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예리니야애가(3)-진노로 스스로 가리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
필기를 참고
1.서론
a. 인간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견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갖게 되면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b. 사람들은 삶에 대해 매우 진지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이 땅에서의 인간의 존재는 공허하고 무의미합니다. 이 땅에서 부를 축적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입니다.
c. 사람은 죽을 때 세상의 논리 체계 안에서 죽게 되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고 결국 그들을 죽입니다.
d.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관심 없으신 것에 관심을 갖고, 하나님께서 관심 있으시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e. 하나님은 사람들이 더 많은 고통을 받거나 더 많은 죄를 겪더라도 신경 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죄"(선악을 분별하는 것, 육신의 방종, 세상적인 사랑)를 매우 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로 인해 죽습니다.
f. 살고자 하는 욕망은 죽음의 영에서 나옵니다. 세상의 논리는 파괴되어야 합니다.
2. 성경의 말씀
진노로 스스로 가리우시고 우리를 군축하시며 살륙하사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주꼐서 구름으로 가리우사 기도로 상달치 못하게 하시고 우리를 열방 가운데서 진개와 폐물을 삼으셨으므로.(예레미야애가3:43-45)
기도:
하나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고, 당신을 알게 하시고, 당신의 진노를 알게 해주세요. 당신의 진노 아래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알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당신이 염려하시는 것을 우리가 돌보게 하시고,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의 논리를 완전히 무너뜨리게 해주세요. 당신의 뜻대로 행하여 당신의 진노에서 구원받게 해주세요.
우리의 마음이 당신의 말씀으로 가득 차게 하시고, 당신의 말씀대로 살게 해주세요. 당신의 진노를 피하고 멸망하지 않게 해주세요. 당신의 논리를 이해하고, 당신의 말씀을 이해하게 해주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 성경말씀의 배경
a. 바빌로니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겉으로는 애국심과 야망으로 보였지만, 속으로는 세속적인 논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b.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큰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살았고, 기꺼이 고난을 겪으려 했습니다. 인간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c. 선지자들의 고난과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 논리의 심오한 악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d. 하나님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논리와 신적인 논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5. 선지자의 고난은 인간의 죄를 드러냅니다.
a.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목숨을 잃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회에서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b. 선지자는 당연히 세상의 논리와 종교 체계에 도전했고, 그 대가를 치렀습니다.
6. 사람은 자신의 죄로 인해 벌을 받습니다.
a. 세상을 사랑하고, 육신에 빠지고, 선악을 분별하는 것은 일련의 문제를 야기하는 죄이며, 사람은 자신의 죄로 인해 벌을 받습니다.
b. 사람은 세상의 논리 체계에 쉽게 빠질 수 있으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7. 하나님은 사람의 죄와 패역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a.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돌보십니다. 세상적인 논리에 물들어 반항하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b.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의 기초 위에 굳건히 서 있을 때만 용서하십니다.
c. 반항은 매우 악합니다. 사람이 믿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8. 당신은 무자비하게 살인합니다.
a. 하나님께서 학살을 집행하시기 전에, 사망의 길로 가지 말고, 죄악 가운데 머물지 말고, 자기 의와 반역을 고집하지 마십시오.
b. 사람들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내가 고집하는 걸까? 지금 당장 바뀌어야 한다"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c. 자연스럽고 합리적으로 들리는 모든 논리를 거부하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의 논리에 집중하여 축복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9. 백성의 멸망으로 인해 내 눈물이 강물처럼 흐릅니다.
a. 예레미야의 눈물은 그의 민족이 겪은 파괴로 인해 강물처럼 흘렀습니다.
b. 선지자의 눈물이 헛되지 않도록 마음을 부드럽게 하십시오.
10. 결론
살육의 길에서 돌이켜 축복의 길로 나아가십시오. 세상의 논리 체계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줄 마음으로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을 추구하십시오.
