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서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여러분에게 큰 위로가 될 수 있는 주제인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는 우리의 ‘영생의 도’ 시리즈 강의 중 제6강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제가 관찰한 바로는 많은 사람이 처음에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 사실 ‘어리둥절하고 막연한’ 상태에서 출발합니다. 제가 처음에 한 영어 교회에 들어갔을 때를 떠올려 보면, 성경을 읽어본 적도 없었고 영어도 반쯤밖에 알아듣지 못해 겨우 5%에서 10% 정도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막연한 상태에서 주님을 믿기로 선택한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주님을 믿게 된 경험은 대체로 ‘알 듯 모를 듯한’ 상태에서 시작되었으며, 완전히 깊이 연구하여 꿰뚫어 본 후에 믿기 시작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번 설교의 핵심 관점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와 같은 형제자매들에게 위로를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글을 많이 알지 못하거나, 노트를 적을 줄 모르거나, 심지어 컴퓨터로 타이핑할 줄 모를 수도 있습니다. 비록 여러분 스스로 지각과 깨달음이 평범하다고 느낄지라도, 마음으로 굳게 믿기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에 그리 크게 연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사람이라면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그저 다른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전하는 것을 듣고 어리벙벙한 채로 믿었는데, 이런 형제자매들도 사실 참 좋습니다! 베드로처럼 산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과거에 저는 늘 깨달음과 지각을 강조하느라 어쩌면 그들에게 상당한 부담을 주었을지도 모르고, 그들의 마음을 답답하고 꼬이게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회개해야 합니다. 믿는 것은 매우 단순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단순하게 설교하면 성도들이 나태해지지 않을까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실 것입니다.
목회자로서 사람이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 세상을 떠나기 직전의 그 단계에서는 보통 어떻게 ‘승리’를 추구할 것인지를 더 이상 강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환자가 도리어 더 혼란스럽고 불안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나누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풍성한 자애를 앙망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말기 암을 앓던 한 자매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날들에 저는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더 위로를 주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비록 그녀의 병이 치유되지는 못했지만, 그녀도 치유를 경험했던 적이 있었고 안타깝게도 잘못된 선택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진정으로 믿었습니다. 그 자매님은 “목사님, 헌금하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제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질 뻔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자매님, 자매님의 헌금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비록 제가 그녀의 돈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믿음이 하나님께 열납되었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비록 그녀가 육체의 치유는 끝내 받지 못했지만, 저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고 굳게 믿습니다. 이는 고인에 대한 위로일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힘을 줍니다.
오래전, 제가 처음 주님을 믿었을 때 부모님께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관계가 아주 좋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교통이 매우 불편해서 기차역 승강장은 늘 이별의 눈물로 가득했습니다. 다음번에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아무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부모님께 주님을 믿으라고 권했을 때, 아버지의 말씀은 제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아, 너는 우리의 혈육인데 우리가 어찌 네 말을 믿지 않겠느냐? 다만 우리가 나이가 많아서 도대체 어떻게 믿어야 할지를 모를 뿐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몇 년 후 부모님은 몇 가지 이적을 경험하고 마침내 주님을 믿으셨습니다. 비록 부모님의 신앙생활이 그리 훌륭하지는 않았고 정말 승리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제게 더없는 위안을 준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해 아버지는 감기와 기침으로 입원하셨고 병세가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자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신 지 두 달 만에 아버지는 평온하게 숨을 거두셨습니다. 가족들이 장례를 준비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기적처럼 깨어나셨습니다. 친척 중 한 분이 농담조로 “염라대왕이 몇 년 더 살다 오라고 돌려보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분을 엄하게 째려보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누나가 조용히 “아버지, 천사를 보셨어요?”라고 묻자, 아버지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몇 시간 후 아버지는 평안히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 일은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종종 제게 “목사님, 제 가족이 세상을 떠난 후 과연 천국에 갔을까요, 아니면 지옥에 갔을까요?”라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다 천국에 있다고 믿습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섭리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 풍성한 은혜와 긍휼이 있음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이 일로 염려하지 마시고,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충만하십시오. 어떤 분들은 마음이 매우 부드러워서 저와 따지지 않고 “아, 정말 좋네요, 주님을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군요”라고 받아들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아십니까? 제게는 이론적 근거가 있습니다. 평생 온갖 악행을 저지른 한 강도를 아실 것입니다. 제 생각에 그는 사람을 찔러 죽인 적도 있을 것입니다. 강도이니 실수로라도 사람을 해쳤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중에 그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예수님이 가운데 계시고 그는 옆에 있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잘 들어보십시오. 이렇게 악한 사람, 뼛속까지 악한 사람이 바로 그 순간 아주 잠깐 믿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우리도 그 낙원이 어떤 곳인지 잘 모르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어쨌든 지옥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듣기만 해도 참 좋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듣기에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평생 착한 일을 해놓고도 예수님을 도무지 믿지 않는 사람보다 이 강도의 이야기가 훨씬 더 좋게 들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습니다. 말씀드리자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라는 글자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가 숨을 거두기 5분 전에 믿었는지, 숨을 거두기 하루 전에 믿었는지, 숨을 거두기 한 달 전에 믿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얼마나 좋으신 분이며, 얼마나 은혜로우신 분입니까!
