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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사사기 20장 - 하나님을 찾지 않음이 더 큰 재앙을 가져온다

2025-03-12 3,914 士师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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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师记-以色列人准备打仗
  • 1 于是以色列从但到别是巴,以及住基列地的众人都出来,如同一人,聚集在米斯巴耶和华面前。
  • 2 以色列民的首领,就是各支派的军长,都站在 神百姓的会中;拿刀的步兵共有四十万。
  • 3 以色列人上到米斯巴,便雅悯人都听见了。以色列人说:“请你将这件恶事的情由对我们说明。”
  • 4 那利未人,就是被害之妇人的丈夫,回答说:“我和我的妾到了便雅悯的基比亚住宿。
  • 5 基比亚人夜间起来,围了我住的房子,想要杀我,又将我的妾强奸致死。
  • 6 我就把我妾的尸身切成块子,使人拿着传送以色列得为业的全地,因为基比亚人在以色列中行了凶淫丑恶的事。
  • 7 你们以色列人都当筹划商议。”
  • 8 众民都起来如同一人,说:“我们连一人都不回自己帐棚、自己房屋去。
  • 9 我们向基比亚人必这样行,照所掣的签去攻击他们。
  • 10 我们要在以色列各支派中,一百人挑取十人,一千人挑取百人,一万人挑取千人,为民运粮,等大众到了便雅悯的基比亚,就照基比亚人在以色列中所行的丑事征伐他们。”
  • 11 于是以色列众人彼此连合如同一人,聚集攻击那城。
  • 12 以色列众支派打发人去,问便雅悯支派的各家说:“你们中间怎么做了这样的恶事呢?
  • 13 现在你们要将基比亚的那些匪徒交出来,我们好治死他们,从以色列中除掉这恶。”便雅悯人却不肯听从他们弟兄以色列人的话。
  • 14 便雅悯人从他们的各城里出来,聚集到了基比亚,要与以色列人打仗。
  • 15 那时便雅悯人从各城里点出拿刀的,共有二万六千;另外还有基比亚人点出七百精兵。
  • 16 在众军之中有拣选的七百精兵,都是左手便利的,能用机弦甩石打人,毫发不差。
  • 17 便雅悯人之外,点出以色列人拿刀的,共有四十万,都是战士。
  • 18 以色列人就起来,到伯特利去求问 神说:“我们中间谁当首先上去与便雅悯人争战呢?”耶和华说:“犹大当先上去。”
  • 19 以色列人早晨起来,对着基比亚安营。
  • 20 以色列人出来,要与便雅悯人打仗,就在基比亚前摆阵。
  • 21 便雅悯人就从基比亚出来,当日杀死以色列人二万二千。
  • 22 以色列人彼此奋勇,仍在头一日摆阵的地方又摆阵。
  • 23 未摆阵之先,以色列人上去,在耶和华面前哭号,直到晚上,求问耶和华说:“我们再去与我们弟兄便雅悯人打仗可以不可以?”耶和华说:“可以上去攻击他们。”
  • 24 第二日,以色列人就上前攻击便雅悯人。
  • 25 便雅悯人也在这日从基比亚出来,与以色列人接战,又杀死他们一万八千,都是拿刀的。
  • 26 以色列众人就上到伯特利,坐在耶和华面前哭号,当日禁食直到晚上;又在耶和华面前献燔祭和平安祭。
  • 27 那时, 神的约柜在那里;亚伦的孙子、以利亚撒的儿子非尼哈侍立在约柜前。以色列人问耶和华说:“我们当再出去与我们弟兄便雅悯人打仗呢?还是罢兵呢?”耶和华说:“你们当上去,因为明日我必将他们交在你们手中。”
  • 28
  • 29 以色列人在基比亚的四围设下伏兵。
  • 30 第三日,以色列人又上去攻击便雅悯人,在基比亚前摆阵,与前两次一样。
  • 31 便雅悯人也出来迎敌,就被引诱离城;在田间两条路上,一通伯特利,一通基比亚,像前两次,动手杀死以色列人约有三十个。
  • 32 便雅悯人说:“他们仍旧败在我们面前。”但以色列人说:“我们不如逃跑,引诱他们离开城到路上来。”
  • 33 以色列众人都起来,在巴力·他玛摆阵,以色列的伏兵从马利·迦巴埋伏的地方冲上前去。
  • 34 有以色列人中的一万精兵,来到基比亚前接战,势派甚是凶猛;便雅悯人却不知道灾祸临近了。
  • 35 耶和华使以色列人杀败便雅悯人。那日,以色列人杀死便雅悯人二万五千一百,都是拿刀的。
  • 36 于是便雅悯人知道自己败了。先是以色列人;因为靠着在基比亚前所设的伏兵,就在便雅悯人面前诈败。
  • 37 伏兵急忙闯进基比亚,用刀杀死全城的人。
  • 38 以色列人预先同伏兵约定在城内放火,以烟气上腾为号。
  • 39 以色列人临退阵的时候,便雅悯人动手杀死以色列人,约有三十个,就说:“他们仍像前次被我们杀败了。”
  • 40 当烟气如柱从城中上腾的时候,便雅悯人回头观看,见全城的烟气冲天。
  • 41 以色列人又转身回来,便雅悯人就甚惊惶,因为看见灾祸临到自己了。
  • 42 他们在以色列人面前转身往旷野逃跑;以色列人在后面追杀。那从各城里出来的,也都夹攻杀灭他们。
  • 43 以色列人围绕便雅悯人,追赶他们,在他们歇脚之处、对着日出之地的基比亚践踏他们。
  • 44 便雅悯人死了的有一万八千,都是勇士。
  • 45 其余的人转身向旷野逃跑,往临门磐去。以色列人在道路上杀了他们五千人,如拾取遗穗一样,追到基顿又杀了他们二千人。
  • 46 那日便雅悯死了的共有二万五千人,都是拿刀的勇士。
  • 47 只剩下六百人,转身向旷野逃跑,到了临门磐,就在那里住了四个月。
  • 48 以色列人又转到便雅悯地,将各城的人和牲畜,并一切所遇见的,都用刀杀尽,又放火烧了一切城邑。

