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Q1:老师,什么样的认罪是神所喜悦的?是会蒙福的?我在认罪很久后,才看见结果,这是哪里出现问题了?
我得告诉大家,有些教会就一直教导人“认罪认罪认罪”,他们以为认完罪,鬼就走了。其实不是这么回事。认完了罪,鬼也还没走。尤其是在《新约》,当我们认罪以后,鬼还住在我们身上。怎么办?就需要把牠赶出去。其实认罪是一回事儿,真正的谨守遵行是另外一回事。很多人认罪,那是真认,但是没有谨守遵行,不谨守遵行就是罪。
Q2:孩子才十六岁就吸烟,这是鬼的事儿吗?
我看又有人也有鬼,我们常常觉得是鬼,其实一个属肉体的人,就是跟鬼非常合一的人;一个属肉体的人,天然的就是与神为敌。整个信主的过程,实际上是治死肉体的过程;一个人成圣的过程,是治死肉体的过程。他爸爸吸烟也很厉害。他爸爸吸烟是小事儿,吸就吸了,也没什么了不起。其实比吸烟更严重的,就是一个人属肉体。
Q3:老师,我一进清真的饭店,就想他们的信仰,比如他们信奉的东西,就有些害怕,老师通一通我的悟性。
这个吃东西的事情,吃完了以后第二天、第三天去了哪儿?去了茅厕。所以耶稣怎么说呢?入口的不能污秽人,出口的才能。我们这些被宗教的灵辖制的人,就常常会有这个很奇怪的现象,就很在乎吃什么喝什么。
其实耶稣早就说过,入口的不能污秽人,出口的从心里发出来的恶念,才能污秽人。如果要对付的话,咱就好好对付我们里面的那些恶念。新加坡的小贩中心那些摊位,拜啥的都有,你就放心的吃吧,至于他有没有拜过,就别管了。也不知道解决了你的困惑没有?吃东西不重要。
Q4:每次读到《耶利米书》三十九章,耶路撒冷被攻破,四月初九,这也是我的生日,就不由自主的想那是个倒霉的日子,老师怎么去除这个想法?
四月初九,是人家犹太历的四月初九,跟你那个农历的四月初九,和阳历的四月初九,都搭不上边儿。人就喜欢整这些乌七八糟的,你多读点神的话行不行?读神的话是读四月初九吗?别整这些事,这些东西毫无用处。
还有人整什么呢?家族、原生家庭的咒诅。其实原生家庭那个咒诅没啥用。耶稣是不是大卫的后裔?是大卫的后裔。那大卫都犯罪,大卫的家有没有咒诅?有。那后来耶稣咋就没受影响呢?别整这些字句的东西,字句叫人死,精意叫人活。那最关键的问题在哪里?最关键的问题叫做尽心、尽性、尽力、爱主你的神。关键点不在四月初九,关键点在尽心尽性尽力爱主你的神,那才是解决问题的关键。
Q5:我怎么为孩子吸烟祷告?
我这个好像还有点困扰,我想告诉大家,有一些人总想通过“我祷告,他改变”,好像这不太合乎《圣经》。是我们祷告我们改变。在《圣经》里头我真的没有找到过一个例子,也许我无知,不知道有这样的事儿。
但是我真的在《圣经》里头找到的都是我们自己对付自己。像这个孩子的问题,从小就任性,那我们要不要管教?不要等到十六岁了才想起来管教。如果他吸烟能吸成像邓小平那样,你觉得怎么样?可能你还挺开心的,因为邓小平也吸烟,毛泽东也吸烟。
我想,其实在孩子身上很多很重要的事儿我们可以做,你比如说塑造孩子的性格,教导孩子、引导孩子走正路,这些东西我们不做,为了一个吸烟整天在那祷告,我就觉得好像不大有用。
Q6:老师,有福的人少受苦难。您指的是疾病一类算为苦难吗?人太在乎自己总是识别善恶,在乎自己里面难受,是不是也是苦难?
人心里面难受,你说我不在乎。你不在乎它也难受。疾病肯定是个苦难,只要是难受、不舒服都是很辛苦的,它都是苦难。我也得告诉大家,疾病肯定跟鬼有关系;疾病也肯定跟咒诅有关系;疾病肯定跟违背神的话有关系。当然我这么一说,很多人就不爽,那就慢慢琢磨。
Q7:老师,刚认识的朋友,如何考察这个人心里是否刚硬?
那很容易,如何考察?你看他坚持自己的观点,坚持到什么程度?尤其是有一些东西像爱面子,为了面子而坚持,那是很糟糕的。如果跟你争论,你自己看一看是不是那么回事?有的人非常固执和任性,那就是刚硬。
Q8:老师,常常出现负面意念和图像,祷告赶鬼还是没有彻底清除,怎么办?
