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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지혜와 우매함과 오만함 시리즈 (2) -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느니라

2026-06-28 988 智慧愚昧与狂妄系列

《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지혜와 우매함, 그리고 오만함 시리즈의 두 번째 설교를 이어가겠습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우매한 자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느니라.” 사람이 사는 문제를 꿰뚫어 보면 도를 깨달은 고수가 됩니다. 도를 깨달은 고수가 되면 살아가는 것이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살아가는 것이 아주 쉬워집니다. 문제는 사람이 과연 고수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도를 깨달은 고수는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많은 사람은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야 사람이 살다 보면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걸까요? 그러므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일찍 알면 온갖 우여곡절을 겪을 필요도 없고, 험한 길을 헤맬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이 언젠가 죽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의 끝이며, 이를 알고 난 후에야 어떻게 살아갈지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저는 매일 ‘내가 내일 죽는다면 후회가 남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후회를 남기지 말고 잘 살아야 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의 후회는 이렇습니다. “아이고, 난 평생 비행기도 못 타봤네”, “아이고, 난 평생 기차도 못 타봤네.” 그런 사람의 소망은 정말 수준이 낮습니다. 그래서 저도 가끔 잊어버리곤 합니다. 어떨 때는 도를 깨달은 사람이 되었다가, 어떨 때는 도가 없는 사람이 되고, 다시 도를 깨달았다가 또 도가 없어지곤 합니다.

눈앞의 사소한 일만 보면 도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아,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보통 저는 동역자들과 함께 갑니다. “자, 관 있는 곳으로 가서 관 속에 누워 있는 사람을 봅시다. 그의 사랑도, 그의 미움도, 그가 그토록 신경 쓰던 모든 것도 푸른 하늘 속으로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 여러분은 저의 행동 방식을 이해하셔야지,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암에 걸렸다고 해 봅시다. 물론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지는 않아서 진짜 암인지는 모르겠지만, 증상은 다 있었습니다. 저는 병원에 가지도 않고 치료받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은 분명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게는 ‘의사가 고칠 수 있다’는 식의 논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의사가 고치는 경우도 있겠지만, 저는 그런 일에 크게 연연하지 않습니다. 젊었을 때도 살고 싶지 않았는데, 나이가 들었다고 살고 싶겠습니까? 저 역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제게는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고 “목사님, 죽으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이 예수님께 “주님, 죽으시면 안 됩니다”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실 것입니다. 사람의 논리 체계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논리 체계에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고난을 겪게 됩니다. 나중에 보니 관 속에 누워 있는 사람을 저는 보고 있는데, 그는 저를 보지 못했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하는 감회가 가득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안배가 참으로 오묘합니다. 제가 그 병을 앓았을 때, 한 친구도 똑같은 병에 걸렸습니다. 제 증상과 그의 증상이 완전히 같았습니다. 그는 검사를 받으러 가서 비인두암 판정을 받고, 그 많은 돈을 쓰며 치료를 받았습니다. 9개월 후, 그는 관 속에 들어갔고 저는 관 밖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저의 행동 방식을 여러분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저를 이해해 주기를 기대하지 않지만, 오해하지만 않으시면 됩니다. 남의 방식을 함부로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그냥 의사에게 진료를 받으십시오. “그 목사님이 그렇게 가르쳤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렇게 가르칠 수 없습니다! 제가 가르쳐 드릴 수 있는 것은 지혜자의 마음이 초상집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음이 모든 사람의 끝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제게는 또 하나의 논리가 있습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 고통을 다 겪지 않고 죽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쉽게 놓아주겠습니까? 저는 이 사실을 명확히 압니다. 머리로도 알고 마음으로도 어떻게 된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류 역사의 궤적을 돌아봅시다. 폼페이라는 도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폼페이는 오늘날의 상하이와 같았고, 상하이가 아니라 해도 적어도 선전이나 광저우, 못해도 톈진 정도는 되는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대단히 번영했습니다. 1,900여 년 전 로마 제국 시절, 폼페이는 매우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훗날 사람들이 발굴 작업을 했는데, 그 과정은 참으로 끔찍했습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있습니다. 화산이 폭발했을 때, 이 도시에 주어진 시간은 단 4분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살고 싶다면 헬리콥터를 잘 준비해 두십시오. 화산재가 쏟아져 내릴 때 헬리콥터를 타고 도망치십시오. 화산재는 시속 700킬로미터로 쏟아지고 헬기는 시속 400킬로미터이니, 그렇게 계산하면 몇 분은 더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발굴된 유해들은 화산재에 완전히 뒤덮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손에 돈뭉치를 꼭 쥐고 있었고, 금은보화와 값비싼 보물들을 쥐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었는데, 어쨌든 다 값나가는 물건들이었습니다.

