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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사사기 12장 - 자기 소견대로 행한 대가!

2025-01-15 5,702 士师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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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师记12章-耶弗他和以法莲人
  • 1 以法莲人聚集,到了北方,对耶弗他说:“你去与亚扪人争战,为什么没有招我们同去呢?我们必用火烧你和你的房屋。”
  • 2 耶弗他对他们说:“我和我的民与亚扪人大大争战;我招你们来,你们竟没有来救我脱离他们的手。
  • 3 我见你们不来救我,我就拚命前去攻击亚扪人,耶和华将他们交在我手中。你们今日为什么上我这里来攻打我呢?”
  • 4 于是耶弗他招聚基列人,与以法莲人争战。基列人击杀以法莲人,是因他们说:“你们基列人在以法莲、玛拿西中间,不过是以法莲逃亡的人。”
  • 5 基列人把守约旦河的渡口,不容以法莲人过去。以法莲逃走的人若说:“容我过去。”基列人就问他说:“你是以法莲人不是?”他若说:“不是”,
  • 6 就对他说:“你说‘示播列’。”以法莲人因为咬不真字音,便说“西播列”。基列人就将他拿住,杀在约旦河的渡口。那时以法莲人被杀的有四万二千人。
  • 7 耶弗他作以色列的士师六年。基列人耶弗他死了,葬在基列的一座城里。
  • 8 耶弗他以后,有伯利恒人以比赞作以色列的士师。
  • 9 他有三十个儿子,三十个女儿;女儿都嫁出去了。他给众子从外乡娶了三十个媳妇。他作以色列的士师七年。
  • 10 以比赞死了,葬在伯利恒。
  • 11 以比赞之后,有西布伦人以伦,作以色列的士师十年。
  • 12 西布伦人以伦死了,葬在西布伦地的亚雅仑。
  • 13 以伦之后,有比拉顿人希列的儿子押顿作以色列的士师。
  • 14 他有四十个儿子,三十个孙子,骑着七十匹驴驹。押顿作以色列的士师八年。
  • 15 比拉顿人希列的儿子押顿死了,葬在以法莲地的比拉顿,在亚玛力人的山地。

《答疑解惑》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사사기》 12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이 장을 읽어보면 정말 엉망진창이고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 읽고 나면 완전히 어리둥절해지는데, 사실 원래부터가 혼란스러운 역사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단순히 성경 속 혼란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들의 인생을 보아도 완전히 죽 쑤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혼란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우리 중에도 사기를 당하거나, 병에 걸리거나, 쓸데없이 고집부리거나, 낭패를 겪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이 그저 평안히 잘 살 수는 없는 것일까요?

그러므로 《사사기》 12장뿐만 아니라 사사기 전체를 다 읽고 나면, 그야말로 한 편의 막장 역사요, 지독한 막장 드라마입니다. 그렇다면 이 막장 드라마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사사기》 12장의 주제는 바로 ‘제멋대로 행한 대가’입니다. 즉, 사사기는 각기 제멋대로 행한 이야기이며,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이 막장 드라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어느 날은 이 나라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또 어느 날은 저 나라 대통령이 체포됩니다. 세상에, 모두가 제멋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제멋대로 행하는 것이지만, 정작 본인들은 철저하게 계산하고 따져가며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제멋대로 행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머리를 굴려 철저히 계산했지만, 결국 자기 꾀에 자기가 걸려 넘어졌습니다. 이 일로 순식간에 4만 2천 명이 죽었고, 4만 2천 명의 과부와 4만 2천 명의 아비 없는 자식이 생겨났습니다.