这个事不是这么干的,最重要的是啥?最重要的就是读神的话。人无知,整天对付这些负面的意念,是没有什么太大意义的,包括画面也没有什么太大意义。多专心读神的话,专心了解把事整对了是啥样。
我知道很多宗教味十足的人,他们不做正经事儿,整天就是祈祷传道、胡思乱想,最后整出很多奇奇怪怪的事情来。其实悟性也不通,整天搞这些东西,还比不上做点正经事儿。然后好好地读神的话,系统地读神的话,那些东西就忽略掉就好了。像常常出现这种有负面的意念和图像,都是闲得没事的时候才这样。
Q9:老师,我以前领受的是约伯是个义人,神觉得约伯很有信心,神试探人,其实是神觉得约伯是义人,约伯也觉得自己很敬畏神,所以招来鬼吗?
你读的不明白,你好好读、读完它,读到后来约伯自己悔改。约伯以前是风闻有神,现在是亲眼看见神。你看看约伯跟神争论的那些东西,都是自以为是的东西,所以最后就招鬼了。其实约伯真的觉得自己不错。
Q10:老师好,借着刚才孩子吸烟的问题,您说我们祷告改变,不是改变孩子是改变自己,能再说一下吗?不太理解。
你能改变谁呢?很多人祷告改变他老公,改变了吗?我看没有。很多人祷告改变孩子,改变了吗?还有很多儿媳妇想改变她老婆婆,很多老婆婆也想改变她儿媳妇,改变了吗?没有。
这人最奇怪的就是想改变世界;后来改变不了世界,想改变一个国家;改变不了一个国家,就想改变一个城市;后来到老了,发现什么也改不了,只能改变自己。
我想,人为什么要改变别人,这是一个很奇怪的现象。有的教会整一群祷告团队,祷告啥呢?祷告神改变他们的牧师。这东西是不是很邪性?按我说,这背后其实还真的是一个巫术,透过灵改变另外一个人,这不是巫术,这不是掌控吗?
我们的答疑就到这里,愿神祝福大家!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이어서 시편 32편을 나누겠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나눌 제목은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입니다. 성경에서 저주와 축복은 영원한 두 가지 주제입니다. 신약에는 저주가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어리석은 주장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저주에 대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복음을 잘못 믿고, 복음을 잘못 전한다면 그는 반드시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반드시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고 찾아보십시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축복과 저주는 성경에서 매우 영원한 의미를 지닌 주제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저주와 축복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모든 것을 죽 쑤듯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럼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하면 반드시 축복을 받을 것이고, 지켜 행하지 않으면 반드시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합니다. "선생님, 저는 지켜 행할 수가 없어요." "아, 지켜 행할 수가 없군요." "아이고, 그럼 저는 너무 두려워요." 두려워해야 마땅합니다! 온종일 지켜 행하지 않으면서 두려워하지 않아야겠습니까?
그래서 이번에 시편 32편을 나누는 것은 바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짐"에 대해 전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묘하게도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이 못났다고 생각하면 존재감마저 사라져서 사람이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신이 살아가는 소망과 용기로 삼습니다. 이것이 비극 아닙니까? 하지만 사람이 일단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위험해집니다.
여러분은 본래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본래 죄인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으로 여기지 않으실 뿐입니다. 사실은 여전히 죄인입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면, 이 사람은 복이 있어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하지만 일이 오랫동안 잘 풀리고 형통하다 보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야'라며 목회자에게 따지고 대들며, 영적 리더에게도 말대꾸합니다. 세상에나, 스스로 너무 잘났다고 생각하고, 게다가 옳고 그름만을 고집합니다. 그것이 극악무도한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잊고,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를 의인이라 칭해주셨을 뿐이라는 이 사실을 잊어버릴 때 귀신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고 일이 꼬이게 됩니다.
누가 이런 경험이 가장 많겠습니까? 제가 가장 많습니다. 저 외에도 다윗, 바로 성경의 다윗 왕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항상 관찰하고 배우고 정리해야 결론을 얻고 깨달음이 밝아져, 자신이 죄인임을 온전히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받은 것이 은혜임을 알고, 스스로 괜찮다고 여길 자격이 없음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이제 시편 1편을 쓴 다윗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그가 어떻게 썼습니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복 있는 사람이라." 그가 바로 이 시를 쓴 다윗 왕입니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또 시편 32편을 쓰게 되었는데,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요?