서론
안녕하세요 여러분, 이건 제가 스스로에게 던진 엄청난 도전입니다. 지난 일요일부터 매일 예레미야 3장을 읽고 있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정말 이해가 안 됩니다. "나는 독서를 잘하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가네."라는 생각이 계속 듭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요? 앞뒤가 맞지 않죠? 어떤 순간은 신을 믿는 것 같다가도, 또 어떤 순간은 믿지 않는 것 같고, 또 어떤 때는 또 무슨 일일까요? 다 읽고 나면 완전히 혼란스러워서 단서를 찾지 못한 채 계속해서 넘겨봅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 3장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당신은 분노에 싸여 무자비하게 죽입니다." 이 제목을 들으면, 이것이 여전히 기독교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믿는 신이 여전히 그런 신일까요? 여러분은 저에게 묻고, 저도 제 자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정말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이 정말 무자비하게 죽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일주일 동안 이 문제로 고민하며 머리를 쥐어짜다가 어떻게 이 주제를 발견했을까요? "하나님, 이 장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건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아시죠? 이런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 꽤 효과적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읽고 싶은 것만 읽는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읽고 싶은 것만 읽는다면 좋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새롭고, 당신의 정직함은 엄청납니다. 예레미야의 새로운 관점을 원하시나요? 예레미야는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며칠 후 감옥에 갇혔으며, 나중에는 하수구에 갇혔습니다. 오물이 머리까지 차올랐습니다. 그는 정말 겁에 질렸습니다. 세상에, 숨을 쉴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런 새로운 관점을 원하시나요? 그렇다면 성경을 그렇게 읽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당신의 관점이 중요하지 않다면, 사람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보고 "하나님, 왜요?"라고 외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도 너에게 왜 그런지 묻고 싶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사람들이 스스로의 의견을 형성하면 하나님의 관점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 설교의 주제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자신도 분노에 눈이 멀었고,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당신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은 열 살, 스무 살, 백 살까지 살든 죽든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이 모두 헛되고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마치 땅바닥에서 부지런히 기어 다니는 개미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관점은 무엇일까요? 자신을 위해 부를 축적하는 것만으로는 생명을 구할 수 없지만, 사람들의 관점은 다릅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관점은 전적으로 자연스럽고 세속적이며 육적인 것입니다. 사람은 살덩어리로 태어나 이 살에서 조금씩 자라납니다. 육에 대한 성향이 날로 커지고,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이 날로 커지고, 세상에 대한 사랑이 날로 커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관점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너는 날로 커지고 있구나, 그렇지 않느냐? 한두 가지를 보여 주고, 약간의 분노를 안겨 주겠다"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세상을 꿰뚫어 보는 사람이 정말 드뭅니다. 저는 우리 형제자매 모두가 세상을 꿰뚫어 보고, 예레미야 3장을 조금이나마 깨닫고, 세상에 너무 집착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한번은 어떤 형제가 상사에 대한 존경심으로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그의 상사가 신자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상사는 딸이 28세에 암으로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를 섬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럼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아, 내 딸은 28살이었고, 성실하고 아주 훌륭한 직원이었지."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직원이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수는 없지 않나요? 훌륭한 직원이란 세상에 대한 아주 좋은 사랑을 뜻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아시죠? "딸은 열렬한 사랑도 없이 죽었어."라고 말했죠. 세상적인 관점이 얼마나 강력한지 아세요? 사람들은 바로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이 광활한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에, 너무 혼란스러워합니다. 때로는 부러워하기도 하지 않나요? 하지만 한 세대가 지나고 또 다른 세대가 오면, 사람들의 관점은 하나님의 관점과 완전히 달라져요. 작년 비슷한 시기에 미얀마의 네 가문이 성대한 생일 축하 행사를 열었는데, 정말 화려하고 웅장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네 가문은 통신 사기에 연루되어 돈을 벌었지만, 사람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신장이 잘리고, 간이 제거되고, 심지어 머리가 잘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세대의 이런 피해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는 사기꾼들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 언제 개입하실 건가요? 개입하셨잖아요, 안 하셨죠? 올해 네 가족이 모두 몰락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오만합니까? 영광은 남아 있습니까? 아니요,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손녀 중 한 명은 20대에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말씀드리자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죽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람들이 자신 안에 있는 세상의 논리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세상의 논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드러나고 내려올 때, 저는 감히 누구도 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비극입니다.
