命定神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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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서 이미 작정하신 일을 성취하셨도다

2025-10-19 2,027 耶利米哀歌系列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계속해서 《예레미야애가》를 나누겠습니다. 왜 이 《예레미야애가》를 공부할까요? 지난 수년 동안 우리는 이 책을 한 번도 나눈 적이 없었기에, 이번 주일 시간을 빌려 《예레미야애가》를 끝까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안에는 성경의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신약과 구약 전체를 다 강해하겠다는 꿈이 있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정말로 진지한 자세로 임해 왔습니다.

이번 기간에는 《예레미야애가》를 나누고 있으며, 이번 주에는 2장을 나눕니다.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을 이루셨도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예루살렘이 원수에게 짓밟히고 바벨론의 말발굽에 짓밟혔을 때의 일입니다. 바벨론 기병은 매우 막강하여 성을 1년 4개월 동안 포위했고, 이 1년 4개월 동안 성안의 양식이 완전히 끊겼습니다.

양식이 끊긴 뒤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참으로 처참했습니다. 네 아들을 내게 주면 내가 돼지고기처럼 잡아먹고, 내 아들을 너에게 줄 테니 네가 잡아먹는 식의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프리카 초원의 하이에나나 들개처럼, 사람은 개만도 못한 꼴로 살아갔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성안으로 들이닥쳤을 때, 성을 지키려 했던 수많은 사람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습니다. 일본군이 난징에 입성했을 때나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나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그토록 잔혹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곳에서 《예레미야애가》 2장을 기록했습니다. 그가 남의 불행을 고소해하며 썼을까요?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날마다 울었습니다. 틈만 나면 울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하나님께서 분노를 진노로 바꾸시어 예루살렘에 쏟아부으시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이루어졌습니까? 여호와께서 정하신 저주가 이루어졌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러니 이 책의 이름이 《예레미야애가》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천재지변은 없습니다. 오직 인재(人災)만 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은 다 인재입니다. 천재지변이 어디 있습니까? 천재지변은 곧 하나님의 분노입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지금은 없습니까? 날마다 일어납니다. 뉴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비행기를 타려고 공항에 있을 때 뉴스 화면을 보았습니다. 비행기가 고층 빌딩을 들이받더니, 잠시 후 또 한 대가 날아와 부딪쳤습니다. 비행기 안의 사람들도 죽고 건물 안의 사람들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 대형 여객기에 항공유가 몇 톤이나 실려 있었겠습니까? 쾅 부딪치더니 잠시 후 그 두 빌딩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얼마나 충격적입니까? 저 역시 비행기를 타려던 중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탄 비행기가 바로 그 9·11 테러의 비행기였다면, 저 역시 저 푸른 하늘 속으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참으로 눈 뜨고 볼 수 없는 비극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제 산 주식이 오늘 20% 올랐다며 기뻐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금융 중심지 빌딩에는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멀쩡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람은 어디로 갔습니까? 뼈는 어디로 갔습니까? 다 사라졌습니다.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주식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사람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은 참으로 연약한 존재입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런데 왜 하필 그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누가 연출한 것입니까? 테러리스트가 연출했습니까? 그렇다면 그 테러리스트는 누가 연출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연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에게 임할 때, 우리는 그것을 천재지변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모두 인재입니다.

그 후 동남아 대쓰나미가 일어났습니다. 그때도 마침 제가 비행기를 타려던 때였습니다. 공항에서 그 쓰나미 영상을 보는데, 모든 것이 성냥갑처럼 휩쓸려 갔습니다. 거대한 공업용 빌딩과 주택들이 카메라 렌즈 앞에서는, 그 거대한 쓰나미 앞에서는 성냥갑에 불과했습니다. 차들이 이리저리 뒹굴며 휩쓸려 갔습니다. 누가 연출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연출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변호하려 듭니다. “사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야.” 하지만 저는 말씀드립니다. 그런 일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보십시오. 사람들은 그 이면에 담긴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까요? 사람들로 하여금 깨어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목숨은 길지 않으며, 별다른 이유 없이도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동남아 대쓰나미 이후 일본에서도 대쓰나미가 일어났습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해변에서 즐겁게 놀다가 순식간에 사람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살아 숨 쉬던 사람이 한 덩이의 고깃덩이로 변해 버렸습니다. 탕산 대지진이나 쓰촨 원촨 대지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를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억지로 변호하려 하지 마십시오.