한동안 삶이 안락해져서 그는 전선에 나가 싸울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날들도 평온해졌고, 직접 칼과 창을 들고 전장에서 격전을 벌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경제가 발전하고 백성들의 삶이 크게 개선되자, 자신의 통치 업적이 매우 훌륭하다고 여겼습니다. 큰 모임, 작은 모임을 열면 부하들이 아첨을 해대고, 게다가 스스로도 괜찮다고 느끼며 '주님 감사합니다, 여전히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며 마음이 흐뭇해지기 시작했고, 밑에서는 공덕을 찬양해 주니 스스로 참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곁에는 온통 아첨꾼들이 가득했습니다. 아첨을 받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그리고 무슨 기타 연주자들을 모아놓고는 "다윗 왕이시여, 마이크를 잡고 시편 1편을 노래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곡까지 붙여서 노래를 부르며 "아, 내가 쓴 이 시편은 정말 훌륭하구나" 하며 자신이 정말 잘 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귀신이 찾아왔습니다. 스스로 매우 영광스럽다고 여겨 심지어 자기 이름을 '다윗 영광', '영광의 다윗'이라고 부를 지경이었는데, 결국 귀신이 찾아왔습니다.
다윗은 며칠 전 밤에 술을 한잔 걸치고는 측근 신하 몇 명을 불러 꼬치구이를 시켜놓았습니다. 너 한 잔 나 한 잔 마시며 금세 마오타이주 한 상자를 비우고 맥주 세 상자를 더 가져오게 하여 바비큐 파티를 벌였습니다.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논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그리며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셨습니다. 제가 지금 시편 32편의 배경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침까지 술을 마시며 중간중간 다윗이 쓴 시와 노래도 불렀습니다. 와, 얼마나 유쾌했겠습니까. 인생이 이럴 수 있다니 다 하나님의 은혜라며, 결국 오후까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깨어난 후에는 잠에 취해 멍했습니다. '해는 어디 있지? 어제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동쪽에서 떴는데, 어라, 왜 서쪽에서 해가 보이지?' 사실 해가 거의 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상하게 여기며 비몽사몽간에 눈을 비볐습니다.
그리고 잠옷을 입고 예루살렘 성에서 가장 높은 옥상 테라스에 섰습니다. 당시 가장 높은 테라스는 대략 2층 높이의 옥상이었습니다. 멀리 바라보는데, 얼마나 공교롭습니까? 밧세바라는 젊은 여인이 다윗의 집 근처 안뜰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 정말이지 각도가 너무 완벽했습니다. 여인이 거기서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을 다윗이 보았는데, 상상이 되십니까? 세상에나! 그 목욕하는 몸짓 앞에서 여호와의 율법이 생각났겠습니까? 사라졌습니다. 오직 육체의 반응만 남았습니다. 어제 마신 마오타이주가 꽤 양기를 돋웠는지 몸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를 데려오라 했고, 데려왔습니다. 세상에, 정말로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밧세바는 왜 하필 거기서 목욕을 했을까요? 밧세바라는 이 여인은 남편이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데 욕정이 생기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녀는 다윗이 그 테라스에 서기를 바라며 '아, 언제쯤 내가 여기서 목욕하는 것을 봐줄까?' 하고 바랐던 것입니다. 얼마나 공교롭습니까?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그 결과 다윗의 머릿속은 온통 밧세바가 목욕하던 그 모습으로 가득 찼습니다. 요즘 시대 같았으면 남의 목욕을 엿본 일로 분명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을 것입니다. 결국 그녀를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임신을 해버렸습니다. 단 한 번에 임신이 된 것입니다. 이제 어쩌겠습니까? 자, 우리가 그에게 아이디어를 한번 내어봅시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윗이라는 사람에게 이 순간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이 남아 있었을까요? 그런 게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미 임신해 버린 일을 율법이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가 임신했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국 전선에서 그녀의 남편을 불러들였습니다. 남편이 집에 들어가 그녀와 동침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 태어난 아이는 주님께 감사하게도 우리아, 네 아이가 되었구나' 하며 계산을 아주 잘 세웠습니다.
