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Q1:老师,我刚来教会的时候也得到了恩典,找到了一个大厂的工作,进去了以后,工作强度很大,就开始全心全意的爱工作,想要得着领导赏识,非常想得到认可,把神给忘了,把神丢一边去了,后来就丢了工作。现在心里苦,身上也苦,对世上的什么都没热情了。我想问怎么才能保持对神的热情?如何正确的看待世上的工作?保罗是怎么做的?
这个问题好,很多的人在做选择的时候就选择错了。选择错了原因很简单,是里面的逻辑体系不对。为什么逻辑体系不对?就以为神的大能,能给他一份工作,剩下的就对神说:祢躲远点啊,结果神就躲远了。他本来就不行,还让神躲远一点,说:我自己来。自己来怎么着?自己来就辛苦,因为你干不过这世上的邪灵。
为什么让神躲远一点呢?因为把工作当成神了。人一旦把工作当成神了,爱工作就如同爱神一样,爱工作超越了爱神。这是什么逻辑体系呢?这就是耶罗波安的金牛犊的逻辑体系。其实人活着不是靠工作,不是靠能力,不是靠势利,不是靠才干,人活着是靠神口里所说的一切话!
所以我想人应该怎样看待世上的工作?工作有什么好看的吗?神既然给我们一份工作,那神就一定会帮助让我们把这份工作做好。但是我们把神离弃了,你说这不是耶罗波安吗?那怎么样才能保持对神的热情?需要保持吗?如果人聪明,知道神是我们的一切,我们还需要保持吗?如果一个人知道神是我们的一切,神帮助我们,神是我的恩典,我每一天生活都需要神!还需要我们保持热情吗?不需要,你一定会有热情。
但是人心里头苦,因为人证明了一圈,是证明了自己的愚蠢。前面主日所讲的这个题目,人老想证明自己,结果证明自己不行,那不就完蛋了吗!我想这问题不需要保持对神的热情,那如果人要知道神是个宝贝,怎么可能没有热情呢?如果人知道神是个宝贝,看待世上的工作有什么好看待的?保罗是怎么做的?保罗就是这么做到。你需要慢慢琢磨,在什么地方效法耶稣呢?咱们讲的不是照着主所行的去行吗?但是人不信那就毁了。
Q2:老师好,《约翰一书》里说“从此我们知道如今是末时了”说这话距离现在已经过了近2000年了,现在还没到末时吗?
这个老约翰以为到了末时了,他们以为耶稣很快就会回来,但是一等,等了两千多年。两千多年过去了,到末时了没有?现在比那个时候更末时了,那个时候都是末时了,现在更是末末时了。所以我想咱们的眼光是人的眼光,老约翰讲的末时,那是最后一个小时。最后那个小时,我问你对神来讲是一个小时,天上一天,地上千年,那我问你那一个小时是多少?那老多了。千年如一日,所以我们眼光要改,千年如一日那就是两千年。
问题是末时有多长的时间你不好说,也就是说这末后的事情,就是这末后的阶段。什么阶段?教会的阶段,这末后的阶段就是教会的阶段。教会的阶段是干啥的呢?建造神荣耀的教会,然后教会要欢欢喜喜迎接主耶稣的再来,教会要成为耶稣基督的新妇。就是这么个逻辑,所以叫做末后的阶段。
再下一个阶段呢?就是耶稣基督再来,那耶稣基督再来还有个一千年,这一千年挺有意思。这一千年干啥呢?就是在地上掌管地上的国家。那有些人就问到了:我们这些人将来怎么办?你别留在天上。留在天上干啥?神造人就是让我们管理这地,结果跟耶稣在这地上管理一千年,一千年以后就有新天新地。
新天新地降临的时候我们就与神一直同在,我跟你讲在那儿活的老好了,活在神的荣耀当中!那新天新地需要不需要管理,仍然需要管理。记住啊,新天新地不是在那里喊:哈利路亚。新天新地仍然在那里学习管理,就是新天新地仍然需要我们这些人管理。我们现在得好好学习,我猜到那个时候可能还得需要写软件,只不过到了那个时候人工智能已经很厉害了!
Q3:老师好,经常听到老师讲到“小子”,这章又提到了“小子”,我对“小子”不是很理解,请您再讲的详细一些?
就是孩子们,小子就是孩子们呐。这回明白了吗?因为他是老头儿嘛,所以他就管弟兄姐妹叫孩子们。那叫孩子们,有的叫父老,父老就是在教会管事的;年轻人就叫做少年人,就是在教会里没管事的。
Q4:老师,在工作中遇到小人,工作就很困难。不知道是不在乎,然后继续工作?还是换一个工作?