시속 700킬로미터의 속도는 고속열차보다 빠릅니다. 순식간에 덮쳐왔습니다. 폼페이는 순식간에 화산재 아래 묻혔고, 도시 안의 사람 중 단 한 명도 탈출하지 못했습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순식간에 마침표가 찍힌다는 것입니다. 몇 분 만에 섭씨 700도의 고온으로 타올랐고, 700도의 용암이 덮쳤으니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우리 인류 역사에는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또 죽인 사건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 시절에는 미친 듯이 사람을 학살했습니다. 폼페이의 화산재 아래서 죽은 사람들은 차라리 고통을 덜 겪었으니 나은 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있을 때 투자하고, 재테크를 하고, 자금을 모으고, 돈을 벌던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비참합니다.

중국의 탕산 대지진, 동남아 쓰나미, 동일본 대지진을 보십시오. 인간은 너무나 연약하여 언제 누구의 차례가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니, 매사에 그렇게 심각해하고 얽매이며 아등바등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온종일 아등바등하는 것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의 끝입니다.

이 한마디를 마음에 새기십시오. 죽음은 모든 사람의 끝이며,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태도가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을 결정합니다. 여러분은 지혜롭게 살든지, 아니면 지혜 없이 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암에 걸린 어떤 사람은 “난 살아야 해, 난 치료받아야 해”라고 합니다. 제가 치료받으라고 했더니, 9개월 후에 관 속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그에게 몇 마디 건넸습니다. 여러분, 들으시고 저를 나무라지는 마십시오. 저는 가끔 농담 섞인 말을 하곤 합니다. “이 사람아, 자네는 관 속에 있고 나는 관 밖에 있네.” 물론 언젠가 저 역시 관 속에 눕게 될 것이고, 어쩌면 관조차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감회가 깊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는 치료를 구했고 나는 하나님을 구했네.” 이 사람이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영원 속에서 영광스러운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님을 믿은 그날부터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저는 제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길 원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 고비 한 고비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때도 그랬습니다. 저 역시 죽을 뻔했습니다. 죽었다면 여기서 설교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께 말씀드리지만 저는 병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 고칠 수 있다면 그것이 전염병이겠습니까? 병원도 고치지 못하고, 저 역시 병원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집에서 기도했습니다. 매일 기도했습니다. 저는 죽는다는 것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참 기막힌 표현이 있는데, 사람이 죽는 것을 ‘숨이 끊어졌다(嗝屁, 방귀 뀌고 트림하듯 꼴까닥 죽었다)’라고 합니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누가 죽었다는 말을 못 하고 “꼴까닥했대, 꼴까닥했대”라고 말합니다. 제가 기도를 시작하자 하루에 수백 번, 아니 거의 천 번 가까이 방귀가 나오고, 트림이 멈추지 않고 계속 나왔습니다.

제가 다시 살아났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래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고 싶었는데, 그게 훨씬 더 좋은데! 어째서 다시 살아났을까?” 저는 참 의아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고 기를 쓰고 치료를 받습니다. 암에 걸렸다가 또 다른 암에 걸리고, 뇌혈관 문제에 심혈관 문제까지 겹치며, 어떨 때는 대장암, 어떨 때는 직장암, 림프암, 간암으로 이어집니다.

