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 세우기> 시리즈의 제6강,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변화됨"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람의 논리 체계에 따라 교회를 세운다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울 방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어린아이가 되어 지난 수년간 쌓아온 것들을 모두 제거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선생님, 저는 박사 학위까지 받았는데 어떻게 어린아이가 됩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 치명적입니다. 왜일까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수많은 고정관념을 쌓아왔고, 지식이 많을수록 더 번거로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배움은 바로 자신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것을 그리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일이 절실히 필요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 과정 속에서 자신을 깨뜨리고, 과거에 쌓아온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를 깨뜨려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으며, 그제야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변해야만 하나님께 속한 논리 체계를 새롭게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마음속에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를 잔뜩 품고 있다면, 하나님께 속한 논리 체계에 동의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자매님이 계셨는데, 문제가 아주 많아서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마치 자신의 뼈를 찌르는 것 같아 동의하기를 몹시 힘들어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음속에 세상에 속한 것들이 너무 많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수년간 다니면서도 받아들인 것들이 온통 이상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논리 체계를 배워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원래 받아들였던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와는 정반대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여러분도 제가 설교한 <마태복음>을 다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두 가지 왕국, 두 가지 논리 체계를 이야기합니다. 지금 우리가 나누는 본문은 <마태복음> 18장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교회를 언급하신 곳은 단 두 군데뿐인데, 한 곳은 16장이고 다른 한 곳은 바로 18장입니다. 16장에서는 교회의 정의를 말씀하고, 18장에서는 교회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어린아이가 되어 새로 배우는 것은 일종의 회개이자 깨어짐이며, 지난 수년간 쌓아온 쓰레기를 모두 허물어버리고 어린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이 기초 위에서 새로 배우고 새로 세워야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허물기를 기꺼이 원해야 합니다. 만약 마음이 완고하여 허물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치명적인 일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나답과 아비후는 얼마나 완고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속으로 '무슨 문제가 그렇게 많아? 내가 다른 불을 드렸다고 하는데, 예전에 이집트에 있을 때 늘 이렇게 해왔어도 아무 일 없었잖아. 무슨 잔소리가 이리 많아, 다 맞춰줄 줄 알고?'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안 맞춰준다니, 이 말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버릇없이 굴도록 내버려두다니, 될 말입니까. 집에서 향을 가져와 담배 피우는 라이터를 꺼내 분향단에 불을 붙인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 아닙니까? 도대체 당신이 하나님을 맞춰주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당신을 맞춰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완고한 태도를 받아주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농담이 아닙니다. 사람이 대체 얼마나 완고해져야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조심하고 주의하라, 주의하지 않으면 죽는다." <출애굽기>를 읽어보면 정말 사람이 죽어나갑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사람이 죽을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일로도 사람이 죽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미 많은 사람이 죽었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목회자가 암에 걸립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불을 드린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맞춰주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맞춰주는 것입니까? 이는 결코 장난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완고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고난을 더 많이 겪고, 다른 하나는 부드러운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가장 쉽게 교정받습니다.
예를 들어 제 아버지가 허리띠로 저를 때리실 때, 제 마음은 아주 부드러웠습니다. 완고하게 버티지 않고 아버지와 맞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허리띠를 한 번 드시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저는 곧바로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맞으니까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끝에 명문대에 합격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제가 기꺼이 부드러워지기를 원했던 것인지 하나님이 저를 부드럽게 만들어주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부드러운 부류에 속했습니다.
