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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사사기 14장 - 이 일은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이라 블레셋 사람을 칠 틈을 찾으심이었도다

2025-01-29 5,500 士师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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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师记14章-参孙和亭拿的女子
  • 1 参孙下到亭拿,在那里看见一个女子,是非利士人的女儿。
  • 2 参孙上来禀告他父母说:“我在亭拿看见一个女子,是非利士人的女儿,愿你们给我娶来为妻。”
  • 3 他父母说:“在你弟兄的女儿中,或在本国的民中,岂没有一个女子,何至你去在未受割礼的非利士人中娶妻呢?”参孙对他父亲说:“愿你给我娶那女子,因我喜悦她。”
  • 4 他的父母却不知道这事是出于耶和华,因为他找机会攻击非利士人。那时,非利士人辖制以色列人。
  • 5 参孙跟他父母下亭拿去,到了亭拿的葡萄园,见有一只少壮狮子向他吼叫。
  • 6 耶和华的灵大大感动参孙,他虽然手无器械,却将狮子撕裂,如同撕裂山羊羔一样。他行这事并没有告诉父母。
  • 7 参孙下去与女子说话,就喜悦她;
  • 8 过了些日子,再下去要娶那女子,转向道旁要看死狮,见有一群蜂子和蜜在死狮之内,
  • 9 就用手取蜜,且吃且走;到了父母那里,给他父母,他们也吃了;只是没有告诉这蜜是从死狮之内取来的。
  • 10 他父亲下去见女子。参孙在那里设摆筵宴,因为向来少年人都有这个规矩。
  • 11 众人看见参孙,就请了三十个人陪伴他。
  • 12 参孙对他们说:“我给你们出一个谜语,你们在七日筵宴之内,若能猜出意思告诉我,我就给你们三十件里衣,三十套衣裳;
  • 13 你们若不能猜出意思告诉我,你们就给我三十件里衣,三十套衣裳。”他们说:“请将谜语说给我们听。”
  • 14 参孙对他们说:“吃的从吃者出来;甜的从强者出来。”他们三日不能猜出谜语的意思。
  • 15 到第七天,他们对参孙的妻说:“你诓哄你丈夫,探出谜语的意思告诉我们,免得我们用火烧你和你父家。你们请了我们来,是要夺我们所有的吗?”
  • 16 参孙的妻在丈夫面前啼哭说:“你是恨我,不是爱我,你给我本国的人出谜语,却没有将意思告诉我。”参孙回答说:“连我父母我都没有告诉,岂可告诉你呢?”
  • 17 七日筵宴之内,她在丈夫面前啼哭,到第七天逼着他,他才将谜语的意思告诉他妻,他妻就告诉本国的人。
  • 18 到第七天,日头未落以前,那城里的人对参孙说:“有什么比蜜还甜呢?有什么比狮子还强呢?”参孙对他们说:“你们若非用我的母牛犊耕地,就猜不出我谜语的意思来。”
  • 19 耶和华的灵大大感动参孙,他就下到亚实基伦,击杀了三十个人,夺了他们的衣裳,将衣裳给了猜出谜语的人。参孙发怒,就上父家去了。
  • 20 参孙的妻便归了参孙的陪伴,就是作过他朋友的。

《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 함께 사사기 14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이 장을 읽고 나면 아마 머릿속이 하얘지고, 도대체 이게 무슨 내용인지, 그야말로 한 편의 막장 드라마 같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셔서 그가 사자를 찢어 죽이고, 이후에 하나님의 영이 또다시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셔서 그가 삼십 명을 쳐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보면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역사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건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여러분의 상상을 초월하며, 그 결과 또한 저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요 며칠 저는 몹시 고뇌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대체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 겁니까?” 첫째 날에도 하나님은 답을 주지 않으셨고, 둘째 날에도, 셋째 날에도 답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 그런데 넷째 날 오후가 되어서야 갑자기 깨달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를 온전히 깨닫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묘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방식 또한 참으로 기묘하셔서, 우리가 상상하는 범주 내에 있다면 그것은 기묘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사기 14장의 주제는 “이 일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으로 블레셋 사람을 칠 기회를 찾으려 하심이라”입니다. 저는 이 주제를 제가 찾아낸 줄 알았지만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반드시 알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읽어도 깨달아지지 않을 때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주님을 간절히 찾고 구할 때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하자마자 하나님께서 즉시 계시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며칠 동안 애를 태우게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야 의미가 있습니다. 이 기다림 속에서 많은 사람이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애가 타는 중에도 끊임없이 구하고 찾아 결국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사 이 땅에 주를 찾는 자가 있는가 살펴보시는 이유입니다. 구하자마자 바로 얻어지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믿음으로 얼마간 간절히 구하는 시간이 필요한 법입니다.