《答疑解惑》

여러분 안녕하세요, 사사기 20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이 장을 다 읽고 나면, 이것이 무슨 엉망진창인 막장극인가 싶을 정도로 참으로 비참합니다. 이번 장의 주제는 "하나님을 구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은 더 큰 재앙"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구했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구한 것 같지만, 정말로 구했을까요? 사실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구하러 나아왔을까요? 이스라엘 각 지파는 시체 한 조각씩, 사람의 살점을 받았습니다. 어떤 지파는 시체의 가슴을, 어떤 지파는 다리를, 어떤 지파는 머리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그 당시에는 냉장고도 없었으니 고기 조각마다 썩어서 냄새가 진동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길르앗 땅으로 향했고,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그리고 길르앗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나와서 한 사람같이 미스바의 여호와 앞에 모였습니다. 그것이 정말 여호와 앞이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 각 지파의 지휘관들이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이 사십만 명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모여 레위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 레위 사람은 영향력이 대단했습니다. 그는 모세의 손자였고, 당시의 제사장은 아론의 손자였습니다. 한 사람은 모세의 손자이고, 한 사람은 아론의 손자였지만, 사실 모세와 아론 시대에도 그러했는데 모세의 손자와 아론의 손자 때에 이르러 그들이 어떠했겠습니까? 결국 별 볼 일 없었습니다. 성경 기록자도 모세의 손자를 기록하기조차 귀찮아했을 정도입니다.

곧 피해를 입은 여인의 남편이 대답하기를, 사십만 대군을 일으켜 사람들을 토벌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모세의 손자에게 물었으며, 모세의 손자 또한 대단하게도 자기에게 유리한 절반의 이야기만 늘어놓았습니다.

