을 뿐,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려 하시는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후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서 다른 곳으로 건너가셨습니다. 사람들도 물 건너편까지 쫓아와 주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언제 여기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내가 왜 여기 오면 안 되는가? 내가 스스로 건너왔는데 왜 여기 있으면 안 되는가?’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시니 사람들이 여기까지 쫓아온 것은 다 떡 때문이지, 영생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긴 말씀을 하셨는데,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시간이 있다면 더 많이 읽어보아도 좋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건대, 예수님께서 왜 표적을 행하셨을까요? 우리 안에 있는 이생의, 세상적인 논리 체계를 무너뜨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셨으나, 사람들은 그 표적의 이면에 우리 안의 세상적이고 육적인 것들을 무너뜨려 영생의 도를 얻게 하시려는 뜻이 있음을 잊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영생의 도를 보지 못했고 표적도 잊어버린 채, 그저 ‘그 떡 참 맛있었지’ 하는 것만 기억했습니다. 예수님이 만드신 포도주는 최상급 포도주였고, 예수님이 만드신 떡도 최상급 떡이었습니다. 기름진 파전처럼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 만큼 맛있었을 것입니다. 다 먹지 못한 아쉬움에 갈릴리 바다 건너편까지 쫓아온 것입니다. 그 물고기는 또 얼마나 맛있었겠습니까? 기적으로 만들어낸 물고기니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그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떡 생각뿐이었으니, 머릿속에 떡만 가득 차서야 어떻게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배경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대승불교식으로 도리나 가르치신 분이 아니라, 실제로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오병이어뿐 아니라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시기도 했습니다. 떡 몇 개, 물고기 몇 마리, 몇천 명이냐를 따질 것 없이 있는 대로 다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분께서 이 표적을 행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확증하신 것입니다. 보셨습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자 사람들이 묻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여러분, 괜히 이것저것 분주하게 다니지 마십시오. 핵심은 믿는 것, 곧 참된 믿음입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무엇 하러 오셨는지 관심도 없다면 그것으로 끝장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양식에 대해 말하자면, 사실 하나님은 늘 우리를 먹이십니다.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은 만나를 먹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온 떡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얼마나 탄식하셨겠습니까? 눈앞의 떡만 보고 그 이면의 마음은 보지 못하니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신 것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어 모든 사람이 그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시게 하려 하심이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귀에는 이 말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어떻게 먹으라는 거지? 삶아 먹으라는 건가? 저 사람 요셉의 아들 아닌가? 우리 이웃 목수 아니었던가?’ 말을 하다 보면 말씀의 궤도에서 벗어나 버리니, 참 기가 막힐 일 아닙니까? 그 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라니, 아이고 맙소사!” 하며 더욱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한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멍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 형제자매들의 그 좁은 도량과 마음으로는 이 말을 듣는 순간 ‘큰일 났구나’ 하며 다 잊어버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완전히 패닉에 빠져서 “예수가 미쳤다”며 떠나갈 것입니다. “저런 미치광이를 따르지 말자, 뇌에 문제가 생겼나 보다.” 뇌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겠습니까? 사람의 생각이란 참으로 기괴합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만, 당신이 아무리 많은 표적을 경험했다 할지라도, 이해되지 않는 점이 하나라도 생기면 즉시 무너지고 무용지물이 되어 버립니다. 왜일까요? 사람이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제자들 중에 많은 이가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 말의 속뜻은 ‘가려거든 어서 가라, 갈 사람은 빨리 가버려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보아하니 베드로는 정말로 영생의 도를 구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믿었고, 모든 것을 버려두었습니다. 주님, 우리가 다 버려둔 것을 보셨지 않습니까? 저는 아내에게 말 한마디 안 하고 집을 나왔는데 모르십니까? 평소 같으면 제가 어찌 감히 그랬겠습니까? 평소에 저에게 그런 담력이 있었겠습니까? 그랬다가는 아내가 경찰에 신고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만약 끝까지 예수님을 따른다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적인 논리를 품고 돈을 지독히 사랑한다면, 도대체 무엇 하러 온 것입니까? 마귀의 짓을 하러 온 것이니, 곧 마귀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에이, 나도 당신과 안 놀 테니 내 갈 길 가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놀아라’ 하시면 가버립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가라’ 하셔도 “안 갑니다, 끝까지 따라다니며 당신을 팔아넘길 때까지 기다릴 것입니다”라고 한 셈입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별의별 사람이 다 있고 생각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표적들을 행하실 수 있다면, 당신 안에 있는 이생의 논리 체계를 흔들어 깨뜨릴 수 없겠습니까? 사람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고도 우리 안에 굳어진 그 묵은 틀을 무너뜨리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하셨습니다. 만약 사람이 ‘살리는 것은 육이고 영은 무익하다’고 여긴다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그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때 곁눈질로 예수님을 흘겨보았습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눈을 흘기며 ‘흥!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집어치워라. 흥! 육체는 무익하다고? 육체가 어찌 무익할 수 있는가? 육체가 얼마나 좋은데. 내가 어제 돈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그 맛있는 떡을 사 먹었는데 얼마나 꿀맛이었던가. 옆에서 파는 양꼬치도 몇 개 사 먹었는데, 흥! 너희에게 이런 복이 어디 있느냐? 육체가 무익하다고? 집어치우고 실컷 헛소리나 해라’ 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더러 마음대로 해보라 했고, 예수님도 그더러 마음대로 하라 하셨습니다. 결국 누가 파멸했습니까? 결국 가룟 유다는 목을 매어 죽음으로 자기 인생을 끝장내고 말았습니다. 정말이지 그러했습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영생의 도를 믿는다면 온 힘을 다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당신이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보물로 인정한다면 온 힘을 쏟겠습니까, 안 쏟겠습니까? 당연히 힘을 쏟을 것입니다. 어찌 쏟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정말로 좋은 기회라면 당신은 헌신(투자)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실 때 그가 전심으로 헌신하는지 보십니다. 그가 헌신하지 않을 때 내가 헌신한다면, 누가 진짜입니까? 헌신하는 자가 진짜입니다. 사람의 재물이 있는 곳에 사람의 마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업을 할 때 당신은 돈을 내고 상대는 힘을 보탠다고 합시다. 그가 돈은 안 내고 힘만 낸다면 자기가 내고 싶은 만큼만 힘을 쓸 테니, 그런 동업은 관두는 게 낫습니다. 사람이 영생의 양식을 위해 일하지 않고 힘을 쏟지 않는다면 가짜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하러 온 것입니까?