나의 소망은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며, 그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제게 “목사님, 죽으시면 안 됩니다”라고 절대 말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할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아끼는 자는 잃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드리는 말씀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목숨을 아끼면 반드시 목숨을 잃게 되며, 그것도 아주 비참하게 잃습니다. 그러나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바치면 반드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육신을 위하는 것은 대단히 악한 것입니다. 이 육체는 반드시 죽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육신을 아끼며 살고자 집착하면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됩니다. 어떤 아흔 살 된 어르신이 계셨는데, 자녀들이 억지로 중환자실로 보내 관을 꽂았습니다. 여러분, 얇은 면봉으로 코를 쑤시기만 해도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십니까? 어르신을 중환자실에 보내 관을 꽂아놓고 한 달 동안 고통을 겪게 하니, 숨을 거둘 때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돌아가셨습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을 때 눈을 부릅뜨고 죽습니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죽기 싫은 사람’입니다! 또 하나 눈을 부릅뜨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프고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의 논리 체계를 모든 분이 다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일찍 죽으나 늦게 죽으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저는 차라리 80세에 죽는 것이 90세에 죽는 것보다 낫다고 봅니다. 80세에는 거동이라도 잘하지만, 90세가 되어 5년 동안 누워 대소변도 가리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엄청난 고통이고 큰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조금 일찍 죽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물론 영생의 소망이 없는 사람은 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가끔 ‘사람들이 왜 이토록 삶에 집착할까?’ 하는 깊은 생각이 듭니다. 죽음이 모든 사람의 끝임을 알면서도 영생의 소망이 없다면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죽어서는 안 되고, 그래서 문제가 생겨 억지로 하루하루 연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많을 것이라 착각하지 마십시오. 많지 않습니다.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목회자도 많지 않습니다.

저는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기를 쓰고 고통을 받으려 하는구나. 병원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고 나와서 간증을 하다니, 도대체 무슨 간증이란 말인가!’ 저는 사람들이 왜 그리 삶에 집착하며 고통을 자처하는지 의아합니다. 영생의 소망이 없으니 육신으로 하루라도 더 살고자 이생에 집착하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목숨을 아끼면 반드시 목숨을 잃되, 온갖 고난 속에서 잃게 됩니다.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보면 반드시 귀신을 불러들이고, 귀신이 와서 사람을 괴롭힙니다. 게다가 저의 논리 안에는 또 다른 논리가 있습니다.

사람의 몸에 병이 많은 만큼 그 사람의 머릿속에 쓰레기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병이 심각할수록 그 사람의 육에 속한 사고 체계가 강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릿속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거리 한복판에 널어놓고 모든 사람의 식탁 위에 올려놓고 보십시오. 그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은 모두 스스로 만들어낸 것들이며, 육에 속한 논리 체계이자 이생에 속한 논리 체계이므로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목회자로 섬기는 일은 참으로 힘듭니다. 매우 힘듭니다. 무엇이 힘든지 아십니까? 세게 꺾어놓으려 하면 이를 드러내며 대적합니다. 그렇다고 살살 대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아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때로는 힘 조절을 잘 못할 때가 있으니 여러분이 저를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저의 지혜가 부족하기에 저 역시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제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여러분의 머릿속 쓰레기를 제거해 주어 고통을 덜 겪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난을 덜 겪는 것이 좋지, 굳이 고난을 자처해야 하겠습니까! 사람의 생각을 바로잡는 데는 결국 성도 여러분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머릿속 쓰레기를 치우고 싶지 않은데 제가 억지로 치우려 하면 피투성이가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머릿속 쓰레기를 치우고자 한다면 그것은 아주 식은죽먹기 같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는데, X-레이를 찍어보면 전부 왼쪽에 치우쳐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제 권면을 들으십시오. 죽음을 마음에 두십시오. 죽음은 모든 사람의 끝이니, 살아가는 일에 너무 아등바등하고 너무 심각해지지 마십시오. 사람이 조금 어수선하고 느슨하게 사는 것이 온종일 아등바등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온종일 아등바등하는 태도를 버리고 머릿속 쓰레기를 치우면 귀신은 쉽게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저의 믿음 안에서, 제가 믿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능력의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 몸에 나타나는 복음임을 압니다. 그것은 눈먼 자가 보고 다리 저는 자가 걷는 복음입니다. 제가 설교를 마치면 어떤 사람들은 도저히 듣지 못합니다. 듣지도 못하면서 굳이 끝까지 듣고는 제게 댓글을 남깁니다. “이 당뇨병이라는 게 원래 꾸물거리고 지저분한 습관이 있어서 그런 거래요”라고 하는데, 그 사람이 당뇨병에 걸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생활 습관은 귀신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미적거리는 습관이 있다면 몸에 반드시 미적거리는 귀신이 있고, 그 귀신이 사람을 괴롭힙니다. 귀신마다 가져오는 질병이 다릅니다. 당뇨병은 미적거리는 습관과 원망을 쌓아두는 습관에서 오기 쉽습니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이론은 매우 훌륭합니다. “노여움은 간을 상하게 하고, 두려움은 콩팥을 상하게 한다(怒傷肝, 恐傷腎).” 사람에게 두려움이 있으면 콩팥을 상하게 하고, 콩팥은 뼈를 주관하므로 뼈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귀신의 역사 법칙은 한의학에서 말하는 것과 매우 잘 들어맞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의 나쁜 습관과 악습을 제거하고 머릿속 쓰레기를 치워야 합니다. 질병은 이러한 현상들로 인해 생겨나며, 그 배후에는 귀신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원망을 쌓아둡니다. 원망을 쌓아둔다는 것은 퉁명스럽게 말하고, 화와 감정을 실어 말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드러내놓고 싸우지는 않으면서 떫은 태도로 비꼬아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온갖 습관이 있는데, 원망을 쌓아두는 것은 툴툴거리고 징징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은 이제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이 죽음이 모든 사람의 끝임을 알게 될 때 삶이 쉬워집니다. 이것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저것도 꿰뚫어 보지 못하면 복잡하지만, 꿰뚫어 보면 단순해지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이 부모나 가족과 지낼 때 그들의 논리 체계는 거스르기 어렵습니다.