우리가 나눈 창세기 성경공부 역시 그렇게 구하여 얻은 결과이며, 사사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것이 사람의 지혜로 된 것이겠습니까? 겨우 제 머리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의 머리가 호두알 같다고 하지만, 제 머리 역시 호두알에 불과하며 어쩌면 더 작은 호두알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그 어떤 것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경 전체가 무엇을 부각하고자 하는지 아십니까? 바로 하나의 주제입니다. 각 권마다, 각 장마다 부각하고자 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사기 14장이 부각하고자 하는 주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지배와 통제(속박)’의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비극적인 역사이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떻게 삼손의 시대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한번 묵상해 봅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선악을 분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해질 수 없으며 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노아 홍수 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이 다 휩쓸려 갔는데, 그것은 이스라엘만의 역사가 아니라 전 인류의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었지만, 노아 시대부터 또다시 갈수록 악화되었습니다. “갈수록 전 세대만 못하다”는 옛말처럼 참으로 고단한 역사였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시대를 지나며 또다시 악화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를 지나며 또다시 갈수록 악화되었습니다. 아, 이스라엘의 역사는 참으로 슬픈 역사입니다. 이후 늙은 엘리 제사장의 시대에 이르렀고, 하나님은 사무엘을 세우셨습니다. 사무엘과 다윗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상황을 아주 훌륭하게 회복시키셨으나, 그 후 또다시 갈수록 악화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그전에 예루살렘 중건이라는 작은 회복이 있었지만 또다시 악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 사도 바울 시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삼손의 시대에 이르러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배와 통제를 받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 지배와 속박이라는 것은 매우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입은 본래 목적은 자유를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반드시 이 지배와 속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지배와 통제는 사람을 지극히 패망하게 만드는 악한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남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것이 인간의 커다란 비극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의 부부 관계만 보더라도 서로를 지배하고 통제하려 듭니다. “네가 내 말대로 안 하면 난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죽어버릴 거야”라고 하면, 상대방은 결국 굴복하고 고분고분해집니다. 또 어떤 아내는 남편에게 틈만 나면 “당신 나 사랑해?”, “당신 나 사랑 안 하지?”라며 들볶습니다. 이런 속박과 통제 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지배와 억압을 당하자, 하나님께서는 이 지배와 속박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억압받는 데 익숙해져서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않았고, 부르짖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기막힌 막장 드라마 같은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분량도 꽤 깁니다. 비록 역사 속에서 삼손의 위상이 그리 크지 않을지 몰라도, 삼손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실로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친히 삼손을 세우셔서 막장 드라마 같은 상황을 연출하시며, 하나님께서 서로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관계를 얼마나 혐오하시는지를 사람들이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당시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어떻게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통제했을까요? 통제하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남편을 통제할 때, “당신 나 사랑해, 안 사랑해?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다그치면 남편은 이내 기가 죽어버립니다. 그러면 어찌하겠습니까? 집안에서 싸우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에휴, 그냥 넘어가자” 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실 이런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살아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살아갈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배와 속박 가운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려면 살 수는 있지만, 억압당하며 사는 것이었고 상대방이 협박하면 이내 굴복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공존 관계는 매우 기묘했습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아주 흥미로운 상황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삼손이 블레셋 여인을 마음에 두고, 그의 부모가 딤나로 내려가 혼사를 논의할 때 상대방은 그들을 극진히 대접합니다. 거기에 무슨 지배와 억압이 보여집니까? 겉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서로 아주 잘 지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너희가 우리 블레셋 딸을 데려가고, 우리가 너희 이스라엘 딸을 데려오며 서로 친척 방문도 하고 친구처럼 지내자” 하니 겉보기에는 아주 정상적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 우리가 잘 지내는 게 질투 나십니까? 우리가 이러는 게 싫어서 굳이 기회를 만들어 블레셋을 치려고 하십니까?”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사람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좋아하는 것과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실제로 그 당시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지배한 방식은, 미디안 족속처럼 쳐들어와 곡식을 전부 빼앗아 가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억압당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먹고살 수는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들은 ‘이 정도면 살 만하지 않은가? 그냥 이 관계를 유지하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부부 관계 중 10%는 금슬이 아주 좋고, 40%는 물불 가리지 않고 극심한 갈등 속에 살며, 나머지 40%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로 살아간다고요. 구체적인 비율의 정확성을 따질 필요는 없겠지만, 이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극심한 고통 속에 있을 때는 하나님께 부르짖기라도 하지만, 미지근한 상태에서는 그럭저럭 살 만하다고 느껴 겨우겨우 관계를 유지해 나갈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처럼 지배하고 지배받는 관계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남을 통제하는 것도, 남에게 억압당하는 것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은혜를 입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를 얻게 하려 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 두 아이를 둔 한 자매님이 계십니다. 설날 제야에 그녀는 두 아이를 데리고 집 근처 호텔로 가서 며칠을 머물렀습니다. 저는 참 기뻤습니다. 수년 동안 그녀가 느껴보지 못했던 자유를 처음으로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자유를 얻게 되었을까요? 집안에 위기와 갈등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치시려고 그런 갈등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자 하십니다. 자유를 누리는 느낌이 얼마나 좋습니까? 정말 좋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 자식 관계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빚을 갚으라고 강요하며 올가미를 씌우면, 자녀는 영문도 모른 채 부모의 밑 빠진 독을 메우느라 협박당하듯 끌려다닙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관계도 마치 이런 부부 관계와 같았습니다. 날마다 억압과 협박 속에 살면서도 “지낼 만한가?”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고, “못 살겠는가?” 하면 또 그럭저럭 살아가는 상태였습니다.

