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도행전》 5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주제는 《사람에게서 난 것은 반드시 무너지고, 하나님께로서 난 것은 무너질 수 없다》입니다. 이 장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관점으로 사물의 현상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많은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참으로 훌륭한 장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이 기독교의 대부흥을 갈망해 왔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대부흥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이 장을 다 공부하고 나면, 그 안의 내용들이 우리로 하여금 깊이 반성하게 만듭니다.
저는 1900년 이후 성령 충만과 성령 강림에 대해 기록된 문헌들을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1904년 영국의 사우스웨일스에 이반 로버츠라는 젊은 광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목회자가 아니었지만 1904년에 큰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교회의 부흥 정도는 ‘맹렬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고, 교회에는 매일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그 2년 동안 나이트클럽이 문을 닫았고, 법률 사무소도 여러 곳이 폐업했습니다. 범죄도 없고 소송도 없었으며, 모두가 교회에 모여 설교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자 이러한 대부흥은 사라졌고, 사람들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으며, 교회에는 다시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기독교 역사에는 이런 신기한 일들이 가득했고, 예전의 저 역시 이를 몹시 부러워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깨달은 것은, 우리가 읽게 될 이 장에 기록된 베드로의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큰 부흥이 일어났으나 결국 흐지부지 끝났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하며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것과 같아서, 우리가 깊이 연구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사우스웨일스의 이 대부흥의 바람은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로 불어갔고, 그곳의 아주사(Azusa)라는 거리에서 1906년에 또 다른 대부흥이 일어나 교회가 사람들로 가득 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사라졌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을 보면서 저는 교회들이 이런 갑작스러운 대부흥을 극도로 갈망하고 있음을 발견했고, 이에 대해 꽤 깊이 연구했습니다. 신학교에서 기독교 대부흥을 배운다면 아마 다들 이 대목을 가르칠 것이고, 매우 긍정적으로 다룰 것입니다. 하지만 제 관점에서는 또 다른 이면이 보였습니다. 사람마다 뜻이 달라 이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저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이렇게 떠들썩하고 요란한 광경을 좋아하지 않으며, 사실 하나님께서도 이런 요란함을 반드시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다들 매우 지혜롭습니다. 사도 바울이 박사 과정을 밟을 때, 그의 지도교수는 가말리엘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시대의 이스라엘에서 가말리엘은 사회과학원 원사에 필적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가말리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었으며, 오늘날로 치면 양전닝(Yang Zhenning) 교수를 스승으로 둔 것과 같았습니다. 가말리엘은 바리새인이었지만, 그가 한 말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오직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사도행전 5:34-39)
이 말씀은 핵심을 찔렀습니다. 가말리엘은 명망 있는 학자였기에 역사를 헛되이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면 가말리엘이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겠으며, 바울이 박사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깊은 의미는 이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는 일이 자기 자신에게서 난 것이라면 반드시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인지, 아니면 사람에게서 난 것인지는 참으로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늘 마음에 두려움이 있고 자주 괴롭습니다. 혹시 내가 하는 일이 사람에게서 난 것일까 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하는 이 일들이 과연 하나님께로서 난 것인지, 사람에게서 난 것인지 자주 반성하며, 결코 베드로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자주 일깨웁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께서 내게 긍휼과 은혜를 베푸셔서 평생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교회의 발전을 이끄는 결정을 내릴 때마다, 이론적으로 돌파해야 할 때마다, 제 마음속으로는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인지 사람에게서 난 것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서 났다면 반드시 무너지겠지만, 하나님께로서 난 것은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형제자매들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들을 데리고 롤러코스터를 타고 싶지 않으며, 나중에 가서야 자신이 제대로 하지 못했음을 깨닫고 결국 헛된 구경거리만 되었거나 공허함만 남는 결과를 맞이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두 가지 결과는 모두 제가 결코 보고 싶지 않은 모습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일이며, 그래서 최근 저는 다시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처음에 101 과정을 작성할 때 저는 3개월 동안 고뇌했고, 이후 201 과정을 작성할 때는 6개월 동안 고뇌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도대체 무엇인지 간절히 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일을 그르치느니 차라리 더 많은 고난을 겪기를 택했습니다. 사람에게서 난 것은 반드시 무너지고, 하나님께로서 난 것은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다는 이 말씀이 제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가말리엘의 논술이었고, 사도 바울 역시 분명히 이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가말리엘이 이 말을 했을 때, 사도 바울은 아마 가말리엘 밑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일은 사람에게서 나고, 어떤 일은 하나님께로서 난다