결혼을 독촉하거나, 출산을 독촉하거나, 무언가를 자꾸 요구하며 함께 있으면서 사는 일을 점점 더 복잡하고 힘들게 만듭니다. 참으로 고달프게 만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면 문제는 훨씬 줄어듭니다. 남이 나를 욕하면 ‘아, 욕먹을 만했지, 잘 욕했다’ 하고 넘깁니다. 남이 소리를 지르면 ‘소리 잘 질렀네, 속이 좀 풀렸는가? 풀렸구려. 내가 소리를 좀 들었지만 괜찮아, 당신 속만 풀렸다면 됐어’ 하고 넘깁니다. 우리가 화풀이 대상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사람이 살아가는 이 이치를 꿰뚫어 보면 살아가는 지혜가 생기며, 그 지혜는 초상집에 있습니다.

본문

좋은 이름이 아름다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전도서 7:1-4)

기도

하나님, 우리의 마음 문을 열어 주옵소서. 주 예수님,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지혜를 주시고, 죽음이 모든 사람의 끝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가 죽음을 마음에 두게 하시고, 쇠패한 날이 이르기 전에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살아있을 때 이 일을 마음에 두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혜를 주셔서 우매함에서 건져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배경

성경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전도서》입니다. 전도서는 정신을 번쩍 들게 합니다. 전도서는 수많은 전도자와 목회자가 가장 강해하기 꺼리는 성경 중 하나입니다. 세상적인 논리 체계와 하나님께 속한 논리 체계 사이의 전면적인 충돌, 매우 강렬한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전도서는 솔로몬이 썼습니다. 아브라함 이후 천 년이 지나서야 솔로몬이 전도서를 기록했지만, 순서를 다시 매긴다면 전도서가 맨 앞에 와야 합니다. ‘헛되고 헛되다’는 이 허무를 깨달아야만 비로소 아브라함이 사명을 추구하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솔로몬이 글로 기록했을 뿐, 사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시대, 노아 시대, 아담과 하와 시대부터 이미 사람의 마음에 이 법칙을 심어 두셨습니다. 우리 중에 장례식에 한 번 가보았거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초상집에 가서 그 현장을 몇 번 직접 느껴보십시오. 느낌이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한번은 40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 함께 식사한 적이 있습니다. 식사 도중 전화가 걸려왔는데, 동창 중 한 명이 중환자실에 들어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중환자실에 들어갔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서둘러 달려갔습니다.

