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발전에서 야고보가 맡은 역할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야고보라는 인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야고보가 예수님을 따라다닌 적이 있었을까요? 사실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과 함께 자라기는 했습니다. 성경에는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꽤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데리고 다니신 제자 중에도 야고보가 있었지만, 그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데리고 다니신 제자들 가운데 글을 남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성경에 가장 많은 글이 수집된 사람은 누구일까요? 사도 바울의 글입니다. 성경에서는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가 무엇을 했는지, 야고보서 외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글의 행간을 통해 이러한 일들을 파헤쳐 보고, 야고보가 어떤 일을 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만약 성경에서 바울이 쓴 서신들이 모두 야고보가 쓴 것이라면 우리는 야고보를 믿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읽는 서신 대부분이 바울이 쓴 것이고, 야고보가 쓴 것은 몇 쪽뿐이라면, 저는 우리가 바울의 서신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관한 많은 정보를 나누었습니다. 이제 야고보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언제부터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을까요? 이 일은 매우 이상하게 전개됩니다. 야고보는 도대체 무엇을 했을까요? 그 일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제 처음부터 차근차근 말씀드리겠습니다.
초대 교회 발전 연대표
먼저 시간의 흐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는 대략 서기 30년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바울이 주님을 믿게 된 때는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대략 45년 뒤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열린 것은 바울이 주님을 믿게 된 후 14년 뒤로, 대략 서기 4749년경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서기 30년에 십자가에 달리셨으므로,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부터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첫 번째 회의에 참석한 때, 곧 사도행전 15장까지는 대략 1718년의 시간이 흐른 것입니다. 이 1718년 동안 교회에는 매우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후 다시 3~4년이 지나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썼고, 갈라디아서에는 베드로와 야고보에 관한 많은 일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밖의 곳에서는 야고보가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거의 전혀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따로 말해 주지 않는 한 말입니다.
갈라디아서가 기록된 시기는 대략 서기 53년, 곧 예루살렘 회의 후 4~5년이 지난 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바울은 이방인 교회 가운데 이미 상당히 견고한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야고보와 베드로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역이 이렇게 나뉘어 있었습니다. 원래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실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믿은 후 어떤 곳으로 가서 약 14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간 것은 그 후의 일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이방인 복음 전파의 직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직분은 원래 사도 베드로에게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여러 지역을 두루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 사도 베드로는 자주 환상을 보았고, 기적을 행하며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의 백부장이라. 그는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해변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무르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자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이르렀을 그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라.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퉁이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할 그때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묻거늘,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0:1-20)
그 결과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갔고, 입을 열어 몇 분 정도 설교했습니다. 그 부분을 읽으면 2분 정도 걸립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성령께서 고넬료와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셨고, 그들이 방언으로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이것은 하나의 확증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복음은 본래 계속해서 이방인에게 전해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베드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베드로는 한 사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인 야고보였습니다. 왜 야고보는 베드로를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길로 이끌었을까요? 제게 묻는다면 저도 정말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본래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부르심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나중에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을까요? 사실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통을 고수한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잃었다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 앞에서 외식하기까지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베드로가 한 사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야고보, 곧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였습니다. 이 사람이 베드로에게 영향을 준 후,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있을 때 다른 사람이 없으면 외식하며 이방인들과 잘 어울렸습니다. 사실 이것이 원래 그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야고보가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자, 베드로는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고자질할까 두려워 이방인들 앞에서 외식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것은 갈라디아서에 기록되어 있고, 당시 바울도 베드로와 같은 곳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를 매우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성경 원문에는 “대적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베드로를 대적했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사실 이런 외식하는 행위를 대적한 것입니다. 외식하는 행위가 이미 예루살렘 교회의 문화가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여러분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전한 것은 모세의 율법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닙니다.
후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믿은 복음이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과 다르면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너희가 전하는 복음이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과 같지 않다면 그것도 저주를 받을지어다.” 너무 독단적인 말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 정말 독단적인 말일까요? 그는 단지 복음의 순수함을 지키려 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코 모세가 전한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율법이라면 우리는 모세의 율법만 믿으면 되지, 왜 굳이 예수 그리스도까지 필요하겠습니까? 모세의 율법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러 오신 것입니까? 또 하나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당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오늘 하나씩 정리해 보겠습니다.