많은 일이 사람에게서 나고, 또 많은 일이 하나님께로서 납니다. 이는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드러내는 주제, 곧 ‘수많은 사람이 넘어지고 또한 수많은 사람이 흥하게 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하는 일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고, 또한 수많은 사람이 하는 일은 하나님께로서 난 것입니다. 누가는 바울을 따랐고, 바울이라는 사람이 행한 일을 매우 확신했습니다. 바울이 행한 일은 지난 2천 년 동안 대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사도 바울이 쓴 서신들은 모두 《성경》 안에 남아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태복음 16:15-17)
베드로는 참으로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그가 방금 주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는 그가 메시아임을 알고 있는 것을 보시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에게 계시해 주셔서 알게 하신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태복음 16:21-23)
잠시 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임을 당하고 묻히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즉시 돌아서서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순식간에 잊어버리고, 예수님이 죽으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만 했던 것입니다. 신약 《성경》 사복음서의 저자들은 베드로에게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목격한 사실을 그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상한 말만 앞세우기를 좋아했고,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그런 기분을 즐겼습니다.
조금 전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는데, 그 직후에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며, 훗날의 기록들도 과연 이를 증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일이 사람에게서 난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베드로가 행한 것이라 해서 다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든 우리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이든, 사람에게서 난 것도 있고 하나님께로서 난 것도 있으니, 관건은 당신이 행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모든 것을 다 바르게 처리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실 저는 늘 경외하는 마음을 품고 매 걸음을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럽게 나아갑니다. 앞으로 발을 내딛을 때마다 함정에 빠질까 두려워 조심스럽게 시도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나아갈 때 저는 제 뜻으로 여러분을 인도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이를 위해 하나님께 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저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저는 수많은 결정을 내릴 때마다 매사를 거듭 숙고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하나하나 바르게 잡아 나갔습니다.
예를 들어, 큰 소리로 기도하면 확실히 뜨거운 느낌은 들지만, 결국 관리사무소나 심지어 경찰까지 부르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옳지 않음을 발견하고 즉시 조정했습니다. 이와 유사한 일들을 하나하나 바로잡아 나갔습니다. 결코 하나님께 “제가 어떤 일을 하려 하오니,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막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막아 주실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막으실 것 같았으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때 이미 막으셨을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기도하지 마십시오. 깊이 생각할 줄 알아야 하며, 지각(悟性)이 통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일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고, 얼마나 많은 일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일까요?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일이 다 하나님께로서 났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일단 하나님께 묻기 시작할 때는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상태인 경우가 많습니다. 발람이 하나님께 가도 되느냐고 물었을 때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막아도 소용없음을 아셨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온통 금은보화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발람은 멸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막아 주실 것이라 기대하지 마십시오. 어떤 결정을 내렸다면 그냥 그대로 행하십시오. 저는 그저 행운을 빌어줄 뿐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밖에서 방탕하게 행하다가 임신을 하고 나서 저를 찾아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알지 못하며, 하나님의 뜻을 대신 집행해 줄 수도 없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은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많은 일에 대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훗날 베드로가 행했던 수많은 일도 결국에는 흐지부지 식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서 난 것은 하나님에 의해 무너질 것이요, 하나님께로서 난 것은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하나님께로서 난 것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삼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사도행전 5:1-8)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은 하나님께로서 난 것일까요? 이 일은 어딘가 기괴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헌금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정말 그렇게 연연해하실까요? 우리 가운데도 하나님을 속인 사람이 적지 않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관원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사도행전 5:9-10)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 매우 이상하다고 느꼈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자주 일깨웁니다. 