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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예레미야애가 2장 - 여호와께서 이미 작정하신 일을 성취하셨도다

2025-10-19 1,283 耶利米哀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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耶利米哀歌02章-耶和华刑罚耶路撒冷
  • 1 主何竟发怒,使黑云遮蔽锡安城!他将以色列的华美从天扔在地上;在他发怒的日子并不记念自己的脚凳。
  • 2 主吞灭雅各一切的住处,并不顾惜。他发怒倾覆犹大民的保障,使这保障坍倒在地;他辱没这国和其中的首领。
  • 3 他发烈怒,把以色列的角全然砍断,在仇敌面前收回右手。他像火焰四围吞灭,将雅各烧毁。
  • 4 他张弓好像仇敌;他站着举起右手,如同敌人将悦人眼目的,尽行杀戮。在锡安百姓的帐棚上倒出他的忿怒,像火一样。
  • 5 主如仇敌吞灭以色列和锡安的一切宫殿,拆毁百姓的保障;在犹大民中加增悲伤哭号。
  • 6 他强取自己的帐幕,好像是园中的窝棚,毁坏他的聚会之处。耶和华使圣节和安息日在锡安都被忘记,又在怒气的愤恨中藐视君王和祭司。
  • 7 耶和华丢弃自己的祭坛,憎恶自己的圣所,将宫殿的墙垣交付仇敌。他们在耶和华的殿中喧嚷,像在圣会之日一样。
  • 8 耶和华定意拆毁锡安的城墙;他拉了准绳,不将手收回,定要毁灭。他使外郭和城墙都悲哀,一同衰败。
  • 9 锡安的门都陷入地内;主将她的门闩毁坏,折断。她的君王和首领落在没有律法的列国中;她的先知不得见耶和华的异象。
  • 10 锡安城的长老坐在地上默默无声;他们扬起尘土落在头上,腰束麻布;耶路撒冷的处女垂头至地。
  • 11 我眼中流泪,以致失明;我的心肠扰乱,肝胆涂地,都因我众民遭毁灭,又因孩童和吃奶的在城内街上发昏。
  • 12 那时,他们在城内街上发昏,好像受伤的,在母亲的怀里,将要丧命;对母亲说:“谷、酒在哪里呢?”
  • 13 耶路撒冷的民哪,我可用什么向你证明呢?我可用什么与你相比呢?锡安的民哪,我可拿什么和你比较,好安慰你呢?因为你的裂口大如海,谁能医治你呢?
  • 14 你的先知为你见虚假和愚昧的异象,并没有显露你的罪孽,使你被掳的归回;却为你见虚假的默示和使你被赶出本境的缘故。
  • 15 凡过路的都向你拍掌。他们向耶路撒冷城嗤笑,摇头,说:“难道人所称为全美的,称为全地所喜悦的,就是这城吗?”
  • 16 你的仇敌都向你大大张口;他们嗤笑,又切齿说:“我们吞灭她。这真是我们所盼望的日子临到了!我们亲眼看见了!”
  • 17 耶和华成就了他所定的,应验了他古时所命定的。他倾覆了,并不顾惜,使你的仇敌向你夸耀;使你敌人的角也被高举。
  • 18 锡安民的心哀求主。锡安的城墙啊,愿你流泪如河,昼夜不息;愿你眼中的瞳人泪流不止。
  • 19 夜间,每逢交更的时候要起来呼喊,在主面前倾心如水。你的孩童在各市口上受饿发昏;你要为他们的性命向主举手祷告。
  • 20 耶和华啊,求你观看!见你向谁这样行?妇人岂可吃自己所生育手里所摇弄的婴孩吗?祭司和先知岂可在主的圣所中被杀戮吗?
  • 21 少年人和老年人都在街上躺卧;我的处女和壮丁都倒在刀下;你发怒的日子杀死他们。你杀了,并不顾惜。
  • 22 你招聚四围惊吓我的,像在大会的日子招聚人一样。耶和华发怒的日子,无人逃脱,无人存留。我所摇弄所养育的婴孩,仇敌都杀净了。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계속해서 <예레미야애가>를 나누겠습니다. 왜 이 <예레미야애가>를 공부할까요? 지난 수년간 우리가 이 책을 한 번도 나눈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일 시간을 빌려 <예레미야애가>를 끝까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 안에는 성경의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신구약 전체를 다 통독하고 공부하겠다는 꿈이 있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임해 왔습니다.

요즘 우리는 <예레미야애가>를 나누고 있는데, 이번 주에는 2장을 나누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정하신 일을 행하셨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예루살렘이 원수에게 짓밟히고 바벨론의 말발굽에 짓밟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바벨론 기병은 대단히 강력했습니다. 성을 1년 4개월 동안 포위했는데, 이 1년 4개월 동안 성 안에는 양식이 완전히 떨어졌습니다.