처음에 베드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이방인 고넬료가 주님을 믿게 된 일을 그들에게 나누었습니다. 사람들은 듣기에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할례를 받은 신자들이 많았고, 그들은 베드로와 논쟁했습니다.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베드로는 그들에게 하나하나 설명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명문화되지 않은 관습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할례”와 “할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유대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러했고, 할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습니다. 할례가 대체 무엇입니까? 생식기에 작은 수술을 하여 포피를 잘라 내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온 힘을 다해 그들에게 성령께서 어떻게 자신에게 계시하셨는지, 어떻게 고넬료의 집에 갔는지, 자신이 설교하자 성령께서 어떻게 임하셨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잠잠해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정말 이 일을 받아들였을까요?
실제로 후대의 교회 역사는 그들이 여전히 할례를 전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전통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게 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어릴 때부터 할례, 할례를 계속 들었고, 그들 자신도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할례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사실 할례를 받았든 받지 않았든 사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전혀 막지 못합니다. 그 결과 교회는 계속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교회를 세우다
사도행전 9장에서 바울은 아직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바울은 주님께 돌아온 후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사귀고자 했지만, 그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오직 바나바만 그를 받아들였습니다. 후에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나 아주 먼 곳으로 갔습니다. 나중에 바나바가 다소에 가서 바울을 데려왔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11장의 일이며, 바울은 안디옥에 도착했습니다. 이때부터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각처로 파송되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사도행전 13장부터 15장까지 곳곳에 교회를 세웠고, 이 기간은 서기 49년 이전이었습니다.
바울은 몇 년 동안 사역했고, 그 결과는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바울은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왜 예루살렘 회의에 가야 했을까요? 그는 계시를 따라 올라갔습니다. 혹시 자신이 이전에 했거나 앞으로 하게 될 일이 헛수고가 될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우두머리로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어떻게 우두머리가 되었을까요? 원래는 베드로가 우두머리였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헤롯 왕이 베드로를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네 명씩 네 조로 나누어 군인들이 지키게 했습니다. 유월절 후에 그를 끌어내어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교회는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헤롯이 베드로를 끌어내어 죽이려던 전날 밤, 베드로는 두 쇠사슬에 매여 두 군인 사이에서 잠들어 있었고, 문 밖에는 보초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와서 베드로의 옆구리를 치며 빨리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그의 쇠사슬이 풀렸고, 베드로는 서둘러 신을 신고 허리띠를 띠었습니다. 천사는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베드로는 계속 자신이 환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밖으로 나와서야 천사가 자신을 구해 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이 모여 있는 집으로 갔습니다. 집 안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문을 두드리자 안으로 들어갔지만, 많은 사람이 믿지 못하고 베드로의 천사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가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이르되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알리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사도행전 12:17)
여기서 언급된 야고보가 바로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동생입니다. 베드로의 뜻은 이 일을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알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야고보와 베드로의 관계는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지위가 베드로보다 높았는지 낮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야고보가 교회의 권세를 얻게 된 과정에 대한 추측
그 후 사도행전 15장에 이르면 우리는 야고보가 이미 교회의 우두머리가 된 것을 보게 됩니다. 당시 헤롯은 베드로를 찾지 못하자 사방으로 찾아다녔고, 베드로는 어딘가에 숨어 있었습니다.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야고보와 형제들을 불러오라고 한 것은 야고보가 자신을 대신하여 예루살렘 교회를 관리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는 그곳에 없었고,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실 때에도 그곳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언제 교회 안으로 들어왔을까요? 성경에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조사할 방법이 없습니다. 야고보가 언제 교회에 들어왔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고, 야고보와 또 다른 동생 유다가 어떻게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말해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저는 대담하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대단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할까요? 당시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께서 임하신 후 3천 명이 주님을 믿고, 5천 명이 주님을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당시 교회 안에 돈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밭을 팔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1만 명의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선전의 1만 명이라고 하면, 그들이 집과 땅을 모두 팔 경우 선전에서는 한 사람당 적어도 1천만 위안은 될 것입니다. 1만 명이면 1천억 위안입니다. 그 액수가 얼마나 엄청납니까? 사람들은 함께 교회에 와서 식사하고, 공산주의 생활을 한 셈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많아지자 문제가 생겼고, 결국 식사를 관리하도록 일곱 집사를 세웠습니다.