그것은 냄비 속에서 서서히 익어가는 개구리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싸우는 것인지, 서로를 억압하며 싸우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은 서로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다 파멸에 이르는 것입니다. 상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상대가 자신의 핵심 이익이 되므로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의 핵심 이익과 요구가 우선이며 상대는 그저 작은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처럼 서로를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하나님은 갈등을 일으키십니다.

단언컨대 하나님은 갈등을 일으키시는 데 있어 최고의 명수이십니다. 제가 사역하면서 발견한 것은, 갈등이 생기면 사람들의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온갖 감정이 뒤엉켜 저를 향해 덤벼듭니다. 그러면 올 테면 와보라는 식으로 정면 대결을 펼칩니다. 왜 그럴까요? 갈등 때문입니다.

갈등과 충돌을 겪는 것 자체가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모든 충돌 뒤에는 변화와 전환이 일어납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드러나지도 않고, 폭발하지도 않고, 아무 반응도 없으면서 속으로 곪아 터지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에서는 이미 쓴 뿌리가 독을 뿜어내고 있다면 결국 어떻게 되겠습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대열에서 낙오되고 맙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해결하고자 하시는 것은 바로 이 ‘지배와 통제(속박)’의 문제입니다. 침묵 속에서 폭발하든지, 침묵 속에서 멸망하든지 둘 중 하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찾아 블레셋 사람을 치시다

