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答疑解惑》
答疑:
Q1:第一个故事没有听懂?老师能否再解释一下?
很多人欠一个财主债务,但财主的管家把主人的钱送人了,这个管家是为他自己的未来做预备。人认为这是贪腐,但是神不在乎这个,只要是为了未来做预备,方式可圈可点,大家不要掉到识别善恶里去。
主人夸奖这不义的管家作事聪明,主人就是我们的神,因为这管家为未来考虑,所以夸奖他聪明。世上的人都是做有回报的事,世人都不做赔钱的买卖。神要告诉我们的就是:要藉着不义的钱财结交朋友,到了钱财无用的时候,他们可以接你们到永存的帐幕里去。
今天我们是否用世上不义的钱财与神结交朋友,好让将来神可以把我们带到永存的帐幕里去?因为把世上的事情都看透了,在做工、奉献、钱财上就不会与神斤斤计较,很多事情看透了就会变得毫无意义。当钱财无用的时候,我们被接到永存的帐幕里去,这是神要突出的。神讲了这个故事,就是告诉我们,要为永存的帐幕预备,要为很远的未来做规划。
不做长远的规划,就像那个财主只是做财务管理、退休计划,这些都没有用,最后就被丢到阴间,被当作肉串烤,很辛苦的。人不为永存的未来做规划,这是何等的愚昧。人要么为了未来,要么为了今生,为今生就不能为永恒,为永恒就不会在乎今生,这就是关键。
但是,今天我们放眼望去,看看为了今生打算的人多,还是为了永恒打算的人多?为今生打算的人多啊!人活着都是为了今生这点事打算,真的是很愚昧。人不侍奉神而侍奉玛门,就是为了今生,为了今生得到的不过是棺材或者骨灰盒。
人要开始把活着这事看透,《传道书》是基督徒信仰的根基。现在和基督徒对话,会发现他们对今生充满了兴趣,特别认真,但提起永生好像有又好像没有。比如:休妻另娶的就是犯奸淫,娶被休之妻的也是犯奸淫,你能理解吗?就是把今生的事看得太重,又娶又嫁,又嫁又娶的。神看永恒比我们都重,天地都要废去,我们人为什么把世上的事看得那么重,人活着这件事本身是很简单的事。
举个例子:有个村子里走出来的女孩,做什么都不行,家里又很穷,但是得活着啊!怎么办?她生活在一个女人嫁给有钱人做小三的圈子里,为什么要做小三?就是为了活着。结果弄出一大堆纠结的事,活好了吗?没有活好!如果人看透了世上的事,就摆脱了很多麻烦。为什么这个女孩这么做?因为她爸妈有病。这看起来好像是她为了父母牺牲很大,但是神不纪念这事,神是让我们把这些事都看透。
我非常理解,所以我在服侍这些人的时候,我采取了超越道德的观念,鼓励他们活出神的尊贵和荣耀,开始有能力。当这个女孩被训练出来以后,她自己看自己很尊贵,她父亲看她也很尊贵了。问题在哪儿呢?就是我们一旦把活着这件事看得很重,把我们父母活着这件事看得很重,我们就会做出很多很奇怪的事,也把自己弄得很纠结。
所以我们今天的服侍,就是要把人从活着这点事儿的里面拉出来。比如说,有人欠钱,欠了好几百万。为什么会欠了这么多钱?因为老想活得好一点,老想赚钱,老想快速赚钱,就是不想脚踏实地,就整了很多很虚的东西,结果越套越深、越套越深。
其实如果我们把活着这事看透了,把世上的钱财当做不义的钱财,这些就都影响不了你,就算欠了好几百万,日子不也照过吗?人家拉撒路这么过都过了,今天咱们还没有像拉撒路一样讨饭呢,有啥不能过的?把世上这点儿事儿都看透了,怎么可能活不好?
