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예리니야애가(2)-주님께서는 계획하신 것을 이루셨습니다.
필기를 참고
1.서론
a. 예루살렘은 짓밟히고, 도시는 식량이 고갈되었으며, 사람들은 절박하게 살아남기 위해 식인 풍습을 행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저주를 목격하고 "애가"를 썼습니다.
b. 자연재해는 없었고, 오직 인재만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진노였으며, 하나님은 사람들이 깨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짧기 때문입니다.
c. 세상의 논리에 따라 사는 것은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목적의 성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으로 주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d. 병이 깊을수록 마음은 더 더러워집니다. 그들의 내면의 논리는 흔들릴 필요가 있으며, 주님은 당신의 목적을 이루셨습니다.
e. 세상의 논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의 본보기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2. 성경의 말씀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요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훼파하사 원수로 너를 인하여 즐거워하게 하며 너의 대적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예레미야애가2:17)
3. 기도
경건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께 왜 그런지 묻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은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하나님! 지금 우리에게 경건한 마음을 주셔서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의 논리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게 하소서. 하나님, 우리가 삶을 명확하게 보게 하소서. 우리의 삶의 길이 당신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드러내는 길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갑니다. 당신을 더욱 경외하게 하소서.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교훈을 얻게 하소서. 당신을 경외하게 하소서. 당신의 진노에서 떠나게 하소서. 하나님, 당신의 진노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고, 당신의 분노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고, 경건한 마음으로 당신 앞에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안에 있는 세상적이고 육적인 논리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게 하소서.
우리가 여기 서서 이 세상이 우리 안에 아무것도 없음을 세상에 선포하게 하소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승리를 살아내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당신을 기쁘시게 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말씀이 성취되고, 당신의 축복의 말씀이 우리 형제자매들 안에서 성취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 성경말씀의 배경
a. 유다 왕국은 바벨론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마음을 세상에만 두면 하나님에 의해 멸망될 것입니다.
b. 네가 풍족한 가운데 기쁨과 즐거움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하면 주림과 목마름과 헐벗음과 궁핍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보내신 원수들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c. 하나님은 인간의 도움이 필요 없으십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돕고 있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것입니다.
d. 자연재해와 인재는 모두 세상의 논리 체계에 의해 발생합니다. 세상의 논리 체계는 독선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매우 부패했습니다.
5. 성벽과 요새는 당신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a. 성벽, 요새, 군대, 지도자... 모두 세상의 논리 체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진노를 뒤집습니다.
b. 세상의 정치 체계는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립니다. 세상의 늙은 말이 전투에서 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늙은 말을 물리치려면 자신의 세상 논리를 완전히 해체해야 합니다.
6. 당신의 능력은 당신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a. 발은 인간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이 세상은 능력을 숭배하지만, 능력은 당신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b.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능력을 의지할 수 있지만, 능력을 숭배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습니다. 에서는 이 저주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c.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일단 힘을 숭배하면 저주 아래 살게 되며, 언제 저주가 내릴지 알 수 없습니다.
7. 사원, 모임, 축제, 제사는 당신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a. 성전, 모임, 절기, 제사는 단지 정치적 도구일 뿐이며, 모두 거짓이었습니다.
b. 하나님께서 친히 성전을 파괴하신 것은 성전 자체가 중요하지 않고,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신성한 논리가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c. 하나님은 모임이나 제사를 즐기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그분의 말씀에 주의 깊게 순종하고 그분께 소망을 두기를 원하십니다.
d.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자신 안에 있는 세속적인 논리를 끊임없이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8. 예언적 환상은 당신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a. 선지자들은 종종 인간의 해석에 따라, 특히 권력자들 앞에서 환상을 해석합니다. 이는 모두 터무니없고 무의미합니다.
b. 선지자의 환상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도록 인간의 죄를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보호하는 열쇠입니다.
c. 자신의 죄를 자주 성찰하고, 잘못한 부분을 반성하며, 하나하나 바로잡으십시오.
9. 결론: 주님 앞에서 겸손히 회개하십시오.
a. 우리는 끊임없이 진리의 높이에 올라가 추구해야 합니다. 자만하거나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b. 하나님의 말씀에 부지런히 순종하는 자는 복을 받고, 순종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정하신 것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을 경외해야 합니다!
서론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애가서 공부를 계속합니다. 왜 애가서를 살펴봐야 할까요? 몇 년 동안 이 책을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주일 시간을 내어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구약과 신약 전체를 살펴보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연구해 왔습니다.
이번 시간 동안 우리는 애가서를 공부했습니다. 이번 주에는 2장 "여호와께서 뜻하신 것을 이루셨다"를 공부하겠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루살렘은 적들에게 짓밟혔고, 바빌론의 철제 발굽에 짓밟혔습니다. 바빌론 기병대는 강력하게 1년 4개월 동안 그 도시를 포위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도시는 식량이 부족했습니다.