这个事我得给你一个建议,其实什么东西也不能够拦阻神要祝福你!听明白了吗?我们在工作中遇到小人。难道能够改变神的旨意吗?如果你是约瑟,就是给你卖到埃及那得是老大老大的小人了。那小人把你卖到埃及能够改变你的命运吗?能改变神在你身上的计划吗?不能。
当然你换一个工作能不能改变神在你身上的计划?也不能;你不换一个工作,会不会改变神在你身上的计划?不会。因为神在你身上的计划不是这份工作,乃是永远长存。就是我们的眼光看到这些东西的时候反应非常奇怪:啊,小人,就是经常遇到小人,遇到小小人。其实遇到啥?没事!该做啥、不做啥不重要,不过你想换就换。
Q5:老师好,我好想回到起初刚刚信神的那个时候。怎么能回到起初呢?
怎么回到起初?回到起初干啥?是心里头要知道起初如何领受恩典,起初你没有为神做什么就领受恩典,你一旦要想为神做点啥,才能领受恩典那就成了交易。所以要知道领受恩典,千万不要跟神搞交易,搞了交易以后你就麻烦了。
Q6:老师好,保罗和彼得都有命定,为什么行出来的结果不一样?
你咋知道?你哪里看出彼得有命定了?我是不知道你怎么看出来的,但是保罗有这个命定我知道,彼得有没有我就不知道。如果真的有的话,为什么要装假?你读《加拉太书》彼得为什么要装假?为什么要讨人的喜欢?如果有命定死都不怕,怕什么?为什么要怕人呢?怕那些法利赛人做什么呢?难道那叫做有命定啊?我不知道你说的这些是个啥,还保罗和彼得都有命定,你怎么得出这个结论的?如果你得出这结论,下面的就回答不了了,因为不一样,所以行出来的不一样。
Q7:老师好,我对本章第16节:"眼目的情欲'不太懂,请老师指点。
眼目的情欲咱们叫回头率,大家知道回头率吗?有一个夫妻在大街上走,结果这个老公看到对面有个美女走过来,然后那眼睛就随着美女转过去。他老婆就掐他一把,你看啥?好看吗?后来这个老公就说,哎呀!人人都喜欢看美女。是这么回事吗?是他自己说的。我想这眼目的情欲就是啥?看自己看着喜好的。人眼睛很奇怪,一看一摞、一打一打的钞票,哎呀!挺好;一看人家贪官贪了很多,哎呀!挺好,我也考个公务员将来也有机会贪,是不是那么回事?
眼目的情欲就是啥?眼睛看到的都想占为己有,情欲。你说,唉!老师,这眼睛看到的都是好的呀!那你得看这是啥,是不是啊?我想这眼目的情欲是世界上人的情欲的一个部分,就是满足自己的眼球。眼目的情欲就想看这个,看那个,看!看完了你要干啥也不知道,就想得着,也不知道。肉体的情欲就不用说了,肉体的想吃啊,想喝啊,食色性也。这个今生的骄傲这都属于今生的败坏的根源,就是这个世界上的东西。我解释的对吗?不同意的没关系,咱们可以商量。
Q8:老师,我和老公几个月前因为分歧彻底分开,我从那时起每一天开始经历神的恩典,一步一步地带领认识到自己的问题,也真正认识了神。每一天心里头平静安稳喜乐,也一直听你的课程。有一天有事回去看到我老公死气沉沉的,整个家里都很压抑,我心里就很担心,不知道怎么对他,这离婚对不对?替不替他祷告?
其实问我这个问题,我一回答的话,人家就觉着我好像破坏人家庭似的。其实在一起难受这不是神的旨意,这肯定不是好的,是吧。为啥呢?你想想都知道,这个逻辑还是蛮简单的,我给你算笔账。夫妻俩有一个人黑脸,两个人的脸色就都不好看,是不是啊?比如你高高兴兴回家喊老公,老公苦瓜脸。他一苦瓜你马上你也不能成甜瓜,他苦瓜了你西葫芦了,他是个苦瓜,你就是个西葫芦。
结果第二天你老公苦瓜脸变香蕉脸了,回来了,结果你这西葫芦变苦瓜了。老婆,我回来了,结果一看老婆的脸变苦瓜了,他又变成西葫芦了。你想想看他有一半的时间变苦瓜,你有一半的时间西葫芦。后来他变成一半的西葫芦的时候,你就变成一半的苦瓜,你说这家的日子咋过?
所以有人跟我说,他说这世上的婚姻就是有百分之多少,他跟我讲的这比例我也没记清楚。有百分之四十的人大概活在水深火热中;有百分之四十的人呢,不冷不热;还有百分之二十的人呢,是个啥?不知道。反正就是那么个过法,挺吧!挺到老,挺到头,是吧。那你怎么办?你就得这么办。
那如果现在分开了你挺好,你还要回去吗?就别回去了,他不开心那是他的命,谁不开心跟咱也没什么关系。他不开心那是他的命,他自己选择不开心,那跟你已经没关系了,你也不在了嘛。他那个西葫芦脸,苦瓜脸跟你这脸没关系了。你回去一看,你也不能把他变一下,是吧。我看呐,想替他祷告就是想得点心里安慰,不替他祷告你就开始好好地寻求一个命定,为神而活。
Q9:老师,你如何看待最近很火的董宇辉事件?我们是不是也需要学习了解人性这个东西?《圣经》说我们需要灵巧像蛇,是不是说我们也需要规避人性的恶?但是,是不是又会陷入属世界的方法里就不依靠神了?