所以你会发现,我对这些事情不太在乎。比如欠人家几百万,欠就欠了呗;或者人家欠他几百万,欠就欠了呗。人没有这些,也照样活着。所以就把活着这点儿事看透了,就把什么婚姻嫁娶、孝敬父母、生儿育女……一大堆的事情,都看扁了,看扁了就没事了。
最后神就把真实的钱财,也就是永恒里的钱财托付给我们。因为我们在这世上的事情向神忠心,世上的事情都是最小的事情,神就把神国度里的事情托付给我们。如果我们在这世上不义的钱财上对神忠心,神就把永恒里的钱财托付给我们,你说我们怎么可能会穷呢?所以不要一个人侍奉两个主,不能又侍奉神,又侍奉玛门,没有这回事,两边不讨好。
Q2:信主能信成拉撒路那样吗?要饭还长毒疮~
信主信成那样干啥呀?耶稣用这种比喻,是要说人就算在世上活成拉撒路那样,也得为永恒里的事情打算、预备。如果永恒里面得着,在世上活成这样又算得了什么呢?
其实人问这话,也是为了活着这点儿事来问的。活成这样那样,能怎么样?也不怎么样,最后还是结局最重要。结局就是能不能进神的国、进到永存的帐幕里。
Q3:如何藉着不义的钱财跟神做朋友呢?
就是把神放在生命的首位,不要把不义的钱财放到生命的首位。把神放在生命的首位,他是我们最重要的。神要我们奉献,其实那些都不是咱们的。钱财看起来好像是属于咱们的,其实都不是咱们的。奉献多了没啥毛病,大家千万不要以为奉献多了是个毛病。
Q4:基督徒可以投资理财买房产吗?
其实投资理财买房产有啥毛病呀?那人如果去做投资理财买房产这些事情,毛病可能会出在哪儿呢?就是我们把这些事当做我们生命的首位了。如果这样,那你不受咒诅,谁受咒诅啊?所以千万不要把这些事儿整错了,不要老是问:可不可以做这个、可不可以做那个,其实你的心是知道的。
法利赛人是贪爱钱财的,人一旦贪爱钱财,人的逻辑体系就是那样,然后人就会问一系列的问题。凡是以今生为本的、以在世上活着的这些事儿为你的根本的,都这么问。所以如果我们根本就不在乎活着这件事儿了,投资理财啥毛病也没有。
问题是我们考量的重点到底是啥?为我们的肉体预备,那能不受咒诅吗?比如问一个人:你为啥赚钱啊?他说:赚了钱,我将来好有钱看病啊!这不是咒诅自己吗?所以千万不要以今生为本,把今生看得很重,就麻烦了。
Q5:法利赛人贪爱钱财,考量的重点是啥?
他们考虑的重点不就是活着这点儿事吗?人投资理财、又赚钱又建造,《圣经》怎么说呢?又买又卖、又耕种又建造,又娶又嫁,不就是为了活着这点儿事吗?人为了活着这点儿事儿,活得那么认真,结果有一天洪水来了就被冲去了。
大火降下来,把所多玛和蛾摩拉烧灭的时候,城里的人就是为了活着这点儿事儿而活的。神看以扫为可咒诅的,因为以扫就是为了活着而活着,就是这么简单。所以咱们就不为了活着而活着。
昨天有个姐妹发了个帖子,挺有意思,这个帖子是这么说的:在这疫情中,我们要感谢耶稣什么呢?感谢耶稣保佑我们大家还活着。然后我就回复:这样的话好像不太正面吧?这疫情不是给神的百姓的,是神击打这个世界的。
听明白了吗?就是人对活着这事看得挺重的,还要感谢神能活着。其实感谢神我还活着,这逻辑体系是不是有问题?我们应该感谢神什么?感谢神早点儿接我回去。人把活着这事儿看得重,不想死、只想活着,那就麻烦了。人想活着,这件事本身就是个问题。
有人就问:那你想死啊?不是我想死,而是这事儿我说了不算。这事儿我说了不算,但是我有一个盼望,我盼望神早点儿把我接去。如果我盼望神早点儿把我接去,那我会怕死吗?我不会怕死,我觉得离开这个世界,与主同在是好得无比的。
所以我会感谢神,他在我身上有一个美好的计划。活着这两个字是非常属灵的,有的人感谢神自己还能活着,其实说这话本身就是个受咒诅的话,不是感谢神我还活着,而是感谢神,我在这世上还活在神的旨意当中!感谢神,今天我还靠着神加添给我的力量往前奔跑。
我们把生和死都看透了,还会贪生怕死吗?就不再贪生怕死。假如说有一天撒旦说:我整死你!我就会说:那太好了!我可以跟大家说这是我的心志,至于能否做到以后再说。我要是整死我自己吧,我到神那里我没法交账,今天你愿意整死我,那你整啊,整完了我好回到神那里啊。如果我这么说完了,你说撒但会怎么样?撒但会说:哎呀,这人真难整啊!