몇 년 전 한 자매님이 저희에게 찾아왔는데, 어제 담임목사님이 저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분은 오랫동안 교회에서 사역하셨고, 행정직도 맡기도 하셨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분이 잘못된 길로 가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의 아이가 잠자리에 오줌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가 꽤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효과가 없었습니다. 여러 구루와 치유사들이 찾아왔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사를 만들고 싶어 하는 또 다른 구루들이 찾아와 그의 집에 함께 살았습니다. 하지만 야뇨증 문제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그에게는 아주 친한 누나가 있었습니다. 그 누나는 매일 그와 꿈과 비전을 나누었습니다. 와, 그들은 정말 영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를 보는 것은 마치 영적인 세계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누나는 야뇨증이 있는 아들을 그에게 데려갔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매일 예수님을 만나면서 야뇨증은 해결하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결국 그들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아이의 야뇨증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극적으로 호전되었습니다. 왜냐고요? 야뇨증은 할머니 때문에 생긴 것이었고, 할머니와 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할머니와 어떻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실 수 있느냐"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전장에서 자주 만났고, 서로 대등한 상대였지만, 사이는 아주 좋았습니다. 할머니는 저에게 완전히 굴복하셨습니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영적인 세계에 가서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분은 여전히 저를 존경하실 겁니다. 왜냐고요? 그분은 제 안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전히 노력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세상적이고 육적인 것들은 제 안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처럼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처럼 돈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처럼 유명한 목사가 되고 싶지도 않고, 권력을 휘두르다가 감옥에 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안에서 바르게 걷고 싶을 뿐입니다.
그 결과, 그녀의 영적인 자매는 눈 깜짝할 새에 몇 년이 흘렀고, 최근 백혈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주 심각한 병이었습니다. 이곳에 온 후, 그녀는 우리 자매를 찾았고, 우리 자매는 자신의 내면의 자존심을 건드릴까 봐 여러 가지 우회적인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건, 그리스도인들은 자존심이 매우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저는 이렇게 간략하게 말했습니다. "이것을 저주라고 부르는데, 정말 끔찍해요! 말벌집을 뒤흔든 셈이죠. 저주를 받는 거죠." 저희 자매가 이런 반응을 경험한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사역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암이 저주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암에 걸렸지만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담는 그릇, 그분의 진노의 표현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모르고,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더 죽이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만 완전히 거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로부터 모세 오경을 받았고, 나중에는 선지자 사무엘, 그리고 이사야, 예레미야 등의 선지자들을 낳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역사였습니다.
하나님 자신도 분노에 눈이 멀었고, 무자비하게 살육을 자행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난 날부터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정말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믿는 날부터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길을 걷고 있지 않습니까?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모른 채, 자만심에 사로잡혀 죽습니다.
하나님이 신경 쓰는 것을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신경 쓰는 것을 하나님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이것이 치명적인 결함입니다. 하나님이 신경 쓰는 것을 당신은 신경 쓰지 않고, 당신이 신경 쓰는 것을 하나님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너무 복잡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3장을 읽고 나면 예레미야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그렇게 많은 고통을 겪었는데, 왜 하나님은 개입하지 않으셨습니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계속 선포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듣지 않았습니다.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에도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신경 쓰지 않고,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시는 것은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더 고통받거나 더 많은 죄를 짓는 것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당신이 예레미야든, 예수 그리스도든 말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이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되셨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아끼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몹시 싫어하십니다. 죄가 무엇이냐고 물으시는군요. 죄는 세상을 사랑하고, 육신의 욕망을 탐닉하고, 선악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저는 죄를 간결하게 요약했습니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죽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불을 질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세상을 사랑합니다.
세상과 돈을 사랑한다면, 당신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이 세 가지는 인간의 죄를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사람들 내면의 관념을 보십시오. 그들의 삶에 대한 관점은 완전히 세속적입니다. 하나님의 죄에 대한 미움은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 육신의 욕망을 채우는 방식, 선과 악을 분별하는 방식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진노를 나타내십니다. 설령 당신이 죽는다 해도 하나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으십니다.
사람 내면의 관념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지, 아니면 기쁨을 받을지를 결정합니다. 우리의 관념이 하나님 중심적이고, 하나님께서 관심하시는 것에 관심을 둔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께 쓰임받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섬기는 과정에서 어떤 죄를 지을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죄는 그 자체로 영광스러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겪으신 죄도 영광스러웠습니다.