하나님께서는 갈등을 일으킬 기회를 찾으시며 “너희가 아주 잘 지내고 있구나. 누가 너희더러 그렇게 살라고 했느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으로 기이하고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도 성경을 읽고 이해하지 못했고, 저 역시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이 아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삼손을 예비하셨는데, 그 삼손이 블레셋 여인을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아, 도대체 무슨 논리입니까! 삼손의 부모는 “네가 나실인이 아니냐? 어찌하여 블레셋 여인을 취하려 하느냐? 우리 동족 중에는 여자가 없단 말이냐?” 하며 몹시 애가 타서 날마다 그를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아닙니다, 나는 오직 그 블레셋 여인을 원합니다”라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부모는 “네가 어찌 이리도 제멋대로냐! 너는 나실인이다”라며 탄식했습니다. 삼손의 부모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치유와 축사 사역을 할 때, 기도하기 전에는 괜찮았는데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래 그렇게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때로 우리는 삼손을 보며 ‘어디 나사가 하나 빠졌나?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삼손을 위대하게 쓰시려나 보다!’라고 단순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중에 삼손의 꼴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삼손을 사용하신 방식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어느 날 한 형제가 위대한 선지자가 되고 싶다고 하더군요. 제가 말했습니다. “그럼 단단히 준비해야 합니다.” 그가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묻길래, “위대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벌거벗고 뛰어다니게도 쓰셨으니 준비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벌거벗고 뛰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위대한 선지자가 되려면 주를 위해 체면을 다 버려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단, 경찰에는 잡히지 말아야겠지요.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칠 기회를 찾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에 갈등을 일으키시는 것 역시 이해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아, 우리 가정이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게 잘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갈등을 일으키는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갈등이 생길 때 이상하게 여기거나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세상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있다면, 여러분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 왜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까?”라고 묻겠지만, 그것은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말미암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여러분의 세상적인 헛된 꿈을 완전히 무너뜨리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삼손의 시대에 하나님은 바로 이 일을 행하고자 하셨습니다. 부모가 아무리 타일러도 소용이 없었고, 삼손은 오직 그 여인만을 고집했습니다. 삼손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 여인과 결혼시켜 주지 않으면 뛰어내릴 거예요!”라고 하자, 아버지는 “여기엔 뛰어내릴 높은 건물도 없다”고 했습니다. 삼손은 “그럼 강에 빠지든 목을 매든 벽에 머리를 들이받겠습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삼손의 성격상 정말로 들이받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결국 부모도 두 손 두 발 다 들고 ‘딤나 여인의 인물도 나쁘지 않고 예쁘장하니 그냥 그렇게 하자’ 하며 삼손을 데리고 맞선을 보러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집니다. 부모가 앞서 걷고 있었는데, 삼손이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뒤처져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부모가 지나갈 때는 엎드려 있던 사자가 꿈쩍도 않더니, 삼손이 다가가자 사자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은 이런 사소한 일까지 주관하십니다. 사자가 괜히 삼손에게 덤벼들었겠습니까? 이 일 역시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사자가 삼손을 향해 으르렁거리자,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여 그가 사자를 찢어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일에 개입하셨을까요? 뒤이어 벌어질 이야기의 복선을 깔아두신 것입니다. 그 사자의 시체에서 꿀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삼손을 나실인으로 구별하지 않으셨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실인으로 하여금 사자의 시체에서 꿀을 취하게 하신다면 그것 또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세우신 규례의 틀에도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삼손의 감정, 사자의 반응, 부모의 생각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였습니까? 바로 충돌과 갈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이신 공이 결코 적지 않습니다. 이야기 전체가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이후 수수께끼를 내고, 시체에서 나온 꿀을 삼손과 그의 부모가 먹게 됩니다. 삼손은 부모에게 그 출처를 알리지 않았고, 블레셋 여인과 혼인 잔치를 베풀자 저쪽에서는 서른 명의 친구를 붙여주었습니다. 삼손은 그들에게 수수께끼를 내며 맞히지 못하면 옷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옷 한 벌은 매우 귀한 것이었습니다. 서른 명에게서 각 한 벌씩 총 서른 벌이었습니다. 그 서른 명은 기가 찼을 것입니다. ‘여기 와서 잔치에 참석해 줬더니 옷을 뜯기게 생겼네?’ 삼손이 더 대단했다면 바지까지 걸고 내기를 해서 그 서른 명을 다 벌거벗겨 쫓아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 눈에는 모든 것이 기이해 보입니다.