음식이 끊기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참으로 비극적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아들을 내게 주었는데, 나는 그를 돼지고기처럼 먹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내 아들을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먹었습니다. 정말 비극적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들은 그저 살아남고 싶어 합니다. 누가 살아남고 싶지 않겠습니까? 아프리카 초원의 사냥개와 들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개처럼 되었습니다.
바빌로니아인들이 도시에 들어왔을 때, "맙소사! 내가 도시를 지키라고 했는데, 당신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라고 외쳤습니다. 일본의 난징 침공은 바빌로니아의 예루살렘 침공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전쟁은 참혹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곳에서 "애가" 2장을 썼습니다. 그가 뿌듯해했을까요?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매일 울었습니다. 할 일이 없을 때마다 울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저주가 내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분노를 격노로 바꾸어 예루살렘에 쏟아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여호와께서 선포하신 저주가 성취된 것입니다. 비극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애가"라고 부르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자연재해가 없습니다. 오직 인재(人災)만 있을 뿐입니다. 모든 게 인간이 만든 거잖아요, 그렇죠? 다 인간이 만든 거예요. 자연재해라는 건 없어요. 자연재해는 그저 신의 진노일 뿐이죠. 그렇죠? 그럼 신의 진노는 아직도 존재할까요? 매일매일 그 자리에 있어요. 뉴스를 볼까요? 한번은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영상을 봤어요. 비행기 한 대가 건물에 충돌하는 거예요. 쾅! 그러고 나서 또 한 대가 들어왔어요. 세상에! 비행기에 탄 사람들이 다 죽었고,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도 다 사라졌어요.
그 거대한 비행기가 얼마나 많은 항공유를 싣고 있었을지 상상해 보세요. 쾅! 그러고 나서 순식간에 두 건물이 무너졌어요! 상상해 보세요. 충격적이지 않나요? 저도 비행기에 탔었어요. 만약 제 비행기가 9/11 테러 비행기를 탔다면, 저는 하늘로 사라졌을 거예요. 세상에! 정말 끔찍했어요.
어제 산 주식이 오늘 20%나 올랐으니까 그 사람들은 정말 기뻐했어요. 금융가 건물에는 금융계 사람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다들 괜찮았는데, 어떻게 사라졌을까요? 사람들은 어디 있죠? 뼈는 어디 있죠? 다 사라졌는데,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렇죠? 다 사라졌어요. 하지만 주식은 아직 그대로 있고, 세상에, 이 사람! 쾅! 생각해 보세요. 정말 연약해요.
정말 비극적이지 않나요? 끔찍해요. 그런데 왜 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누가 조종했을까요? 테러리스트들이죠. 누가 테러리스트들을 조종했을까요? 정말 신이 조종했어요. 신이 조종했어요. 신이 조종했어요. 신의 진노가 사람들에게 임하면 자연재해인 줄 알지만, 사실은 인재예요.
그러다가 쓰나미가 왔어요. 동남아시아 쓰나미였죠. 세상에, 제 비행기에서도 또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왜 항상 비행기를 타세요? 몇 번 비행하다가 우연히 그 쓰나미를 만났을 뿐이에요. 공항에서 쓰나미를 보니, 세상에, 모든 게 성냥갑처럼 보였어요. 건물들, 산업 빌딩들은 거대했지만, 카메라 아래서 보니 쓰나미 앞에선 성냥갑처럼 보였습니다. 세상에, 그 차가 쿵쿵거리고 있었습니다. 누가 이 일을 지휘했을까요? 신이 지휘했죠, 그렇죠? 신이 지휘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의 행동을 설명하려고 하는지 아십니까? 사실, 우리 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늘 그렇죠. 단지 사람들이 안쪽 문을 볼 수 없을 뿐입니다. 왜냐고요? 신은 사람들이 깨어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쾅, 당신은 죽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쓰나미, 동남아시아 쓰나미, 그리고 일본 쓰나미. 세상에. 상상이 되시나요? 해변에서 신나게 놀고, 신나게 놀고, 신나게 놀다가, 사람들이 사라지고, 사라지는 거죠. 살아있는 사람들이 살덩어리로 변하는 거죠. 탕산 지진이나 원촨 지진 같은 일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신 일이라고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행적을 설명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자연재해와 인재가 있는 것일까요? 이는 태고부터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선하다고 하면서 왜 죽었을까요? 그가 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당신이 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 당신이 선하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쭤보세요.
예레미야와 에스겔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우리 인간은 종종 "왜?"라고 묻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세상의 논리에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논리에 따라 살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마음에 더 큰 경외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매일 누군가 불치병 진단을 받고, 매일 누군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렇지 않나요? 하나님의 뜻인데 사람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하죠, 그렇죠? 아주 혼란스러워요. 아, 왜 이제 내 차례인가? 음. 네 차례인데 왜 놀라는 거지? 그렇지? 놀라지 마. 나중에 사역을 하면서 저는 점점 이런 패턴을 갖게 됐어요. 병이 심각할수록 마음이 더 더러워진다는 거죠. 천천히 생각해 봐야 해요.