이 사실이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사람의 믿음에 따라 은혜를 베푸십니다. 믿음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사람이 추구하는 것, 사람이 바라는 것, 사람이 얻고자 갈망하는 것을 어쩌면 알 듯 모를 듯할 수 있습니다. 영생, ‘나는 영생을 얻고 싶다’고 하지만 영생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어쨌든 저는 그것을 다 설명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땅의 일을 말씀하셔도 우리가 다 믿지 못하는데, 하늘의 일을 말씀하시면 우리가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에게 하늘의 일을 일일이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제가 들 수 있는 예는 아직도 많습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사역자들도 예수님을 믿을 때 다 어리벙벙한 상태였습니다.
한 자매님이 싱가포르에 와서 교회로 인도되었습니다. 싱가포르의 교회는 대부분 영어를 사용하는데, 그녀는 영어를 잘 못해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자 그녀는 손을 들었고, 옆에서 누군가 통역을 해 주어 그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것이 다 믿음으로 버텨온 것 아닙니까? 제가 보니 우리 가운데 여기 앉아 계신 많은 형제자매들도 제가 전하는 말을 어리벙벙하게 들으면서 믿게 되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훤히 다 알고 있다면 더 이상 제 성경공부를 들을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깨닫고 나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나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도무지 믿지 않습니다. 무슨 수를 써도 믿지 않습니다. 목에 칼을 들이대도 안 믿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형제자매 여러분, 천천히 배웁시다. 제가 인용한 이 본문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제게는 이러한 근거들이 있습니다. 아셔야 할 것은, 제가 베드로를 좀 칭찬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베드로를 몹시 낮추어 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에게는 거대한 장점이 하나 있습니다. 훗날 천국에서 그를 만나면 “야! 네가 드디어 나를 칭찬하는구나!”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바와 같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이것이 제가 자주 베드로를 칭찬하는 부분입니다.