그 후부터 흥미로운 일이 시작됩니다. 교회가 박해를 받기 시작했고, 스데반이 순교했습니다. 그 후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머물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박해는 몇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바울도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 중 하나였고, 매우 열심히 박해했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은 하나님께 직접 택함을 받아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예수님께서 전도하실 때에도 동생 야고보와 유다는 그곳에 없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없었으며,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에도 없었습니다. 제가 이 내용을 말할 때, 성경을 저보다 더 자세히 읽은 몇몇 형제자매들이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는 것입니다.
감람원이라 하는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거리라. 제자들이 감람원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사도행전 1:12-14)
이 구절에는 처음으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동생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야고보와 그의 동생 유다도 포함되었을 것이며, 그들은 모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때 야고보가 등장한 것입니다. 형제자매들이 제안한 내용은 매우 좋았습니다. 이 구절을 제시한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야고보와 유다와 마리아가 그 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1장 14절부터 12장 17절까지 야고보가 등장하지만, 그 사이에 그가 무엇을 했는지, 어떤 기적을 행했는지, 예수님의 어떤 가르침을 실행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이후의 기록에서도 야고보는 야고보서 외에 다른 글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서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율법을 매우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전체에서 처음에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밝힌 부분을 제외하면, 성령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야고보서가 말하는 내용을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유롭게 하는 율법”이라는 말을 두 번 언급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자유롭게 하시는 분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야고보가 말한 율법은 당시로서는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곧 구약성경을 가리켰을 것입니다.
이 율법에 관해 말하자면, 저는 야고보가 바울보다 뛰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가말리엘은 오늘날로 말하면 과학원의 원사에 해당하는 인물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바울에게 율법을 가르쳤으니, 바울은 율법에 매우 정통했을 것입니다. 바울 앞에서 야고보가 율법을 말한다면, 기본적으로는 장인 앞에서 서투른 솜씨를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장 뛰어난 목수 앞에서 목공 일을 논한다면 당연히 그보다 못할 것입니다.
야고보가 말한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일까요?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이름을 내걸었을 뿐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전한 말씀과 복음에 대해 상세히 논술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후에 야고보가 성령 충만에 관한 말씀을 전했는지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언제 교회에 들어왔을까요? 교회가 부유해지기 시작했을 때 들어온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단지 추측일 뿐입니다. 누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까요? 마리아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이기는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누가 자신의 어머니이고 형제인지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그러한 사람이며, 그렇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육신으로 난 것은 육신입니다. 마리아가 보기에 “내 아들도 교회에서 뭔가 맡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수억 위안 규모의 기업과 같으니, 연봉도 적어도 100만~200만 위안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에 로마 가톨릭이 베드로와 마리아를 매우 높이 추대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대담하게 추측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 추측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야고보가 언제 주님을 믿었는지, 언제 세례를 받았는지, 언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귀신을 쫓아낸 적이 있을까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베드로가 도망할 때 야고보가 갑자기 등장합니다. 마치 월급만 받고 일은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영향력이 매우 큰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할례를 중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또 다른 동생 유다가 무엇을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누구를 해방시켰는지, 어떤 기적을 행했는지, 어떤 위대한 일을 했는지, 어떤 위대한 교회를 세웠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기록만 있습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에 많은 혼란을 일으켰고, 갈라디아 교회에도 많은 어려움을 주었으며, 심지어 로마 교회에도 많은 곤란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가 곳곳에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동생이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그의 어머니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신이 우두머리인지 두 번째 사람인지는 무엇을 증명합니까?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일이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특히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에서 말한 것처럼, 그가 가장 큰 사도였다는 말입니까? 바울은 계속 논쟁했습니다. 무엇을 두고 논쟁했을까요? 나중에 알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가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와, 예루살렘의 위대한 사도 야고보가 왔다! 베드로도 왔다! 와,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베드로라니! 그가 바울보다 훨씬 대단하겠구나!” 모든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지점을 많이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베드로의 지위와 야고보의 지위 때문에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겠습니까? 반드시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그 영향이 좋은 것이었는지 나쁜 것이었는지는 여러분이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는 것 같습니까? 야고보가 바로 이런 방식으로 교회 안에 들어온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교회가 가장 중요하다
그가 무슨 일을 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베드로가 한 일은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후에 야고보의 영향을 받았고,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에도 야고보서의 흔적이 있으며, 말하는 방식도 매우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관계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합니다. 오늘 형제자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내 어머니이든 내게 어떤 사람이든 그것이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 우리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만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교회만이 중요합니다.
