命定神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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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疑解惑》

1.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며 조금 흥분이 되었습니다. 왜 흥분이 되었을까요? 이 내용이 아주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년 동안 제게는 작은 의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귀신을 쫓는 축사 사역을 하는 교회인데, 사도 바울은 왜 귀신 쫓는 사역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성격이 꽤 집요한 사람이라 수년간 이를 연구했고, 오늘 마침내 그 답을 찾았습니다.

귀신을 쫓는 일은 참 흥미롭습니다. 사실 이리저리 귀신을 쫓아내다 보면, 결국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한 대부분의 말씀은 사실 ‘자기 자신을 쫓아내는(육신을 처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자기 안의 육적인 것들이 귀신을 불러들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육적인 것을 처리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께서 아무리 많은 은혜를 부어주셔도 헛수고가 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설계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귀신을 쫓아내어 귀신이 떠나가고 병이 낫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은 어떻습니까? 사실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입니다.

최근 우리의 축사 사역은 더 깊은 차원의 단계로 진입했으며, 그 수준도 점점 예수님과 사도 바울에게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참으로 위대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며,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예루살렘을 세우는 이론 체계를 확립했습니다. 시온산, 성전, 예루살렘, 이스라엘 같은 단어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자 하나님의 교회인 교회를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 방면의 사역을 감당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어깨 위에 서서 한 걸음 더 전진시켰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깨닫고 가슴이 뛰었습니다. 왜 흥분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의 끝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일을 다 끝마쳤습니까? 그 역시 다 끝마치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어깨 위에 서서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우리에게도 기회가 왔고, 마침내 우리 차례가 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다면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요? 귀신 쫓는 일도 예수님과 사도 바울에게서 배워야 할 뿐 아니라,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일도 그들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양육을 포함하여 이 사역을 더 깊은 곳으로 전진시키고자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지 10년이 된 한 자매님이 계십니다. 이 자매님은 10년 동안 참으로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10년 전에는 요추와 경추 질환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시자 이번에는 손발이 저리기 시작했습니다. 손발 저림을 치유받고 나니 피부에 발진이 돋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엎치락뒤치락 끊임없이 문제가 이어졌습니다. 최근에는 기침이 너무 심해져서 밤마다 기침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타이어가 펑크 난 것처럼 공기가 위로 솟구치는데, 밤에 잠도 못 자고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제가 예전에 그 자매님을 양육한 적이 있어서 이 문제를 맡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자매님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먼저 기도는 해줄 수 있지만, 기도해도 큰 효과는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신 내면의 문제가 겉으로 드러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집에 가서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성찰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을 몇 년 동안이나 했겠습니까? 사실 수년 전부터 자신을 돌아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았을까요?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반드시 돌아보아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성찰하는 일도 참 재미있는 것이, 하루를 기다려도 소식이 없기에 봤더니 무슨 논문이라도 쓰려는 듯이 장문의 글을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그럴 필요까지 있습니까? 당신 몸에 있는 문제점은 손가락 다섯 개로도 다 셀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몸에 있는 허물과 문제는 손가락 다섯 개도 다 쓰지 못할 만큼 서너 마디로 끝나는 일입니다. 논문 쓸 필요 없다고 했더니, 그제야 요약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리를 마치자마자 신기하게도 기침이 잦아들었습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를 포함해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채찍질을 한 번 안 하시고 발로 걷어차지 않으시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저 자신이 가장 좋은 본보기입니다. 저는 ‘어쩌면 이렇게 나처럼 미련한 사람들이 많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무엇을 돌아보는 것일까요? 여러분에게 흔히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오늘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원래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사람이라서 무슨 일을 하든 별로 열정이 없습니다.” 그러면 제가 말합니다. “그만두세요. 당신은 일할 때는 열정이 넘쳐서 아파도 출근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몸이 아픈데도 하나님을 섬기러 나오는 모습을 제가 언제 본 적이 있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자신을 미지근한 사람이라고 돌아보는 것은, 주님을 믿는 일에 미지근하고 사역을 섬기는 일에 미지근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안 했다고 하시면 안 되죠. 저는 주일예배도 매주 참석하고, 성경공부도 오고, 기도회도 다 나오는데, 저한테 문제가 있다고 하시면 안 되죠”라고 말합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큰일 났구나, 행위 중심에 빠져 있구나’ 싶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일에는 반드시 열정을 냅니다. 하지만 자신이 보기에 별로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결코 열정을 내지 않습니다. 열정은 없지만 겉으로는 하는 척 흉내를 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회사 직원이 매일 출근은 꼬박꼬박 하지만 늘 맥이 빠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일이 싫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출근을 안 할 수는 없으니 아침 8시 반에 출근하고 저녁 5시 반에 퇴근하며 시간은 정확히 지킵니다. 그러니 뭐라고 탓할 수는 없지만, 일을 많이 하든 적게 하든 그저 그렇게 영혼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관리하던 직원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침은 무엇과 관련이 있습니까? 피부병은 무엇과 관련이 있습니까? 대소변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과 관련이 있습니까? 밥을 잘 먹지 못하거나,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 것은 무엇과 관련이 있습니까? 바로 이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이 세대의 풍속을 조심하라>고 정했습니다. 방금 전까지 귀신을 쫓는 깊은 단계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지만, 사실 하고자 하는 말씀은 이 세대의 풍속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잠시 후에 이와 관련된 성경 본문을 읽겠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후로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더 이상 기록하지 않았고, 기록할 관심조차 두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 예수님의 치유가 병의 뿌리까지 완전히 뽑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뿌리가 뽑혔을까요? 아닙니다. 제가 오랫동안 연구한 끝에 발견한 사실은, 그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에 병이 모두 재발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사역했던 사람들도 기도를 받고 나서 병이 다시 재발하곤 했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던 어떤 사람은 기도를 받고 나서 모든 소리를 다 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치유는 딱 15분 동안만 지속되었고 15분 뒤에는 원래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받고 나았는데 30분 뒤에 모든 증상이 다시 돌아왔고, 어떤 사람은 완전히 나았는데 하루 만에, 어떤 사람은 한 달 만에, 어떤 사람은 세 달 만에 병이 다 도졌습니다.