결국 서른 명은 칠 일 안에 수수께끼를 풀지 못해 옷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어떻게 합니까? 삼손의 아내를 불러 협박합니다. “네 남편을 꾀어 그 답을 알아내라. 그렇지 않으면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을 불사르겠다.” 참으로 사서 고생하는 꼴 아닙니까? 삼손이 괜히 사자를 죽이고, 벌 떼가 생겨 꿀을 먹고, 수수께끼를 내는 바람에 이제 아내가 협박과 이용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를 청하여 우리의 소유를 빼앗고자 함이냐?” 하며 난리가 났습니다. 이 모든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제가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기회를 찾아 갈등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남에게 지배당하고 억압받는 사람이라면, 속으로 ‘그냥 대충 맞추며 살자. 그저 평안하게 조용히 살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안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반드시 갈등을 일으켜 자유를 얻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회를 만들어 그들을 치실 것입니다.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 가운데 억압과 통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분들은 모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아직 벗어나지 못한 분들은 속으로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일을 겪게 하십니까?’라고 원망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지배와 속박 아래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억압과 통제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묘한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속박에서 건져내고자 하십니다. 어떻게 건져내십니까? 서른 명을 쳐 죽이심으로써입니다. 때로는 ‘그 서른 명은 무슨 죄로 억울하게 죽었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시매, 그가 아스글론으로 내려가 서른 명을 쳐 죽이고 그들의 옷을 노략하여 수수께끼를 푼 자들에게 주었습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왜 이렇게 구원하셨을까요? 왜 이토록 복잡하게 일하시며, 왜 수많은 사람을 치시면서까지 먼 길을 돌아가셨을까요? “하나님, 더 좋은 방법은 없었습니까?”라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배하고 속박하는 악한 관계를 지극히 혐오하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보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참 인품도 좋고 사랑도 많은 훌륭한 목회자인데, 어찌하여 뇌암에 걸렸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이 세대에는 사람들에게 속박과 통제를 견디라고 부추기는 목회자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억압과 통제를 지극히 미워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두 사람이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십시오. 한쪽이 기꺼이 지배를 받으며 평안하게 살면 되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가 얼마나 가정을 중시하는데, 조금만 참으면 안 됩니까?”라고 권면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인내입니까? 그것은 억압과 속박일 뿐입니다.

저는 성도들에게 속박을 견디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제가 섬기는 성도들이 진정으로 누려야 할 것은 자유입니다. 저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구절을 들이대지 마십시오. 그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한 말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등의 구절을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식으로 왜곡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 스스로 속박 가운데 살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조만간 탈이 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혐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속박 속에 갇혀 있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상대방의 핵심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를 똑똑히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도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제가 사역하며 지켜본 바로는, 여러분 배우자의 핵심 이익은 ‘돈’입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똑똑히 아셔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의 가정을 깨뜨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깨뜨리고자 하신다면 그것은 저와 상관없는 일이며, 저도 책임을 피할 것입니다. 여러분 배우자의 핵심 이익이 돈이라면, 우리의 핵심 이익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함께 살 수 있다면 온전히 잘 살되, 도저히 함께할 수 없다면 일부를 희생하더라도 반드시 자유를 쟁취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본문의 의미가 이해되십니까? 삼손이 블레셋 여인을 좋아한 것 자체는 하나님께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보신 것은 ‘사람이 자유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온통 이러한 지배와 속박의 싸움입니다. 삼손의 아내가 어떻게 삼손을 옭아맸습니까? 남편 앞에서 울고불고 매달렸습니다.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죽겠다고 하는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삼손은 또 부모를 어떻게 통제했습니까? 역시 울고불고 난리를 쳤습니다. 이제는 벽에 머리를 들이받겠다는 협박까지 더해졌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이 구조는 참으로 악한 것입니다.

삼손의 아내는 울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를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아요.” 삼손은 그 말에 기가 꺾여 “내가 당신을 사랑하오”라고 변명했습니다. 아내는 “사랑하지 않잖아요! 사랑한다면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주세요”라고 윽박질렀습니다. 결국 삼손은 답을 알려주었고, 이내 아내에게 환멸을 느껴 그녀를 친정에 버려두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러자 장인은 삼손의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 버렸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난장판 아닙니까?