야고보가 위대한 일을 했다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야고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매우 강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이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을 중요하게 여긴다.”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람을 마귀의 지배에서 해방시킬 수 있습니까? 알 수 없습니다. 할례에 대해서는 매우 힘 있고 대단하게 말하지만, 사람을 속박에서 해방시킬 방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영향을 받은 교회는 매우 많습니다. 오늘 저는 벌집을 건드린 셈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을 속박에서 해방시킬 능력은 없으면서 큰 원칙만 말하는 데에는 대단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노새인지 말인지 끌어내어 달려 보게 한다면, 성경에서 야고보는 한 번도 나와서 달려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무엇을 했는지 계속 알 수 없고, 성경에는 단 한 가지 일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수많은 혼란과 어려움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교회 안에 들어온 후, 바울은 곳곳에 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3장부터 14장까지의 일입니다. 그는 구브로에서 전도했고, 안디옥에서 전도했으며, 이고니온에서 전도했습니다. 그 후 루스드라로 가서 전도하려 했고, 나중에는 수리아, 곧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바울은 사역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전 세계의 교회, 곧 그 시대의 교회는 예루살렘의 관할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어떤 전도자에게 “내려가라. 너는 더 이상 사역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 그는 사역할 수 없었습니다. “너는 잘하고 있으니 계속하라”라고 하면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관계가 좋지 않으면 그가 당신을 해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가 여러 교회에 편지를 보내 “이 사람은 더 이상 사역할 수 없다”라고 통지한다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바울은 사역할 수 없게 됩니다. 바울은 이 일을 갈라디아서에 기록했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인 중에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2:1-2)
무슨 뜻일까요? 당시 바울이 관계를 잘 맺지 않았다면 매우 위험했을 것이고, 해임되었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해임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네게 이 일을 맡겼는데 네가 나를 대적하는 것이냐?”라는 상황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계시를 따라 올라갔습니다. 헛되이 수고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이나 전에도 내가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에는 숨은 뜻이 있습니다. 후에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했고, 예루살렘 회의, 곧 사도행전 15장의 회의가 열렸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모세의 규례와 할례에 관한 문제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자신이 원하던 것을 순조롭게 얻었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앞으로 더 이상 헛되이 수고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와 다음과 같은 협의를 이루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12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사도행전 15:12-21)
이것은 어떤 협의였을까요? 바나바와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보내고, 베드로와 야고보는 유대인에게로 보내는 협의였습니다. 이 구분은 꽤 괜찮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그때 그는 다른 사람의 지붕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의 지붕 아래 있다면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매우 지혜로웠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바로 그 당시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후 바울은 이방인 가운데서 크게 활동하며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게도냐로 갔고, 유럽으로 건너갔으며, 로마에 이르기까지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루살렘 회의, 곧 사도행전 15장 이전에 사도 바울은 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15장 이후에는 유럽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후에는 고린도와 에베소 같은 곳에 이르렀습니다. 갈라디아서는 그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자 바울은 이방인 교회 가운데서 사도로서의 지위가 매우 견고해졌고, 교회도 크게 부흥했습니다. 바울의 본거지는 안디옥이었습니다. 그는 늘 안디옥에서 여러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후에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습니다. 안디옥은 이방인의 지역이었으므로 베드로는 처음에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오자 두려워하여 이방인들과 떨어져 더 이상 함께 식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바나바도 베드로를 따라 함께 외식했습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왔다는 이유로 외식하다니, 정말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습니다. 바울은 이방인 교회에서 자신의 지위가 매우 견고해졌을 때 갈라디아서를 썼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나니)그들이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은 것과 같은 것을 보았으니,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갈라디아서 2:6-10)
이 말씀이 이해됩니까?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루어진 협의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점점 더 많은 외식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자신들을 마치 높은 수준의 그리스도인과 낮은 수준의 그리스도인처럼 생각했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있으므로 높은 수준의 그리스도인이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낮은 수준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누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절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심각합니까? 물론 심각합니다.