제가 가장 뛰어난 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내가 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완고한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도 다 나처럼 해"라고 말하며, 자기가 온 세상의 기준인 양 굽니다. 얼마나 어리석으면 온 세상 사람이 자기처럼 어리석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우리 교회의 가장 황금 같은 법칙은 바로 "내가 이 일을 아직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아직 바로잡지 못한 일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미 많은 것을 바로잡았고 많이 깨어졌을지라도,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부드럽고 겸손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한마디로 저를 말문이 막히게 하려는 듯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5년 전에는 이렇게 말씀하시더니 지금은 저렇게 말씀하시는데, 도대체 5년 전에 틀린 겁니까, 지금 틀린 겁니까?" 그러고는 장문의 편지를 써서 저를 고발하듯 따졌습니다. 저는 그에게 "둘 다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5년 뒤에 한 것도 반드시 다 맞는다는 보장이 없으며, 5년이 지나면 저는 또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15년 전에 했던 것은 또 얼마나 엉성했겠습니까. 저는 자신을 위해 변호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멍해졌습니다. '어느 쪽이 틀렸냐고 물었는데, 둘 다 틀렸을 수 있다고 하다니' 하며 몹시 당황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완고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나누는 말씀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와 같습니다. 지금 아이폰4를 쓰는 사람이 있습니까? 요전 날 아이폰4를 하나 발견했는데, 그 작은 화면이 어찌나 볼품없어 보이던지요. 하지만 그 당시 아이폰4를 처음 손에 쥐었을 때는 정말 세련돼 보여서 길거리를 걸을 때도 굳이 손에 들고 흔들며 다녔습니다. 지금 보면 너무나 볼품없어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휴대폰이 업그레이드되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완고한 사람만이 여전히 아이폰4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지금 누가 아이폰4를 들고 다닌다면 정말 창피한 일입니다. 예전의 애플 휴대폰은 끊임없이 변화했고, 그 결과 훌륭하게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요즘은 다소 완고해진 것 같기도 합니다. 일론 머스크의 말에 따르면 "이게 무슨 업그레이드인가, 여전히 옛날 것 그대로지"라고 하더군요. 이처럼 완고해지면 끝장납니다. 노키아는 그야말로 강철처럼 완고해져서 "스마트폰은 절대 안 만들고, 버튼 몇 개 달린 작은 휴대폰만 만들겠다"고 고집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설교했던 <마태복음> 18장 성경공부를 다시 보니, 당시에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별로인 것 같아 또 업그레이드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부드러워질 줄 알아야 하며, 늘 자신이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설령 제대로 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업그레이드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화인명정신학의 가장 핵심적인 자질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며, 하나님을 알아감에는 끝이 없으므로 끊임없이 향상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수년간 꽤 높이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돌아보니 당시에는 꽤 괜찮다고 여겼던 그 높이에서도 위로를 얻고 만족스러운 느낌에 기대어 약간의 존재감을 드러냈을 뿐이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마태복음>을 전합니다. 완고한 사람은 고치기를 거부하고, 허물어지기도 어렵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끝내 어린아이가 되지 못하고 겸손해지지 못하면, 그만큼 고난을 더 겪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고난을 더 겪게 하시는 것에 감사하며, 부디 바로 왕처럼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로 왕은 완고함의 대명사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왕을 완고하게 만드신 것일까요, 아니면 바로 왕 자신이 완고했던 것일까요? 참으로 따질 곳도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바로 왕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완고한 바로 왕을 지으셨으니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라고 묻는다면 하나님은 "내가 원해서 그랬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런 농담이 있습니다. 길을 걷던 젊은 남녀에게 한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대며 물었습니다. "청년, 한 달에 얼마 버나요?" 청년이 "2천 위안 남짓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기자가 여자에게 "왜 이 남자를 좋아하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자는 기자에게 "노자가 왜 <도덕경>을 썼는지 아세요?"라고 되물었습니다. 기자가 "모르겠는데요"라고 하자, 여자가 말했습니다. "그럼 알려드릴게요. 내 마음이니까요!"
하나님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완고한 바로를 지으실 자격이 없으시겠습니까? 바로 역시 완고한 사람이 되기를 자처했습니다. 앞에서 이집트의 모든 장자가 하나님의 치심을 당하자, 모세 일행을 더 이상 남겨두었다가는 둘째, 셋째까지 죽게 생겼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다 유대인들이 홍해 가에 이르러 앞길이 막혔다는 소식을 듣자, 바로는 '쫓아가서 그들을 다시 잡아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쫓아갔다가 홍해 바다 밑바닥에 그대로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바로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돌이킬 수 없을 때까지 고난을 겪습니다.