암에 무슨 영광이 있겠습니까? 아,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어제 한 형제가 폐암에 걸린 동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수술 중에 그의 흉강에서 암세포가 가득 찬 대야를 꺼냈습니다. 세상에, 그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요? 그는 결국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죄에 대한 미움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얼굴을 감추십니다. 그분이 당신을 돌보실까요? 그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으십니다. 만약 당신이 완강하게 거부한다면, 완강하게 고집을 부리고 하나님과 당신 중 누가 더 완강한지 시험해 보세요. 이 세상에서 삶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비극입니다.
얼마 전 전도서를 공부할 때, 저는 전도서가 창세기보다 앞선다고 말했습니다. 전도서에 나오는 "헛되고 헛되다"는 매우 중요한 토대입니다. 만약 삶이 헛되고 헛되다면, 열 살에 죽든, 스무 살에 죽든, 서른 살에 죽든, 오십 살에 죽든, 여든 살에 죽든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저는 다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일수록 죽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왜 살고 싶어 할까요? 누가 살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인생이 너무 지루해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라고 말했거든요. 하지만 항상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온갖 치료법을 다 시도하다가 결국 죽기도 합니다.
몇 년 전, 친구를 집으로 데려다주던 중, 친구가 시아버지가 코피를 흘렸다는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그때 저는 제 코피 증상을 이야기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 증상은 친구의 증상과 똑같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겁에 질리지 않을까요? 친구 시아버지도 저와 같은 나이였고, 같은 증상을 보였는데, 백혈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저는 검사를 받지 않았고, 검사나 의사를 믿지 않았습니다. 의사가 치료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의사를 믿는 게 맞겠죠? 하지만 의사가 치료할 수 있다 하더라도, 확률 문제일 뿐입니다. 치료 없이도 회복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9개월 후, 그의 형은 관에 누워 있었고, 저는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시신을 그냥 눕혀 놓는 중국과는 달리, 유리창을 통해 그의 얼굴이 드러났습니다. 싱가포르에서는 악취를 막기 위해 관을 덮습니다. 세상에, 그는 거기에 누워 있었습니다. 저는 "형님, 당신은 여기 누워 있고 저는 밖에 서 있습니다. 살고 싶지 않았나요? 살아남을 수도 없는데. 그럼 제가 왜 살고 싶겠어요? 살고 싶지 않다면 왜 치료를 받아야 하나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삶에 대한 관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필사적으로 살려고 하면 더 빨리 죽게 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을 세속적인 관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삶에 대한 관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저에게 인생은 허무 중의 허무입니다. 하루를 더 살든 덜 살든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다가 종양이 생기고도 여전히 살고 싶다면 치료를 받으세요. 치료를 받는 동안 제게 기도하세요. 살고자 하는 이 간절한 바람은 죽음의 영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본질적으로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만간 죽든 말든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관념, 즉 "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같은 관념으로 산다"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죽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분노에 눈이 멀어, 사람을 죽이는 데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사람들의 세속적인 관념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이 세속적인 논리를 해체하고 싶습니다. 세상적인 논리는 너무나 많고, 성경 전체가 그 논리에 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두 왕국, 두 가지 논리 체계, 그리고 두 가지 가치 체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난 금요일에 제가 느헤미야의 부의 방식에 대해 성경 공부를 했을 때, 세상의 논리로 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논리는 하나님의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세상의 논리로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요? 때로는 얻을 수 있고, 때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논리 체계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형제자매들은 세상의 논리 체계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께 멸망당할 운명에 처해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쁘다고 말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 세상에 대한 사랑, 육신의 탐닉으로 인해 죽임을 당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죽이시는 것을 본다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2. 성경의 말씀
진노로 스스로 가리우시고 우리를 군축하시며 살륙하사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주꼐서 구름으로 가리우사 기도로 상달치 못하게 하시고 우리를 열방 가운데서 진개와 폐물을 삼으셨으므로.(예레미야애가3:43-45)
기도:
하나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고, 당신을 알게 하시고, 당신의 진노를 알게 해주세요. 당신의 진노 아래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알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당신이 염려하시는 것을 우리가 돌보게 하시고,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의 논리를 완전히 무너뜨리게 해주세요. 당신의 뜻대로 행하여 당신의 진노에서 구원받게 해주세요.