묻겠습니다. 대학 입시를 위해 힘을 쏟았습니까, 안 쏟았습니까? 쏟았습니다. 제 평생 가장 힘을 쏟았던 때가 바로 대학 입시 때였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예수 시험’, ‘영생 시험’에는 힘을 쏟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이 영생을 위해서는 힘을 쏟는 모습을 볼 수 없습니까? “시간이 없어서요.”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그동안 시간은 다 어디에 썼습니까? “아, 요즘 대학 입시 준비 중이어서요.” 대학이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까? 예수님이 대학만큼의 가치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다 그렇게 바라봅니다. 지금 당신은 예수님이 보배임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가를 치르는 자와 치르지 않는 자는 단번에 갈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 바라보실 때, ‘이 자는 장난하러 왔고, 이 자는 진짜로 임하고 있구나’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무슨 어투를 쓰시든 그 어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당신이 진정 장난하러 왔는지 아니면 수고하러 왔는지입니다. 가짜로 믿으면서 “아, 주님 믿는 것도 참 좋네!” 하겠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좋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좌에 앉으셔서 “너는 장난치러 왔으니, 가서 실컷 놀아라!” 하시면 어찌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당신을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양식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온 힘을 기울이지 않고 배길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어떤 노(老)목사님께서 저에게 권면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목사님이셨고, 그분이 제게 베풀어주신 선한 일들을 마음 깊이 기억합니다. 그 목사님은 저에게 “성경을 열심히 상고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진작부터 알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 말씀을 하신 후, 성경을 연구하는 일에 있어서 그분은 수많은 사람에게 똑같은 말씀을 하셨겠지만 그것을 가장 철저히 실천한 사람은 아마 저일 것입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는 제가 가장 철저히 해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년이 흘렀고, 우리는 신구약 성경 전체를 거의 다 강해했습니다.