지난 수년간 우리는 이처럼 완고한 사람들을 수없이 섬겼습니다. 우리 사역구 중 한 곳에 온몸에 병을 앓는 새신자 한 명이 찾아왔습니다. 수많은 병원을 다니며 의사를 만났고, 한의사들도 많이 만났으며, 절에도 수없이 찾아갔던 사람입니다. 한의원에 갔을 때 한의사가 그의 병을 보고 침도 놓고 약도 지어주며 마지막으로 이런 조언을 건넸습니다. "이 약을 먼저 드셔보시고, 그래도 낫지 않으면 귀신이라도 쫓아보러 가십시오."
그는 한의사가 귀신을 쫓으라는 말을 듣고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리를 찾게 되었고,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우리에게 왔습니다. 본래 귀신도 쫓겨나가고 병도 나았지만, 그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이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속의 것들은 참으로 악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건대, 하나님께는 풍성한 은혜와 긍휼이 있으십니다. 그가 변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 가운데 온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그를 회개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와서 회복된 후, 우리는 그가 성장하도록 이끌며 그 내면의 옛 체계를 허물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 우상을 숭배하고 절에 다니며 온갖 짓을 다 하다가 자신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이제는 배우기 시작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공부가 얼마나 힘듭니까. 그는 "선생님, 제 병은 다 나았으니 이제 여기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여긴 대체 뭡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대체 뭐란 말입니까? 병을 다 고쳐주었더니 이게 뭐냐고 합니다. "여기는 너무 느리고 공부까지 해야 하니, 저는 한 번에 바로 낫는 곳을 찾아 나가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몇 주 전에 이미 완전히 나아서 더 이상 병원에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자 집에 가서 풍수를 따지고 수정 구슬 따위를 늘어놓았습니다. 나중에 그의 어머니가 그의 목회자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죽었다고 전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가 아니고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바로는 고작 서른 몇 살에, 아이는 아직 젖을 먹고 있는데, 세상에,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저는 이처럼 완고한 사람들을 정말 수도 없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수년 전, 우리는 한 암 환자를 섬겼습니다. 열여덟, 아홉 살 된 어린 여성이 방탕하게 살다가 어린 나이에 둥관으로 가서 문란하게 지내다 몹쓸 병에 걸렸습니다. 생식기에서 배까지 커다란 콜리플라워 모양의 종괴가 자라났습니다. 그 종괴 안에서는 벌레들이 기어 나오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진물은 닿는 곳마다 살을 썩게 만들어 몹시 끔찍했습니다.
누군가 사진을 찍어 우리에게 보냈는데, 세상에, 보고 나서는 다들 밥도 먹지 못할 만큼 역겨웠습니다. 푸르스름하고 보랏빛을 띤 짓무른 살점이 콜리플라워만큼 컸습니다. 우리는 그녀를 섬기기 시작했고, 제가 더 많이 섬겼으며 다른 형제자매들도 순번을 정해 섬겼습니다. 매일 밤 3~6시간씩 기도를 인도하며 우리는 큰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이것저것을 끊어내게 했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더러운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밤마다 온몸이 극심하게 아파 비명을 지를 정도였고, 금식 기도까지 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녀를 섬겼습니다.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겠습니까? 종양은 작아지고 말라붙어, 제가 보기에는 적어도 3분의 1은 줄어들었습니다. 이제 곧 나을 판국이지 않습니까? 복 받는 삶을 살아야지, 암이 나았다고 해서 다시 옛 일로 돌아가면 큰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제부터 헌금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라고 말했더니, 그녀는 "교회를 떠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제 설교를 즐겨 듣던 한 온라인 구독자가 제가 이 아이를 섬긴다는 소식을 듣고 8천 위안 상당의 물품을 후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녀에게 800위안을 헌금하라고 했는데, 그 800위안 때문에 죽을 듯이 굴었습니다. 참 기가 막힌 일 아닙니까. 결국 제가 교회를 비운 그날 밤, 우리가 배정한 사역자가 기도를 인도하려 전화를 걸었으나 도무지 받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8시에 그녀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어머니는 "새벽 5시에 세상을 떠났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로써 문제가 완전히 끝나버렸습니다. 고작 800위안 때문에 사람이 이토록 완고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이러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이유는, 여러분이 기꺼이 깨어져서 이전까지 우리를 살게 하고 존재하게 만들었던 것들을 산산이 부수고 하나님께 속한 논리 체계로 바꾸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는 온라인 모금으로 수십만 위안을 모아 병원에 고스란히 바치고 결국 커다란 종양 덩어리를 만들었으면서도 그것은 기꺼이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800위안을 드려 복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홍해 바다 밑바닥에 수장되지 않고서는 멈추지 않을 완고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진노를 나타내실 그릇들을 많이 만드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린아이가 되어 새로 배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낡은 기초 위에서 땜질하듯 고쳐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허름한 집 안에서 이리저리 기워봤자 결코 훌륭한 인테리어를 완성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길은 반드시 자신의 옛 방식을 깨뜨리고 어린아이가 되어 새롭게 세워나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길은 영적 고지를 오르고, 자신을 깨뜨리며, 육체를 쳐 죽이는 길이며,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를 완전히 타파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길입니다. 새롭게 창조된 어린아이가 되어 그 기초 위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수년간 수많은 것들을 깨뜨려왔습니다.