그런데 우리아는 집에 가지 않고 다윗의 집 문간에 앉아 잠을 잤습니다. 아이고, 다윗은 속이 타들어 갔습니다. '이걸 어쩌나.' 다윗은 어쩔 수 없이 말했습니다. "아, 우리아, 그대는 참으로 충성스럽도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구나." 결국 우리아를 다시 전선으로 돌려보내며, 우리아의 장군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아가 전장에서 전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간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배후에는 귀신의 연출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 1편을 쓸 때는 머릿속으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그 복이 남아 있습니까? 복은 사라졌습니다. 오직 밧세바의 뱃속에 있는 그 사생아 생각뿐이었고, 이 부끄러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만 생각하느라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근심과 시름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은 다윗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궁금해하며 "다윗 왕께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근심하고 계시는구나. 왕이시여, 어찌하여 기쁨이 없으십니까?"라고 묻자, "아, 묻지 마라, 묻지 말고 물러가라, 물러가라" 할 뿐이었습니다. 주야로 우리아를 제거할 흉계만 묵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아가 살해당하고, 밧세바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죽을 때까지의 이 모든 기간 동안 다윗은 극심한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평생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죄를 자백하자니 체면이 서지 않고, 자백하지 않자니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다윗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어디서 지혜로웠을까요?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내가 귀신에게 이렇게 휘둘릴 수는 없다. 나는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 필요하고, 내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 하나님, 제가 주님 앞에 죄를 자백하겠습니다. 주님 앞에 죄를 자백할 뿐만 아니라, 시편 32편을 쓰겠습니다. 저의 이 부끄러운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내 보여주겠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결단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복 있는 것인지 아십니까? 돈이 많은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마음이 활짝 열리고 시원한 것입니다. 마음이 후련한 것, 술을 한잔 걸쳐서 후련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이 너무나 상쾌하고 시원한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을 다시 얻는 것, 이 사람이 바로 복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32편은 다윗이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은 후에 마침내 그 안의 도리를 깨달았음을 말해줍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만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한다 해도 자만과 독선은 당해낼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일단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순간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은 조심해야 합니다. 절대로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스스로 하나님을 아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의인이라고 생각하며,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상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때로는 그것이 진짜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결코 진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주 예수님 덕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한 말씀 중에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는 주님을 믿어가면서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더 믿고 섬기면서도 자신이 죄인이라고 여겼습니다. 더 나아가다 보니 '큰 죄인'이 되었고, 더 시간이 흐르자 결국 '죄인 중에 괴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논리일까요? 사람이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지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질수록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게 되는 법입니다. 바로 그런 이치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욥을 끌어옵니다. 나중에 제가 연구하여 깨달은 것인데, 욥은 당시에 스스로 매우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온종일 '나는 의인이다, 우스 땅에 의인이 하나 있는데 바로 나 욥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엄청나게 그것을 즐겼고, 존재감이 충만했으며, 속으로 스스로가 매우 훌륭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자 사탄이 보고 '어라? 네가 정말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는구나' 하고는 하나님께 가서 참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뜻과 딱 맞는구나, 가서 그를 한번 쳐보아라."
비록 여러분이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할지라도,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욥기를 읽어보십시오. 문맥을 끊어서 읽지 말고, 욥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읽는다면 욥이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진작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욥은 하나님과 논쟁했습니다. 하나님과 논쟁하며 온갖 엉뚱한 말들을 쏟아냈고, 자기가 아주 옳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시자 말문이 막혀버렸습니다. 그들의 대화를 보면 욥이 스스로 꽤 괜찮다고 여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나중에 욥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왜 그랬을까요? 스스로 괜찮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이것은 참으로 치명적인 것입니다.
제가 이전에 알고 지냈던 사람들, 제가 섬겼던 사람들을 보면 저는 압니다. 암에 걸렸으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만약 암에 걸려 치유받기를 원하신다면 방법은 간단합니다. 제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십시오. 더 이상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가 섬겼던 수많은 암 환자들 중에 결국 사망한 사람들은 다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 암 환자들은 이미 가망이 없는데도 여전히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귀신이 찾아와 죽을 때까지 괴롭히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했다면 효과가 꽤 좋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이 의인이었습니까? 그가 어디 의인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의인으로 여겨주셨을 뿐입니다. 다윗이 의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의인으로 여겨주셨을 뿐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의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여겨주셨을 뿐입니다.
주님을 오랫동안 믿고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던 한 분이 마음에 깊은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바로 신명기 28장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101 과정>에서 축복과 저주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신명기 28장의 축복과 저주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는데, 저는 자주 어기니 이러다 저주를 받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하셨고, 십자가에서 무엇을 이루셨단 말입니까?" 이 얼마나 큰 혼란입니까.
이런 혼란은 참으로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그녀는 그것 때문에 혼란스러워하고, 저는 그녀가 하는 혼란 때문에 혼란스러웠습니다. 사실 그녀는 죄인이고 이미 적지 않은 저주를 겪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이런 혼란 속에 빠져 있으니, 얼마나 큰 두려움입니까?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바로 이 얽히고설킨 문제를 풀기 위함이었습니다. 왜일까요?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에 귀신이 사람 안에서 권세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귀신이 사람 안에서 권세를 잡으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은 많은 저주를 겪게 됩니다.
이후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비록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고 신명기 28장을 온전히 지킬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죄인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의인으로 여겨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죄는 어디로 갔습니까? 예수님의 몸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리하여 귀신은 불법이 되었고,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풀어주셨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이 죄인이면 귀신이 합법적으로 여러분을 공격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귀신이 공격하면 여러분은 더 많은 죄를 짓게 되고, 더 많은 죄를 지으면 귀신은 더 강하게 공격하여 평생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이 얽힌 문제를 푸셨습니다. 여러분이 충분히 잘해서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후에 이 은혜를 얻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지켜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지켜 행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은 결코 여러분에게 말씀을 지키지 않아도 될 핑계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에 대해 제가 이렇게 길게 말씀드린 것은, 여러분이 아직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음을 스스로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설령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여긴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자신이 여전히 죄인임을 알아야 하며, 온전함에 이르기 위해 힘써 나아가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재갈과 굴레로 제어해야만 길들여지는 노새나 말처럼 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악인에게는 많은 고통이 따릅니다.