1. 제멋대로 행하는 사사와 제멋대로 행하는 백성

여러분, 《사사기》가 말하는 핵심 주제가 바로 ‘각기 자기 소견대로, 제멋대로 행함’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하나님, 왜 가만히 보고만 계십니까?”라며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간섭하시겠습니까? 모세를 통한 말씀에 이미 분명하게 기록해 두셨지만 아무도 그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사사도 행하지 않았고, 백성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가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창세기》가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신명기》, 《민수기》가 없었습니까?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따위 것을 읽는다고 밥이 나오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게 됩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말씀대로 살면 손해 봅니다.” 우리가 양육 사역을 할 때 정말 힘들고 애가 탑니다. 왜 힘들까요? 사람들이 낭패를 당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제멋대로 행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제멋대로 행하다가 큰 화를 당하고 나서는 도리어 “하나님, 왜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라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어처구니가 없으셔서 “내가 오히려 너희에게 묻고 싶다. 왜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느냐?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라고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생명의 길을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우리 가운데 제멋대로 행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엉터리로 믿고, 엉터리로 행동하며, 엉터리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미 분명히 밝혀져 있습니다. 이렇게 행하면 이런 저주를 받고, 저렇게 행하면 저런 저주를 받으며, 이렇게 하면 사람이 죽고, 저렇게 해도 사람이 죽는다고 말입니다.

그 결과 《사사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그리고 옷니엘로 이어지며 끊임없이 기준을 낮추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어쩔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 기준이 어디까지 낮아졌습니까? 옷니엘에서 시작하여 입다에 이르기까지 계속 낮아졌고, 기준이 낮아질수록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다. 다음 차례에는 삼손에 대해 이야기하겠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의 극치입니다. 아무도 성경을 읽지 않고, 아무도 저주가 무엇인지 모른 채, 그저 아들을 70명씩 낳거나 수십 명씩 낳으며 난장판을 벌였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감에 있어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대단히 진지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온전히 다 소유했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토록 진지하게 탐구하는 것을 보시고 당신의 진리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지 않고 각자 자기 뜻대로만 행합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의 후손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누구라고 하셨습니까?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다 아브라함의 자손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만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여러분 안에 야곱의 사명이 있고, 아브라함과 같은 간구함이 있으며, 이삭과 같은 믿음이 있을 때 비로소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믿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내멋대로 행하고 있는가?” 솔직히 우리 형제자매들 중에도 제멋대로 행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제멋대로 굴고, 속아 넘어가고, 거짓말을 철석같이 믿는 데는 일등이면서, 마귀의 궤계를 간파하는 데는 두 사람이 모여도 한 사람 몫을 못 해냅니다. 참으로 한탄스럽지 않습니까? 정말 탄식이 나옵니다. 저는 형제자매들에게 저주의 길은 결코 가기 쉬운 길이 아니며, 낭패의 길은 참혹한 길임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한 자매를 섬기면서 말했습니다. “자매님, 반드시 이런 저주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러자 그 자매가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요? 먼저 이런 잘못된 것들부터 뜯어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자매는 말을 이어가면서 결국 자기 문제가 아니라 남의 탓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래서야 어떻게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제멋대로 행하여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도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말합니다. 저는 속으로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당연히 일어날 일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귀신을 쫓아내든지, 아니면 귀신에게 끌려가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저와 함께 이 사명의 길을 걸어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양심에 손을 얹고 말하건대, 저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제가 누군가를 내쫓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그 사람 스스로 떠난 것입니다. 참으로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사람이 제멋대로 행하는 것은 실로 엄청난 패망을 불러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됩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기 뜻대로만 행하고 있습니까? 말 한마디에 시험에 들고, 사소한 거짓말 하나 때문에 4만 2천 명이 기세등등하게 나아갔다가 허무하게 죽어 나갔습니다.

2. 제멋대로 행하는 에브라임 사람들

기드온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기드온은 아들을 70명이나 낳았고, 또 아비멜렉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결국 그 70명의 아들이 몰살당하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온통 엉망진창인 일들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막아주지 않으셨느냐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죄를 짓고 형벌을 받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까? 제멋대로 행한 대가는 이처럼 혹독합니다.

암몬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18년 동안 괴롭힐 때 에브라임 사람들이 나섰습니까? 암몬 사람들이 쳐들어오자 에브라임 사람들은 발에 기름을 바른 듯 도망치기 바빴습니다. 그런데 입다가 그 암몬 사람들을 쳐부수고 나니, 에브라임 사람들이 와서 시비를 걸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말합니다. “너는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 입다가 대답합니다. “지난번에 적이 왔을 때 너희는 올라오지 않았다. 그 전에도 너희를 불렀지만 오지 않았다. 또 그전에도 ‘에브라임 사람들이여, 와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외쳤지만 너희는 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내가 암몬 사람들을 쳐부수고 나니 너희가 찾아와 내 집을 불태우겠다고 하느냐?”