만약 제가 누군가에게 왜 성령을 속이느냐고 문책했는데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면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다행히 베드로 시대에는 법률이 온전하지 않아 사람이 죽어도 그냥 묻으면 그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이 과연 이런 하나님이십니까? 여러분만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저 역시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속인 적이 있지만, 우리 하나님은 대단히 너그러우신 분이라 이런 얼마 안 되는 돈에 전혀 연연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집을 팔아 돈을 교회로 가져오게 했고, 다 함께 교회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이 부부가 돈의 일부를 감춘 것을 알았는지 궁금해했고, 성령의 계시였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께서 과연 이런 것을 계시하시겠습니까? 이것이 사탄의 계시인지 하나님의 영의 계시인지는 아무도 명확히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만난 어떤 새신자들은, 자기네 교회가 헌금을 걷어 교회를 세우는 데 쓰지 않고 다 같이 먹고 마시는 데 썼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입니까? 저 역시 단정할 수는 없지만, 훗날의 역사는 이것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아님을 증명했습니다. 사람에게서 난 것은 반드시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집을 팔아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한솥밥을 먹던 일은 결국 무너졌습니다. 먹는 일로 인해 수많은 문제가 생겨났고,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를 치셨으며, 결국 교회는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예전 교회도 집을 팔아 유무상통하다가 결국 다 흩어지고 목사는 붙잡혀 20년 형을 선고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께로서 난 것입니까? 사람에게서 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실 것이요,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라면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제가 처음 주님을 믿고 《성경》을 읽을 때 이 대목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중에야 비로소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모든 물건을 통용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으며, 돈을 가져다가 먹는 것은 결코 양육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고, 오직 성령의 권능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있으며,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끊임없이 빚어져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으로 변화되는 데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에 치중하다 보면 수많은 문제가 생겨나고, 많은 사람이 누가 더 많이 먹고 적게 먹는지, 분배를 많이 받았는지 적게 받았는지를 두고 끊임없이 다투게 됩니다. 만약 이런 방식이 유익했다면 예수님께서 진작에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의 여지를 남겨둡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죽었을까요? 사람에게서 난 것이며,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곧 사탄입니다. 사탄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를 좋아하며, 심지어 우리와 함께 사탄을 치자고 외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팬데믹 기간에 어떤 사람들이 길에 쓰러져 급사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라오마(마귀 세력)가 한 짓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는 사람을 미혹하는 자가 곧 사탄임을 알아야 하며, 교회가 일어나려면 반드시 지각(悟性)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득해야 하고, 사탄의 거짓말을 단호히 거절해야 합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것인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것(유무상통)은 결코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그런 논리가 전혀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라면 모세 시대에 이미 유무상통을 행했어야 합니다. 이것은 베드로 자신의 발명품이었고, 사람에게서 난 것이었습니다. 결국 나중에 가서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사람에게서 난 것은 반드시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제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덧붙일까 봐 늘 두려워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은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으며, 더하든 빼든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화인사명신학(華人命定神學)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논술함에 있어 가장 체계적이고 확고한 프레임워크를 갖춘 논술입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도행전 5:11)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갑자기 쓰러져 죽었으니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이런 교회에 계속 갈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이런 교회가 있을까요? 우리 가운데도 그런 공포스러운 교회에서 나온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화인사명교회에 오셨다면, 여러분은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시면 되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 정상적인 일을 하고, 정상적으로 식사하십시오.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크게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만약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라면 우리 모두가 두려워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사도행전 5:13)
나머지 사람들은 감히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흉측한 덧니가 돋아났거나 얼굴에 털이 나고 머리에 뿔이라도 돋았단 말입니까? 베드로는 지각으로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일을 행했고, 그 배후에는 분명 사람의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곧 사탄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수많은 교주급 인물들이 있습니다. 과거 어떤 도사는 빈 항아리에서 뱀이 나오게 하고 멀리 떨어진 물건을 끌어당기는 초능력을 부려, 수많은 사람이 그를 찾아가 점을 치고 운명을 바꾸려 했습니다. 영계의 실재는 매우 분명하며, 사람이 영계를 모른다면 그것은 무지한 것입니다.