"선생님, 저 괴로워요"라고 하신다면, 악인입니다. "선생님, 저 너무 괴로워요"라고 하신다면, 큰 악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게임을 하고 소설을 읽는 그 열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한다면 혼란스러울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혼란스러울 리가 없습니다. 사람은 소설을 읽거나 게임을 할 때 열정이 솟구칩니다. 여러분, 사람이 일단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면 끝장입니다. 바로 악인이 되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허물의 사함을 받지 못했고 죄악이 가려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성경 본문
이제 시편 32편을 함께 읽겠습니다. 성경을 펴주십시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무겁게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루리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시편 32:1-11)**
기도
하나님, 오늘 우리의 마음눈을 열어주셔서 우리가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 존재인지 보게 하시고, 또한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게 하옵소서. 주님의 이 은혜가 우리 안에서 영광스러운 찬송을 받게 하옵소서.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주님 앞에 죄를 자복하고 회개할 용기를 주옵소서.
주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덮으사 주님의 눈에 의인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사 주님 앞에서 구원을 다시 얻고 기쁨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주님을 의지하여 이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주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그 영광스러운 형상을 살아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배경
이 본문의 배경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길게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이 죄를 범했을 당시에는 참으로 짜릿했을 것입니다. 즐거웠을까요, 안 즐거웠을까요? 즐거웠습니다. 말할 수 없이 즐거웠지요. 그러나 그 뒤에 찾아온 고통은 그 쾌락보다 열 배는 더 괴로웠습니다. 그가 이런 일을 저지른 후 귀신은 그 사람에게 찰싹 달라붙었습니다. 사람은 귀신의 생각대로 한 걸음씩 나아가게 되고, 갈수록 더 괴로워지며 고통은 더욱 깊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고 또 벌어서 사업을 키우고 강하게 만들다가 결국 투신자살합니다. 결말은 감옥에 가거나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제게 영상을 하나 보내주었는데, 지난 얼마 동안 민영 기업가 다섯 명이 투신했다는 통계였습니다. 민영 기업가들이 돈을 벌었는데, 그중에는 우리 모두가 아는 유명 브랜드의 대표도 투신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돈을 벌고 또 벌다 보면 결국 무엇을 얻게 됩니까? 고통을 얻게 됩니다. 왜일까요? 돈을 벌다 보니 어느새 악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리아오(李敖)가 한 말 중에 참 와닿는 말이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 중에 착한 사람은 없으며, 착한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착한 사람이 어떻게 성공하겠습니까? 어려서부터 독하고 나쁜 구석이 없었다면 어떻게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겠습니까? 못된 구석이 있어야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공한 사람의 이면에는 우여곡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악함과 부패함이 숨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형제자매 여러분이 이 논리를 알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다가 결국 뛰어내려 목숨을 끊는 것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요? 상처에 소금을 뿌릴 생각은 없지만, 우리의 마음은 이것이 어찌 된 일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윗도 이런 악행을 저지르고 마음이 너무 괴로웠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뛰어내리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당시 건물은 높지도 않아서 뛰어내려 봤자 다리나 부러질 뿐 다른 일은 못 했을 것입니다. 그의 집은 2층짜리였으니까요.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윗은 지혜로웠습니다. 그는 죄를 자복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쁨을 얻었습니다. 왜일까요? 알고 보니 우리는 본래 죄인이었는데, 이제 죄가 하나 더 늘어난 것뿐입니다. 죄를 하나 더 자백하면 그만이지 대단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의 안목으로 문제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사실 여러분과 저 모두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뿐만 아니라 여러분과 저도 죽어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복 있는 것입니까?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가 복이 있습니다. 왜 복이 있습니까? 죄를 자백했기 때문에 용서받았고, 시인했기 때문에 가려지고 씻겨졌기 때문입니다. 아주 명백하고 단순한 일입니다. 정직한 마음을 가지면 복잡하게 꼬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며 "선생님, 너무 혼란스러워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주 간단한 일인데 혼란스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윗은 이 일을 겪은 후에 시편 32편을 썼는데, 이 경험은 다윗에게 너무나 중요했습니다. 마음속의 그 괴로움은 여러분과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의 고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귀신이 사람을 극심하게 괴롭히는 고통입니다. 귀신이 사람 안에 거하면 사람은 몹시 괴롭습니다.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귀신은 반드시 사람 안에 거합니다. 우리의 허물이 사함받지 못하고 죄악이 가려지지 않았기에 귀신이 합법적으로 우리를 맹렬히 짓밟는 것입니다.