교회를 세우다 보면 참 기이한 일들을 봅니다. 많은 교회 성도들이 귀신은 안 쫓고 도리어 목사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매우 흥미로운 현상은, 교회에서 섬기는 사람의 말은 통하지 않고, 섬기지 않는 사람의 말이 통하며, 귀신을 쫓아내던 사람이 결국 사람들에게 쫓겨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 축사 사역을 추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교회의 담임목사인데, 제 설교를 듣고 “나도 화인사명신학대로 해야겠다”라고 생각한다면 조심하십시오. 귀신을 다 쫓아내기도 전에 교인들에게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에브라임 사람들은 평소에는 코빼기도 안 비치다가, 승리하고 나니까 그제야 나타났습니다. 귀신 쫓는 데는 무능하고, 암몬 사람과 싸우는 데도 무능하면서, 목사를 쫓아내는 데는 선수이고, 입다를 대적하는 데는 아주 기세가 등등합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들인지 모르겠습니다. 제멋대로 행하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무리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왜 찾아왔는지 아십니까?

이것은 제가 성경의 배경을 바탕으로 각색해 본 이야기입니다. 에브라임 사람 갑이 에브라임 사람 을에게 말합니다. “야, 저 입다라는 녀석이 정말로 암몬 놈들을 쳐부쉈대. 그자가 전리품을 얼마나 챙겼는지 알아?” 을이 말합니다. “어휴, 엄청 챙겼겠지. 암몬 놈들이 가져온 재물을 입다가 싹 다 차지했잖아.” 갑이 말합니다. “맞아, 그런데 우리한테는 땡전 한 푼 안 나눠주더라고.” 을이 묻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떡하지?” 갑이 말합니다. “가서 우리 몫을 당당히 찾아와야지.” 참으로 못되지 않았습니까? 싸울 때는 오지도 않아 놓고 몰랐다고 발뺌합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습니까? 에브라임 사람들은 “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느냐? 네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라고 협박합니다. 완전히 트집을 잡는 것입니다. 입다가 “너희가 돈을 원하는 것이라면 안에서 조용히 협상하고 나눠주면 끝날 일 아니냐”라고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실 본질은 이런 것입니다.

밖에서 무능한 자들이 집안에서는 큰소리를 칩니다. 밖에서 당하고 다니는 자들이 집에 오면 안방 호랑이 노릇을 하며 기세등등하고, 밖에서 유능한 자들은 오히려 집에서 온유합니다. 또 에브라임 사람 병이 정에게 말합니다. “저 입다 녀석이 우리 위대한 에브라임을 무시하고 있어! 우리 대(大)에브라임의 명예를 저놈이 짓밟았다고! 에브라임이 누구냐?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지파가 아니냐! 저 입다라는 건달 녀석을 손봐주어야 해. 감히 저따위 놈이 우리의 사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여러분, 이것이 합리적입니까? 전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것을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겼습니다. 체면만 차리는 형편없는 자들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모여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에브라임의 지도자들이 다 모여 웅성거리자, 우두머리가 일어나 소리칩니다. “입다에게 정의를 요구할 자들은 나를 따르라! 우리 위대한 에브라임의 명성이 입다 따위에게 짓밟혀서는 안 된다!” 이것은 제가 구성해 본 상황이지만, 실제로도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성경이 굳이 시시콜콜 기록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누가 나와 함께 가겠느냐?” 이미 밑작업은 다 끝났습니다. 가서 암몬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을 다 빼앗아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위대한 에브라임의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탐욕스러운 무리일 뿐입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면, 저로서도 하나님께서 왜 이런 형편없는 무리를 택하셨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하나님, 저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대체 무엇을 하려 하셨습니까?” 이런 자들을 이끌어 내시어 참으로 한심한 역사를 만드셨습니다. 사사도, 이스라엘 백성도 온통 엉망진창인 막장 드라마입니다.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모습은 간곳없고, 온통 제멋대로인 모습뿐입니다. 온 백성이 흥분하여 정의를 바로잡겠다며 큰 집회를 열고 기세등등하게 나아갔지만, 결국 기세등등하게 죽으러 간 꼴이 되었습니다.