양식이 떨어지고 난 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네 아들을 내게 다오, 내가 돼지고기처럼 잡아먹겠다. 내 아들을 네게 줄 테니 내 아들을 잡아먹어라.” 이렇게 될 정도로 비참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프리카 초원의 하이에나나 들개처럼, 사람이 개만도 못한 꼴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바벨론 군대가 성 안으로 들어왔을 때를 보십시오. “성을 지키겠다고 버텼겠다? 다 죽여라!” 하며 수많은 사람을 학살했습니다. 일본군이 난징성에 들어갔을 때나 바벨론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나 거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전쟁이란 이토록 잔혹합니다. 예레미야는 그 자리에서 <예레미야애가> 2장을 썼습니다. 그가 남의 불행을 고소해하며 쓴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날마다 울었습니다. 틈만 나면 울었습니다. 왜 울었을까요?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는 것을 눈앞에서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분노를 맹렬한 진노로 바꾸사 예루살렘에 쏟아부으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이루어졌습니까? 여호와께서 작정하신 저주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참으로 비극적입니다. 그러니 이 책의 이름이 <예레미야애가>가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본래 천재지변이란 없고 오직 인재만 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은 다 인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 인재입니다. 어찌 천재지변이겠습니까? 천재지변이란 곧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지금은 없습니까? 날마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뉴스를 보십시오. 한번은 제가 비행기를 타려고 공항에 있다가 뉴스 화면을 보았습니다. 비행기가 빌딩을 들이받더니, 쾅 하고 잠시 후 또 다른 비행기가 날아왔습니다. 세상에, 비행기 안에 있던 사람들도 죽고 빌딩 안에 있던 사람들도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그 대형 여객기에 항공유가 몇 톤이나 실려 있었겠습니까? 쾅 부딪치더니 잠시 후 그 두 빌딩이 와르르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세상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충격적입니까? 저도 당시 비행기를 타고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탔던 비행기가 9·11 테러 비행기였다면, 저 역시 저 푸른 하늘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얼마나 끔찍하고 참담한 일입니까?

그 사람들은 전날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아서 싱글벙글했을 것입니다. 어제 산 주식이 오늘 20%나 올랐으니까요. 그 금융 중심가 빌딩에는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멀쩡히 잘 지내다가 어째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을까요? 사람은 어디로 갔습니까? 뼈는 어디 있습니까? 다 사라졌습니다. 어디 가서 찾겠습니까? 사라졌습니다. 주식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사람은 쾅 하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란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정말 비참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비참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그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닥쳤을까요? 누가 연출한 것입니까? 테러리스트가 연출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테러리스트는 누가 연출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연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연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에게 임할 때, 우리는 천재지변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다 인재입니다.

그 후 동남아 대쓰나미가 일어났습니다. 세상에, 그때도 마침 제가 비행기를 탈 때였습니다. ‘왜 그렇게 비행기를 자주 타냐’고 하시겠지만, 몇 번 타지도 않았는데 매번 그런 일을 맞닥뜨렸습니다. 공항에서 그 쓰나미 영상을 보는데, 모든 것이 성냥갑처럼 휩쓸려 갔습니다. 그 큰 건물과 공장들이 카메라 렌즈 아래 쓰나미 앞에서는 성냥갑에 불과했습니다. 차들이 이리저리 부딪치며 쓸려 내려갔습니다. 누가 연출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연출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연출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변호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사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야, 이러이러한 분이셔.” 제가 장담하건대, 이런 사건들을 하나하나 보아도 사람들은 그 안에 담긴 영적 원리를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사람이 정신을 차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목숨은 길지 않습니다. 별다른 것도 없이 순식간에 쾅 하고 사라집니다.

동남아 대쓰나미 이후에 또 일본 대쓰나미가 일어났습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바닷가에서 신나게 놀며 즐거워하고 있었는데,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살아 숨 쉬던 사람이 한 덩어리 고깃덩이로 변해 버렸습니다. 탕산 대지진이나 쓰촨성 원촨 대지진 같은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를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억지로 변호하려 들지 마십시오.

이 세상 천하의 일 중에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토록 많은 천재지변과 인재가 일어날까요? 예로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정해 놓으셨습니다. “저 사람은 참 괜찮은 사람인데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라고 말합니까? 당신 눈에 괜찮아 보이는 것입니까? 아니면 스스로 괜찮다고 착각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도 당신을 괜찮게 보시는지 하나님께 여쭈어보십시오.