우리의 마음이 당신의 말씀으로 가득 차게 하시고, 당신의 말씀대로 살게 해주세요. 당신의 진노를 피하고 멸망하지 않게 해주세요. 당신의 논리를 이해하고, 당신의 말씀을 이해하게 해주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경말씀의 배경:
예레미야가 애가를 썼을 때, 예루살렘은 이미 바벨론 군대에 의해 함락되어 1년 반 동안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포위 기간 동안, 이 군인들은 특히 애국심과 야망에 차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일본 마귀들과 싸우고 싶습니다. 나는 바벨론 사람들과 싸우고 싶습니다!" 정말 멋지지 않나요? 악비처럼 애국심을 가지고 정예 부대에 맞서 싸우는 모습은 얼마나 고귀한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실지도 모릅니다.
예레미야는 성 안에서 "항복하라! 항복하라! 이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벨론의 악마들이다!"라고 외치며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군인들은 이를 사기 저하로 여겼습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선지자 예레미야가 외치고 있다는 것을 듣고 그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예레미야를 심하게 때려 멍들게 하고 두들겨 맞았습니다. 세상에! 그는 멍들고 두들겨 맞았으며, 그의 눈은 팬더 눈처럼 되었습니다. 다음 날, 예레미야는 팬더 눈을 하고 다시 "항복하라! 항복하라!"라고 외쳤습니다. 이 말에 연대장, 사단장, 군단장들은 격분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사기를 저하시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하수구에 던져 버렸습니다. 하수구의 진흙 속에 던져 버렸습니다.
아, 정말 악취가 진동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수구에 던져진 그는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하지만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를 즉시 구출하라고 재촉했습니다. 얼마 후, 왕은 예레미야를 궁궐로 불러 "진실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내가 진실을 말하면 나를 죽이지 않겠지? 그들이 나를 하수구에 던져 넣었다. 죽이지 않을 거야, 안 죽일 거야, 약속할게. 그냥 진실만 말해."라고 대답했습니다. 진실은 그가 항복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생각했습니다. "오, 얼마나 어려운가! 나는 군사력도 없는데. 항복하라고 하면 나도 하수구에 던져지지 않을까? 나는 왕이지만, 하수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며 항복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았습니다. 정치가 얼마나 복잡한지 다들 알고 계시죠? 왕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세상의 논리는 사람들을 단단히 얽어매는 것입니다. 삶은 정말 힘듭니다. 회사를 차리고, 휴대폰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세상에, 휴대폰을 만들다가 제재를 받으면 어쩌지? 칩을 만들고 싶었어. 아니, 자동차를 만들고 싶었어, 자동차, 끝이 없었지. 그러다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그것도 허락되지 않았어. 모두가 그물에 꽁꽁 묶인 것처럼 서로 얽매였지. 시드기야도 마찬가지였어.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엄청난 고통을 겪었어. 하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를 고집했는데,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지. 그는 이미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붓기도 채 가라앉기도 전에 하수구에 던져졌어. 우리는 이 영적인 고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고 싶다면 전제 조건이 있어. 삶과 죽음을 꿰뚫어 보아야 해. 인간 삶의 사소한 부분까지 꿰뚫어 보아야 해.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난 내 동의 없이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지. 이제부터 저는 이 가치관으로 살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 기꺼이 고난을 겪겠습니다.
예레미야도 고난을 겪지 않았습니까? 매를 맞고, 어느 날은 시퍼렇게 멍이 들고, 어느 날은 하수구에 버려지고, 다음 날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주님의 진노로 고통받는 자들, 이 진노의 지팡이는 예레미야를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났습니다.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 당한 자는 내로다.나를 이끌어 흑암에 행하고 광명에 행치 않게 하셨으며.종일토록 손을 돌이켜 자주 자주 나를 치시도다.(예레미야 3:1-3)
이러한 고난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가하신 것입니다. 왜 그에게 이런 고난을 겪으셨을까요?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내면의 고통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때는 이렇게 말하다가 다음에는 다른 방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레미야 3장을 일주일 동안 읽었지만 끝내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완전히 어리둥절해졌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립니다. 만약 누군가의 소망이 이 세상에 있지 않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제게 임하여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정하신 운명을 이루는 것이며, 비록 눈물의 강이 흐른다 해도 그럴 가치가 있다. 이것이 바로 삶의 개념이다."라고 말씀하실 때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고,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왜 울고 있니? 너는 한심하구나."라는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왜 울고 있니? "무슨 일로 울고 있니?" 예레미야는 웃음거리가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한 선지자를 보내셨지만,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또 다른 선지자를 보내셨지만, 그 역시 죽임을 당했습니다. 나중에는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지만, 그 아들 역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인류 멸망의 징조가 되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선지자들이 왜 고난을 받았습니까? 선지자들의 고난, 즉 예수님의 죽임을 당하심은 이 세상의 논리가 얼마나 악한지를 보여줍니다.