그저께 밤, 한 자매님이 장폐색으로 몸이 좋지 않았어요. 저희 담임 목사님이 그 자매님을 돌보고 계셨죠. 이게 제가 한 말의 성취가 아닐까요? 언제 먹고, 똥 싸고, 소변 볼지 아무도 결정할 수 없다고요. 그런데 담임 목사님이 그 자매님을 돌보고 계셨어요. 아, 그 자매님을 보고 안쓰러워서 기도를 인도했어요. 제 사역은 온전히 이해에 기반한 기도였어요.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21년 만에 난소암에 걸렸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된 일인지 남편과 다툰 후였다고 하더군요. 여성의 생식 기관은 질병에 걸렸습니다. 이 가족 상황과 확실히 연관이 있죠. 나중에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집에서 화가 난 건가요?"라고 물었는데,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왜냐고요? 남편은 밖에서 재밌게 놀고 있었고, 그녀는 집에서 화가 나 있었던 거죠. 저는 둘 사이의 연관성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남편은 시어머니에게서 태어났고, 어머니는 당신을 낳았습니다. 남편과 당신은 어떤 관계인가요?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집에서 화가 나고, 너무 화가 나서 난소암에 걸린 건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이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아이들, 부모님 때문에 이 가정을 유지하는 게 아닌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당신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러다 암에 걸렸어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어서 암에 걸렸다는 거죠?"라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그렇게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암에 걸렸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친절하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그러다 장폐색이 생겨 위를 절개하고 장의 다른 부분을 제거했습니다. "맙소사!"라고 외치게 되죠. 그런데 3, 4년 후, 또 장폐색이 재발했습니다. 이 자매는 엄마, 아빠, 직장 동료 등 모든 사람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선악을 아는 지식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고칠 수 있었을까요?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한 입 베어 물었습니다. 그녀는 하루 종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바구니 가득 따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루어질 수 없다고요? 그렇지 않나요? 정말 비극적입니다. 저는 중증 환자를 여러 명 돌보았는데, 모두 중증 환자였습니다. 몇 년 전, 제가 돌보던 자매님이 장례를 치렀는데, 마침 제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장례가 치러진 유골함에 남편은 밖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자매님은 집에서 뚱한 표정을 짓고 계셨는데, 그로 인해 위암이 발병했습니다.
위암이 낫기를 기도한 후, 남편은 다시 즐거운 시간을 보내러 나갔고, 그녀는 집에서 다시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암이 재발했어요. 정말 놀랐어요. 무슨 일이지?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았고,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을 낳았어요. 그들은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는 당신 자식이 아니고, 당신은 그의 자식이 아니에요. 그렇지 않나요? 왜 뚱한 표정을 짓는 거죠? 그렇지 않나요?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가족은 그녀에게 땅을 사줬어요. 그녀는 한동안 화장터에 묻혔고, 마침 제가 그곳에 있었고,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들은 이 일에 꽤 집착하는 것 같아요. "나는 산 사람이 두렵지 않아. 죽은 사람이 두려울 뿐이야." 장례식은 기독교식이었어요. 장례식에서 주례사의 낭송은 너무나 아름답고 감미로웠고,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팠어요.
우리가 마음으로 이 사실을 깨닫고, "애가"를 더 자주 부르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면, 종양도 줄어들고, 위암도 줄어들고, 고통도 줄어들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너무 무겁지 않나요? 정말 무겁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뜻, 여호와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뿌리째 흔들려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안에는 흔들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참석할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습니다. 예전에 신경 쓰던 것들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놓을 수 없었던 것들을 놓아버립니다.
예전에 교회가 있었을 때, 저는 거의 관을 무대에 올려놓을 뻔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돈 때문에, 이것저것 때문에 살지만,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비극적이었습니다. 바빌론의 철발이 예루살렘을 무너뜨렸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모든 것이 깨끗해졌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신경 쓰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금에 대해서요? 하나님은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셨습니다. 전혀 아닙니다. 성전을 파괴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너무나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십니까? 여기저기서 불편함을 느끼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신호를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많은 신호를 보내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버릴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설령 버릴 수 없더라도,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에 약간의 "양념"을 더하시고, 그분의 진노를 더하실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시대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이상하네. 먹지 말라고 했는데. 보기만 하고 어떻게 먹을 수 있겠어?" 이브는 그 나무를 좌우로 훑어보았다. 꽤 좋았어. 그러고 나서 냄새를 맡았다. 와, 향기가 났다. 와, 대홍포차보다 더 향긋했다. 보기에도 좋았어. 뱀이 '먹으면 지혜가 생겨 선악을 분별할 수 있을 거야'라고 했잖아. 정말 좋았어, 정말 좋았어.