이런 지배와 통제는 영적 지혜가 없으면 결코 이겨낼 수 없습니다. 제가 아는 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명심하십시오. 어떤 교회를 다니고자 살펴볼 때, 목사와 사모가 서로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관계라면 극히 주의해야 합니다. 그 배후에는 반드시 통제와 속박의 영이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회는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고자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이 자유를 얻기를 원하십니다.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이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한번은 어느 원로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 교단에 꽤 대형 교회를 이끌던 목사님이 계셨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이 집 뒤편 바다를 향해 걸어 들어가며 혼잣말로 “나는 이혼하기도 싫고, 아내를 죽이기도 싫으니, 차라리 내가 죽겠다”라고 중얼거렸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이게 대체 무슨 꼴인가?’ 싶었습니다. 지배와 속박 때문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속박당하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억압에 짓눌린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이 이런 악한 영에 얽매여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제자 부부가 있었는데, 마침 저희와 한 숙소에 묵게 되었습니다. 그 부부가 한 방을 쓰고, 저와 다른 형제가 다른 방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가 서로를 옭아매고 통제하는 모습이 참으로 처참했습니다. 육신을 위하는 목사는 육신을 위하는 도를 전하고, 육신을 위하는 목사는 육신에 속한 양 떼를 기르며, 서로를 지배하는 목사는 서로를 속박하는 수많은 양을 길러낼 뿐입니다. 기막히지 않습니까?

이 세대는 지배와 통제(속박)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며, 이 일은 여호와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가정에 막장 드라마 같은 갈등이 터지더라도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라고 묻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지배와 속박을 깨뜨릴 기회를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억압하는 자가 누구이든 하나님은 그 멍에를 꺾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몇 사람이 더 죽고 덜 죽는 것에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니 이런 해석이 꽤 흥미롭지 않습니까? 사실 여러분 마음 깊은 곳에서 큰 공감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지배와 통제에 지칠 대로 짓눌려 보았기에 깊이 공감하는 것이며, 저 역시 깊이 공감합니다.

지배와 억압의 배후에는 악령이 있다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지배한 배후에는 전적으로 악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블레셋 여인이 행한 방식을 자세히 보십시오. 똑같습니다. 블레셋 사람 서른 명이 말했습니다. “삼손의 아내여, 네가 남편을 꾀어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으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태우겠다.” 그들에게는 좋은 기회였고 단숨에 상대를 쥐흔들었습니다. 그러자 삼손의 아내는 어떻게 했습니까?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 답을 가르쳐주지 않는군요”라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울고불고 떼를 쓰며 위협하는 것, 이것이 다 지배와 통제의 수법이 아니겠습니까?

한번은 우리 교회의 어느 부부가 저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목사님,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겠다고 협박합니다.” 제가 듣고 “그것이 바로 통제와 속박입니다!”라고 하자 부부는 사색이 되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일까요? 아이가 정말 그렇게 할 것 같습니까? 정말 극단적인 선택을 하겠습니까? 자살의 영은 자살의 영이고, 사람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영은 조종하는 영입니다. 잘 분별해 보십시오.

제가 말했습니다. “아이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 제 발로 돌아올 것입니다. 자기를 그토록 사랑하는 아이가 어떻게 여러분을 위해 목숨을 끊겠습니까?” 제 말이 이해되십니까? 그 부부는 하루 종일 가슴을 졸이며 보냈습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자 아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멀쩡히 돌아왔습니다. 부부는 “목사님, 말씀이 딱 맞았습니다”라고 감탄했습니다.