所以今天我们胜过撒但,靠着什么?虽至于死也不爱惜自己的性命,靠着羔羊的血和我们所见证的道,我们虽至于死也不爱惜性命。不就是这么回事吗?撒但你要整死我,那就整吧。
假如说有一天,有一个绑匪把我儿子给绑票了,跟我打电话要赎金。那我就会说:哎呀,那我可得谢谢你,我一直想杀我这个儿子,就是没机会。如果我这么说,那这个绑匪不是很抓狂吗?他就会说:如果真的把这个孩子整死了,还帮了这个臭小子一个忙了,这怎么整呢?然后他就会把我的儿子给放了,他不想帮我这个忙,因为杀了也白杀,绑匪是要钱不是要人命。像我这样的,他整我也没什么用。
人在这世上把今生的事都看透了,不为今生预备,而为永生预备,那是何等聪明的选择啊,在神面前就成为了又忠心又良善的仆人了。有的人说:那你真的这么整?我不敢说我这么整都对,但是神要是纠正我的话,我绝对顺从神。我常常问我自己,这个东西是不是整对了?那个东西是不是整对了?我也常常问神,我这个东西是不是整对了?
如果基督徒还活在今生的盼望里,就比世人还可怜。我们今天已经对这世上完全丧失了所有的盼望,这地上根本不是我要待的家,我不过是寄居的。如果是在这世上寄居的,问题就好办了,就像亚伯拉罕到处挪移帐篷,辛苦吗?也辛苦,但是也就这样。
亚伯拉罕、以撒、雅各都是带着永生的盼望活在这世上,结果不管他活成什么样,做了埃及的宰相也好,像亚伯拉罕在迦南做客旅也好,都一样,人家根本不在乎这事。比如说亚伯拉罕,神跟他说:你的后裔要到埃及地,服侍那地的人,在那里做奴隶四百年。一般人听了这句话就会想:那麻烦了,我的后代怎么能做奴隶呢?那多辛苦啊!那可不行!但亚伯拉罕听了之后什么怨言也没有,他说:神,这是你美好的计划。
人在这世上就是得看透啊,看透了就好了。
성경공부:
서론: 『성경』을 읽다가 『도덕경』으로 읽지 말라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16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이 장에 대해 많은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이 장을 아주 분명하게 해석한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걸림돌입니다.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가리키며 이러쿵저러쿵 비평하기를 좋아하고, 아브라함은 이것도 나쁘고 저것도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또 많은 사람이 『성경』을 읽기만 하면 『도덕경』의 내용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우리 하나님은 도덕적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도덕은 전적으로 이생에 속한 관념이지만, 우리 하나님은 사물을 바라보실 때 이생의 관념을 뛰어넘으십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은 한 부자의 청지기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주인에게 그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고 고발했습니다. 주인은 그를 불러 해고하려고 했습니다.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누가복음』 16:2)
그러자 청지기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실직하면 중년의 위기인데, 위로는 부모님이 계시고 아래로는 자녀들이 있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주인이 나를 해고하고 더 이상 청지기로 쓰지 않으면 앞으로 무엇을 하지? 나는 평생 전문 관리인으로 일했으니 이제 와서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구걸하자니 부끄럽구나.’ 곰곰이 생각한 끝에 한 가지 묘안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장부를 관리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모두 불러들였습니다.
