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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야고보서 0장 - 개요 (상편)

2021-04-23 8,908 雅各书 信心 律法 敬畏 权能 福音 行为

교회 발전에서 야고보가 맡은 역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야고보라는 사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을 따라다녔을까요? 사실 그렇지 않았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과 함께 자라기는 했습니다. 성경에는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꽤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데리고 다니신 제자 중에도 야고보가 있었지만, 그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데리고 다니신 제자들 가운데 글을 남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성경에 가장 많은 글이 수집된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의 글입니다. 성경에서는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가 야고보서 외에 무엇을 했는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행간을 통해 이 일들을 파헤쳐 보고, 야고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야고보는 언제부터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을까요? 이 일은 매우 이상하게 보입니다. 야고보는 도대체 무엇을 했으며, 이 일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이제 처음부터 차근차근 말씀드리겠습니다.

초대교회 발전 연대표

먼저 연대표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때는 대략 주후 30년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바울이 주님을 믿게 된 때는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약 45년이 지난 때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린 때는 바울이 주님을 믿은 후 14년이 지난 때로, 대략 주후 4749년경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주후 30년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때부터 바울이 예루살렘의 첫 공의회에 참석한 때, 곧 사도행전 15장까지는 대략 1718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1718년 동안 교회에는 매우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후 다시 약 3~4년이 지나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썼고, 갈라디아서에는 베드로와 야고보에 관한 많은 일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밖의 곳에서는 야고보가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거의 전혀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따로 말해 주지 않는 한 말입니다.

갈라디아서가 기록된 때는 대략 주후 53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린 후 4~5년이 지났을 무렵, 바울은 이미 이방인 교회 안에서 매우 견고한 기반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야고보와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식으로 사역이 나뉘었습니다. 원래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실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믿은 후 한 곳으로 가서 약 14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간 것은 그 후의 일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이방인 전도의 직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직분은 원래 사도 베드로에게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여러 지역을 두루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 사도 베드로는 자주 환상을 보았고, 기적을 행하며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바닷가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으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자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말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육 시더라.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퉁이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할 때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큰 소리로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머물고 있느냐” 하거늘,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사도행전》10:1-20)

그 결과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가서 입을 열어 몇 분 정도 설교했습니다. 그 말씀을 읽으면 2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성령께서 고넬료와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셨고,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며 하나님을 크게 찬양했습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이것은 하나의 확증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복음은 본래 계속해서 이방인들에게 전해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후에 베드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베드로는 한 사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인 야고보였습니다. 왜 야고보는 베드로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길로 이끌었을까요? 여러분이 저에게 묻는다면 정말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는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본래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부르심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나중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까? 사실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통을 고수한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전도의 직분을 잃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방인들 앞에서 위선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후에 베드로가 한 사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였습니다. 야고보의 영향을 받은 후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있을 때, 아무도 보지 않으면 위선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이방인들과 잘 어울렸습니다. 사실 이것이 본래 그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야고보가 교회의 지도자가 되자, 베드로는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을 보고 그들이 자신에 대해 보고할까 두려워 이방인들 앞에서 위선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갈라디아서에 기록되어 있고, 당시 바울도 베드로와 같은 곳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를 매우 엄하게 책망했습니다. 성경 원문의 표현은 “대적했다”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베드로를 대적했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이런 위선적인 행동을 대적한 것입니다. 위선적인 행동은 이미 예루살렘 교회의 문화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이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전한 것은 모세의 율법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닙니다.

후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받은 복음이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과 다르면 그 사람은 저주를 받아야 한다. 너희가 전하는 복음이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과 같지 않다면 그것도 저주를 받아야 한다.” 너무 독단적인 말처럼 보입니까? 그러나 실제로 정말 독단적인 것일까요? 사실 바울은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것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코 모세가 전한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율법이라면 우리는 모세의 율법을 믿으면 됩니다. 왜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우겠습니까? 모세의 율법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다시 모셔 올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러 오신 것입니까? 당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오늘 하나씩 정리해 보겠습니다.

처음에 베드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이방인 고넬료가 주님을 믿게 된 일을 그들에게 전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좋게 듣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할례를 받은 제자들이 많았고, 그들이 베드로와 논쟁했습니다. “당신이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식사하다니, 이 일은 큰일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하나씩 설명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할례받지 않은 사람”과 “할례받은 사람”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불문율이 있었습니다.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고, 할례가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할례가 대체 무엇입니까? 생식기에 작은 수술을 하여 포피를 잘라내는 것일 뿐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자신에게 어떻게 계시하셨는지, 자신이 어떻게 고넬료의 집에 갔는지, 설교할 때 성령께서 어떻게 임하셨는지를 온 힘을 다해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해졌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이 정말 이 일을 받아들였을까요?

후대 교회 역사는 그들이 여전히 할례를 전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전통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게 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어려서부터 할례, 할례를 계속 배웠고 자신들도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할례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잊었습니다. 할례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는 사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전혀 막지 못합니다. 그 결과 교회는 계속해서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의 교회 설립

사도행전 9장에서 바울은 아직 사울이라고 불렸습니다. 바울이 주님께 돌아온 후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교제하려 했지만, 그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오직 바나바만 그를 받아 주었습니다. 후에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나 아주 먼 곳으로 갔습니다. 그 후 바나바가 다소에 가서 바울을 데려왔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1장에 나오는 일입니다. 바울은 안디옥에 이르렀고, 이때부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여러 지역으로 파송되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사도행전 13~15장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교회를 세웠는데, 이 시기는 주후 49년 이전이었습니다.