입다가 어떤 사람입니까? 입다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입다를 들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입다와 싸우러 온다는 것이 무엇과 같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고라’를 기억하십니까? 《출애굽기》와 《민수기》에서 모세를 대적하여 반역했던 고라처럼, 그 배후에는 거대한 사리사욕이 있었습니다. 이 에브라임 무리는 마치 고라처럼 반역을 꾀한 것입니다. 반역의 끝이 좋을 수 있겠습니까?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도 돈과 체면 때문에 망했습니다.

에브라임 사람 4만 2천 명이 모였는데, 이는 에브라임 지파에서 싸울 수 있는 장정은 거의 다 나온 셈입니다. 그런데 그 4만 2천 명이 장사도 지내지 못하고 몰살당했습니다. 그중에 지혜로운 자는 없었을까요? 있었습니다. 어떤 에브라임 사람이 “이보게, 내가 저 입다 녀석에게 몫을 따지러 가려는데 자네도 갈 텐가?”라고 묻자, 지혜로운 사람은 “우리 아내가 곧 아이를 낳을 때가 되어서 말이야. 자네나 다녀오게”라고 핑계를 댔습니다. 그렇게 나간 자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또 어떤 지혜로운 사람은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상을 치러야 하네”라며 핑계를 대고 빠졌습니다. 이들은 ‘너희나 가라’고 생각한 영리한 자들입니다. 이것이 반역이자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입다가 길르앗 사람들을 이끌고 암몬을 쳐부쉈는데, 이제 와서 에브라임이 웬 난리인가? 지난번 암몬이 쳐들어왔을 때는 뭘 하다가 이제 와서 이러는가? 너희끼리나 가라, 나는 안 간다.’ 하지만 대놓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랬다가는 에브라임 무리에게 집단 공격을 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같이 가고 싶지만 사정이 있어서 도저히 갈 수가 없네”라고 핑계를 대어 죽음을 면한 것입니다. 이처럼 에브라임은 위아래 할 것 없이 제멋대로 행하며 부끄러운 역사를 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각자 자기 소견대로 행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에브라임이 요셉의 아들로서 ‘고난받는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이름의 뜻을 가졌다고 해서 대단하게 보지 마십시오. 그들은 고난받고 억압당할 때는 쥐 죽은 듯 숨어 있다가, 입다가 승리하니까 도리어 기세등등해지는 비열한 자들이었습니다. 각기 제멋대로 행하다가 4만 2천 명이 헛되이 죽어갔습니다. 그들에게는 요셉의 모습도, 야곱의 모습도,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모습도 전혀 없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제 권면을 들으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깨달아야 하며,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거룩한 비전을 품어야지 제멋대로 행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에게 선포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비록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울지라도 나는 그 길을 갈 것이다. 결코 제멋대로 행하지 않겠다. 그것은 멸망의 길이기 때문이다.” 저는 여러분을 축복의 길로 인도하고자 온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축복의 길을 잘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 길이 겉보기에는 별로 복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저주받고, 이기적이며, 자기만 알고 제멋대로 행하는 길은 이득을 보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멸망의 길입니다.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입다는 요단강 동편에서 이 에브라임 사람들을 모두 쳐죽였습니다.

3. 제멋대로 행하는 사사 입다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도 성미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에브라임 사람들이 삿대질하며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과 므낫세 가운데서 도망한 자들이 아니냐!”라고 모욕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길르앗 사람들과 입다의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입다는 사사가 되기 전부터 거친 암흑가에서 이름을 날리던 거물이었는데, 어디서 이런 모욕을 참아 넘기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입다는 성경을 조금 읽기는 했으나 온전히 깨닫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신앙이 어떠했는지 깊이 알지 못했습니다. 입다는 ‘내가 이스라엘의 사사인데 너희가 감히 반역을 꾀하고 내 집을 불태우겠다고? 어디 한번 해보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4만 2천 명의 에브라임 사람과 입다가 이끄는 길르앗 사람들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길르앗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므낫세 반 지파와 르우벤 지파 등 요단 동편에 머물렀던 두 지파 반을 가리켜 길르앗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 길르앗 사람들도 성격이 대단히 거칠었습니다. 이들이 에브라임 사람들과 맞붙었는데, 입다가 얼마나 강합니까? 암몬을 쳐부순 자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암몬 앞에서는 숨도 못 쉬면서 입다 앞에서는 큰소리를 치다가 결국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요단강 서쪽에 살던 에브라임 사람들이 요단강 동쪽으로 건너왔다가 몰살당하게 된 것입니다.