저는 ‘이 병의 뿌리가 뽑힌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남들이 하지 않는 엉뚱한 질문을 파고들기를 좋아합니다. 사실 엉뚱한 것이 아니라 깊이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문제인데, 보통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으니 제가 파고드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과연 병이 다시 도지지 않았을까?’ 연구해 본 결과, 그들의 병도 다시 도졌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저의 분석은 이렇습니다. 이 사람이 애초에 왜 병에 걸렸습니까? 세속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며 날마다 귀신을 자기 삶에 초대했기 때문에 병에 걸린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의 삶의 방식, 생각과 마음의 방식이 그의 삶의 열매를 결정했고, 그 결과 온몸에 병이 든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신 것은 새롭게 다시 시작하게 하려 하심인데, 그 사람이 다시 옛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 버린다면 병에 걸리겠습니까, 안 걸리겠습니까?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염된 물을 마셔서 병에 걸렸습니다. 치료를 받아 나았는데, 집에 돌아가서 또다시 그 오염된 물을 마신다면 병에 걸리겠습니까? 반드시 병에 걸립니다. 사람이 바로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고쳐주신 것은 과거의 삶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과거에 바르게 살지 못했던 것을 오늘 바로잡으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바로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매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서 다시 믿지 않는다면 병이 재발하지 않겠습니까? 다 재발합니다!

제가 섬겼던 암 환자들 중에는 내면에 지극히 완고한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어서 치명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지만, 당신의 불신이 다시 당신을 해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중에 다시 믿지 않게 되었을까요? 그러니 병이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그 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뿌리는 바로 ‘이 세대의 풍속’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풍속에 대해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사람이 육신에 속하고 사람의 뜻을 따르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는 이를 깊이 논술하지 않으셨지만, 사도 바울이 이를 이어받아 아주 깊이 있게 다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대의 풍속은 대단히 무서운 것입니다!

마귀는 대단히 교활합니다. 어느 정도까지 교활할까요? 마귀는 피를 흘리지 않고 사람을 죽입니다. 칼을 쓰지도 않고, 밧줄 하나 쥐여주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이 스스로 밧줄을 찾고, 스스로 칼을 찾아 자기 자신을 찌르게 만듭니다. 싸우지 않고 남을 굴복시키는 것이야말로 마귀의 가장 무서운 점이며, 마귀는 절대적인 고수입니다. 거짓말 하나만 던져주면 당신을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거짓말을 조심해야 하고, 이 세대의 풍속을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풍속은 겉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게 된 과정을 한번 되돌아보십시오. 죽게 되었거나, 한계에 부딪혔거나, 재앙을 만났거나, 병이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으러 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 근본 원인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삶의 방식, 사고방식, 그리고 가치 체계입니다.