바울은 몇 년 동안 사역했고 그 결과는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왜 예루살렘에 가야 했을까요? 계시를 받아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했던 일과 앞으로 할 일이 헛수고가 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어떻게 지도자가 되었을까요? 원래 베드로가 지도자였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헤롯 왕이 베드로를 잡아 가두었습니다. 군인들에게 맡겨 감옥에 넣었고, 네 명씩 네 조로 나누어 지키게 했습니다. 유월절 후에 그를 끌어내어 죽이려 했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교회는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헤롯이 베드로를 끌어내어 죽이려던 전날 밤, 베드로는 두 쇠사슬에 묶여 두 군인 사이에서 잠들어 있었고 문밖에도 보초가 서 있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와서 베드로의 옆구리를 두드리며 빨리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쇠사슬이 풀렸습니다. 베드로는 서둘러 신을 신고 허리띠를 매었고, 천사가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베드로는 계속 자신이 환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돌아온 후에야 천사가 자신을 구해 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이 모여 있는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 집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자 많은 사람들이 믿지 못하고 베드로의 천사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가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알리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사도행전 12:17)

여기서 언급된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동생입니다. 베드로가 “이 일을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알리라”고 한 것을 보면 야고보와 베드로의 관계가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지위가 베드로보다 높았는지 낮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야고보가 교회의 권한을 얻게 된 과정에 대한 추측

그 후 사도행전 15장에 이르면 야고보가 이미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헤롯은 베드로를 찾지 못하자 곳곳을 수색했습니다. 베드로는 어딘가에 숨어 있었지만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일을 알리라고 한 것은 야고보가 자신을 대신해 예루살렘 교회를 관리하도록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곳에 있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실 때도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야고보는 언제 교회에 들어왔을까요? 성경에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조사할 방법이 없습니다. 야고보가 언제 교회에 들어왔는지 기록이 없고, 야고보와 그의 또 다른 동생 유다가 어떻게 교회에 들어왔는지도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제가 대담하게 추측해 보겠습니다. 교회가 대단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합니까?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하신 후 삼천 명이 주님을 믿고, 오천 명이 주님을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당시 교회 안의 돈은 엄청났습니다. 사람들이 밭과 땅을 모두 팔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만 명이 집과 토지를 모두 팔았다면 그 금액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모두 교회에 모여 식사하며 일종의 공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많아지자 문제가 생겼고, 식사를 관리하도록 일곱 집사를 세웠습니다.

그 후부터 흥미로운 일이 시작됩니다. 교회가 박해를 받기 시작했고, 스데반이 순교했습니다. 그 후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머물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박해는 몇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바울도 교회를 박해한 사람 중 하나였고, 매우 열심히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하나님께서 친히 바울을 택하셔서 주님을 믿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유다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도 없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에도 없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자 성경을 저보다 자세히 읽은 형제자매들이 한 구절을 알려 주었습니다.

감람 산이라 하는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거리라. 그들이 감람 산에서 돌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니 그들이 유숙하던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사도행전 1:12-14)

이 구절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형제들이 언급됩니다. 여기에는 야고보와 그의 동생 유다가 포함되었을 것이며, 그들은 함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즉 이때 야고보가 등장합니다. 형제자매들이 이 구절을 알려 준 것은 좋은 제안이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실 때 야고보와 유다와 마리아도 그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1장 14절부터 12장 17절까지 야고보가 등장하지만, 그 사이에 그가 무엇을 했는지, 어떤 기적을 행했는지, 예수님의 어떤 가르침을 실천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후대의 기록에서도 야고보서를 제외하면 야고보가 다른 글을 쓴 기록은 없습니다.

야고보서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율법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전체에서 처음에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한 것 외에는 성령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야고보서가 말하는 내용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율법”이라는 말도 두 번 언급하지만, 실제로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야고보가 말한 율법은 당시로 보면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곧 구약성경을 가리켰을 것입니다.

율법에 관해서 야고보가 바울보다 뛰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가말리엘은 오늘날로 말하면 최고 학술기관의 원사와 같은 인물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울에게 율법을 가르쳤으니 바울은 율법에 매우 정통했습니다. 바울 앞에서 야고보가 율법을 논한다면 그것은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것과 같습니다. 가장 뛰어난 목수 앞에서 목공 일을 이야기한다면 당연히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야고보가 말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이름을 내세운 것 외에, 그가 전한 말씀과 복음에 대한 자세한 논술이 남아 있는지 살펴보면 사실 아무 기록도 없습니다. 야고보가 후에 성령 충만에 관한 복음을 전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언제 교회에 들어왔을까요? 교회가 부유해지기 시작했을 때 들어온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추측일 뿐입니다. 누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까요? 마리아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우리는 생각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였지만, 예수님은 이미 누가 자신의 어머니이며 형제인지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육신으로 난 것은 육신일 뿐입니다. 마리아가 보기에 “내 아들도 교회 일에 좀 관여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이 베드로와 마리아를 매우 높인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대담하게 추측해 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추측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야고보가 언제 주님을 믿었는지, 언제 세례를 받았는지, 언제 성령 충만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그가 귀신을 쫓았는지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베드로가 도망할 때 야고보가 갑자기 등장합니다. 마치 월급만 받고 일은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할례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또 다른 동생 유다가 무엇을 했는지, 누구를 해방시켰는지, 어떤 기적을 행했는지, 어떤 위대한 일을 했는지, 어떤 위대한 교회를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기록된 것은 단 하나입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에 많은 곤란을 일으켰고, 로마 교회에도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가 여러 곳에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동생이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그의 어머니이며, 예루살렘 교회에서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냐 부지도자냐가 무엇을 증명합니까? 사실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일이 매우 심각합니다. 특히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그가 가장 큰 사도인가?”라는 문제를 다룹니다. 바울은 계속 논쟁했는데, 무엇 때문에 논쟁했을까요? 후에 알게 된 것은 고린도 교회가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와, 예루살렘의 큰 사도 야고보와 베드로가 왔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사람이잖아! 그러면 바울보다 훨씬 뛰어나겠네!”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이 우리 앞에 많은 걸림돌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베드로와 야고보의 지위 때문에 혼란에 빠졌습니다.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매우 영향력 있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영향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여러분이 판단할 일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야고보가 이런 방식으로 교회 안에 들어온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교회가 가장 중요하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무엇을 했습니까? 알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한 일은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후에 베드로는 야고보의 영향을 받았고,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에도 야고보서의 흔적이 있으며 말하는 방식도 매우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육신적인 관계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합니다. 오늘 형제자매들은 알아야 합니다. 앞으로 그 사람이 내 어머니든 어떤 사람이든 그것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우리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교회만이 중요합니다.