베드로에 대해 말하자면, 그가 평생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교회를 세웠는데 교회를 ‘대형 식당’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참 별로였습니다. 그가 한 일들은 솔직히 말해 다소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의 상황도 낙관적이지 못해 땡전 한 푼 없이 가난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이 세운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성도들의 사랑의 헌금을 얻어 쓰기도 했습니다. 순교하기 전에는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를 썼는데, 그 글들도 다소 횡설수설하고 썩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주님을 믿은 것은 참으로 진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신 제자는 세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베드로, 요한,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은 그 세 사람을 데리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수난에 대해 의논하는 거룩한 환상을 직접 목격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베드로를 편애하셨을까요? 비록 베드로의 믿음에는 지각적 깨달음의 뒷받침이 부족했을지라도, 그의 순수한 마음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 아니라 동명의 다른 제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야고보라는 이름이 너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그 솔직한 믿음을 특별히 아끼셨습니다. 비록 베드로가 ‘세 번 주를 부인하는’ 부끄러운 일을 겪기는 했지만, 그의 삶은 사실 흥미진진했습니다. 베드로는 참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창조하실 때부터 이런 유쾌한 성품을 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몹시 기뻐하셨습니다.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사려 깊지 못한 말을 내뱉으며, 이를테면 예수님께 수난을 당하지 마시라고 말렸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고 꾸짖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처럼 진솔하고, 심지어 약간의 희극적 면모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곁에 베드로 같은 사람이 한두 명 있다면 삶에 분명 많은 즐거움이 더해질 것입니다. 베드로는 무해하고 유쾌함이 넘쳐 예수님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주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베드로는 즉시 “주여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라고 반응했습니다. 그는 이처럼 유쾌하고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베드로가 교회를 세우는 일을 망쳐놓았고, 나중에는 바울이 세운 교회에 가서 엉뚱한 소리를 하기도 했으며, 베드로전후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30여 년 동안 그는 학문을 깊이 연구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비할 데 없이 확고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중에 베드로와 매우 닮은 분들은 너무 답답해하지 마십시오. 비록 제가 평소에 늘 ‘지각(깨달음)’을 강조하지만, 여러분이 사도 바울을 본받지 못하겠다면 베드로를 본받아도 괜찮습니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생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바울이 훗날 썼듯이, 만약 당신이 세운 교회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 아니라 풀이나 나무나 짚으로 지어져 불에 타 버린다면, 당신의 공적은 불타 없어질지라도 당신 자신은 결국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교회를 어떻게 세워야 할지 몰랐고, 이 방면의 깨달음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과 믿음은 지극히 진실했으며,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공정하게 평가해 주어야 합니다. 훗날 주 예수님은 그에게 순교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는 마치 불 속에서 끄집어낸 나무토막과 같아서, 공적은 불타 해를 입었으나 자신은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 충만하신 분입니다. 여러분이 베드로의 그 순수한 믿음을 본받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그는 결연히 따랐으며, 이것 자체가 하나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베드로의 믿음은 진실했으며, 우리 가운데 글을 잘 알지 못하는 많은 형제자매들의 믿음 또한 그만큼 순수합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깁니다. 결국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왜 ‘승리’를 추구해야 할까요?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십자가 위의 강도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그는 평생 악을 행하다가 임종 직전에야 십자가에서 회개하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은 그의 평생에 은혜가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그는 참으로 고되고 힘들게 살았습니다. 만약 그가 젊었을 때 주님을 믿고 승리를 추구했더라면 강도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암흑가에서 부대끼며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며, 매우 고단하고 위험으로 가득 찬 삶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그가 소년 시절부터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며 평생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먼저 죄 가운데 살다가 임종 때 그 강도처럼 회개해도 늦지 않다고 늘 생각합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논리입니까? 겨우 숨 넘어가기 직전에 구원을 얻으려고 평생 헛되이 고생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승리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난 은혜입니다. 승리할 때마다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을 살아낼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셈을 분명히 계산해야 합니다. 늘 마지막 순간까지 미루려고 하지 말고, 아직 건강하고 기회가 있을 때 마땅히 승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진작에 제대로 보충 수업을 받아 바울처럼 교회를 잘 세웠더라면 얼마나 영광스럽게 살았겠습니까? 불 속에서 끄집어내어 새까맣게 그을리고 연기가 풀풀 나는 나무토막처럼 되지 않았어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왜 굳이 그런 모양새가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승리해야 합니다. 승리는 살아 있을 때의 일입니다. 설령 승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영생을 주실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살아 있을 때 승리했습니까?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그 강도가 살아 있을 때 승리했습니까?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고생스러웠습니까? 고생스러웠습니다. 