하늘 아래 일어나는 일 치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많은 천재와 인재가 일어납니까? 예로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정해 두셨습니다. “저 사람은 착한데 왜 죽었을까?” 당신 눈에 착해 보이는 것입니까, 아니면 스스로 착하다고 착각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도 당신을 괜찮게 보시는지 여쭈어보십시오.

예레미야와 에스겔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은 늘 “왜?”라고 묻지만,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 반드시 성취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더욱 경외심을 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날마다 불치병 판정을 받는 사람들이 있고, 날마다 숨을 거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합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당신에게 일어난 것이 무엇이 그리 이상합니까? 이상하게 여길 것 없습니다. 제가 사역을 하면서 점차 한 가지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에 깃든 질병이 심각할수록, 그 사람의 마음속 또한 그만큼 더럽다는 사실입니다.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저께 밤 한 자매가 장폐색으로 온몸의 고통을 겪고 있어서, 제 담당 소그룹 목회자가 그녀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늘 하던 말의 증거가 아닙니까? 언제 먹을 수 있는지, 대변을 볼 수 있는지, 소변을 볼 수 있는지조차 인간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목회자가 섬기는 모습을 보며 긍휼한 마음이 들어 제가 들어가서 기도로 섬겼습니다. 저는 늘 영적 분별과 깨달음으로 기도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니 2021년에 난소암에 걸렸다고 했습니다. 왜 걸렸을까요? 남편과 다투고 화를 내다가 걸렸습니다. 여성의 생식기 계통 질환은 가정 내의 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남편이 밖에서 방탕하게 지내니 집에서 분노를 품었습니까?” 저는 이 점을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남편은 밖에서 즐기고 있는데, 왜 아내는 집에서 속을 끓이며 화를 냅니까?

제가 말했습니다. “남편은 남편의 어머니가 낳았고, 당신은 당신의 어머니가 낳았는데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남편이 밖에서 딴짓을 한다고 집에서 화를 내다가 난소암까지 걸리다니, 이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가정을 지키고 아이에게 부모가 다 있어야 하니 가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까?”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스스로 참 대단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했지요? 결국 그 대단함의 결과가 암입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암에 걸렸으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선하다고 여겼습니다. 이후 장폐색이 와서 배에 구멍을 내고 장을 한 토막 잘라냈습니다. 3~4년이 지난 지금 다시 재발하여 장폐색이 온 것입니다. 이 자매는 부모와도, 직장 동료와도, 그 누구와도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선악을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찌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뿐이지만, 이 자매는 날마다 광주리째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가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어찌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비참합니다. 저는 여러 중증 환자들을 섬겨 보았습니다. 몇 년 전 한 자매의 장례식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섬겼던 자매였습니다. 결국 유골함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밖에서 방탕하게 놀자 집에서 속을 끓이다가 위암에 걸렸습니다.

위암이 기도로 치유되었는데도 남편이 다시 밖에서 방탕하게 굴자 또다시 집에서 속을 끓였고, 결국 암이 재발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입니다. 남편은 시어머니가 낳았고 당신은 친정어머니가 낳았으니 본래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남편도 당신의 소유가 아니고 당신도 남편의 소유가 아닌데, 왜 속을 끓입니까?