세상의 논리로 가득 찬 그리스도인 여러분, 예수님이 오셨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죽이는 것은 바로 당신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논리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부의 길을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부의 길을 막는 것은 마치 부모를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두 왕국, 두 가치관, 두 논리 체계. 세상의 논리에 따라 사는 자들은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논리 체계 안에서 산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안배를 위해 살고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 구절은 바로 그것에 대한 것입니다. 강조한다고요? 하나님이 진정 어떤 신이신지 강조하는 거죠. 나머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몫입니다. 세속적인 것을 선택할지, 신성한 것을 선택할지 말입니다.
선지자들의 고난은 인간의 죄를 드러냅니다.
그 군사령관들이 나라를 지키고 바빌로니아인들과 싸운 것이 잘못이었을까요? 말해 보세요, 그들이 잘못했을까요? 아니, 그렇지 않나요? 그들이 우리나라를 공격했을 때, 우리가 그들을 위해 싸운 것이 잘못이었을까요?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당신은 영웅이잖아요, 그렇죠? 당신은 영웅입니다. 하지만 바빌로니아인들에게 당신은 그저 겁쟁이일 뿐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세속적인 존재입니다. 세속적인 것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저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선지자들이 이 세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는 이유로 학대를 받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일입니다. 때때로 저는 "하나님, 만약 이런 일이 저에게 일어난다면, 정말 힘들 겁니다."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당신이 제게 가서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한다면, "당신들은 다 틀렸어요. 중국 예정론을 믿어야죠..." 저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겁니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냥 혀를 차일 테니까요, 그렇죠? 그냥 도망칠 겁니다.
문제는 역사를 통틀어 선지자들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에 있으면서 세상의 논리에 반대하려고 하면 박해를 받게 됩니다. 다행히 저는 제 가르침을 온라인에 올렸습니다. 듣고 싶으면 듣고, 듣기 싫으면 듣지 마세요. 그들이 제게까지 올 수는 없습니다. 온라인에서 저를 비판하더라도 어쩔 수 없죠.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는 말이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겠습니까? 매우 어렵습니다.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은 고사하고, 그저 소멸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좋은 결과입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세상의 논리에 도전해야 하는 존재이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존재이며, 세상의 종교 체계에 도전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교회가 세계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이 대통령이나 저 대통령을 지지하다가 순교했다고 생각하며 총에 맞거나 암살당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한 부류는 순교했고, 다른 부류는 순교하지 않았지만, 죽음을 향해 싸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요점은 무엇일까요? 역사를 통틀어 정치는 세속적이었습니다. 세속의 논리는 매우 엄격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또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은 해석이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산타클로스로 해석하여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선물을 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로 인해 벌을 받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예레미야 3:39)
암에 걸리면 하늘과 땅을 탓하고, 먹지 못하게 되면 하늘과 땅을 탓합니다. 이런 병, 저런 병에 걸려 많은 고통을 겪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세속적인 논리는 탓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너무 경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으니까요.
설명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다음 달에 집세와 주택 담보 대출금을 내야 하니 돈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까요? 일을 해야 하고, 월급을 받아야 합니다. 당신은 감당할 수 있습니까? 직장에서 상사를 두려워해야 하지 않습니까? 상사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 세상적인 것들이 하나님의 몫을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상사를 두려워하십니까? 직장을 두려워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십니까? 너무 어렵죠?
제가 너무 경계를 넘고 있는 걸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죄로 벌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믿으세요! 저 사람이 살 수 있을까요? 저 사람도 살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지금 관리라면 부패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그런 시스템에서 어떻게 부패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너무 어려워서 못 살겠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 세상의 논리에서 벗어나는 게 너무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옛 자아를 극복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거예요. 그럼 말해 보세요.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어요? 누가 살고 싶지 않겠어요? 이 세상의 논리는 깨기 힘들지만, 이것들은 죄입니다.