한번은 어느 목사님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예전에 대기업 고위 임원 출신이었는데, 교회 안에 교회를 다스리는 관리 체계를 세우겠다고 제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저도 탐색 중이었기에 한번 나누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KPI니 OKR이니 하는 기업 경영 방식들을 교회로 가져오려 했습니다. 저는 당시에 그런 것들을 잘 몰랐지만, 그저 뭔가 옳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상응하는 선례를 찾을 수 없으면 그 일에 문제가 있다고 느낍니다.
나중에 그가 그 방향대로 교회를 세우려 했지만 도무지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KPI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바로 헌금과 인원수였습니다. 그래서 한 성도가 한 사역구에서 다른 사역구로 이동할 때마다 두 사역구장이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싸움을 부추기는 KPI 체계를 세워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체계가 틀렸음을 압니다.
그것을 바로 다른 불을 드리는 것이라 부릅니다. 다른 불을 드리는 교회는 너무나 많고, 허물어야 할 것들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는 기업의 임원 출신이었기에 그 임원 시절의 방식을 교회로 가져왔지만 통하지 않았습니다. 기업은 돈을 버는 곳이고 교회는 영혼을 얻는 곳인데,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교회는 감리교나 성공회의 전통을 계승하며 그 전통이 좋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통을 깨뜨리신 분입니다. 이제 우리는 반드시 단순해져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되면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단순해집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왜 그토록 완고하여 설교를 들을 때마다 저와 사변을 벌이고 맞서며, 끊임없이 떠들어대며 제가 전한 말이 틀렸음을 증명하려 할까요? 이것도 틀렸고 저것도 틀렸으며 오직 자신만 옳다고 증명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온몸에 병만 얻지 않습니까? 선악을 분별함과 사변은 성경의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화인명정신학의 믿음은 아주 단순한 믿음입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사변은 완전히 근절되어야 합니다. 사변이 없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사람이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를 품고 있으면 누가 더 큰지 논쟁하게 됩니다. 누가 더 큰지 다툴 때,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가장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천국에서는 누가 가장 큰지 물으며 좌의정, 우의정 같은 자리가 크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어린아이가 가장 큽니다. 이 말을 들으면 멍해지겠지만, 이것이 진실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단순해질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논리를 펴고 나는 나의 논리를 편다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연합할 때 비로소 매고 푸는 사역을 행할 수 있으며, 억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묶인 자를 놓아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왜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는지 아십니까? 어떤 목사님이 교회를 세웠는데 안에서 늘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의아해하며 '교회는 사랑으로 충만해야 하는데 왜 여기서는 늘 싸움이 일어날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로는 교회를 온전히 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 사람도 실족하고 저 사람도 실족하여 "아이고, 당신 때문에 내가 넘어졌다", "나 때문에 당신이 넘어졌다"라며 온종일 이런 것들로 다투는 것은 <마태복음> 18장을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분명히 깨달아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인생에서 깨어짐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제 한 자매를 섬겼는데, 공부만 하면 조급해져서 이것저것 보는 것만 아주 많았습니다. 이런 것들을 깨뜨리지 않고 늘 단번에 다 끝내려 하니, 결국 단번에 완전히 무너져버렸습니다. 공무원 시험도 단번에 붙으려 하고 운전면허도 단번에 따려 하다가, 계속 그렇게 시험만 치르다가는 바비큐처럼 새까맣게 타버릴 판이었습니다. 그토록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서 그 체계를 허물지 않는다면 결국 완전히 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어린아이가 되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어린아이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어린아이가 되면 많은 것이 단순해집니다. 어린아이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 외에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스스로 어린아이임을 깨달으면 문제는 단순해집니다.