사람이 죽은 후 유가족이 묘지를 샀고, 시신은 화장장에 잠시 안치되었습니다. 마침 제가 그곳에 가게 되어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형식에 꽤 신경을 씁니다. 저는 살아 있는 사람은 두렵지 않지만 죽은 사람은 두렵습니다.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렀고, 하관할 때 사회자의 추도사는 노래처럼 아름다웠지만 듣는 마음은 몹시 무거웠습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깨달아 《예레미야애가》를 더 깊이 묵상하고 깨닫는다면, 종양도, 위암도, 고통도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참으로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를 성취한 역사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정하신 일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내면의 것들도 큰 충격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안에는 흔들려 무너져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장례식에 참석하기를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장례식에 갈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듭니다. 집착하던 것들을 내려놓게 되고, 놓지 못하던 것들을 내려놓게 됩니다.

예전에 오프라인 교회가 있을 때, 저는 강단 위에 관을 하나 올려둘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인생을 제대로 꿰뚫어 보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돈을 위해 살고, 이것저것을 위해 살면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서는 살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참으로 처참했습니다. 바벨론의 말발굽이 예루살렘을 짓밟고 평정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모든 기물이 털리고 약탈당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의 금붙이에 진정으로 연연해하실 줄 아십니까? 하나님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으십니다. 성전을 허무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몹시 비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몸이 여기저기 아프고 삶에 온갖 일들이 터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신호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내려놓기 싫어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끝까지 내려놓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인생에 ‘양념’을 더 치셔서 하나님의 진노를 더 맛보게 하실 뿐입니다.

아담과 하와 시절,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며,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먹지 말라니 이상하다, 내가 보기엔 먹음직스러운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리저리 살펴보니 나무가 참 좋아 보였습니다. 냄새를 맡아보니 고급 명차보다 더 향기로웠습니다. 게다가 뱀이 먹으면 지혜로워져서 선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고 하니 참 좋아 보였습니다.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보기에 좋고 냄새도 향기롭고 맛도 달콤해 보였지만, 먹으면 죽는 것이었습니다. 하와가 먹은 뒤 아담이 지켜보았습니다. ‘어라? 여전히 숨을 쉬고 있네? 하나님 말씀은 틀렸구나. 먹으면 죽는다더니 입에 거품을 무는 것도 아니고 눈이 뒤집히는 것도 아니네? 입술도 향긋하고 참 좋구나.’

하와가 그 열매를 아담에게 주었고, 아담도 ‘하나님 말씀은 헛소리였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헛된 생각을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헛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 말씀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담이 덥석 한 입 베어 물었고, 그것이 오늘날의 ‘애플(Apple)’ 로고가 된 것 아닙니까? 그 로고의 베어 문 자국을 누가 물었습니까? 아담이 한 입 베어 문 것입니다. 그 결과 수조 달러 규모의 거대 기업이 생겨났지만, 그 창업자 또한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담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도 아무렇지 않게 900년 이상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지 않은 것입니까? 성취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바를 이루셨습니다. 900년이 길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900년도 하루와 같습니다. 왜 1900년이 아니라 900년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눈에는 그날 당장 죽은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토록 엄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가인이 문을 열고 나가 살펴보았지만 문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보이지 않으니 ‘거짓말이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결국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가만두시겠습니까?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평생을 정신적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정신 질환의 고통이 가장 큽니다. 가인은 방에 앉아 머릿속에서 소리가 날 때마다 온몸을 떨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이었습니다. 훗날 이 병은 라멕에게로 이어졌고, 그는 날마다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그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이 기를 쓰고 위로 기어오르다가 결국 정신 질환을 얻습니다. 바벨탑 꼭대기에는 온통 정신 질환자들뿐입니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벨을 죽였는데 왜 사형에 처하지 않고 살려두셨을까요? 그것이 사형보다 훨씬 더 무서운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결국 온 인류가 정신적으로 병들었고, 노아 시대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라멕처럼 포악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홍수가 닥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습니까? 성취되었습니다.