不知道,不认识董宇辉。他火不火也比不上耶稣那么火,听见没有?耶稣多火呀,是吧。那我怎么就看不见人说,哎呀!最近耶稣可火啦,耶稣火你咋不知道呢?耶稣这么火你不知道啊?我问你耶稣火不火?耶稣老火了。那我告诉你要学习神的真理,学习认识神,这是很重要的。如果一个人不认识神就不知道神的恩典,不知道神的恩典就不会谨守遵行神的旨意,然后就灭亡。进到灭亡的路是又宽又大的,就算是你了解了人性这个东西你又能怎样?当然啦,你了解了解还是可以的,但是问题是说你是否把根基建在耶稣基督的真理之上。
Q10:老师,能不能够解释一下,怎么理解:“恩膏存在心里不用人教训你们,自有主的恩膏在凡事上教训你们”?
我刚才没解释清楚啊?你问得太好了,因为我没解释清楚。这个恩膏就是命定,把命定存在心里,然后所有的事就迎刃而解,这回知道了吧?就不用人教你,教你教不了。一个人没有命定就为他活着那点小屁事活着,然后你怎么教?教不了,人要有命定也不用人教,《圣经》白纸黑字一读就懂,为啥?因为他为此而生,为此而活,为此来到这世上,也为此而死,这就是你的命定。如果你为主全然将自己摆上,你还需要什么人教你吗?你已经全然摆上神岂不是更乐意将祂自己启示给你吗?清楚了吗?
愿神祝福大家,弟兄姐妹再见!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요한일서 2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요한일서는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장들은 이해되는 것 같으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답답한 것은 글자는 다 아는데 모아놓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기름 부으심, 영원히 거함, 죄를 짓거나 짓지 않는 것 등 여러 거대한 개념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지난 세월 동안 제가 사람들에게 가장 자주 들었던 말은 "사람이 죄를 짓지 않고 어떻게 삽니까?"라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이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도 이런 말을 적지 않게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요한일서,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읽고 깨닫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을 가르쳐 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제'를 붙잡는 것입니다. 주제를 붙잡지 못하면 여기저기 갈팡질팡하며 매우 혼란스러워집니다. 핵심을 잡을 줄 알아야 공부를 잘할 수 있습니다. 핵심을 잡고 문맥을 연결하면 이해하기가 쉬워집니다. 이 장의 주제는 바로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는 자는 영원히 거할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를 쓴 사도 요한은 100세가 넘도록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이처럼 장수한 노사도는 교회의 흥망성쇠를 목격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를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정말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저를 따라 이렇게 주님을 믿으면 어떻게 먹고살며, 가정은 어떻게 챙기느냐고 따지는 사람들의 말을 자주 듣습니다. 이렇게 믿으면 돈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돈에 눈이 멀었거나 밥벌레가 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며, 오늘의 양식뿐만 아니라 영원한 양식까지도 배불리 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너희로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핑계 대기를 매우 좋아하며, 세상 사람들도 다 자기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핑계를 대고, 자신이 지은 죄에 핑계를 대며, 결국 자기가 저지른 그 어리석은 짓들에 대해 끊임없이 핑계를 찾는 것입니다. 저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논리도 들어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후에 회개하고 나서는, 죄를 짓는 것도 은혜라고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짓는 것이 은혜입니까? 사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죄를 짓고 하나님께 다시 징계를 받더니, 죄를 짓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하느냐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도대체 무슨 논리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너희로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한일서》 2:1)
이 말씀이 얼마나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러나 세상 교회 안에는 "어차피 대언자가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죄를 지어도 괜찮다. 예수님의 보혈이 모든 죄를 덮으실 수 있다"라는 말이 떠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반복해서 죄를 짓고, 또다시 예수님의 보혈로 덮이기만을 기다립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이 우리로 죄를 짓게 하는 것이어서, 우리가 죄를 반복해 지을 때마다 그분이 닦아주기만 하신다면, 예수님은 '예수'가 아니라 '예걸레'라고 불려야 할 것입니다. 예걸레와 예수님이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말씀을 왜곡해서 들으려 하면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죄를 지어도 상관없고, 예수님의 보혈이 다 씻어주신다"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예전에 한 비신자가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뻔뻔하다.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또 죄를 짓고 또 회개하니 이게 무슨 하나님이냐? 무슨 죄든 다 덮어주느냐?"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 그 사람들이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다루시는지 모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치시는지 안다면 그래도 죄를 짓겠습니까? 아이가 학교를 빼먹고 집에 오면 매를 맞듯이, 사람도 죄를 짓고 나면 매를 맞게 되며, 하나님께서는 결코 여러분을 징계하지 않고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육신의 아버지도 자식을 징계하거늘,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방종하게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상관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데 징계해서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내가 죄를 짓고 회개하면 되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입술로만 하는 회개는 소용이 없으며, 반드시 저주를 받게 됩니다. 저주는 죄와 관련이 있고, 죄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사람이 죄를 짓는 이유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미얀마 북부의 사기 범죄 조직들이 본거지까지 소탕당했는데, 그런 식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치십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해결하고자 하시는 것은 바로 사람이 죄를 짓는 문제이지, 사람이 죄를 지은 뒤에 닦아주는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며, 결코 사람이 죄를 짓도록 방종하게 두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통을 겪는 것은 모두 죄를 짓기 때문이며, 죄를 짓는 것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신 것은 사람의 죄를 방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그가 죄짓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랑하고 또 사랑하다가 결국 죄를 짓고, 그러고 나면 고통을 겪기 시작하며, 고통을 다 겪고 나서야 주님을 찾아옵니다.