야고보는 분명 갈라디아서를 읽었을 것이고, 그 후 매우 흥미로운 말을 했습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야고보서 3:10-11) 한 사람의 입에서 찬양의 말과 저주의 말이 동시에 나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정말 그런가요? 모세는 신명기에서 축복도 말하고 저주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주의해야 합니다. 듣기에는 매우 좋은 말이지만 극도로 혼란스러운 말도 많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주님을 믿은 이방인들에 대해 성경에 기록된 야고보의 말은 무슨 뜻일까요? “아, 주님을 믿은 이방인들은 이등 그리스도인이니 우리가 그들을 괴롭히지 말자.” 이런 말이 무슨 말입니까? 지켜야 할 것은 지키고,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은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맞으면 맞는 것이고, 아니면 아닌 것입니다. “괴롭히지 않는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이방인이기 때문에 “원래는 할례를 지켜야 하지만 오늘은 내가 너를 괴롭히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어떤 교회가 “원래 너는 헌금해야 하지만 내가 너를 괴롭히지 않을 테니 헌금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라고 하면 하는 것이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지키는 기준은 구약의 율법보다 훨씬 높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약성경의 요구가 구약성경의 요구보다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야고보서에 대해, 이른바 “더더” 또는 “각각”에 관해 이야기했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떠났습니다. 그들이 떠났다면 떠나게 두면 됩니다. 그런 사람들을 걸러 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을 한다 해도 저는 여러분을 축복하고, 여러분도 자신을 축복하면 됩니다.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을 엄밀하게 살펴서 그 말이 옳은지 그른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이기 때문에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갈라디아서이기 때문에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실행해 보았을 때 실제로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나고, 속박된 사람이 해방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엄밀하게 성경을 살펴보라
엄밀하게 성경을 살펴보는 것은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 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시대에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추진할 때의 상황도 이와 매우 비슷했습니다. 당시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엄청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대기업에서 개혁을 추진한다면 많은 사람이 반대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예는 말할 것도 없고, 상앙의 변법을 보십시오. 당시 상앙이 맞닥뜨린 저항은 매우 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의 고정된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덩샤오핑과 마오쩌둥 같은 사람들을 매우 존경합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추진하려 할 때 중국은 가난하고 낙후되어 있었고, 중국 전체의 GDP가 대만보다도 낮았습니다. 그 상황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런데 통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어떻게 통일하겠습니까? 후에 덩샤오핑이 선전 지역에 선을 하나 그었고, 선전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그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가 선을 그은 범위 안에 있던 사람들은 농민들까지도 모두 천만장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덩샤오핑이 “두 가지 모두”라는 원칙에 직면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오 주석이 내린 모든 결정을 우리는 단호히 옹호한다. 마오 주석의 모든 지시는 우리는 변함없이 따른다.” 마오 주석은 실수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매우 위대한 사람이었고 우리도 그를 존경하지만, 그 역시 실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경직되게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시작했을 때, 제가 대학에 다니던 시기는 마침 제11기 3중전회가 열린 때였습니다. 그 보고서는 정말 훌륭했고,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추구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배우고 탐구하고 파헤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경직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모두 실행해야 한다고 한다면, 유다가 자살했는데 여러분도 자살해야 합니까? 물론 자살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유다의 자살을 농담처럼 여기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점치는 책처럼 여깁니다. 눈을 감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 달라고 한 뒤, 성경을 펼쳐 손가락으로 짚고 눈을 떠 보니 유다의 자살에 관한 구절을 짚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자살해야 합니까? 주님을 믿는 것이 이런 식입니까?