그러므로 승리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며 살기 위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핵심이며, 바울이 전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복음은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창조하셨고 베드로도 창조하셔서 우리가 본받을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연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지금 우리의 인생을 연출하기 시작하셨으니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만드셨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유쾌함이 넘칩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 베드로가 저지른 일들을 이야기하고, 바울이 가르친 교훈들을 이야기하면 흥미가 넘칩니다. 만약 베드로가 없었다면 주님을 믿는 우리의 인생은 많은 재미를 잃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베드로처럼 어리벙벙하게 믿었고, 어쨌든 살아서 조금 고생해도 괜찮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베드로의 이야기를 듣고 ‘베드로가 영생을 얻었구나’ 하는 위로를 얻습니다. 알고 보니 당신도 베드로 같은 사람이었군요, 그것도 참 좋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함께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도무지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복음과 하나님의 의가 바로 이러한 일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끝내 믿지 않고, 믿기도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경험하고 나서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참으로 기괴합니다. 우리 중 한 자매님이 어떤 사람에게 간증을 나누었습니다. “제가 그때 우울증에 걸려 잠을 못 잤어요.” 그러자 그 사람은 온갖 분석을 늘어놓으며 “그건 귀신이 아니야. 사실 그 잠 못 자는 문제는 나도 잘 알아”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건 마음속에 불안이 있어서 그래. 불안하지 않으면 잠이 오잖아? 나를 봐, 난 불안하지 않으니까 불면증이 없어.” 귀신과도 상관없고, 영생과도 상관없이 그저 불면증에 대해 이리저리 해설만 늘어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참 신기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단번에 믿는데, 어떤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믿지 않습니다. 알고 보니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은 다 믿은 것입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의 예정을 바꿀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직면한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 중 한 자매님이 있는데, 그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녀의 믿음으로 인해 은혜를 받았을까요? 받았습니다. 그녀의 고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경험했는데도 도무지 믿지 않습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80세가 넘으셨을 때 지옥의 불을 보기 시작했고 영계의 것들을 보아서 모두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매님이 이틀 동안 그분을 위해 기도해 드린 후부터 그것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그러고 나서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녀의 할머니도 허리 디스크를 앓았는데, 우리 자매님의 섬김을 통해 치유를 경험했으면서도 끝내 믿지 않습니다. 입만 열면 “아이고, 난 오래 잘 살아야지”라고 하십니다. 잘 사실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가족을 만나셨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조금이나마 위로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부디 언젠가 그분들이 믿게 되기를 바랍니다. 작정은 작정이며,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으니 그저 믿으십시오. 만약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작정하셨다면 우리가 무엇을 따질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정해진 사실을 바꿀 수 없습니다. 저는 어떤 일들이 전통적인 교회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늘 느낍니다. 사람들은 가족을 위해 필사적으로 기도하며 상대방이 주님을 믿기를 바라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아무리 많은 경험을 하고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상대방이 도무지 믿지 않아 결국 바꾸지 못하는데, 이것이 어쩌면 이른바 예정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예정에 대해서는 말을 줄이고 믿음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사실 한 사람이 듣고 곧바로 믿는다면, 그것이 바로 작정된 것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들 중 많은 분이 이런 믿음의 여정을 거쳤습니다.
본문 말씀
그들이 회당에서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의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사도행전》 13:42-51)
기도
하나님! 우리 가운데 주님의 역사를 나타내사, 주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우리는 믿음을 선택합니다! 주님을 신뢰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의인이라 칭함을 받게 하소서! 우리가 항상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며, 믿음의 도를 떠나지 않게 하옵소서! 아멘!
본문 배경
본문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의 도를 선포하자 이방인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고 기록합니다. 바울이 안디옥에서 겪은 경험은 매우 의미가 깊은데, 바나바가 그를 그곳으로 데려갔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주님을 믿은 후의 여정은 매우 특별했습니다. 비록 성경에 그의 초기 행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는 성경에 대한 깊은 조예로 인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훗날 누가가 안디옥에서 바울을 알게 되었고, 이 역사를 《사도행전》에 기록했습니다.
안디옥은 이 작은 무리가 모여 기도하고 말씀을 나눔으로써 매우 큰 영향력을 지닌 거룩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제자들에게 분부하여,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바나바와 바울은 선교 여행을 시작했는데, 그때 바울은 아직 사울이라 불렸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처음으로 밖으로 나가 선교하며 교회를 개척한 여정이었으며, 그의 생각은 매우 명확하여 교회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교회를 세우는 구체적인 실행 단계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한 지역에 이르렀을 때 바예수라 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지역의 관리인 총독 서기오 바울은 영적인 일에 큰 갈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루마라는 마술사가 끊임없이 바울을 방해했습니다. 바울은 ‘내가 이 지역의 장관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네가 어찌하여 여기서 훼방을 놓으며 복음 전파를 가로막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를 주목하며 엄히 꾸짖었습니다.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그러자 즉시 엘루마의 두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서기오 바울은 바울이 전한 말씀의 권능을 직접 목격하고 즉시 주의 도를 굳게 믿었습니다.
