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 함께 《창세기》 36장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번 장은 다소 난도가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저는 왜 《성경》이 이런 내용들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사실 여기에는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잃어버린 후에 겉으로 보기에는 꽤 잘 살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이 저주받은 에서에 대해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이것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까?
이번 장에서 우리는 에서의 후손 중에 수많은 명문 망족이 배출되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는 요셉이 나와 애굽의 총리가 되었지만, 에서의 후손 중에도 그런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직 왕이 없었을 때, 에서의 후손 중에는 이미 왕이 있었고, 게다가 야곱의 후손보다 더 잘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을 주셨지만, 언뜻 보기에는 에서만큼 많이 낳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에서는 자손을 많이 낳았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왕과 족장들이 나왔는데, 이것이 저주입니까? 정말 사람을 몹시 헷갈리게 합니다!
저는 훗날 한 사람이 에서의 길을 가기로 선택한다면, 그들의 논리 체계 역시 대단히 치밀하며 아주 잘 살아서, 잘 살지 못한다는 징후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전에 에서가 사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야곱을 맞으러 왔을 때, 실제로는 살의를 품고 야곱을 죽이려던 것이었습니다. 사람 수를 따지자면 에서의 군사가 야곱보다 많았고, 재물로 따져도 에서가 야곱보다 부유했으며, 사업을 따져도 에서가 야곱보다 더 크게 했고, 영토를 따져도 에서가 차지한 땅이 야곱이 차지한 땅보다 넓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아도 저주를 받은 것 같지 않아 정말 헷갈립니다!
사실 사람이 이 세상 일들을 마주할 때 혼란스러워하려면 얼마든지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눈앞에서 어떤 사람은 참 좋은데 왜 횡사하는가? 어떤 사람은 참 악해 보이는데 오히려 장수하고, 저 사람은 아주 악해 보이는데 관직은 꽤 높이 올라갑니다. 이렇게 악한 사람이 어떻게 사업을 이렇게 크게 번창시킬 수 있는가? 여러분이 제 말을 듣고 나서 주변 사람들을 둘러본다면, 순간 제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무슨 저주가 있단 말인가? 도무지 저주받은 티가 안 나고, 오히려 에서 같은 모습이 저주라면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결코 적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사람이 무엇을 믿는가는 모두 선택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민주주의를 선택하여 민주와 자유가 좋다고 여기는데, 그것도 하나의 선택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독재도 꽤 괜찮다고 여깁니다. 독재가 나쁘다는 수많은 예를 들 수도 있고, 민주주의가 나쁘다는 수많은 예를 열거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바로 이러한 일들 앞에서 온갖 혼란을 겪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에서의 후손은 저주를 받은 것입니까? 제가 이 장의 본문을 아무리 보아도 어떤 저주도 보이지 않으며, 에서의 일평생 가운데 누구도 귀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들 영계가 실재한다고 말하는데, 왜 에서에게서는 영계의 실재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오히려 세상에 속한 것이 지극히 실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반면에 야곱은 그다지 잘 살지 못한 것처럼 보이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며 에서가 야곱을 섬긴다는 것은 정말이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만약 사람이 단지 세상에서 누가 더 잘 사는가만을 비교하여 누가 영적인가를 규정하려 한다면 큰일입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모두 선택이며, 어느 쪽을 선택하든 다 괜찮아 보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축복을 선택하겠습니까, 아니면 저주를 선택하겠습니까? 에서의 집안사람들이 오래 살지 못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헛소리입니다. 보십시오, 그들의 후손 중에도 백세를 누린 노인이 많습니다. 사실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면 볼수록 미혹될 것입니다. 원래 《성경》은 사람을 헷갈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살아가는 이 작은 일들만 바라본다면 온갖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으로 하여금 혼란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며, 그 혼란의 원인은 바로 믿음과 불신에 있습니다.