오늘 왜 우리가 더 깊은 차원의 단계로 들어갔다고 말할까요? 사람들을 이 세대의 풍속에서 건져내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님, 저는 제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거짓말입니다! 사실 그런 사람들도 자기 통제를 아주 잘합니다. 제가 “그럼 한번 시험해 봅시다. 당신 통장에 있는 돈을 전부 내게 보내보세요”라고 하면, “그건 안 되죠”라고 합니다. 제가 “통제를 아주 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라고 합니다. 왜 자신을 주체하지 못했는지 아십니까? 사기꾼에게 걸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사기꾼은 “돈을 내놓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처럼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면 사기꾼이 아닙니다. 사기꾼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세요, 저한테 1억을 투자하시면 연말에 3억으로 돌려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3억에 눈이 멀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얼른 돈을 보냅니다. 자제가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 벌 생각만 하고 손해 볼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수지맞는 장사라고 여겨 얼른 붙잡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스스로 기회라고 여겨 붙잡았다가 돈을 날린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당시에는 그저 기회라고만 생각해서 손해 보지 않으려고 얼른 붙잡았던 것입니다. 왜 절제가 안 되었을까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아주 훌륭하게 절제했을 것입니다. 저는 사람의 무지와 어리석음에 탄식하곤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경험해야 문제의 근본을 인정하겠습니까? 자기가 자기 자신을 해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마귀의 거짓말 속에 살고 있는 줄도 모르니, 이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일입니까? 스스로를 해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떤 여인이 있었습니다. 왜 그냥 ‘여인’이라고 부를까요? 저희 동북 지방에는 “그냥 아녀자(계집)일 뿐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지만, 그 여인의 수준이 딱 그렇다는 뜻입니다. 예전에 저도 그 여인을 섬겼고, 우리 교회 목회자들도 그 여인을 섬겼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이 여인이 따끈한 국수 두 그릇을 포장해 집으로 돌아왔는데 문이 안에서 잠겨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서 기다렸는데, 문이 열리더니 남편이 다른 여자와 함께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문을 잠가놓고 남편이 다른 여자와 집 안에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그 여인이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더니 그 자리에서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그 여인이 제게 말했습니다. “누구라도 그런 상황이면 눈이 뒤집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말했습니다. “저는 안 그럽니다. 내가 머리에 총을 맞았다고 내 눈을 멀게 만듭니까? 옛날에 눈이 멀어서 그런 남편에게 시집갔더니, 이제는 진짜로 눈이 멀어버렸군요.”

나중에 우리가 사역을 해주고 나서 그 여인은 눈이 나아 사물을 조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영적으로 맹인이었고, 그저 한낱 어리석은 여인에 불과했습니다! 참 괘씸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맹인이 눈을 뜨게 되려면 병원에 가서 얼마를 주어야 합니까? 그 여인의 월급이 대략 2,200위안이었는데 헌금을 고작 200위안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자매에게 “당신은 헌금 얼마 해요? 나는 그렇게 많이 안 해요. 내가 왜 그렇게 많이 해야 하죠?”라고 물었습니다. 우리가 왜 “당신은 헌금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을까요? 당시 우리가 눈이 멀어서 그런 사람에게 헌금할 자격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자격으로 여기지도 않고 겨우 20위안을 아끼려고 잔머리를 굴렸습니다. 저는 ‘그 자격을 박탈해 버리자’고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맹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누구든 헌금하려면 ‘자격 없음’의 상태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깨닫지 못하면 저주를 부르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묻습니다. “목사님, 저는 헌금을 했는데 왜 이전보다 형편이 더 나빠졌을까요?”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팁이나 던져주듯 헌금했으니 하나님께서 손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저주가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것저것 계산을 따지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참 미련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논리 체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께 말씀드리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장난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결혼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깁니다. 어떤 부부가 이혼을 했는데, 한 목사님이 그들을 유람선에 태워 웨딩드레스를 다시 입히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한평생 한 남편 한 아내로 살라”며 서약을 다시 시켰습니다. 하지만 함께 살 수가 없었습니다. 둘 다 너무나 고통스럽게 살다가 결국 다시 이혼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런 형식적인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던 모양입니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다시 서약하는 것은 쉽지만, 우리 안에 있는 이생의 논리 체계를 처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혼이란 종종 눈이 멀어 사람을 잘못 만나 시집가거나 장가를 잘못 든 결과인 경우가 많습니다.

방금 말한 눈먼 여인처럼, 저는 그녀를 ‘자매’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저는 그녀의 목사가 아니고 그녀도 우리 교회의 자매가 아닙니다.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방에서 나왔다고 해서 눈이 멀어버리고는, 제게 “누구라도 그런 상황이면 그렇지 않겠어요?”라고 하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논리입니까? 바로 ‘이 세대의 풍속’입니다! 이 세상의 풍속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까? 남편을 소고기 한 덩어리로 보고, 그 여자를 돼지고기 한 덩어리로 보십시다. 소고기 한 덩어리가 돼지고기 한 덩어리와 부딪혔다고 해서 당신 눈이 멀어야 합니까? 이것이 무슨 해괴한 논리입니까? 소고기 열 덩어리가 돼지고기 열 덩어리와 부딪치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것은 세상의 논리일 뿐이며, 온갖 배신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잔뜩 만들어 낸 것입니다. 저의 이론은 ‘소고기 돼지고기 이론’입니다.

그것들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눈이 멀기까지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눈을 뜨고 볼 수 있다면 왜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여전히 맹인이 아닙니까?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그 여인이 나중에 다시 눈이 멀었을까요? 분명히 다시 멀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별의별 일이 다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자면 끝도 없습니다. 어떤 남편은 아내가 남자 직장 동료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집에 가서 칼을 갈며 아내의 온 가족을 다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다 무슨 논리입니까? 어떤 남편은 직장에서 상급 기관의 여성 임원을 접대했는데, 아내가 그것을 보고는 집에 가서 큰 난리를 피웠습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것을 아십니까? 직접 겪어보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아닙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보면 다 나옵니다.