병원에 도착하니 면회가 되지 않아 중환자실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위암이었습니다. 3일 전에 수술을 받았고 이틀째까지는 괜찮았는데, 사흘째 되던 날 위 수술 부위 봉합이 잘못되었는지 터져버려 위액이 복강 전체로 흘러나왔다는 것입니다.

돼지를 잡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배를 가르면 대장과 위 속에 있던 기름지고 끈적한 온갖 오물이 배 안에 가득 쏟아져 나와 고통에 비명을 지르게 됩니다. 그를 보고 난 다음 날, 저는 장례식장으로 갔습니다. 그는 관 속에 누워 숨져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에 참으로 깊은 감회가 들었습니다.

솔로몬은 수많은 일을 보았습니다. 솔로몬은 노년이 되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대략 60세 무렵이었습니다. 체력 소모가 심했기 때문에 60세 무렵에는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전도서를 쓸 때는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이때 그는 자신의 평생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수많은 남성이 솔로몬의 삶을 부러워하지만, 솔로몬 자신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고백이 나왔습니다. 솔로몬이 기록한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다”였습니다.

수많은 아내를 둔 것도 헛되고, 그 많은 궁궐을 지은 것도 헛되며, 평생 이룬 수많은 위대한 일도 헛되고 헛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니 헛되고 헛될 뿐이었습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1년이 남았다면 365일이고, 10년이 남았다면 3,650일입니다.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시간은 참 빠르게 흘렀습니다. 10년 전 트럼프가 처음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때가 엊그제 같지 않습니까? 10년이 남았다고 해도 눈 깜짝할 사이입니다. 솔로몬 역시 ‘내게 10년도 남지 않았다. 어찌 그렇게 많이 남았겠는가? 10년만 있어도 좋겠으나 실상은 몇 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전도서를 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돌아보며 지혜가 가득한 하나의 법칙을 결론으로 이끌어냈습니다. 곧 사람이 죽음을 마음에 두어야 자신의 날을 계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사람이 일생 동안 무엇을 가졌든 가지지 못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죽어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찬 일생이었다면 엄지를 치켜세우며 찬사를 보낼 것입니다.

하지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온통 얽매임과 괴로움과 몸부림으로 가득했다면 그것은 얽매인 삶, 몸부림친 삶, 곤고하고 수고로운 일생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제게 “목사님은 참 잘 사시는 것처럼 보입니다”라고 물으신다면, 당연합니다. 여러분이 제 안의 기쁨을 빼앗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빼앗을 수 없습니다. 제가 물질적으로는 여러분에게 손해를 볼 수 있어도, 기쁨에 있어서는 제 것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비록 저 역시 화가 나고 괴로울 때가 있지만,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면 죽음은 모든 사람의 끝입니다. 솔로몬처럼 살날이 몇 년 남지 않았다면 사소한 일에 얽매여 무엇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제게 묻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돌아가시면 화인 사명 신학은 어떻게 됩니까?” 저와는 상관없습니다. “목사님이 돌아가신 후 교회가 문을 닫으면 어떡합니까?” 닫으면 닫는 것이지, 그것 역시 저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일으키시면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일생을 요약한 최고의 명언은 “죽음은 모든 사람의 끝이며,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입니다. 잠깐이라도 잊어버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례식장에 가서 직접 보십시오. 그러므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습니다. 저는 제가 도를 깨달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지혜’라고 짓는다고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을 지혜라 지었어도 죽음을 마음에 두어야 비로소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죽은 사람을 많이 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저는 수많은 죽음을 보았는데, 참으로 할 말이 많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있었는데, 곧 죽을 사람이 무슨 돈에 그리 집착하는지 모릅니다. 그때 이후로 저는 헌금할 자격이 있어야 헌금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암에 걸려 죽어가던 사람이 있었는데, 암세포가 콜리플라워처럼 거대하게 자라났고 그 안에서 벌레가 기어 나왔으며, 흘러나오는 진물은 황산 같아서 닿는 곳마다 피부가 썩어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더럽고 끔찍한 병입니까! 그 부위가 여성의 은밀한 곳에서 시작하여 위쪽 배 쪽으로 번져갔습니다.