어젯밤 한 아이가 열이 났습니다. 사실 2주 연속으로 그렇게 반복해서 열이 났는데, 제가 크게 꾸짖었습니다. 아이가 너무 제멋대로 굴었기 때문입니다. 제멋대로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고 오직 자기 뜻만을 따르게 되며, 자기 뜻을 따르는 자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자업자득이요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제가 조금만 뭐라고 해도 그 고집을 부리며, 저를 자기 집 종처럼 부르면 언제든 달려오는 사람으로 여기니 정말 답답한 노릇입니다. 그 못된 고집을 꺾지 않고 자기 뜻대로 하게 둔다면 어찌 고통을 겪지 않겠습니까? 2주는 고사하고 두 달이라도 갈 수 있습니다.
어떤 어른들은 3040대, 5060대가 되어서도 제멋대로 굽니다. 제멋대로 하다가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을 행하며, 자기 생각이나 기호대로 행하다가 결국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그러다 고통이 찾아오면 저를 찾아와 저나 목회자들에게 기도를 해달라고 하는데, 정말 답답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답답해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걸레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논리 체계를 고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언제 끝이 나겠습니까?
죄의 근원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저는 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돈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을 본 적이 없으며,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죄를 짓는 것도 본 적이 없습니다. 오직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오직 베풀기만을 원하는 사람이 무슨 죄를 짓겠습니까? 그러므로 역사상 그 어느 시대도 이기심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이기적이지 않다면 공산주의의 이상은 반드시 실현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사람이 이기적이라는 점인데, 어떻게 공산이 지속될 수 있겠습니까? 다들 자기 집으로 챙겨가려 하고, 적게 일하고 많이 얻으려고만 하니 이것은 지속될 수 없으며 지속 가능한 발전성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유제가 지속 가능한 발전성을 가지는 이유가 설명됩니다. 인간의 이기심을 이용해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매우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가 게으른 자들을 먹여 살리는 제도라는 말이 전부는 아니며, 인간의 이기심을 지금까지 해결할 방법이 없었을 뿐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부패의 근원은 인간의 이기심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유제는 각자 일하고 일한 만큼 더 가져가는 구조이기에 이러한 사악한 자본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자본의 약탈은 매우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이기심이나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결국 사람은 죄를 짓다가 죄악이 가득 차면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히 다른 체계에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하시는 방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간의 허물을 씻어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은혜를 덧입을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로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이며, 이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주의 말씀을 지키게 되고, 주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 안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온전하게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의문이 있다면 기록해 두었다가 질의응답 시간에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이 장은 읽기가 쉽지 않아 저도 겨우 깨달았으며, 여러분에게 힘닿는 데까지 명확하게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해집니다. 즉, 여러분 안에 주의 말씀을 지킬 힘이 없는 것은 여러분 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50%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50%는 세상을 사랑한다면, 세상을 사랑하는 그 50%는 반드시 죄를 짓게 만듭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에 대해 수많은 핑계와 온갖 이유를 대는 것은 바로 주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켜 행하는 것이요, 지켜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논리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켜 행하지도 않으면서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여깁니다. 십일조는 한 번도 드리지 않으면서 자기가 하나님을 몹시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십일조가 아까워 한 푼이라도 꽉 쥐고 놓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자기 자신마저도 하나님께 드리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알면 힘써 지켜 행하고, 힘써 지켜 행하면 하나님을 알게 되며, 힘써 지켜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절반만 지켜 행하면 절반만 아는 것이고, 10%만 지켜 행하면 10%만 아는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지키지 않고, 심지어 제 말대로 살면 도저히 살 수 없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사실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으며, 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하는 이 일들이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합니다. 다만 그 평가 기준이 무엇이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의 평가 기준은 세상의 기준에 따르고, 어떤 사람의 기준은 영원 속에서의 하나님의 뜻에 따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영원히 거합니다. 영원히 거하기를 원하지 않고, 그저 유골함 하나 차지하고 살아서 미리 무덤 자리나 하나 마련해 두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그 묘지도 때가 되면 누구 차지가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요즘 묘지에는 영구 소유권이 없으며, 영원히 차지하게 두지도 않고 언젠가는 밀어버릴지 모릅니다.