돈에 눈이 먼 이야기는 훨씬 더 많습니다. 얼마 전 항저우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무슨 일이었을까요? 아내는 돈이 많고 남편은 돈이 없었는데, 아내가 남편에게 돈을 주지 않자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 것입니다. 살해한 뒤 시신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조금씩 끓여 먹은 사건도 있고, 시신을 토막 내어 변기에 버려 물을 내린 사건도 있었습니다. 결국 ‘변기장(便器葬)’이라는 기괴한 장례 방식까지 생겨난 셈입니다. 바다에 유골을 뿌리는 해양장도 있고, 산에 관을 매다는 조장도 있으며, 화장과 매장도 있는데 이번에는 변기장까지 등장한 것입니다. 참으로 탄식할 일입니다. 모두 돈 때문이며, 다 이 세대의 풍속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 만약 남편이 돈을 몹시 밝히는 사람이라면 조심하십시오. 어느 날 당신도 변기장에 처해질지 모릅니다. 모든 것이 돈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얼마나 많은 기업이 무너지고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탄 납니까?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세대의 풍속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이 돈을 한낱 장례용 종이돈처럼 여긴다면,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겠습니까? 죽이지 않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돈 때문에 자기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으면서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이 돈을 향해 앞다투어 뛰어들고 있습니다! “얼른 회사를 상장시켜야지.”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사람을 해치려는 것뿐입니다!

어느 날 제가 차를 타고 한 거리를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이 거리에 있는 건물들이 전부 그 회사 소유였어요. 그 회사가 다 사들였죠”라고 말했습니다. 수년 전의 일인데, 당시에는 수조 원대 자산을 가진 대단히 화려한 기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회사는 부도나고 대표는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무엇을 위해 산 것입니까? 저는 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일평생 이 세상의 논리 체계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완전히 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제가 드리는 말씀을 여러분은 우스갯소리처럼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여러분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저는 일을 해야 해서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다 나중에 암에 걸리고 나니 내려놓았습니까? 내려놓았습니다. 당신이라는 존재가 없어도 회사는 아무 문제 없이 잘만 돌아갑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가 대단한 줄 알고 내려놓지 못하는데, 이런 것들이 다 기이한 논리 체계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높이에서 내려다보면, 보이는 것은 온통 어리석은 바보들뿐입니다. 아내와 이혼하고, 재산을 분할하고, 자산을 빼돌리고, 감옥에 갔다가 나와서는 “다시 사나이답게 살아보겠다”고 합니다. 그만두십시오. 살아서 나올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고, 나온다 해도 이미 늙어버린 노인일 뿐입니다. 사람이 평생 한 편의 소동극을 연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고 영생이 없으니, 그저 이 세상에서 먹고사는 일만 생각하다가 한 편 또 한 편의 소동극만 벌이다 끝납니다. 계산을 완전히 잘못한 것 아닙니까? 비극입니다! 수천 년 동안 한 세대가 가고 또 다른 세대가 왔지만, 이를 꿰뚫어 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오늘 조금이라도 깨어나셨습니까? 여러분은 도대체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더 경험해야 이생의 논리 체계와 이 세대의 풍속에서 벗어나겠습니까? 여러분이 교회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제가 고마워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열심히 일하라고 하셨잖아요?”라고 합니다. 이 세대의 논리 체계를 위해 저더러 보증을 서달라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문제의 근원은 여전히 내면의 가치 체계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시대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소동극을 연출해 왔습니까? 지난주에 한 형제님이 제게 전화를 걸어 “목사님, 최근에 하신 설교는 전부 저를 두고 하신 말씀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오늘 설교도 당신을 향해 하는 말입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이 미련한 사람아! 언제쯤에야 정신을 차리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가운데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배우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기를 원한다는 찬양을 부를 때면, 때로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정말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길게 이야기했지만, 결론은 이 세대의 풍속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2. 본문 말씀

여러분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여러분을 그분께서 살리셨습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속을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랐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다 그들 가운데서 육체의 정욕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입니다. (에베소서 2:1-7)

3.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얼마나 크고 영광스러운 소망이 있는지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 오늘 우리 안에 있는 세상적인 가치 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려 주셔서, 이 세상에는 아무런 소망도 참된 기대도 없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 과거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세상에서 택하시고 주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셨사오니, 이제는 우리 자신을 더욱 깊이 처리하게 하시고, 우리 안에서 나오는 거짓을 제하여 버리고 이제부터는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더욱 경험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인자하심을 더 깊이 맛보아 다가올 세대에 아름다운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이 놀라운 은혜를 다 함께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4. 본문 배경

여러분, 바울 서신 중에서 가장 읽기 어려운 책이 바로 『에베소서』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왜 에베소서가 가장 읽기 어려울까요?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를 쓸 당시 그의 신학 체계가 가장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는 종이를 아끼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종이가 없고 양피지뿐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논리를 아주 농축하여 고도로 요약해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는 언제 쓰였을까요?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황제의 재판을 기다리며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쓰였습니다.