믿음과 불신이 낳는 결과는 육안으로는 정말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콩나물을 기른다면 3일에서 일주일이면 자라나서 볶아 먹든 무쳐 먹든 다 맛있습니다. 콩나물은 며칠만 기르면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은 심자마자 바로 효과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심어도 자라지 않는 것이 있고, 자라나기도 전에 죽어버리는 것도 있습니다. 눈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나오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며, 언젠가는 자라나게 마련입니다. 즉 믿음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축복이든 저주든 자라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살아있는 70~80년, 백 년 남짓한 짧은 세월만으로는 식별하기가 다소 어렵습니다. 야곱이라는 사람이 대단한 이유는 바로 그가 그렇게 선택했다는 점에 있으며, 그의 선택은 사람이 보기에 사실 비합리적이었습니다. 사람의 논리로 보면 야곱은 잘 살지 못했고, 에서야말로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속담에 시간이 모든 것을 증명한다고 하듯, 만약 한 사람이 영원이라는 관점에 서서 이 일을 바라본다면 차이는 엄청납니다. 그러므로 영원의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많은 혼란이 생깁니다. 악인이 백수를 누릴 수도 있고, 선인이 장수하지 못할 수도 있으며, 온갖 일이 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안목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 서른 살 남짓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좋지 않다고 여깁니다. 만약 사람이 이생만을 추구한다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 수십 년 동안 혼란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 가운데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추구한다면 그것 역시 하나의 선택이며, 보게 되는 것도 완전히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저에게 정말로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사실 저도 본 적은 없지만, 그저 믿을 뿐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후서》 4:18)
우리가 만약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면 보이는 것만을 주목하겠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면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즉 여러분이 무엇을 주목하느냐가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의 위치를 결정합니다.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오고 가는 것은 결국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사람의 일생에 영원한 소망이 없다면 살아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살다가 그냥 죽는 것뿐입니다.
살아있을 때 참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은 길가의 개나 돼지우리에 갇혀 도살을 기다리는 돼지와 같습니다. 그것들도 사는 게 꽤 재미있다고 느끼겠지만, 그 돼지는 어쩌면 다음 날 식탁 위의 온갖 화려한 요리가 될지도 모릅니다. 사람에게 영원을 향한 추구가 없다면 살아가는 것이 꽤 '실속 있어' 보일지 모르나, 그 실속이라는 것은 아프리카 대초원의 동물들과 다를 바가 없으며,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살다가 결국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 관찰하고 나서 내린 결론은, 살아있을 때 잘 사느냐 못 사느냐가 척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유한가 가난한가, 지위가 높은가 낮은가로는 영적 상태를 분별할 수 없다
우리가 세상일을 관찰해 보면, 어떤 이는 하나님이 좋은 직장을 축복해 주셨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사람 중에는 그보다 더 좋은 직장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최근에 승진하고 연봉이 올랐다고 하지만,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보다 더 빨리 승진하고 연봉도 더 많이 오릅니다. 또 어떤 이는 최근에 사업이 호전되었다고 말하지만,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사업은 이미 진작에 호전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에 시선을 두는 것은 매우 치명적입니다. 그러므로 부유한가 가난한가, 지위가 높은가 낮은가로는 영적 상태를 분별할 수 없으며,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 재산의 넉넉함으로 어떤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려 고집한다면, 당신은 분명 혼란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은 부유함과 가난함, 지위의 높고 낮음의 관점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부유함으로 따지면 에서가 야곱보다 부유했고, 지위로 따지면 에서의 지위가 야곱보다 높았습니다. 에서의 후손에게서는 진작에 왕들이 나왔고, 왕과 족장들도 수없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이 결과를 보고 나면 사람들은 매우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모세가 에서와 그의 후손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코웃음을 치며 '도대체 에서가 어디가 저주받았다는 말인가?'라며 모세가 헛소리한다고 여기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광야에서 고라 일당이 모세를 반역하고, 이스라엘 백성 60만 명이 광야에서 죽은 이유입니다. 실제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는데, 이는 믿지 않고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이것이 저주임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지위와 명망으로 따진다면 당연히 고라가 뽑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신 자는 모세였습니다. 모세와 고라는 둘 다 레위인이었으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것이라 말했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죽고 말았으니, 이 얼마나 헷갈리는 일입니까!