길르앗 사람들은 모든 나루턱을 가로막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면, “그럼 ‘쉽볼렛’이라고 발음해 보라”고 시켰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발음이 안 되어 “십볼렛”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억양과 사투리는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사투리를 고칠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치 특정 지역 사람들이 발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도 그렇게 억양 때문에 들통나서 나루턱에서 목이 잘렸습니다.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은 4만 2천 명을 죽였고, 그중 단 한 사람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 즉시 4만 2천 명의 과부와 4만 2천 명의 고아가 생겨났습니다. 여러분, 이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복수심에 불타는 4만 2천 개의 테러리스트 가정이 탄생한 것입니다! 에브라임 쪽에서는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자기들이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고 반성하겠습니까? 아닙니다. 피의 복수를 다짐할 뿐입니다. 부모와 형제를 죽인 원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입다에게 기드온과 같은 지혜가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입다는 거친 출신이라 배움이 부족했고, 이것이 치명적인 한계였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였습니까? 그들을 훈계하고 교육하여 돌려보냈다면, 적어도 이스라엘 안에서 훌륭한 사사로서의 명성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4만 2천 가정을 원수로 만들어 아비의 원수, 형제의 원수, 자식의 원수가 되었으니, 그 4만 2천 가정이 입다를 가만히 두겠습니까? 절대로 가만두지 않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이 이렇게 행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제멋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입다가 하나님께 여쭈어보았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모세와 달랐습니다. 모세는 매사에 하나님께 여쭈었고, 고라의 반역 무리를 멸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으며 모세 스스로 원수를 갚지 않았습니다. 입다는 4만 2천 명을 죽이며 손에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혔습니까? 결국 그는 사사로 겨우 6년을 지내다 죽었는데, 성경은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기록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입다는 무예가 뛰어나고 건장한 사람이었습니다. 딸의 나이를 스무 살 정도로 본다면, 입다의 나이는 기껏해야 마흔 안팎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6년이 지나 사사직을 마칠 때의 나이는 쉰 살 남짓, 한창나이에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사고로 죽었는지, 독사에 물려 죽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사사기》 저자가 그의 죽음을 어떻게 기록할 수 있었겠습니까? 쓸 말이 없었던 것입니다. 너무 부끄럽지 않게 그저 “죽어 장사되었다”라고만 기록하고 끝냈습니다. 암살을 당했는지, 독살을 당했는지, 화살에 맞아 죽었는지 밝히기조차 부끄러운 죽음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를 지켜주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묻고 싶겠지만, 그렇게 수많은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였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켜주시겠습니까? 거친 옛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혈기대로 행한 결과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외동딸 하나뿐이었는데, 그 딸마저 하나님께 바쳤다는 사실입니다. 무지와 제멋대로 행함은 이처럼 멸망을 낳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와 이 막장 드라마 같은 기록을 읽으면서 마음속에 영적 각성이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집부리지 말고, 제멋대로 행하지 말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입다가 진정으로 위대하고자 했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히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며, 제사와 예배를 회복하도록 이끌었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왜 입다를 무지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는 경솔하게 서원하는 악습까지 있었습니다. 쓸데없는 서원을 남발하다가 결국 자기 딸을 번제로 바치는 비극을 낳았으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무지는 이처럼 심각한 문제를 불러옵니다. 사사라 할지라도 제멋대로 행하면 결국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4. 제멋대로 행하는 입산, 엘론, 압돈