욥이 겪은 그 고난들도 귀신이 괴롭힌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회복되었습니까? 욥이 회개했기 때문에 회복된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어떻게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그 하찮은 자존심을 버리십시오. 그깟 자존심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이 시편을 씀으로써 훗날 우리가 본받을 수 있는 귀한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복 있는 자는 마음이 부드럽다
복 있는 자는 마음이 부드럽습니다. 자세히 관찰해 보십시오. 세상에는 한 가지 현상이 있는데, 제가 오랫동안 연구해 온 것입니다. 바로 마음이 완고한 자는 고통을 많이 겪는다는 사실입니다. 스스로 옳다고 여기고 자신이 고집하는 바만을 확신하는 사람은 많은 고통을 받습니다. 사람이 일생 동안 겪는 고통의 정도는 그의 완고함, 부드럽지 못함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말했습니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이 얼마나 훌륭한 말씀입니까? 사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지는 복 있는 자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지난 세월 동안 사역하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절실히 느꼈습니다. 때로는 누군가 잘못했다는 것을 짚어주며 살짝 조언이라도 건네면 당장 들고일어납니다. 저와 말다툼을 벌이고 멱살이라도 잡을 듯 대듭니다. 사람이 이렇습니다. 이런 사람이 고통을 더 겪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음이 부드러운 것은 매우 위대한 성품입니다. 절대로 자신이 고집하는 것만을 옳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자신이 정한 것만 고집하다가는 패망합니다. 마음이 부드러워 항상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고 여기면 고생을 덜 하게 됩니다.
유덕화가 출연한 홍콩 드라마 중에 <강호>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보신 적 있으십니까? 광둥어로 된 홍콩 작품인데, 저는 영화를 거의 보지 않아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싱가포르의 한 장관이 회의 석상에서 유덕화의 명대사를 광둥어로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그 대사는 이렇습니다. "말해주면 듣지를 않고, 들으면 알아듣지를 못하고, 알면 행하지를 않고, 행하면 틀리게 행한다. 틀렸으면 인정하지를 않고, 인정했으면 고치지를 않고, 고쳤으면 승복하지를 않는다.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광둥어로 들으면 꽤 맛깔스럽지만, 제가 이렇게 번역한 것도 꽤 괜찮지요?
이것이 바로 완고함 아니겠습니까? 엉덩이를 걷어차야 겨우 한 걸음 떼는 꼴입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자면, 완고한 사람은 고생을 배로 겪습니다. 그 고집불통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좋은 성격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성격은 사서 고생하는 것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사람이 억지를 부리며 버틴다고 해서 하나님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복 있는 자는 마음이 부드럽습니다. 마음이 부드러운 것은 줏대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매우 훌륭한 인격입니다.
예전에 제 상사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자친구를 사귀고 아내를 맞이할 때는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을 찾아야지, 절대로 마음이 완고한 사람을 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완고한 사람은 자신도 많은 고통을 겪을 뿐만 아니라 온 가족까지 함께 고통을 겪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가운데 아들을 위해 며느릿감을 열심히 찾고 계신 자매님들이 있다면 잘 분별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이 고생을 덜 겪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져 복 있는 자가 되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 들을 수 있을 때 듣고, 들었으면 깨닫고, 깨달았으면 행하고, 행할 때 그르치지 않게 행하는 것입니다. 잘못했으면 즉시 인정하고, 인정했으면 즉시 고치며, 고집 센 당나귀처럼 속으로 불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집을 부리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결코 말이나 노새처럼 되지 마십시오. 재갈을 물려 잡아당겨야만 움직입니다. 입에 쇠 재갈을 물고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길들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한 말이지 제가 한 말이 아닙니다.