야고보가 정말 위대한 일을 했다면 성경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야고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매우 강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이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능력을 알겠다.”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람을 마귀의 지배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할례에 대해서는 매우 강하게 말하지만, 사람을 속박에서 해방시킬 방법은 없습니다.

오늘날 이런 영향을 받은 교회가 매우 많습니다. 오늘 저는 벌집을 건드린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속박에서 해방시킬 능력은 없으면서 큰 원칙만 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노새인지 말인지 실제로 달려 보게 한다면, 성경에서 야고보는 한 번도 나타나서 무엇인가를 행한 적이 없습니다. 그가 무엇을 했는지 계속 알 수 없고, 성경에는 사도 바울에게 많은 혼란과 어려움을 일으켰다는 한 가지 일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고보가 교회 안으로 들어온 후 바울은 사도행전 13~14장에서 여러 곳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구브로에서 전도했고, 안디옥에서 전도했고, 이고니온에서 전도했으며, 루스드라로 갔다가 후에는 수리아와 수리아 안디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울의 사역이 어려워졌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전 세계의 교회가 예루살렘의 통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어떤 전도자에게 “내려가라. 이제 사역할 수 없다”고 하면 그는 사역할 수 없었습니다. “괜찮다. 계속하라”고 하면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관계가 좋지 않으면 면직될 수 있었습니다. 그가 편지를 써서 모든 교회에 알리면, 오늘날 지도자에게 “이 사람은 더 이상 사역할 수 없다”고 통지하는 것과 같아 일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사역할 수 없게 됩니다. 바울은 이 일을 갈라디아서에 기록했습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는 사적으로 하였으니 이는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2:1-2)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당시 바울이 관계를 잘 맺지 않았다면 매우 위험했을 것입니다. 면직될 수도 있었습니다.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데, 어느 날 “이제 그만두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이 일을 하게 했는데 나에게 대적하는 것이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계시를 받아 올라갔습니다. 헛수고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말에는 다른 뜻이 담겨 있습니다. 후에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루살렘 공의회를 열었습니다. 곧 사도행전 15장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모세의 규례와 할례에 관해 말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앞으로 헛수고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와 다음과 같은 합의를 이루었습니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사도행전 15:12-21)

이것은 어떤 합의입니까? 바나바와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가고, 베드로와 야고보는 유대인들에게 가는 합의였습니다. 이 분담은 좋아 보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당시 바울은 다른 사람의 지붕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의 지붕 아래 있으면 고개를 숙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바울은 지혜로웠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바로 이때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후 바울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마음껏 복음을 전했습니다. 마게도냐로 가고 유럽으로 가서 로마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 전에는 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사도행전 15장 이후에는 유럽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고, 고린도와 에베소 같은 곳에 이르렀습니다. 갈라디아서는 그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자 바울의 이방인 교회 안에서의 사도적 지위는 매우 견고해졌고 교회도 크게 부흥했습니다. 바울의 본거지는 안디옥이었습니다. 그는 늘 안디옥에서 출발해 여러 곳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후에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습니다. 안디옥은 이방인의 지역이었으므로 베드로는 처음에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오자 두려워하여 이방인들과 떨어져 함께 식사하지 않았습니다. 바나바도 베드로와 함께 위선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왔다고 이렇게 위선적으로 행동하다니, 정말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렇습니다.

바울은 이방인 교회에서 자신의 지위가 매우 견고해졌을 때 갈라디아서를 썼습니다.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본래 어떤 이들이든 내가 상관하지 아니하노라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으니,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갈라디아서 2:6-10)

이 말이 이해됩니까? 이것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루어진 합의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위선적인 요소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마치 높은 수준의 그리스도인과 낮은 수준의 그리스도인처럼 여겼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므로 높은 수준이고,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낮은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누면 되겠습니까? 절대 안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자신이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심각한 말입니까? 물론 심각합니다. 야고보는 갈라디아서를 읽었을 것이고, 그 후 매우 흥미로운 말을 했습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야고보서 3:10-11) 한 사람의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동시에 나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모세는 신명기에서 축복과 저주를 모두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조심해야 합니다. 듣기에는 좋은 말이지만 매우 혼란스러운 말도 많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야고보의 말은 무슨 뜻입니까? “믿게 된 이방인들은 이등 그리스도인이므로 우리가 그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지켜야 할 것은 지키고,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은 행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맞으면 맞는 것이고, 아니면 아닌 것입니다. “괴롭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방인이기 때문에 “너는 원래 할례를 지켜야 하지만 오늘은 내가 너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교회가 “원래는 헌금해야 하지만 내가 너를 괴롭히지 않으니 헌금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면 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행해야 하면 행하고, 행하지 말아야 하면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지키는 기준은 구약의 율법보다 훨씬 높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의 요구가 구약성경의 요구보다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 대해 제가 “더더” 혹은 “각각”이라고 말했을 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떠났습니다. 그들이 떠나면 떠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걸러 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아름다운 말을 한다 해도 저는 여러분을 축복하고, 여러분도 자신을 축복하면 됩니다.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을 엄밀하게 살펴 이 말이 옳은지 그른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하거나 갈라디아서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실천해 보았을 때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나는지, 억압받는 사람이 해방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엄밀하게 성경을 연구하라