백성들의 표는 온통 고라에게 쏠렸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고라에게 큰 구덩이를 파서 그를 빠져 죽게 하셨습니다. 고라가 죽은 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땅에서 저절로 구덩이가 생길 리 없다며 틀림없이 모세가 큰 함정을 파서 그들을 생매장했다고,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을 죽였다고 비난했습니다. 따져보면 고라가 가진 세력이 모세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이 세상은 사실 정말 이렇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영적인 사람을 영원히 핍박할 것이며, 세상에 속한 사람이 영적인 사람보다 반드시 더 번창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러한 번영을 원한다면, 실컷 한번 번영해 보십시오. 죽을힘을 다해 그런 번영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십시오. 에서처럼 살고 싶다면 필사적으로 에서가 되어 보십시오. 장래에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에게서 명문 망족이 쏟아져 나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작 그날까지 살지도 못하고 그 번영과 융성을 보지도 못할 것입니다. 물론 영적인 사람도 보지 못하지만, 영계에서 영적인 안목으로 이런 일들을 바라본다면 그 차이는 엄청납니다. 비록 제가 그곳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오늘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우리 자신의 선택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형제자매들은 새신자를 영접할 때 열심히 설명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면 저는 멀리서 눈짓을 보내며 설명하지 말라고, 설명할 수 없다고 전하려 합니다. 믿음과 불신은 선택일 뿐이며, 논리와 이치로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는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체계는 세상에 속한 것으로 살다가 결국 죽는 것이고, 다른 하나의 체계는 영에 속한 것으로 이것 역시 살다가 결국 죽는 것이니, 도저히 명확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런 번거로움을 덜어내십시오. 설득할 수 없습니다. 믿음과 불신은 하나님이 세우신 규칙이며, 믿지 않는 자들을 걸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영원 안에서 이미 택함을 받았습니다. 듣기에는 다소 절망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다만 덜 절망적인 것은 우리가 그 사람이 하나님께 택함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에 관해서라면, 결코 논리적 추론을 끝낸 후에 주님을 믿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저 스스로 주님을 믿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다른 이들이 왜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저 주님을 믿는 것이 좋기 때문이며, 왜 좋은지에 대해서는 한참을 설명해도 딱히 뚜렷한 답을 내놓지 못할지라도 각자 자신의 선택인 것입니다.
일단 선택하여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선택했을 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심을 보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표적과 기사가 따릅니다. 그러나 이 표적과 기사는 여러분의 가세를 넉넉하게 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영광 속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며, 이 모든 것은 오직 믿음과 불신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믿기로 선택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합니다. 반면에 살아있는 동안 이러한 현상들을 보며 혼란에 빠진다면, 믿지 않고 이생의 영광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생도 선택이고, 영생도 선택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보십시오. 만약 사람이 평생 사는 목표를 이생의 논리 체계에 둔다면, 그것은 너무나 혼란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저는 점차 성장했고, 성장할수록 많은 일들을 더욱 꿰뚫어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를 하나씩 허물어뜨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에게 영생이 있음을 믿기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간단한 이치입니다. 우리는 이생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영생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형제자매 안에 여전히 세상의 논리 체계가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혼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자매가 조부모님이 쓰레기장 같은 환경에서 사시는 것을 보고, 조부모님을 위해 좋은 일을 하겠다고 쓰레기를 치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조부모님은 치우지 못하게 하셨는데, 그 쓰레기들이 그분들에게는 모두 보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람을 매우 난감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그분들은 그런 논리 체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도와주려 해도 도울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쓰레기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그분은 쓰레기가 아주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살다가 죽는 것은 사람의 선택이며, 당신이 그를 대신해 선택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대단한 일도 아니니 괴로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법입니다.