복 있는 자는 하나님을 만날 기회에 하나님께 기도한다
복 있는 자는 주를 만날 기회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복 있는 사람은 마음이 부드럽습니다. 괴롭고 힘이 들 때, 아직 홍수에 휩쓸리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수 있고 우리에게 아직 기도할 자격이 있을 때 속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죄를 자복하고, 여호와께 내 허물을 자백해야 합니다. 고집을 부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가리킬까요? 바로 노아의 방주 이야기입니다. 노아가 호랑이, 늑대, 사자, 코끼리 등 온갖 생물들을 짝지어 방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 줄이 얼마나 길었겠습니까? 당시에도 문명이 꽤 발달하여 현지에서 라이브 방송을 하듯,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일을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노아, 당신 집안에서 뭐 하는 거요?" "홍수가 곧 닥칠 것이니 우리는 방주로 들어갑니다." 홍수가 온다니 사람들은 하늘이 이렇게 가문데 무슨 홍수가 오겠느냐며 아무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후 7일 뒤에 홍수가 났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고 부드럽지 못하자, 하나님께서는 방주의 문을 닫아버리셨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비웃고 있었습니다. "홍수가 어디 있어?" 땅의 사람들에게는 7일간의 목숨이 더 남아 있었을 뿐입니다. 노아는 방주 안에서 음식을 지어먹고 있었습니다. 아직 홍수가 오지 않았을 때 노아의 가족 중 누군가가 어리석게도 "홍수는 무슨, 나 잠깐 나가서 둘러보고 마트 가서 장 좀 보고 올게. 배달시킨 음식이 방주 문 앞에 왔으니 얼른 문 열어야 해"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문이 닫히면 나갈 수도 없고, 밖의 사람은 들어올 수 없으며 안의 사람도 나갈 수 없습니다. 결국 7일 뒤에 콸콸 홍수가 닥쳤고, 밖의 사람들은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이 물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홍수가 닥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께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고 기도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홍수에 휩쓸리기 전에, 아직 하나님을 찾을 기회가 남아 있을 때 속히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지켜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기도하고 회개할 생각을 합니다. 그때는 소용이 없습니다. 정말로 소용없습니다. 여러분을 겁주려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사람들을 섬기면서 이런 완고한 자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고생을 덜 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완고하게 버티다가 문이 닫히고 나면 어디서 주님을 찾겠습니까? "하나님, 문을 열어주소서" 해도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알지 못하노라" 하시면 끝장입니다.
복 있는 자는 하나님 안에 숨는다
시편 32편 7절입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이 말씀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사람이 하나님 안에 있으면 귀신이 틈타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밖에 있으면 귀신이 죽도록 괴롭힙니다. 사람이 왜 하나님 밖에 머물겠습니까? 사람은 하나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은신처이십니다.
다윗은 죄를 짓고 나서 회개한 후 하나님 안에 숨었기에 귀신이 그를 더 이상 해치지 못했습니다. 이 말이 때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쓴 표현은 매우 직설적이므로 깊이 문자적으로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스스로 잔꾀와 음모를 꾸미지 마십시오. 다윗은 음모를 꾸며 우리아를 죽이는 데 성공했고,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려오는 데도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다윗 마음속의 괴로움은 결코 쉽게 해결될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괴로웠습니까?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무겁게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손인 줄만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악한 영들을 보내어 무겁게 짓누르시는 것입니다. 사람 내면의 그 고통은 맛있는 것을 먹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면의 그 고통이 엄습할 때, 우울증을 앓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입니다. 그 고통은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습니다. 이것이 바로 많은 이들이 투신하는 이유이며, 도대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겠습니까?
대기업가들이 직면한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어려움입니다. 장사가 잘될 때는 좋은 직원을 구하기 어렵고, 좋은 직원을 구했더니 이번에는 장사가 안됩니다. 세상에나, 너무 힘든 일입니다. 은행 대출은 갚지 못하는데 날짜가 되면 직원들 월급은 주어야 합니다. 아이고, 너무 힘듭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그들의 괴로움 뒤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데리고 있는 이 고생하는 형제들을, 이 천벌 받을 내가 어쩌자고... 누가 이들을 돌봐줄 것인가?" 하며 그런 걱정까지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 안에 숨는 것이 훨씬 살기 편합니다. 더 이상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짐들은 혼자 감당할 수 없으며, 그 압박감은 정말 버텨낼 수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스스로를 의지하는 그 사람들을 하나님의 손이 무겁게 짓눌렀기에 버티지 못하고 뛰어내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다윗은 지혜로웠습니다. 그의 마음은 부드러웠고, 기도할 수 있을 때 속히 기도하며 주님을 찾았습니다. 회개할 수 있을 때 속히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숨어야 합니다. 바깥은 살 만한 곳이 못 됩니다. 제게 물으신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좋은 곳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귀신이 여러분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인으로 여겨주십니다. 어떻게 그 안에 숨을 수 있습니까?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절대로 그 대사처럼 "말해주면 듣지 않고, 들으면 깨닫지 못하고, 깨달으면 행하지 않고, 행하면 틀리게 하고, 틀렸으면 인정하지 않고, 인정했으면 고치지 않고, 고쳤으면 승복하지 않으며,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나오면 어쩌겠습니까? 그저 하나님의 손에 짓눌려 지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숨는 자이며, 결코 그 밖으로 나오지 않는 자입니다. 그 밖으로 나오면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저는 감당할 길이 없으며, 밖으로 나가면 너무나 비참해집니다.