그 당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 어떤 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에베소에 들를 시간이 없자 자신이 에베소에 세운 교회의 담임목회자들을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에베소 각 교회의 담임목회자들이 바울을 만나러 왔을 때, 바울은 그들에게 “아마 앞으로 여러분이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들 부둥켜안고 통곡했습니다. 바울은 이 말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도 어떤 이들이 일어나 패역한 일을 행하고, 마귀의 거짓말을 따를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사도행전 20:30)

그 후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갔고, 결국 투옥되어 이스라엘에서 2년, 로마에서 2년, 눈 깜짝할 사이에 4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4년 동안 감옥 안에서 할 일도 없고, 인터넷을 할 수도 없으며, 읽을거리도 마땅치 않자 그는 자신의 신학 체계를 요약하고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에베소서』는 『로마서』보다 더 깊이 들어간 서신입니다. 어느 면에서 더 앞서 있을까요? 문제의 근본적인 뿌리를 뽑고자 한다면 에베소서야말로 확실하게 뿌리를 뽑아줍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에베소 교회에 보냈습니다. 왜 에베소서가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쓰였을까요? 에베소 지역의 목회자들 중 일부가 하나님의 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몇 가지 방면에서 하나님의 도를 벗어났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가정을 세우고, 가정 제단을 쌓고, 가족 관계를 중시하는 쪽으로 치우쳤습니다. 또 어떤 교회들은 점점 이 세대의 풍속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 세상의 풍속에는 생일 축하나 백일잔치 같은 여러 가지 세상적인 풍습들이 포함됩니다. 교회 목사가 환갑을 맞이하면 성대하게 잔치를 열고, 결혼식도 화려하게 치렀습니다. 점차 세속적인 논리 체계와 이 세상의 풍속이 교회 안으로 섞여 들어왔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비롯한 각지의 교회들이 이미 이 세상 풍속에 깊이 침투당했음을 알았습니다. 교회가 일단 세상 풍속에 물들면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지난 2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이 세상의 풍속이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것은 실로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어떤 목사님은 날마다 싸우는 부부를 유람선에 태워 공해상에서 다시 서약을 시키고, 웨딩드레스를 입히고, 사진을 찍게 했지만, 집에 돌아가서는 다시 피 터지게 싸웠습니다.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의 것들이 교회 안으로 섞여 들어왔기 때문에 바울은 ‘이 세대의 풍속’을 경계하며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이 세대의 풍속을 조심하라고 말씀드리는 이유입니다.

이 세상의 풍속이라는 것들이 겉보기에 천인공노할 악행처럼 보입니까? 아닙니다. 문제가 있어 보입니까?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입니다. 다 좋은 말 같습니다. 바르게 살라 권하고, 열심히 일하라 권하며, 가정을 잘 돌보고 자녀를 잘 교육하라고 권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아무 문제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정말 문제가 없을까요? 그것은 이 세상의 풍속에 속한 것이며, 사람의 이성에 합당해 보일 뿐입니다. 마귀의 가장 무서운 점은 바로 이런 것들을 교회 안으로 침투시켜,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성령의 임재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한 가지를 강력히 강조했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관’입니다!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기 위한 최고의 보물과 같은 책입니다. 바울은 귀신 쫓는 일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대해 많이 언급했습니다. 교회가 바로 세워지면 귀신 쫓는 것은 자연스러운 부산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깊은 차원의 단계로 들어왔습니다. 마귀가 예로부터 일해 온 방식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으며, 오늘날도 여전히 동일합니다! 이 세대의 풍속 안에 머물고, 이생의 가치 체계 안에 머물며, 육신의 정욕 안에 머무는 것이 마귀가 역사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귀신을 쫓으려면 먼저 자신의 육신을 쫓아내고, 이생의 풍속을 내쫓아야 합니다. 그것이 마귀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을 언급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이야기하며, 교회를 말하면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해진다는 것조차 사람들을 미혹하는 도구가 될 수 있으니, 마귀가 얼마나 교활하고 무섭습니까! 오늘 제가 몇 마디 덧붙이자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을 사랑하다가 항문이 파열될 지경에 이르러서야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나중에 또다시 항문이 터지면 그때는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사람은 상처가 아물면 고통을 잊어버립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는 그토록 열정을 내지 못할까요? 저도 참 의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을 때 값없이 주신 것이지만, 은혜를 받은 후에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命定)입니다!