엄밀하게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그러해야 하지만, 우리가 살던 시대에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추진할 때도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당시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추진할 때 엄청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큰 기업에서 개혁을 추진하면 많은 사람이 반대하지 않습니까? 상앙의 변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상앙이 마주한 저항은 매우 컸습니다. 사람의 고정된 생각은 바꾸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덩샤오핑과 마오쩌둥 같은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그들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추진할 때 중국은 가난하고 낙후되어 있었습니다. 중국 전체의 GDP가 대만보다도 낮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통일을 말한다면 어떻게 통일할 수 있겠습니까? 후에 덩샤오핑은 선전 지역에 선을 하나 그었고, 선전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그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선 안에 있던 사람들은 농민까지도 큰 부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덩샤오핑이 맞서야 했던 것은 “두 가지 모두”였습니다. “마오 주석이 내린 모든 결정을 우리는 단호히 지지한다. 마오 주석의 모든 지시를 우리는 변함없이 따른다.” 마오 주석은 실수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위대한 사람이었고 우리도 존경하지만, 그 역시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직되게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가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가 열렸던 시기였는데, 그 보고서는 정말 좋았습니다. 사실에 근거해 진리를 구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사실에 근거해 진리를 구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배우고 탐구하고 파헤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경직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무엇이든 다 실행해야 한다면, 유다가 자살했으니 우리도 자살해야 합니까? 물론 자살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유다 자살을 농담처럼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점치는 책처럼 여깁니다. 눈을 감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 달라고 한 다음 성경을 펼쳐 손가락으로 짚었는데, 눈을 떠 보니 유다의 자살을 가리키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살해야 합니까? 주님을 믿는 것이 이런 식입니까?

기초로 돌아가 온전한 신앙 체계를 세우라

신앙생활을 이렇게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절대로 이런 일을 하지 마십시오. 무섭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모두 실행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 가톨릭의 성경은 우리의 성경과도 조금 다릅니다. 성경을 세심하게 읽어야 합니다. 당시 어떤 바위 하나가 성경에 들어갔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바위가 성경에 들어왔는데 우리가 그 바위에 걸려 넘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라는 사실을 모릅니까? 예수님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라면 우리는 더욱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야고보는 어떤 사람입니까? 야고보는 “이방인 여러분, 내가 여러분을 괴롭게 하지 않겠습니다. 원래는 지켜야 하지만 내가 괴롭게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해도 됩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무슨 일이든 “내가 괴롭게 하지 않을 테니 성경을 읽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주일에 와서 설교를 듣지 않아도 됩니다. 노트를 작성하지 않아도 됩니다”라고만 한다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정말 심각한 일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많은 말이 옳지만 그 가운데 몇 마디만 틀려도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시 기초로 돌아가 온전한 신앙 체계를 세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배우는 것은 결코 맹목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영적인 일을 모르며 단지 심리적인 위로만 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보살과 동일시하면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습니다. 무지는 멸망을 가져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온전한 신앙 체계를 세우는 일을 추진해야 합니다. 제가 말하는 것을 믿지 마십시오. 제가 말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직접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어떻게 세웁니까?” 하나씩 세우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을 데리고 함께 세워 가고 있습니다. 함께 연구해 보면 “아, 원래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오늘 바울을 믿지 않는다면 신약성경을 어떻게 읽겠습니까? 바울을 성경에서 빼 버리면 누가복음부터 히브리서까지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살아 내며 이 능력의 복음을 회복한다면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사실이 웅변보다 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움을 추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게으르고 성경이 모두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성경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지는 모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지도 않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말하며 묵묵히 받아들이기만 합니까?

성경은 누가 썼습니까? 주후 300여 년이 지난 후 많은 사람이 함께 회의하여 당시 성경에 수록할 수 있는 것들을 모았습니다. 그때 교회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정말 알고 있습니까? 알지 못합니다. 오늘날까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교회 공의회가 무엇을 했는지 실제로 연구한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많은 사람이 모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가 확인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이방인 가운데서 바울이 가진 위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고, 자신들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이렇게 나뉜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사도 베드로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전하다가 사라졌습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그 일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까?

우리도 일을 하다 보면 어떤 사람은 일하던 중에 일을 없애 버립니다. 베드로의 직분은 점점 작아졌고 사도 바울의 사역은 점점 커졌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우리는 무엇을 보았습니까?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했고, 그가 전한 복음에는 성령의 능력이 크게 나타났습니다. 그가 세운 교회는 당시 유럽과 아시아, 소아시아 곳곳에 퍼졌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아시아의 경계까지 전했고, 후에 성령의 인도로 다시 유럽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우리도 알 수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그렇게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모순되는 복음을 전한다면 누구를 받아들이겠습니까? 저에게 묻는다면 저는 바울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참된 복음대로 실천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된다

제가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여 실천했을 때 교회에 능력이 충만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야고보서를 매우 열심히 읽고 그 내용을 실천하려 했지만 너무 어려웠고 도저히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노력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매우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 안의 많은 가르침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모순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모순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미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후에 바울의 가르침을 실천하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와 함께하시는지 보게 되었습니다.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모순되는지 여부를 상관하지 않은 채 어떤 때는 야고보의 말을 따르고 어떤 때는 바울의 말을 따른다면 되겠습니까? 1+1=2이면서 동시에 1+1=3, 4, 5가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시 생각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가운데 있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배움의 길을 열어 주고 싶습니다. 한 교회를 본 적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앞에서 설교하고 있었고, 아래에는 의자가 두 줄로 놓여 있었으며 가운데 통로가 있었습니다. 한쪽은 방언 기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고 다른 쪽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목회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전 예배와 저녁 예배가 다르면 이해할 수 있지만, 함께 수업을 한다면 어떻게 가르치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아무렇게나 하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좋은 사람인 척하며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고 하지 마십시오. 후에 사도행전 21장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야고보를 방문했습니다. 당시 야고보와 예루살렘 사람들은 모두 갈라디아서를 읽었고, 매우 분노하며 강하게 반응했습니다.