이삭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에서와 야곱은 각자의 선택이 있었고 서로를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에서는 여전히 자기가 아주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저주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축복을 받았다고 여겼지만, 우리의 안목으로 보면 혼란으로 가득 차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결코 사람이 돈이 있느냐 없느냐, 지위가 높으냐 낮으냐로 하나님의 역사를 선포하지 마십시오. 사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주님을 믿자마자 부자가 되었다는 식의 간증을 결코 한 적이 없으며,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가 오다
부유한지 아닌지, 지위가 높은지 낮은지, 혹은 자녀가 잘되었는지 아닌지로 하나님이 자신을 후대하셨음을 증명하려 하지 마십시오. 언뜻 보면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이 더 후대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줄곧 이러한 기록이 나옵니다. 《창세기》 5장, 11장, 36장에는 어떤 사람이 몇 년을 살다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고, 죽은 후에는 다른 사람이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며, 살다가 결국 죽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장래에 저 역시 살다가 결국 죽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스물 몇 살이라 저보다 몇 년 더 산다 해도, 결국에는 별 차이가 없으며 모두가 똑같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혼란스러운 문제를 하나 던져드리겠습니다. 부유한가 가난한가, 지위가 높은가 낮은가로는 한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유한 것은 영적 상태를 알아볼 수 없지만, 가난한 것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온 천지 만물 가운데 이러한 법칙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곧 부유한 사람이라 해서 그가 영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적이고, 어떤 사람은 영적이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의 지위의 높고 낮음으로도 그가 영적인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지위가 높아도 영적인지 알 수 없고, 영적이지 않은 사람도 지위가 매우 높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인간 말종처럼 살고, 찢어지게 가난하며, 무슨 일을 하든 귀신이 함께하여 무슨 일을 해도 안 되고 밥조차 제대로 먹지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 영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즉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알아야 할 것은 사는 것이 영적인 문제라는 점입니다. 영적인 사람과 세상적인 사람은 훗날 모두 죽습니다. 영적인 사람 중에도 부유한 자가 있지만, 세상적인 사람 중에도 부유한 자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가난한 것은 알아볼 수 있을까요? 에서 같은 사람이 저주를 받으면 수많은 혼란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주를 받아 몹시 얽매이고 고통스럽게 사는데, 그것은 분명 영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명기》 28:1-6)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신명기》 28:8)
당신의 창고와 곡간도 복을 받고, 은행 계좌도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돈이 많다고 해서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복을 받은 사람은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으며,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가 다 복을 받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차이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논리학에 다소 생소합니다. 예를 들어 백마도 말이고 흑마도 말이니 둘 다 말이지만, 문제는 흰 것과 검은 것이 다 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주님을 믿은 후의 재정 상태를 통해 그가 영적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가 부유한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가를 보는 것입니다.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가 오며, 에서든 야곱이든 마찬가지인데 어찌하여 에서가 야곱을 섬기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셔서 세상에서 야곱처럼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도 겉으로 보기에는 대대로 이어져 가는 것처럼 보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영원 가운데 살았고, 에서는 멸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즉 장래에 우리가 영원을 향한 추구와 갈망이 있는가, 우리가 사람이 살아가는 이 일에 대해 육에 속한 체계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아니면 영에 속한 체계를 가지고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영에 속한 체계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반드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육에 속한 체계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귀신이 함께하는 것을 꼭 눈으로 보지는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귀신이 당신에게 직접 나타나지 않고 당신을 속여 넘기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귀신이 배후에서 계속 농간을 부려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때까지 조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세상이 참 흥미롭다고 생각하며, 결국에는 하나의 선택입니다. 믿음이냐 불신이냐는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인간의 선택입니다. 