여러분 안의 논리 체계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유익한 것만 행하려는 것, 사실 이것도 이기심의 한 단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의 말씀을 지키라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은 사실 우리로 유익을 얻고 은혜를 얻게 하려 하심인데, 사람들이 믿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안에서 온전해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큰 계명이며,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아니면 세상을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온몸에 병이 듭니다.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대소변을 배출하지 못하며, 밥도 못 먹고 물도 못 마시게 됩니다. 신장이 망가지면 소변을 볼 수 있겠습니까? 투석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의 어떤 것이 진정으로 여러분에게 유익한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하나님을 안다면 이것들이 모두 여러분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반드시 알게 될 것이며, 과장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축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주께서 행하신 대로 행하게 될 것입니다.
주 안에 거하면, 주께서 행하신 대로 행해야 한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한일서》 2:6)
요한일서를 읽어보면 화인 사명 신학의 논리 체계가 이것과 맥을 같이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 안에 있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 안에 있으면 주께서 행하신 대로 행하게 되는데, 이는 주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본보기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신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따라 행해야 할지 모른다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대로 행하면 간단합니다.
저는 예전에 신학교에 다닌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그만둔 이유는 그 신학 교수의 말이 신학 교수로서 마땅히 해야 할 말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용기를 내어 손을 들고 질문했다가 그 자리에서 눌려 망신을 당할 뻔했습니다. 저의 질문은 "교수님께서 방금 강의하신 이 주제에 대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보시겠습니까?"였습니다. 교수는 자기가 예수님이 아닌데 어떻게 아느냐고 대답했습니다. 교수가 예수님의 뜻도 모르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모르는데, 제가 거기서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돈도 포기하고 시간도 아꼈습니다. 그렇게 배워서 무슨 좋은 결과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예수님의 생각도 모르는 무리가 모여서 엉터리로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화인 사명 신학은 이것을 단순화하여 '예수님이 하신 것은 우리도 하고, 예수님이 행하신 대로 우리도 행한다'로 귀결시켰습니다. 종종 저에게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몇 분이나 계시냐? 네 분수를 알고 네 꼴을 봐라.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 하느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욕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입니다. 이 세대의 그리스도인들 안에서는 도대체 누구를 따라 행해야 할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요한일서에 얼마나 잘 나와 있습니까?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이러면 아주 단순해지지 않습니까?
주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셨는데, 여러분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 보셨습니까?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영계를 알 수 있겠습니까? 영계를 알지 못한다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을 믿는다면,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모든 권세가 우리 주 예수님께 속했음을 믿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이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가 어찌 주께서 행하신 대로 행하지 못하겠습니까? 제가 바울이 말한 대로 행하겠다고 하며 바울이 한 대로 하겠다고 하니, 어떤 사람들은 "그만 좀 해라, 이 세상에 바울이 몇 명이나 있겠느냐?"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이전에는 바울이 한 명뿐이었지만, 지금 또 한 명이 나오면 안 됩니까?
사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분의 나라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고, 우리는 모두 작은 그리스도, 작은 예수가 되어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화인 사명 신학에서 말하는 것들은 정말로 강력하며, 단번에 문제를 단순하게 만듭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보실까?'를 생각하면 일은 간단해지고, 우리도 그렇게 바라보게 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여러분이 겪은 일을 겪으셨다면 불평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도 불평하지 맙시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일을 겪으셨다면 거기서 씨름하고 괴로워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도 거기서 씨름하고 괴로워하지 맙시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 목회자와는 도저히 소통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럼 저를 찾으면 소통이 됩니까? 저더러 당신과 소통해 달라는 것입니까? 제가 한 소리 따끔하게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줄 알아야지, 도대체 무슨 논리입니까? 그것은 우리 안에서 선악을 분별하는 정도가 지나쳐 며칠 동안이나 속을 썩이며 참아온 것으로, 마치 지독한 방귀나 냄새나는 숨을 억지로 참았다가 내뿜을 때 사람을 질식시킬 정도로 고약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런 것을 만들어 내기를 좋아하면서도, "과연 주 예수님께서도 이러셨을까?"라고 자문할 줄은 모릅니다.
때로 제가 어떤 사람들을 책망하면, 책망을 듣고 나서 저에게 얼굴색을 바꿉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얼굴색을 바꾸지 않으시는데, 어찌하여 그 순간에는 낯빛이 변합니까? 저는 사람을 목양할 때 절대로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생각이 제대로 박히지 않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라면 주께서 행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가장 좋아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렇게 많이 행하셨으니, 우리가 설령 예수님을 흉내 내거나 모방하더라도 예수님을 닮지 않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모범이십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가복음》 14:36)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있습니까?