예레미야와 에스겔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똑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늘 “왜?”라고 묻지만,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이 세상의 논리 체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의 논리 체계 속에 살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우리가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더 많이 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날마다 불치병 판정을 받는 환자들이 나오고, 날마다 숨을 거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의아해합니다. “어쩌다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당신에게 일어난 것이 무엇이 그리 이상합니까? 이상하게 여길 것 없습니다. 사역을 하면서 저는 점차 한 가지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에 든 질병이 심각할수록 그 마음속이 그만큼 더럽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저께 밤에 한 자매님이 장폐색으로 온몸의 고통을 겪고 있어서, 제가 양육을 맡긴 평신도 목회자가 그 자매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늘 하던 말이 응한 것 아닙니까? 사람이 언제 음식을 먹을 수 있을지, 똥을 눌 수 있을지, 오줌을 눌 수 있을지조차 스스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제 사역자가 그녀를 섬기고 있는 모습을 보는데 마음에 긍휼함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들어가서 기도로 섬겨주기 시작했습니다. 제 사역은 언제나 마음과 지각으로 기도하는 것(영적 깨달음의 기도)부터 시작합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2021년에 난소암에 걸렸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걸렸을까요? 남편과 화를 내고 다투다가 걸렸습니다. 여성의 생식기 계통에 생기는 질환은 가정 안에서의 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남편이 밖에서 방탕하게 노니까 집에서 혼자 속을 끓이며 화를 낸 것 아닙니까?” 저는 이런 일이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남편은 밖에서 쾌락을 즐기는데, 아내는 집에서 화를 냅니다. 이 둘 사이에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남편은 시어머니가 낳았고, 당신은 친정어머니가 낳았는데 둘이 무슨 상관입니까? 남편은 밖에서 바람을 피우고, 당신은 집에서 속을 끓이다가 난소암에 걸렸으니,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가 또 물었습니다. “이 가정을 지키겠다고, 아이에게 아빠 엄마가 다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가정을 억지로 유지해 온 것 아닙니까?” 자매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스스로 참 대단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결국 암에 걸린 것입니다. 너무나 ‘위대’해서 암에 걸린 것입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대단히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암에 걸렸으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착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장폐색이 와서 배에 구멍을 뚫고 장의 일부를 잘라냈습니다. 세상에, 그런데 3~4년이 지난 지금 또 재발하여 장폐색이 온 것입니다. 이 자매는 부모님과도, 직장 동료와도, 그 누구와도 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선악을 분별하는(판단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뿐이지만, 이 자매는 날마다 선악과를 광주리째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나 비참합니다. 저는 수많은 중증 환자들을 사역해 보았는데, 다들 가장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몇 년 전 한 자매의 장례식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사역했던 자매였습니다. 결국 유골함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밖에서 쾌락을 좇고, 아내는 집에서 속을 끓이다가 위암에 걸렸습니다.

기도를 받고 위암이 나았는데, 남편이 또 밖에서 방탕하게 행하자 집에서 다시 속을 끓였고, 결국 암이 재발했습니다. 저는 너무나 기이했습니다. 이것이 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남편은 그의 어머니가 낳았고, 당신은 당신의 어머니가 낳아 둘은 본래 남남입니다. 남편도 당신의 소유가 아니고, 당신도 남편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속을 끓입니까?

그녀가 죽은 후 가족들이 묘지를 사 주었습니다. 화장장에 유골을 잠시 안치해 두었을 때 제가 그곳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에 참 신경을 많이 씁니다. 저는 산 사람도 두렵지 않은데, 죽은 사람이 뭐가 두렵겠습니까? 장례식은 기독교식으로 치러졌고, 하관할 때 사회자가 읊는 추모사는 노래처럼 아름다웠습니다. 마치 노래를 부르듯 유창했지만, 듣는 마음은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깨달아 <예레미야애가>를 더 자주 부를 수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면, 종양도 줄어들고 위암도 줄어들며 고통도 훨씬 덜 겪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이 정하신 바를 그대로 이루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정하신 일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내면에 있는 것들도 큰 충격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안에는 뒤흔들려 깨져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장례식에 가기를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장례식에 갈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듭니다. ‘내가 그토록 집착하던 것들이 다 부질없구나’ 하며 내려놓지 못하던 것들을 내려놓게 됩니다.

예전에 자체 교회 건물이 있었을 때, 저는 강단 위에 관을 하나 가져다 놓을 뻔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인생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돈을 위해 살고, 이것을 위해 살고, 저것을 위해 살면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서는 살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바벨론의 말발굽이 예루살렘을 짓밟고 평정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모든 기물이 샅샅이 약탈당한 것 역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전의 금붙이에 정말 관심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 친히 그 성전을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극도로 비참해졌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들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십니까? 몸 이곳저곳이 아프고,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보내시는 경고 신호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신호를 보내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내려놓지 못해도 결국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지금 내려놓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생에 ‘양념’을 좀 더 치셔서 하나님의 진노를 더 맛보게 하실 뿐입니다.