어제 동역자들에게 제가 쓴 원고가 2천만 자에 달한다고 했더니, 그들이 “목사님, 그 정도가 아닙니다! 2천만 자를 넘어 3천만 자는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목회와 양육, 양육 시스템, 목회자 훈련에 관한 것까지 다 합치면 정말 엄청납니다. 저는 진지하게 임했습니다. 기도도 진지하게, 성경공부도 진지하게 임했습니다. 믿느냐고요? 믿습니다! 뼛속 깊이 믿는 진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그대로 믿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결과는 정말로 훌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확증해 주셨습니다. 인자는 하나님께서 확증하신 분입니다. 여러분도 이처럼 철저히 행한다면 하나님께서 또한 확증해 주실 것입니다.

영생의 양식을 위해 일하는데, 제가 온 힘을 다하지 않는다면 바보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반드시 전심전력을 다합니다. 진정으로 전심을 다하면 가벼운 감기나 잔병치레 따위는 저를 가로막지 못합니다. 숨이 넘어가지 않는 한 저는 십수 년 동안 성경공부를 한 번도 중단한 적이 없으며, 오직 이러한 열정으로 달려왔습니다. 제가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무엇 하러 여기에 왔겠습니까? 이토록 좋은 것을 두고 대가를 치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이 영생의 양식이야말로 우리가 온 힘을 쏟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지 않습니까? 성경에 흑백으로 명백히 기록된 예수님의 수많은 말씀을 온 힘을 다해 읽고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손오공처럼 스승을 찾아 사방으로 헤맬 필요도 없이, 성경을 제대로 읽으십시오! 그 안에 온갖 보화와 생명이 가득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힘을 쏟으십시오.

인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치신 자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예수님이 그저 설교의 대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치시고 확증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전무후무한 것으로,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고, 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자가 걸으며, 날 때부터 맹인 된 자가 보게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건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 비하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은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합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는 물로 여섯 항아리의 포도주를 만드셨는데, 최고급 명주 중의 명주요 최상급의 포도주였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표적을 행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확증하신 것입니다.

오늘 형제자매 여러분은 우리가 배우는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서 제가 “병원비 다 굳었다”고 말할 때마다 그것은 실제였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확증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암에 걸린 것을 두고 ‘변장된 축복’이라는 둥 허황된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순 헛소리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영생의 도입니다. ‘이곳에 영생의 도가 있는데 내가 누구를 따르겠는가? 이곳에 영생의 말씀이 있는데 내가 누구에게로 가겠는가?’ 이것이 바로 성경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인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치신 자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는 길을 확증하시며 표적과 기사로 따르는 말씀을 확증해 주신다면, 이 얼마나 보배로운 일입니까! 참으로 보배롭습니다!

여섯째로, 인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치신 분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곳에 갔는데 아무런 확증도 없고 그저 그럴듯한 도리만 이야기하며, 병이 나면 의사만 소개해 주고 예수님은 결코 소개해 주지 않는다면, 십중팔구 가짜이며 결코 복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형제자매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표적이 따르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능히 일을 이룰 수 있으며,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영생의 도 가운데, 곧 영생 안에 거하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이생에서 육신은 무익하며, 비록 지금 우리가 육신으로 살고 있지만 아무 상관 없습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주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다