세상의 체계와 하나님의 체계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요한일서》 2:9-11)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곧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빛이 우리를 비추실 것입니다. 주 안에 있지 않으면 어둠 속에 있는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형제를 사랑하기는커녕 자신의 목회자조차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한다고 해도 육신을 위하는 방식으로 하니, 그 체계가 완전히 잘못되어 있습니다. 체계가 잘못되었는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체계는 영원히 지속되지만, 인간의 체계의 최종 결과는 고작 7080년 유지되는 유골함 하나일 뿐입니다. 7080년의 체계 속에 서서 바라본다면, 제 생각에 여러분에게 능력이 없어서 그렇지 능력만 있었다면 사기 범죄 단지라도 차렸을 것입니다. 70~80년의 삶 전체가 이 세상의 체계로 가득 차 있으니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형제를 미워하는 이유는 세상의 체계를 따르기 때문이며, 형제가 자기 안의 더러움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교회 안에서 하나 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람 안의 육적인 것, 세상 체계의 것들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 될 수 있겠습니까? 그저 흉내만 낼 뿐입니다. 그렇다면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가인이 되는 것 아닙니까? 가인은 그의 아우 아벨을 미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왜 안색이 변하느냐고 물으시자, 가인은 오히려 당당하게 하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고 하셨지만, 가인의 태도는 받으시려면 받으시고 말려면 마시라는 식이었으며, 제물을 드리는 것조차 귀찮아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형제자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그들의 문제를 지적하면 그들의 안색이 나빠집니다. 왜 안색이 변하느냐고 물으면, 저의 안색도 꽤 험상궂다고 대답합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여기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당시의 장면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체계와 하나님의 체계는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체계입니다. 가인이 농사지은 곡식은 먹고 나면 다음 날 거름과 물이 되어 버리니 결코 영원히 남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있으니 분명 영원히 남는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질량 보존의 법칙을 여기에 갖다 붙입니까? 물질은 변환될 뿐 사라지지 않는 것이 맞지만, 문제는 사람이 멸망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형제를 미워합니까? 그 사람 안에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와 목회자를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빛이 어둠에 비치려 할 때 사람이 비침을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며, 빛이 드러나면 체면이 깎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의 그 더러운 것들을 드러내려니 너무 부끄러운 것입니다. 다툼, 시기, 부러움, 비교 의식 등은 말하기엔 너무 천박하고, 말하지 않자니 속이 답답하고, 말하자니 창피하니 그 안에서 갈등하고 씨름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 안에 있는 세상의 체계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한일서》 2:15-17)
여러분, 우리 모두 한 가지 체계를 선택합시다. 선택한 후에 어느 쪽이 이득이고 어느 쪽이 손해인지 따져보십시오. 하나님의 체계 안에 있으면 많은 것들이 중요하지 않음을 알게 되지만, 세상의 체계 안에 있거나 절반쯤 세상 체계에 걸쳐 있다면 마귀가 반드시 여러분을 유혹할 것이고, 유혹을 받으면 끝장납니다. 틈이 없는 계란에는 파리가 꼬이지 않는다는 옛말이 있듯이, 결국 그 계란은 곪아 터지게 됩니다.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요한일서》 2:12-13)
요한이 이 글을 쓴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여러분의 믿음, 영원 안에서의 믿음을 다시 세워주어, 여러분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세워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났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적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속죄가 필요 없다고 말하며, 완전한 사람이 되든지 아니면 죄인이 되든지 둘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죄인이 되는 것을 매우 당연하게 여겨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부인해 버립니다.
처음에 은혜를 어떻게 받았는지 잊지 말라
처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받았는지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요한일서》 2:24)
저는 이 말씀을 조금 바꾸어 **"처음에 은혜를 어떻게 받았는지 잊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여러분이 사실 아무것도 몰랐고,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음에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 중 누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행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처럼 뛰어내려 죽으려 했거나, 이런저런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렸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해 주셨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거저 받았다면, 왜 나중에는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 합니까? 행위로 하나님의 기쁨을 사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기쁘시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속한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처음에 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까? 이전에는 세상의 체계를 따라 살았기 때문에 온갖 고통을 겪었고, 하나님께로 돌아선 것이 곧 회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처음으로 돌아가 어떻게 된 일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성령 충만은 오순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모두가 능력을 받아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이 그러했으니 나중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이유는, 처음에는 이와 같았으나 마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받았는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기억력이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건망증이 있는 편이라면, 은혜를 어떻게 받았는지 노트에 적어두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허물을 도말하시고 죄악을 사하시며 질병을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또 죄를 짓겠습니까? 또다시 고통을 겪겠습니까? 이제는 그러지 맙시다.