이 사명에는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것이 포함되는데, 그저 찬양만 부르며 황홀경에 빠지는 것으로 많은 사람이 미혹당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사도’니 ‘선지자’니 하는 온갖 거창한 명칭을 만들어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온갖 것은 다 갖추었지만 정작 성령께서 거하시지 않으니, 다 헛수고가 아니겠습니까? 제가 예전에 교회를 개척할 때 한 가지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다 해놓았는데 하나님께서 “이것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시면 절대로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비극입니까? 제가 이 땅에서 성도들을 위해 만두를 빚고 밥을 지으며 분주히 뛰어다녔는데, 하나님께서 “내가 원한 것은 이것이 아니다”라고 하시면 어쩌겠습니까? 그때는 땅을 치고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주의 영이 저를 떠나지 않게 하시고, 제가 늘 주의 뜻 안에 행하게 하시며, 제 평생 이 땅에서 헛된 수고만 하다가 허무하게 끝나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주님께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시면 어떡합니까? 그나마 주님 앞에라도 가면 다행이지, 주님 앞에 갈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사람들은 훨씬 더 비참합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근본을 해결해야 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병 고치고 귀신 쫓는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5. 마귀의 역사

마귀는 무엇을 통해 역사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여러분을 그분께서 살리셨습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속을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랐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다 그들 가운데서 육체의 정욕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1-3)

마귀의 일이 무엇입니까? 마귀의 일은 바로 ‘이 세대의 풍속’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풍속은 이생(육신의 삶)을 기초로 세워진 논리 체계입니다. 이 세대의 풍속은 살인하거나 방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님, 저는 살인도 안 하고 불도 안 질렀습니다”라고 합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고 불을 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좋은 사람입니까?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입니까! 한 암 환자가 “목사님, 저는 제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기에 제가 물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착합니까?” 그러자 “저는 살인도 안 했고 방화도 안 저질렀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살인 안 하고 불 안 지른 사람은 세상에 널렸는데, 그렇다면 이 세상은 착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저는 거지를 보면 가끔 빵도 사줍니다”라고 합니다. 그것이 착한 사람입니까? 도대체 무슨 논리입니까? 이 세대의 풍속은 살인이나 방화가 아니며, 세상 풍속 안에서도 살인과 방화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강한 도덕관념이 존재하며, 사람들은 불륜이니 외도니 하는 온갖 단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결혼과 가정에 얽힌 도덕관념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해쳤습니까? 직장과 일상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옭아맸습니까? 마귀는 결코 여러분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위협하지 않습니다. 마귀의 사역은 바로 ‘이 세대의 풍속’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귀신을 불러들였습니까? 살인도 안 하고 방화도 안 저질렀으며 천인공노할 짓을 하지 않았어도, 남의 집이나 재산을 은근히 탐내는 마음만 품어도 충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님 집을 나한테 안 물려주면 누구한테 주겠어? 부모님께 손 좀 벌리는 것도 괜찮아, 나도 힘드니까”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대의 풍속입니다!

이 세대의 풍속 가운데 상당 부분은 재물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어떤 이야기에서 큰아들이 어머니를 모셔가자, 둘째 아들이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저 어머니 매달 수입이 얼마인지 다 알고, 매일 얼마 쓰시는지도 다 알아요. 남은 돈이 얼마인지 제 머릿속에 훤히 계산되어 있으니 알아두세요.” 그 돈이 자기 돈인 줄 아는 것입니다. 얼마나 지지리 궁상맞은 짓입니까? 사람이 가난하고 옹졸한 자식을 키우면 정말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그 궁상맞은 아들에게 또 아들이 있어서, 자기 아들 결혼식을 치러주려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이것이 다 이생에 얽힌 일 아닙니까? 아들 결혼식을 치르려면 돈이 필요한데 그 돈이 어디서 나옵니까? 90세가 넘은 노모에게서 뜯어내려는 것입니다.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세상을 가만히 관찰해 보십시오. 온통 이 세대의 풍속뿐입니다. 제게 묻는다면, 저는 세상의 많은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중요하다고 여기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죽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에서야 이런 말을 하는 줄 아십니까? 저는 20대 때부터 이런 태도로 살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20대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속 편하고 당당하게 살아왔겠습니까? 죽지 않을 일이라면 사소한 일이고, 죽을 일이라면 이미 더 이상 일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죽으면 좋은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영생 속에 살고 있는데, 죽는 것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참 유머러스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가 그렇게 하도록 일부러 내버려 두셨습니다. 사람들은 고의로 영생을 잊어버린 채 장례식에 참석합니다. 그날만큼은 잠시 정신을 차립니다. 시신을 화장로에 넣고 태운 뒤 유골을 긁어모으는데, 그 유골이 정말 그 사람의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유골함에 담아 무덤에 묻습니다.