아담과 하와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상하다, 먹지 말라니? 내가 보기엔 먹음직스러운데.” 하와가 나무를 이리저리 살펴보니 참 좋아 보였습니다. 냄새를 맡아보니 고급 명차보다 더 향기로웠습니다. 보기에 참 탐스러웠습니다. 뱀이 “먹으면 지혜로워져서 선악을 분별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니, 너무 좋아 보였습니다.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말씀은 잊어버렸습니다. 보기에 좋고, 향기도 좋고, 맛도 달콤해 보였지만, 먹으면 죽는 것입니다. 하와가 먹었습니다. 하와가 먹고 난 뒤 아담이 쳐다보았습니다. “어라? 여전히 숨을 잘 쉬고 있네? 하나님 말씀은 다 헛소리였군. 먹으면 죽는다더니 입에 거품을 무는 것도 아니고, 눈이 뒤집히는 것도 아니잖아? 먹고 나서 입안 가득 향기가 도니 참 좋네!”

하와가 그 열매를 아담에게 주었습니다. 아담이 보기에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신 거네’ 싶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헛된 생각을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헛된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지금도 많은 순간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아담이 덥석 한 입 베어 물었고, 그것이 오늘날의 ‘애플(Apple)’ 로고처럼 된 것 아닙니까? 애플 로고의 한 입 베어 문 자국을 누가 물었습니까? 아담이 한 입 베어 문 것입니다. 그 결과 누군가는 애플사를 세웠고, 그 회사를 세운 사람은 결국 죽었습니다. 그 한 입 베어 문 사과가 수조 달러짜리 거대 기업을 낳았습니다.

아담이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고, 무려 900년 넘게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까,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를 이루셨습니다. 여러분은 900년이 길게 느껴지겠지만, 하나님께는 900년도 하루와 같습니다. 저는 왜 1,900년이 아니라 900여 년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날 바로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토록 엄중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가인이 문을 열고 나가 보았지만, “내 문앞에 어디 죄가 있어? 안 보이는데? 헛소리야, 헛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헛된 말씀을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결국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그냥 두시겠습니까?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평생을 정신 질환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음의 병, 정신의 병이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가인은 방에 앉아만 있어도 머릿속에서 소리가 울리고 온몸이 덜덜 떨렸습니다. 머릿속에서 소리가 나니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나중에 이 병은 라멕에게로 이어져, 날마다 고통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나서 살아가는 삶 자체가 고통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이 기를 쓰고 높은 곳으로 기어오르다가 결국 정신병에 걸립니다. 바벨탑 꼭대기에는 온통 정신 질환자들뿐입니다. 사람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아벨을 죽였는데 하나님은 왜 가인을 살려두셨을까? 왜 사형에 처하지 않으셨을까?” 그것은 사형보다 훨씬 더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 결과 온 세상 사람들이 죄다 정신병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노아 시대에 이르자 모든 사람이 정신병자였고, 다 라멕처럼 포악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홍수가 임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까, 안 이루어졌습니까? 이루어졌습니다.

“목사님, 좀 듣기 좋은 말씀은 없나요? 이런 설교를 들으니 너무 무섭습니다.” 맞습니다. 두려워하라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않으면 가인이나 라멕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훗날 마침내 아브라함이라는 깨어 있는 사람이 나타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입증해 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로부터 예레미야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았습니다.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그가 정하신 일을 행하셨다”는 말씀의 산증인이 되었는데, 이는 아담과 하와, 노아의 시대와 비견될 만합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이르러 모세가 <신명기>에 기록했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무엇이라고 썼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만국 중에 흩어져 이리저리 내던져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되는 것이 과연 복이기만 한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후손이 되었지만, 결국 만민 가운데 이리저리 내던져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너무나 비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엇이 이런 비극을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저주의 본보기가 되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의 표본으로 만들었습니까? 바로 ‘세상의 논리 체계’입니다. 이 세상의 논리 체계는 너무나 강력합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이 세상의 논리 체계 속에서 맹목적으로 내달렸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본성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며, 날 때부터 육신에 속하고 세상에 속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예레미야가 애가를 쓸 때까지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래?” 여러분도 그런 상황에 처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해하든 못 하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는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깨닫지 못한 것은 누구 탓입니까? 깨닫지 못해 화를 당했으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누가 아담과 하와의 길을 가라고 했습니까? 누가 가인과 라멕의 길을 가라고 했습니까? 누가 그토록 완고하게 세상의 논리 체계를 붙들라고 했습니까? 누가 그렇게 이 세상 삶에만 목숨을 걸고, 육신의 생명만을 그토록 중하게 여기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은 두 가지 길을 정해 두셨습니다. 하나는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지켜 행하지 않는 길입니다. 지켜 행하는 자는 반드시 복을 받고, 지켜 행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나 지켜 행하든 행하지 않든, 그것은 사람 내면의 논리 체계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지극히 합리적이고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왜 망했습니까? 그들 내면에 있는 세상의 논리 체계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예레미야애가>는 저주가 대폭발한 시대였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십시오. 일본이 대만을 점령했을 때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지금은 잊혔습니다. 몽골이 중국을 점령했을 때도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일본이 난징을 점령했을 때도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바벨론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도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하나님, 왜 가만히 보고만 계십니까?”라고 묻겠습니까?