이어지는 본문은 입산이 아들 30명과 딸 30명을 두었고, 딸들을 다 시집보내고 아들들을 위해 30명의 며느리를 데려왔으며, 7년 동안 사사로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사사기》 저자가 기록하면서 참으로 기가 찼을 것입니다. ‘입산에 대해 무엇을 쓸까? 평생 뭘 하고 살았는가? 그저 결혼 잔치만 치르다 끝났구나.’ 입산이 첩을 몇 명이나 두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온종일 자식 낳고 장가보내고 시집보내는 일에만 매달렸습니다. 얼마나 바빴겠습니까? 7년 동안 자식들의 혼사만 치르다 사사로서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입산은 사사가 되기 전에도 이미 많은 자녀를 낳았을 것입니다. 사사로 있던 7년 동안 아들 30명, 딸 30명을 다 결혼시켰다는 기록은 매우 풍자적입니다. 7년이면 약 84개월인데, 60번의 결혼식을 치렀으니 한 달 반마다 혼사를 치른 셈입니다. 입산이 사사로 있으면서 자식들의 결혼식을 치렀으니 축의금은 또 얼마나 챙겼겠습니까?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시간이 어디 있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의 재판을 공의롭게 돌볼 시간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전혀 돌보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매우 풍자적으로 사사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입산 하면 떠오르는 것이 오직 ‘결혼 잔치’뿐이니, 기록할 만한 가치 있는 일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사사라는 자가 날마다 며느리 들이고 딸 시집보내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하나님의 말씀은 없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제멋대로 행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엘론은 더욱 기가 막힙니다. 사사로 10년을 지내다 죽었다는 기록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자가 엘론에 대해 쓸 말이 없었던 것입니다. ‘입산은 결혼의 제왕이었는데, 엘론은 대체 무엇을 했는가? 쓸 말이 없구나.’ 세상적인 쾌락이나 좇으며 제멋대로 살았을 뿐입니다. 저도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자들을 세우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나 일꾼이 없었으면 이 지경이었겠습니까?

압돈에 이르러서도 저자는 쓸 말이 없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의 인생을 기록한다면 무엇을 쓸 수 있겠습니까? 압돈은 아들 40명과 손자 30명을 두었고, 어린 나귀 70마리를 두었습니다. 자식들에게 최고급 명품 나귀를 한 대씩 뽑아준 것이 그가 사사로 8년 동안 행한 가장 위대한 업적이었습니다. 저자가 참으로 뼈있게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압돈은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는 중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부끄러운 기록으로 남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녀를 낳거든 결코 입산이나 엘론, 압돈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지 마십시오. 너무나 수치스러운 이름들이기 때문입니다. 훗날 우리의 인생이 마침표를 찍었을 때, 누군가가 “아무개는 목사로 10년을 지내다 죽었다. 그런데 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고 차마 기록할 수 없는 일들만 행했다”라고 쓴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평소에 스스로 자신의 삶을 기록해 보십시오. ‘나는 무엇을 행하며 살았는가?’ 남이 써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무엇을 내어놓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왔습니다”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너는 누구냐? 무엇하러 왔느냐?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고 하신다면, “주님, 어찌 저를 모르십니까?”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평생 예수를 헛믿은 것이 아닙니까?

성경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빛된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됩니까! 훗날 하나님 앞에 설 때 풍성한 열매를 올려드리며 “하나님, 저는 이 땅에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싸워야 할 싸움을 싸워 이겼으며, 지켜야 할 믿음을 지켰나이다. 이제 주님의 상급을 받으러 왔나이다”라고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들어와 네 주인을 위하여 예비된 영광을 누리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 늘 격려를 받으며, 헛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가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남들에게 부끄러운 뒷이야기로만 가득 차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이들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우리가 직접 가보지는 않았으나 성경과 영적 원리를 통해 볼 때, 사람이 죽고 나면 이 땅의 일뿐만 아니라 하늘의 일과 지옥의 일을 모두 보게 됩니다. 그때 사람들은 이를 갈며 후회하게 될 것이며, 자신이 살아온 부끄러운 역사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제멋대로 행함’이라는 네 글자를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행하려거든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하십시오. 더 이상 제멋대로 행하여 비참한 대가를 치르지 마십시오. 사람이 제멋대로 자기 뜻대로 행하면 반드시 패망합니다. 비록 사사라 할지라도 형편없는 사사로 끝나고 맙니다. 전능하신 구원자 하나님이 아니 계시면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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