복 있는 자는 고난을 적게 받는다
성경에서 다윗은 매우 흥미로운 결론을 내렸습니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복 있는 사람은 고통을 적게 받습니다. 여기에는 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사람을 극도로 힘들게 하는 일은 다 좋지 않은 것이며 치명적입니다. 특히 질병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어 본 경험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병에 걸리면 내 몸조차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며 몹시 고통스럽습니다. 저는 질병이 결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환난과 고통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은신처이시며, 반드시 우리를 환난에서 보호해 주십니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따르지만, 하나님 안에 있으면 고난과 고통을 적게 받고, 하나님 밖에 있으면 많은 고통을 겪게 됩니다. 사람이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도 스스로 복이 있다고 여길 것이 아니라, 얼른 자신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면 끝날 일 아닙니까?
어떤 목사님들이 감히 질병이 고난이라고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아, 질병도 사실 고난이 아닙니다"라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사람들의 체면을 세워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뼈빠지게 고생하다가 병에 걸렸는데 그 사람이 목회자이거나 하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거기서 상처에 소금을 뿌리면 그 사람이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는 차라리 자신이 잘못했음을 많이 인정하는 편이 낫습니다.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할수록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온전히 행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그깟 체면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저는 얼굴이 꽤 두꺼워서 체면 따위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잘못했으면 "아,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마음이 부드러워야 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그분을 찾고, 그분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 있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안에 숨어야지 함부로 밖으로 나와 서성거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반드시 고난을 적게 받게 될 것입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는 평생 겪어야 할 고생을 참 많이 면했습니다. 하나님을 몰랐다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겠습니까? 복입니다. 저는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제 어머니는 점쟁이 찾아가 사주 보는 것을 좋아하셔서 자식들 사주를 보곤 하셨습니다. 어떤 점쟁이를 찾아가든 "이 집 아이는 참 복이 많다"고 했습니다. 제 이름을 '유복(劉有福)'이라 지었어야 했을 정도입니다. 마음도 완고하지 않아 얼마나 많은 고생을 면했는지 모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도 고생을 덜 겪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이것이 저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이 너무 많은 고생을 겪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게 많은 고생을 겪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고난을 적게 받습니다. 고난을 적게 겪습니다. 만약 욥이 진작 겸손하여 자만하지 않고 스스로를 의인이라 여기지 않았다면 사탄도 그를 지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만히 있었으면 그런 고난을 겪을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이치입니다. 늘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입었음을 기억한다면 마음의 고통도 줄어들 것이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필요는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복 있는 자에게 하나님은 갈 길을 가르쳐 보이신다
복 있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행할 길을 지시해 주십니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보시면 "어라, 이건 틀렸다, 이러면 안 된다"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이 완고해지면 끝장입니다. "네가 틀렸어"라고 하면 "저리 꺼져" 하고 대듭니다. 그래서 우리도 더 이상 말을 못 할 때가 많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절당하신 적은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경고하지 않으셨겠습니까? 하셨습니다. 다윗이 도취되어 잊어버렸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조심해라, 요즘 조심해야 한다, 눈을 함부로 굴리지 마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어이 쳐다보았고, 보고 나서는 하나님의 훈계의 말씀을 기억이나 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가 행할 마땅한 길을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곳에 이를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알려주십니다.
여러분께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 번 저를 일깨우시며 마땅히 갈 길을 알려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마땅히 갈 길이란 매번 결단이 필요한 절박한 것이었습니다. 돈을 벌어서 교회를 부양하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그것은 바른 길이가 아니다. 나는 너희가 나를 부양하는 것을 원치 않으며, 네가 뼈빠지게 돈을 벌어 교회를 먹여 살리기를 바라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기도하며 축사 사역을 하다가 하마터면 함정에 빠질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것만이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초창기의 일이었을 뿐입니다. 평생 그 길만 갈 수는 없습니다. 계속 기도하고 귀신만 쫓아내며 지각(영적 깨달음)의 성장을 이루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막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속히 방향을 수정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갈 길을 지시해 주셨습니다. 최근에도 우리는 한 걸음씩 나아가며 오늘에 이르렀고,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마땅히 갈 길을 가르쳐 주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 복 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부드러워, 말이나 노새처럼 재갈을 물려야만 순종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의 진리를 찾으며, 이 영적 진리의 높은 산을 끊임없이 오릅니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주목하시며 훈계하십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저는 제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라고 느낍니다. 늘 자신이 틀렸을 수 있음을 자각하고, 하나님 앞에 자주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니 참으로 좋습니다!
여러분도 복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만, 불현듯 정욕에 사로잡혀 범죄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의 정욕과 다윗의 정욕이 형태는 다를지라도, 그 정욕과 그로 인해 형성된 옛 생명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비록 이 정욕의 구덩이에 빠졌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오늘 체면을 구겼다고 해서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과거에 우리는 죄인이었고, 오늘 또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드럽기만 하다면,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결코 이 세상의 것들에 얽매여 비참한 지경에 이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 있는 자로 세워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