청지기가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누가복음』 16:5-7)
‘나에게 결산하라고 하셨지? 그렇다면 이렇게 하겠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인은 이 불의한 청지기가 일을 지혜롭게 하였다고 칭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청지기를 보시기에 지혜롭고 충성된 사람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롭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누가복음』 16:8-9)
이 전체 내용은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이 청지기는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지혜롭지 못한 사람입니까? 충성된 사람입니까, 충성되지 않은 사람입니까? 이에 대한 견해는 매우 다양합니다. 이렇게 의견이 다양하니,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청지기를 어떻게 보시는지 물어보겠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도덕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 청지기를 지혜롭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도덕주의자라면 이런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는지, 돈에 대해 어떤 관념을 갖는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어떻게 보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이 세상에 두셨는데, 도대체 무엇을 하게 하신 것일까요? 여러분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재물을 보시는 관점,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보시는 관점, 사람의 충성을 보시는 관점, 사람이 세상에서 일을 지혜롭게 하는 것을 보시는 관점은 흔히 사람의 관점과 정반대입니다. 오늘 사람이 자기 뜻을 따라가면 순식간에 사탄 안으로 떨어집니다. 사람의 뜻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역사하는 차원은 사람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한 가지 관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쩌면 제가 잘못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 이 청지기를 대단하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여기셨을 것입니다. 이 청지기는 어디가 지혜로웠습니까? 그는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 그러니 어서 이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야겠다.’ 그 결과 그는 주인의 돈을 낭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혜롭다고 여기셨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청지기를 충성된 사람으로 보셨습니까, 충성되지 않은 사람으로 보셨습니까?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누가복음』 16:10)
이 청지기는 의로운 청지기입니까, 불의한 청지기입니까? 충성된 청지기입니까, 충성되지 않은 청지기입니까? 사람의 관점으로 보면 그는 불의한 청지기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주인에게 진 빚을 탕감해 주고 주인의 돈을 없애 버렸으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솔직히 말하면 이 청지기가 주인을 위해 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자신의 미래를 계획한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미래를 위해 계획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혜로워집니다. 결과가 어떻습니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이 청지기를 지혜로운 청지기로 여기셨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이 청지기를 충성된 청지기로 여기셨습니다. 어떻게 그를 충성되었다고 하실 수 있느냐고요? 바로 이 점에 논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청지기를 의롭고 충성되었다고 여기신다는 것은 어디에서 드러납니까?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재물을 어떻게 보시는지가 은연중에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남의 돈을 강탈하거나 훔쳐서 얻은 돈만 불의한 재물이 아닙니다. 모든 돈, 위안화든 달러든 모두 불의한 재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돈은 지전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점은 하나님의 관점과 매우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이 청지기를 충성되었다고 여기신 것은 영적인 관점에서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미래를 준비한다
사람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준비한다면, 준비하고 또 준비해서 어떤 미래를 준비하는 것입니까? 10년 후의 미래입니까? 20년 후의 미래입니까? 아니면 죽은 후의 미래입니까?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난 후의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이 준비하지 않으면 죽는 것으로 끝입니다. 이 세상의 것 중 무엇을 가지고 갈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왜 불의한 재물이라고 합니까?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것도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비유로 드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생의 작은 일들, 특히 이생에서 돈과 관련된 일들을 꿰뚫어 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재물에 대해 꿰뚫어 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동북 지방의 말로 하자면 아주 멍청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보좌에 앉으셔서 사람들이 이것저것 바쁘게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언젠가 그 부자처럼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는 세상에 있을 때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벌였습니다. 우리는 부자가 복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날 그는 죽었습니다. 또 나사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온몸에 종기가 나서 부자의 집 문 앞에 버려졌고,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웠습니다.