온 교회가 두려워한 것, 이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아니다
나머지 사람들이 감히 그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귀신이라도 나올 듯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서 여러분은 저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저는 여러분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여러분과 함께 바른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반인류적이지도 않고 반사회적이지도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수많은 사람에게 축복이 되기를 바라며, 이 땅에 하나님의 복을 가져와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 모두 정상적인 사람이 됩시다. 여러분은 저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 얼굴에는 털도 없고 머리에는 뿔도 없습니다. 흉측한 이빨은커녕 덧니조차 없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은 일을 베드로가 적잖게 행했음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온 교회가 두려움에 떤 것,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로서 난 것입니까?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아진 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것인가?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사도행전 5:14)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욱더 많아진 것이 과연 하나님께로서 난 것일까요? 이 문제는 깊이 생각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어디를 가나 수천수만 명에 달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는 겨우 몇 사람만 남았습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실 때 이를 목격한 사람은 500명 정도였고,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한 사람은 고작 120명에 불과했습니다. 예전에 저는 예수님을 대신해 분개하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이 이것밖에 안 남았는가?’ 하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 저는 5만 명, 10만 명, 20만 명, 심지어 80만 명이 모이는 대형 교회를 무척 부러워했습니다. 사람이 많을수록 좋은 줄 알았지만, 나중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 교회들에 직접 가보니 실상은 다단계 판매를 하거나, 보험을 팔거나, 사업을 하거나, 심지어 중매를 서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남녀가 혼기가 차면 원치 않아도 억지로 사람을 엮어주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는 밤에 꿈을 꾸었는데 하나님께서 모 자매가 모 형제에게 시집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저는 참 기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구에게 시집갈지는 자기가 꿈을 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누구와 누구는 천생연분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들은 그런 걸 어떻게 알았단 말입니까? 그래서 저는 결심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아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종 목표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교회를 세우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주님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드릴 수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입니다. 나이의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15~16세의 나이에도 하나님을 극진히 사랑합니다. 요셉 같은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입니다. 반면 나이가 지긋하여 겨우 애굽에서 나왔으나 결국 광야에서 죽고 만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아져 겉보기에는 교회의 성도가 매우 많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결코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5만 명이 모이는 대형 교회에서도 우리 교회 성도들처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을 몇 명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교회를 짓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오직 보배만을 원하며, 하나님께 속한 보배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겠다’고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교회의 머릿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한 사람이 결신하고 내일 열 사람이 결신하여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식으로, 마치 입장권을 나눠주듯 전도합니다.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많아져 수많은 남녀가 믿었지만, 사람에게서 난 것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사도 바울 시대에 이르러 바울은 많은 연보를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로 갔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이미 무너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팔아야 할 집과 밭은 다 팔았고, 먹을 것도 다 먹어버렸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무릎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기도만 하다가 결국 극심한 가난에 빠졌습니다. 사도 바울이 거액의 연보를 가지고 예루살렘에 갔을 때, 그는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몹시 증오했습니다. 그가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를 썼기 때문이며,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이 무리는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했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극도로 빈곤했습니다. 베드로가 수많은 ‘식충이’들을 모아놓았는데, 이제 그 밑천이 다 드러난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난 것들이 어찌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일만은 분명히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어 모두가 나음을 얻은 역사였습니다!
다 나음을 얻은 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다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사도행전 5:16)
베드로가 행한 수많은 일 가운데 어떤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고 어떤 것은 자기 자신에게서 났으니, 이것이 인간의 솔직한 자화상입니다. 역사적으로 아주사 대부흥이든 사우스웨일스 대부흥이든, 그 안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도 가득했지만 동시에 사람의 생각 또한 가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비극입니다. 그러나 제가 형제자매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 교회 안에는 결코 사람에게서 난 것이 없기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지난 수년 동안 우리는 우리 안의 악습들을 하나하나 쳐서 복종시키며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깨달은 것은 이것이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새로운 차원의 훈련이 계속해서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육신을 처리하고 사람의 생각을 다루는 면에서 우리 사역자들은 아직 많이 부족하며, 이를 생각하면 제 마음은 진정으로 괴롭습니다.
며칠 전에도 우리 사역 리더들과 함께, 사역의 반장들이 훈련생들의 문제를 어떻게 가르치고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가 아직 턱없이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안주할 자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신이 승리하는 교회에 속해 있고, 간증문을 훌륭하게 썼으며, 형제자매들이 다 나음을 얻었다고 해서 만족하십니까?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마귀를 단번에 제압하는 것을 자랑거리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것으로는 아직 한참 멉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가야 하며, 지각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득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 부분이 일부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 속한 역사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 역시 몇 가지는 바르게 행했으므로 우리는 그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사도행전 5:18-20)
하나님의 뜻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게 하셔서, 육에 속한 모든 썩어질 것을 벗어버리고 온전함으로 힘써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회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핍박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이는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셨지만, 세상은 까닭 없이 하나님을 미워하고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우리가 이 길을 걷기로 결단할 때 마음이 불안하고 요동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적인 마귀 사탄과 맞서 싸우기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각으로 어떤 것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인지를 명확히 분별해야 합니다.