바울이 이적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그의 확고한 믿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바울이 행한 이적은 심지어 베드로보다도 많았습니다. 바울의 믿음은 그가 주님을 믿은 첫날부터 세워지기 시작했으며, 그 사이 14년 동안 그는 《구약》 성경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빛이 되어 땅끝까지 구원을 베풀라는 말씀을 읽었으며, 이 내용들에 매우 익숙했습니다. 저는 바울의 《창세기》에 대한 이해가 우리보다 훨씬 뛰어났다고 믿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구약》 성경의 핵심 초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곧 교회였습니다. 그의 신학 체계는 전체 근본이 믿음 위에 세워져 있었기에, 그의 훗날 서신들과 교회 개척 역시 모두 이를 기초로 삼았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으니, 이것이 바로 믿음의 논리입니다. 믿음은 이적을 가져옵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나이가 어려 비록 많은 도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마음속에 순수한 믿음만 있다면 이적은 뒤따라 일어납니다. 우리 가운데 한 자매님이 아팠을 때 그녀의 네 살배기 아이가 그녀를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아이는 제가 기도하는 모습을 똑같이 흉내 내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를 선포했는데, 결국 그 엄마의 병이 정말로 깨끗이 나았습니다. 비록 그 아이가 그 깊은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겠지만,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주님을 믿은 것 역시 믿음에서 시작하여 점차 주의 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 나갔습니다. 믿음이 먼저 있고 그 뒤에 다른 것들이 따르는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에 이름’, 이것이 바로 바울의 신앙 여정이었습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나아가 이어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은 안디옥이라 불리는 또 다른 도시이지만 다른 지역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설교를 한 편 전했는데, 그 내용은 《사도행전》 13장 16절부터 4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애굽을 나와 광야에서 40년을 보냈는지, 훗날 다윗과 사울의 행적은 어떠했는지를 이야기한 후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하여 《구약》의 맥락을 정리해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썩음을 당하지 않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이시며, 그분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여러분에게 임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이 믿음의 길을 가지 않으면 선지서에 기록된 저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도 베드로나 십자가 위의 강도, 심지어 우리 같은 사람들도 행위만으로는 결코 통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믿음 때문입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것은 이렇게 단순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도를 떠나지 마십시오. 우리는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을 때는 상황이 나빠지지만, 믿을 때는 마음속에 기쁨이 넘칩니다.
바울이 회당에서 설교를 마친 후 다음 안식일이 되자 온 성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가 매우 훌륭하고 이전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씀이라고 느꼈습니다. 과거에 들었던 것은 지루한 이론에 불과했고 표적과 기사도 없어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바울이 전하자 모두의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두 번째 주일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는데, 바울이 말씀을 잘 전했을 뿐만 아니라 표적이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시기심이 가득 차서, 바울의 설교가 수많은 사람을 끌어모으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입지를 빼앗겼다고 느꼈습니다. 사실 바울은 경쟁하러 온 것이 아니었으나, 유대인들은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믿음과 불신은 사실 매우 단순한 선택입니다. 이어 그들은 바울을 비방하기 시작했고, 성안의 귀부인들과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했습니다. 떠나기 전 바울은 매우 중요한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이방인들이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이어 누가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비록 어떤 이들은 여전히 알 듯 모를 듯 들었을지라도, 믿기만 하면 구원이 임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우리에게 매우 중대한 계시를 줍니다. 비록 우리가 지각과 깨달음을 장려하고 지각 안에서 믿음으로 충만해져야 하지만, 지각 안에서 믿음으로 충만해지기 전에 먼저 그 ‘지각이 다소 부족한 상태의’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것은 믿음의 도이다