먹으면 죽는다는 걸 잊고 있었어. 보기에도 좋고, 냄새도 좋고, 맛도 달콤했지. 하지만 먹고 나면 죽는다는 걸. 이브는 그것을 먹었다. 다 먹고 나자 아담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봐, 어떻게 숨을 쉴 수 있지? 신이 한 말은 말도 안 돼. 먹고 죽는다는 게 무슨 뜻이야? 입에서 거품을 물고 있는 건 못 봤지? 눈을 굴리는 것도 못 봤어. 다 먹고 난 후 입에서 꽤 좋은 냄새가 나는 걸 봤어. 정말 좋았어.
하와가 아담에게 그 열매를 주었습니다. 아담은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 헛소리를 하시는구나! 헛소리를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지 우리의 상상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헛소리일까요?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헛소리를 하시는 줄로 생각하지만, 아담이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고, 그렇게 사과가 생겨났습니다. 누가 그 한 입 베어 물었을까요? 아담이 베어 물었습니다. 아담이 한 입 베어 물었습니다. 애플(Apple Inc.)이 설립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 한 입 베어 물고 1조 달러 규모의 회사가 탄생했습니다.
아담이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900년 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을까요? 네, 이루어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셨습니다. 900년은 긴 시간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900년이 하루와 같습니다. 저는 왜 1900년이 아니라 900년인지 궁금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바로 그날 죽었습니다. 아,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받아들여지지 않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느니라." 가인은 문을 열고 바라보았습니다. "내 문 앞에 죄가 어디 있느냐?" 그는 보지 못했습니다. 정말 보지 못했죠, 그렇죠? 말도 안 돼요, 말도 안 돼요. 묻겠습니다. 하나님이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농담이 아닙니다. 결과는 이랬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어떻게 너를 편하게 해 줄 수 있겠느냐?" 그렇죠? 나는 너를 죽게 내버려 두겠지만, 너는 그럴 수 없다. 나는 너를 고통스럽게 내버려 둘 것이고, 너는 정신 질환을 앓으며 살 것이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무엇일까요? 정신 질환이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마치 가인이 집에 앉아 머리가 윙윙거리고 온몸이 떨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머리가 윙윙거리는 것, 아, 극심한 고통입니다. 훗날 이 병은 라멕에게 옮겨져 매일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 점을 이해해 주십시오. 카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인생은 고통입니다. 사는 의미가 뭐죠? 요즘 많은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오르고, 오르고, 또 오르려고 애쓰다가 정신병에 걸리게 되었죠. 그렇죠? 바벨탑은 정신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벨을 죽인 후에 어떻게 하나님이 당신을 살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형을 선고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것은 사형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결과 온 세상이 정신병에 걸렸습니다. 노아 시대에는 모두가 정신병자였고, 모두가 라멕이었고, 모두가 폭력으로 가득했습니다. 아, 홍수가 닥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을까요? 그렇습니다.
목사님, 이 말씀을 좀 더 긍정적인 방식으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선생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실 때마다 저는 두렵습니다. 맞습니다. 여러분을 두렵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카인과 라멕과 같지 않겠습니까? 말씀드리건대,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후에 아브라함이라는 지혜로운 사람이 마침내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부터 예레미야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고,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셨습니다. 이는 아담, 하와, 노아 시대와 비슷합니다.
후에 예레미야 통치 시대에 모세가 신명기에 기록한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모세는 신명기에 무엇을 기록했습니까?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열국 가운데 흩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되는 것이 축복인지 아닌지는 참으로 의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 이삭과 야곱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되었지만, 결국 열국 가운데 흩어졌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은 다 이루어지리니 하나도 빠짐이 없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지금까지 이런 일을 초래했습니까? 무엇이 이스라엘을 저주의 전형으로 만들었을까요? 무엇이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의 전형으로 만들었을까요? 바로 세상의 논리입니다. 이 세상의 논리는 너무나 강력합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세상의 논리에 휘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런 노력 없이 태어나,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며, 육적이고 세속적인 존재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애가를 쓸 무렵, 이스라엘 백성은 당황했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만약 당신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신이 이해하든 못하든,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누가 당신을 혼란스럽게 했을까요? 이해하지 못하고 어려움에 처한다면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누가 당신을 아담과 하와의 길로 인도했을까요? 누가 당신을 카인과 라멕의 길로 인도했을까요? 그렇죠? 누가 당신을 이 세상의 논리에 그토록 완고하게 매달리게 했을까요? 누가 당신을 그토록 진지하게 살게 했을까요? 누가 당신을 삶을 그토록 진지하게 대하게 했을까요? 그렇지 않나요?