그 후 두 사람 모두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그 부자는 지옥과 음부에 떨어졌습니다. 그곳에서 전기 치료를 받고, 화학 치료를 받고, 호랑이 의자에 앉고, 바비큐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비큐를 해 먹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지옥에서 쇠꼬챙이에 꿰여 구워지는 고기였다는 말입니다. 그 부자는 몹시 고통스럽게 구워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내 조상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어, 곧 우리 집 문 앞에서 구걸하던 그 사람을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몹시 괴롭습니다.” 물론 괴롭지 않겠습니까? 쇠꼬챙이에 꿰어 구워지고 있는데 어찌 괴롭지 않겠습니까? 개구리나 물고기를 불에 올려 구우면 매우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영생과 재물에 대한 태도
사람은 미래의 극심한 고통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 위로를 받았고, 그 부자는 음부와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일을 대조하여, 미래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 구걸하는 한이 있더라도 영원한 장막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어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누가복음』 16:25-31)
사람에게 영생에 대한 관념이 없고 미래를 계획하지 않는다면 그 결말은 이와 같습니다. 사람이 미래를 계획하고 조금이라도 지혜가 있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쌓아도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일입니다. 사람은 꿈이 풍성하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매우 냉혹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생을 위해 계획한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지 않으시는 사람입니다. 현실을 위해 계획하는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불의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이생을 위해 계획한다면 돈이 가장 중요하고, 영생을 위해 계획한다면 돈은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돈을 하찮게 여긴다면 매우 자유롭고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누가복음』 16:13)
돈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은 그것을 불의한 재물로 보는 것입니다. 충성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뜻합니다. 여러분이 헌금하는 일과 이 세상의 재물에 있어서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영원한 곳의 참된 재물을 여러분에게 맡기실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는 좋든 싫든 다른 사람의 재물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니요, 이것은 모두 제 돈입니다. 이 돈은 제 은행 계좌에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날 때 그 재물은 더 이상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곳에 가서 여러분의 손에 달러가 있다고 해도 소용없고, 금이 있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영원한 곳에서 금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불의한 재물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힘들게 번 돈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도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장차 죽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완전히 지나가고 하늘과 땅도 없어질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영원에 대한 관념이 없다면 이생을 위해 수고하며 큰 압박을 느끼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무 진지하게 살기 때문입니다. 조금도 자유롭지 못하게 살아가며, 살기 위해 살아가고, 날마다 거기서 애를 씁니다. 이런 것들이 여러분의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일을 깨닫지 못한다면 관 속에 누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 여러분이 떠난다면 무엇을 가지고 갈 수 있습니까? 다음 날 화장터에 가서 불에 태워지고, 사람에게는 한 줌의 재만 남습니다. 사람의 영은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그곳에서 사람의 영은 불에 구워지지만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세상에서 이런 것들 때문에 고생해야 합니까? 사람이 돈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어리석습니다.
얼마 전 매우 어리석은 한 젊은이가 한참 동안 제게 물었습니다. “당신들 교회의 형제자매들의 돈은 어떻게 마련됩니까?”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이런 일에만 관심이 있네.’ 왜 그는 이 일에만 관심을 가졌습니까? 자기 돈을 다른 사람에게 사기당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 일을 그렇게 신경 쓰지 않고 재물을 탐하지 않았다면 사기를 당할 가능성도 조금은 낮았을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매우 비참합니다. 이 세상의 재물은 모두 다른 사람의 것이며 다른 사람의 재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재물에 있어서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영원한 곳의 참된 재물을 우리에게 맡기실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재물이 비록 여러분의 계좌에 있어도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충성된 사람은 하나님께 충성하며 영원을 준비한다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누가복음』 16:12)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것에 아무리 충성해도 소용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관점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미워하십니다. 영원한 곳에서 하나님께서 사물을 보시는 관점은 우리가 이생에서 보는 관점과 완전히 다릅니다.