영적인 관점으로 보든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로 보든 어떻게 보아도 매우 합리적이지만, 단지 전제가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속한 관점에 서 있다면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영적인 세계의 관점에서는 반드시 믿음 혹은 불신을 통해 사물의 발전을 판단하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저에게 영원 가운데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그저 믿기로 선택했을 뿐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때문에 저는 존귀한 그릇이 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믿음과 불신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권유로 되는 것도 아니고 설득으로 되는 것도 아니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선택하고 싶으면 죽음을 선택하고, 생명을 선택하고 싶으면 생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를 선택하고 싶으면 세상의 논리를 선택하고, 하나님의 논리 체계를 선택하고 싶으면 하나님의 논리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6장이 잘 쓰인 이유는 일들을 매우 직설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인데, 에서의 선택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는 한 세대가 죽고 또 다른 세대가 태어나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그와 같다면 그렇게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의 이름을 지워버리려 하시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의 이름을 지워버리시겠다는 것은 《성경》의 다른 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번 장에 기록된 에서는 아직 죄악이 가득 차지 않았고, 그의 세상적인 논리 체계가 극에 달하지 않았지만, 아말렉 사람에 이르러 대대로 이어지며 무수한 변종이 나오자 하나님께서는 천하에서 아말렉 사람을 도말하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 사람의 이름을 지워버리실 뿐만 아니라 에서의 이름도 지워버리려 하셨습니다. 지금은 에서의 후손이 남아있지 않으며 이미 멸절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은 가나안 땅 사람들을 멸절하기 위함이었는데, 그 까닭은 그들의 죄악이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의 악한 본성, 이 육에 속한 자들로 인해 이 세상은 포학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어떤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포학함으로 육안으로 볼 수 있고, 어떤 것은 겉으로 뚜렷하지 않은 포학함으로 모두 세상의 이익을 위해 분주히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즉 야곱은 한 부류의 사람이고, 에서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입니다. 아말렉 사람은 한 부류의 사람이고, 모세와 여호수아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입니다. 아말렉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이 대대로 원수가 되었다는 것은 육에 속한 자와 하나님께 속한 자가 대대로 원수가 된다는 뜻이며, 전적으로 당신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두 논리 체계는 다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차이는 오직 한 체계는 이생을 근본으로 삼고, 다른 하나는 영원과 영생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민족은 반드시 천하에서 하나님에 의해 도말될 것입니다. 즉 이 세상은 장래에 반드시 지나갈 것이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은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당신의 추구가 이생에 있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으며, 탐관오리와 악덕 상인들은 모두 이생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도대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마귀와 원수가 되는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만약 한 사람이 하나님과 원수 되기를 선택한다면 세상에서도 수많은 비극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다만 《창세기》 36장에서 에서의 후손을 기록할 때는 그러한 세부 사항들을 쓰지 않았을 뿐입니다.
결론: 결국 모든 것은 선택이다
저주를 받은 에서는 그 논리 체계 안에서 살기를 선택하여 자신의 칼을 의지해 살아가며 온종일 싸우고 죽였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의지하여 사람과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으니, 이는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논리 체계입니다. 결국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당신 자신의 몫이며, 누구도 서로를 설득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 살다가 그저 그렇게 죽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니, 그것을 대단한 문제로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조부모님께 복음을 전할 때, 그분들이 받아들이면 듣는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지 억지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들 내면에 뿌리 깊이 박힌 세상의 논리 체계는, 여러분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그분들은 좋게 여기지 않고 여러분이 나쁘다고 여기는 것을 그분들은 괜찮다고 여기니 누구도 서로를 설득할 수 없는데 어디 가서 시비를 가리겠습니까? 특히 사람이 나이가 들면 내면의 고착된 관념은 다른 사람이 흔들기 더욱 어렵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유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 증명해 보임으로써 믿게 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자기만을 위해 기도해 주고 병이 나을 때까지 섬겨주면 그때 가서 우리를 따라 주님을 믿겠다고 말한다면, 제 생각에는 굳이 그가 그렇게 나를 따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그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가 따라 믿으면 그들을 따라 구원받았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것에 쉽게 속지 않습니다. 