하나님은 두 가지 길을 정하셨습니다. 주의 깊게 순종하고 행하는 자는 복을 받고, 불순종하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나 주의 깊게 순종하고 행하느냐 마느냐는 자신의 내면의 논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믿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믿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완벽하게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어디에서 죽었습니까? 그들은 그들만의 세상적인 논리 때문에 죽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에 나오는 예레미야 시대가 큰 저주의 시대였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류 역사에서 일본이 대만을 점령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지금은 잊혔습니다. 몽골이 중국을 점령하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일본이 난징을 점령하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바빌로니아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하나님, 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십니까?
언젠가 제 반 친구가 제게 질문을 했습니다. "물어보세요!"라고 물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자 지구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도록 허락하셨을까요? 제가 혼란스럽다고 생각하시나요? 열 살, 스무 살, 쉰 살, 백 살에 죽었든, 어떤 죽음이든 괜찮습니다. 살해당했든, 의사에게 죽었든, 스스로 죽었든, 쓰나미에 죽었든, 지진에 죽었든, 다 똑같습니다. 왜냐고요? 저는 이런 일들에 대해 저만의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너무나 열심히 살다가 결국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는 노력 때문에 악명을 떨칩니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세대의 유대인들은 애국심이 강했잖아요? 그들은 성전을 지키고 정복당한 나라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게 잘못된 일이 아니었나요? 하나님, 저는 당신의 성전을 지키러 왔습니다. 누구도 성전의 물건을 가져가는 것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이 일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아닙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관심 있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는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우리가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는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전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성전의 금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아니요. 그분은 결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사람이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지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경외심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지키든 지키지 않든, 여호와께서는 반드시 자신이 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분의 뜻은 결코 무효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길로 가겠다"라고 한다면, 저 길로 가라. 그러면 틀림없이 여호와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호와께서 축복보다 재앙을 더 많이 가져오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거듭거듭 살펴보면 그 비율이 너무 작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전을 파괴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절기와 제사를 파괴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파괴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가를 읽고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요? 그 결론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애가를 써서 "하나님, 내 눈은 눈물 근원 같고 내 마음은 물같이 주께 쏟나이다"라고 말할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참으로 비극적입니다. 너무나 비극적이지 않습니까? 아니,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예레미야는 수십 년 동안 날마다 예루살렘에서 부르짖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를 미워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를 미워한 자들은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애국 장군들이었습니다.
성경의 말씀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요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훼파하사 원수로 너를 인하여 즐거워하게 하며 너의 대적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예레미야애가2:17)
기도
경건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께 왜 그런지 묻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은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하나님! 지금 우리에게 경건한 마음을 주셔서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의 논리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게 하소서. 하나님, 우리가 삶을 명확하게 보게 하소서. 우리의 삶의 길이 당신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드러내는 길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갑니다. 당신을 더욱 경외하게 하소서.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교훈을 얻게 하소서. 당신을 경외하게 하소서. 당신의 진노에서 떠나게 하소서. 하나님, 당신의 진노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고, 당신의 분노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고, 경건한 마음으로 당신 앞에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안에 있는 세상적이고 육적인 논리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게 하소서.
우리가 여기 서서 이 세상이 우리 안에 아무것도 없음을 세상에 선포하게 하소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승리를 살아내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당신을 기쁘시게 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말씀이 성취되고, 당신의 축복의 말씀이 우리 형제자매들 안에서 성취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경말씀의 배경
이 구절의 이야기와 배경, 즉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해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구절의 배경은 무엇일까요? 매우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바빌로니아는 유다 왕국을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다 왕국을 정복하여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에 머물며 매일 자신의 가르침을 전파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서입니다.
언젠가 예레미야서를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후, 유다 백성을 위해 시드기야라는 왕이 임명되었고, 그는 유다를 통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왕이라기보다는 총독에 가까웠습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매우 관대한 태도를 보였으며, 유다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군사적 주둔을 유지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끊임없이 "유다는 나라를 회복하고 싶어 하고, 나는 독립을 원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분노라고 합니다. 시드기야는 여러 날 동안 군사령관들과 상의하다가 어느 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반역을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놀랍지 않습니까? 시드기야는 하나님을 알았을까요?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국가 정책에 대해 예레미야와 자주 상의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시드기야는 반역을 시작했습니다. 바빌론 왕은 강력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군대를 보내 예루살렘을 위에서 아래까지 포위했습니다. 약 1년 반 후, 그 도시는 함락되었습니다. 얼마나 끔찍한 광경이었습니까!
예레미야는 그 도시에 있었지만, 바빌론 왕은 예레미야를 알고 있었고, 그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그와 바빌론 왕이 동맹을 맺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당신, 바빌론 왕과 동맹을 맺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강력한 것은 당신, 바빌론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내 유다 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상의 논리에 깊이 빠져 있는 이 무리를 멸망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속적인 사람을 멸망시키는 것은 간단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주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 하나님께서 당신을 공격한 원수를 섬기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 아닙니까? 바로 그것이 배경 설명입니다.