본문 말씀
<마태복음> 18장 1절부터 5절까지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태복음》 18:1-5)
기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 안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사 우리 내면의 복잡하고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를 깨뜨려 주시옵소서. 오늘 우리가 주께로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단순해지게 하옵소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주 안에서 새롭게 빚어져 하나님께 속한 논리 체계를 갖추게 하옵소서.
하나님, 주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를 간청합니다. 우리가 돌이키기를 원하오니 우리를 도우사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자가 되게 하시고, 천국에서 어린아이와 같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주님을 뵈올 때까지 인도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배경
넷째로, 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이때 제자들은 비록 많은 귀신을 쫓아내고 예수님을 한동안 따랐지만, 머릿속에 든 생각은 여전히 매우 기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까지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왼편과 오른편에 누가 앉을 것인가를 두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예수님이 이미 황제가 되신 것처럼 관직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황제가 되면 그 뒤에는 혼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황제가 결정되었으니 다음은 문무백관의 직책 배분이었습니다. 원수가 상장보다 낫고, 상장이 중장보다 낫고, 중장이 소장보다 나으며, 소장은 심지어 밥만 많이 먹는 일부 '대장'보다 낫다는 식입니다. 이 과정은 극도로 복잡한 시스템 공학이며, 모든 나라가 건국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골칫거리에 직면합니다. 예를 들어 옛날 이자성이 북경성에 입성했으나 직책 배분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고작 18일 동안만 황제 노릇을 하다가 정권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제자들은 도대체 누가 가장 크며, 누가 앞서고 누가 뒤에 서야 하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옥신각신 다투다가 결국 예수님 앞에 나아와 "우리 중에 누가 가장 큽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둘러보시며 "너희 중에는 아무도 가장 큰 자가 없어 보인다"라고 하시더니, 한 어린아이를 데려와 "이 아이가 가장 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늘 큰 인물이 되기를 원합니다. 큰 인물이 되면 위세를 부릴 수 있고 섬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나 큰 인물이 되어 주도권을 쥐고 권세를 누리며 좌우 정승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통해 진정으로 '큰 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돌이켜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이 어린아이가 가장 크다고?"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18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20여 장에 가도 제자들은 여전히 다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정말 깨달았을까요? 그들은 "깨달았습니다"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무얼 깨달았다는 말이냐?"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여전히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큰 자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린아이는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화인명정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바로 "내가 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라고 고백하는 겸손입니다. 많은 사람이 마치 손에 진리를 쥐고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제가 "당신이 이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저는 이미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한참을 보아도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어느 부분에서 구원받았느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제대로 설명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화인명정신학의 관점은 '나는 부족하므로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다 통달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도 다 통달하지 못했는데 우리가 왜 당신을 따라갑니까?"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보면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지만, 당신과 나 둘을 비교해 본다면 그래도 제가 당신보다는 더 깊이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함께 이 길을 달려갈 때, 누가 더 겸손한지를 겨루어야 합니다.