“목사님, 좋은 말씀 좀 해주실 수는 없나요? 이런 말씀을 들으니 너무 두렵습니다.” 맞습니다. 두려워하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으면 가인과 라멕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훗날 아브라함이라는 깨어 있는 사람이 나타나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을 입증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로부터 예레미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았습니다.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 곧 여호와께서 정하신 바를 성취하는 표본이 되었으며, 이는 아담과 하와, 노아 시대와 비견될 만합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이르러 모세가 《신명기》에 기록한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만국 중에 흩어져 방황하게 될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 된다는 것이 과연 축복이기만 한지 물음표를 던져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었지만, 결국 만민 중에 내던져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성취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무엇이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습니까? 무엇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의 본보기가 되게 했습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의 본보기가 되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입니다. 이 세상의 논리 체계는 너무나 강력합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 속에서 맹목적으로 내달렸습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며, 날 때부터 육에 속하고 세상에 속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애가를 쓰던 시절,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도대체 뭘 잘못했단 말인가?” 여러분도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성취됩니다.

누가 무지하게 살라고 했습니까? 깨닫지 못해 화를 당한 것을 누구 탓으로 돌리겠습니까? 누가 아담과 하와의 길을 가라고 했습니까? 누가 가인과 라멕의 길을 가라고 했습니까? 누가 그토록 완고하게 세상의 논리 체계를 고수하라고 했습니까? 누가 이토록 세상살이에 집착하며 목숨을 중히 여기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길을 정해 두셨습니다. 하나는 삼가 순종하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순종하지 않는 길입니다. 순종하는 자는 복을 받고, 순종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는 사람 내면의 논리 체계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틀렸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지극히 합리적이고 옳다고 여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디서 망했습니까? 자기 내면에 있는 세상의 논리 체계 때문에 망했습니다. 《예레미야애가》가 기록된 시대는 저주가 대폭발하던 시대였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일본이 대만을 점령하고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지금은 잊혔습니다. 몽골이 중국을 점령하며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일본이 난징을 점령하며 수많은 사람을 학살했습니다. 바벨론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수많은 사람을 학살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왜 가만히 보고만 계십니까?”라고 묻습니다.

한번은 제 동창이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그렇게 사람들을 죽이도록 허락하시는 걸까?” 제가 혼란스러워할 줄 아십니까? 열 살에 죽든, 스무 살에 죽든, 쉰 살에 죽든, 백 살에 죽든, 칼에 맞아 죽든, 의사의 오진으로 죽든, 자연사하든, 쓰나미로 죽든, 지진으로 죽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런 일들에 대해 저만의 관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아무리 치열하게 살아도,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다 만대에 오명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시대의 유대인들이 애국심을 품고 성전을 지키며 망국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 했던 것이 잘못입니까? “하나님, 주님의 성전을 지키겠습니다. 성전의 기물들을 빼앗기게 둘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정 그런 것에 연연해하시겠습니까? 전혀 연연하지 않으십니다.

다시 한번 당부드립니다. 우리 안의 관심사가 내 중심이라면 큰 문제입니다.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이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시는 것과 일치해야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전 건물에 연연해하십니까? 성전의 금붙이에 마음을 두십니까? 아닙니다. 처음부터 관심 없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람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것만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길입니다. 하나는 삼가 경외하는 길이요, 하나는 경외하지 않는 길입니다. 당신이 경외하든 경외하지 않든, 여호와께서는 정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은 하나도 폐해지지 않습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살겠다”고 한다면 그렇게 사십시오. 그러나 반드시 여호와께서 정하신 바를 이루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호와께서 이루신 재앙의 기록이 축복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성경 전체를 보아도 축복의 비율은 적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신의 성전을 헐어버리셨고, 자신의 절기와 제사를 모두 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허무십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애가》를 읽으며 우리가 얻어야 할 결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예레미야가 애가를 지어 부를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 내 눈이 눈물의 근원이 되었나이다. 주를 향해 마음을 물 쏟듯 쏟아놓나이다”라고 통곡하는 처지가 되지 마십시오. 너무나 비참하지 않습니까?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진작 어떻게 했어야 했습니까?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수십 년 동안 날마다 외쳤지만 들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를 미워하는 자들만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애국심 넘치는 장군들이었고, 예루살렘을 지극히 사랑하던 장군들이었습니다.