결국 바빌론 왕은 시드기야의 눈을 뽑아 바빌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내가 너에게 반역하라고 했잖아!" 반역하려는 자들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백성들이 반역하는 것을 막고 싶었고, 항상 반역의 유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대 민족의 회복은 당시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인간 내면의 세속적인 논리가 너무 강해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입니다. 제게는 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누구든 불쾌하게 하는 것은 괜찮지만, 하나님은 불쾌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누구든 기분 나쁘게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다에서는 시드기야 왕부터 그의 군사령관들까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 걸까요? 그들은 혼란스러워했습니다. "저는 아직 우리 성전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우리를 도와주실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마음은 하나님께 있지 않고 오직 이 세상에만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자신도 모르게 이 사람들을 멸망시키셨습니다.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예레미야에게 "바빌론으로 갈 것입니까, 아니면 여기에 남을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매우 흥미로운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여기에 남겠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빌론 왕에게 반역한 자들은 예레미야를 데리고 애굽의 다바네스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끊임없이 전했지만, 그들은 자기들만의 생각이 있어서 듣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시드기야 이후, 그달리야라는 사람이 유다 총독으로 임명되었지만, 그 역시 시온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마치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돕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신경 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 백성에게 이것이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와 애가를 읽고 나니, 저는 하나의 논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설교자이고 제가 애가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된다면, 반드시 잘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도움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끊임없이 하나님을 도우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아주 조심하십시오.
예레미야가 쓴 이 애가는 참으로 비극적입니다. 문제가 무엇일까요? 문제는 사람들이 세상적인 논리에 사로잡혀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 채 죽습니다. 그러니 말씀드리자면, 사람들이 가장 비열한 것은 세속적인 논리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애국심을 포함한 이 세속적인 논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독선적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당신은 어느 나라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저는 중러 국경에 있는 헤이샤쯔 섬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국경 너머의 땅은 원래 중국에 속했습니다. 러시아 측은 동상을 세우고 자국의 영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그 동상을 보고 그를 침략자로 규정했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웅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살인자입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세속적인 논리입니다.
우리 중국인들은 "한 장군의 성공은 수천 명의 희생의 결과다"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우리의 세속적인 논리가 상당히 부패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자연재해와 인재가 발생하는 이유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세속적인 논리 때문에 발생합니다. 후에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들조차도 이 복음을 모른다고 썼습니다. 참으로 강력한 말씀이 아닙니까? 아주 강력합니다.
자, 이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이 이 구절의 배경입니다. 예레미야는 애가를 썼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빌론의 철 발굽이 예루살렘을 짓밟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얼마나 진노하셨는지요! 그분은 시온을 캄캄한 구름으로 덮으셨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영광을 하늘에서 땅으로 던지셨고, 그분의 진노의 날에 그분의 발판이신 것을 기억하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를 삼키시고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분노하셔서 유다의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셔서 땅에 쓰러뜨리셨습니다. 그분은 그 땅과 그 지도자들을 굴욕시키셨습니다.
성벽과 요새가 너희를 보호하지 못할 것이다.
이 사람을 아시죠? 그는 정말 성벽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성벽이 그를 보호할 수 있을까요? 성벽은 그를 보호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왜 성벽을 쌓았을까요? 느헤미야는 사람들의 마음을 세우기 위해 성벽을 쌓았습니다. 성벽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람들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천천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하나님은 유다 백성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시고 그들을 땅에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는 나라와 지도자들을 굴욕시켰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런 것들은 세상의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군사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왕, 유다 왕은 모든 희망을 성벽에 걸었습니다. 성벽이 너무 튼튼했기에 그들은 바벨론 군대에 맞서 1년 4개월 동안 버텼습니다.
그 1년 4개월은 매우 인상적이었지만, 결국 성벽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어떻게 성벽을 무너뜨렸을까요?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유다 백성의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리셨기 때문입니다. 성벽은 쓸모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 그리고 성벽 안에 있는 자들의 눈에는 이 성벽이 어떻게 쓸모없을 수 있겠습니까? 굉장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1년 넘게 바벨론에 맞서 싸웠습니다. 이 성벽이 없었다면 성벽은 오래전에 무너졌을 것입니다.
이 시기에 예레미야는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항복을 촉구하며 "목숨을 내놓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안 됩니다." 그는 항복하고 싶었지만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의 군사 지도자들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유도 비슷했습니다. 일본 황제는 항복하고 싶어 했지만, 대신들과 총리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항복 조서는 비밀리에 내려져야 했습니다.