이 어린아이가 가장 큰 자라니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큰 맷돌을 그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건대,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태복음》 18:6-9)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크다고 하더니, 이제는 어린아이가 크지 않고 누군가가 그를 걸려 넘어지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이어지는 구절이 더욱 중요합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고,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늘 다른 사람 때문에 넘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여러분은 이 말씀을 끝까지 읽지 않은 것입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넘어지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십시오. 손이나 발 하나 없이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습니다. 알고 보니 자기 자신의 손과 발 때문에 넘어진 것이었습니다. 손은 여전히 세상을 붙잡고 있고, 발은 여전히 세상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러분이 어린아이가 되어 천국에서 큰 자가 되었을 때, 어디로 갈 것인지 선택해야 함을 뜻합니다. 만약 세상의 길을 가려 한다면 그 손과 발을 잘라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에 속한 발, 세상에 속한 손, 세상에 속한 머리, 세상에 속한 마음과 모든 내장을 다 잘라내고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바꾸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일종의 각성이며, 많은 이들이 실제로 손발을 자르라는 뜻으로 오해하지만, 이는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완전히 깨뜨려버려야 함을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이 저를 찾아와 "선생님, 저 사람이 저를 넘어뜨렸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당신은 한 번도 일어선 적이 없는데 넘어지긴 뭘 넘어집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나니 그 사람도 씁쓸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저 역시 보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줄곧 엎드려 있었으면서 오늘 다른 사람 때문에 넘어졌다고 하다니, 일어선 적도 없는데 어떻게 넘어집니까? 누워 있는 게 얼마나 편합니까. 엎드려 있거나 누워 있었을 뿐이니, 기껏해야 그 사람이 당신 몸을 한번 뒤집어 준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것은 철저히 깨어지고, 다시 건축되어 어린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것은 길 잃은 양을 찾는 것입니다. 그 길 잃은 양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몹시 갈망하지만, 아직 화인명정신학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 영광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전통적인 신학 관념 안에서 온갖 고난을 겪고 한 번도 깨어지지 못하다가 마침내 화인명정신학을 만났습니다. 우리 가운데 와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깨어짐이며, 세상에 속한 발과 세상에 속한 온갖 마음을 다 없애고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그 길 잃은 양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족제비나 여우 같은 것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였고, 그것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나가려 하지도 않습니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여기서는 형제라 부르니 잠시 형제라 칭하겠습니다), 너는 가서 오직 너와 그 사람만 있을 때 그의 잘못을 지적하십시오. 만약 그가 듣고 부드러워지면 다행이며, 너는 네 형제를 얻은 것입니다. 만약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십시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겨 쫓아내십시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태복음》 18:15-17)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깨뜨리고 다시 세웁니다. 어떤 사람은 길 잃은 양이어서 하나님께서 온 힘을 다해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죄를 짓기 위해 숨어든 자이니, 그런 자는 쫓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러 온 것이 아니라 교회를 무너뜨리러 온 사람인데, 무엇 하러 붙잡아 두겠습니까? 우리는 사람이 떠나려 할 때 붙잡는 일부 교회들과 다릅니다. 우리는 결코 붙잡지 않으며, 그리할 때 교회는 하나가 되고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어디서든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참으로 단순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이렇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묶인 자와 억눌린 자가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교회를 세우는 가장 중요한 사명이자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사역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자 베드로는 몹시 우스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왜 그랬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누가 더 큰지 다투다가 베드로를 한순간에 밀쳐내 버리고 요한을 앞으로 내세웠기에 베드로의 마음이 몹시 상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못했습니다. 오직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좌우 정승 자리는 하나는 요한이 차지하고 하나는 야고보가 차지하여 내 자리는 없으니, 나 베드로는 무얼 한단 말인가?'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족함을 용서해야 하는 문제를 말씀하셨으며,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멱살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태복음》 18:23-35)
예수님께서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 어떻게 할 것인지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나 베드로가 형제에게 피해를 입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완전히 초점을 벗어났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하늘에 속한 논리 체계를 품어야 합니다. 하늘에 속한 논리 체계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남이 한 말 한마디를 용서하지 못하고, 그 말 한마디를 끝까지 붙잡고 따지려 듭니다. 이러한 사람은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람의 죄는 다시 그 자신에게로 돌아가며, 그는 빚을 다시 다 갚아야 합니다. 영원히 갚지 못하면 끝장나며, 마지막 결말은 죽음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는 것은 '남이 나를 실족하게 했다'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설령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실족할 일을 겪더라도 넉넉히 견뎌내는 것입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죄를 짓거나 교회 안에서 당신을 속였다면, 속았으면 속은 셈 치고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바로잡았는가가 중요합니다. 사실 <마태복음> 18장은 교회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에 관한 말씀이며,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려면 누가 더 큰가를 따지는 세상적인 관념을 반드시 깨뜨려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관념을 깨뜨림
누가 더 큰가 하는 관념을 깨뜨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큽니까? 관리가 크고 백성은 작습니다. 관리는 백성을 섬기지 않고 백성이 관리를 섬기니, 이것이 모두 세상에 속한 관념입니다. 왜 사람들은 관리가 되기를 좋아할까요? 관리가 되면 자원이 많고 결정권을 가지며 사리사욕을 채워 돈을 챙길 수 있고 얻는 이익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누가 큽니까?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자입니다. 섬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자가 작은 자이고, 섬기는 자가 나중 되며, 섬김을 받는 자가 먼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면 겸손해지고, 어린아이와 같아지면 큰 자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기꺼이 뒤로 물러서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내면에 아직 깨어지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이 담겨 있기 때문에, 다섯 번째 대지는 '세상에 속한 관념을 깨뜨림'입니다.