기초로 돌아가 온전한 신앙 체계를 세우라
주님을 믿는 것을 이런 식으로 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절대로 이런 일을 하지 마십시오. 이런 것들은 사람을 두렵게 합니다. 성경에 수록된 모든 것을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 가톨릭의 성경은 우리의 성경과도 조금 다릅니다. 반드시 성경을 세심하게 읽어야 합니다. 당시 어떤 바위 하나가 성경 안에 들어갔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만일 그 바위가 성경에 들어갔는데 여러분이 부주의하게 그 바위에 걸려 넘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돌이라는 사실을 모릅니까? 예수님이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돌이라면, 우리가 더 자세히 살펴볼 때 정말 뜻밖의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야고보는 어떤 사람입니까? 야고보는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너희 이방인들아, 내가 너희를 괴롭히지 않겠다. 원래는 지켜야 하지만 내가 너희를 괴롭히지 않겠다!” 이렇게 해도 됩니까?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무슨 일이든 “내가 너를 괴롭히지 않을 테니 성경을 읽지 않아도 된다. 너는 좋은 사람이다. 내가 너를 괴롭히지 않을 테니 주일에 와서 설교를 듣지 않아도 된다. 노트를 쓰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정말 심각한 일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많은 말이 옳지만 몇 마디만 잘못되어도 매우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시 기초로 돌아가 온전한 신앙 체계를 세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배우는 것은 결코 맹목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고 영적인 일에 무지한 채, 단지 심리적인 위로만 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보살과 동등하게 여긴다면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에게는 보살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습니다. 무지는 멸망을 가져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온전한 신앙 체계를 세우는 일을 추진해야 합니다. 제가 말하는 것을 믿지 마십시오. 제가 말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성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세웁니까?”라고 묻는다면, 하나씩 세우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을 이끌며 함께 세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펴본 후에야 본래 이런 것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바울을 믿지 않는다면 신약성경을 어떻게 읽겠습니까? 바울을 성경에서 빼 버린다면 누가복음부터 히브리서까지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고 이 능력 있는 복음을 회복한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사실이 말보다 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우는 일을 추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게으르고 성경을 읽기 싫어하면서도 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까? 성경을 자세히 읽지도 않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말한 뒤 묵묵히 받아들이기만 합니까?
성경은 누가 썼습니까? 주후 300여 년이 지난 뒤 많은 사람이 함께 회의를 열고, 당시 성경에 넣을 수 있었던 것들을 수집했습니다. 당시 교회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정말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도 모릅니다. 오늘날까지도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 회의가 무엇을 했는지 실제로 살펴본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많은 사람이 모릅니다.
예루살렘 회의가 확인한 가장 중요한 일은 바울이 이방인 가운데서 가진 지위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고, 자신들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나뉜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원래 사도 베드로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전하다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그 일을 없애 버렸을까요?
우리도 일을 하다 보면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을 하다가 일을 망쳐 버립니다. 베드로의 직분은 갈수록 작아졌고, 사도 바울의 사역은 갈수록 커졌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보았습니까?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들은 모두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했고, 그가 전한 복음에는 성령의 큰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세운 교회들은 당시 유럽 전역과 아시아, 소아시아에 가득했습니다.
당시 바울은 복음을 아시아의 경계까지 전했습니다. 후에 성령께서 인도하셔서 그들을 다시 유럽으로 이끄셨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우리도 알 수 없습니다. 이유가 없습니까? 성령께서 그렇게 인도하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니면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바울과 야고보가 전한 복음이 서로 모순된다면 어느 것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제게 묻는다면 저는 바울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참된 말씀대로 실행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된다
제가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여 실행했을 때 교회가 능력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배우기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야고보서를 열심히 읽고 그 안의 내용을 실천해 보았지만, 매우 어렵고 도저히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노력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안에 사도 바울이 가르친 것과 모순되는 가르침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모순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그것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후 바울의 가르침을 실행하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와 함께하시는지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모순인지 아닌지도 상관하지 않고, 때로는 야고보의 말을 따라 행하고 때로는 바울의 말을 따라 행한다면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1+1이 2이면서 동시에 3이고, 4이고, 5일 수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시 생각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가운데 있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배움의 길을 열고자 합니다. 저는 한 교회를 본 적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앞에서 설교하고 있었고, 아래에는 의자가 두 줄로 놓여 있었으며, 가운데에 통로가 있었습니다. 통로 한쪽에는 방언기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앉아 있고, 다른 한쪽에는 방언기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목회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전 예배와 저녁 예배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함께 수업을 듣는데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입니까? 제멋대로 해서는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이것이 매우 어려운 이유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양쪽 모두에게 좋은 사람인 척하지 마십시오.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고 하지 마십시오. 후에 사도행전 21장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야고보를 방문했습니다. 그때 야고보와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미 갈라디아서를 모두 읽었고, 읽은 후 매우 분노했으며 반응도 강렬했습니다.