어느 날 제가 장례식에 갔더니, 장례 전문 지도사가 유골함을 무덤 한쪽에 두고 반대편 자리에는 벽돌 하나를 싸서 놓아두었습니다. 제가 “이건 왜 둔 겁니까?”라고 물었더니, “남편분을 위해 남겨둔 자리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바로 옆에 서 있었습니다. 참 묘한 광경이었습니다. 훗날 남편도 이곳에 묻힐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제가 속으로 말했습니다. ‘남편이 나중에 어디에 묻힐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 만약 남편이 아내를 여럿 두었다면 어디로 가겠는가?’ 장례식, 결혼식, 결혼에 얽힌 도덕관념 등 이 모든 것의 대부분이 이 세대의 풍속입니다.

이 세상의 풍속은 정치든 경제든 이생의 모든 것으로 사람을 꽁꽁 묶어 비참하고 고달프게 만듭니다! 모두가 유골함을 향해 성큼성큼 직진하고 있으면서, 그 유골함까지 겨우 한 걸음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여든, 아흔 살이 되어서도 일자리를 하나라도 더 차지하겠다고 기를 씁니다. 참 일도 지독하게 사랑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생 병들고 고통스러우며 힘들게 살아간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가 사람을 사람답지도 귀신답지도 않게 짓밟아 놓도록 내버려 두시며, 그가 하나님을 찾는지 찾지 않는지를 지켜보십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겠다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경험했으면서도, 왜 에베소 교회처럼 다시 세상의 논리 체계로, 이 세대의 풍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까?

우리 교회에는 생일 파티를 챙기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를 위해 생일 파티를 열어주려거든 저리 치우십시오! 어떤 분이 “목사님, 환갑잔치를 열어드리겠습니다”라고 하기에 제가 “저리 치우세요, 난 아직 20대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기념합니까? 내가 예순 살이 된 것을 기념합니까? 기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르시겠지만 저는 올해 열여덟 살이고 아주 멋진 청년입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님, 노후 대책은 어떻게 하십니까?”라고 묻길래, “무슨 노후를 준비합니까? 젊음을 가꾸며 사는 것이 훨씬 낫지!”라고 했습니다.

오늘 성도 여러분은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과거의 논리 체계 속에서 마귀에게 짓밟히다가 하나님을 찾았고, 주님을 찾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으면서 왜 다시 옛것으로 돌아갑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에베소서』를 쓰며 논술한 핵심 내용입니다. 우리에게는 추구할 수 있는 풍성한 영광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와 소망이 있는데 왜 그것을 추구하지 않습니까?

6. 하나님의 구원

마귀의 역사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은혜였습니다. 본래는 귀신이 당신 안에 머물 수 있었지만,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귀신이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다시 믿음을 버리자 귀신이 되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세상의 논리 체계대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믿는 것입니까? 그것은 불신입니다. 성도 여러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 주신 것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며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참으로 단순합니다!

병이 낫고 나면 ‘아, 내 병이 다 나았으니 이제 마음껏 즐기며 살아야지! 즐기며 사는 것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 아닌가?’라며 산과 들로 놀러 다니고 먹고 마시는 데 빠집니다. 어떤 이들은 ‘야, 좋다! 병도 나았고 체력도 회복되었으니 이제 남편과 다시 신나게 싸울 수 있겠구나. 이제 다시 세상을 사랑할 자격이 생겼네!’라며 기운을 차립니다. 그래서 저는 한 가지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 자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뒤에 그가 내리는 ‘선택’이야말로 진짜입니다!

저는 수많은 암 환자를 섬긴 적이 있습니다. 기도해 주고 나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걷고, 밭에 나가 일해도 아무렇지 않으며, 고통스럽던 증상이 싹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 세대의 풍속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마귀의 역사는 바로 이 세대의 풍속이며, 그것이 당신을 철저히 망가뜨린 뿌리입니다. 뿌리를 뽑으려면 이 세상 풍속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저는 수많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은 시작에 불과하며, 회개하여 얼마나 많은 세상 풍속을 벗어버렸는가가 진짜입니다. 당신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는지 없는지는 바로 거기서 드러납니다.

오늘 우리는 귀신을 쫓는 더 깊은 차원의 단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깊은 단계는 바로 ‘이 세대의 풍속’을 처리하는 것이며, 이것을 다루어야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됩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단순히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대의 풍속을 끊어버리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더 이상 귀신 쫓는 일에 대해 쓰지 않고, 핵심 문제인 ‘이 세대의 풍속’과 ‘육신의 정욕’에 대해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자격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신 것은, 우리를 마귀의 거짓말과 이 세대의 풍속에서 건져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7. 하나님의 계획은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그의 시야가 고작 1년, 2년, 3년, 5년에 머물러 있다면, 기껏해야 자식이 장성하여 결혼해 며느리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소원의 전부일 것입니다. 그 소원을 이루고 나면 눈을 감고 유골함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작 3050년, 길어야 7080년짜리 안목으로 살면서 그 후의 일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런 목표만 가지고 산다면 제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가슴이 답답하고, 고혈압, 고혈당, 고지혈증에 시달리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식단을 조절하고 다이어트를 해보지만, 결국 무슨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돈이 있어서 병원에 가 치료를 받는다 해도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의 시야를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눈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볼 수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과 완전히 화목하는 길이며 우리 안의 세상 풍속을 제거하는 길임을 알게 됩니다. 예전에 유익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이제는 다 해로운 것으로 여기며 변화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올바른 교회관을 세워야 합니다. 교회관이란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 기록한 대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곧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 온전히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한가운데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에베소서 2:14)