여러분이 야고보라면 갈라디아서를 읽은 뒤 그 내용이 모두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가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에 대한 답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때 바울이 예루살렘에 와서 야고보를 방문했습니다. 야고보는 좋은 사람인 척했습니다. 바울이 야고보를 만나자 서로 인사했지만 속으로는 서로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전후서, 로마서를 읽고 자신을 돌아보기를 바랐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기 방식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우리 중에 서원한 네 사람이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여 편지하였느니라.”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결례 기간이 만료되었음을 신고하니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를 드릴 때까지의 칠 일이라.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그를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사도행전 21:20-27)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칠 일이 거의 끝날 무렵 바울은 성전에 들어갔다가 주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성전이 매우 중요했고 대제사장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유대인의 규례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이상한 혼합체였습니다. “우리의 말을 따라 행하라”고 했는데 결국 바울은 붙잡혔습니다. 많은 사람이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 배후에 무언가가 있었는지 여러분은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바울은 이미 여러 해 동안 감옥에 갇혀 로마로 보내져 가이사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있었습니다. 깊은 사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누가는 매우 조심스럽게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복잡한 일입니다. 이 두 일을 연결해 보면, 결국 함정이 아니었겠습니까? 가라고 하고, 가자마자 붙잡아 죽이려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순수한 복음을 위해 대가를 치른 바울

왜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야 했습니까? 그 전에 많은 사람이 바울에게 가지 말라고 했고, 성령께서도 거듭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갔습니까? 바울은 서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한다.” 바울은 자신의 동족을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함정인 줄 알면서도 그 안으로 뛰어들었고, 산에 호랑이가 있는 줄 알면서도 호랑이가 있는 산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벌집을 건드려 봅시다. 돌과 침이 날아올 수도 있습니다. 침에 빠져 죽는다 해도 저는 기꺼이 감당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세워 준 본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복음의 비밀을 다시 회복하여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복음의 유익을 얻게 해야 합니다. 더 이상 겉모양만 내세우지 말고, 더 이상 외식적인 경건을 꾸미지 말고,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말에만 의지하지 맙시다. 오늘 우리가 전하는 것은 성령의 큰 능력으로 증거되는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이 시대는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는 시대이며, 사도 바울이 전한 순수한 복음을 회복하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복음은 다시 밝은 빛처럼 비추고,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다시 소망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이 복음을 위해 오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혜와 총명을 사용하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며 복음의 순수성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믿고 복음의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매우 훌륭한 본을 세웠습니다. 자신의 동족을 위해 생사를 초월한 사람, 돈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생명을 내놓은 사람만이 순수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에게도 큰 도전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날 밤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23:11)

한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면 안심하십시오.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다 이루지 못했다면 죽지 않습니다! 쉽게 죽지 않습니다. 다음 몇 주 동안 우리는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틀리게 말할 수도 있지만 괜찮습니다. 여러분은 자세히 연구하여 제가 말한 것이 옳은지 그른지 확인하십시오. 제 말에 걸려 넘어지지 마십시오. 이 일을 통해 당시 사도 바울과 야고보가 어떻게 걸어왔는지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복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후에 저는 야고보서를 즐겨 설교하는 목회자들, 야고보서의 진리를 진리로 여기는 많은 목회자들이 매우 힘들게 살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를 매우 가난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예루살렘 교회를 그렇게 가난하게 만들었을까요? 우리는 반성해 볼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많은 교회를 본 사람이라면 분명히 알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진리를 실천한 교회에는 공통된 결과가 있습니다. 교회가 매우 가난하고, 기적과 표적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혀 기적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많은 경우 제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이 일에 걸려 넘어지지 마십시오. 받아들이고 싶으면 받아들이고, 저는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연구한 결과를 여러분과 나누는 것입니다. 제가 야고보의 생애를 정리한 것이 어떻습니까? 여러분 앞에 매우 분명하게 드러났을 것입니다. 그가 한 일은 바로 이런 일들입니다. 다음 주에 다시 만나 야고보서 1장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다른 사람들이 야고보에 대해 말한 견해입니다. 야고보의 또 다른 이름은 의인 야고보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역사적으로 야고보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며, 이는 우리의 견해와는 다소 다릅니다.

Who Was James, Jesus' Brother?

예수님은 대가족 출신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3:55-56은 예수님의 형제들인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의 이름을 언급하고 누이들도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는 적어도 여섯 명의 형제자매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열거될 때 야고보는 항상 첫 번째로 나오는데, 당시에는 이것이 네 형제 중 맏이였다는 뜻일 가능성이 큽니다. 의인 야고보와 ‘낙타 무릎’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야고보는 주후 62년에 폭력적인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Who Was James, Jesus' Brother? What Does the Bible Say about James? Young Skeptic

요한복음 7:1-4에서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5절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이 사건은 예수님의 사역이 끝나 갈 무렵,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약 6개월 전에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동안 장애를 앓은 사람을 고치셨고(요한복음 5:2-9), 한 아이의 도시락으로 오천 명을 먹이셨으며(요한복음 6:5-14), 물 위를 걸으신 후의 일이었습니다(요한복음 6:16-21). 2년이 넘는 기적을 본 후에도 야고보는 회의적이었습니다. 함께 자란 형제가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겸손해진 증인

고린도전서 15:7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사람 가운데 야고보를 특별히 언급합니다. 죽었던 형제가 살아서 걷고 말하는 것을 본 야고보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됩니다.

후에 야고보서를 쓸 때 그는 자신을 예수님의 형제나 교회의 지도자로 소개하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소개합니다(야고보서 1:1).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직후 사도행전 1:14에서 야고보는 사도들과 함께 약속된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교회가 시작된 날인 오순절에 성령으로 충만해진 120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사도행전 2:1-4).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만난 순간부터 야고보는 온 마음을 다해 주님과 그분의 교회를 섬겼습니다.