그 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내 첩과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내가 머물고 있던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 그를 죽게 한지라 내가 내 첩의 시체를 거두어 쪼개서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냈나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란하고 망령된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라 (사사기 20:4-6)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왜 자신들에게 이런 재앙이 닥쳤는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고, 마귀도 실수하지 않습니다. 착각하고 잘못한 것은 바로 이 모세의 손자입니다. 그는 자기가 모세의 손자이니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사역할 때 어떤 사람들은 제게 묻습니다. "선생님, 만약 이런 일이 선생님께 닥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대답합니다. "내게는 닥치지 않습니다. 내게 닥치기 전에 이미 회개했을 테니까요." 저는 당신처럼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오늘날까지 완고하게 버티며 남에게 속고, 빚을 지고, 온갖 난장판 같은 일들을 벌여놓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라면 이런 난장판 같은 일들을 벌이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의 손자가 벌여놓은 일에 대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의논하고 상의하더니, 결국 모든 백성이 한 사람같이 일어났습니다. 연합되었습니까? 네, 연합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는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백성들끼리는 똘똘 뭉쳐서 그저 공의를 따져 억울함을 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공의를 따지며 억울함을 풀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한 사람도 자기 장막이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기필코 기브아 사람들을 치러 가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은 이미 결정을 내려놓았고, 하나님을 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입니다.

예전에도 어떤 이들이 제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이렇게 해도 될까요?" 제가 뭐라고 답했을까요? 저는 틀림없이 "해도 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선생님, 제가 그 사람과 결혼해도 될까요?", "선생님, 제가 그 여자와 결혼해도 될까요?", "선생님, 제가 이 사업을 해도 될까요?", "선생님, 제가 이렇게 해도 될까요?" 저의 대답은 한결같이 "다 해도 됩니다"입니다. 왜 전부 해도 된다고 할까요? 여러분이 이미 결정을 다 내려놓았으니,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보라는 뜻입니다.

이제 좀 분별이 생기셨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 모세의 손자를 위해 공의를 바로잡고 억울함을 풀겠다고 나서는데, 아무도 말릴 수 없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따져 물었다면 어땠을까요? 음행한 첩이 친정으로 돌아갔고, 그 남편은 미가의 우상을 만들고 미가의 집에서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었으며, 그러고 나서 다시 그 음행한 첩을 데리러 갔는데 모세 손자의 장인은 기어이 그를 붙잡아 두었습니다. 결국 해질 무렵에 길을 떠났다가 마침 기브아에 이르러 이런 일을 당한 것입니다. 저라면 "자업자득이다, 꼴좋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우리 가운데는 참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꼭 아셨으면 하는 것은, 수많은 일들이 사실은 '자업자득'이라는 점을 영원히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구하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생각해보았더라면 어땠을까요? 이 레위인, 모세의 손자는 유다 베들레헴에 있었는데, 거기는 왜 갔을까요? 알고 보니 집에서 누군가와 토라지고 기분이 상해서 온 가족을 데리고 떠나 에브라임 미가의 집에 가서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굳이 이 사십만 대군을 일으킬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럴 필요 없었습니다. 자업자득으로 끝날 일인데 그렇게 어리석게 굴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사십만 대군까지 일으키다니요. 우리는 마귀가 무슨 짓을 하는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모세의 손자를 미혹하고, 미가를 미혹했습니다. 미혹하고 난 뒤 재앙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닥쳤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원인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결국 재앙은 더욱 커졌습니다. 만약 어느 단계에서든 하나님을 제대로 구했더라면 이런 결과에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죽어 마땅한 자는 바로 모세의 손자였고, 첩이 죽은 것은 당연한 죽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불쌍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미운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어떤 좋은 것에도 부족함이 없으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사십만 대군을 동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번에 저와 함께 읽으시면서 무언가 느껴지십니까? 부디 흥분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제 말을 듣고 감정이 무너지며 "세상에, 너무 인정머리가 없다, 너무 공의가 없다"고 합니다. 사실 지나치게 의인이 되려 하면 사람이 죽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구하지 않았을까요? 사람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을 의지했다