하나님과 우리가 비로소 하나로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옛 중국에서는 이를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은 교회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지며, 그 위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왜곡된 미혹이 있습니다. 사도의 개념이 흐려졌고, 선지자의 개념도 모호해졌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선지자라고 부르며 온갖 헛소리를 늘어놓게 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해진다는 개념도 엉망이 되어, 그저 찬양을 부르며 감정에 도취되는 것을 친밀함이라고 착각합니다. 온통 혼란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에게서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에베소서 2:8-13)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여러분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여러분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여러분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에베소서 2:14-22)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처소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성전에 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이유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명 신학(命定神学)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 즉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축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그럼 부부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에베소서』 후반부에서 부부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 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내가 너희 부부를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고, 예수님은 교회의 신랑이시며, 이 둘이 하나로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일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어떠한지 온전한 관점을 세우고, 목표를 명확히 하며, 전략을 분명히 하고, 올바른 방법을 취해야 합니다. 목표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며, 전략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것이고, 방법은 우리 안에 있는 이 세대의 풍속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8. 평생 이 세대의 풍속을 처리하라

사실 저는 여러분의 질병 자체에는 그리 큰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대의 풍속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가장 큰 관심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안에는 얼마나 많은 세상 풍속이 숨어 있습니까? 사람의 체면을 차려주는 것이 세상 풍속입니까? 맞습니다. 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기쁘게 하려는 것이 세상 풍속입니까? 맞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부터 남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와서 지금까지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뜯어고쳐야 할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제게 “목사님, 주님 믿는 게 왜 이렇게 복잡합니까? 좀 더 간단하게 믿을 수는 없습니까?”라고 하지 마십시오. 이 세대의 풍속을 처리하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것, 이것처럼 단순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대의 풍속을 처리하는 것은 말은 쉬워도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렵습니다.

오늘날 우리 중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은 몇 명이며, 돈을 위해 사는 사람은 몇 명입니까? 하나님을 섬기자고 하면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닌 양 미적거리다가도, 돈을 벌자고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듭니다. 이제는 가장 보상이 크고 가장 영원한 보장을 선택할 수 없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영적 기업입니다. 평생 이 세대의 풍속을 처리해야 하는데, 오늘 여러분의 처리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제 말에 가시가 돋쳐 있어 듣기에 매우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가 여러분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안에 있는 ‘이 세대의 풍속’을 처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광채를 덧입고 싶지 않습니까?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떤 여자가 청바지에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걸어가며 ‘멋있다’고 뽐내는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은 조금도 멋진 것이 아닙니다.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시고, 주의 천사들이 베풀어 주는 영광의 빛이 감돌며, 천군 천사가 여러분 주위에 진을 치고, 여러분의 입술로 선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주시는 그런 삶을 원하지 않습니까? 간절히 원하고 꿈꾸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당장 결단하십시오. 어느 길목에 서 있든지 즉시 유턴하십시오! 앞을 향해 광적으로 달려가던 세상의 논리 체계에서 돌아서십시오. 그 끝에는 유골함밖에 없습니다. 어떤 길목에서든 지금 즉시 유턴하여 이 세대의 풍속을 처리하고 우리 안의 거짓을 벗어버리십시오. 얼마나 좋습니까! 가는 길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며,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물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다가 마침내 주님의 얼굴을 뵈옵게 될 것입니다. 아멘!

찬양 한 장을 부르고 헌금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만약 헌금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거나 헌금할 자격이 없다면 절대로 헌금하지 마십시오. 헌금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드리면 깊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마음을 찌르는 강력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제 조금 맑아지셨습니까? 오늘 드리는 헌금은 단순한 십일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온전히 주께 드리며 주님을 더욱 깊이 갈망하고 경험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더 깊이 맛보기 위한 결단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나타내 주시고 우리의 안목을 높여 주셔서,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기를 간구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비할 데 없이 귀한 최고의 선택입니다!

이 시간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오늘 저를 도우사 주님의 영적인 높은 산을 오르게 하시고, 주님을 더욱더 깊이 사랑하게 하옵소서. 주님을 더욱더 깊이 경험하게 하시고, 주의 말씀을 깊이 깨달아 주의 마음을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 오늘 저는 결단합니다. 더 이상 이생의 논리 체계 안에서 살지 않고, 이 세대의 풍속을 따르지 않겠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며 주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고, 제 마음이 온전히 주님의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 자신을 온전한 산 제물로 올려드리나이다. 하나님, 저의 헌신과 예물을 기쁘게 흠향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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