본문 말씀

**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엎으사 원수가 너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하며 네 대적자들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예레미야애가》 2:17) **

기도

우리가 경외하는 마음을 품고, 결코 하나님께 “왜?”라고 묻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 모든 것은 인재입니다.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지금 저희에게 경외하는 마음을 주시사, 저희 안에 있는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를 온전히 무너뜨려 주옵소서. 하나님, 살아가는 이 삶의 본질을 명명백백하게 보게 하옵소서. 저희 평생의 걸음이 주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나타내는 길이 되게 하옵소서.

저희의 평생은 오직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니, 저희 안에 더욱 큰 경외심을 허락하옵소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교훈을 얻게 하시고, 주님을 경외함으로 주님의 진노에서 멀어지게 하옵소서. 하나님, 주님의 분노와 진노에서 저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오니, 저희 안의 세상적인 논리 체계와 육적인 논리 체계를 철저히 무너뜨려 주옵소서.

저희가 이 자리에서 세상을 향해 선포하길 원합니다. 이 세상은 저희 안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저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며 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를 나타내며 살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날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며, 주께서 축복하신 말씀들이 우리 형제자매들의 삶 가운데 그대로 성취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배경

계속해서 배경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 왕국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매우 흥미로운 사건입니다. 바벨론은 유다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않고 정복하여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땅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는데, 그것이 바로 《예레미야서》입니다.

기회가 닿는 대로 여러분과 함께 《예레미야서》 전체를 읽어보길 원합니다. 바벨론은 유다에 시드기야라는 왕을 세워 다스리게 했습니다. 왕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총독이었습니다. 바벨론은 꽤 관대하여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군대를 두는 것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는 날마다 유다의 독립과 부국강병만을 꿈꾸었습니다. 객기를 부린 것입니다. 시드기야는 군대 장관들과 날마다 모의하더니 어느 날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세상의 논리 체계로 보면 그의 반역이 매우 위대해 보이지 않습니까? 시드기야가 하나님을 알았을까요?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알았기에 그는 자주 예레미야를 찾아와 국정을 논의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지만 시드기야는 결국 반역을 꾀했습니다. 바벨론 왕은 강력한 군대를 보내 예루살렘 성을 겹겹이 포위했고, 약 1년 반 만에 성은 함락되었습니다. 성이 함락된 후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도 성안에 있었습니다. 바벨론 왕은 예레미야를 알고 있었고, 그가 바벨론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어찌 바벨론의 편이었겠습니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편이었습니다. 바벨론 왕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유다를 멸하시고 세상의 논리 체계로 가득 찬 자들을 심판하시려고 바벨론을 도구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속한 자를 멸하시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일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라고 했습니까?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너를 치러 온 대적을 섬기게 하실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결국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에게 두 눈을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반역을 꾀한 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역사는 10여 년 동안 이어졌고, 여러 차례에 걸쳐 포로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이 끊임없이 반역을 꿈꾸었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독립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유다의 멸망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었으나 사람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사람 안의 세상적 논리 체계가 너무나 강했기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제게는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죄를 짓더라도 하나님께는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섭섭하게 할지언정 하나님을 거역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유다 땅에서는 시드기야 왕부터 군대 장관들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이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러실까?” 하며 갈팡질팡했습니다. “우리는 성전을 지켜야 해, 하나님이 반드시 도와주실 거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잖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무조건 도우십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면서도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가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차 없이 멸망시키셨습니다.