사람이 처음을 자꾸 잊어버리는 것은 정말 치명적입니다. 우리 가운데 한 자매는 처음에 은혜를 어떻게 받았는지를 자주 잊어버려 나중에는 모든 것이 빗나갔습니다. 오래전 이야기 하나를 더 해드리겠습니다. 한 자매가 예전에 싱가포르 공항에서 설거지를 하며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낼 만큼 매우 고생했습니다. 어릴 적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기에 이전에는 이런 고생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자매의 언니가 우리 가운데 있었기에 그녀를 데려왔습니다. 우리가 그녀를 붙들고 기도해 주었고, 나중에 그녀는 하루에 13~14시간씩 설거지하는 고된 일이 아닌, 유치원 교사라는 좋은 일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녀는 처음에 받은 이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제가 그녀에게 이 은혜를 어떻게 받았는지 잊지 말라고 권면하자, 그녀는 저에게 "고작 그 200달러 때문이냐"며 돈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그녀에게 헌금할 자격조차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사람이 은혜를 어떻게 받았는지 잊어버리는 것은 매우 사악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잊어버리시겠습니까? 만약 여전히 잊어버린다면 정말 매를 맞아야 마땅합니다. 나중에 그 자매는 다시 교회로 돌아와 온라인으로 저와 함께 기도했습니다. 저는 당시에 그녀가 왜 기도하는지도 몰랐는데, 몇 달 동안 기도를 인도해 준 후 그녀가 간증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몇 달 전에 병원에서조차 치료할 수 없는 죽을병에 걸려 우리를 다시 찾아왔던 것이고, 2주 전에 검사를 받았더니 의사가 병이 사라졌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병이 낫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또 어떻게 은혜를 받았는지 잊어버리고 다시 엉뚱한 짓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은혜를 어떻게 받았는지 잊어버릴까 두렵다면 노트에 기록해 두고 틈날 때마다 읽어보십시오. 사람이 은혜를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그런 고통의 대가를 치렀습니까? 세상의 체계 안에서 살아가다 고통을 겪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또 죄를 짓겠습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의 삶의 압박에 직면하면 또 잊어버리는데, 다시 고통을 겪을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때로는 신앙의 끈이 풀려 버림받게 되는데, 즉 사람이 하나님을 거듭 버리면 광야에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거든 결코 광야에서 죽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약속을 끊임없이 받아 누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그러므로 처음에 어떻게 은혜를 받았는지 굳게 기억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며,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영원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그분의 은혜를 받았다면, 단단히 결심하고 다시는 하나님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광야에서 멸망당하고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 세대가 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 자들이 많은데, 이는 하나님께서 처음에 자신에게 행하신 일들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권능의 팔로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는지를 알고,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신 일을 기억했다면 하나님을 버렸겠습니까?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어야 하나님을 버리고 이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를 따라 살아가겠습니까? 처음에는 주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았는데, 왜 또 죄를 짓습니까? 처음에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은 이 세상의 체계 속에서 겪을 만큼 고통을 겪었기 때문인데, 왜 여전히 세상의 체계 안에 머물려 합니까? 왜 나중에는 거짓말을 따르게 되었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섬기는 이 하나님은 능력이 심히 많으시며 지극히 두려우신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 하찮은 일들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보좌에서 코딱지만 한 축복 하나만 튕겨주셔도 평생 누리기에 족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버립니까? 여러분, 처음부터 들은 것을 다시 한번 마음에 깊이 품으시기 바랍니다.
기름 부으심, 곧 사명을 마음에 항상 품으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요한일서》 2:27)
기름 부으심은 커다란 미스터리이며, 많은 사람들이 이 기름 부으심을 신비주의처럼 가르쳐 왔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으며 기름 부으심이 가르쳐 줄 것이고 성령께서도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우리 화인 사명 신학은 기름 부으심을 매우 명확하게 설명하는데, 기름 부으심은 곧 사명(하나님이 주신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성령께서 예수님께 기름을 부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찾아보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예수님께 기름을 부으셨다는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기름을 부으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왜 그 전에는 예수님께 기름을 붓지 않으셨습니까? 그분이 사역하러 나오실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으로 하여금 하나의 임무, 즉 사명을 완수하게 하기 위함이었으며,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해 사셨고, 이를 위해 죽으셨으며, 이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이것을 기름 부으심이라고 합니다. 즉,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면, 즉 사명이 곧 기름 부으심이고 기름 부으심이 곧 사명임을 알게 되며,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에 대한 이 문제를 명확히 정리한다면 다른 모든 혼란도 다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면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이를 위해 살고, 이를 위해 죽으며, 이를 위해 이 세상에 왔다"는 사명을 굳게 붙잡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어찌 여전히 어려운 문제가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돈을 위해 산다면 돈을 위해 죽을 것이니,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사명이 있다면 아무도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으며, 주의 기름 부으심이 모든 일에서 여러분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사명이 여러분 삶의 중심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혼란은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어릴 적에 '계급투쟁이 벼리(綱)이니 벼리를 잡으면 그물이 펴진다(綱擧目張)'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 말의 뜻은 그물에는 크고 작은 줄들이 많은데, 벼리(綱)는 아주 굵은 줄을 말합니다. 벼리를 한 번 당기면 그물 전체가 팽팽하게 펴지고 정돈됩니다. 