한번은 제 동창이 물었습니다. “질문 하나만 해도 돼?” 그래서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그렇게 사람들을 죽이도록 내버려두시는 거야?” 제가 그런 질문에 당황할 것 같습니까? 열 살에 죽든, 스무 살에 죽든, 쉰 살에 죽든, 백 살에 죽든 사람은 어떻게든 죽습니다. 살해당해 죽든, 의사의 치료를 받다가 죽든, 자연사하든, 쓰나미나 지진으로 죽든 다 똑같습니다. 왜일까요? 저는 이런 일들에 대해 저만의 확고한 영적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대단하게 살아도,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다가 영원히 오명을 남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시대에 나라를 사랑하고, 성전을 지키려 하며, 망국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 했던 것이 무슨 죄입니까? “하나님, 제가 주님의 성전을 지키겠습니다. 성전의 기물들을 빼앗기게 둘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말 그런 것에 관심이 있으실까요?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께 경고합니다. 우리 내면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만 집착한다면 큰일 납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과 일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성전 건물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성전 안의 금붙이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애초부터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오직 사람의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것만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을 지키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경외하지 않고 지키지 않는 길입니다. 당신이 순종하든 불순종하든,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정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분이 정하신 것은 하나도 폐해지지 않습니다. “나는 그냥 내 고집대로 살겠다”고 한다면 그렇게 사십시오. 당신은 결국 “여호와께서 그가 정하신 일을 행하셨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여호와께서 행하신 재앙의 기록이 축복의 기록보다 훨씬 많습니다. 성경 전체를 보아도 참된 순종의 비율은 너무나 적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자신의 성전을 헐어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절기와 제사 제도를 친히 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허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레미야애가>를 읽으며 어떤 결론을 얻어야 하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위험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당신을 위해 애가를 지어 부를 때가 되어서야 “하나님, 내 눈이 눈물의 근원이 되었나이다, 주님 앞에 내 마음을 물 쏟듯 쏟아붓나이다”라고 부르짖지 마십시오. 그때는 너무 비참하고 늦었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작 어떻게 살았어야 했습니까?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수십 년 동안 날마다 외쳤지만 들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무리만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애국심 넘치는 장군들이었고, 예루살렘을 열렬히 사랑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본문 말씀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엎으사 원수가 너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하며 네 대적자들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예레미야애가 2:17)

기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결코 하나님께 “왜 그러시냐”고 묻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은 인재입니다.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우리에게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주셔서, 우리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세상의 논리 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리게 하옵소서. 하나님, ‘산다는 것’의 참된 의미를 명백히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의 평생이 주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나타내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평생이 오직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삶이 되게 하시고, 주님을 더욱 경외하게 하옵소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엄중한 교훈을 얻게 하시고, 주님을 경외함으로 주님의 진노에서 멀어지게 하옵소서. 하나님, 주님의 분노와 맹렬한 진노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오니,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의 논리 체계와 육신의 논리 체계를 완전히 파쇄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세상 앞에 당당히 서서 ‘이 세상은 내 안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선포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이 땅에서 오직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며,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를 살아낼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며, 주께서 약속하신 모든 축복의 말씀이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성취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배경

본문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 왕국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참으로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바벨론은 유다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않고 정복하여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땅에 머물며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는데,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서>입니다.