느부갓네살 바벨론 왕은 예레미야에게 바벨론으로 갈 것인지, 이곳에 남을 것인지 물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곳에 남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벨론 왕을 반역한 자들이 예레미야를 억지로 데리고 애굽의 다바넷이라는 곳으로 도망쳤습니다. 예레미야가 날마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전했지만 그들은 듣기 싫어했습니다. 자기들만의 생각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시드기야 이후에 그다랴라는 사람이 유다의 총독으로 세워졌지만, 독립을 꾀하던 유대인들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돕고 있다고 여겼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딴 도움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그것을 바라지 않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야애가》를 읽을 때 명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만약 사역자 중에 이 설교를 듣는 분이 계시다면 깊이 새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내 힘으로 하나님을 돕겠다고 나서는 순간,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될 것입니다.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기록한 애가는 너무나 비참합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사람들 속에 세상의 논리 체계가 가득 차서 도무지 깨닫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그 논리 체계는 애국심을 포함하여 겉보기에는 지극히 당연하고 훌륭해 보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나라는 어느 나라입니까?

한번은 중국과 러시아 국경에 있는 헤이샤즈섬에 간 적이 있습니다. 원래 중국 영토였던 국경 너머 러시아 쪽에 동상이 하나 서 있었는데, 러시아에서는 그를 민족의 영웅이라고 칭송했습니다. 반면 중국 쪽에서는 그 동상을 보며 침략자라고 부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한 민족에게는 영웅이지만 다른 민족에게는 살인자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입니다.

장수 한 사람의 공을 이루기 위해 만 명의 뼈가 마른다는 말처럼,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됩니까?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는 이처럼 부패했습니다. 오늘날 천재와 인재가 이토록 많은 이유도 다 세상의 논리 체계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서신서에서 고백했듯이, 이 세상의 통치자들 중 누구도 이 복음의 지혜를 알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엄중한 말씀입니까?

이것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바벨론의 말발굽이 예루살렘을 짓밟았기에 예레미야가 애가를 지었습니다. 그는 2장 벽두부터 이렇게 고백합니다.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들을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으며 노하사 딸 유다의 견고한 성채들을 허물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그 지도자들을 욕되게 하셨도다.”

성벽과 요새는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성벽으로 자신을 지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벽이 사람을 지켜줄 수 있습니까? 지켜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왜 성벽을 건축했습니까?”라고 물을지 모릅니다.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은 백성들의 마음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성벽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유다 백성의 요새를 무너뜨려 땅에 엎으시고, 그 나라와 지도자들을 욕되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모든 것이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지휘관들과 유다의 왕은 자신들의 소망을 오직 견고한 성벽에 두었습니다. 성벽이 튼튼했기에 바벨론 군대와 1년 4개월 동안 대치할 수 있었습니다.

1년 4개월을 버틴 것도 대단하지만, 결국 성벽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어떻게 무너졌습니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어 유다의 요새를 무너뜨리셨기 때문입니다. 성벽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안에 있던 유다 백성의 눈에는 그 성벽이 얼마나 든든해 보였겠습니까? “이 성벽 덕분에 바벨론 군대와 1년 넘게 대치할 수 있었지, 성벽이 없었다면 진작 끝장났을 거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 예레미야는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항복하라고 권면했습니다. 항복해야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고 했지만 시드기야는 거부했습니다. 사실 항복하고 싶어도 군대 장관들이 반대하여 감히 항복하지 못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천황은 항복하려 했으나 대신들과 총리가 반대하여 비밀리에 항복 조서를 작성해야 했던 상황과 비슷합니다.

시드기야는 세상의 정치 체계에 완전히 얽매여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며 세상의 논리 체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정치가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세상의 정치 시스템은 사람을 꽁꽁 묶어두어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듭니다.