그가 나를 따라 믿는다 한들 제게 이득 될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사실은 개똥 한 무더기를 얻은 것과 같습니다. 이는 사람 자신의 선택이므로 더 이상 설득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지 마십시오.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길을 걷게 된 것에 대해 저 자신도 참 신기하게 여깁니다. 내가 어떻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결국 저 자신조차도 내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다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길을 걸어가면 갈수록 믿음도 점점 더 커지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분명히 보게 되니, 알고 보니 제가 참으로 지혜로운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창세기》 36장 본문
36:1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36:2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손녀요 아나의 딸인 오홀리바마를 아내로 맞이하고
36:3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하였더니
36:4 아다는 엘리바스를 에서에게 낳았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고
36:5 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이요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태어난 자들이더라
36:6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얻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36:7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류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36:8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
36:9 세일 산에 있는 에돔 족속의 조상 에서의 족보는 이러하고
36:10 그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아내 아다의 아들은 엘리바스요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은 르우엘이며
36:11 엘리바스의 아들들은 데만과 오말과 스보와 가담과 그나스요
36:12 딤나는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이었는데 그가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
36:13 르우엘의 아들들은 나핫과 세라와 삼마와 밋사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자손이며
36:14 시브온의 손녀 아나의 딸인 에서의 아내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은 이러하니 그가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에서에게 낳았더라
36:15 에서 자손 중 족장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의 자손 중에는 데만 족장, 오말 족장, 스보 족장, 그나스 족장,
36:16 고라 족장, 가담 족장, 아말렉 족장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엘리바스의 족장들이요 이들은 아다의 자손이며
36:17 에서의 아들 르우엘의 자손 중에는 나핫 족장, 세라 족장, 삼마 족장, 밋사 족장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르우엘의 족장들이요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자손이며
36:18 에서의 아내 오홀리바마의 자손 중에는 여우스 족장, 얄람 족장, 고라 족장이니 이들은 아나의 딸이요 에서의 아내인 오홀리바마의 자손들에게서 나온 족장들이라
36:19 에서 곧 에돔의 자손으로서 족장 된 자들이 이러하였더라
36:20 그 땅의 원래 주민 호리 족속 세일의 자손은 로단과 소발과 시브온과 아나와
36:21 디손과 에셀과 디산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세일의 자손 중 호리 족속의 족장들이요
36:22 로단의 아들은 호리와 헤맘이요 로단의 누이는 딤나이며
36:23 소발의 아들은 알완과 마나핫과 에발과 스보와 오남이요
36:24 시브온의 아들은 아야와 아나며 이 아나는 광야에서 그의 아버지 시브온의 나귀를 칠 때에 온천을 발견하였고
36:25 아나의 아들은 디손이요 아나의 딸은 오홀리바마며
36:26 디손의 아들은 헴단과 에스반과 이드란과 그란이요
36:27 에셀의 아들은 빌한과 사아완과 아간이요
36:28 디산의 아들은 우스와 아란이라
36:29 호리 족속에게서 나온 족장들은 이러하니 곧 로단 족장, 소발 족장, 시브온 족장, 아나 족장,
36:30 디손 족장, 에셀 족장, 디산 족장이라 이들은 호리 족속에게서 나온 족장들로서 다 세일 땅에서 종족을 따라 족장이 되었더라
36:31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은 이러하니라
36:32 브올의 아들 벨라가 에돔의 왕이 되었으니 그의 도성 이름은 딘하바며
36:33 벨라가 죽고 보스라 사람 세라의 아들 요밥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6:34 요밥이 죽고 데만 땅 사람 후삼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6:35 후삼이 죽고 브닷의 아들 하닷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이 하닷은 모압 들에서 미디안 족속을 쳐부순 자요 그의 도성 이름은 아윗이며
36:36 하닷이 죽고 마스레가 사람 삼라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6:37 삼라가 죽고 큰 강가의 르호봇 사람 사울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6:38 사울이 죽고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6:39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죽고 하닷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그의 도성 이름은 바우며 그의 아내 이름은 므헤다벨이니 메사합의 손녀요 마드렛의 딸이더라
36:40 에서에게서 나온 족장들의 이름은 그들의 종족과 거처와 이름에 따라 기록하면 이러하니 곧 딤나 족장, 알와 족장, 여뎃 족장,
36:41 오홀리바마 족장, 엘라 족장, 비논 족장,
36:42 그나스 족장, 데만 족장, 밉살 족장,
36:43 막디엘 족장, 이람 족장이라 이들은 에돔 사람이 소유한 땅에서 그들의 거처에 따른 모든 족장이며 다 에돔 사람의 조상 에서의 후손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