만약 자잘한 그물코만 붙잡고 늘어지면 잡을수록 더 엉키게 됩니다. '강거목장'은 그물을 당긴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사명을 팽팽하게 당기면 모든 문제와 혼란이 해결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태어났고, 이를 위해 살며, 이를 위해 죽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이 사명의 가르침을 따라 주 안에 거하며, 이를 위해 살고 이를 위해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기에, 사역이 아무리 힘들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에 받은 은혜를 붙잡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끝까지 지켜내며, 얻은 모든 것이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끊임없이 전진하여 사명 안으로 들어가고, 이 기름 부으심의 가르침을 마음에 항상 품으며, 이 사명을 마음에 항상 품고 살아간다면 아무런 혼란도 없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한다는 말씀이 더 이상 어렵지 않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런 소망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과 우리의 나라는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며 기어이 죄를 지어가면서까지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왜 사는가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모든 것들이 엉망이 됩니다. 여러분이 세상일을 위해 산다면, 온갖 친척들이 집안에서 서로 물고 뜯으며 난장판이 될 것입니다. 이 사람이 눈치를 주거나 저 사람이 째려보며 아무도 서로에게 굴복하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목적이 고작 이런 하찮은 일들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난투극이 벌어지듯 때리는 자와 맞는 자가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지켜 행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우리는 이를 위해 이 세상에 왔기 때문에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오래전에 사역을 통해 표적이 나타나자, 어떤 사람이 몹시 흥분하여 대형 교회의 한 목사님을 데리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목사님은 뇌종양에 걸려 있었는데, 어떻게 뇌종양에 걸렸느냐고 물으니 교회 사역이 너무 힘들어서 일주일에 단 하루만 쉰다고 했습니다. 저는 하루도 쉬지 않는데, 하루를 쉬면서도 마음에 불평을 품었으니 '혹 목사(뇌종양)'가 되지 않고 무엇이 되겠습니까? 이어서 그는 자기가 50여 개의 구역을 맡고 있는데, 구역장들이 임기 동안 매주 주일에 나와야 해서 3년마다 갈아치워야 하며 3년이 지나면 다들 탈진해 버린다고 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 중에 주일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고작 구역을 맡고 가끔 구역장 훈련을 시킨다고 탈진한단 말입니까? 저는 우리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치르는 대가가 그쪽 구역장들이 치르는 대가보다 훨씬 크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 말을 하고 나서 조금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이 나의 사명이고, 내가 이를 위해 태어났으며, 이를 위해 이 세상에 왔고, 이를 위해 살고 이를 위해 죽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나중에 그를 위해 기도해 주었더니 실제로 효과가 있어서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그러나 뼛속까지 고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사역하는 것을 정말 사랑하며,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이것이 저의 사명이기에 이 세상에 온 이상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합니다.
제가 추구하는 것은 영원히 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영원히 거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영생입니다. 저는 이생의 하찮은 일들을 다 꿰뚫어 보았기에 그런 것들을 위해 사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느낍니다.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너무나 무료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방식은 무엇이며 여러분의 사명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사명의 길이 없다면 여러분은 끝까지 걸어갈 수 없습니다. 사명이 없고 여러분 마음속에 이 기름 부으심이 없다면 여러분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얼마나 풍성한 영광이 있는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고 가실 길이 얼마나 눈부신 인생인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실 영광이 사람의 마음으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얼마나 광대한지를 영원히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구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이끌려 영원 속으로 들어가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돈을 버는 데는 별로 큰 흥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돈을 버는 것은 참으로 재미가 없습니다. 저의 한 가지 소망은 온 힘을 다해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고, 함께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하며,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축하여 함께 영원히 거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다 함께 주 예수님 앞에 나아가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됩시다.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 장의 중간 부분에서 요한은 자신이 전에 썼던 서신, 즉 이전에 썼던 요한복음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 책도 성경공부를 해보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다행히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 다시 요한일서를 쓴 것은 태초에 말씀(道)이 계셨다는 것, 바로 이 말씀, 즉 영원히 거하는 말씀이자 원래 있었던 생명의 말씀에 대해 전함으로써 우리의 생명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모두에게 소망이 있기를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소망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일들을 하찮게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자녀가 공부해서 대학에 가야 하고, 취직해야 하고, 장가를 가야 하며, 자녀가 또 아이를 낳아 손주를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등의 일들이 있습니다. 손주를 돌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지만, 그런 것들이 영원히 남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여전히 "그럼 인생을 어떻게 삽니까?"라고 묻는다면, 저의 대답은 "여전히 살아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실 수 없겠습니까? 당연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 이번 장에서 전한 말씀이 여러분에게 많은 질문을 남겼을 수 있고, 제가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다 이야기하자면 내용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