베냐민 지파를 공격할 때, 사십만 대군이 한 사람처럼 뭉쳤고, 베냐민 지파는 겨우 이만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이때 여러분은 조심해야 합니다. 만약 이를 두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 되게 하셨다고 읽는다면 그 배후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며칠 동안 이 본문을 연구해보니 온갖 해석이 다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보고 나니 저도 납득이 잘 안 가고 계속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오늘 오후 두 시쯤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사십만 대군으로 작은 베냐민 하나 멸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전히 사람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군사들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고 활을 든 자들도 있어, 폼을 잡는 것만 봐도 다 용사 같았습니다.

베냐민 사람들은 더욱 대단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이미 습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무예는 이스라엘 전체 지파 중에서도 매우 뛰어났기에 군대를 훈련하는 것도 매우 전문적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들 중 칠백 명은 모두 왼손잡이였는데, 물매로 돌을 던지면 머리털 하나 빗나가지 않고 겨냥하는 족족 맞추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람은 참새보다 훨씬 큰데, 하나를 조준하면 백발백중으로 죽이니 대단히 무서운 자들이었고, 오늘날로 치면 저격수들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렇게 대단한 군대를 이끌고 있다면 항복하겠습니까? 당연히 안 합니다. 이때는 이미 피가 끓어오르고, 주권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게 됩니다. 베냐민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네가 사십만을 동원했다 해도 난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비록 우리가 이만 명뿐이라 해도, 우리 칠백 명만으로도 기드온의 삼백 용사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러나 결과는 완전히 참패였습니다. 칠백 명은커녕 이만 명이 넘는 사람이 다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를 의지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사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하나님을 구하지 않습니다. 다들 먼저 결정을 내려놓고 나서 하나님을 구합니다. 결정을 먼저 내린 뒤 하나님더러 책임지라고 하거나, 아니면 아예 구하지조차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왜 찾아? 내 손에는 돌을 던질 수 있는 왼손이 있는데.' 이것은 전부 힘 있는 자들의 논리 체계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사사기에 기록된 이러한 상황은,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멋대로 살아가는 모습이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달려와서 말합니다. "목사님, 기도의 능력이 대단하시니 제 아이를 위해 기도해 주시면 십만 위안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고작 십만 위안짜리인가?' 저는 그런 짓 안 합니다. 빚에는 채권자가 있고 재앙에는 뿌리가 있는 법이니, 먼저 회개부터 하십시오. 회개하지 않으면 제가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온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제가 가장 꺼리는 이들이 바로 용한 스승을 찾아 섬기듯 사람을 우상화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하지 않습니까? 보시다시피 저는 유덕화처럼 잘생기지도 않았고 성룡 같은 무술 실력도 없습니다. 외모도 볼품없고 말투도 거칠며, 늘 여러분을 향해 머리가 왜 그리 멍청하냐고 쏘아붙입니다. 그 말을 듣고 여러분은 상처를 받고, 저를 직접 보고 나면 환상이 깨집니다. 인터넷에서 제 설교를 들을 때는 대단한 줄 알았겠지만, 대단하긴 뭐가 대단합니까, 그저 그 모양 그 꼴일 뿐입니다. 우리가 신뢰할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자유케 하신다면 참으로 좋은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자유케 하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저 사람을 의지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중화권 사명신학(화인 사명신학)은 배우는 신학입니다. 여러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악행을 깨달아 알아가며, 자기가 어쩌다 이토록 많은 재앙을 겪게 되었는지, 어떻게 이 재앙의 피해자가 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십만 이스라엘 대군이 행한 짓을 얼마나 많이 저질렀습니까? 우리는 기브아 사람들이 행한 저런 짓들을 얼마나 많이 행했습니까? 생각해 보면 참으로 탄식만 나올 뿐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한 것은 그 불량배들을 내놓으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사실 그 불량배들을 넘겨받는 데 그렇게까지 힘을 뺄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십만 군사를 일으키는 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듭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도 다 팽개치고 백 명 중에서 열 명을, 천 명 중에서 백 명을, 만 명 중에서 천 명을 뽑아 군량을 나르게 했습니다. 백성을 괴롭히고 재물을 낭비하는 일은 결코 축복을 낳을 수 없으며, 결국 육만 명이 넘게 죽는 재앙만을 불러왔을 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거대한 비극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늘 자기에게는 잘못이 없으며, 이런 재앙을 당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물었던 질문 자체가 문제투성이였다