여러분이 늘 고민하며 세상의 재물이 자신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재물 때문에 사람과 소송까지 한다면, 이런 것들이 여러분에게 유익한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이런 돈이 있으면 살아갈 수 있지만, 돈이 없어도 여전히 살아갈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에서 돈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마몬을 섬긴다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금과 은과 보석으로 교회를 세운다면 그것은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교회를 세웁니다. 교회를 세우는 데 필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사람의 숫자도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거하시면 이곳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 모두 이생이 헛되고 또 헛되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이 작은 돈 때문에 사람과 소송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영원한 장막을 잊고, 장차 이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많은 목회자도 『성경』을 읽고 『성경』을 설교하지만, 세상의 재물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이해한다면 『성경』 안에 있는 많은 의문이 쉽게 풀리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신 318명을 데리고 네 왕을 물리치고 그들이 빼앗아 간 모든 것을 되찾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재물을 다른 사람들이 가져가게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이 일 때문에 자신이 부자가 되었다고 말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재물에 그렇게 강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여러분과 제 경우로 바꿔 생각하면, 우리는 분명 재물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고 자기 것으로 남겨 두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재물을 어떻게 보는지는 정말 많은 것을 결정합니다. 다윗이 군대를 이끌고 전쟁할 때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쳤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그곳에 남겨 쉬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전쟁하러 갔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얻은 전리품을 모두가 똑같이 나누었습니다. 전쟁에 나간 사람이나 나가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 몫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다윗은 재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재물은 모두 불의한 재물입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결국 가난해졌습니까? 다윗이 바친 금만 해도 200여 톤에 달하며, 그 양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람의 입에서 늘 돈 이야기가 나온다면 사실 돈을 여전히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돈을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는 실제로 이생에 소망을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생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의 환경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환경 속에서 불의한 재물로 영원한 곳에서 친구를 사귀어야 합니다. 우리가 두 눈을 감는 순간 재물은 아무 소용이 없어지고, 세상의 재물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재물이 쓸모없게 될 때 여러분은 영원한 장막으로 영접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생을 꿰뚫어 본다면,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여러분이 남긴 재물은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재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죽기 전에 유언장까지 작성합니다. 그러나 유산을 분배해 놓으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재물은 본래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은 하나의 시험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들을 가지고 우리의 시야가 어떠한지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이생에만 고정되어 있다면 부자와 같이 장차 영원한 곳에서 고통과 괴로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충성된 사람은 이생을 중히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중히 여기시는 것을 중히 여긴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용하는 재물은 모두 불의한 재물입니다. 헌금도 하나의 시험일 뿐입니다. 얼마나 헌금했든 결국 우리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재물입니다. 오늘 우리가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제가 하는 말을 듣고 저를 비웃을 것이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예수님을 비웃을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 앞에서는 의인처럼 보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사람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를 원합니까?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어제 인터넷에서 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매우 유명한 목회자가 반년 전까지만 해도 아주 건강하고 활기찼는데, 반년 후에는 병원에서 항암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역자들을 모두 불러 한 가지 일을 의논했습니다. 자신이 사는 도시에 아직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동역자들에게 그들을 잘 돌보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라고安排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매우 정상적이고 좋은 일로 보입니다. 저도 좋은 일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육체에 속한 일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자선 활동을 하시는 것을 언제 보았습니까? 예수님은 자선 활동을 하신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억눌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이생의 작은 일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면 이런 일을 하게 되고, 이생의 일들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제가 이생의 작은 일들을 모두 꿰뚫어 본다면 저는 자선 활동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정말 배고프다면 밥 한 그릇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울 것인지, 어떻게 마귀에게 억눌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할 것인지를 더 많이 생각할 것입니다.
최근 한 부부가 있었는데, 마귀에게 매우 심하게 억눌려 있었습니다. 그들의 교회는 자선 활동에는 큰 관심을 보였지만, 마귀에게 억눌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일을 하기를 좋아하지만, 사람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중히 여길 수 있습니까? 사람이 귀하게 여기는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일은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일을 한다면 더 이상 이생의 작은 일들을 위해 살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영생을 위해 계획해야 합니다. 이생의 재물은 모두 불의한 재물입니다. 여러분이 도덕주의적인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도덕주의자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생의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면 많은 성경 구절을 읽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를 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간음이며,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것도 간음이라는 구절을 하나님께 속한 논리 체계 없이 읽는다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모두 영원한 장막을 위해 준비하며 이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준비하지 않고 이생의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면 결코 잘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늘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을 한다면 어떻게 잘될 수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간음하는 것이며,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도 간음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일들은 모두 세상에 속한 일이며, 사람이 세상의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든, 누가든, 예수 그리스도든, 그들은 모두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 일을 매우 가볍게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되기도 했는데, 우리는 이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인간적인 논리, 세상적인 논리, 도덕적인 논리, 이생의 논리 체계를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생의 논리 체계에서 나와 이생을 하찮게 여겨야 합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백만 위안, 오백만 위안, 심지어 수억 위안을 가져갔다면 그냥 가져가게 두십시오.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소송을 제기하고, 결국 많은 돈을 배상하게 되었다면 세상의 일을 너무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하고 의로운 일을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이생에서도 아름다운 미래를 얻을 뿐 아니라 영원한 곳에서도 아름다운 미래를 얻게 됩니다.