제가 그 자매를 위해 기도하자 그 혹이 시들기 시작하더니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절반으로 줄어들었을 때 제가 말했습니다. “헌금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곧 병이 나을 것입니다. 당신 내면의 암과 같은 이기심과 악한 본성을 처리해야 합니다.” 그 자매도 자기가 나아가고 있음을 알았지만 “아니요, 목사님, 저는 교회를 떠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토요일에 그렇게 말하기에 떠나고 싶으면 떠나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나을 줄 알았던 것입니다. 절반이나 줄어들었으니 조금만 더 가면 완전히 없어질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다음 날 아침 5시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침 8시에 걱정이 되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5시에 숨을 거두었다고 했습니다.

살날이 몇 시간 남지도 않았는데 왜 굳이 그렇게 고집을 부렸는지 안타까웠지만, 그것 역시 사람의 분복입니다. 솔로몬도 이런 일을 무수히 보았습니다. 사람은 재물 때문에 죽고 새는 먹이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솔로몬은 시므이의 우매함, 아도니야의 우매함, 요압의 우매함을 직접 보았고, 그들은 모두 솔로몬의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재판을 담당했고 사형 선고 서명도 솔로몬이 직접 했습니다.

몇 년 전 윈난성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건달이 부녀자를 성폭행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수많은 가라오케와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며 패거리를 거느렸습니다. 훗날 그가 또다시 성폭행을 저질러 조사를 해보니, 그는 이미 여러 해 전에 사형 선고를 받아 죽었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다시 살아나 돌아다니고 있었을까요?

조사해 보니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온갖 악행을 저질렀을 때, 경찰이던 부모가 대단한 수완을 발휘하여 그를 몰래 빼돌렸던 것입니다. 빠져나와서는 또다시 악행을 저지르고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솔로몬도 틀림없이 이와 같은 재판을 수없이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죽음을 마음에 둘 줄 모르기에 결국 우매한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옵니다. 우매한 자는 평생 살아가는 일만 생각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며 이생의 논리 체계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생의 논리 체계에 머물지 않고 영원의 논리 체계 속에 있다면, 이런저런 일에 연연하겠습니까? 더는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체면을 몹시 따지는데, 체면을 관 속에 가지고 들어갈 수 있습니까? 체면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솔로몬의 결론은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생의 논리 체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전도서 7:1-4)

이것을 정리한 후 솔로몬은 두 번째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매한 자들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전도서 7:5-6)

지혜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죽음을 마음에 둡니다. 그러나 우매한 자는 죽음을 마음에 두지 못하고 조화롭게 살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낫습니다. 우매한 자들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요란하게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 또한 헛된 것입니다.

사람이 삶에만 집착하게 될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솔로몬은 또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는 수많은 갈취와 뇌물 사건을 재판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갈취와 뇌물은 돈을 위해 벌어집니다. 사람이 오직 살기만을 바라고,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면 온갖 해괴한 짓을 저지르게 됩니다. 갈취와 뇌물은 돈 때문입니다. 갈취(탐욕)는 지혜자를 우매하게 만들고 뇌물은 사람의 지혜로운 마음을 망쳐 놓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150세까지 살 수 있는데 60세에 은퇴한다고 해 봅시다. 150세까지 사는데 60세에 은퇴한다면 무엇을 계획해야 하겠습니까? 60세부터 150세까지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150세가 될 때면 명나라가 청나라로 바뀌듯 화폐도 다 바뀌었을 것입니다.

150세까지 남은 90년 동안, 물가 상승률까지 계산하면 도대체 얼마의 돈이 필요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생각을 하면 사람은 눈앞이 캄캄해져 갈취하고 뇌물을 받지 않겠습니까? 솔로몬은 이런 모습을 수없이 보았기에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솔로몬은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서서히 말라 죽어가고, 관을 꽂은 채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쪽 다리가 조금씩 썩어 들어가 허벅지까지 썩고, 나중에는 생식기까지 썩어 들어가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어젯밤에 저는 오리 한 마리가 나오는 꿈을 꾸었습니다. 오리의 몸통 고기는 다 익었는데, 오리 머리는 살아서 꽥꽥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아플까! 목 앞부분만 살아있고 나머지는 다 삶아진 요리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깨어나서 ‘이게 무슨 꿈인가? 죽은 오리지, 산 오리가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제발 고통을 덜 겪으시길 바랍니다. 고통을 덜 겪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스스로 저주를 쌓지 마십시오.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한 채 그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 고통은 참으로 비명을 지를 만큼 끔찍합니다. 저와 함께 암 환자들을 섬겨본 성도들은 그 끔찍한 실상을 다 보았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이제 우리는 뼈를 깎아 독을 제거하듯 머릿속 쓰레기를 치우고 죽음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단순히 죽음만이 아니라, 그 마지막 끝을 마음에 두고 우리 마음속의 찌꺼기를 제거해야 합니다.