자신의 손과 발을 잘라내는 결단으로 자신을 깨뜨림
만약 우리의 손이 세상에 속했다면 잘라버려야 하며, 이것을 깨어짐이라 부릅니다. 이 결단은 매우 단호한 것으로, 차라리 포기하겠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는 우리의 손과 발, 마음과 모든 내장,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세상의 것들을 모조리 깨뜨려버려야 합니다. 깨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산다면, 여러분은 손발과 함께 영원한 불에 던져져 영생의 소망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워가는 이 길은 진정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기 시작할 때, 입으로는 세운다는 구호를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저마다 엉큼한 생각을 품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 속한 논리 체계를 품고 있으면 필연적으로 암투와 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우리 가운데는 이런 일이 거의 없으며, 설령 있다 해도 단호히 잘라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반드시 자신을 깨뜨려야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 되지 못함은 더럽고 부정한 것입니다. 부정하다면 깨어져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고난을 겪게 됩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깨뜨리시는 역사는 앞으로도 갈 길이 멉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병이 들고, 직장을 잃고, 빚을 지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내면의 것들이 아직 온전히 깨어지지 않았고, 사람 안에는 여전히 깨뜨려야 할 더러운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우리 중 한 목회자가 제게 나눈 이야기인데, 어떤 자매님이 우리에게 와서 목회자가 자신에게 너무나 잘해주니 목회자에게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에 자신의 가장 빛나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 했다고 합니다. 결국 거짓된 모습으로 살다 보니 본인도 너무 괴롭고 섬김도 너무 괴로웠습니다. 제가 원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있는 모습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내어드려 깨어지고,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다시 세워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출발점입니다.
우리 안에는 지난 수년간 배워온 수많은 세상의 더럽고 추악한 것들이 가득한데도 우리는 여전히 좋다고 여깁니다. 온갖 더러움을 품은 채 가장 아름다운 척 꾸며냅니다. 어떤 사람은 3개월 동안 자신을 숨기며, 제 앞에 화려하게 변신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도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입고 있는 남루한 옷과 온갖 더러운 것들은 다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세상을 붙잡는 것은 배설물을 한 손 가득 쥐어 악취를 풍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두려워하지 말고 겸손해지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교회의 사역은 길 잃은 양을 찾는 것
교회의 사역은 바로 길 잃은 양을 찾는 것입니다. 늑대를 찾는 것도 아니고, 족제비를 찾는 것도 아니며, 신랑을 찾는 것도 아닙니다. 찾는 대상은 바로 길 잃은 양입니다. 그렇다면 길 잃은 양이란 무엇입니까? 그 내면에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자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눈을 들어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면 수많은 필요가 보일 것입니다. 길 잃은 양을 찾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사역입니다. 다만 지금 우리의 역량으로는 이 정도만 양육할 수 있을 뿐, 너무 많이 오면 다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소목회자들을 일으키사 끊임없이 자신을 깨뜨리고 빚어가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더 많은 책임을 감당하고 하나님의 양 떼를 잘 돌보며 길 잃은 양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관심을 두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를 돌보시는 방식과 길 잃은 양을 돌보시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얻으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날마다 영적인 공급을 받으며 문제가 생기면 목회자의 양육을 받습니다. 그러나 목양해 줄 사람 없이 길을 잃은 양들은 얼마나 가련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양들을 되찾아와야 합니다. 혹시 실수로 잘못 데려왔다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교회를 세우러 온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태도로 왔다면 나중에 내보내도 괜찮습니다. 잘못 판단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죄를 대하는 태도
교회를 세우려면 거룩한 교회를 세워야 하며, 사람의 세상적인 논리 체계를 깨뜨리는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죄를 대하는 태도는 단호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온 것입니까? 은혜를 조금 받고자 한다면 받게 하되, 만약 계속 죄 가운데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른 자리를 내어줄 테니 '사막의 샘' 같은 곳으로 가라고 하십시오. 반드시 거룩한 교회를 세워야 하며, 단순히 그가 한두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죄를 짓는 그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교회의 목회자를 찾아가 사실을 확증하고 그가 진정 그러한지를 확인하십시오.