기회가 닿으면 여러분과 함께 <예레미야서> 전체를 꼭 통독하겠습니다. 바벨론은 시드기야라는 사람을 유다의 왕으로 세워 통치하게 했습니다. 말이 왕이지 사실상 총독에 불과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비교적 관대하여 그 땅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허용했고, 군대를 유지하는 것도 허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드기야는 날마다 유다의 국권 회복과 독립만을 꿈꾸었습니다. 독립을 꾀하는 것, 그것은 일종의 오기였습니다. 시드기야는 휘하의 군대 장관들과 은밀히 모의하더니 결국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세상의 논리 체계로 생각하면 시드기야의 행동이 매우 위대하고 애국적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시드기야가 하나님을 몰랐을까요? 그는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알았기에 그는 종종 예레미야를 불러 국가 정책을 상의하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절대로 반역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지만, 시드기야는 결국 반역을 꾀했습니다. 바벨론 왕은 매우 강력한 군주였습니다. 군대를 파견해 예루살렘성을 겹겹이 물샐틈없이 포위했고, 약 1년 반 만에 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성이 함락된 후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도 그 성 안에 있었습니다. 바벨론 왕 역시 예레미야를 알고 있었고, 그가 바벨론 편에 선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어찌 바벨론 왕의 편이었겠습니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편이었습니다. 바벨론 왕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논리 체계로 가득 찬 유다 백성을 심판하시기 위해 바벨론 왕을 도구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속한 자를 심판하시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대적을 섬기게 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결국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에게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반역을 꾀한 자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후 십수 년의 세월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유다 백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땅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반역을 꾀했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국권 회복은 당시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유다가 멸망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뜻이었지만, 백성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사람 안의 세상적 논리 체계가 너무나 완고했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저에게는 한 가지 확고한 원칙이 있습니다. 세상 누구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하나님께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섭섭하게 해도 하나님을 거역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유다 땅에서는 시드기야 왕부터 군대 장관들에 이르기까지 이를 깨달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러실까?” 하며 다들 어리둥절해했습니다. “우리는 성전을 지켜야 해,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도우실 거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면 무조건 도우셔야 합니까? 입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서 마음은 온통 세상에 가 있었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가차 없이 멸망시키셨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예레미야에게 바벨론으로 갈 것인지, 이곳에 남을 것인지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땅에 남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바벨론 왕에게 반역한 자들이 예레미야를 억지로 끌고 애굽의 다바네스라는 곳으로 도망쳤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그들은 듣기 싫어했습니다. 자기들만의 확고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드기야 이후에 그다랴라는 사람이 유다의 총독으로 세워졌으나, 유다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또다시 암살당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돕고 있다고 착각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도움을 조금도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나는 그런 것을 원치 않는다”고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야애가>를 읽으며 제가 얻은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만약 사역자 중에 제 설교를 듣는 분이 계시다면 귀담아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속으로 늘 ‘내가 하나님을 도와드려야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이 될 수 있으니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쓴 이 애가는 참으로 처절합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사람들의 내면이 온통 세상의 논리 체계로 가득 차 있어서 도무지 깨닫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세상의 논리 체계 속에 사는 것만큼 가증하고 무서운 일은 없습니다. 세상의 논리 체계는 겉보기에 너무나 그럴듯하고 당연해 보입니다. ‘애국’조차도 그렇습니다. 당신이 진정 사랑하는 나라는 어느 나라입니까?

한번은 중러 국경에 있는 헤이샤쯔섬(볼쇼이우수리스키섬)에 간 적이 있습니다. 사실 그 국경 너머의 땅은 본래 중국 땅이었습니다. 러시아 쪽에는 자기 민족의 영웅이라며 동상을 세워놓았는데, 중국 쪽에서 보면 그 인물은 침략자에 불과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한 민족에게는 위대한 영웅이지만, 다른 민족에게는 살인자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논리 체계입니다.

‘한 장수의 공이 이루어지기까지 만 명의 뼈가 마른다’는 말처럼,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됩니까? 이처럼 세상의 논리 체계는 지극히 부패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천재지변과 인재가 일어나는 근본 원인도 바로 이 세상의 논리 체계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서에서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라고 선포했습니다. 얼마나 예리하고 강력한 말씀입니까?

이것이 바로 본문의 배경입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말발굽이 예루살렘을 짓밟았을 때 애가를 지었습니다. 2장 초반에 그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구름으로 시온 딸을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들을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으며 노하사 딸 유다의 견고한 성채들을 허물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그 지도자들을 욕되게 하셨도다.”

성벽과 요새는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성벽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벽이 사람을 지켜줄 수 있습니까? 성벽은 지켜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왜 성벽을 쌓았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쌓은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점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성벽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중심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주께서는 유다 백성의 견고한 성채를 허물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지도자들을 욕되게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모든 것이 ‘세상의 논리 체계’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들과 유다의 왕은 모든 소망을 성벽에 두었습니다. 성벽이 워낙 견고했기에 바벨론 군대와 1년 4개월이나 맞서 버틸 수 있었습니다.

1년 4개월을 버틴 것도 대단하지만, 결국 그 성벽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어떻게 성벽을 뚫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유다 백성의 보장을 친히 허무셨기 때문입니다. 성벽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벽 안에 갇혀 있던 유다 백성의 눈에는 성벽이 너무나 믿음직해 보였습니다. “이 성벽이 얼마나 든든한가? 이 성벽 덕분에 바벨론과 1년 넘게 버틴 것 아닌가? 성벽이 없었으면 진작 끝장났을 것이다.”

그 포위 기간 동안 예레미야는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간곡히 권면했습니다. “항복하십시오. 항복해야 목숨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항복하고 싶어도 군대 장관들이 반대하니 감히 항복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치 2차 대전 당시 일본 천황은 항복하고 싶어 했으나 군부 각료들이 완강히 반대하여 비밀리에 항복 조서를 작성해야 했던 상황과 같습니다.

시드기야는 세상의 정치 체계, 즉 세상적 논리 체계에 꽁꽁 묶여 있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논리 체계를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특히 정치가의 자리에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든 낮은 자리에 있든, 세상의 정치 논리 체계는 사람을 옭아매어 꼼짝달싹 못 하게 만듭니다.