한번 그 시스템에 들어가면 빠져나오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싶어도 세상의 논리 체계 속에 갇혀 있으니 너무나 힘든 것입니다. 영적 마귀 세력이 “나는 패배해 본 적이 없다”고 장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려면 자기 내면의 세상적인 것들을 철저히 무너뜨려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능력은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스스로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그의 오른손을 뒤로 거두어 들이시고 들불이 사방으로 사름 같이 야곱을 불사르셨도다 (《예레미야애가》 2:3) **

여기서 ‘뿔’은 사람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능력을 숭상합니다. 여러분은 능력을 숭상하지 않습니까?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보면 부러워하지 않습니까? 최고 부자가 “1억 위안은 작은 목표일 뿐”이라고 말하면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우리에게는 천문학적 액수이지만 그들에게는 작은 목표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 부자도 자신의 목표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능력을 숭상하지만, 능력은 사람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당시 유다 땅에도 뛰어난 무예와 능력을 갖춘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능력을 의지하느라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능력을 의지하는 자는 반드시 저주를 받습니다. 에서는 야곱보다 능력이 뛰어났지만 세상의 논리 체계를 따랐기에 그 민족 전체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에서는 멧돼지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사냥꾼이었지만, 능력을 숭상한 결과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논리 체계입니다.

우리 안에도 그런 생각이 자리 잡고 있지 않습니까? 겉보기에는 매우 그럴듯해 보입니다. 뛰어난 인재들이 인공지능이나 자율주행 기술을 개발하는 것을 보며 감탄합니다. 대단한 기술이지만, 인간의 능력을 숭상하는 순간 저주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 저주가 언제 임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세상만사는 돌고 도는 법이라 10년 뒤, 20년 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며, 때가 이르면 비로소 드러나게 됩니다.

성전, 예배, 절기, 제사장은 지켜줄 수 없습니다

** 주께서 그의 초막을 동산처럼 헐어 버리시며 그의 공회의 처소를 무너뜨리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그가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전의 성벽들을 원수의 손에 넘기셨으매 그들이 여호와의 전에서 떠들기를 절기의 날과 같이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딸 시온의 성벽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무너뜨리는 일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벽과 성채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그들이 함께 쇠하였도다 (《예레미야애가》 2:6-8) **

참으로 처참한 광경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기 직전까지도 모임과 예배는 평소처럼 드려졌습니다. 기도하고, 모이고, 안식일을 지키고, 제사장들이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제단도, 성소도, 왕궁도 하나님께 멸시를 당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이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를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성전 예배와 절기와 제사는 정치적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성전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며 규칙을 지켰지만, 그것은 정치적 기득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가짜였습니다. 종교가 정치와 결탁하는 순간 큰 위험이 따릅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행할 수 없고, 행할 수 있는 것은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예루살렘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친히 허무셨습니다.

수년 전 저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성전을 허무신다”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왜 허무실까요? 건물로서의 성전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의 사람들이 행하는 중심과 그들의 뇌리에 박힌 논리 체계입니다. 내면에 세상의 논리 체계를 가득 담고 있으면서 겉으로 경건한 모양만 낸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 안의 정치 싸움도 이처럼 위험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했는데, 그 교회 안에서 정치 싸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좌지우지하며 그 다툼을 ‘용호상박’이라 표현했습니다. 당신이 세운 교회라 할지라도 세상의 논리 체계를 가지고 세웠다면, 무너지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훗날 그 목사님은 코로나에 걸렸다가 금방 회복되었습니다. 당시 저도 코로나를 앓고 있었기에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그 목사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음이 무척 착잡했습니다. 저 역시 코로나를 겪으며 내면의 세상적인 논리 체계를 많이 깨뜨려야 했습니다.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모임이나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직 당신의 말씀을 삼가 지켜 행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를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애가》를 자주 읽으며 영혼을 깨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의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안에는 늘 ‘내가 아직 온전치 못하다’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논리 체계는 큰 것을 치우면 중간 것이 나타나고, 중간 것을 치우면 작은 것이 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논리 체계는 참으로 끈질깁니다. 완전히 다 없애기는 어려울지라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선지자의 환상은 지켜줄 수 없습니다

선지자의 환상도 지켜주지 못합니다. 14절에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선지자의 환상이 사람의 죄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 거짓 환상을 보았을까요? 체제 안에서 환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왕이 보고 싶어 하는 환상만을 맞춤형으로 보아준 것입니다.