야고보는 지혜로운 지도자였다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그는 두 교회의 장로인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만났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18-19에서 이 사건을 설명하며 야고보를 사도라고 부릅니다. 야고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 소수의 사람 가운데 하나였고, 그의 가르침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4년 후 바울이 유대인의 율법 중 어떤 것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적용되는지 해결하기 위해 다시 예루살렘에 왔을 때에도 야고보는 여전히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받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모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는 율법주의자들과, 이방인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유대인이 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는 바울과 베드로 사이에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습니다(사도행전 15:1-12). 이 논쟁은 막 시작된 교회를 둘로 찢어 놓을 만큼 복잡하고 심각했습니다.

야고보는 양측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각자의 의견과 염려와 논리를 충분히 표현하게 했습니다. 모두 말을 마친 뒤에야 대답했으며, 그의 대답은 성경에 대한 지식과 분별력, 강하고 공정한 지도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연설가들은 화려한 찬사로 청중을 추켜세우고, 이야기와 문화적 배경을 섞은 뒤, 결국 자신이 전하고 싶은 것을 암시하는 방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5:13-21에서 야고보가 한 연설은 단순하고 명확하며 핵심적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구원하고 계시다는 베드로의 증언을 지지합니다. 그리고 아모스 9:11-12을 인용하여 이방인의 구원이 성경의 가르침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성취임을 보여 줍니다.

그 후 야고보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타협안이었습니다. 이방인 신자들에게 유대인의 율법을 지우지 않되,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의 교제를 어렵게 만들 수 있는 네 가지를 삼가도록 한 것입니다.

더 이상의 논쟁은 없었습니다. 그의 권위와 지혜는 존중받았고, 그의 판결은 양측 모두에게 공정하고 유익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2:1-10에서 야고보를 교회의 기둥이며 명성이 높은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또한 야고보와 다른 장로들이 이방인 사역을 승인하면서 바울에게 부탁한 한 가지는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하라는 것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동생은 급진적인 옹호자였다

야고보서에서 야고보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반복해서 정의를 요구한 것은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의 약 4분의 1은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고 격려하며, 부에 따른 차별을 정죄하고, 부자들의 탐욕과 무관심과 착취와 어리석은 교만을 책망하는 데 할애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이처럼 많이 말한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그의 형제처럼 야고보도 돌려 말하지 않았습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육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야고보서 5:1-5에서 발췌).

야고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정과 돌봄을 베풀라고 권할 뿐 아니라 그들을 높이고 존중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야고보서 2:5).

목회적 평화를 이루는 사람

야고보서의 첫 구절에서 야고보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장황한 인사와 축복을 생략하고 곧바로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야고보서 1:2).

그의 말에는 목회자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신실하고 순결하며, 겸손히 하나님께 복종하라고 성도들을 권면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극심한 박해를 받아 대부분의 신자들이 다른 도시로 흩어졌습니다. 야고보는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난받는 이들을 영원한 관점으로 위로합니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야고보서 5:8).

교회의 연합은 야고보에게 중요한 우선순위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반복해서 권면하고(야고보서 2:12-13, 4:11-12), 혀와 성질을 다스리며(야고보서 1:19-20, 3:2-12), 혼란과 갈등과 다툼을 일으키는 시기와 이기적인 야망을 버리라고 촉구했습니다(야고보서 3:14-4:2).

성경에서 야고보가 마지막으로 역사적으로 언급되는 장면에서 그는 하나님의 가족이 된 이방인들을 기뻐하며, 교회의 분열을 회복하기 위해 바울에게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합니다. 예루살렘의 수많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다른 도시의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될 때 유대교를 버리라고 가르친다고 믿어 분노했습니다.

야고보는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믿을 때 유대인이기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 아님을 이해했습니다. 바울이 가르친 것은 이방인이 예수님을 믿거나 교회의 온전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혼란과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야고보는 바울이 자신도 여전히 유대인으로 여기며 율법을 지킨다는 사실을 보여 주도록 제안했습니다. 바울이 결례에 참여하고 다른 네 사람이 결례를 행하는 비용을 지불하게 한 것입니다(사도행전 21:17-26).

야고보는 사역 전체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지도력은 야고보서 3:17-18을 삶으로 실천한 모습이었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어떻게 죽었는가?

성경은 야고보의 죽음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록한 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에서 가택 연금 중인 장면으로 끝나며, 야고보는 그때까지 살아서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로마 총독들이 교체되는 과도기에 야고보가 죽었다고 기록했으며, 따라서 사망 시기는 주후 62년경으로 추정됩니다.

이때 야고보에게는 여러 별명이 붙었습니다. 의인 야고보, 오블리아스(“백성의 보루”라는 뜻의 헬라어), 그리고 ‘낙타 무릎’이라는 별명입니다. 왜 낙타 무릎일까요? 맷 에릭슨은 2세기 그리스도인 헤게시푸스가 야고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성전에서 홀로 무릎을 꿇고 유대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습으로 자주 발견되었으며, 너무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기도했기 때문에 그의 무릎이 “낙타의 무릎처럼 굳어졌다”는 것입니다. 그의 삶은 야고보서 5:16에서 기도에 대해 기록한 내용을 믿었다는 증거를 보여 줍니다. 이제 그의 믿음은 곧 시험을 받게 됩니다.

4세기의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인용한 헤게시푸스의 기록에는 야고보의 죽음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의인 야고보는 비그리스도인 유대인들에게까지 매우 존경받고 있었습니다. 야고보가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말하자 지도층 가운데 일부가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걱정된 유대 지도자들은 야고보에게 군중에게 말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야고보를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군중이 그를 보고 들을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는 모두 당신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당신은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백성은 혼란스러워하며 죽은 사람 예수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 대해 말해 주십시오.”