한번 그 체계 속으로 들어가면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싶어도 세상의 논리 체계에 갇혀 있으니 너무나 힘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영(마귀)이 “나는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고 호언장담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려면, 자기 안의 세상적인 것들을 철저히 무너뜨려야만 합니다.

당신의 능력은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결코 사람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말씀을 보십시오.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그의 오른손을 뒤로 거두어들이시고 불붙는 꽃이 사방으로 삼킴 같이 야곱을 불사르셨도다 (예레미야애가 2:3)

여기서 ‘뿔’은 사람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능력을 숭상합니다. 여러분도 능력을 숭상하지 않습니까? “저 사람 정말 대단한 능력이 있네, 참 대단해!”라고 감탄합니다. 최고 부자의 이름을 들으면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봅니다. “1억 위안(수백억 원) 정도는 소소한 목표지”라고 말하는 부자도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천문학적인 액수이지만, 그 사람에게는 ‘작은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 작은 목표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능력을 숭배하지만, 능력은 결코 사람을 보호하지 못합니다. 당시 유다 땅에도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들과 무예가 출중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의지했기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는 반드시 저주를 받습니다. 에서의 능력은 야곱보다 훨씬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세상의 논리 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결국 에서의 족속 전체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에서는 멧돼지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사냥꾼이었습니다. 두 다리로 엄청나게 잘 달렸지만, 능력을 숭상하던 그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논리 체계입니다.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생각도 그런 것 아닙니까? 겉으로는 매우 합리적으로 들립니다. 실제로 인공지능(AI)이나 자율주행 기술을 보며 “정말 대단하다”고 감탄합니다. 대단한 기술인 것은 맞지만, 인간의 능력을 숭상하는 순간 저주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 저주가 언제 임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세상만사는 물레방아 돌듯 변합니다. 인생사가 어떻게 뒤바뀔지 알 수 없으나, 때가 이르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성전, 예배, 절기, 제사장은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주께서 그의 초막을 동산처럼 헐어 버리시며 그의 절기를 폐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그가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전의 성벽들을 원수의 손에 넘기셨으매 그들이 여호와의 전에서 떠들기를 절기의 날과 같이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딸 시온의 성벽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무너뜨리는 일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벽과 옹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그들이 함께 쇠하였도다 (예레미야애가 2:6-8)

참으로 처참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직전까지도 예배와 집회는 정상적으로 드려졌습니다. 사람들은 성전에 모여 기도하고, 안식일을 지켰으며, 제사장들은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 제단과 성소와 궁전은 모두 하나님의 멸시를 받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백성들이 세상의 논리 체계를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성전, 예배, 절기, 제사는 정치적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정치적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그 체제 안에서 움직이려면 그 체제의 규칙을 따라야 했고, 그 규칙은 오직 기득권의 정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가짜였습니다. 종교가 정치와 결탁하는 순간 극도로 위험해집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행하지 못하고, 행하는 것은 떳떳이 말하지 못하는 모순에 빠집니다. 예루살렘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너무나 비참하게도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들을 헐어버리셨습니다.

수년 전 저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성전을 허무신다”는 제목으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왜 성전을 허무실까요? 건물로서의 성전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전 안에서 사람들이 부리는 간교한 술수가 문제이며, 사람의 뇌 속에 가득 찬 논리 체계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내면에 세상의 논리 체계를 가득 담고 있으면서 겉으로 경건한 척 형식을 갖춘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암투 역시 심각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정치 싸움이 일어났고, 세상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좌지우지하려 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정치 싸움을 ‘용호상박의 혈투’처럼 묘사했습니다. 교회를 세운 장본인이 세상의 논리 체계를 가지고 교회를 운영한다면,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아니겠습니까?

훗날 그 목사님은 코로나에 걸렸다가 금방 회복되었습니다. 당시 저도 코로나를 앓고 있었기에 내심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그분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음이 참으로 착잡했습니다. 사실 저 역시 코로나를 겪으면서 제 안의 세상적인 논리 체계를 많이 깨뜨리고 내려놓았습니다. 무너뜨려야 합니다. 내면의 세상적 체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모임이나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시며, 오직 주님의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이제 우리의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대 가운데 우리를 반드시 흥왕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레미야애가>가 있으니, 이 애가를 자주 묵상하여 우리의 영혼을 깨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의의 길을 걸어갑시다. 주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늘 ‘내가 아직 온전히 바로잡히지 못했다’는 자각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의 세상적 논리 체계를 큰 것부터 치워내도 중간 크기의 것이 남아 있고, 중간 것을 치워도 작은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논리 체계는 참으로 끈질기고 악합니다.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지만, 치우지 않으면 치명적인 영적 화를 부르게 됩니다.