여러분이 야고보라면 갈라디아서를 읽고 그 안의 모든 화살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가 바로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에 대한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바울이 예루살렘에 와서 야고보를 방문했습니다. 야고보는 좋은 사람인 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야고보를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누었지만, 서로 속으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야고보를 만나며, 예루살렘 사람들이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를 읽은 후 자신을 돌아보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네가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우리 중에 서원한 네 사람이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여 편지하였느니라.” 하거늘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다음 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를 드릴 때까지의 날이라.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사도행전 21:20-27)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레가 거의 찰 무렵 바울은 성전에 들어갔다가 주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성전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대제사장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런 일들은 유대인의 규례와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이상한 혼합체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말대로 행하라”고 했는데 결국 바울은 붙잡혔고, 많은 사람이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 일의 배후에 무언가가 있었을까요?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이미 바울이 여러 해 동안 감옥에 갇혀 로마로 보내졌고, 가이사 앞에서 자신을 변론하고 있었습니다. 그 내막은 매우 복잡합니다! 사도 바울과 누가는 매우 은밀하게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깊은 사정이 있습니다. 이 두 사건을 연결할 수 있습니까? 분명히 함정이었습니다! 가라고 해 놓고, 가자마자 붙잡아 죽이려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순수한 복음을 위해 대가를 치른 바울
바울은 왜 예루살렘에 가려고 했을까요? 그 전에 많은 사람이 바울에게 가지 말라고 했고, 성령께서도 거듭거듭 가지 말라고 일깨우셨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왜 갔을까요? 바울은 서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한다.” 바울은 자신의 동족을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함정인 줄 알면서도 그 안으로 뛰어들었고, 산에 호랑이가 있는 줄 알면서도 호랑이가 있는 산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벌집을 한번 건드려 봅시다. 어쩌면 돌과 침이 날아올 수도 있습니다. 침에 맞아 죽는다 해도 저는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를 위해 세워 준 본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복음의 비밀을 다시 회복하여,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이 복음의 유익을 얻게 해야 합니다. 더 이상 겉모습만 꾸미지 말고, 더 이상 경건한 체하지 말며, 지혜롭고 완곡한 말에만 의지하지 맙시다. 오늘 우리가 전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확증되는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이 시대는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는 시대이며, 사도 바울이 전한 순수한 복음을 회복하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복음은 다시 밝은 빛처럼 빛나고,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다시 소망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이 복음을 위해 오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혜와 총명을 사용하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며 복음의 순수함을 지켰습니다. 이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복음의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매우 훌륭한 본을 세웠습니다. 자신의 동족을 위해 생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돈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람만이 순수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큰 도전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23:11)
한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다면 죽지 않습니다! 쉽게 죽지 않습니다.
앞으로 몇 주 동안 우리는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이 틀릴 수도 있지만 괜찮습니다. 여러분 모두 자세히 살펴보고 제가 말한 것이 옳은지 그른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제 말에 걸려 넘어지지 마십시오. 이 일을 통해 당시 사도 바울과 야고보 같은 사람들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복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후에 저는 야고보서를 즐겨 전하는 설교자들과 야고보서의 진리를 진리로 여기는 많은 설교자들이 매우 힘겹게 살아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를 매우 가난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예루살렘 교회를 그렇게 가난하게 만들었을까요? 우리는 이것을 돌아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많은 교회를 본 사람이라면 분명 알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진리를 실행한 교회에는 공통된 결과가 있습니다. 교회가 매우 가난하고, 기적과 표적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기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형제자매 여러분, 이 일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마십시오. 받아들이고 싶으면 받아들이고, 저는 사람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연구한 결과를 여러분과 나누며 인도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야고보의 일생을 어떻게 정리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한 일들이 여러분 앞에 분명히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한 일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다음 주에 다시 만나 야고보서 1장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