야고보는 똑같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왜 예수님에 대해 묻습니까? 그분은 하늘에 계시며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고 하늘의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분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도자들은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군중을 향해 외쳤습니다. “아, 의인이 자신도 미쳐 버렸구나!” 그리고 야고보를 그 높이에서 아래로 던졌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죽지 않자 지도자들은 그를 돌로 치기 시작했습니다.

야고보는 늘 하던 일을 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유대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돌이 계속 그의 몸을 때리는 가운데 한 제사장이 외쳤습니다. “멈추시오! 무엇을 하는 것이오? 의인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소!” 한 세탁공이 빨래를 두드릴 때 사용하는 방망이를 들어 야고보의 머리를 내리쳤고, 의인 야고보는 마침내 죽었습니다.

야고보는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는가?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세베대의 아들이며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와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데 동의합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이끈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기 전에 죽었습니다(사도행전 12:2).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인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가 같은 인물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다른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이 학자들은 야고보가 예수님의 사촌이나 의붓형제였다고 제안합니다.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7:1-4에서 그들이 예수님을 조롱한 사건은 열두 제자들이 참여했던 많은 사건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야고보의 유산

야고보의 삶은 부활의 능력을 보여 줍니다. 조롱하던 회의론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본 후 헌신적인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서 그의 모습은 공정하고 연합을 이루며 굳건한 섬김의 지도력을 보여 줍니다. 야고보서는 교회의 사명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곧 연합, 기도와 증언에 대한 신실함, 순결, 시험 가운데 인내, 서로와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돌봄입니다. 야고보의 삶과 사역과 글은 교회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고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서론

야고보가 어떻게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는지 처음부터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때는 대략 주후 30년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바울이 주님을 믿은 때는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약 45년이 지난 때이고,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린 때는 바울이 주님을 믿은 후 14년이 지난 때입니다. 대략 주후 4749년경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주후 30년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십자가 사건부터 예루살렘에서 처음 공의회가 열린 사도행전 15장까지는 약 1718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1718년 동안 교회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다시 약 34년이 지나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썼습니다. 갈라디아서에는 베드로와 야고보에 관한 많은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주후 5253년경에 기록되었고, 당시 바울은 이방인 가운데 매우 견고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야고보와 베드로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부르심을 잃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원래 바울에게 맡기려던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맡겨진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믿은 후 한 곳으로 가서 14년 동안 머물렀고, 예루살렘에 간 것은 그 후의 일이었습니다. 원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베드로의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여러 곳을 다니며 기적을 행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이 일은 사도행전 10장 1~20절에서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가서 몇 분 동안 설교했습니다. 베드로가 아직 설교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고넬료에게 부어졌습니다. 고넬료는 방언으로 말했고, 베드로는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물로 세례 베푸는 것을 막겠느냐?”라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도록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다는 확증이었습니다. 복음은 계속 이방인에게 전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베드로는 야고보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이었습니다. 왜 야고보는 베드로를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길로 이끌었을까요? 후에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방인 앞에서 위선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야고보의 영향을 받은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있을 때 아무도 보지 않으면 위선적으로 행동하고 그들과 잘 어울렸습니다. 사실 이것이 원래 그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위선적인 문화의 기원

후에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자, 베드로는 누군가가 보고할까 두려워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있을 때 그들 앞에서 위선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에 기록되어 있고, 성경의 원문은 이것을 위선이라고 부릅니다. 위선적인 행동은 예루살렘 교회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전한 것은 모세의 율법이었고, 모세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누군가가 자신이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의 말은 독단적으로 보이지만 복음의 순수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믿을 것이라면 왜 예수님을 내세워야 합니까?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고넬료가 주님을 믿은 일을 전하자, 교회 안의 많은 할례 지지자들은 베드로가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했다고 비난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모든 일을 설명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할례를 중요하게 여겼고, 그리스도인이라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온 힘을 다해 그들에게 설명했고,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은혜를 주셨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전통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면 바꾸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할례를 받았는지 여부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전혀 막지 못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교제하려 했지만 모두가 그를 두려워했고, 바나바만 그를 받아 주었습니다. 후에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나 먼 곳으로 갔습니다. 바나바가 다소에 가서 바울을 데려왔고, 이것은 사도행전 1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안디옥에 이르렀고, 이때부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파송되어 여러 곳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3~15장에 기록되어 있으며, 주후 49년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기 전의 일입니다. 몇 년 동안 사역했고 결과는 매우 좋았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했을까요? 계시를 받아 올라갔으며, 자신이 이전에 한 일이 헛수고가 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공의회에 참석해 보니 누가 지도자였습니까? 야고보였습니다. 원래 베드로가 지도자였는데 어떻게 야고보가 지도자가 되었을까요?

당시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고, 헤롯 왕은 베드로를 잡아 감옥에 넣었습니다. 사람을 세워 지키게 하고 유월절에 끌어내어 죽이려 했습니다. 죽이기 전날 밤 천사가 와서 베드로를 구해 주었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집에 갔고, 많은 사람이 그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사도행전 12:17에서 언급된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동생입니다. 야고보와 베드로의 관계는 매우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지위가 베드로보다 높았는지 낮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후에 베드로는 숨어 버렸고, 야고보가 그를 대신해 예루살렘 교회를 관리하도록 했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언제 교회에 들어왔는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야고보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야고보가 교회에 들어온 일을 기록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대담하게 추측해 보겠습니다. 교회는 매우 강력한 조직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했고, 사람들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했으며 교회 안에는 엄청난 돈이 있었습니다. 함께 식사하며 공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가 박해를 받았고 스데반이 순교했습니다. 바울도 교회를 박해한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후에 하나님께서 친히 바울을 택하셔서 주님을 믿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그분의 형제들은 없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도 없었으며, 부활하실 때도 없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실 때에도 그분의 형제들이 없었습니다. 언제 등장했습니까? 교회가 부유해진 후입니다. 마리아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자신의 형제자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아들을 교회 일에 참여시키려 했을 수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이 베드로와 마리아를 매우 높인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위에서 말한 대담한 추측입니다.