역사에서 한 가지 교훈을 배우다
우리는 반드시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무엇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더 이상 아주사 대부흥이나 사우스웨일스 대부흥을 맹목적으로 좇지 마십시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발을 땅에 딛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루며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온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근대 교회 역사에서도 표적과 기사가 한때 맹렬하게 일어났지만, 왜 지금은 다 사라졌습니까? 사람들의 지각이 통달하지 못했고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베드로가 당시 추구했던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스스로 천하제일이라고 여겼지만, 사실상 수많은 육적인 요소를 섞어 넣으면서도 스스로는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저와 함께 지각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득 채우고 역사에서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나중에 보니 사도 바울은 대중운동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군중 집회를 마치신 후 사람들을 다 돌려보내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소위 대부흥이라는 것을 좇지 말고, 사도 바울처럼 발을 땅에 딛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며 우리 안의 육에 속한 악행을 처리하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육의 악행이 너무나 많습니다. 당신이 이를 처리하고자 한다면 제가 돕겠지만, 처리하기를 거부한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쓰레기가 될 수밖에 없고 육신을 따르며 극도로 이기적이고 자신만을 위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계속 그렇게 살아간다면 저는 그저 당신에게 행운을 빌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 길을 걷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와, 요란하게 일어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소위 부흥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 요란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命定)을 가진 자는 차근차근 내실을 다지며 한 걸음씩 성장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여러분이 추구하는 것은 어쩌면 단숨에 상장하여 유니콘 기업이 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은 한 걸음 한 걸음 견고하게 성장하여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저는 겉만 번지르르한 헛된 것을 참으로 싫어합니다. 순식간에 세워졌다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추진하는 모든 사역과 일은 어떤 프로젝트든, 어떤 분야든 차곡차곡 쌓아가는 과정이 있습니다. 조금씩 성장하고 조금씩 축적해 나갑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진행 중에 잘못된 것을 발견하면 즉시 뜯어고칩니다. 우리는 모두 역사에서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화인사명신학은 생각의 패러다임에 혁신적인 전환을 가져다줍니다. 수많은 교회가 1만 명, 수십만 명, 수백만 명이라는 숫자를 좇을 때, 우리는 한두 사람, 혹은 십여 명을 온전케 세우는 데 집중합니다. 한 사람도 제대로 세우지 못하면서 어떻게 수만 명을 바르게 세울 수 있겠습니까? 영적인 안경을 쓰고 교회를 바라보았을 때 가득 찬 무리가 온통 영적으로 변질된 이들이라면, 그것은 베드로가 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발을 땅에 딛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더 이상 뜬구름 잡는 허황된 것을 좇지 말아야 합니다. 대중운동을 벌이지 말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뜻,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제 평생의 유일한 추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걷는 이 길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훌륭한 학생이 되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훌륭한 직원이 되려면 성실히 일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목회자가 되어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는 일 역시 몹시 고된 일입니다. 너무 힘들어 입이 딱 벌어지고 때로는 눈물이 쏟아질 지경입니다. 형제자매들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볼 때면 제 마음은 찢어지듯 아픕니다. 비록 입으로는 행운을 빈다고 말할지라도, 마음으로는 그들을 향한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시기를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무엇을 사랑하든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대가를 치르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너무나 이기적이고, 자신만을 너무 사랑하며, 사람의 생각을 지나치게 따르느라 하나님을 위해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면서 정작 하나님만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가 결코 되지 맙시다.
제 믿음 안에서 저는 여전히 믿음을 선택합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자신 안의 육에 속한 악습을 쳐서 복종시키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끊임없이 회복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제 마음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저의 소망은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나서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실제로 온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제가 구하고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
이제 우리 하나님께 박수를 올려드립시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그분의 진리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셔서 《사도행전》을 밝히 깨닫게 하셨고, 진정한 부흥이란 발을 땅에 딛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만족시켜 드리는 부흥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도행전》 5장을 이렇게 강해한 사람은 역사상 제가 처음이거나, 어쩌면 두 번째나 세 번째일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계시해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 가운데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