그러니 제가 예전에 했던 세 가지 요점을 잘 들어보세요. 세상을 사랑하지만 안 하면 어떡하죠? 육신에 빠져 살지만 안 하면 어떡하죠? 선악을 분별하지만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면 판단 기준을 잃은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세상의 논리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벌을 받았어요.
당시 대제사장을 생각해 보세요. 성전을 쪼개고, 작은 상들을 많이 만들어서 세를 줬어요. 사람들이 와서 제물을 바치려고 할 때 제사, 이 조각은 돈으로, 저 조각은 비둘기로, 저 조각은 양으로, 온갖 것들로 교환하는 가판대가 있었습니다. 왜 돈을 벌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저는 이 방법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전세. 왜 전세? 성전 운영비의 일부를 나누려고? 생각해 보세요. 저는 이렇게 해야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도 이 함정에 거의 빠질 뻔했습니다. "그러면 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사업을 해야지." 얼마나 끔찍하고 두려운 일인지 말씀드리죠! 한 발짝만 잘못 내딛어도 세상의 논리에 빠져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됩니다.
그러니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는 구원을 향해 나아갑니다. 나중에 말씀드렸듯이, 저는 제 생각을 바꾸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지탱해 주십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야 합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에게 축복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돈이 부족해서는 안 됩니다. 이게 어렵다고 생각하세요? 정말 어렵습니다.
한 번은 제가 만난 적이 있습니다.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허난성 출신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설교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했습니다. 결국 그는 설교자들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고, 돈을 잃고 파산했습니다. 매일 밤 1시가 되면 무언가가 그를 깨워 돈을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한밤중에 그가 저에게 전화를 걸어 "제 돈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당신 돈을 위해 기도해 주시겠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런 얘기는 처음 들어봐요." 그는 "성령께서 매일 밤 1시에 저를 깨우셔서 돈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맙소사, 사람들은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모르다니. 너무 당연한 말처럼 들리네요. 사람들은 죄 때문에 벌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국심이 강했고, 성전을 사랑했으며, 성전 안에서 하나님께 헌신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렇죠? 저는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고 싶어요. 고귀하게 들리지만, 그들은 바빌론이 하나님의 창조물이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멸망시키려 하셨을 뿐만 아니라 성전까지 허물고 싶어 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분노에 눈이 멀어 무자비하게 학살을 자행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멸망시키려 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성전과 제단까지 멸망시키려 하셨습니다. "당신은 생명에 관심이 있나요?"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 때문에 벌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반역을 용서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범죄함과 패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예레미야 3:42)
"우리가 죄를 짓고 반역하였사오나,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이 말씀이 마음에 걸리지 않으십니까? 용서가 없으시니. 왜 용서하지 않으십니까? 세상의 논리 체계 안에서 살면서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맞는 말씀입니까?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죄를 짓고 반역합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이 잘못입니까? 하나님, 왜 우리를 이렇게 대하십니까? 제가 하는 일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내가 예루살렘을 지키겠고, 주의 성전을 지키겠고, 주의 성전과 함께 살고 죽겠나이다." 세상에, 우리에게는 정말 그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누가 당신이 그들과 함께 살고 죽기를 바라겠습니까? 예레미야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당신이 목표를 완전히 오해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는 거짓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바벨론에 항복합시다. 내가 주의 성전을 지키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 그는 완전히 틀렸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반역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런 것들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사람 안에 있는 세속적인 논리 체계는 매우 단단하고 해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오직 그것을 완전히 해체하고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논리 체계를 구축해야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세심히 살펴보면 세속적인 논리로는 이해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죄와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죄를 짓고 회개하며 하나님 말씀의 기초 위에 자신을 세울 때만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거역이 지극히 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믿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중국 예정론은 우리가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결코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합니다. 우리에게 열 분의 힘이 있다면 열 분의 힘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알기 위해 120%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다면,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다면, 진실이라면,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겠죠.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가 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무자비하게 살인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잘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 60만 명, 군사 60만 명 중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광야에서 하나님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무자비한지요! 고라가 반역하자 땅이 갈라져 그를 삼켰습니다. 땅이 어떻게 갈라지고, 어떻게 삼켜졌을까요? 그 부분은 깊이 파고들지 맙시다. 저는 고고학자가 아니니까요.