사람이 왜 조급해하고 분노할까요? 오래 살려고 하는데 자신의 핵심 이익이 침해당하니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핵심 이익이라는 것도 고작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소한 이익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분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분노한다면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

솔로몬은 또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옛날이 지금보다 나았다”고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예전에는 기억력이 참 좋았는데 지금은 안 좋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만두십시오. 젊었을 때도 기억력이 좋지 않았으면서 늘 옛날 기억력이 좋았다고 착각하니, 갈수록 퇴보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머릿속에 오직 먹고사는 일만 가득하면 반드시 귀신을 부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지혜를 얻으면 반드시 아름다운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이 본문의 배경이며, 솔로몬은 노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젊은 시절 그에게 주어졌던 지혜가 늘 온전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는 늙어서야 비로소 깨닫고 정리한 것입니다.

왕이 되자마자 전도서를 썼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때는 알지 못했고, 지혜가 그저 좋은 것인 줄만 알았습니다. 자신이 지혜를 구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노년에 이르러서야 죽음의 문제를 진정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분명히 깨달아야 삶이 온전해집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죽을 때는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 사람이 죽을 때 고통의 날들도 끝이 납니다. 죽을 때는 억지로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자존심을 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관 속에 누워 있는 사람에게 욕을 한들 그가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습니다.

체면을 깎아내려도 아무 반응이 없으며,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너무나 고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마음인지 제 스스로의 생각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아는 것은, 저는 줄곧 ‘사람의 삶은 고난 그 자체’라는 생각을 품고 살아왔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면 더는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됩니다. 게다가 저는 주님을 믿은 후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는 것이 고통이므로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고 느끼는 것은 첫 단계에 불과합니다.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가 “내가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행했던 일들을 돌아보십시오. 그런 일들이 결코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끝장입니다. 우리 안의 감정과 미움이 일어나고, 선악을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결국 그런 썩어질 것들을 탐하기 때문입니다.

일하면서도 괴로워하고 살아가면서도 고통스러워하며 저주 속에 사는데, 어떻게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이 좋으며, 인생은 헛되고 헛된 것임을 안다면 어찌 발을 땅에 딛고 수고를 덜며 살지 않겠습니까? 어찌 자신의 수고로움 속에서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지혜자의 책망을 들으라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매한 자들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전도서 7:5-6)

사람은 마땅히 남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지식은 다 남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뉴턴의 운동 법칙은 뉴턴이 발견한 것이지, 제게서나 물리 선생님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뉴턴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인플루언서로 활동하든 가게를 운영하든 트래픽을 모으고 마케팅을 하려면 남에게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입니다.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지혜자의 책망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깨닫지 못할 때 고수가 와서 나를 책망해 준다면 저는 너무나 기쁠 것입니다. 지혜자가 나를 책망하는 것은 나를 유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책망의 말을 듣기 싫어하고, 우매한 자의 웃음소리와 노래, 곧 온종일 칭송하고 아부하는 소리만 듣기 좋아하는데 그것은 참으로 치명적인 일입니다. 솔로몬에게 아첨하는 자들이 많았겠습니까, 적었겠습니까? 여러분이 기업의 대표나 최고 책임자가 되어 보았다면 아첨꾼들이 줄을 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매자의 노래와 웃음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아첨에 대해 뼈저리게 깨달았고, 그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지혜자의 책망이었습니다. 그를 책망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가 그릇된 길을 가도 아는 이가 없었고, 결국 스스로 후회하며 전도서를 쓸 때에야 깨달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솔로몬처럼 지혜로운 사람조차 지혜자의 책망을 듣기를 원했는데, 하물며 솔로몬만도 못한 우리이겠습니까? 듣기 좋은 말만 찾지 말고 책망의 말을 귀담아들으십시오. 우리는 책망을 들으면 견디지 못하는데, 우리 안에 우매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을 제대로 하고도 책망을 받는다면 그나마 자격이 있지만, 일을 엉망으로 해놓고 지적을 받으면 기분 나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산 자가 죽음을 마음에 두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언젠가 죽는다면 일생 동안 지혜의 길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죽음을 마음에 둔다면 체면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체면에 집착하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짓입니다. 체면을 건드리면 사람은 미쳐 날뜁니다. 우매함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으니 보면 바로 압니다.