어떤 사람은 "선생님,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구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물었던 질문은 그 자체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리이까?"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애초에 그들에게 올라가라고 명하신 적이 없습니다.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하나님도 참 유머러스하게 "유다가 먼저 올라갈지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 질문은 '누가 먼저 죽으러 갈까요?'라고 묻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유다가 먼저 죽으러 가거라.' 여러분 중에 유다 지파가 가장 강한데, 가장 강한 자가 올라가면 이길 수 있을까요? 못 이깁니다. 가장 강한 자가 올라가도 못 이기는데, 그 아래 지파들은 더 형편없으니 더더욱 이길 수 없습니다.

사실 많은 형제자매들이 제게 와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제가 여기에 투자해도 될까요?"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해도 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대뜸 제게 묻습니다. "어느 것에 투자해야 할까요? A, B, C, D 중에 하나 골라주세요." 그러면 저는 눈감고 A를 찍습니다. A가 마음에 안 들면 B, B가 마음에 안 들면 C, 그냥 눈감고 아무거나 찍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라고 허락하신 적도 없는데, 다짜고짜 누가 먼저 올라가느냐고 묻습니까? 하나님은 눈감고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고 대충 던지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깊은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절대로 이런 식으로 묻지 마십시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누가 먼저 올라가야 하느냐고 물었을까요? 아무도 먼저 올라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로 미루고 떠넘기며 선뜻 나서려는 이가 없자 그제서야 하나님께 물었고, 하나님은 유다가 먼저 가라고 하셨습니다. 유다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어쩔 수 없구나' 생각했습니다. 결국 올라가자마자 이만 이천 명이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올라가자마자 이만 이천 명이나 죽었지?' 하며 의아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애초에 그렇게 안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묻는 태도는 대단히 악했습니다. '하나님, 누가 먼저 올라갈 수 있습니까? 보시다시피 우리는 아무도 먼저 가고 싶지 않은데, 도대체 누가 먼저 올라가야 합니까?' 하나님은 정말 유머러스하게 맞장구치시며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고 하셨는데, 아마도 말을 더듬으시듯 "유, 유, 유, 유다가 먼저 가라" 하셨을 것입니다. 누가 먼저 가든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유다는 장자의 명분을 얻어 지파들 중에서 으스대며 가장 기고만장했던 지파였습니다. 아마도 모세의 손자를 위해 공의를 바로잡자고 큰소리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한 것도, 하나님께 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올라가자마자 이만 이천 명이 죽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돌아와 넋이 나갔습니다. 많은 형제자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 제가 그 사람과 결혼해야 할까요?" 그러다 결혼하고 나서 재앙이 닥치면, 왜 이렇게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실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신호는 이미 명백했습니다. 모세의 손자가 우상을 만들었는데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으니, 가장 먼저 멸망당해야 할 자는 바로 그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개의치 않았고, 그는 심지어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음행한 첩 하나 죽었다고 이런 난리를 피운 것입니다.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 용기를 내어 전날 진을 쳤던 곳에 다시 진을 쳤습니다. 진을 치기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저녁까지 울며 부르짖고 여호와께 여쭈었습니다. "우리가 다시 나아가 우리 형제 베냐민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올라가라, 올라가라, 올라가라." 여러분, 이 뉘앙스가 느껴지십니까? 훗날 여러분이 제게 "선생님, 제가 그 사람에게 시집가도 될까요?"라고 묻는다면, 제 대답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래라, 그래, 그러려무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뉘앙스를 알아듣지 못했으니 자업자득입니다. 결국 올라가서 또 일만 팔천 명이 죽었습니다. 사람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뉘앙스를 알아듣지 못할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울고불고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이런 악어의 눈물을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합니까? 사실 하나님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영원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고, 마귀도 실수하지 않습니다. 착각하고 잘못하는 것은 오직 우리 지구인들뿐입니다. 재앙이 사람에게 임하는 것은 틀림없이 이전에 심은 것이 있기 때문이니, 스스로 서서히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면 그것은 분명 비극입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여쭙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비극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질문하는 법조차 모르니, 결국 통곡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 번째로 하나님께 여쭈었을 때, 비로소 약간의 겸손한 태도를 가졌다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사사기 20:26)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 번째로 하나님께 여쭈었을 때, 드디어 약간의 겸손한 태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사십만이 모였을 때는 그 사십만 대군에 대해 소망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이제는 소망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아론의 손자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시고 섰더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쭈어 이르되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시는지라 (사사기 20:27-28)