한번은 어떤 형제와 함께 몹시 곤경에 처한 사람을 섬기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 형제는 눈을 감더니 “예수님께서 당신 뒤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제 눈에는 예수님이 아니라 귀신이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청년은 그 말을 듣고 어이없다는 듯 힐끗 쳐다보았습니다. 형제는 눈을 감은 채 여전히 환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속으로 ‘제발 그만두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뒤에 계시는데 어찌 삶이 그토록 비참하게 망가질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권력자나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환상을 보기를 좋아합니다.

어용 선지자가 되면 안 됩니다. 어용 선지자의 환상은 헛된 것입니다. 사람의 기호에 맞추어 말하고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은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레미야는 어떠했습니까? 감옥의 깊은 진흙탕 속에 갇히면서도 여호와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환상은 다 허탄한 헛소리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그런 것에 미혹되지 마십시오. 환상을 본다는 것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차라리 우리의 죄를 밝히 드러내는 것이 낫습니다. 능력이 있다면 자신의 죄를 명백히 드러내어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물 쏟듯 회개하십시오. 그것이 생명을 보전하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이 곁에 계신다”는 식의 헛된 말보다 우리의 죄를 직시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습니까? 얼마나 내 능력과 재물과 성벽과 군마와 무기와 종교적 형식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그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상의 논리 체계를 벗어나는 것이 핵심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계시와 환상은 반드시 사람의 죄를 드러내어 회개하게 만듭니다.

어떤 이들은 제게 “목사님은 왜 코로나에 걸리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저는 죄인일 뿐입니다. 제가 무슨 성인군자의 표본입니까? 저는 죄인의 표본이며 끊임없이 회개해야 할 사람입니다. 저는 진리의 화신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세운 화인 사명 신학은 무엇입니까?” 그것 역시 진리의 화신이 아니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꺼내어 전하는 것뿐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여 통회하는 길은 아직 멉니다. 화인 사명 신학의 유산을 잇고자 한다면 제 말을 기억하십시오. “이것도 아직 부족하고 저것도 바로잡아야 하니, 하나씩 하나씩 온전케 해 나가자.” 이미 다 깨달았다고 자만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 세상적인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벽과 무기와 능력과 종교적 행위와 거짓 환상을 의지하느라 정작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합니다. 죄를 볼 수 있었다면 《예레미야애가》를 부르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애가》를 통해 우리의 문제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마음을 찢고 회개해야 합니다.

결론: 주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예레미야애가》 2:18-19) **

이것이 여러분과 저 자신에게 드리는 최고의 권면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진리를 다 가졌다고 감히 자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진리의 정상을 향해 끊임없이 올라가는 순례자일 뿐입니다. 결코 자만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는 자에게는 반드시 재앙과 화가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예레미야애가》를 부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성취됩니다. 여호와께서는 정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십니다.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받고, 진리를 버리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저주가 대폭발하는 시대입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허물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교회를 허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다 안다고 큰소리칠 것이 아니라, 더욱 힘써 진리를 추구해야 마땅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갑시다. 경외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유다 백성처럼 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또한 허무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 안의 세상적인 것들을 거두어 가시기를 간구합시다. 세상이 우리 안에 아무것도 발붙이지 못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때,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기억하심을 얻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구제와 헌금을 하는 것을 대단한 일로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돈이 필요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을 온전히 올려드립시다. 의지하려거든 오직 우리 하나님만을 의지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거듭하여 경고를 보내셨습니다.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신호를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벽이 무너지며 성전이 훼파될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지금 주님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제사나 소와 양의 제물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면 반드시 하나님의 경고를 경험하게 됩니다. 예레미야의 거듭된 경고를 들었으니,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질 때까지 미루지 마십시오.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이 포로 된 지 70년이 지나서야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70년이면 그 세대의 사람들은 이미 다 죽고 난 뒤입니다.

오늘 설교를 이것으로 마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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