하나님은 무차별적으로 죽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히틀러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셨을까요? 사람들의 죄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었고, 그들은 죄에 대한 벌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죄와 반역은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제 말이 두렵다면,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삶의 비극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우리 안에 있는 겉보기에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논리들을 제거하십시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독선일 뿐입니다.
어젯밤에 한 자매님이 제게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아이고, 저는 늙어서 어머니처럼 어리둥절할 수는 없어요." 그녀는 남편에게 "제가 늙으면 어머니처럼 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남편은 "늙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어요. 이미 늙었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 그녀는 이미 그렇게 늙었는데도 여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군요. 사람들은 마치 놀이공원 거울을 보듯 자신을 이상하게 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고집이 센지 자주 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빨리 바꾸세요. 하나님께서 죽임을 당하시기 전에 그런 길로 가지 마세요. 초등학교, 중학교 때 공부를 게을리하다가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왜 성공하지 못했는지 후회하지 마세요. 그동안 뭘 하고 살았습니까? 스무 살에도 열심히 일하지 않고, 서른 살에도 열심히 일하지 않고, 마흔 살에는 돈도 없고 직업도 없이 왜 이렇게 됐는지 후회하며 살았습니다.
절대 죄를 짓지 마세요.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고 반항함으로써 죄를 짓지 마세요. 그 지경에 이르면 하나님께서 자비 없이 죽임을 당하실 뿐입니다. 그러니 그런 길로 가지 마세요, 알겠어요? 상황을 바꿀 힘이 없어 어쩔 줄 몰라 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후회하세요.
힘든 병에 걸리기 전에 당신은 이미 먼 길을 왔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신경 쓰지 말고 하나님의 논리에 집중하세요. 막다른 길에 다다르기 전에, 재빨리 차선을 바꾸고, 재빨리 방향을 돌려 축복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내 백성의 멸망으로 인해 내 눈물이 강물처럼 흐릅니다.
처녀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내 무의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리는도다.(예레미야 3:48-50)
예언자는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악당들은 그를 감옥에 가두고, 온몸을 때리고, 결국 그에게 멸망을 안겨주었습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여전히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울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예레미야를 위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네 입은 비뚤어졌고, 네 눈은 삐뚤어졌구나." 읽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눈물이 강물처럼 흘러내렸습니다. 사실 저도 울보입니다.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감히 너무 심하게 말하지 못합니다. 아무 소용도 없고 오히려 부작용만 생길 테니까요. 하지만 너무 가볍게 말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 이건 어렵습니다. 마치 사람들이 죄의 길로 곤두박질치며 달려가다가 죄를 지은 후 반역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반역 후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겪게 됩니다. 마음은 쓰라림으로 가득 차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선지자의 운명입니다. 그 지경에 이르기도 전에 그는 미친 듯이 외치기 시작합니다. "이 길로 가지 마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멸망하지 마라!"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울부짖으며 간청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풍성한 은혜와 자비로 가득하시니, 우리가 그분께 돌아오면 이 모든 죄를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예레미야를 조롱했습니다.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예레미야 3:14)
저희가 앉든지 서든지 나를 노래하는 것을 주여 보옵소서.(예레미야 3:63)
"예레미야야, 왜 울고 있느냐? 왜 울고 있느냐? 얼마나 한심한가! 이 노래는 예레미야를 위해 쓰인 것이 아니냐? 그런데 예레미야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 중보했다. 우리가 감동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살육은 용납될 수 없다. 이것이 신의 징벌이 아니겠느냐?"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선지자들의 눈물이 헛되지 않도록 합시다. 알겠습니까?
신명기를 언급할 때, 우리는 복과 불운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은 "복과 화를, 삶과 죽음을 너희가 택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하늘과 땅에 부르짖으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증거했습니다. 복과 화를, 삶과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입니다. 당신의 선택은 무엇이었습니까?
축복으로 가는 길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모든 길이 살육의 길인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살육의 길로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아끼지 않으시는 살육을 당하는 길입니다. 몇 번 더 죽는 것도, 몇 번 덜 죽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축복의 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논리에서 벗어나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을 추구하며 하나님 앞에서 축복과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설교를 마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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