앞서 이스라엘 온 백성이 벧엘로 올라가 여호와 앞에 앉아 울며 그날 저녁까지 금식하고, 여호와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마침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생각을 해냈고, 드디어 조금 겸손해져서 교만과 오만을 번제물, 화목제물과 함께 태워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모습이 아닙니까? 작은 재앙을 만났을 때에는 여전히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그 자신감은 믿음(faith)이 아니라 자기 확신(confidence)입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이며, 믿음(faith)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기 확신(confidence)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며,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자기를 믿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드디어 약간의 겸손한 태도를 보이자, 하나님께서 보시고 서둘러 긍휼을 베푸시며 "내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주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참으로 수고로우십니다. 이런 무리를 보고 계시자니 정말 견디기 힘드셨을 것입니다. 셋째 날에도 여전히 서른 명이 죽었습니다. 물매로 던진 돌이 멀리 날아와 머리에 맞으면 당연히 목숨을 잃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응답하여 베냐민 사람들을 너희 손에 넘겨준다 할지라도, 너희는 이 일이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내가 언제 너희더러 사십만 대군을 일으켜 베냐민을 치라고 했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죽은 그 서른 명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셨고, 마귀도 실수하지 않았으며, 물맷돌조차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착각하고 잘못한 것은 사람 자신이며, 그 서른 명도 자업자득이었습니다. 그들은 속으로 '설마 내가 맞겠어? 그 돌이 그렇게 정확하겠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를 믿었으니 그 짓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 번째로 하나님께 여쭈었을 때, 많은 이들이 울고불고했지만 어떤 이들은 여전히 승복하지 못하고 '우리가 이 베냐민 놈들을 못 없애겠냐' 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베냐민 사람들에게 또 당했고, 이 서른 명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들이 약간의 계략을 써서 먼저 복병을 매복시킨 뒤, 이스라엘 군대 소대로 베냐민 사람들을 성 밖으로 유인했습니다. 베냐민 사람들은 이때 매우 기고만장하여 자신만만했습니다. '우리의 과학기술은 일류이고, 무예 실력도 일류다!' 하며 모든 것을 무시했습니다.

베냐민 사람들은 한 번 승리하여 이만 이천 명을 죽였고, 또 한 번 승리하여 일만 팔천 명을 죽였으니, 이번에는 적어도 일만 육천 명쯤은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정예병 일만 명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베냐민 사람들은 '겨우 일만 명밖에 안 왔네, 숫자가 안 맞잖아, 난 일만 육천 명은 되는 줄 알았는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자신이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은 채 자신감에 도취된 것입니다.