시드기야는 이 정치 체제, 이 세상의 정치 체제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세상의 논리 체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특히 정치인들에게는 정말 어렵습니다. 윗자리에 있든 아랫자리에 있든, 정말 어렵습니다. 사람들을 너무나 단단히, 너무나 단단히 묶어서 벗어날 수 없는 세속적인 정치 시스템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 시스템에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정말 희망이 없지 않습니까? 아, 그 사람 말입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싶지만, 여전히 이 세속적인 논리에 갇혀 있습니다. 너무 어렵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늙은 말 자체가 거의 패배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왜 그럴까요? 늙은 말,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자들은 자신 안에 있는 세속적인 것들을 완전히 파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힘은 당신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힘은 당신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주꼐서 야곱의 모든 거처를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음이여 노하사 처녀 유다의 견고한 성을 헐어 땅에 옆으시고 나라와 방백으로 욕되게 하셨도다.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오른손을 거두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사름 같이 야곱을 사르셨도다.(예레미야 2:3)
이 뿔은 인간의 힘을 상징합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권력을 숭배합니다. 권력을 숭배하지 않는다고요? 보세요, 그들은 정말 유능하죠, 그렇죠? 정말 놀랍습니다. 우리가 권력에 대해 이야기하면, 가장 부유한 사람의 얼굴에는 부러움이 가득하지 않나요? 그리고 그들이 말을 시작하면 "1억은 작은 목표일 뿐이야."라고 말합니다.
1억은 우리에게는 천문학적인 숫자지만, 그들에게는 그저 작은 목표일 뿐입니다. 이제 그들은 그 작은 목표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상이 권력을 중시하지만, 권력이 사람을 보호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다에는 매우 유능하고 무술에 능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그런 것들에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든지, 자신의 힘을 의지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권력에 의지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강력한지 상상해 보세요. 에서는 야곱보다 더 강했지만, 에서는 이런 세속적인 논리를 따랐고, 그의 온 민족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에서는 멧돼지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었습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그는 사냥꾼이었고, 그의 두 다리는 매우 강력했습니다. 하지만 권력을 중시하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이것이 우리 내면에 있는 것일까요? 이 생각은 매우 타당하게 들립니다. 사실 세상에는 재능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와, 그들의 인공지능과 자율주행 기술은 정말 놀랍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 인상적이지만, 동시에 능력에 대한 숭배를 반영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재능이 있더라도 인간의 능력을 숭배하기 시작하면 저주 아래 사는 것입니다.
이 저주가 언제 이루어질지는 우리는 모릅니다. 정말 모릅니다. 이 세상을 보십시오. 바람과 물과 같이 끊임없이 변합니다. 30년 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절기 동안 성전을 지킬 수 없습니다.
송막을 동산의 초막같이 헐어 버리시며 공희 처소를 훼파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 가운데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여호와꼐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장을 원수의 손에 붙이셨으매 저희가 여호와의 전에서 훤화하기를 절기 날과 같이 하셨도다.여호와꼐서 처녀 시온의 성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훼파함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과 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저희가 함께 쇠하였도다.(애가 2:6-8)
오, 이것은 비극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전에도 모임은 평소처럼 계속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기도가 드려지고, 집회가 열리고, 안식일이 지켜지고, 제사장들은 여전히 그곳에서 봉사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은 이 모든 것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 제단, 그 성소, 그 궁전은 모두 하나님께 멸시받았습니다. 왜냐고요? 사람들이 세속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 모임과 절기 제사 같은 것들은 정치적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것들은 예루살렘의 정치적 도구였습니다.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려면 그 규칙을 따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규칙들은 그들의 정치에 봉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정치적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은 가짜입니다. 기억하세요, 일단 정치와 연관되면 약간의 위험이 따릅니다. 말할 수 있지만 할 수 없는 것들이 많고, 할 수 있지만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 아닙니까? 예루살렘에서도 그랬고, 예루살렘에서도 그랬습니다. 비극적이었고, 결국 하나님께서 직접 성전을 파괴하셨습니다.
몇 년 전, 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전을 파괴하셨다는 설교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전을 파괴하신다고요? 왜냐고요? 성전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속임수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속 논리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세속적인 논리와 신과 같은 겉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 안의 정치적 갈등은 정말 치명적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자신의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그가 교회를 설립한 후, 교회 안의 정치적 갈등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정치적 갈등은 끊이지 않았고, 모두 세속적인 것들에 의해 조종당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교회 안의 이러한 정치적 갈등을 용과 호랑이의 싸움에 비유했습니다. 당신이 이 교회의 설립자 아닙니까? 세속적인 논리로 이 교회를 세운다면, 무너뜨리지 않으면 누가 망하겠습니까?
그분은 나중에 코로나19에 걸렸다가 금방 회복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부러웠습니다. 저도 코로나19에 걸렸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며칠 후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아,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사실 코로나19를 통해 저도 세속적인 논리 체계를 많이 무너뜨렸습니다. 무너뜨려라! 그렇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임이나 제사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그분의 말씀을 주의 깊게 지키고 순종하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이제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십시오. 그분은 우리가 이 세대에 번영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여기 애가서가 있습니다. 이 책을 자주 읽으면 우리의 영혼이 깨어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의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안에는 끊임없이 우리가 옳지 않다고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세상적인 논리 체계가 어떤 큰 것들은 해결하고, 어떤 것들은 작은 것들은 해결하고, 그 작은 것들은 작은 것들은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적인 논리는 매우 가증스럽습니다. 완전히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해결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예언적인 환상은 간직될 수 없습니다.