이 말씀은 참으로 좋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믿습니까? 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곧 우리 생명의 양식입니다. 이것이 우리 생명의 양식이라면 힘을 쏟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힘을 쏟은 후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확증해 주신다면, 이것이 생명의 양식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으며,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고 영적으로 번성하게 됩니다. 주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이것저것을 갈망했지만,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오직 주 예수님만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내면의 목마름이 채워지고, 늘 불안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던 마음이 비로소 안식을 얻어 든든하고 평안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양식이심을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분이 곧 생명의 양식이십니다. 왜 메마르고 생기 없는 삶을 삽니까? 온종일 이나모리 가즈오 같은 세상 경영서나 읽고 있으니 메마르지 않겠습니까? 《손자병법》을 달달 외운다 한들 그것 역시 메마른 것이며 생명의 양식이 아닙니다. 생명의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풍성히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고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얼마나 좋습니까. 당신이 믿기 시작하면,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습니다. 믿기 시작하는 즉시 하나님의 영이 당신 안에 거하시며, 당신은 영생 안에 거하게 되고 당신의 영은 하나님과 함께하게 됩니다. 만약 사람이 오직 육에 속한 것만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영이 어찌 그 안에 거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 말씀은 참으로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며,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의 양식이니 우리가 먹으면 살아납니다.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몸도 강건할까요? 그의 영이 번성하기 때문입니다. 영이 번성하지 못한 채 날마다 육체에 이것저것 보양식만 챙겨 넣는다면 영은 메마르고 몸 역시 강건할 수 없습니다. 육은 무익합니다. 이 한 구절만으로도 우리는 몇 년 동안 깊이 묵상해 볼 만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를 알지 못해 육신에만 온 힘을 쏟습니다. 달리기를 하고 운동을 하는데, 무엇을 단련하는 것입니까? 육체를 단련하는 것입니다. 건강식품을 먹고 유기농 식품을 먹는 것도 다 육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우리의 영이 번성하면 몸도 강건해지고 범사가 잘되니, 그것이 바로 참된 생명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위에 계시므로 오늘 우리는 영생 가운데 있으며,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우리를 얽매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실 수 있었다면, 우리를 먹이시는 것이 그리 어렵겠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먹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보혈이 우리 생명의 양식이 되어 영생의 양식을 위해 일한다면 우리의 삶에 부족함이 있겠습니까?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거듭 표적을 행하시며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셨으나, 아무리 확증을 보여주셔도 사람들은 여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 중에는 병 고침을 받아 살아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병을 고쳐주신 것은 목숨을 살려준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살아났음에도 그들의 영은 다시 죽고 말았으니, 그들을 살게 한 것은 육체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생의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의 양식에 온 힘을 쏟으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시며 여러분이 받은 말씀을 확증해 주실 것이고, 여러분이 생명의 양식을 풍성히 먹을 때 영이 살아날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좌에서 내려다보시며 “참 좋구나, 이 아이가 참으로 지혜롭다” 하실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렇게 좋은 말씀에도 많은 사람이 떠나다

오늘 여러분도 떠나가려 합니까? 말씀을 다 듣고 나서 “목사님, 참 직설적으로 말씀하시는데 저는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습니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알아듣고 못 알아듣고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 안에 이미 굳어진 세상의 틀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기 안의 답을 정해놓았기에 제가 전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렇게 예수 믿으면 어떻게 먹고 삽니까?” 하며 많은 사람이 떠나갑니다. 제가 기도해 주어 암이 깨끗이 나았던 한 환자가 있었는데, 저를 찾아와 “내 아들이 목사님처럼 주님을 믿으면 어떻게 먹고 삽니까?”라고 묻기에 참 기가 막혔습니다. “그럼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했더니 떠나갔고, 지금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지난 수년 동안 제 마음속에 한 가지 깊은 탄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셨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 이해가 되십니까? 여러분이 영생의 도를 좇는 사람이 아니라면 떠날 테면 떠나십시오. 굳이 그들을 붙잡아 권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저는 이 교훈을 배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때로는 정말 그들이 떠나지 않기를 바랐고 마음이 아팠지만, 점차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습니다. 사람들이 떠나가면 마음은 아프지만, 그것은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이곳에 올 수 없습니다.

만약 이생에 집착하고 돈을 사랑하면서도 죽어도 떠나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마귀가 아니겠습니까? 나중에 보니 교회 안에서도 참 묘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다 보면 귀신이 그 사람을 데리고 떠나가 버립니다. 만약 그러면서도 죽어라 떠나지 않고 버틴다면 그것은 아주 큰 귀신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우리에게 영생의 말씀이 있다고 선포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우리를 위해 친히 증언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곧 생명의 양식을 때를 따라 여러분에게 나누어주어 여러분 모두의 영이 번성하게 하기를 원합니다! 비록 우리의 육체는 날마다 낡아지나 우리의 영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언젠가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할 것이며, 그것은 비할 데 없이 좋은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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