야고보가 귀신을 쫓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도망할 때 야고보가 갑자기 등장했습니다. 아마도 월급만 받고 일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야고보는 매우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예수님의 또 다른 동생 유다가 무엇을 했는지는 성경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와 로마 교회에 많은 곤란을 가져왔습니다. 야고보서는 영향력이 컸고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지만, 그것이 무엇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순수한 복음을 위해 논쟁하다

고린도전후서에는 “베드로만 가장 큰 사도인가?”라는 문제가 나옵니다. 바울이 이런 일로 논쟁한 이유는 야고보와 베드로의 영향력이 컸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야고보와 베드로의 지위 때문에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들의 지위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한 일은 알고 있지만 야고보가 한 일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육신적인 관계도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교회가 중요합니다. 야고보가 정말 위대한 일을 했다면 성경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많은 사람이 말은 잘하지만 행하지는 못합니다. 오늘날 이런 교회가 매우 많습니다. 사람을 속박에서 해방시킬 능력은 없으면서 말만 많이 합니다.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니라 능력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야고보는 한 번도 실제로 나타나 무엇인가를 행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야고보가 바울에게 많은 혼란을 일으켰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3~14장에서 바울은 곳곳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 세계의 교회는 모두 예루살렘의 통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야고보가 “더 이상 사역하지 말라”고 하면 사역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 일을 갈라디아서 2:1-2에 기록했습니다. 이 구절의 미묘한 뜻을 보았습니까? 당시 바울이 관계를 잘 맺지 않았다면 위험했으며, 어느 날 야고보가 그를 면직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받은 계시는 헛수고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후에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를 열었습니다. 그는 모세의 규례와 할례에 관해 말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앞으로 헛수고하지 않도록 합의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5:12-19에 기록된 이 합의는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에게 가고, 야고보와 베드로가 유대인에게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었고, 이후 이방인들에게 대대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의 이방인 가운데서의 사도적 지위는 견고해졌고, 그의 본거지는 안디옥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 처음에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했지만,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오자 두려워 이방인들과 떨어졌습니다. 바나바도 베드로와 함께 위선적으로 행동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지위가 매우 견고해졌을 때 갈라디아서를 썼습니다. 그는 유력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더해 준 것이 없고 자신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루살렘 교회에는 위선적인 요소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유대인은 높은 수준의 그리스도인이고 이방인은 낮은 수준의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여겼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한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동시에 나올 수 없다고 했지만, 모세는 신명기에서 축복과 저주를 모두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야고보가 이방인에게 “너희를 괴롭게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맞는 것은 맞고,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결코 낮아지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율법의 기준은 구약성경보다 훨씬 높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엄밀하게 연구하여 이 말이 옳은지 그른지 살펴야 합니다. 누가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울의 말을 실천했을 때 실제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많은 사람이 치유되기 때문입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과 상앙의 변법에는 엄청난 저항이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GDP는 대만보다 낮았지만, 덩샤오핑은 선전에 선을 그었고 후에는 한 농민의 재산도 크게 늘어났습니다. 덩샤오핑은 권위를 맹목적으로 믿지 않고 사실에 근거해 진리를 구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사실에 근거해 진리를 구하고 탐구하며 파헤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모두 해야 합니까? 유다가 목을 매었으니 여러분도 그렇게 하겠습니까? 성경에 들어 있다고 해서 모두 실행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바위가 들어 있다면 그것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많은 말이 옳지만 몇 마디의 잘못된 말만으로도 치명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초로 돌아가 온전한 신앙 체계를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보살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 버리면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은 보살의 마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무지는 멸망을 가져옵니다. 계속 성경을 연구하여 온전한 신앙 체계를 세워야 합니다. 연구하고 나면 “아, 원래 이런 것이었구나”라고 알게 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을 믿지 않는다면 신약성경을 읽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행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있는 모습을 살아 낸다면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자세히 연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라

많은 사람이 게으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스스로는 제대로 읽지 않습니다. 오늘날 예루살렘 공의회가 무엇을 했는지 연구한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받았지만, 원래 그것은 베드로의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그 일이 사라졌습니까?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에는 성령의 능력이 크게 나타났고, 그가 세운 교회는 여러 지역에 퍼졌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야고보의 복음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제가 바울의 방식으로 교회를 세웠을 때 교회에 능력이 충만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야고보의 방식으로 교회를 세우려고 매우 노력했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미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 하며, 여러분을 위해 배움의 길을 열어야 합니다.

한 교회에서 절반은 방언 기도를 받아들이고 절반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교회에서 어떻게 설교하겠습니까? 반씩 나누어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사람인 척하며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후에 사도행전 21장에서 야고보는 갈라디아서를 읽고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다시 예루살렘에 왔고, 야고보는 좋은 사람인 척하며 서로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기를 바랐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기 방식대로 행동했습니다. 사도행전 21:20-26에 따르면 결국 성전에서 칠 일이 끝나 갈 때 바울은 주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성전과 대제사장은 그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이상한 혼합체였습니다. 바울이 붙잡힌 일의 배후에는 많은 사정이 있었습니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바울은 로마에서 여러 해 동안 감옥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함정이었습니다.

사명을 가진 사람은 죽지 않는다!

바울은 왜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야 했습니까? 자신의 동족을 위해서였습니다. 자신이 주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했습니다. 함정인 줄 알면서도 그 안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벌집을 건드려 봅시다. 침에 빠져 죽는다 해도 기꺼이 감당하겠습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복음의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외식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의 순수성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 시대의 복음은 다시 밝은 등불처럼 빛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혜와 총명을 사용하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며 복음의 순수성을 지켰습니다. 오늘 복음을 믿는 우리가 복음의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매우 훌륭한 본을 세웠습니다. 생사를 초월하고 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만이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3:11의 말씀처럼, 안심하십시오. 한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전에는 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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