소설에서 흔히 듣던 이야기와 같습니다.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를 쥐고 적장의 목을 주머니 속 물건 꺼내듯 벤다는 식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머니 속 물건을 꺼냈습니까? 자기가 주머니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이번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베냐민의 기브아 성으로 돌진했고, 베냐민 사람들은 성읍에서 연기 기둥이 치솟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돌아서서 맞서자, 베냐민 사람들은 재앙이 자기들에게 닥친 것을 보고 크게 당황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관을 보지 않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격이며, 교만과 오만은 반드시 스스로 재앙을 불러오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절대로 함부로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교만할 자격이 있어 보일 때조차 교만하지 마십시오. 사람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언제 변을 제대로 볼 수 있을지조차 자기 마음대로 못 정하는데, 자기가 무슨 대단한 존재나 됩니까? 자기가 한낱 인간임을 알아야지, 교만 떨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기어이 1억이라는 '소박한 목표'를 이루었다고 하지만, 지금 1억이 소박한 목표입니까? 요즘은 1억 만들기가 참 어렵습니다. 수많은 쇼핑몰 광장들을 내다 팔며 돈을 끌어모으고 있지 않습니까. 한 푼의 돈이 영웅호걸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수조 원대 기업 제국을 세우겠다며 거만해져서 걸음걸이부터 달라지고 바람을 가르듯 걷습니다. 손을 들어 올리는 모습은 위대한 영도자를 쏙 빼닮게 흉내 냅니다. 하지만 그 거대한 제국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사람도 사라졌습니다. 회사는 남아 있을지언정 창업자는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여러분께 가장 기본적인 상식 하나를 권면합니다. 바로 여러분 자신이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람임을 모른다면 끝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살아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십만팔천 리나 멀었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오만방자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자기가 개나 돼지인 줄 안다면 그나마 나을 것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여, 자신이 한낱 인간이며 하나님이 필요한 존재임을 알고 결코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일잔치 한 번에 20만 위안을 썼는데, 4개월 뒤에는 영원히 생일을 쇠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암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약간의 겸손한 태도가 있는 것은 언제나 유익합니다. 어떤 이들은 1억은커녕 백만 위안만 쥐고 있어도 걸음걸이가 달라집니다.

사람이 이렇듯 깊이가 없고, 자기가 사람인 줄도 모르며, 돈이란 무가치한 배설물과 같다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이번 기회에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계시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요, 하나님이 없으면 무엇을 가져도 헛수고이며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쓸모가 없습니다.

이 재앙으로 6만 5천 명이 죽었다

한 첩 때문에, 그리고 모세의 손자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단 지파의 제사장이 생겨난 것은 에브라임 사람 미가가 우상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미가는 왜 우상을 만들었을까요?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저주했기에 그 저주를 풀려고 우상을 만들었다가 결국 꼬리를 무는 재앙 속으로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연이은 재앙을 겪었다면 발뒤꿈치로만 생각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정말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젊었을 때 주님을 알고 주님을 구할 수 있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람임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내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재앙을 통해 사람이 깨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여전히 깨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언약궤가 실로에 있던 날들 동안, 단 지파에는 미가의 우상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 어떤 재앙도 이 단 지파를 깨우지 못했고, 수많은 재앙도 이스라엘 온 지파를 깨우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베냐민 지파가 거의 전멸하여 겨우 육백 명만 남았는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깨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곧 재앙의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고 이 역사 속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재앙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 책임의 굴레는 언제나 우리 손에 있고 우리 머리 위에 있습니다. 문제를 찾으려면 항상 우리 자신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스스로 욥이라도 된 줄 착각하지 마십시오. 욥조차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했습니다. 욥이 당한 재앙에도 분명 원인이 있었습니다. 재앙을 겪은 욥은 회개했지만, 재앙을 겪고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며, 우리 형제자매들이 이 말씀을 듣고 깨어나기를 바랍니다. 평생 우리를 지으신 주님을 기억하고, 평생 자기가 잘못 살았음을 인정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저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보기 드물게 마음이 완고하지 않은 사람이라, 잘못되었다 싶으면 즉시 회개하고, 문제가 보인다 싶으면 지체 없이 회개합니다. 회개가 가장 훌륭한 영적 전쟁입니다. 하나님께 여쭙고, 하나님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영원히 가장 아름다운 선택입니다.

여러분이 우리 가운데서 이 은혜를 누리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중화권 사명신학(화인 사명신학)은 "우리가 잘못 행했다!"라는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행해야 합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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