제가 한 관광 가이드를 섬긴 적이 있습니다. 관광 가이드는 수입이 많았는데, 관광객들이 물건을 사도록 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관광객을 보석, 다이아몬드와 같은 장신구를 사는 곳으로 데려가야 했습니다. 이 가이드는 상점의 물건 조달 경로를 잘 알고 있었고, 상품의 원가는 매우 저렴하지만 상점에서는 수백, 수천, 심지어 만 위안이 넘는 높은 가격에 판매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물건들이 폭리를 취하는 것이며 사람들의 돈을 속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관광객들에게 이런 물건을 사지 말라고 했고, 결국 사장에게 해고되었습니다. 그는 매우 괴로워했습니다.
그가 저를 찾아와 한 말은 모두 인간적인 도덕 관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나쁘고 저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세상의 재물은 불의한 재물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그런 물건을 사는 데 쓰는 돈도 세상의 불의한 재물일 뿐입니다. 그들이 이번 일에서 사기를 당하지 않더라도 다른 일에서 사기를 당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합법적이고 정당하게 운영되는 상점에서 사고파는 일은 서로 원해서 하는 것인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이 관광 가이드의 급여는 적지 않았지만, 그 급여는 상점에서 받는 리베이트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정말 진지했지만, 그렇게 일하면 어디에서도 일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IT 회사를 운영할 때 고객이 요구 사항을 제시하면 쉽게 10만 위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며 고객에게 이 일을 하는 데 1만 위안이 든다고 말해도 쉽게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합니다. 우리가 이생의 일을 너무 진지하게 여기면 불의한 재물을 생명의 근본으로 여기게 됩니다. 기독교인이 『도덕경』 안에서 살아간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생의 일을 너무 중요하게 여기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영생을 중히 여기고 이생의 돈을 지전처럼 여긴다면 아주 편안하게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왜 일을 두려워하고 상사를 두려워합니까? 일이 곧 수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수입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일을 하찮게 여기라
여러분에게 한 가지 관념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살아가는 일을 하찮게 여기고, 살아 있는 일도 죽는 일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많은 일과 많은 문제가 사라질 것입니다. 한 청년이 중국에서 공부를 잘하지 못하자 미국에 가야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비자 문제를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걱정하고 또 걱정하다가 우울증에 걸렸고, 약을 먹고 자살하려 했습니다. 간신히 살아났지만 여전히 국내에서는 살 수 없고 미국에도 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또다시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살아가는 일을 너무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들을 모두 하찮게 여기면 살아가는 일이 아주 단순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면 기쁘게 살아가면 됩니다. 날마다 이런 일들을 붙들고 씨름할 필요가 있습니까? 많은 사람의 문제는 이렇게 단순한 살아가는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는 데 있습니다. 죽을 병에 걸리면 오히려 그들에게 살아가는 일이 단순해집니다. 그러나 병이 나으면 다시 살아가는 일을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영원한 장막을 위해 잘 준비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세상의 일을 하찮게 여기면 아내를 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일이나 재물 같은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됩니다. 그런 일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일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생에 고정되어 있으면 살아가는 일이 매우 복잡해집니다. 사람이 영원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세상의 일들을 모두 꿰뚫어 보게 되고, 재물도 불의한 재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세상의 일을 꿰뚫어 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게 되고, 살아가는 모든 일이 매우 단순해집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가는 일을 하찮게 여기는 마음과 뜻을 갖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온몸에 종기가 나고, 부자의 식탁 아래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며, 개들이 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다고 해도 우리는 영원한 장막에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단지 극단적인 예일 뿐입니다. 핵심은 우리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이생의 작은 일들을 꿰뚫어 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섬기는 가운데 발견한 것은 많은 사람의 문제가 살아가는 일을 복잡하게 만든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일 때문에 여기저기 사람을 찾아 부탁하고 관계를 동원하여 명문 학교에 보내려고 합니다. 사실 그런 것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됩니다. 설령 들어간다 해도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요즘 학군 아파트 가격은 매우 높게 올라갔고, 사람들은 늘 자녀가 명문 학교에 가야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명문 학교를 나온 아이들도 매우 힘든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우울증 환자와 날마다 자살이나 투신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너무 진지하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영원한 장막에 들어가라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관점이 하나님과 같아진다면, 우리가 이곳에 잠시 왔다가 시험을 치르고 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불의한 재물로 우리가 영원하신 하나님께 충성하는지를 시험하십니다. 우리가 모두 이렇게 생각한다면 교회의 헌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관심을 가질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무도 이런 일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결산할 수 있는지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마침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렇게 말씀드릴 날을 간절히 기대합니다. “하나님, 어떤 자매는 원래 이러했지만 제 섬김을 통해 세워졌습니다. 이 사람은 원래 우울증을 앓았지만 제가 그 안에서 자유롭게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제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들어와 네 주인의 영광을 누리라.”