사실 저도 큰 모험을 한 셈입니다. 만에 하나 진짜 사고라도 나면 어찌합니까? 그러나 영적 분별이 필요합니다. 자기를 그토록 끔찍이 아끼는 자가 어찌 죽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모험이었지만, 때로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중심을 잡아주기 위해 이런 결단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통제이자 조종입니다. 자발적인 순종이 아니라 협박에 의한 억지 굴복입니다. 거짓말과 두려움을 통해 조종당하면서도 스스로 “나는 인내하고 있어”, “나는 선악을 분별하지 않아”라며 껍데기만 포장합니다. 제가 들을 때는 기가 찰 뿐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참겠다는 말입니까? 이미 사람에게 짓밟히고 통제당하면서도 여전히 ‘선악을 분별하지 않겠다’고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억압당하고 통제받아 자유가 없는 사람은 결코 순전한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속박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습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니 주위를 잘 관찰해 보십시오. 다른 모든 것을 잃더라도 여러분이 자유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성경을 다시 읽어보면 명확히 깨닫게 됩니다. 모세 역시 아내의 통제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처가살이를 하는 데릴사위였고, 그의 아내 십보라는 대단히 기가 세서 걸핏하면 소리를 질렀습니다. 모세는 처가에서 목줄만 안 맸지 거의 개처럼 쥐 죽은 듯 지냈으며, 두려워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너를 쓰겠다”고 하셨을 때, 모세는 속으로 ‘우리 집사람이 허락하지 않을 텐데, 내 귀를 뜯어내고 입을 찢어놓지 않을까?’ 하며 가고 싶어도 두려워 감히 나서지 못했습니다. 결국 모세가 승낙하자 그의 아내도 따라나섰습니다. 사실 아내가 왜 따라갑니까? 십보라는 집에 있고 모세 혼자 가면 될 일 아닙니까? 그러나 아내는 미덥지 못했던 것입니다. 비록 성경에 다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길을 가던 중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셨는데, 왜 그러셨을까요? 그가 아내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아내가 반대한다는 이유로 두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던 것입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지는 않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목사님이 교회 직원들에게 어떤 일을 맡겨 진행하게 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일하고 났더니 사모님이 알고서 “누가 이렇게 하라고 했어요?”라고 따집니다. 직원이 “목사님이 지시하셨습니다”라고 하자, 사모님은 “안 돼요, 그렇게 하지 마세요”라고 합니다. 직원이 목사님을 찾아가 “목사님, 저희가 목사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사모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라고 묻자, 목사님은 “사모님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니 사모님 말씀대로 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지배와 통제가 교회 안에 만연한 현실이 참으로 가슴 아픕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지배와 속박을 지극히 혐오하십니다.

웃긴 이야기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어떤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이 아내에게 “여보, 뭐 먹고 싶어?” 하고 물으니 아내는 “아무거나 다 괜찮아”라고 대답했습니다. 남편이 “그럼 맥도날드 가자” 하니 아내는 “No! 난 맥도날드 질색이야”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그럼 뭐 먹고 싶은데?” 하니 아내는 “아무거나 다 좋아”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그럼 KFC 가자” 하니 아내는 “No! 난 KFC 싫어”라고 했습니다. 그 여자의 속마음을 맞히는 것은 삼손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통제와 속박의 파멸적인 본질을 깨달아야 합니다! 억압과 조종이 얼마나 악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남을 지배하려 드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라 하면 무능하고, 주님의 일을 하라 하면 아무것도 못 하면서, 남을 조종하고 옭아매는 데는 엄청난 재주를 부립니다. 제가 단언컨대, 제 앞에서는 그런 수작이 통하지 않습니다. 제게 와서 억압하려 들면 어림도 없습니다. 머리를 벽에 들이받겠다면 들이받으십시오. 제 머리가 깨지는 것도 아니고 자기 머리를 박는 것인데, 몇 번 더 박든 덜 박든 상관없습니다. 겪어본 사람들은 다 압니다.

우리 교회는 억압과 조종을 용납하지 않으며, 타협을 숭상하지 않고, 겉으로만 평안한 척 미봉책으로 살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충돌해야 할 때는 정면으로 충돌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반드시 해결하되, 기필코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아멘! 여러분이 제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삼손이라는 인물을 통해 지배하고 지배받는 속박의 악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셨음을 깨달으셨을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에 순종하여 이 지배와 피지배의 굴레에서 벗어나십시오. 남을 억압하든, 남에게 억압당하든, 그 속박의 자리에서 속히 걸어 나오십시오. 왜입니까? 어떤 이는 남을 조종하는 것이 좋다고 여길지 모르나 남을 통제하는 자 역시 고통스럽고, 억압당하는 자는 괴롭지 않겠습니까? 몹시 괴롭습니다. 남을 짓누르고 나서 상대가 괴로워하는데 본인인들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결코 편할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각자가 처한 환경 속에서 참된 자유를 추구하기 시작합시다. 시 구절에도 있지 않습니까? “생명도 소중하고 사랑은 더욱 귀하나, 자유를 위해서라면 둘 다 버릴 수 있노라.” 이것은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유명한 시의 한 구절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포기할 수 있어도 자유만큼은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협상할 수 있어도 주권만큼은 타협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참된 자유를 누리는 훈련을 시작합시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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