갈취와 뇌물은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버는 짓이다

갈취와 뇌물은 살기 위해 돈을 버는 행위입니다. 왜 돈을 갈취하겠습니까? “내가 사람을 잡았으니 빨리 돈을 받으시오. 그러면 풀어주겠소. 돈을 받지 않으면 풀어주지 않겠소”라고 하는 납치범이 어디 있겠습니까? 보통은 “당장 돈을 부쳐라, 그래야 사람을 풀어준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체계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남을 축복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축복하면서도 상대방에게서 이득을 취하려 하지 않습니다. 갈취와 뇌물은 오직 살기 위한 것입니다. 뇌물을 받는 것도 다 먹고살기 위함이 아닙니까?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뇌물을 받아 무엇하겠습니까? 두 다리를 뻗고 두 눈을 감으면 위안화든 달러든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차라리 노잣돈 종이를 몇 장 태워주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는 늘 잘나가다가 노년에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일의 끝에 추구해야 할 것은 세상을 떠날 때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살아있을 때 죽음을 마음에 두어야 하지만, 그 마지막 결말이 진정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까?

평소에 거울을 보며 우리의 얼굴을 비추어 보십시오. 과연 지혜자의 얼굴인지, 우매자의 얼굴인지 보십시오. 솔로몬은 노년이 되어서야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시작은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고, 자신을 위해 궁전을 짓고, 수백 수천 명의 후궁을 거느리며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그가 평생 겪은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결말이 좋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닙니다. 나쁜 결말은 사람이 과거에 심은 결과입니다. 뇌물을 심고, 갈취를 심고, 선악을 분별하는 마음을 심고, 육신을 따르는 생각을 심었는데 어떻게 결말이 좋을 수 있겠습니까?

조급함과 분노

솔로몬의 결론은 얼마나 훌륭합니까? 마음으로 조급하여 분노하지 마십시오. 분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조급하고 분노하는 사람인지 돌아보십시오. 솔로몬은 조급해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왜 조급해하고 분노합니까? 이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먹고살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생존을 건드리는데 어찌 조급해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겠습니까? 다 먹고사는 문제 때문입니다.

옛날과 지금

지금이 옛날보다 나은지, 옛날이 지금보다 나은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누가 더 낫고 못하냐가 아니라, 그저 먹고사는 데만 매달려 있느냐는 것입니다. 화인 사명 신학에는 ‘작은 일상에 안주하는 삶(小日子)’이라는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자기만의 작은 일상에 안주하여 사는 사람은 반드시 망합니다. 그런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작은 일상이 아무리 안락하다 한들 그 결말이 어떠하겠습니까? “결말이야 어찌 되든 난 그저 하루하루 이렇게 먹고살면 그만이고, 난 지금 충분히 잘살고 있어”라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로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세상 사람들, 육에 속한 자들은 그렇게 작은 일상에 안주하며 살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이 되도다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 (전도서 7:11-12)

결론

저도 다 명쾌하게 설명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열심히 전했지만 제 수준은 여기까지입니다. 저는 성도 여러분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몸에 온갖 문제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아니면서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여러분의 몸에 나타나고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낸 결과와 우리가 추구하는 바가 진정 죽음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까? 사람이 죽은 후에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일에 큰 관심이 없다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육신 안에서의 소망에 머물러 있다면, 세상 사람보다 더욱 불쌍한 자임을 기억하십시오. 지금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으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자신의 날을 계수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진지하게 계획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하십시오. 돌아가셔서 전도서를 여러 번 정독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솔로몬의 시각, 예수 그리스도의 높은 시각에 서서 사람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십시오.

오늘 설교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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