여러분이 감당하지 못하겠다면 괜찮으니 목회자를 찾으십시오. 목회자가 감당하지 못하면 사역구장을 찾고, 사역구장이 감당하지 못하면 제게로 오십시오. 우리가 도저히 섬길 수 없다면 하나님께 맡겨드리면 됩니다. 혹 우리가 잘못 판단했을 수도 있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길 잃은 양으로 보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그 한 마리 양을 아끼시기에 반드시 되찾아 오실 것이지만, 결코 죄를 용납하지는 않으십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울 때 한마음 한뜻으로 연합하게 될 것입니다.
한마음 한뜻으로 매고 푸는 사명을 감당함
교회의 사역은 반드시 이 길 잃은 양을 마귀의 손에서 빼앗아 오는 것이며, 그것이 곧 매고 푸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를 결박하고 억눌린 백성을 풀어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얻게 하는 것, 이것이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사역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우리가 한마음 한뜻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어떠한 귀신이든지 우리가 한마음 한뜻이 된다면 귀신은 반드시 우리 발아래 밟히게 될 것입니다. 이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자 한마음 한뜻으로 연합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렇게 세워지는 것이며,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답입니다.
제가 전하는 것은 <마태복음> 18장의 말씀이며, 18장에서 예수님은 일찌감치 이 일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훗날 누가 예수님의 이 명령을 완수했습니까?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교회 안에서 상처받고 실족하는 일을 견뎌내지 못하면 여러분은 베드로처럼 되고 맙니다. "주여, 내 형제가 내게 죄를 범했습니다"라는 식의 불평은 성경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실족함을 다루는 태도
상처받고 실족하는 태도를 다루는 것 역시 깨어짐의 한 과정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나를 넘어뜨렸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말 자체가 당신이 한 번도 일어선 적이 없음을 증명합니다. 누군가가 실족할 일이나 상처를 겪는다면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상처받았을 때의 태도를 보면 당신의 현재 영적 높이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깨어져야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상처받거나 괴롭힘을 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집에 가서 부모님을 찾으면 부모님이 "무슨 잔소리가 그렇게 많아" 하며 훈계하지 않습니까.
어떤 집안은 엄격하여 아버지가 아이를 데리고 나가 공평함을 따지기도 하지만, 어떤 집안은 아이에게 상처받는 상황을 견디는 법을 배우게 합니다. 상처와 실족함을 견뎌내는 능력이야말로 그 사람이 강하다는 증거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체계입니다. 상처받는 훈련을 잘 받으십시오. 때로는 제가 여러분의 반응을 보기 위해 일부러 실족할 만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는데, 이는 매우 정상적인 일입니다.
때로는 어떤 사역을 맡길 때 그 안에 실족할 만한 요소를 미리 설계해 두기도 합니다. 미숙한 소목회자를 일부러 배치하여 당신을 쉽게 실족하게 만들 수도 있는데, 그는 자신이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지도 모를 것입니다. 상처와 실족함을 견뎌내는 우리의 능력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핵심 자질입니다.
그러니 형제자매 여러분, 상처받고 깨어지며 성장할 수 있도록 이토록 훌륭하게 설계되어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가 설계한 모든 것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큰 자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