제가 왜 이런 일을 합니까? 이 불의한 재물과 제 것이 아닌 것들을 사용하여 하나님과 친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이 더 이상 쓸모없게 될 때, 저는 그것을 통해 영원한 장막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장의 제목은 『영원한 장막을 위해 준비하라』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주님을 믿는 것이 모두 헛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믿는 이유가 단지 치료를 받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병이 어떻게 생겼는지 물어보지 않겠습니까?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이 세상에서 너무 진지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제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정말 그렇게 큰 능력이 있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손을 아픈 부위에 대기만 하면 즉시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너희는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꿰뚫어 보면 우리가 과거에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천국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천국의 길은 이 세상의 일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꿰뚫어 본다면 이렇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와! 앞길이 정말 환하게 열렸구나!” 사람은 세상의 것들 때문에 혼미해집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진지하게 살지 않는다면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것들에 묶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밝고 시원하겠습니까! 오늘 아침 제가 섬긴 한 자매는 입만 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안 돼요. 늘 실수해요. 저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어요. 여러분에게 이런 섬김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 사실 그 자매는 이런 일들을 너무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매에게 말했습니다. “자매님이 말한 일들은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두 이런 일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무엇 때문에 고민하겠습니까? 사람을 세워 주는 일만 중요하게 여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것만 추구하면 됩니다.
우리가 오직 공평함만 추구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공평함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상한 일을 하시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이런 일을 기업에 적용한다면 직원들이 벌써 들고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십니다. 예를 들어 아침 8시에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들어와 일하고, 정오 12시에 또 어떤 사람이 들어와 일하며, 오후 5시에도 어떤 사람이 들어와 일합니다. 그런데 저녁 6시에 일이 끝났을 때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씩 줍니다. 아침 8시에 들어와 일한 사람이 즉시 화를 내지 않겠습니까? “왜 저에게 이것밖에 주지 않습니까?” 그러나 처음부터 주인과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합의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은 세상의 일을 너무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실 누가 더 많이 일하고 누가 적게 일했는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공평함을 찾으려고 한다면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이생의 논리 체계로는 이 일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영원의 논리 체계로 이 일을 바라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침 8시에 와서 일했고 한 데나리온만 받았지만, 영원한 곳에서 받을 상은 풍성하다. 나는 기꺼이 일하겠다. 나는 더 많이 일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아무 문제도 없지 않습니까?
결론: 영원한 장막을 위해 준비하라
가령 다른 사람이 여러분에게 천만 위안을 빚졌고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오백만 위안을 빚졌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자신의 돈을 받아 다른 사람에게 오백만 위안을 갚고 나면 오백만 위안이 남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재물일 뿐입니다. 그것이 없어도 여전히 살아갈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있어도 살아가는 모습은 같고, 때로는 돈이 많을수록 더 괴로울 수 있습니다. 물론 돈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세상의 것들에 묶여 그것을 너무 중요하게 여긴다면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닙니까?
장차 어느 날 답이 밝혀질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깊은 구렁의 이쪽에 있겠습니까, 저쪽에 있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깊은 구렁의 저쪽에 있다면 아브라함과 나사로와 저를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영원한 곳에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깊은 구렁의 다른 편에서 바비큐가 되어 구운 생선이나 꼬치 고기처럼 있다면, 그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영원을 위해 준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어디에 충성이 있겠습니까? 어디에 의로움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런 일들을 반드시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