예언적인 환상은 간직될 수 없습니다. 14절은 "네 선지자가 거짓되고 어리석은 환상을 보았으나 네 죄를 드러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예언적 환상이 자신의 죄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사실상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언적 환상은 간직될 수 없습니다. 왜냐고요? 선지자는 체제 안에서 환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왕이 보고 싶어 하는 환상은 무엇이든 선지자는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이해하셨나요?
한번은 제가 한 형제님을 데리고 매우 비참한 상태에 있는 어떤 사람을 돌보러 갔습니다. 사실 제 형제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아, 예수님이 당신 뒤에 서 계신 게 보여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보며 "맙소사, 왜 예수님이 저 사람 뒤에 서 계신 게 안 보여요? 왜 악령이 저 사람 뒤에 서 있는 걸까요?"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젊은이는 눈을 굴리며 그를 노려보았습니다. 물론 그 형제님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환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만둬! 만약 예수님이 저 사람 뒤에 서 계신다면,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 그는 너무나 비참한 상태에 살고 있잖아.' 그러다가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특히 권력자들 앞에서는 인간의 해석에 따라 환상을 해석하는 걸 좋아합니다.
우리는 이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 결과 모든 선지자는 정부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정부의 선지자들의 환상조차도 쓸모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정부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어땠을까요? 예레미야는 놀라운 사람이었습니다. 저를 감옥에 가두고 진흙탕에 처넣어도 저는 여전히 주님의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선지자와 그의 환상은 모두 헛소리입니다.
그러니 형제자매 여러분, 이런 것들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예언적인 환상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폭로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만약 능력이 있다면, 죄를 폭로하고 물처럼 맑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을 보호하는 열쇠입니다. 어떤 예언적인 환상이냐고요? 예수님께서 당신 뒤에 서 계셨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당신 옆에 서 계신 것을 봅니다. 그리고 저는 "잊어버리세요"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의 죄 중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됩니까? 우리는 자신의 능력, 부, 성벽, 말, 무기, 종교 의식에 얼마나 의존합니까? 이 모든 것은 쓸모없습니다. 완전히 쓸모없습니다. 세상의 논리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환상을 보여주셨다고 감히 주장한다면, 선지자가 본 것은 인간의 죄를 드러낸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묻습니다. "목사님, 왜 코로나에 걸리셨습니까? 저는 죄인입니다.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습니까? 저는 죄인입니다. 회개해야 하지 않습니까? 저는 진리의 화신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창시한 이 중국식 예정론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진리의 화신이 아닙니다. 단지 성경의 말씀을 가져다가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겸손과 회개에 있어서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비전신학론을 전하고 싶다면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아, 이건 아직 옳지 않아, 오, 저건 아직 옳지 않아. 하나하나 바로잡아." "이건 옳고, 저건 옳아."라고만 말하지 마십시오.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우리 안에 있는 죄,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세상적인 것들을 붙잡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벽, 무기, 권력, 종교적 관습, 거짓 환상에 의지하면 우리는 자신의 죄를 볼 수 없습니다. 만약 볼 수 있다면 "애가"를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애가"는 우리가 자신의 문제를 보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회개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결론: 주님 앞에서 겸손히 회개하십시오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처녀 시온의 성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눔동자로 쉬게 하지 말지어다.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 찌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쏟듯 할지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애가2:18-19)
이것은 제가 모든 사람에게 드리는 최고의 조언이자, 저 자신의 조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감히 진리를 소유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단지 진리의 산꼭대기에 오르고 있을 뿐입니다. 절대 안주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반드시 재앙을 맞이할 것입니다.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반드시 재앙을 맞이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애가를 부르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진리를 지키는 자는 복을 받지만, 진리를 지키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 세대가 큰 저주의 시대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전을 파괴하고 계신 걸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교회를 파괴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진리를 가졌다고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엄숙한 약속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진리를 부지런히 추구해야 합니다.
바로 이때 우리는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만약 우리가 유다 백성처럼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 안에 있는 세상적인 것들을 제거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 안에 아무것도 없게 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먼지로 전락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비와 기억하심을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때, 십일조나 구제를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구제를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의지해야 한다면,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거듭거듭 경고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될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성벽이 무너질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성전이 허물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지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제물이나 소나 양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필연적으로 그분의 경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우리가 그분의 경고를 듣는 순간 하나님의 진노가 터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고 반복해서 일깨워 줍니다. 그렇게 하면 너무 늦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이 70년간의 포로 생활 끝에 돌아오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 70년 동안 모든 사람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命定神学 华人社区