선지자의 환상은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환상은 사람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14절에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죄악을 드러내지 않는 선지자의 환상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거짓 환상은 사람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왜일까요? 선지자들이 기득권 체제 안에서 환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왕이 보고 싶어 하는 환상에 맞추어 선지자들이 환상을 지어냈던 것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한번은 제가 어떤 형제와 함께 매우 비참한 형편에 처한 사람을 사역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함께 간 형제는 영적 분별이 부족한 상태에서 눈을 감고 환상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예수님이 당신 등 뒤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제가 보기에 기가 막혔습니다. 제 눈에는 예수님이 아니라 귀신이 그 사람 뒤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청년은 그 말을 듣더니 눈을 희번덕거리며 어이없다는 듯 흘겨보았습니다. 정작 그 형제는 눈을 감은 채 계속 환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제발 그만두어라’ 싶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 사람 뒤에 계셨다면 어찌 삶이 그토록 엉망진창으로 망가졌겠습니까? 사람들은 권력자나 사람의 구미에 맞추어 환상 보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것을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권력의 어용 선지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어용 선지자의 환상은 헛될 뿐입니다. 사람의 비위를 맞추느라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레미야는 어떠했습니까? 예레미야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진흙탕 속에 처박혀도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을 가감 없이 선포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환상은 다 허탄한 소리에 불과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헛된 환상에 미혹되지 마십시오. 환상을 본다는 것에 매달리지 마십시오. 그런 것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차라리 우리의 죄악을 낱낱이 드러내는 편이 낫습니다. 영적 실력이 있다면 자신의 죄악을 명명백백히 들추어내어, 하나님 앞에 물을 쏟아붓듯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보존하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이 네 뒤에 서 계신다, 네 곁에 계신다”는 식의 헛된 환상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우리의 죄를 직시하고 회개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습니까? 얼마나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고, 재물을 의지하며, 성벽과 병마와 무기를 의지하고, 헛된 종교적 의식에 기대어 살아왔습니까? 그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상의 논리 체계를 버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이상과 묵시는 반드시 사람의 죄악을 들추어내어 회개하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게 “목사님은 어쩌다 코로나에 걸리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제가 무슨 성인의 표상이라도 됩니까? 저는 죄인의 표본일 뿐입니다. 저 역시 회개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진리의 화신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전하는 ‘화인 사명 신학’은 진리의 화신입니까? 아닙니다. 그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꺼내어 선포하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겸손히 통회하며 가야 할 길은 아직 멉니다. 화인 사명 신학의 영적 유산을 이어받으려면 제 말을 명심하십시오. “아, 이것도 아직 부족하구나, 저것도 아직 바로잡지 못했구나” 하며 하나하나 바로잡아가야 합니다. “이것도 잘했고 저것도 잘했다”며 자만하지 마십시오. 이미 잘된 것은 그대로 두고,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세상의 찌꺼기와 죄악이 들어차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벽을 의지하고, 무기를 의지하고,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고, 종교적 행위를 의지하며, 헛된 환상을 좇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죄악은 보지 못합니다. 자신의 죄를 볼 수 있었다면 어찌 <예레미야애가>를 부르는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레미야애가>를 통해 우리의 문제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통회해야 합니다.

결론: 주님 앞에서 겸손히 통회하라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예레미야애가 2:18-19)

이것이 여러분과 저 자신에게 드리는 최고의 권면입니다. 우리는 감히 스스로 진리를 다 가졌다고 자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정상을 향해 끊임없이 올라가는 순례자일 뿐입니다. 결코 자만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는 자에게는 반드시 재앙이 닥칩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에게는 화가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생에 <예레미야애가>를 부르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정하신 바를 반드시 행하십니다.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받고, 진리를 버리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저주가 대폭발하는 시대입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성전을 허물고 계시는 때입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교회를 허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다 안다고 자만할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진리를 좇아야 합니다.

지금 바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시다. 마음에 경외함을 품으십시오. 우리가 유다 백성처럼 행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역시 허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앞에 나아가 우리 안의 세상적인 것들을 다 제하여 주시기를 구합시다. 이 세상이 우리 안에서 아무런 권세도 갖지 못하게 합시다. 순식간에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의 긍휼과 기억하심을 입는 자가 됩시다.

십일조를 드리고 구제와 헌금을 하는 것을 대단한 일로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돈이 필요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중심입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을 온전히 올려드립시다. 의지하려거든 오직 우리 하나님만을 의지합시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거듭 경고하셨고, 주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뜻을 분명히 보이셨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성벽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될 때까지 지체하지 마십시오.

지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제사가 아닙니다. 소나 양의 제물이 아니라 우리의 상한 심령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 반드시 하나님의 경고를 겪게 됩니다. 예레미야가 거듭 외쳤던 경고를 들었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질 때까지 미루지 마십시오.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70년 동안 포로로 끌려가게 하신 후에야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70년이면 그 세대의 사람들은 이미 다 죽고 난 뒤입니다.

오늘 설교는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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