바울의 서신, 특히 《갈라디아서》를 읽어보면 야고보는 “믿음뿐만 아니라 행함도 있어야 한다”고 말한 반면, 바울은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한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바울이 말한 ‘오직 믿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야고보서》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지만, 이는 현실 속에서 실제로 적용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입으로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마음으로 진정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떤 일로 돈을 벌 수 있다고 정말로 믿는다면 그는 반드시 그 일을 할 것입니다. 만약 돈을 벌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다면 꼭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왜 사기를 당합니까? 사기꾼을 믿었기 때문에 돈을 빚내서라도 투자했다가 결국 사기를 당해 빚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지 않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구절은 사실 재고의 여지가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암 환자가 치유를 받을 때 그에게 무슨 행함이 있었습니까? 그는 단순히 믿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치유받는 것을 보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으며, 맹인이 보게 되고 다리 저는 자가 걷게 되었을 때도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은 당시에 특별한 행함이 없었으며, 마음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결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며 행함이 핵심이 아님을 상세히 논증했습니다. 많은 사람의 혼란은 어디에 있습니까? 많은 이가 자신은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악한 짓을 행하는데, 그것은 사실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표적과 기사가 따르며, 이는 매우 단순하고 순수한 믿음입니다. 결코 믿음과 행함이 동등하게 나란히 서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1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믿음의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바울이 주님을 믿고 14년이 지난 후에야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그 기간 동안 그는 수많은 준비를 하며 《성경》을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십수 년의 축적을 거쳐 성경을 한 장 한 장 명확하게 공부해 낸 것과 같습니다. 왜 우리의 신학이 열매가 있습니까? 믿음의 도를 전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도에는 표적과 기사가 뒤따릅니다.
믿는 자에게는 반드시 표적과 기사가 따름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그가 행한 이적은 참으로 많았습니다. 당시에 총독 서기오 바울 앞에서 바울은 마술사 엘루마의 두 눈을 그 자리에서 멀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도를 대적하는 자의 눈을 즉시 멀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바울의 믿음이 보통 사람은 감히 따르기 어려울 정도였음을 보여줍니다. 그에게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표적과 기사가 끊임없이 그를 따랐으며, 바울은 자주 이적을 행했습니다. 믿음을 세우는 것은 사실 어렵지 않습니다. 기도를 통해 병이 낫는 것은 매우 간단하지만, 하나님께서 때로 조금 남겨두시는 것은 은혜이며 우리가 회개하도록 이끄시는 과정입니다. 불신은 타락과 패망의 근원이며, 믿음은 단순하면서도 심오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표적이 따르며, 손을 얹고 기도하여 병이 낫는 것은 당신이 믿기 때문이고 섬기는 사람이 믿음을 전달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는 의롭다 함을 얻음
칭의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늘 ‘자신의 의’를 고집하며 자신이 행한 것이 다 옳다고 여긴다면 잘못된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비록 우리에게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을지라도, 믿음을 선택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여겨 주십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여겨 주시면 귀신은 우리 몸에서 불법적인 존재가 되어 우리가 귀신을 쫓아낼 수 있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여전히 죄인이라면 귀신은 쫓겨나지 않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심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충분히 잘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후에 우리 안에 있는 악령의 역사가 철저히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는 죄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도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았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연약할 수 있고, 여전히 육신을 따르며, 선악을 분별하고, 세상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귀신은 더 이상 우리 안에서 왕 노릇 할 수 없으며, 우리는 더 이상 죄에 얽매이지 않고 성화와 승리의 길로 들어서서 조금씩 주님께로 돌아가며 조금씩 승리하게 됩니다. 믿은 후에는 잠시 힘이 없다고 느낄 수 있으므로, 사람에게는 성령의 권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믿는 자는 성령 충만을 받음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은 성령 충만에 관한 진리를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우리가 믿는 복음은 성령 충만하며 큰 능력이 있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바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기에 영적인 권능을 얻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는 핵심 목적은 권능을 얻기 위함입니다. 믿는 자가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은 복음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입니다. 이는 개인이 얼마나 뛰어난가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믿음을 선택할 때 하나님의 영이 당신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당신을 충만하게 하실 때 당신은 자연히 권능을 얻게 됩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느냐? 방언으로 기도하느냐?” 성경에 구체적인 절차가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핵심은 ‘믿음’에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방언 기도나 성령 충만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당신이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입을 열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이는 신비주의적인 것이 아니며, 믿음으로 입을 열기만 하면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사람이 사모함으로 얻게 되는 결과입니다. 사람은 연약하고 무능하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 부분이 빠지면 대승불교를 믿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실 수 있음을 믿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성령 충만을 받으려다 악령이 올까 봐 두려워합니다. 말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세상의 육신의 아버지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전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있습니다. 저는 믿음이 다소 연약한 사람들을 이끌고 성령 충만을 받게 한 적이 있는데, 믿음을 가지고 방언 기도를 배우고 훈련하기만 하면 수많은 방언 기도가 실제로 내면의 영적인 능력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믿는 자는 승리할 수 있음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승리할 것을 믿기만 하면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며, 믿음의 길에서 당신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전에 한 자매님이 자신을 제어할 수 없다고 느꼈을 때, 저는 그녀에게 자제력을 잃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마다 대대적인 성령 충만과 방언 기도를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사실 그녀가 그렇게 할 때마다 매우 큰 효과가 있음이 입증되었습니다. 이러한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 기초하며, 성령을 통해 얻는 권능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믿음과 성령의 권능을 통해 우리 각자는 삶 속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제어하지 못해 뚱뚱해지곤 합니다. 약간 통통한 정도일까요? 요즘의 ‘약간 통통함’이 예전의 ‘뚱뚱함’이고, 예전의 뚱뚱함이 지금은 통통함이 되었으며, 요즘 진짜 뚱뚱한 사람은 걷잡을 수 없이 살이 찝니다. 만약 당신이 이미 너무 많이 먹어 뚱뚱해졌고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다면, 제가 말씀드리건대 많은 기도를 통해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그 갈망 자체가 사라지게 됩니다. 이는 정말로 신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누가 나를 이 죽을 몸에서 건져내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 예수님을 힘입으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 예수님을 의지하면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 예수님을 의지합니까? 먼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의롭다 함을 얻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으며, 그의 보혈로 우리가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얻었음을 믿으면 우리는 얻게 됩니다. 그런 다음 영 안에서 대대적으로 기도하면 그 효과는 매우 탁월할 것입니다. 이어서 믿음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진리 가운데로 나아가 지각에 넘치는 온전한 믿음을 끊임없이 끌어올려야 합니다. 믿음이 곧 영생입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이 길을 갑니다. 믿는 자는 다 믿었으며, 믿은 후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믿지 않는 자는 보고 놀라고 멸망할 것임
그들이 사도 바울이 행한 이적을 보았습니까? 분명히 보았습니다. 보고 나서도 믿지 않으니 참으로 기이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다 보고 나서 그 능력에 경탄하며, 기도를 통해 사람이 걷게 되는 것을 보고 참 신기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놀라워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믿지 않는다면 경탄한 후에도 결국 멸망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적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이 보았으면서도 단지 놀라워하는 데만 머물러 결국 멸망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보고도 믿지 않으니 도대체 어떻게 하겠습니까? 도리는 매우 명확하게 선포되었습니다. 믿는 자는 의롭다 함을 얻고, 귀신을 쫓아내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지면 귀신은 견디지 못하고 떠나갑니다. 물론 성령 충만에도 과정이 있습니다.
믿는 자는 승리할 수 있고, 이적을 행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저 구경만 하다가 다 보고 나서도 여전히 믿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처럼 많은 사람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장차 심판대 앞에 설 때 그 사람들이 하나님은 불공평하다고 말하면, 하나님은 “내가 너로 하여금 이적을 경험하게 했고 이적을 보게 하였으나 너는 그것을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로만 여겼으니, 내가 너를 멸망하게 하지 않고 무엇을 더 주겠느냐?”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적을 경험하고도 결국 멸망의 길을 걸어갑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느니라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하며, 믿음의 길을 걷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